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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4. 23 주일 낮 예배
시편 119편 67, 71절(507장)
(67)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지난 주일에 ‘부활주일’을 맞이하여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라”는 제목으로 로마서 6장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구원이 과거/현재/미래의 3시제를 가지는 것처럼 부활 역시 과거/현재/미래의 부활이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세례를 받음으로 죽었던 영혼이 부활한 ‘과거의 부활’이나,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죽었던 우리의 육체가 다시 살아날 ‘미래의 부활’보다는, 지금 여기에서는 죄 된 육신을 날마다 죽이고 날마다 다시 사는 ‘현재적인 부활’, 죄에게 승리하는 삶이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부분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런데 죄와 싸워서 승리하는 것은 간단하게 한두 번 다루고 넘어갈 내용이 아닙니다. 그래서 다음번 ‘소망의 인내’ 달인 8월에 집중적으로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다만, 오늘은 죄와의 싸움에서의 승리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 내용만 다루려 합니다. 저는 본문을 선택하고 본문의 구절들과 낱말들을 자세히 풀어가는 ‘주해 설교’를 즐겨 하는 편이지만, 오늘은 ‘주제 설교’를 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의 필연성’과 ‘고난이 주는 유익’을 다루기 위해서는 한 본문만이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여러 구절들을 함께 다루는 것이 더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1. 고난의 필연성
첫 번째로 살펴보려는 것은 ‘고난의 필연성’입니다. 저는 첫째 주의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라는 설교에서 어떻게 우리가 ‘고난’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었는지, 원죄와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저주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우리 인생이 경험하는 ‘고난’이란 ‘범죄’에 대한 ‘형벌과 저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서는(롬 8:28) 범죄에 대한 형벌인 ‘고난’까지도 선을 이루는 방편으로 바꾸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예를 여러 번 찾을 수 있는데, 범죄의 결과 잉태와 해산의 고통을 형벌로 받은 여자가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디모데전서 2장 15절 말씀이나,1) 세겜 사람들을 학살한 죄(참 34:25)에 대한 형벌/저주(창 49:5-7)로 이스라엘 여러 지파 가운데 흩어져야 했던 레위 지파가, 금송아지 사건 때의 헌신으로 인한 축복(출 32:26, 29)으로 이스라엘 가운데 흩어지기는 하지만 거기서 영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는 것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동일한 방식으로 인간의 범죄로 인한 형벌로 주어진 고난이 오히려 인간 구원의 완성을 위한 도구가 되었습니다. 이제 고난의 필연성을 가르치는 다섯 개의 성경 구절을 순서대로 살펴보겠습니다.
① 첫째는 로마서 8장 17절 말씀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 자녀가 되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후사/후계자가 된 것을 의미하며,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게 되었으며 그리스도가 받을 영광을 우리도 받게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영어권 사람들은 이 구절에서 “No Cross, No Crown!”이라는 말을 만들어냈습니다. 영광의 면류관을 얻기 위해서는 십자가라는 고난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면류관도 없다는 것입니다. 고난이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아니! 어느 시대이든지! 사람들은 고난 없이 영광만 얻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의 원칙은 분명합니다. 영광을 얻고자 한다면 먼저 고난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고난을 거치는 것은 영광에 도달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② 둘째로 빌립보서 1장 29절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바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렇게 하신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요?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사람들 가운데 ‘은혜’ 받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는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면 적어도 두 가지를 해야 합니다 하나는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을 위한 은혜요, 고난을 위한 은혜라는 이야기입니다. 은혜는 구하지만 고난은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입니다! 통상적으로 말해서 우리는 고난 받지 않기 위해서 은혜를 구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고난 받으라고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에게 고난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③ 세 번째 구절은 디모데후서 1장 8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복음 때문에 옥에 갇힌 바울이 제자요 영적 아들인 디모데를 향해 쓴 최후의 편지에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복음(우리 주의 증거)과 복음 전도자(바울), 혹은 복음을 전하다 투옥된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고난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고난을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받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그렇게 하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필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 자신의 힘으로는 그 고난을 견딜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고난을 받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혼자 힘으로 어떻게든 해보라고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힘과 능력으로 고난을 받고 견뎌야 하는 것입니다.
④ 그 다음은 베드로전서 2장 21절입니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부르심을 입었는지 근본적인 부분을 지적하여 이야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고난을 받으심으로 본을 보이셨고, 우리가 그 본과 자취를 따라 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본과 자취를 따라 가도록, 그것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고난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르심을 입었다면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고난을 받도록, 그 일을 위해서 부르심을 입은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물론 앞에서도 살펴보았고, 뒤에서도 살펴보겠지만 고난이 전부는 아닙니다. 고난은 단지 ‘과정’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고난을 피해갈 방법은 없습니다. 반드시 그 고난이라는 과정을 거쳐야만 그 다음 이야기, 그 다음에 약속된 영광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⑤ 고난의 필연성에 대한 마지막 구절은 베드로전서 5장 9절입니다.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여기서 우리는 고난의 또 다른 측면/모습을 발견합니다. 그것은 우리의 고난이 누군가 다른 존재, 즉 사탄에 의해서 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견디고 이기는 방법 가운데는 믿음을 굳게 하여 고난의 근원이 되는 사탄을 대적하는 것이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고난 가운데 있다면 믿음을 굳게 해야 합니다. 고난 상황에서 믿음을 굳게 하는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이 보일지라도, 그것이 실제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믿음과는 전혀 무관해 보이는 고난도 믿음을 굳게 하여 대적함으로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우리가 당하는 고난은 우리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있는 우리의 형제들, 즉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동일하게 고난을 당한다고 하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나만 힘들고, 나만 괴롭고... 다른 사람들은 멀쩡한데 나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낙심하고 좌절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공동 운명체입니다. 모두가 고난 가운데 있습니다. 위로로 삼으시고 믿음을 더욱 굳게 하셔서 그 고난을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2. 고난이 주는 유익
둘째로 살펴볼 것은 ‘고난이 주는 유익’에 대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오늘 본문인 두 구절과 다른 구절들을 비슷한 내용들끼리 묶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① 첫째로 본문 67절입니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고난을 전후로 하는 자신의 태도를 비교해서 말하는데, 고난 이전에 그는 그릇 행했다고 말합니다. ‘그릇 행했다’(솨가그, gg"v;)는 것은 ‘정도를 벗어났다, 죄를 범했다, 속였다, 실수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정한 것을 벗어나서, 하나님과 사람을 속여가면서 범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난을 당한 후에는 주의 말씀을 지킨다고 합니다. ‘지킨다’(솨마르, rm'v;)는 것은 ‘울타리 치다, 지키다, 보호하다, 시중들다, 준수하다’라는 뜻입니다. 고난 이전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파괴하는 일에 앞장섰지만, 고난 후에는 그 말씀을 보호하고 지키는 일에 앞장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71절입니다.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이 그를 정복하고 굴복시켜서 괴롭히고 압제하며 낮추어 낙심하고 겸손하게 만드는 것은 결코 유쾌한 경험일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시편 기자는 그 고난이 자신에게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유익’(토브, b/f)이라는 말은 ‘선한, 상냥한, 기분 좋은, 이익, 복지’라는 뜻입니다. 고난은 그에게 이익을 가져다주는 좋은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가 얻은 유익이 무엇입니까?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된 것인데, ‘율례’(호크, qjo)란 ‘법령, 포고령, 제한, 규정된 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포고하시어 제한하시고 규정하신 법령을 가리킵니다. 시편 기자는 고난을 통해서 그 율례를 배우게 된 것입니다. ‘배운다’고 번역된 단어(라마드, dm'l;)는 흥미로운데, 그것은 ‘배우다, 가르치다, 훈련시키다’라는 뜻이고 원래의 의미는 ‘뾰족한 막대기로 찌르다’라는 말입니다. 즉, 고난이라는 것이 뾰족한 막대기처럼 그를 찔러 대서 그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도록 훈련시켰다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를 이렇게 180°바뀌게 만든 것이 무엇입니까? ‘고난’입니다! 고난이 무엇이기에 사람을 이렇게 변하게 합니까? 67절과 71절 모두에서 ‘고난’으로 번역된 히브리 단어는 ‘아나’(hn:[;)로서 ‘점령되다, 괴롭히다, 압제하다, 낮추다, 굴복하다, 낙심하다, 겸손하다’라는 뜻입니다. 무언가가, 무슨 일 또는 사람 때문에 우리가 점령되고 굴복되어 괴롭힘과 압제와 낮추어짐을 당하여 낙심하고 겸손하게 되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법 앞에 고개를 뻣뻣이 들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를 찔러서 하나님의 법을 지키게 만드는 뾰족한 막대기와 같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인 것입니다. 고난은 그렇게 우리에게 괴로움과 고통을 주지만 결과적으로 우리를 낮추고 겸손하게 하여 하나님 말씀 앞에 굴복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베드로 사도가 베드로전서 4장 1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라고 말합니다. 육체의 고난을 받으므로 죄를 그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서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몸을 복종하게 하기 위해서 그것을 친다고 말합니다. 여기 ‘친다’고 번역된 헬라 단어는 ‘휘포피아조’(uJpwpiavzw)로서 ‘괴롭게 하다, 치다, 눈 밑의 얼굴 부분을 때리다, 멍이 들도록 때리다, 견딜 수 없는 괴로움을 주다, 학대하여 지치게 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는 스스로 자기 육체를 학대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육체에 고난을 주는 것은 잔인한 일로 여겨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체의 고난을 통해 죄가 그쳐질 수 있다면 시도해볼만한 일이 아닙니까? 이 말은 중세 시대의 사람들처럼 채찍으로 스스로를 후려치라는 말이 아닙니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은 사실상 너무 편안한 가운데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제는 그것이 편안한 것인지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거기에 물들어 버렸고, 신자인지 불신자인지조차 구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변해버렸습니다. 이 시대는 편안한 것을 요구합니다. 더 편한 옷, 더 안락한 집, 더 성능 좋은 차... 그래서 그렇게 더 좋은 것들을 얻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기에 더 많은 돈을 위해서 아등바등하고... 승진과 성공을 위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순수한 믿음과 신앙생활을 점점 뒷전으로 물러나게 만드는...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고행과 금욕을 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을 좀 더 단순하게 살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을 너무 편하게 대우해주면 그것이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려 합니다. 그런 육신을 쳐서 복종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영영 그 종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② 이제 로마서 8장 18절을 봅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우리는 이제껏 고난의 필연성과 고난이 의미하는 것을 살펴보았는데, 사실 별로 기분 좋은 내용들은 아니었습니다. 고난이 우리를 말씀대로 살게 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과정도 매우 고통스럽고, 말씀대로 살게 된다는 것이 그렇게 가치 있는 것으로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현재 당하는 고난과 고난을 통과하여 받게 될 영광을 비교하면서, 현재의 고난은 장래의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어떤 것인지 모릅니다. 그것이 정말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것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이겨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여기에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울의 말을 믿어야 합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히브리서 12장 2절에서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고 한 것처럼 예수님도 그렇게 하셨다면 우리 역시 그렇게 할 만한 가치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베드로전서 4장 13절은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을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실 때에 우리도 그것을 함께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바꾸어서 말하면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날 때에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없게 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고난은 우리가 영광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구원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히브리서 2장 10절입니다. “만물이 인하고 만물이 말미암은 자에게는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 일에 저희 구원의 주를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하심이 합당하도다.” 우리 구원의 주이신 예수님은 자신 이외의 많은 아들을 이끌어 영광에 들어가게 하시는데, 그 일을 하심에 있어서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는 일이 필요했다고 말합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이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는 것이 필요한, 불완전한 존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것은 ‘존재론’이 아니라 ‘모범론’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모범을 보이신다는 측면에서 그렇다는 이야기이지,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불완전해서 고난을 통해 온전케 되어야 했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히브리서 5장 8절의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라는 말씀도 같은 쪽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예수님이 우리처럼 불순종하기에 고난을 통해 순종하게 만들었다는 이야기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베드로전서 5장 10절 말씀을 통해 요약하는 것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부르셨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려면 온전케 되어야 하고, 굳게, 강하게, 터가 견고하게 되어야만 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들어갈 만한 자격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이 땅에서 사는 잠간 동안 고난을 받게 하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고난을 받는 것이 필연적임을, 그리고 그것이 유익이라는 점을 예수 그리스도를 모범으로 삼아 보여주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이 고난을 당하셔야 하는 이유들 가운데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있어서, 그리고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삶에 ‘고난’은 반드시 필요한 부분입니다. 원래의 고난은 범죄에 대한 형벌로 주어진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고난을 사용하여 우리의 구원을 완성시키십니다. 그래서 아무도 고난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예할 수 없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땅을 사는 동안 고난을 경험하게 됩니다(필연성).
그리고 그 고난은 뾰족한 막대기처럼 우리를 찔러 대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만듭니다. 우리의 육체가 고난이라는 뾰족한 막대기에 찔림으로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쳐서 복종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의 육신이 안락에 빠져 있고자 할지라도 그것을 막고 싸워서 굴복시켜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나라에, 하나님의 영광에 합당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됩니다. 고난을 이겨내는 것 자체가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영광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지는 과정인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 말씀을 지키는 자가 되는 것, 죄를 그치게 되는 것들이 바로 고난이 주는 유익인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이러한 고난의 필연성과 유익을 깨달아 그것을 잘 활용하므로 마지막 때에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