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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2194
10월26일 [연중 제29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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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저는 사랑없이 단 한 순간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레고리안 성가 성무일도로 유명한 베네딕토 수도회 솔렘수도원 저녁 기도에 참여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등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천 년도 더된 오랜 역사를 지닌 수도원 답게 고풍스런 품격이 진하게 느껴졌습니다.
수도원이 중심이 된 도시답게 솔렘의 거리는 한적했고, 시간도 천천히 흐르는 듯한 느낌이들었습니다.
그런데 인적이 드믈었던 거리 풍경과는 대조적으로, 저녁기도가 시작되는 성당 안에는 베네딕도회 수도자들뿐만 아니라, 순례객들, 마을 주민들로 빼곡했습니다.
이윽고 저녁기도 시간이 되자, 웅장한 성당 종이 울리고, 마흔 명 남짓되는 베네딕도회 수사님들의 장엄 행렬이 시작되었습니다.
허리가 많이 굽은 노인 수도자들도 계셨지만, 기품있는 중년의 수도자들, 샛파란 청년 수도자들도 꽤나 있었습니다.
사회에 있었으면 증권회사나 자동차 회사 등에서 정신없는 하루를 보내고 있을 청년들이 경건한 얼굴로, 정성을 다해, 아주 천천히 그레고리안 성가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본다는 것은 참으로 큰 은총이자 축복이었습니다.
수사님들 존재 자체가 하느님께서 현존하심을 잘 보여주는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찬미가, 시편 세개, 독서에 응송, 성모찬송가, 청원기도, 마침 강복등, 저녁기도 전체를 그냥 읽지 않고 모두 그레고리안 성가로 불렀습니다.
지루할 법도 한데, 감미로운 천상 음악처럼 들리니, 조금도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함께 자리한 순례객들은 다들 황홀경에 빠져 지상천국을 맛보는듯 했습니다.
세상을 거슬러 살아가는 사람들, 세상의 빠름을 떠나 주님 안에 천천히 여유있게 살아가시는 수사님들 모습 앞에, 별것도 없으면서 바쁜 척 돌아가는 제 삶이 무척 부끄러워졌습니다.
수사님들과의 짧은 저녁기도 시간 역시 제게 깨달음 하나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느리고 느린 기도, 그러나 마음과 정성이 담겨있었던 수사님들의 저녁 기도는 인생에 있어 정녕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일깨워준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주님 앞에 조용히 그리고 편안히 머무르기, 그분 사랑의 시선을 느끼며 편안히 성전 안에 머무르기, 이것보다 더 근사하고 멋진 순간이 다시 또 있을까요?
'저는 사랑없이 단 한순간도 살지 않을 것입니다.'
(루르드 성모님 발현 목격자 벨라뎃다 성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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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회개는 내가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봉헌으로부터 시작된다>
어떤 마을에, 이교도 사원과 가톨릭 성당이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습니다. 사원의 예배와 성당의 미사는 매일 같은 시간에 있었습니다.
한 마을 이웃에 사는 이교도 신자인 팜푸스와 그리스도인 키루스는 각자의 예배소로 가는 길을 나란히 같은 시간에 걸어가곤 하였습니다.
이교도 신자인 팜푸스는 늘 자기 신을 위하여 바칠 희생제물을 들고 갔었으나 그리스도인 키루스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음이 의아하게 생각되어
어느 날 팜푸스가 물었습니다.
“선생, 당신은 예배하러 가면서 당신 신한테 바칠 제물을 왜 가져가지 않는 거요?”
이 말에 키루스는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예배 드릴 때마다 하느님께 무언가를 바친답니다."라고 말하자 팜푸스는 어리둥절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무런 제물도 가져가지 않았잖소?”
“나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상의 제물을 그분께 바친답니다.”
“그럼 과연 무엇을 당신 신께 바친다는 말이요?”
키루스는 대답했습니다.
“제 자신입니다.”
물론 자신을 바친다고 하면서 자신의 소유를 함께 바치지 않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바치지 않고 소유물만 바치는 것도 참된 봉헌은 아닙니다.
봉헌은 내 것만이 아니라 나 자신이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신앙행위입니다. 따라서 봉헌 없는 하느님 사랑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 없는 이웃 사랑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하나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줄 모르면 이웃도 사랑할 줄 모릅니다. 하느님께 내어줄 수 없는 사람은 이웃을 위해서도 내어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치는 제물은 하느님께 무언가 얻어내려는 목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이웃에게 베푸는 자선도 이웃을 이용하여 무언가 챙기려는 속셈입니다.
봉헌엔 나의 피가 섞여야합니다. 그것이 하느님께 드리는 제물에 나의 주인이 되어주신 것에 대한 감사를 섞는 것입니다. 감사가 섞이지 않은 제물은 내 피가 섞이지 않은 제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사람들이 빌라도가 갈릴래야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했다는 말을 예수님께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왜 진작 제물이 피를 섞지 않았느냐는 뜻입니다. 회개는 봉헌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참다운 봉헌이어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주님께 봉헌했어야 할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서부터 모든 죄가 시작되었습니다.
참다운 봉헌은 나의 생명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이 봉헌은 이웃사랑으로 이어져야합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실로암은 ‘파견 받았다’는 뜻입니다. 하느님께로부터 이웃사랑을 위해 파견 받은 마음으로 살지 않으면 아직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탑’은 ‘교만’을 상징합니다. 교만은 자신이 자신의 주인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회개했다면 봉헌하고 있을 것이고 봉헌은 하느님께서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참다운 봉헌은 주님이 원하시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봉헌으로 돌아오는 것은 성령입니다. 빵과 포도주를 봉헌하면 성령으로 축성된 그리스도의 살과 피로 돌아옵니다. 이렇게 당신의 생명을 내어주시는 이유는 그 힘으로 이웃을 사랑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봉헌을 통해 다른 무언가를 바라고 있다면
이웃 사랑의 열매는 맺힐 수 없게 됩니다.
먼저 나의 봉헌이 나를 봉헌하는 것이어야 주님의 계명을 따름으로 이어집니다. 만약 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오늘 복음처럼 당신의 천사들에게 이렇게 명령할 것입니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하느님으로부터 잘리지 않으려면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는 참된 봉헌으로부터 시작되어야합니다.
나의 주인이 주님이심을 인정하여 무슨 뜻이든 따를 준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웃 사랑을 소명으로 여기게 됩니다.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조만간’ 주님께서도 우리에 대한 열정을 접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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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2)열매 맺지 못하는 이유>
우리가 고해성사 하는 것을 가만히 되짚어보면 예전에 했던 것들을 반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미워했던 것, 아이와 남편에게 화를 냈던 것, 직장상사나 누군가를 안 좋게 말했던 것, 게을렀던 것,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것,
또 과음하고 늦게야 귀가한 것 등 누구든 각자 했던 고해를 또 하는 것들이 한두 가지씩은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시간을 허락하는 이유는 그런 것들을 고치고 당신 나라로 오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애벌레는 각자 크기가 다릅니다. 그 크기에 따라 누에가 되고 누에에서 나오는 나비도 애벌레 때의 크기와 비례하게 됩니다.
잘 성장했던 애벌레는 큰 나비가 될 것이고 잘 못 먹어 작을 때 누에가 된 것들은 나비가 되어도 작을 것입니다.
한 번 정해진 이 크기는 하느님나라에서 변화되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도 큰 사람과 작은 사람이 있는데 하느님은 우리들이 최대한 커진 상태로 하늘나라에 들어오라고 우리에게 더 클 시간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이 회개의 시간을 그냥 흘려버리고 있다면, 혹은 더 클 수 없을 정도로 커버렸다면
하느님은 그 사람을 세상에 놓아둘 의미가 없어집니다.
농사를 지을 때 누가 설익은 포도를 따겠습니까? 혹은 너무 익어 먹을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을 수확하겠습니까?
어떤 누가 죽는다면 이미 익을 만큼 익었기 때문에 하느님이 데려가시는 것입니다. 더 이상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를 잘라버리려고 할 때 포도 지배인은 한 해만 더 기다려 달라고 청합니다.
그래도 열매 맺지 못하면 주인의 명에 따라 영양분을 낭비하는 무화과나무를 베어버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용서하고 싶어도 용서가 안 되고, 일찍 일어나고 싶어도 잘되지 않으며, 술을 절제하고 싶어도 절제가 안 되는 경우를 자주 경험하게 됩니다.
회개란 이런 우리의 부족함을 변화시켜 가는 것인데 이를 위해서는 내 삶을 변화시키겠다는 결심과 하느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결국 하느님은 결심이 선 사람은 언제나 도와주시기 때문에 내가 변화하지 못하는 이유는 결정적으로는 내가 변화되기 위한 결심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용서가 안 되는 것은 내가 용서를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깊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 죄가 있어서 그것을 정당화하기 위해 나는 끝까지 그 사람을 판단하고 용서해서는 안 되는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용서해야 되는데, 용서해야 되는데...’라고 말하는 것은 용서해야 되는 것을 알지만 잘 안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니 하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성모님, 성인들까지 갈 것도 없이 우리 주위에는 용서하기 불가능해 보이는 사람을 용서한 예가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유영철에게 자신의 노모와 아내, 4대 독자까지 살해당했지만 그를 용서하며 그의 사형을 반대하는 고정원씨만 보더라도 우리가 원해서 안 되는 일은 없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하기를 원치 않는 것뿐입니다.
그렇게 하기 싫어하는 것들을 잘 안 된다는 핑계로 미루고만 있다면 하느님도 이렇게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에 계속 영양분을 공급해 주시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한계가 있습니다. 내가 회개하기 위한 결심을 멈추는 순간, 하느님도 낫을 들어 수확할 결심을 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며칠 전에 몇 년 만에 대학 동창들을 만났습니다.
모두들 아이들 키우며 직장 다니며 열심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도 서로 바빠서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제가 만나자고 하니 외국에 있는 친구들 빼고는 모두들 바쁜 와중에도 다 나와 주었습니다.
대학 다닐 때는 저만 성호 긋고 밥을 먹는 것이 친구들 사이에서 창피하기도 했지만, 막상 사제가 되니 그들도 저를 함부로 부르지 않고 사제를 인정해 주면서도 오히려 친구 중에 사제가 한 명 있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불가에서 말하는 대결정심인 것 같습니다. 회개를 위해 큰 결심을 하지 않으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란 생각 때문에 변화되기를 두려워하지만, 내가 완전히 변화되어 버리면 주위 사람들이 나를 인정하고 맞춰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 제자들은 두려워하였고 결국 그 순간이 오니 모두들 도망쳐버렸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대결정심을 지닌 분이셨습니다. 그랬더니 결국 당신 제자들도 그리스도의 십자가 길을 따라 모두 순교의 길로 걸어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변하여 온 세상을 변하게 만들 수 있는 회개가 참 회개이고 그 회개를 위해서는 대결정심을 지녀야합니다.
이슬람교도들은 길거리에서도 기도 시간만 되면 무엇이든 깔아놓고 메카를 향해 절을 하고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과연 우리들은 삼종기도 시간에 그렇게 합니까?
주위 눈치를 보면서 하지 않거나 아니면 혼자 조용히 숨어서 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어쩌면 우리들 모두가 회개하지 않으면 그 때가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심판관으로 내려오실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온 세상을 바꾸어 나갈 믿음과 결심으로 끊임없이 회개해 나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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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가 13,1-9 :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하였는데, 그 죽은 사람들이 무슨 특별한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런 일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하느님 앞에서 항상 올바로 서있지 못하면 멸망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항상 회개하는 삶으로 그에 맞갖은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주인은 무화과나무를 포도원 안에 심었다.
그리고는 열매를 맺었는지 해마다 살펴보지만,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자 그 나무를 베어버리라고 한다. 주인은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7절) 3년이면 무화과나무가 성숙한 나무로 자라 열매를 맺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잘려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땅만 차지하고 영양분만 없앴지 아무런 결실을 맺지 못하는 이 나무는 남으로부터 받기만 하는 것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말씀이다. 우리 자신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생활 속에서 받는 것보다는 주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정 무엇을 하느님과 이웃을 위해 내어놓을 수 있었는지, 그리고 그러한 체험이 생활 속에 어느 정도 되고 있는지 반성해보아야 한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 해만 더 그냥 두시지요.”(8절) 우리에게 진정한 위로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포도 재배인은 아드님이시다. 그분은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 주시는 분”(1요한 2,1)이시며, 우리를 가꾸시는 정원사시다. 끊임없이 해로운 것들을 잘라 내시고 거룩한 씨앗들로 우리를 채우시어 당신을 위한 열매를 맺게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나의 아버지는 농부이시다.”(요한 15,1)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는 항상 아버지 하느님께 이렇게 기다려 주시기를 청하고 계시는 분이시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를 벌하지 않으시고 끝까지 기다려주시는 분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기회가 나에게 계속 허락될 것이라고 착각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제 진정 주님과 이웃을 위해, 그리고 나의 구원의 결실을 위해 보람 있는 많은 결실을 맺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그 나무가 심겨진 자리에는 아마 다른 나무로 교체될 수도 있다. 아주 열매를 잘 맺는 나무가 그 자리에 서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도 우리 자신의 삶속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을 거두어 다른 사람에게 주실 수 있다는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살면서 거기서 맺는 열매로 복된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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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오늘의 묵상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대구 대명성당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성전 뜰에서 희생 제물을 바치던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인 것과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사람들의 예를 드시면서, 회개하지 않으면 그처럼 멸망하리라고 경고하십니다.
이 두 사건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보다 더 낫지도 못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뜻하지 않게 생명을 잃은 것이고,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예측할 수 없는 것인지 보여 줍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갑자기 기회를 잃어버리기 전에 회개할 필요가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같은 맥락에서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를 심어 놓고 열매를 수확하려고 삼 년이나 기다렸는데, 열매가 달리지 않자 잘라 버리려 합니다. 올리브 나무도 마찬가지이지만 무화과나무는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고, 특별히 거름을 주지 않아도 열매를 맺는 효자 식물입니다. 그런데 삼 년이 되어도 아무 수확을 내지 못하자 그 나무를 잘라 버리려는 주인의 마음은 당연합니다. 열매를 내지 못하면서 땅만 차지하고 있는 나무는 아무 쓸모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포도 재배인이 나서서 한 해만 더 시간을 달라고 청합니다. 그러면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어 보고, 그 다음에도 열매를 맺지 못하면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거름이 필요 없는 무화과나무에 거름을 준다는 것은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 나무를 보살핀다는 뜻입니다.
신앙인들은 계속해서 회개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느 누구도 회개의 필요성에서 제외될 수 없으며, 은총의 시간이 남아 있지만, 그 시간은 마냥 지속될 수 없는 제한된 시간임을 명심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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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고병수 요한 세례자 신부님]
<요즘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요즘 한국교회가 위기라고 한다. 입교자가 전에 없이 감소하고, 쉬는 신자들 역시 증가일로에 있다.
이곳저곳에서 대처방안을 내놓아 보지만 문제가 쉽게 해결될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답답하고 아쉬울 따름이다. 그렇다고 마냥 앉아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그동안 우리 교회는 너무 앞만 보고 달려왔다. 세상을 향한 교회 본연의 사명이나 내적 성장보다는 솔직히 교회를 양적으로 키우는 데 온통 힘을 쏟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싶다.
세계 교회가 깜짝 놀랄 정도의 양적 성장을 이뤄낸 반면, 공동체의 내적 기반이 흔들리면서 사람들에게 큰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결국 교회의 성장에 따른 대형화와 세속화가 부메랑이 되어 교회에 위기를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지금의 위기를 냉철하게 보고, 거듭나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것은 오로지 교회를 키우는 데 몰두했던 데서 벗어나 세상의 변화나 흐름에 관심을 기울이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잘못된 세상을 변혁시켜나가야 하며, 세상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대를 줄 수 있는 교회다운 교회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위해 교회를 친교와 일치, 사귐과 나눔이 넘쳐흐르는 ‘공동체들의 공동체’로 탈바꿈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교회를 새롭게 거듭나게 하는 일이요,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 요구하는 참다운 회개를 지금 여기에서 행하는 것일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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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서인덕 베드로 신부님]
<다시 돌아갑시다>
사제 수품을 받기 전, 지금까지의 제 삶을 돌아보는 은총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지나온 발걸음을 되돌아보았을 때 언제나 하느님께서는 저와 함께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그분의 사랑을 몰랐고, 때로는 외면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부족한 저를 이끌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그 감동과 전율은 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절대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그 전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죠.
“그러나 나는 너의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니 네가 돌아오거든 네 형제들의 힘을 북돋아주어라.”(루카 22,32)
그냥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베드로는 펄쩍펄쩍 뛸 양으로 무슨 말씀이시냐면서 호언장담합니다. 예수님은 분명 알고계셨습니다.
이스카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오른팔이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회개하고 돌아올 용기를 잃지 않도록 기도해주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은 제게 참으로 감동이었고, 감사함으로 다가왔습니다.
특별히 제 세례명이 베드로였기 때문에 더 크게 다가왔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외면하며, 혼자 힘들다고 주저앉아 있었던 저를 위해, 저의 회개를 위해, 제가 용기를 낼 수 있도록 예수님께서 기도를 해주셨기에 제가 회개하고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여러분도 느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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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최영균 시몬 신부님]
<열매 맺지 못한 나무로부터의 수확>
사목자로서 살아가다 보면 가끔은 속수무책인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아무리 어르고 달래보아도 제대로 자기 역할을 못할 뿐만 아니라 관계도 원만치가 않습니다.
그러면 그냥 계속 그렇게 내버려두던가 아니면 공동체로부터 떨어져 나가던가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주인 역시 같은 심정이었을 것입니다. 주인을 대신해 포도원을 관리하는 포도원지기는 이런 주인과는 사뭇 다른 입장입니다. 그는 끝까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왜 포기하거나 내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포도원지기의 역할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어쩌면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를 살리는 것이 그의 소명이 아닐까요.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다 보면 열매 맺지 못하는 빈 수확일 때가 많습니다. 우리 역시 포기하고 싶고 그냥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소명이 바로 포도원지기의 소명이라면 우리의 존재 이유는 성공적인 수확을 거두기 위함이 아니라 죽어가는 쓸모없는 나무를 살리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성공의 수확자가 아닌 모든 죽어가는 것을 위한 파수꾼이 그리스도인의 존재가 아닐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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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오늘>
루카 13,1-9(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한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
바로 그때에 어떤 사람들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래아 사람들을 죽여 그들이 바치려던 제물을 피로 물들게 한 일을 예수님께 알렸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자기 포도밭에 무화과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그리고 나중에 가서 그 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았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였다. 그래서 포도 재배인에게 일렀다.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러자 포도 재배인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오늘>
우리는 언제나 오늘을 살 수밖에 없지요
그러니 내일부터라는 말을 하지 말아요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을 허비하면서
내일은 나아지리라 생각한다면
내일이 오늘이 될 때
오늘은 또 내일이 되지요
우리는 결코 내일을 살 수 없답니다
내일은 오늘을 사는 사람만이
희망할 수 있는 다가올 오늘이지요
그러니 오늘부터 오늘을 살아요
오늘 기뻐하고
오늘 슬퍼하고
오늘 사랑하고
오늘 아파하고
오늘 회개하고
오늘 거룩해져요
그래서 내일이 오늘이 될 때
오늘보다 더 나은 오늘로 가꾸어요
삶의 아름다운 마지막 날
나를 지켜보는 슬픔 가득한 벗들에게
울지 마
난 언제나 오늘을 살았어
난 언제나 오늘을 사랑했어
지금도 여전히 오늘을 사랑해
오늘 삶의 마지막 날이 지나면
하느님과 영원히 함께 하는
평화로운 내일이 오늘이 되리라 믿어
그러니 함께 기뻐해줘
기쁨과 희망 담긴
마지막 말을 남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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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조창현 클레멘스 신부님]
+ 조 두레박 신부의 영적일기
<어리석음을 버리고…>
고운님들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그때야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운님들을 사랑하신 나머지 깊은 기다림으로 타들어 가 빨간 단풍 별이 되신 주님의 마음을 말입니다.
구약의 이사야서 60장 19-20절에 보면, 이사야 예언자는 빨간 단풍별이신 “주님의 마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해는 너에게 더 이상 낮을 밝히는 빛이 아니고, 달도 밤의 광채로 너에게 비추지 않으리라.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너의 하느님께서 너의 영광이 되어 주시리라.
다시는 너의 해가 지지 않고 너의 달이 사라지지 않으리니 주님께서 너에게 영원한 빛이 되어 주시고 이제 네 애도의 날들이 다하였기 때문이다.” 아멘.
이제 주님의 빛이 고운님들을 둘러싸고, 그분의 사랑이 고운님들을 품고, 주님의 능력이 고운님들을 지켜주시고, 고운님들이 어디에 가든 그곳에 하느님을 계실 것입니다. 특히 주님의 빛이 몸과 마음이 아픈 이들과 고운님들의 자녀들을 둘러싸고, 품고,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죽은 열여덟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그런데 매 순간 저희가 생명이 연장되는 것은, 저희가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저희의 회개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배려이십니다. 루카 복음 13장 6-9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 비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인이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잘라버리고 하자, 포도 재배인이 대답하였습니다.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 그러면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그러지 않으면 잘라 버리십시오.”
이 은혜로운 말씀으로 저희가 회개할 기회와 주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는 시간을 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께서는 저희의 회개를 위해 한없이 기다리십니다. 결국은 내 인생의 마지막 날이 오면 깨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저희가 죄가 없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희가 잘살아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더 깊게 생각해보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느님 자비의 마음을 읽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더 넓고, 더 높고, 더 큽니다.
사랑하는 고운님들!
“지나갔던 일들은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지금 일어난 일들은 하느님의 사랑에 맡기고, 앞으로 일어날 일들은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자.”
성 아우구스티노께서 하신 말씀을 종종 되새기며 살면서도, 미래에 대해 크고 작은 불안감을 안고 사는 어리석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무슨 고통스럽고 힘든 일이 생기면 “내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라고 울부짖으면서 죄에 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 고통으로, 그 힘듦으로 인하여 주님께 더 가까이 가고, 이해의 깊이가 깊어지고, 주님의 사랑이 영원한 빛이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고운님들의 삶에 고통이, 어려움이 닥쳐와 힘들게 하거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 그리고 섭리에 맡기며 살아가는 인생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영적일기를 마무리하면서….
대자대비하신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주님이다. 때가 되면 내가 이 일을 서둘러 이루리라.”
고운님들이 주님의 말씀을 되새기며 살면서도 미래에 대한 다소의 불안감을 사는 어리석음을 버리고, 늘 기쁘고,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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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를+ 나를 단단해지게 하는 시편(296)
♧♧ 시편 57편 6절….
"하느님, 하늘 높이 일어나소서. 당신의 영광 온 땅 위에 떨치소서."
이 구절과 12절은...시편 57편 2-6절과 후반부 7-12절의 후렴구입니다. 이 후렴구는 대적에 대한 다윗의 징벌 호소의 궁극적 목적과 하느님께 대한 다윗의 신앙 자세를 잘 나타내 줍니다. 여기서 ‘하늘’과 ‘온 땅’은 세상 만물과 인간 세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구절에서...다윗은 대적에 대한 징벌을 통하여 세상 만물의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권능과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시어, 세상 만물은 물론 온 인류가 하느님을 경외하며 영광을 돌리게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다윗의 간구는 훗날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 천사들이 부른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느님께 영광 땅에서는 그분 마음에 드는 사람들에게 평화!(루카복음 2장 14절)”라는 노래를 연상하게 해줍니다. 다윗이 바라는 주님의 영광은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 시편 57편 7절….
"그들이 제 걸음마다 그물을 쳐놓아 제 영혼이 꺾였습니다. 그들이 제 앞에 구덩이를 파 놓았으나 그들 자신이 그 가운데로 빠져 들었습니다. 셀라"
* 그들이 제 걸음마다 그물을 쳐놓아 제 영혼이 꺾였습니다...
이는 다윗을 잡으려고 날뛰는 사울 왕과 그 부하의 세력들의 간약함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사무엘 상권 24장 1절. 참조) ‘꺾였습니다.’라는 말은 ‘허리를 구부리다’ ‘엎드려 절하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간악한 대적들과 직면한 상황에서 오직 하느님께만 엎드려 구원을 호소할 수밖에 없는 다윗의 간절한 심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 그들이 제 앞에 구덩이를 파 놓았으나 그들 자신이 그 가운데로 빠져 들었습니다...
하느님께 엎드려 간절히 기도했던 다윗이 자신의 기도에 대해 하느님께 응답하시어 대적이 반드시 멸망할 것에 대해 확신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시편 57편 8절….
"제 마음 든든합니다. 하느님, 제 마음 든든합니다. 제가 노래하며 찬미합니다."
* 제 마음 든든합니다. 하느님, 제 마음 든든합니다...
‘든든합니다...’라는 말은 ‘고장되었다.’ ‘확고하게 되었다.’ ‘준비되었다.’ 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이 같은 말을 거듭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음은 다윗이 대적으로부터의 하느님의 구원을 확신하고 이에 대한 진실한 감사의 마음으로 하느님께 찬양드릴 준비가 완료되어 있음을 강조해주고 있습니다. 이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 중에서도 좌절하고 절망하기보다 오히려 더욱 감사 찬미로 주님께 나아가는 성숙된 참 신앙인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제가 노래하며 찬미합니다...
비록 지금 절대 절명의 위기 상황에 처하여 있긴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의 손길을 확신하는 선취적 신앙에 의해 마음에 큰 기쁨을 가지게 된 다윗이 입을 벌려 소리 높여 하느님께 감사 찬미하겠노라고 다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노래하고’와 ‘찬미합니다.’라는 말은 실상 같은 말의 반복인 것으로 구원에 대한 다윗의 확신과 그로 인한 기쁨이 얼마나 큰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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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달과 태양 중에 어떤 것이 더 클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아마 아주 어린 학생도 잘 알 것입니다. 당연히 태양이 훨씬 큽니다. 그러나 맨눈으로 보면 달과 태양의 크기는 별 차이가 없습니다.
그래서 과학이 발달하지 않았을 때는 달과 태양의 크기는 같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우선 달의 크기는 태양의 1/400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같아 보이는 이유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가 우연히도 지구와 달 사이 거리의 400배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를 두고서 어떤 이들은 우주적인 우연이라고 말하지만, 이 역시 이제껏 우리가 몰랐던 하느님의 손길이 아니었냐는 생각을 해봅니다.
만약 달의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컸다면? 또 훨씬 더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상상해보십시오. 아마 지금과 같은 낮과 밤의 구분이 이상해질 것입니다. 또 이제껏 나와 있는 태양과 달에 대한 시구들이 지금과는 완전히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몰랐던 하느님의 손길을 생각해보면 정말로 많습니다. 그렇게 많은 죄를 짓는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심판하지 않는 것 역시 하느님의 손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숨을 내쉬며 사는 것도 우리가 몰랐던 하느님의 손길입니다. 이밖에도 얼마나 많은 하느님의 손길을 우리가 느끼지 못했을까요? 우리가 모르는 곳에서 또 모르는 시간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모르는 사이에 계속 그분의 사랑은 우리에게 펼쳐지고 있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우리는 원하는 것이 이루어질 때 하느님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면 그 안에서의 하느님 손길은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능력으로 그리고 운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는지 감사기도를 바치지 않습니다. 주님의 무화과나무에 관한 비유 말씀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삼 년째 열매가 열리지 않는 무화과나무를 잘라 버리라고 주인이 말하지요. 그러자 포도 재배인은 자신이 더 노력해서 키울 테니 한 해만 더 기다려달라고 합니다. 이 비유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구약성경에서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가리키고 있거든요. 즉, 성조시대, 예언자 시대에 이스라엘을 찾아오셨습니다.
그런데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하고 악으로 기울어진 것입니다. 삼 년째에 잘라버리겠다고 했을 때, 포도 재배인으로 상징되는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면서 구원을 위해 온 힘을 쏟으십니다. 이렇게 역사 안에서 하느님의 기다림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힘주어서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마냥 기다리지 않으십니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하느님 사랑의 손길을 느끼면서 분명히 다가올 심판의 시간을 잘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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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믿는가?>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는데 주인아주머니께서 오셔서 제게 말을 거십니다.
“신부님 맞으시죠? 복장 보니까 신부님 같아서요.”
마침 사제의 공식 복장인 로만칼라를 하고 있어서 신부인 것을 알아보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신부님, 저도 원래 성당 다녔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안 다닙니다.”
“왜요? 열심히 신앙 생활하면 좋잖아요? 바쁘셔서 그런가 보죠?”
“제가 이 동네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서 아는데, 동네에서 아주 못된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성당을 다니더라고요. 글쎄 그런 사람이 성당에서 무슨 직책도 맡고 있데요. 이런 사람이 다니는 성당을 어떻게 나가요?”
“그 사람 믿지 말고 예수님을 믿어보세요.”
“제가 옛날에 사기를 당한 적이 있는데, 그 사기꾼도 성당을 열심히 다녔었어요.”
“사기꾼 믿지 말고 예수님 믿으세요.”
“정치인 중에서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이 참 많아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다 성당 다니더라고요. 그래서 성당 안 가요.”
“정치인 믿지 말고 예수님 믿으세요.”
예수님만 보면 성당에 기쁘게 나갈 수 있는데, 예수님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성당을 열심히 다니다가 냉담 하시는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수님 때문이라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다 성당 안의 누군가 때문에 성당을 나가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믿음의 대상은 예수님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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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오늘은 10월 26일입니다. 벌써 40년이 되었습니다. 충격적인 소식이 신문에 호외로 나왔습니다. 대통령이 서거했다는 뉴스였습니다. 5년 전인 1974년에는 대통령의 부인이 안타깝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한나라의 대통령과 그 부인이 불행한 사건으로 유명을 달리했습니다. 대통령의 딸이 33년 후에 대통령이 되었지만 안타깝게도 탄핵으로 대통령직을 내려놓은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국가적으로도 불행한 일이고, 한 가족으로도 안타까운 역사입니다.
지금부터 40년 전에 저는 고등학생이었습니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그때는 석간이었던 동아일보를 배달하려고 보급소엘 갔습니다. 신문 150부를 들고 배달을 하고 나면 배도 고프고 그래서 신당동 떡볶이집엘 자주 갔습니다. 요즘은 신문도 다들 오토바이로 배달하지만, 그때만 해도 오토바이 배달은 없었습니다. 신당동의 떡볶이집에는 음악이 있었고, 맛있는 떡볶이가 있었고 우리만의 세상이 있었습니다. 그때 들었던 음악은 레이프 가렛의 "다 함께 춤을 춰요"라는 신나는 댄스 음악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진, 나훈아와는 전혀 다른 음악을 보여준 산울림의 음악이 있었습니다. 많은 학생이 산울림의 음악을 좋아했고, 저도 물론 좋아했습니다. 산울림은 90년대에는 서태지와 아이들만큼, 지금의 BTS만큼이나 인기 있었습니다.
대통령이 죽었다는 사실은 저에게도 충격이었습니다. 그분은 새마을 운동을 주도하셨고, 민족의 근대화를 위해서 산업현장을 뛰어다니셨고, 수출 100억 불, 국민소득 1000불을 위해서 불철주야 땀을 흘리셨던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저는 그분의 앞모습만 보았습니다. 신문과 방송도 그분의 앞모습만 저에게 보여주었으니까요. 그 뒤 저는 그분의 뒷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무리하게 삼선개헌을 하였습니다. 긴급조치를 남용했습니다. 노동자들과 학생들의 저항을 잔인하게 진압하도록 했습니다. 자신의 권력을 무리하게 유지하려다가 가장 가까이 있는 측근에게 그렇게 허무하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오늘이 바로 그분이 죽은 지 40년이 되는 날입니다. 사람에 대한 평가는 그가 세운 업적이나 그의 앞모습만으로는 제대로 할 수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 진정한 평가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결국은 드러날 뒷모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살아있는 사람은 결코 성인 품에 올리지 않습니다. 그가 많은 기적을 행했어도, 그가 모든 사람에게 존경을 받았어도 그렇습니다. 그가 아무리 높은 직책에 있었어도 그렇습니다. 죽은 다음에도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야 비로소 성인 품에 올릴 수 있는지 조사를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고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사시는 당신의 영을 통하여 여러분의 죽을 몸도 다시 살리실 것입니다. 누가 주님의 산에 오를 수 있으랴? 누가 그 거룩한 곳에 설 수 있으랴? 손이 깨끗하고 마음이 결백한 이, 헛된 것에 정신을 팔지 않는 이라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유대인 랍비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죄의 크기와 죄의 질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죄에 대해서 뉘우치지 못하는 그 대죄 때문에 용서받지 못하는 것이다!"
내가 하는 일과 내가 하는 말과 내가 하는 행동이 비록 정당하다고 할지라도 사실은 어느덧 나는 나의 욕심과 나의 이기심을 뒤에 감추고 있을 때가 많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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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내적혁명의 회개와 영성靈性>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성령에 따르는 삶-
정보통신기술의 융합으로 이루어진 4차혁명 시대를 말하지만 정작 필요한 것은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인간의 내적혁명입니다. 하나뿐인 ‘공동의 집’ 지구에 사는 사람들입니다. 4차 혁명이 정말 지구를 보호하며 인간을 행복하게 하며 인간답게 살 수 있게 할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하지 못할 것입니다.
요즘의 화두는 단연 지속가능한 삶입니다. 지속가능한 경제, 지속가능한 농업, 지속가능한 교육, 지속가능한 정치 등 해당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지금 같은 삶의 형태라면 지속가능하기가 힘들 것입니다. 출산율 감소와 노령화 사회 역시 지속 가능한 미래사회를 어둡게 합니다. 급감하는 성소자의 감소로 수도원도 지속가능할지 의문입니다. 모두가 미래가 아닌 당대만 생각하며 소비하며 사는 것 같습니다.
정작 필요한 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구체적 금욕, 극기, 절제의 수행으로 근면 검소한, 단순소박한 삶의 실천 형태로 드러나야 하는 회개의 삶, 회개의 여정입니다. 요즘은 생태적 회개라 하여 자연과 조화된 삶의 실천을 이야기 하기도 합니다. 회개는 멀리서가 아니라 오늘 당장 시작해야 하고 평생 회개의 여정을 살아야 합니다. 4차혁명보다 끊임없는 회개를 통한 인간의 내적혁명이 우선입니다.
인간보다 복잡한 존재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라 정의합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거울에 비춰 보는 얼굴이듯 얼마나 하느님 거울에, 예수님 거울에 우리 영혼의 얼굴을 비춰 보는 지요. 날로 하느님을, 예수님을 닮아가는 영혼의 얼굴인지요. 나이 40이 넘으면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는데 바로 육신의 얼굴에 영혼의 얼굴 모습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마성魔性, 수성獸性, 인성人性 바로 인간 안에 내재한 특성입니다. 그러나 영성靈性까지 이르러 이 영성안에 마성, 수성, 인성이 고양 통합되어야 비로소 참 사람입니다. 사람이라 하여 다 사람도 아니며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괴물같은 사람, 악마같은 사람도, 폐인이 된 사람도 부지기수일 것입니다.
참으로 영성의 시대에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여기서 절대적으로 부각되는 것이 회개의 삶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비로소 예수님을 닮아 영성적 삶을 살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여 회개의 여정은 예수님을 닮아 참 내가 되어가는 예닮의 여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절박한 요구도 회개입니다. 우리 모두 너나할 것 없이 회개해야 할 죄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단호한 말씀은 우리 모두의 회개를 촉구합니다.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갈릴래아 사람들이 변을 당한 것도, 실로암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열여덟 사람들은 그들이 더 큰 죄이라서가 아니라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그처럼 멸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살아있을 때 회개이지 죽으면 회개도 없습니다.
회개하라 연장되는 우리의 날들인 것입니다. 바로 이어지는 열매맺지 못하는 무화과 나무의 비유가 이를 입증합니다. 회개할 기회를 주신 유예기간의 인생이니 오늘 지금 당장 회개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얼마전 연미사 내용을 읽으면서 받은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합니다.
“---영혼이 영원한 안식에 들게 하소서. 성당 교우인데 식당에서 밥먹다가 뇌출혈로 쓰러져 수술하고 하룻만에 주님곁으로 갔습니다. 영원한 빛을 비추소서. 올해 나이 53세입니다.”
언제 죽음이 올지 모르니 늘 깨어 회개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회개의 일상화, 회개의 생활화입니다. 회개는 단지 죄로부터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의 삶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성령에 따른 삶을 통해 예수님을 닮아가는 영성적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여정을 통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성령에 따른 삶을 살 때 비로소 예수님을 닮아 영적 인간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4차 혁명의 시대라 해도 영성이 없는 인간이라면 사상누각의 4차 혁명에 불과할 것입니다. 참으로 4차 혁명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것이 내적혁명의 회개를 통한 영성의 성장과 성숙일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회개후 성령에 따른 영적 삶을 강조합니다.
“무릇 육을 따르는 자들은 육에 속한 것을 생각하고, 성령을 따르는 이들을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 육의 관심사는 죽음이지만 성령의 관심사는 생명과 평화입니다.---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회개할 때 성령에 따른 삶이요 예수님을 닮아 죽음에서 벗어나 생명과 평화로 충만한 삶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생명이 되어 주시니 비로소 우리는 영성적 인간이 됩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회개한 우리 모두가 성령 충만한 영성적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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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들에서는 희망의 메시지가 울려 퍼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건 우리 인간은 모두 죽는다는 사실이고, 가장 불확실한 건 그게 언제 닥치느냐 하는 겁니다. 예나 지금이나 비교적 준비가 가능한 선종이 있는 반면, 천재지변이나 불의의 사고로 급작스레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도 적지 않지요. 오늘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들고 온 화제가 바로 이 문제였습니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루카 13,3.4)
예수님은 느닷없이 맞이하는 사고나 죽음이 그 사람의 죄의 결과일 거라는 통념을 정면으로 지적하십니다. 사실 그러한 죽음은 우리 모두에게 열려 있는 가능성이며, 그렇기 때문에 언제 닥칠지 모르는 그 때를 "회개"로써 준비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회개와 보속, 만회, 기워갚음은 우리가 숨과 이성을 지니고 살아 움직이는 순간까지만 가능한 일일 테니까요.
"보게, 내가 삼 년째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 열매가 달렸나 하고 찾아보지만 하나도 찾지 못하네. 그러니 이것을 잘라 버리게. 땅만 버릴 이유가 없지 않은가?"(루카 13,7)
예수님은 포도밭 주인과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를 비유로 드십니다. 포도밭은 이 세상을, 포도밭에 당연히 심겨져 있을 포도나무란 저마다 지방 신을 섬기는 다른 민족들을 의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중 주인이 특별히 심은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이고요. 그런데 삼 년이나 열매를 못 맺었다고 하니 심상치 않습니다. 3은 완전함을 상징하는 숫자이니, 주인이 참고 기다린 시간은 완전한 햇수, 즉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뜻도 됩니다.
"잘라 버리게."
이 말씀을 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는 사실 구약 성경 곳곳에서 들립니다. 노아 시대에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에서 쓸어 버리겠다."(창세 6,7) 하는 후회 가득한 목소리,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에 앞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오는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창세 18,21) 하시는 확인의 목소리, 계약 체결 후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이스라엘에 대해 "그들에게 내 진노를 터뜨려 삼켜 버리게 하겠다."(탈출 32,10) 하셨던 분노의 목소리, 그리고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 들려왔던 질책의 목소리들이 지금 여기에 응집되어 표현된 것이지요.
"주인님, 이 나무를 올해만 그냥 두시지요. 그동안에 제가 그 둘레를 파서 거름을 주겠습니다."(루카 13,8)
사실 포도 재배인이라면 일이 적을수록 편한 입장일텐데 자청해서 주인을 만류합니다. 그 나무가 제 구실을 하도록 자신이 좀 더 수고를 기울여 보겠다는 관대하고 희생적인 마음이 느껴지지요. 이는 대가나 능력 과시 문제가 아니라 연민과 관심의 문제입니다. 어쩌면 그는 제 구실도 못하는 무능하고 이기적인 무화과나무를 사랑하고 있는 듯합니다.
"잘라 버리게."라는 말씀은 구약의 시간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줍니다. 참을 만큼 참은 주인의 결단입니다. 그리고 때가 차자 그동안 보내셨던 무수한 예언자들에 이어 마지막 해결책으로 당신의 외아드님을 보내신 것입니다. 그 외아드님이 "올해" 즉 일 년의 유예를 청한 것이고요.
일 년은 사실 딱 365일에 해당하는 일 년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우리와 시간의 길이 개념이 다른 주님께는 "천 년도 하루"(시편 90,4 참조) 같으시니, 사실 누구도 그 끝을 모르는 기간이라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이 유예는 주님께서 우리의 회개를 위한 집중 돌봄 기간으로 내어주신 것이지요.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는 심판과 구원의 얼굴이 동시에 들어 있습니다. 종말, 최후의 심판이라고도 불리는 "주님의 날"은 아무리 주님께서 사랑과 자비를 다해 기다려 주시며 시간을 늦추어 주신다 해도 언젠가는 반드시 오게 되어 있는 "때"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죄와 죽음의 법이 지배하는 육신을 지니고 살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로마 8,10)
죽을 운명을 지녔던 우리는 "당신의 친아드님을 죄 많은 육의 모습을 지닌 속죄 제물로 보내시어 그 육 안에서 죄를 처단하신"(로마 8,3) 하느님의 결단으로 생명을 얻어 살아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올해, 일 년의 유예는 시간만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우리를 위한 예수님의 모든 노력과 희생의 총량이기도 하지요.
"나는 악인의 죽음을 바라지 않는다. 악인이 자기 길을 버리고 돌아서서 살기를 바란다."(복음 환호송)
오늘 말씀들 안에 담긴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사랑 때문에 주저하고 인내하고 미루시는 그분의 기다림은 당신을 실없는 존재로 만들지라도 계속됩니다. 유예의 시간은 마냥 늑장을 부리라고 주어진 게 아니라 돌아설 기회를 부여받은 선물입니다. 그러니 시간이 주어졌을 때, 포도 재배인의 손길이 머무를 때, 주님을 바라보고 자신을 살피고 돌아서야 합니다. "그때"는 언제일지 모르나 반드시 맞이할 예약 확정 고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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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소보둥지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기회 포착>
'내년에는 열매를 맺겠지요
안그러면 잘라 버리십시오'
육에 관심자는 죽음이요
영의 관심자는 생명과 평화를 얻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가꾸며 사는 것의 유한성을
질책하시며 얼마나 더 기다려야 회개하겠느냐
물으십니다
기회를 자주 알아듣게 주시는데
육에 빠져 지내면 귓등으로 흘러버리고
계속 놓치게 되어 있습니다
주변에서는 다 알아채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살지요
기회는 또 다시 옵니다
그때를 잘 포착하고 놓치지 않으려면
성령을 향해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참는 것 기다림의 끝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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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루카 13, 5)
모든 것은
함께하기에
아름답고
기쁘고 소중합니다.
사랑과 용서가
우리 생명의
참된 회개입니다.
사랑과 용서
성찰과 실천
은총과 맡겨드림
없이는 회개로
나갈 수 없습니다.
단풍이 되어가듯
사람 또한 회개로
진정한 사람이
되어갑니다.
사람은 사랑으로
나가야 합니다.
사람이
회개합니다.
생명은 회개로
회개는 생명입니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우리 자신의
회개입니다.
회개는
생명의 하느님을
뜨겁게 우리가
만나는 것입니다.
살리시는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회개는 하느님을
따르기 위해
죄를 끊어버리는
결단과 봉헌입니다.
회개는 배워나가는
여정입니다.
어리석음과 교만
거짓과
욕망을 통해
회개를 배우고
삶의 가치를
배워나가는 것입니다.
회개의 본질은
하느님을 기쁘게
사랑하는 새로운
변화입니다.
사랑의
하느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오늘
되십시오.
서로를 살리는
회개의 주님을
진실로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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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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