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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교통발달사 3
고려의 교통 통신제도와 해상교역
역,봉수,마정,조운,조선술,교역
1. 고려의 건국과 경제 역사 이래 처음으로 주조화폐를 만들어 쓰다
고려는 국토의 중, 남부에 넓은 평야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했다. 삼면이 바다지만 수산업은 그리 발전하지 않았고, 대신 바닷길을 개척해 중국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활발히 교역했다. 농업 다음으로 경제를 뒷받침한 것은 상업이다. 무역 등 상업이 발전하면서 고려는 쇠 화폐도 만들어 썼다.
이밖에 상류층의 생활용품을 만드는 수공업과 배를 만드는 조선업도 크게 발달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고려의 건국
궁예가 세운 태봉국의 후예
고구려와 백제를 정복해 서기 676년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건국 후 700년 동안 전성기를 누렸지만 통일신라 후기로 들어와서는 왕권의 다툼, 귀족들의 정권 쟁탈전과 부정부패, 왕족들의 반란 등으로 통치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귀족과 사원의 승려들은 불법적으로 백성들의 토지와 재산을 강탈해 국민을 곤궁 속으로 몰아 넣었다. 재산을 빼앗긴 농민들은 유랑민이 되어 떠돌면서 신라 조정에 대한 불만을 키웠다.
그러다가 서기 889년 진성여왕 때는 재산을 몽땅 탐관오리들에게 빼앗겨 거지신세가 된 농민들이 설상가상으로 조세를 내라는 강압에 견디다 못해 폭발, 전국적인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이 틈을 타 지방의 세력가인 호족들이 자신들의 나라를 세울 욕심으로 소유하고 있던 사병(私兵)들과 불만에 찬 농민들을 규합해 여기저기서 신라조정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반란 속에서 세력이 가장 강했던 호족인 견훤은 후백제를 세우고 백제의 재건을, 애꾸눈 궁예는 태봉국을 세워 고구려의 재건을 노려 이른바 통일신라, 후백제, 태봉국 등 후삼국시대를 맞이했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은 경북 상주의 농민출신으로 후에 이 지방의 호족이 된 아자개의 아들로 태어났다. 체격이 크고 건장한데다가 무술이 뛰어났던 견훤은 젊은 나이에 농민봉기 때문에 혼란스러운 때 신라의 군인이 되어 서남해안을 지키다가 신라가 부패해 기울어지는 것을 보고 백제를 재건하려는 야망을 품었다.
견훤은 뜻을 이루기 위해 신라를 배반하고 그동안 키웠던 세력을 이용해 무진주(광주)와 완산주(전주)를 점령하고 서기 900년 완산주에 후백제를 세워 왕이 되었다.
궁예는 신라 제47대 헌안왕의 서자 출신이다. 후궁의 몸에서 태어나던 날 지붕 위에 상서롭지 못한 광채가 나타났다고 하여 왕이 ‘나라에 불길한 아이’라는 이유로 죽이려 하자, 하녀가 그를 구출해 도망하다가 잘못해 애꾸눈이 되고 말았다. 궁예는 그 길로 절에 들어가 승려로서 불도를 닦다가 청년이 되어 자신의 나라를 세울 야망을 품었다.
궁예는 우선 세력을 구축할 목적으로 서기 891년 죽주(경기도)에 근거지를 둔 도적의 괴수 기훤 밑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흉폭한 기훤에 실망을 느끼고 뛰쳐나와 북원(원주)의 괴수 양길 밑으로 들어가 신임을 얻으며 세력을 키웠다.
궁예는 양길의 후원으로 강원도 일대를 장악한 후 급기야는 양길까지 죽이고 서기 901년 철원에 후고구려를 세우고 임금이 되었다. 얼마 후 나라 이름을 태봉으로 바꾼 궁예는 세력이 점점 커지자 송악(개성)일대 황해도까지 차지했다.
이때 왕륭과 그의 아들 왕건이 궁예 밑으로 들어갔다. 왕건은 궁예의 대망인 고구려를 되찾기 위한 북벌과 신라정벌에 크게 활약해 궁예의 신임을 독차지했다.
왕이 된 초기 궁예는 적으로부터 빼앗은 재물을 국민에게 나누어주고 병졸들과 침식을 같이 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으나 자신의 눈을 애꾸로 만든 신라에 대한 적개심과 이로 인해 상처받은 자존심 등으로 고심했고, 이를 잊기 위해 다시 불교에 천착해 미륵이 된 후 미륵신앙을 이용해 독재정치를 펴기 시작했다.
이후 궁예는 날이 갈수록 의심이 많고 포악한 군주로 변해 많은 신하들과 왕비, 왕자는 물론 신라에서 귀순한 자들을 죽였다. 결국 궁예의 횡포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건국공신들이 들고일어나 덕망이 높은 왕건을 앞세워 1만 명의 군사로 왕궁을 포위했고, 궁예는 살기 위해 도망가다가 백성들에게 살해당하고 왕건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해상(海商)가문 출신의 고려 태조 왕건
왕건은 조상이 고구려민족이지만 남하해 예성강 근방의 송악에 정착했다. 해상무역으로 부호가 된 왕건의 아버지 왕륭은 이곳의 덕망 높은 호족으로 출세했다. 왕건은 소년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해상무역과 수군훈련을 받아 상인과 군인으로서 경험을 쌓았다.
왕건은 20세 때 궁예의 세력이 송학까지 밀고 들어오자 아버지 왕륭과 함께 살아남기 위해 궁예의 부하가 되었다. 이후 왕건은 중부와 서남해안 일대를 정복해 궁예로부터 신임을 크게 받으며 지위를 굳혔다.
왕건은 궁예를 위해 쉴새없이 전장을 떠돌았지만 궁예의 폭정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고 민심은 점차 왕건에게 돌아섰다. 이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개국공신 홍유, 신승겸, 복지겸, 배현경 등이 왕건을 앞세워 궁예를 몰아내, 왕건은 42세에 왕이 되었다.
서기 918년 왕위에 오른 왕건은 국호를 태봉에서 ‘고려’로 바꾸고 태조가 되어 왕도를 철원에서 고향인 송악으로 옮겼다. 태조 왕건은 곧 신라와의 유화정책, 지방 호족들에 대한 우대정책을 펴고, 농민들의 조세를 크게 감면하고 발해의 유민들 받아들이며 불교문화를 널리 보급하는 등 선정에 힘을 쏟아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왕건의 위대한 야망인 후삼국 통일에는 견훤이 걸림돌이었다. 초기에는 두 사람 사이가 우호적이었으나 호전적인 견훤이 얼마 안 가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왕의 구원군 요청을 받아들이면서부터 둘 사이가 벌어졌다.
이후 여러 차례의 영토 늘리기 전투에서 밀고 밀리다가 견훤이 왕건 제위 10년째 되던 서기 927년에 신라를 침입하자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에 구원을 청했다.
견훤은 고려군보다 한발 앞서 왕도인 금성(경주)을 함락해 경애왕 등 신하와 대신들을 살해하고 왕비까지 겁탈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왕건은 신라를 구하기 위해 친히 1만의 대군으로 출정했으나 대구의 공산(팔공산)전투에서 견훤군에 패전해 겨우 목숨만 구해 송악으로 돌아왔다.
이후 왕건은 호족들의 도움으로 군대를 다시 정비해 서기 929년 고창군(안동)전투에서 견훤을 물리치고 승전했다. 이를 기회로 왕건은 동해안 강릉~울산 일대에 있던 110개 성을 귀속해 세력을 크게 키웠다.
이어 견훤의 폭정 아래 꼭두각시노릇을 하며 겨우 연명하던 신라는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서기 935년에 고려로 귀순했고, 이에 따라 왕건은 후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지게 되었다.
한편 견훤은 왕자들간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분열이 일어나 세력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견훤이 총명한 넷째 아들인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 주려하자 위의 신검, 용검, 양검 세 왕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아버지 견훤을 금산사 절에 감금하고 금강을 살해해 버렸다.
얼마 후 목숨의 위험을 느낀 견훤은 금산사에서 도망 나와 왕건에게 귀순했다. 반역한 자식들을 없애달라는 견훤의 청을 받고 왕건은 군대를 이끌고 경북 선산군의 일리천 전투에서 신검의 군대를 물리쳐 서기 936년 드디어 후삼국을 통일한 뒤 6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태조 왕건이 사라진 이후 고려는 문종까지 160년간 호족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발전시키며 독창적인 번성기를 이루었다. 불교를
적극 도입해 불교문화를 꽃피웠고, 유교를 받아들여 사회의 기강을 바로 잡으면서 과거제도를 시행해 초기 무신정치에서 점차 문신정치를 펴나갔다.
그러나 문종 이후부터 여러 임금들이 나약하고 놀기 좋아하는 퇴폐적인 성향으로 변하자 왕권의 다툼, 권문 세도가들의 정권쟁탈을 위한 반란, 외척세력의 난무 등으로 정치가 혼란해졌고 문종 이후 집권자인 문신들로부터 괄세를 받던 무신들이 정권을 쟁탈하는 등 안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이렇게 혼란한 국내의 정치상황 속에서 성종 12년인 서기 993년부터 차례로 거란, 몽골, 일본해적인 왜구들이 계속 침입해 밖으로도 고통을 당했다. 특히 몽골이 후에 세운 원나라는 고종 18년(1231년)부터 40년간 고려를 침략하면서 갖은 횡포를 부려 내우외환이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국운이 기울자 최영, 이인임 등 강경한 혁명파 장군들의 세력을 업고 당대의 명궁 이성계 장군이 부패한 왕실을 몰아내고 정권을 잡아, 고려는 34대 475년만인 서기 1392년에 사라지고 조선이 그 뒤를 잇게 된다.
고려의 경제
고려의 국토는 함경남도와 평안북도 지역을 북쪽 경계로 하는 한반도 전부였다. 따라서 중부 이북은 산악지역이라 경제적 가치가 없었고 중·남부에 넓은 평야가 있어 이를 중심으로 농업이 발달했다. 삼면이 바다지만 수산업은 그리 발달하지 못했고 대신 바닷길을 개척해 중국 등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해외 무역을 활발히 했다.
나라의 살림을 운영하기 위해 거두어들이는 세금은 주로 곡물로서 조세라 했고 이를 위해 토지와 농업제도가 잘 발달했다. 다음으로 경제를 뒷받침했던 것은 상업이다. 상업은 국내의 시장보다 해외 여러 나라와 장사하는 무역이 활발했다.
고려의 발전한 항해술과 조선술을 이용해 중국,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 베트남, 태국, 또는 멀리 인도와 아라비아까지 왕래했다.
무역 등 상업의 발전으로 역사 이래 처음으로 고려는 쇠 화폐를 만들어 쓰게 되었다. 고려가 처음으로 쓴 화폐는 지폐가 아니라 쇠로 만든 주조화폐로서, 주로 국내 상업에 쓰였다. 이밖에 귀족 이상 상류층이 필요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수공업과 배를 만드는 조선업도 매우 발달했다.
농업
고려는 함경도와 강원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땅이 논과 밭을 만들 수 있는 경작지로서 농업이 발달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곡물을 재배할 수 있는 전국 농토의 크기는 50만 결이었다. 1결은 쌀 20석을 생산할 수 있는 면적으로, 연간 1천만 석의 곡물을 생산할 수 있는 넓은 농토다.
따라서 고려의 경제는 농업위주였고, 국가를 운영하는 세금도 곡물로 거두어들여 관리들의 녹봉은 물론 국가 기관을 운영하는 비용도 곡물로 썼다. 이렇게 국가의 경제가 농업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농업을 조직적으로 관리하는 전시과(田柴科)라는 토지제도가 생겨났다.
녹과전 또는 과전법이라고 불렸던 전시과는 귀족이나 관리들 또는 군인들처럼 나라를 위해 일하는 대가로 주는 급여인데, 각자의 지위와 충성 정도에 따라 응분의 농토나 산을 녹봉으로 나누어주는 제도다.
토지제도의 또 한가지로 수조권이라는 것이 있었다. 국가가 세금으로 농민들로부터 수확량의 1/10을 거두어들이는 권리를 귀족이나 관리들에게 위임하는 제도다. 이 제도는 세도가들이 갖는 특권으로서, 귀족이나 관료들이 농민들의 토지를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해 농민들을 괴롭혔다.
수조권 때문에 고려 때부터 농장이 많이 생겨났다. 수조권을 국가로부터 위임받는 왕족, 귀족, 관료나 사원이 농민들로부터 농토를 강제 매입하거나 곡물을 농민에게 빌려주고 높은 이자로 곡물을 받아내는 고리대곡, 농민을 동원해 강제로 개간시켜 착복하거나 세금을 내지 못하는 농민의 토지 몰수 등 악랄한 방법으로 토지를 넓혀 만든 농장들이었다.
이외에도 농민을 괴롭힌 것은 절이었다. 국가의 불교 보호정책으로 수조권을 가진 사원들이 절에 시주한다는 명목으로 신자나 농민들의 땅을 강제로 탈취해 재산을 늘려 대지주가 되곤 했다. 이런 토지제도를 악용한 권력층의 만행 때문에 서민들은 계속 빈곤을 면치 못했고, 세도가들은 부를 축적해 빈부의 차가 심했다.
상업
고려의 상업은 수도인 개경을 중심으로 해안도시와 지방의 교통요지에서 성행했다. 궁궐의 귀족과 관청의 관리 등 상류층의 수요품과 생활용품을 우선 공급하고, 백성들 사이에 물물교환을 하기 위한 목적으로 발전했다. 고려의 상업형태는 크게 국내의 도시상업과 지방상업, 그리고 해외 무역으로 나뉜다.
왕이 있는 개경을 중심으로 대도시에는 연립 점포로 형성된 시전상업이 발달했다. 특히 개경의 번화가인 광화문 거리에는 수많은 점포를 가진 상설시장이 열려 궁궐과 관청의 왕족이나 귀족들이 필요한 물품을 조달하면서 나라에서 조세로 거두어들여 사용하고 남은 잉여품들을 판매하는 어용상업이 번창했다고 <고려원경>에 기록되어 있다.
지방에는 교통요지마다 시장이 생겨 주변 농어민들이 곡물이나 옷감 등 생산품을 화폐로 거래하거나 물물교환했고, 이들 지방시장은 대개 5, 6일마다 한 번씩 열렸다.
특히 지방을 중심으로 이 시장 저 시장을 다니며 물품을 사고 판매하는 보부상상업과 강이나 하천을 통해 배를 타고 다니며 장사하는 선상(船商)상업이 고려 때부터 발달했다.
이런 행상상업(行商商業)에서 거래규모나 상품운반규모가 컸던 쪽은 선상이었다. 배를 이용하기 때문에 등짐이나 조랑말로 운반하는 보부상보다 많은 상품을 운반할 수 있어 돈도 훨씬 많이 벌었다.
고려 때 선상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가 하는 것은 1983년 완도 앞바다에서 발굴된 해저 유물선이 증명하고 있다. 이 배에서는 청자 등 상품이 3만여 점이나 발견되어 고려시대 선상들의 거래 규모를 짐작케 한다.
해외 무역은 조선시대 중엽 이전까지 어느 나라보다 활발했다. 조선술과 항해기술의 발달로 개경을 중심으로 서·남해안 도시에서 송나라·일본·요나라·금나라 멀리는 대식국(아라비아)·인도까지 활발하게 교역했다.
이렇듯 고려가 해외무역을 활발히 할 수 있었던 것은 태조 왕건의 뛰어난 해상무역 경험과 해전기술에다 많은 선박까지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태조로 등극한 이후 이런 해상 능력을 이용해 백제의 최대 국제항구인 전남 영상강변의 나주를 함락하고 영산강 수로를 장악해 고려의 무역이 해외로 활발하게 뻗어나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중기 이후 동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했고 한국 역사상 마지막 해상 왕국으로 부상했다.
고려의 해외 교역은 주로 왕실과 귀족 등 상류층을 위한 생활용품과 사치품 등을 수입해 공급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려는 특히 송나라와 무역을 활발하게 했다. 현종 때부터 260년간 무역을 위해 송나라를 왕래한 회수는 120여 회이고, 송나라 상인 5천여 명이 고려에 입국했다.
고려의 최대 국제항구는 개경 근방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였다. 이 항구가 대외무역 쪽으로 얼마나 번창했던지, 고려의 대학자이며 문신인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서 ‘조수가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배가 꼬리를 연이었다. 아침에 벽란도를 떠나면 한낮이 채 못되어 남방의 하늘로 들어가는구나’라고 했다.
주조화폐
고려는 상업의 발달과 함께 역사 이래 처음으로 주조화폐를 만들어 상업에 이용했다. 고려가 만들어 사용한 첫 화폐는 쇠로 만든 둥근 철전으로, 서기 996년 성종 15년부터 앞면은 ‘건원중보’, 뒷면은 ‘동국’이라는 글자를 새긴 주화를 썼고, 중국 당나라의 주화와 같다고 하여 얼마 후에는 이름을 ‘동국중보’로 고쳐 사용했다.
초기에는 주로 도시에서 썼고 지방에서는 여전히 쌀과 옷감을 화폐 대용으로 쓰다가 본격적으로 주화를 쓰기 시작한 것은 서기 1097년 숙종2년부터다. 이때 조정에는 주전관이라는 돈 만드는 부서가 설치되었고 은으로 만든 `은병` 돈을 만들어냈다.
고려의 지형을 본떠 만든, 쌀 15섬의 가치를 가진 8가지 주화가 쓰였지만 서민들은 사용할 수 없을 만큼 큰돈이어서 주로 귀족들의 축재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수공업
고려의 수공업은 농업만큼 발달하지 못했지만 주로 대도시를 중심으로 왕족이나 귀족 또는 관청에서 필요한 가공품을 만들기 위해 이루어졌고, 상업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고려의 수공업은 크게 관청수공업, 소수공업, 사원수공업, 일반수공업으로 나뉜다. 이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진 것은 관청수공업이다.
이는 다시 조정과 왕족 또는 귀족들이 필요한 무기, 생활도구, 사치품, 수레, 기구 등 관수품을 만들어내는 중앙관청수공업과 지방의 행정기관이 있는 도시에서 궁궐용 공물과 지방관청이나 관리들이 필요한 가공품을 만드는 지방관청수공업으로 나뉘었다.
지방관청수공업은 다시 금기방, 잡직방, 갑방 등으로 세분화되었고, 중앙관청수공업보다 규모가 작았으며 무기 등 중요한 가공품은 만들 수 없었다.
중앙관청수공업은 개경의 중앙관청 내에 설치되어 각 전문분야별로 14개의 소수공업관청이 있었다. 이들 14개 부서에서는 군수품과 국가행사에 필요한 물품 또는 왕족과 귀족들의 옷·장신구 같은 필수품, 사치품들을 주로 만들었다.
관청수공업에는 나라에서 최고의 분야별 전문기술을 가진 공장들이 소속되어 있었고, 공장들은 기능별로 세분화되어 각자 특기에 맞는 물건들을 만들어냈다. 특히 철분을 함유한 청록색 또는 담황색 유약을 입힌 고려의 청자는 세계적인 자기예술품으로 유명하다.
청자는 원래 중국의 은나라 때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해 당과 송나라 때 매우 발달했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초기에 제조기술이 들어와 고유의 자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독창적인 기술과 갖가지 형태의 무늬로, 고려청자는 세계적인 예술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청자 중에서 자기에 자개를 파묻어 무늬를 낸 12세기 후의 상감청자를 최고품으로 치는데, 이 청자들은 상류층 귀족들이 주로 썼고 무역상품으로 많이 거래되었다.
소수공업은 수공품을 만들 수 있는 원료, 즉 철·금·은·동·종이·기와·소금 등의 소재를 만드는 분야였다. 철소, 금소, 은소, 동소, 염소, 와소, 탄소 등 전국에 분포된 생산지에 공장을 세워 만들어낸 소재들을 중앙정부와 지방관청에 납품하고, 남은 물건들은 시장을 통해 백성에게 판매했다.
원수공업으로 불리기도 하는 사원수공업은 절에서 필요한 물건을 승려나 신도들이 만드는 것을 말하는데, 주로 옷감, 술, 기와, 소금 등을 생산해 절에서 쓰고 잉여품을 일반백성들에게 팔았다. 고려 중기 이후에는 사원공업이 왕성해져 지방 시장을 거의 독점한 때도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반수공업은 가내수공업이라고도 한다. 일반인들이 농한기나 여가마다 옷감, 약제, 건어물, 육포, 가죽 등 비교적 만들기 쉬운 생활품을 만들어 관청이나 상류층에 공급하거나 시장을 통해 판매했다
2. 고려의 육상교통 22개의 역로망 완성하고 장승을 이정표로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군사용 도로를 많이 개척했다. 고구려나 백제, 신라가 이미 만들어 놓은 길도 이용하면서 고려의 목적에 맞는 군사용·경제 유통용 도로를 다시 다듬고 뚫었다. 삼국시대부터 각 지방으로 연결되는 길을 뚫고 나면 행객들이 쉬어가도록 가로수를 심었다.
장승을 이정표로 쓰도록 한 사람은 임금에게 역의 기능을 되살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던 조 준이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도로로 이어진 고려의 행정구역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신라와 후백제를 통합하기 위해 군사용 도로를 많이 개척했다. 물론 앞선 고구려나 백제, 신라가 이미 만든 길도 이용하면서 고려의 목적에 맞는 군사용·경제 유통용 도로로 다시 다듬고 뚫었다. 이 길을 거쳐 군대를 파견하고 전쟁 노획물이나 지방의 생산품을 개경으로 빠르게 운반했다.
태조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해 국토가 한반도 전역으로 넓어지자 가장 먼저 행정구역을 개편했다. 전국을 양광도·경상도·전라도·서해도·교주도 등 5도(道)로 나누고, 개경(개성)·서경(평양)·동경(경주) 등 거대 도시는 3경으로 편성했다. 그런 다음, 5도의 각 지방행정 중심지를 연결하는 국도(國道)를 정비하기 시작했다.
서기 980년 경종 대에는 전국을 더욱 일사불란하게 통치하고 중앙정부의 왕명과 물자와 사람의 소통을 쉽고 빠르게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전국에 12목(牧. 광주·양주·충주·청주·나주·승주·상주·진주·황주·해주·전주)을 설치하고, 그 아래에는 마을의 크기기에 따라 주(州)·군(郡)·현(縣)을 각각 두었다.
그밖에 국방을 튼튼히 하기 위해 군사적 요충지인 안북(안주)·안변(영흥)·안동(김해)·안남(영암) 등 네 곳에 도호부도 만들었다. 이어 서기 995년 성종 14년에는 전국을 10개 도(방도·관내도·중원도·하남도·영남도·강남도·산남도·해양도)로 나눴다.
고려의 행정조직인 3경 10도 12목 4도호부는 지금의 국도에 해당하는 22개의 역로(驛路)로 긴밀하게 이어졌다.
고려시대 완성한 22개 역로망
성종 때에 역로라는 이름을 얻은 22개 국도는 국가의 기간 정보망으로 가치가 있었고, 이와 함께 민간경제유통을 위한 주요 교역로 역할도 했다. 중앙집권제와 지방통치제도가 확립되면서 전국을 연결하는 국도 22곳에는 곳곳에 역(驛)을 설치했다. 역은 모두 525곳으로, 각 주(州)에 속한 역로를 관리하도록 했다.
고려의 역로는 지형에 따라 분리되어 있었다. 따라서 나라안의 전 역로가 하나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 까닭은 강과 높은 산들 때문이다. 이때만 해도 강에 다리를 놓거나 높은 산에 굴을 뚫을 수 있는 기술도 없었을 뿐더러, 그 비용을 충당할 재정도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22개 역로는 수도인 개성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이 뻗어 나갔다.
금교도(金郊道): 개성에서 황해도 중부를 관통해 곡산까지 연결하는 도로인데 이 사이에는 정류장 격인
16개의 역참(驛站)이 있었다.
산예도( 猊道): 개성에서 황해도 서남해안을 따라 해주를 거처 옹진을 연결하는 도로인데 10개의 역참
을 두었다.
도원도(挑源道): 개성을 출발해 장단∼철원∼평강을 거쳐 회양까지 연결하는 도로인데 21개의 역참을 두
었다.
청교도(靑郊道): 개성으로부터 장단∼파주∼고양∼양주를 거처 서울을 지나 인천까지 가는 도로인데, 이
사이에는 15개의 역참을 두었다.
파령도(巴領道): 황해도 황주군의 자비산 고개에서 황주, 중화를 지나 평양에 이르는 길로서 11개의 역
참이 있었다.
흥교도(興郊道): 평남의 영변에서 박천∼순안∼평양을 지나 용강까지 가는 길로서 12개의 역참을 두었
다.
흥화도(興化道): 평북 서해안 박천에서 선천∼의주를 거쳐 삭주까지의 길로서 29개의 역참을 두었다.
운중도(雲中道): 평양에서 동북부의 순천, 개천, 운산을 지나 창성에 이르는 길과, 회천에서 맹산을 거쳐
원산까지의 길로서 이 두 역로에는 43개의 역참을 두었다.
삭방도(朔方道): 함남의 영흥에서 원산∼안변을 지나 강원도의 고성에 이르는 길로서 42개의 역참이 있
었다.
평구도(平丘道): 서울에서 경기도 여주∼원주∼충북∼충주∼제천∼영월까지의 길과, 제천 에서 단양∼영주∼
봉화까지의 길로서 이 두 길에는 30개의 역참을 두었 다.
춘주도(春州道): 서울에서 양주∼포천∼가평을 거쳐 춘천까지의 길과, 춘천에서 홍천을 지나 횡성에 이르
는 길로서 24개의 역참을 두었다.
명주도(冥州道): 강원도 양양에서 강능을 지나 삼척, 울진까지의 길로서 28개의 역참을 두었다.
광주도(廣州道): 서울에서 과천∼이천∼장호원∼충주를 지나 연풍에 이르는 길로서 15개의 역참을 두었
다.
충청주도(忠淸州道): 수원에서 전의∼공주∼부여에 이르는 길과, 수원에서 죽산∼진천∼청주를 지나 문의
까지의 길, 그리고 수원에서 아산∼예산∼홍천을 거쳐 해미까지의 길로서 34개의 역참이 있었다.
전공주도(全公州道): 전주에서 공주까지의 길로 21개의 역참이 있었다.
승라주도(昇羅州道): 전남 나주를 중심으로 전남지방에 분포된 역로인데 30개의 역참을 두었다.
산남도(山南道): 전북 전주에서 진안을 거쳐 경남의 거창∼협천∼진주까지의 길로 28개의 역참을 두었
다.
남원도(南原道): 전북의 임실에서 남원과 전남의 구례, 곡성을 지나 순천까지의 길로 12개의 역참을 두
었다.
경주도(慶州道): 경북 경주에서 영천을 거쳐 대구까지의 길과, 경주에서 영덕 평해까지 연결되는 길로
23개의 역참이 있었다.
금주도(金州道): 경북 청도에서 경남의 밀양∼김해∼언양을 지나 울산까지의 길로서 31개 의 역참을 두
었다.
상주도(尙州道): 경북 문경서 예천, 상주를 지나 선산까지의 길인데 25개의 역참이 있었다.
경산부도(京山府道): 경북 김천을 중심으로 북의 영동, 옥천과 남의 성주 그리고 상주를 지나 보은까지
연결하는 길로서 25개의 역참을 두었다.
역로의 관리제도와 역의 임무
고려의 역로에 관한 모든 의무를 시행하고 관리하는 최고부서는 지금의 행정자치부와 비슷한 상서성(尙書省) 아래의 병부(兵部)에 속한 공역서(供驛署)였다. 공역서는 전국 22역로와 여기에 설치된 525역을 비롯해 각 역에 종사하는 역원들을 관리했다. 이런 모든 업무는 지금의 감사격인 역승(驛丞)이 총괄했는데, 모든 역원들에게 암행어사 같은 무서운 존재였다.
각 역에는 역의 우두머리인 역장이 있었고, 그 밑으로 문서정리와 인원·말의 보충을 담당하는 역리(驛吏), 그리고 말이나 발로 뛰어 다음 역으로 관청의 문서를 전달하는 역정(驛丁)이 있었다.
가장 힘든 일을 많이 하는 역정은 ‘육과채계’라는 제도에 따라 국토방위와 행정상 중요한 지역을 연결하는 역로에 더욱 많이 배치되었다. 왕도인 개경과 서경(평양)을 연결하는 역로에 설치된 1과 역들에는 역마다 역정을 75명 배치했고, 북쪽 국경지역 역로의 역들은 2과 역으로 취급해 역정을 60명씩 두었다.
3과역인 동해안쪽 역들은 45명, 개경∼철원∼통천을 잇는 4과 역들은 35명, 철원∼횡성 사이 5과 역에는 역정이 12명이었고, 횡성∼강릉을 잇는 6과 역에는 역정을 7명씩 배치했다. 각 역에서는 역로를 오가는 조정의 출장을 관리하고 외국 사신들을 위한 말을 빌려주거나 숙식을 맡았다. 또한 자기 역에 도착한 왕명이나 공문서를 다음 역으로 재빨리 전달하는 것도 중요한 임무였다.
역에서 여행자에게 말을 빌려주는 데에는 처음에 엄격한 구분이 있었다. 원종 15년(1274)에 규정한 기준을 보면 2품 이상의 관리는 여행기간 동안 말을 10마리까지 빌려서 바꾸어 탈 수 있었다. 3품 벼슬아치는 7마리, 하급 관리는 한 마리를 빌릴 수 있었다.
그러나 나중에 역마제도가 문란해져 허가 없이 관리의 식구들이나 역원들이 역마를 마음대로 타고 돌아다녔다. 이를 막기 위해 충렬왕 2년(서기 1276년)에는 역마를 이용할 수 있는 허가증인 포마차자(鋪馬箚子)를 발행하는 차자색(箚子色)이라는 관청을 두어 엄격히 관리했다. 그래도 제대로 지켜지지 않자 충렬왕 4년(1278)에는 국왕이 직접 차자를 내려주기도 했다.
역을 통해 중앙정부와 지방행정기관 사이에 왕의 명령이나 지방수령들의 보고서들을 전달하는 데에도 엄격한 규정이 있었다. 왕의 명령서나 중앙관청의 공문서는 가죽 주머니에 넣어 역정이 릴레이식으로 다음 역으로 말을 타고 신속히 전달했다. 공문서 전달을 하지 않거나 게을리 하는 역정은 감독인 역승이나 그 역의 우두머리인 역장이 그 이유를 밝힌 다음 엄한 벌을 주었다.
공문서는 중요성과 시급함에 따라 전달하는 방법이 달랐다. <고려사>에는 현령전송(懸鈴傳送)과 피대전송(皮袋傳送) 두 가지 방법이 나온다. 피대전송은 보통 공문서를 가죽 주머니에 넣어 보통 속도로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령전송은 특급 공문서를 가장 빠른 속도로 전달하는 방법이다.
현령전송도 세 가지로 나뉘었다. 가장 급한 3급은 가죽주머니에 방울 3개를, 다음으로 급한 2급과 상대적으로 덜 급한 1급은 각각 방울 2개, 1개를 달았다. 그런 다음 말에다가 현령이라 쓴 깃발을 달고 역에서 역으로 번개같이 전달했다.
그런가 하면 오가는 역로의 거리도 등급에 따라 달랐는데, 현령전송을 예로 들어보면 낮 시간이 긴 2월부터 7월까지는, 3급은 6개 역, 2급과 1급은 각각 5개 역과 4개 역을 하루 동안 달리도록 했다. 역간의 평균 거리가 30리였기 때문에 가장 급한 3급 공문서는 하루에 180리를 이동한 셈이다. 또한 낮 시간이 짧은 8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는 3급은 5개 역, 2급과 1급은 각각 4개 역과 3개역을 하루에 달려 전달토록 했다.
역의 운영 방법
역을 운영하는 데는 돈이 필요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조정에서는 역의 인원과 운영 규모에 맞는 ‘공해전’이라는 농토를 지급했다. 역은 국가로부터 받은 공해전으로 농사를 지어 수확한 농산물을 이용해 역을 운영했다. 각 역에서 일하는 역원들의 보수와 출장관리들에게 식사를 대접하거나 역마를 사들이는 일 등 역에 필요한 경비를 모두 공해전으로 해결했다.
역에서 일하는 역원들과 이들의 식구를 ‘역민(驛民)’이라 불렀는데, 보수로 받는 공해전에서 나온 농산물도 역 운영과 역민들의 생활에 다 쓸 수 없었다. 더구나, 국가는 공해전을 지급 받는 역민들로부터 곡물을 세금으로 받아들였다.
이래서 외국사신이나 관리들이 빈번하게 내왕하는 역로의 역민들은 이중부담을 지고 혹사를 당했다. 게다가 조정이나 지방의 권문세도가들이 공해전이나 농산물을 강탈하는 일도 많아 이중삼중으로 역민들은 고통을 당했다.
고려는 국가가 설치한 국영 역 말고도 전국 각 사찰에서 민간인들의 왕래가 빈번한 역과 역 사이에 역과 비슷한 원(院)이라는 민간용 쉼터를 세웠다. 이곳은 주로 상인들과 신도들의 식사와 잠자리를 제공했는데, 나라의 허락을 받고 설치해 사찰에서 관리했다.
원은 백성들의 침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사찰에서 생산한 농산물이나 가공상품들을 판매 거래하는 유통거점 역할도 같이 담당했다. 신도들이 절을 찾을 때에 침식을 제공하기 위해 세운 것이 차츰 상업화되어 고려 후기에는 국영 역과 같은 기능을 하게 되었다.
고려 말기에는 왜구들이 세곡선(稅穀船)과 세곡창고를 자주 약탈해서 바닷길로 개경까지 세곡을 운반하는 데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자 정부는 육지로 수송하도록 대책을 마련했다. 공민왕 5년(1356년)에 전국 각 조창에서 개경으로 세곡을 수송하는 도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원관(院館)을 설치해 세곡 수송을 돕도록 했다.
이때 조정에서는 경비를 줄이기 위해 사원에서 민간용으로 설치한 원을 많이 활용했기 때문에 원의 기능이 한층 강화되었다. 하지만 수많은 산과 강이 가로막은 험한 역로들이 많아 세곡 수레가 개경까지 제대로 갈 수 없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최초의 가로수와 역로의 폐단
삼국시대부터 각 지방으로 연결되는 길을 뚫고 나면 행객들이 쉬어가도록 가로수를 심어 조경을 했다. 고려 제6대 성종 때(960)에는 서울에서 경상도, 전라도로 내려가는 삼남대로 (三南大路)나 평양, 의주를 거쳐 중국으로 들어가는 서북로, 강원도를 거쳐가는 동북로 등의 중요 역로에 가로수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의 가로수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요즘 TV드라마로 인기를 끌고 있는 ‘무인시대’에 나오는 이의민도 한몫 거들었다. 고려 19대 명종 때(1170)부터는 백성들도 역로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나라의 업무를 총괄하던 관청인 중서문하성의 총책임자인 이의민이 본격적으로 길가에 버드나무를 심게 했다. 그 뒤부터 사람들이 그를 ‘새길(新道)재상’이라 불렀다고 한다.
고려중엽으로 들어서면서 역로 주변의 마을이 피해를 입게 된다. 그래서 생겨난 말이 ‘노방잔읍(路방殘邑)’이다. 역로 가에 있는 읍이나 성은 높은 벼슬아치들의 갈취 때문에 망한다는 뜻이다. 이와 함께 역민들이 관리들의 행패 때문에 견디지 못하고 없어지거나 도망가버려 역로 제도가 황폐해지기 시작했다.
조정의 관리들이 오갈 때에는 ‘노문(路文)’이라는 공문서를 역이나 읍·군으로 띄우면서 말과 관리들의 식사를 대접하는 의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런데 높은 관리 한 사람이 오면 그에 딸린 종이나 가마꾼 같은 수행원들이 자그마치 몇 십 명씩 따라붙는다.
이 사람들을 모두 대접하다 보니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었다. 이런 까닭에 역로 주변의 백성들은 멀리 떠나버려 읍이나 성이 계속 사라져갔다. 이를 보다 못해 문신 조 준이 임금께 역호를 다시 살려야 한다는 취지로 상소를 올리기도 했다.
최초의 도로 표지인 장승의 등장
장승은 고조선 초기의 부락사회에서 생겨나 고려시대 후기까지 잡귀, 전염병, 재앙을 막아 마을을 평화롭게 만드는 신앙적인 상징이었다. 풍수지리적으로는 마을의 허약한 부분을 보호해 태평하도록 만드는 ‘비보(裨補)기능’으로 쓰기도 했다.
장승을 이정표로 쓰도록 한 사람은 앞에서 임금에게 역의 기능을 되살려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것으로 유명한 조 준이다. 그는 공양왕 때인 1390년경 고려의 문신으로서 왜구토벌에 공을 세우고 부원군이라는 최고 벼슬까지 지냈다. 토지제도에 해박했던 그는 토지제도를 개혁시킬 때 우역제도를 더욱 발전시킬 목적으로 장승을 이정표로 쓰도록 했다.
이때부터 전국 국도 22곳에 설치된 역마다 ‘지로(指路)’라는 길 안내 팻말이 세워졌다. 또한 각 역로가 지나는 마을에는 입구에 반드시 장승을 세우도록 했다. 장승에는 거리를 안내하는 이정표를 기록해 다음 마을의 이름과 그곳까지 가는 거리를 표시하도록 했다. 이것이 도로 행선지 표지판의 시초라고 하겠다.
3. 고려의 수레와 수상교통 바닷길 따라 멀리 아라비아와도 교역
고려는 왕·귀족용 수레와 검차를 만드는 담당기관을 개경에두었다. 초기에는 14개 중앙 수공업 관청 중봉거서에서 수레를 전문적으로 만들었고 중기부터는 중앙행정조직의 하나인 ‘공부’가 수레의 제조, 관리, 수리를맡았다.
한편 고려는 마정제도를 두어 중요 교통수단이었던말의 관리를 체계화하고 봉수법도 정식으로 제도화했다.내륙 수상교통은 ‘조운’과 ‘상업’에 힘입어 발전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삼국의 영향을 받은 고려 초기의 수레
삼국시대 때만큼 활발한 것은 아니었으나 고려는 초기인 태조 때부터 삼국통일을 한 후 성종 때(990)까지 70년간 수레를 많이 사용했다. 백제·신라가 삼국시대에 개척한 수레용 도로들이 그대로 있고 삼국통일을 위한 전쟁에 수레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초기 수레에 대한 기록은 사기 여러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정인지가 쓴 <고려사>를 보면 태조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한 판 전투를 치른 후 견훤이 쓴 화해의 편지를 인용한 구절이 있다. ‘처음에 그대가 나를 경시하여 돌진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매미와 사마귀가 수레바퀴를 막아서는 것과 같았으며……’.
<고려사>에는 태조 18년인 서기 935년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기 위해 신라의 왕도인 경주를 출발해 개경으로 들어올 때 향나무로 만든 수레(香車)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나 뻗쳤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같은 기록을 보면 신라가 멸망할 때까지 수레를 얼마나 많이 사용했는가 알 수 있다.
견훤이 경주를 함락하고 신라왕과 신하, 관리들을 죽인 후 궁궐을 불태우고 궁녀들과 많은 재물을 약탈해 수많은 수레에 싣고 후백제의 수도인 부여까지 갔다는 기록도 있다. 견훤은 신라에서 수레까지 탈취했던 것이다. 이처럼 삼국시대에 가장 발달했던 신라의 수레들은 후백제와 고려로 들어가 두 나라 수레 교통에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생각된다.
서기 990년 10월 제6대왕인 성종이 서도(황해도)를 순찰할 때, 길가에는 농민과 관리들이 나와 왕이 탄 수레 앞에서 절을 하고 춤을 추었다. 또 현종 13년(1021)부터 정종, 문종, 선종 5년(1088)까지 거란(요나라)은 고려의 왕과 왕자를 책봉할 때 축하선물로 거란의 수레를 꼭 보냈고, 선종 5년에는 무려 23대의 수레를 보낸 적도 있다. 15대 숙종은 1105년 10월 고구려 세조인 동명왕의 제사를 마치고 궁궐로 돌아오던 중 병 때문에 타고 있던 수레 안에서 52세로 죽었다. 이후 고려사 등 사기에 수레에 대한 기록이 점차 사라진 것을 보면 고려 중기에 들어서면서 수레의 사용이 부진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수레가 쇠퇴한 이유
고려의 수레가 쇠퇴한 이유는 우선 외적의 침입 때문으로 보고 있다. 서기 990년 성종 때부터 연속적으로 거란, 몽고, 왜구들이 침입하자 이들이 내륙으로 들어올 수 있는 역로들을 폐쇄하거나 더 이상 관리를 하지 않아 수레가 다닐 수 있는 길이 점차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의 이유는 초기 영토확장을 위한 전쟁을 치르기 위해 각 지역으로 신속히 군대를 파군할 수 있는 교통로가 필요해 길을 닦았으나, 후삼국을 통일해 전쟁이 없어지고 초기의 무신정치에서 문신정치로 변하면서 외방 정치보다는 내방정치로 돌아선 다음 권력다툼, 왕위쟁탈전 등의 권력층 부패로 역로의 관리가 허술해진 데 있다.
게다가 외적의 침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해안으로 향하는 역로를 차단하거나 백성들의 주거지인 부락을 외적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교통로를 차단하고 관리하지 않아 수레의 사용이 점차 줄게 되었다.
이렇게 외침과 내란으로 정치가 혼란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부락단위 자급자족의 경제로 바뀌면서 길의 필요성이 사라진 데다가, 고려 전국의 지세를 보면 산악지대가 많은 탓에 더 이상 역로를 개발하지 않아 수레가 전 국토를 달릴 일이 없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의 수레는 중기 이후 개경, 서경, 동경 등 대도시에서 쓰이거나 각 조창을 연결하는 평탄한 도로에서만 이용하게 되었던 것이다.
고려 수레의 모양
고려 수레에 대한 기록은 여러 사기에서 발견할 수 있으나 유물 등이 발견되지 않아 생김새를 확실하게 알 수는 없다. 따라서 신라나 조선 초기의 수레를 들어 짐작할 수밖에 없다. 수레를 많이 사용한 고구려, 신라, 백제를 통일해 이 세 나라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고려말기에 쓴 수레가 바로 조선 초기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왕과 귀족들이 타던 승용 수레는 신라의 수레와 비슷한 것이었지만 왕은 4륜 수레를 타고 주로 도로가 잘 다듬어진 도성 안에서 이용했다. 귀족들은 두 바퀴 수레를 탔을 것으로 보이며 왕이나 귀족의 수레는 지붕이 달린 것으로 수레 안에 걸터앉을 수 있는 의자가 설치되었다.
이들 귀족이 타는 수레는 품계에 따라 치장과 의자의 모양에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왕의 4륜 수레가 가장 호화롭게 꾸며졌으나 전국 22개 국도를 따라 지방을 순행할 때는 도성 안처럼 잘 다듬어져 있지 않고 험로가 많은 도로 탓에 2륜 수레를 이용했다.
서민들은 승용 수레를 탈 수 없었고 다만 화물 운반용 수레인 평차(平車)와 유형차(遊衡車)를 많이 썼다. 평차는 큰 바퀴가 짐 싣는 하대 위로 올라온 2륜 수레이고, 유형차는 작은 바퀴가 하대 아래에 달려있는 2륜 짐수레다.
이밖에도 여진의 해적이 침입했던 11세기 초, 이들을 격퇴하기 위한 전투에서 검차(劒車)라는 전차를 썼다는 기록이 〈고려사〉에 있다. 검차는 차체와 바퀴 살에 단검을 빈틈없이 꽂아 적의 접근을 막는 2륜 전차로 말이 끌었다고 한다.
고려는 왕·귀족용 수레와 검차를 제작하는 담당기관까지 개경에 두었다. 태조 왕건 이후 고려를 군사나 경제에서 부강한 나라로 만들기 위해 현종 대에서 문종 사이(992∼1032)에는 제도적으로 수공업을 발달시켰다. 개경에 각 전문분야별로 14개 부문의 중앙수공업 관청을 두었다. 이 관청들은 주로 왕과 귀족의 생활용품, 그리고 군수품과 국가행사에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었다.
초기에는 14개 중앙 수공업 관청 중 봉거서(奉車署)에서 수레를 전문적으로 만들어냈다. 중기에 들어와서는 나라를 운영하는 행정조직 6부 중에서 공부(工部)가 담당해 제조뿐만 아니라 수레의 관리, 수리까지 맡았다. 공부는 수레제조뿐만 아니라 22개의 국도와 교량의 신축, 개, 보수도 담당했다.
말을 관리하는 마정제도(馬政制度)
고려에는 교통수단의 주역을 담당했던 말을 정책적으로 관리하고 사육하는 마정제도가 있었다. 이 마정제도는 고조선시대에 생겼는데, 교통과 군사용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말을 정부에서 관장하는 것이었다. 고려시대의 마정제도는 중앙의 경우 마정 사무를 총괄하는 사복사(司僕寺)와 전목사(典牧司)를 두었고, 지방의 각 목장에는 말과 목장을 감독하는 목감(牧監), 말을 키우는 일꾼인 노자(奴子) 그리고 말을 지키는 간수군(看守軍)을 배치해 운영했다.
고려 의종 13년인 1159년에는 말의 사육방법을 과학화해 말과 소의 하루 사료 배급량을 규정한 축마우료식(畜馬牛料式)을 제정했다. 말 한 필이 필요한 1일분 사료를 말의 종류, 성격, 계절에 따라 품종과 양의 차이로 구분해 기르는 과학적인 목축기술을 갖추었다. 고려가 원나라의 정치적 간섭을 받게 되면서, 원은 일본 정벌에 필요한 말을 확보하기 위해서 충열왕 2년(1276) 제주도에 대규모의 목장을 몽골식으로 건설했다. 건설 후 몽고말과 사육 전문가인 목호(牧胡)를 파견해 본격적으로 방목했고, 공민왕 16년(1367)부터 말 생산에 종사했던 노자(奴子)의 명칭이 목자(牧子)로 바뀌었다.
고려 말에는 명과 원나라의 끝없는 말 조달 강요가 이어졌다. 고려는 원에 20여 회에 걸쳐 수만 두의 말과 소, 수십만 석의 사료를 바쳤고, 명에 3만여 필의 말을 35회에 걸쳐 보냈다. 이러한 상납은 원과 명나라 관계 정상화에 크게 기여했고 조선시대로 들어와서 말은 더욱 중요한 외교적인 가치와 위치를 차지했다.
고려는 전쟁용 말인 전마(戰馬), 임금이 타는 어마(御馬), 나라의 중요한 명령이나 지시를 지방관아에 전달할 때 역로에서 타는 말인 파부마(把父馬), 일하는 역마(役馬) 등 13가지 종류의 말과 3가지 종류의 소로 구분해 사육, 관리했다.
봉수법 통신을 제도화시킨 고려
옛날에는 국가의 위급상황이나 중요한 소식을 빨리 임금에게 알리는 급속 통신수단으로 횃불과 연기를 사용하는 봉수법(烽燧法)이 있었다. 즉 적이 국경을 넘어 침입해 오는 위급한 사정을 궁궐의 왕에게 전하고 국경의 다른 군사기지와 백성에게 알려 피난시키거나 군민이 합쳐 적을 격퇴하기 위한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했다.
밤에는 잘 보이는 횃불을, 낮에는 불보다 잘 보이는 연기를 피워 위급사항을 알렸는데, 수십 리의 일정한 간격으로 군사적으로 중요한 산 위에 봉수대를 만들어 봉수했고, 비나 안개, 구름 때문에 봉수로 연락이 불가능할 때는 봉수대를 지키는 봉수군이 발이나 말로 뛰어 다음봉수대로 연락했다.
봉수법은 중국 주(周)나라에서 제일 먼저 사용했고, 우리나라에서는 백제가 처음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 중 ‘백제본기’에 보면 기원전 9년인 온조왕 10년에 말갈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온조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봉현(烽峴)에 나가 공격했다는 기록과 서기 256년 백제의 고이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봉산성(烽山城)을 침공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봉화의 뜻을 가진 烽자가 자주 쓰인 것을 보아 봉수를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봉수를 사용했다는 확실한 기록은 <삼국유사> 중 `가락국기`에 있다.
봉수법을 정식으로 쓰기 위해 제도화시킨 것은 고려였다. 제18대 의종 때인 1149년 적의 침입을 긴급히 알리는 통신수단으로 봉수법을 제도화시키자는 서북병마사 조진약의 상소를 받아들여 법률로 정했다. 봉(烽)은 밤에 올리는 횃불, 수(燧)는 낮에 올리는 연기를 뜻한다. 이 제도에 따라 밤에는 불빛을 낮에는 연기를 사용하기로 정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봉수법의 기본인데, 1급인 평상시에는 1홰를, 2급인 변방이 위급할 때는 2홰를, 3급인 적이 침입해 전투가 임박했을 때는 3홰를, 4급인 적과 전투가 벌어졌을 때는 4홰를 올렸다.
각 봉수대에는 4개의 봉수를 올리는 큰 화로가 설치되어 있고 화로 한 개를 1홰로 정했다. 그러니까 가장 위급한 4급 때는 화로 4개에 전부 봉수를 올린 것이다.
<중헌문헌비고>를 보면 봉수대에는 책임자격인 방정(防丁)이 2명, 불을 지피거나 연락하는 일을 하는 사병인 백정이 20명씩 배치되어 있었다. 봉수대 관리병들의 녹봉과 운영비는 농가 1가구 당 경작할 수 있는 농지 면적인 평전 1결씩 국가가 지급해 여기서 생산되는 농산물로 대신하도록 했다.
조운(漕運)이 번창시킨 내륙 수상교통
고려의 내륙수상교통은 세곡미(稅穀米)를 개경으로 운송하는 조운(漕運)에 힘입어 발달했다. 전국에서 거두어들인 세곡미를 임시로 보관하는 창고인 13곳의 조창(漕倉)이 정식으로 세워지기 전에는 서남해안과 내륙강변의 포구 60여 곳이 세곡미를 모아두는 집산지 역할을 했다.
한강, 금강, 영산강, 섬진강, 낙동강 등 내륙에서 흐르는 큰 강변의 많은 포구들에는 인근 지역의 세곡미가 소와 말 또는 수레나 소에 실려 운송, 보관되었고 이 세곡미는 지정한 날에 강선(江船)에 실어 개경의 국가창고로 운반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초기의 원시적인 조운은 시간과 세곡미의 낭비가 심해 거두어들인 세곡미를 빠르고 온전하게 국가창고로 입고시킬 수 없었다. 이에 따라 서기 983년인 성종 2년 고려는 조운제도를 개혁해 서남해안과 내륙강변에 13곳의 국가창고인 조창을 설립하고 세곡 전용수송선을 사용하는 세곡미 관리제도를 만들었다.
고려는 국민이 국가에 바치는 세금을 쌀·보리·콩·조 등 곡물로 대신했다. 이런 많은 세곡미를 육상으로 수송하는 것보다 강이나 바다로 수송하는 것이 빠르고 안전해 내륙 수로 교통이 비교적 발달했지만 강선들이 쉽게 다닐 수 있는 큰 강만 수상교통이 원활했다.
13개 조창 중 서남해안에 세운 창고를 해창(海倉), 강변에 세운 것을 강창(江倉)이라 불렀으나 강창은 한강 상류 원주의 흥원창과 충주의 덕흥창 두 곳뿐이었고 나머지 11개창은 서해와 남해안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조운 때문에 내륙 수운교통이 가장 발달한 곳은 한강이었고 나머지 큰 강들은 서민들의 상업 덕에 발달했다.
고려 때 행상(行商)은 육로를 이용하는 보부상과 강이나 바닷길을 이용하는 선상(船商)이 있었다. 강을 이용하면 단번에 많은 상품을 빠르게 수송할 수 있어 상인들은 내륙수상교통 발달에 큰 역할을 했다.
배가 다니기 쉬운 서해와 남해안에 설치한 11곳의 해창은 황해도 장연의 안란창, 아산의 하양창, 서산의 영풍창 임피의 진성창, 부안의 안흥창, 영광의 부용창, 해릉창, 영암의 장흥창, 승주의 해룡창, 사천의 통양창, 창원의 석두창 등이다.
고려는 각 조창에 전속 선박을 배치해 세곡미 수송을 엄격히 관리 통제했다. 내륙 2개 강창에는 200석 운반용 평저선 20척을 덕흥창에, 21척을 흥원창에 배치하고 나머지 11개 해창에는 미곡 1000석 운반용 초마선을 각각 6척씩 배치했다.
이들 각 조창에 배치한 배들이 1개 선단으로 조직되어 세곡미를 수도인 개경의 중앙창고인 광흥창(좌창)과 풍저창(우창)으로 수송했다.
바다와 인연 깊은 태조 왕건의 가문
태조 왕건의 가문은 시초부터 당나라 그리고 바다와 관계가 깊었다. 2대 선조인 강충의 혼인설화를 보면 강충의 아들 보육은 딸이 둘 있었는데 큰딸이 어느 날 꿈에 오관산에 앉아 오줌을 누었는데 천하가 오줌으로 가득 찼다.
이 꿈을 좋은 태몽이라며 작은 딸 진이가 비단치마를 주고 샀는데, 마침 당의 왕자였던 숙종이 여행하다가 송악(개경)에 살던 보육의 집에 우연히 묵게되어 작은 딸 진이와 정을 맺어 낳은 아들이 왕건의 조부인 작재건이다.
작재건은 성장 후 아버지 숙종을 만나기 위해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가던 중 용왕을 괴롭히던 늙은 여우를 죽였고, 용왕은 대가로 동방의 왕이 되고 싶다는 작재건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그 대신 용왕의 딸과 결혼한 작재건은 네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인 용건(륭)이 꿈에서 만난 여인 한씨와 낳은 아들이 바로 왕건이라는 얘기다. 이 설화는 고려 의종 때 검교군기감이라는 벼슬을 했던 김관의(金寬毅)의 저서 <편년통록>(編年通錄)에 기록되어 있다.
설화이긴 하지만 어쨌든 왕건의 가문은 선대부터 바다와 인연이 깊었다. 신라말기에 크게 일어났던 해상 가문으로서 중국과 왕성한 교역을 펼쳤다. 무역은 물론 해적소탕 전투 경험도 풍부했다. 이런 환경에서 성장한 왕건은 어려서부터 무역과 해적소탕의 수군전에 가담해 바다 경험을 차분히 쌓아, 삼국을 통일해 고려를 건국하고 해상권을 장악하는데 큰 힘을 발휘했다.
고려가 처음으로 송나라와 해상교역을 한 것은 태조 17년 서기 934년 7월 고려 상선이 후당의 등주로 가서 거래를 시작하면서부터다. 같은 해 11월에는 고려의 사신이 정치적 친교를 맺기 위해 등주 지방의 행정부가 있던 청주로 갔다.
이후 현종 3년(1012)부터 송나라와 본격적으로 민간교역을 시작했고, 전성기를 맞았던 충열왕 4년(1278)까지 송나라 무역선이 126회나 고려에 왔다는 기록이 <고려사> 중 ‘세가’에 있다. 매회 평균 50여 명의 선원이 타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송나라 무역선은 상당히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송나라 진출에 이어 고려는 초기에 이미 오월, 남한 등의 남중국 여러 나라는 물론 멀리 인도양까지 나아가 인도, 대식국(大食國, 아라비아)과도 교역했다
4. 고려의 국제 해상교통 선대의 항해기술을 이어받아 더욱 발전시키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치·문화·상업적으로 활발하게 교류했다.따라서 항해술도 두 나라의 우수한 부분을 서로 도입하며 발전해나간 것으로 보인다. 고려는 계절풍을 이용해 중국을 오가고 선박의 속도를 높이는 방법을 개발했다.
지리와 나침반 등 항해장비나 별·해·달의 이동을 측정하는 관측성항해법도 도입했다. 이 같은 항해술의 발달은 신라의 암해자, 발해의 천문생, 백제의해민들이 대거 고려 백성으로 유입된 데 힘입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삼국과 가야가 개척한 해로 이용
고려가 해상교통을 장악해 중국·일본·동남아, 아라비아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고려 이전 고대한국 여러 나라들이 개척해 놓은 해상교통과 항해술, 그리고 조선술(造船術) 덕분이었다.
금관가야국은 서기 48년경 인도의 공주를 김수로왕이 왕비로 데려올 때 바닷길을 이용하는 국제해로를 개척했고, 고구려의 광개토대왕은 친히 수군을 이끌고 4세기말 서해로 내려와 백제를 정벌해 황해의 뱃길을 개척했다. 백제는 삼국 중 가장 먼저 외국과 해상교류를 시작했고, 특히 일본에 백제 문화를 전하면서 한·일간 해상교통을 열었다.
신라는 통일신라 말기에 와서 해상왕 장보고가 중국·남지나·일본까지 해적소탕과 교역 등으로 활발히 진출했고 중국 산동반도와 서해남양만 사이 황해를 횡단하는 직항로를 개척했다. 발해는 동해 북쪽 훈춘에서 동해를 횡단해 일본에 도달하는 항로 개척에 성공했다.
고려는 이처럼 고대 여러 나라가 개척한 항로를 활용하면서 이를 토대로 해상 활동을 더욱 발전시켰다. 삼국과 발해가 개척한 해상교통로를 고려가 자연스럽게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통일 때 선대 4국의 항해·조선 기술자들이 고려 백성으로 유입되어 고려의 해상교통 발전에 큰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고려가 해상교통을 발전시키는 데 주역을 담당한 것은 지방의 세도가인 호족들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큰 강이나 해안 지역에 살면서 상선을 가지고 중국·일본 동남아 여러 나라들과 교역하며 부를 축적했고 이는 고려가 해상교통을 개척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운(漕運)제도가 발전시킨 해상교통
고려의 해상교통 발전에 또 하나 큰 도움이 된 것은 조운제도였다. 전국의 강과 해변에 설치된 13개의 조창 중 서해와 남해안에 주로 해창이 산재했는데, 고려는 해창에 입고된 세곡미를 개성의 중앙창고로 운송하는 해로를 개척하며 연안 해상교통을 발전시켰다.
각 조창에 배치된 세곡미 운송선인 초마선단이 개성까지 오가기 위해 개척한 해로 중에서 가장 멀리 위치했던 것은 남해안 창원의 석두창이었다. 여기에서 개경의 중앙창고인 광흥창과 풍저창까지 가는 해로는 남해와 서해를 통하는 바닷길로서 가장 길었다.
즉 경남 창원 석두창~한산도 해협~사량도~남해도 북방~전라 좌수영 남방~나로도 북방~완도 북방~보길도 북방~진도 북방~무안의 자라도 북방~임자도~지도해협~영광 법성진~옥구 서방~서천의 연도 동방~보령의 원산도 남방~서산의 안흥진 서방~당진의 대난지도 서방~월미도와 영종도 사이 해협~강화도~개경에 이르는 해로로서 돌아갈 때도 이 뱃길을 이용해야 했다.
그런데 이 해로에서는 해난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 미숙했던 항해기술과 간만의 차가 심하고 험한 바닷길 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태안반도의 안흥량(만리포) 앞바다에서 가장 많은 좌초 해난사고가 일어났다.
이곳은 수많은 작은 섬과 암초투성이의 복잡한 해안선이 있어 간만의 차가 어느 곳보다 심하고 파도가 험했다. 여기서 생긴 사고 때문에 세곡미 수송은 막대한 손해를 입었다.
이런 해상사고를 막기 위해 고려는 유사 이래 처음으로 태안반도에 남북으로 운하를 뚫고자 했다. 인종은 1132년 추밀원 지주사를 지낸 충신 정습명(鄭襲明)에게 안흥량 운하건설의 책임을 맡겼다.
어명을 받은 정습명은 수천 명의 군인을 동원해 공사를 시작했으나 워낙 단단한 암반이 많아 10리 정도 굴착하고는 더 이상 파낼 수 없어 인종12년(1134)에 공사를 중단하고 말았다.
그 후 고려 말기인 1388년 우왕14년에 정권을 잡은 이성계 장군은 조운제도가 쇠퇴해 국가제정이 어렵게 되자 조운을 다시 살리기 위해 안흥량 운하건설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조운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조운재활에 큰공을 쌓았던 삼도수군도체찰사 왕강(王綱)을 시켜 다시 땅을 파게 했다.
왕강은 태안반도의 서산 남쪽 천수만에서 서산북쪽 대난지도 해협을 잇는 운하를 남북으로 파서 험한 암흥량 바닷길을 피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암석투성이 바닥과 험한 조수가 공사를 방해해 운하건설 계획은 영원히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중국과의 해상교통
고려는 삼국을 통일하기는 했지만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의 땅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하고 함경남북도 북부 땅을 여진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고대로부터 중국과 정치 경제 문화적으로 교류해온 고려는 여진의 방해로 두 나라 사이의 육로교통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중국과의 교류통로를 황해를 건너다니는 해상교통으로 바꿔갔다. 백제와 신라가 개척한 중국해로를 사용하는 한편 삼국시대 때보다 한층 더 교역을 활발히 하고 여진·원나라와 해상전투를 통해 중국과의 해상교통을 더욱 발전시켰다.
특히 11세기 초부터 12세기 후반까지는 빠르고 가까운 황해횡단 뱃길을 통해 송나라와 활발하게 사신·문화 교류, 교역을 했다. 삼국시대에는 항해술이 미숙해 두 나라의 황해 연안을 따라 왕래를 했지만, 고려는 많은 희생과 시행착오를 겪으며 항해술과 조선술을 발달시킨 덕분에 새로 개척한 황해 횡단 직행 해로를 이용할 수 있었다.
고려 태조가 송나라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서기 1019년이었다. <고려사>를 보면 고려사신 호부시랑 최원신(崔元信)이 황해도를 횡단해 중국의 산동반도까지 큰 사고 없이 도착했으나 상륙 항구인 등주 앞바다에서 험한 풍랑으로 배가 난파해 일행 90명이 익사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기록을 보면 뱃길이 얼마나 험난했는가를 알 수 있다.
이후에는 계절풍을 이용해 황해 횡단 직항로를 오갔다. 고려에서 송나라로 갈 때는 늦가을에 부는 북동풍을 이용했고, 중국에서 고려로 올 때는 늦봄에 부는 남서풍을 탔다. 고려시대 중국과의 직항로는 크게 계절풍에 따른 네 가지 루트가 있었다.
첫째 해로는 개경에서 중국으로 가는 황해 중부 횡단 북해로인데, 개경의 벽란도항을 출발해 해주만을 지나 옹진반도로 북상한 다음 백령도에서 황해를 직선으로 황해를 횡단해 중국 산동반도 북해안의 등주항에 도착하는 길이다. 이 항로는 만 2일 걸렸는데 고려시대 전기에 사신들이 주로 이용하던 루트로서 늦가을에 부는 북동풍을 타면 비교적 쉽게 중국으로 갈 수 있었다.
이 루트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백령도가 황해 중부 횡단항로에서 중요한 등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고려로 돌아올 때도 남서풍을 타고 같은 해로를 이용했으나 백령도 북쪽 장산곶은 급하고 험한 파도 때문에 파선이 잦아 이곳에서 용왕에게 제사를 지내곤 했다. 이곳이 바로 심청전에 나오는 심청이가 공양미 300석에 몸을 던진 인당수다.
둘째는 개경에서 중국으로 가는 황해 중부횡단 남해로다. 개경의 벽란도항구를 출발해 경기만을 지나 북상한 다음 옹진반도 앞바다에서 서남쪽으로 비스듬히 황해를 횡단하면 산동반도 남쪽 청도만에 도착한다. 여기서 송나라 북방의 최고 무역항인 판교진(자오센)항구를 통해 중국으로 들어가면 된다. 이 해로는 늦봄에 부는 북동 계절풍을 타고 무역상들이 고려중기부터 주로 이용했다.
셋째는 동중국해 사단해로다. 이 뱃길은 중국에서 고려로 올 때 이용했다. 송나라의 최대 항구였던 명주(닝뽀)를 출발해 주산열도 앞의 보타도로 나와 비스듬히 사선으로 고려를 향해 북상한 다음 흑산도와 군산 앞바다의 고산군도를 지나 경기만을 거쳐 벽란도항에 도착하는 길이었다.
이 해로는 주로 남서 계절풍이 부는 늦봄에 중국서 출발할 때 이용했는데, 순풍일 때는 5일이나 걸렸지만 가장 안전한 해로였다고 고려를 다녀갔던 송나라 사신 서긍은 그의 고려여행기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기록하고 있다.
넷째는 황해 남부 사단해로로 고려에서 송나라의 명주 항구로 가는 바닷길이다. 북서계절풍을 타기 위해 주로 늦가을에 벽란도 항구를 출발해 황해 중부횡단 남해로를 이용해 청도만까지 건너가서 다시 중국해안을 따라 남하한 다음 주산열도에서 명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일본과의 해상교통
고려가 일본과 바닷길로 처음 교류한 것은 태조 2년인 서기 937년이었다. 일본 사기인 <일본기략(日本記略)>을 보면 고려사신이 가지고 온 태조의 편지를 일본 왕이 보았다는 기록이 있다. 이로부터 2년 후인 서기 939년에 일본의 태재부가 고려의 사신을 돌려보냈고 광종 25년(974)에 일본의 교역사가 고려에 입국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을 보면 고려가 건국 초기부터 일본과 해상교류를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와 일본간의 교역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은 문종 10년(1053년) 이후부터 나타난다. 일본 무역선이 처음으로 개경에 온 것은 문종 27년인 서기 1073년이었다. 이때 일본측은 상품을 진상하고 양국간 교역을 청했다. 이후 의종 때인 1170년까지 24회나 일본상선이 고려에 들어와 상거래를 했다는 기록이 <일본기략>에 있다.
고려에서 일본으로 갈 때는 3가지 해로를 이용했다. 첫째 해로는 경남 창원의 합포를 출발해 쓰시마를 거쳐 규수로 들어가는 길인데 주로 남해안의 상인들과 일본 원정군이 이용했다. 서기 1274년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일본정벌을 위해 원정할 때도 합포~쓰시마~규수해로를 택했다.
다음은 개경의 벽란도항을 출발, 서해안으로 남하해 제주도 해협을 지나 유구(오키나와)를 가는 뱃길로 고려사신들이 일본으로 갈 때 주로 이용했다. 오키나와행 해로는 태평양으로 흘러가는 쿠로시오(黑潮)해류를 타고 이어졌다. 가까운 동해 횡단길을 이용하지 않은 것은 계절풍이 부는 기간이 짧고, 약하거나 강해서 이용하기가 어려다가 동해 파도가 험하고 폭풍도 잦았기 때문이다.
고려의 항해술
고려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신라·백제·발해가 개척하고 발전시킨 항해술을 그대로 이어받아 왕성한 해상교류를 통해 더욱 발달시켰다. 고려인들은 해마다 12월에서 2월까지 북동쪽에서 남으로 부는 계절풍을 돛으로 이용해 중국으로 건너갔다. 962년부터 993년까지 중국으로 파견되는 견사들이 28회나 이 시기에 고려를 출발했다.
송나라 사신들은 고려로 올 때 남태평양에서 북쪽으로 5월과 8월 사이에 부는 남동계절풍을 많이 이용했다. 북송의 사신 서긍이 고려를 다녀간 후 쓴 <선화봉사고려도경>에 보면, 5~8월 사이에 부는 남동풍을 타고 명주를 출발, 주산군도 앞바다에서 사선으로 황해 남부를 횡단 북상해 개경의 벽란도항에 도착하는데 20일이 걸렸으나 상선(商船)은 순풍일 때 7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도 항해술에서 계절풍 이용이 가장 큰 몫을 차지했음을 알 수 있다.
5~8월 사이에 부는 남동계절풍은 풍향의 변화가 심해 고려에서 송나라 명주로 가는 시간보다 송나라에서 고려로 오는 시간이 훨씬 더 걸렸다. 이러한 어려움을 해소하고 속도를 높이기 위해 송나라와 고려는 역풍을 잘 이용할 수 있도록 무역선 돛의 구조를 개선했다.
이후 송의 명주를 출발해 동중국해를 사단(사선으로 비스듬히 횡단)하는데 2일이, 고려 개경의 예성강 입구까지 가는데 모두 4일이 걸렸다는 기록이 <송사> 중 고려조에 있다. 견사선(遣使船)보다 무역선의 속도가 훨씬 빨랐는데, 고려 후기에 들어와서는 중국과 고려 사이 바닷길이 빠르면 4일, 보통 7일이 걸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속도를 높이는 항해술도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송나라와 정치·문화·상업적으로 밀접하고 왕성하게 교류했다. 따라서 항해술도 두 나라의 우수한 부분을 서로 도입해 발전시켰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항해술에서 가장 중요했던 계절풍을 이용할 때 송나라 무역선은 돛을 조종하는 기술이 뛰어났다.
바람이 배 뒤쪽으로부터 불 때는 배가 전진하기에 가장 좋으므로 돛을 모두 올려 활짝 펴 빠르게 나아갔다. 항해하다가 바람이 일정하지 않을 때는 돛 양쪽에 달려있는 보조 돛인 뜸을 펼쳐 바람을 조절하고 키로 방향을 잡아 지그재그식으로 전진했다.
바람이 강하거나 약할 때는 돛 상단에 달린 풍향 조절용 돛 야흐범을 조종해 속도를 조절했다. 배가 전진할 수 없을 만큼 역풍이나 돌풍이 갑작스레 불어닥칠 때는 돛과 닻을 전부 내리고 배를 대피시켰다. 또 육지 가까이 급한 조류나 암초가 많은 해역을 지날 때는 돛을 내리고 노를 저어 전진했다.
이처럼 고려의 항해술은 발달해 있었지만 지금처럼 과학적 발달이 아닌 물리적 발달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변화무쌍한 바다의 불가항력적 돌풍이나 태풍, 산더미 같은 파도에 많은 배들이 파손되고 사람과 재물이 수장되는 해난 사고도 자주 있었다.
고려 말 정몽주가 명나라에서 귀국하던 길에 폭풍을 만나 배가 난파되어 표류하다가 간신히 목숨을 구하기도 했다. 이때 같이 갔던 10명의 사신 중 정몽주를 포함한 2명만 살아남았다.
계절풍을 이용하고 선박의 속도를 높이는 것만으로는 변화무쌍한 황해를 쉽게 건널 수 없었다. 이에 따라 고려는 지리와 나침반 등 항해장비를 쓰거나 별·해·달의 이동을 측정하는 관측성항해법도 이용했다.
관측성항해법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뱃길을 잘 아는 신라의 항해사인 암해자(暗海者)들과 달, 태양, 별의 이동을 나침반 등 기구로 관찰하고 측정해 항로를 바로잡는 발해의 천문생(天文生법), 그리고 배를 잘 조종할 줄 아는 선원인 백제의 해민(海民)들이 대거 고려 백성으로 유입된 데 힘입었다.
5. 고려의 조선술과 배의 종류 뛰어난 제작기술, 중국·일본에까지 알려져
고려 현종 3년부터 충렬왕 4년까지는 고려와 송나라가 가장 활발히 교류했던 시기로, 이 기간 동안 송나라 무역선단은 126회나 고려를 찾았다. 송나라는 당시 세계 최고수준의 해양선을 만들었고, 고려의 무역선은 송나라 배와 모양이나 구조가 비슷하지만 더 튼튼하고 빨랐다.
고려는 무역선 외에도 여러 종류의 배를 만들어 썼다. 크게 나누면 군선·조운선·무역선인데, 이 중에서 군선의 종류가 가장 다양했다.
전영선<한국자동차문화연구소장 kacime@kornet.net>
철갑 군선과 대형 과선을 만든 태조 왕건
통일신라시대부터 우리의 배는 중국과 일본에까지 튼튼하고 빠르기로 이름이 나있었다. 삼국시대 우리 고유 조선술에 송나라 조선술의 장점을 가미시켜 특히 고려 초기부터 군선(軍船)을 잘 만들었다.
서기 914년 왕건이 백제의 왕도인 나주를 공략하기 위해 100여 척의 군선을 건조했는데, 이 중 10척은 대형 군선으로 사방이 16보(길이 약 29m)이고 갑판 위에 전망용 누각(褸閣)과 노가 설치되어 있고 말이 달릴 수 있을 만큼 큰 배였다고 <고려사> 중 태조 편은 전하고 있다.
<고려사> 병지(兵志)에는 만주지역에 살던 여진족의 해적들이 10세기 말부터 동해로 내려와 고려를 침범 약탈하자 배 앞머리에 쇠뿔이 달린 철갑 군선인 과선(戈船) 75척을 만들어 1009년 원산만에서 여진해적선을 크게 쳐부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숙종 때인 서기 1105년 고려는 동해로 계속 침입하는 여진족을 물리치기 위해 진명(함남 덕원)과 원흥진(함남 정평)에 군선 조선소인 선병도부서를 설치하고 과선을 만들었다.
무신들이 정권을 잡았을 때인 12세기 초, 무신정권의 주력 부대였던 삼별초군이 정부에 반항하여 서기 1170년 삼별초의 난을 일으키고 새 정부를 세운 후 전라남도의 진도로 이동할 때 1천여 척의 배에 사람·재물·곡식을 싣고 갔다는 기록을 보아도 고려의 조선술이 상당히 발달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뛰어난 조선기술을 이야기할 때 고려와 몽고연합군의 일본 원정선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는 몽골의 28년간(1231∼1250) 침공에 대항하다가 굴복했고, 원종 9년(1268) 원(몽골)나라 세조 징기스칸은 화친을 거절하는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고려에 군선 1천 척을 만들어 바치라고 강요했다.
고려는 거절을 못하고 군선을 건조했고, 원나라 세조가 일본과 송나라 중 어느 나라를 먼저 칠 것인가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마침 고려에서 삼별초의 난이 일어났다. 삼별초군은 원의 요구로 만들어진 1천 척의 군선을 빼앗아 진도로 이동하는데 사용했다.
제1차 일본정벌이 무산되자 원나라는 두 번째로 900척의 일본 원정선을 만들어 바치라고 고려에 강요했다. 원종 15년(1274) 고려는 조선기술자와 일꾼 3만5천 명을 동원해 같은 해 1월부터 5월까지 만 130일만에 1천 석 적재용 대선 300척, 가볍고 빠른 중형군선 300척, 보급용 소형군선 300척 등 900척을 건조해 바쳤다.
원나라는 이 군선으로 고려와 송나라군사를 앞세워 처음으로 일본 정벌에 나섰지만 일본 규슈 앞바다에서 큰 태풍을 만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충렬왕 7년(1281) 원나라는 제2차 일본 원정길에 나서기 위해 역시 고려에게 원정군선 900척을 건조하도록 요구하는 한편, 송나라 군선 3천500척을 동원해 모두 4천400척에 군사 14만 명을 태우고 일본 규슈의 이만리만(伊万里灣)에 집결했으나 이번에도 갑자기 엄습한 태풍으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때 중국의 강남에서 건조한 송나라의 배들은 강한 태풍을 견디지 못하고 거의 부서졌으나 고려가 만든 배는 튼튼하여 전부 무사했다고 한다. 그만큼 고려의 조선술이 송나라의 기술보다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일본 원정이 발전시킨 조선술
일본은 그 후 원나라 군선을 두 번이나 물리친 태풍을 가미가제(神風)라 불렀고, 제2차 대전 때 일본의 자살비행 특공대에도 가미가제라는 이름을 붙였다.
한편 고려의 무역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잘 알 수 없지만 당시 중국 배가 군선보다 상선이 더 발달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송나라 무역선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는 건국초기부터 당나라가 멸망하고 새로 등장한 중국의 5대 군벌정권, 작은 나라 10국들과 사절을 교환하며 국력을 다지고 무역을 활발히 하여 경제력을 축적했다. 그 후 5대 10국을 통일한 송나라와는 약 200년 동안 긴밀한 화친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해상무역과 문화를 교류하는 등 역사상 가장 친하게 지냈다.
고려 현종 3년(101)부터 충렬왕 4년(1278)까지는 고려와 송나라의 교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로, 이 기간동안 송나라 무역선단은 126회나 고려를 찾았고 모두 5천여 명의 송나라 상인들이 들어왔다.
송나라는 당시 세계 최고수준의 해양선을 만들었기 때문에 고려는 송나라 무역선의 장점을 따서 무역선을 만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가장 규모가 컸던 송나라 무역선단은 100명 이상 승선할 수 있는 대형선박 10척에 60∼70인승 중형선박 12척, 30∼50인승 소형선 31척이었다. 고려의 무역선은 송나라 배와 모양이나 구조가 비슷했지만 더 튼튼하고 빨랐다.
가장 큰 송나라 무역선은 길이 30m에 높이 9m, 너비 5.5m로서 배 밑부분이 평평한 첨저선인데, 2개의 돛을 달았고 앞돛의 높이는 24m, 뒷돛의 높이는 30m, 돛의 너비는 5m였다. 큰 돛의 상단에는 풍향을 조절할 수 있는 작은 돛 야호범(野狐帆)이 달려 있고, 뱃머리에 있는 양 기둥 사이에는 길이 150m의 닻줄을 감는 물래가 설치되었다.
배 꽁지에는 방향을 잡는 중심 키 1개와 보조키 3개가 달려 있었다. 노는 한편에 5개씩 모두 10개가 설치되었고 갑판 주위로는 사람이나 화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울타리가 처져있었다. 이런 송나라 무역선은 곡물 2천 석을 싣고 선원 60명이 탈 수 있었다.
송나라의 무역선 외에 고려의 해양선 건조기술에 영향을 끼친 것은 송나라 사신선(使臣船)이었다. 송의 사신선단은 신주(神舟)와 객주(客舟)로 이루어졌는데, 신주 1척에 여러 척의 객주가 보좌했다. 말하자면 신주는 사신이 탄 주선(主船)이요, 객주는 주선을 호위하는 배였다.
객주는 길이 30m, 높이 9m, 너비 7.5m, 돛의 높이 30m에 쌀 2천 석을 실을 수 있는 배다. 주선인 신주는 객주 3배 크기의 대형선박으로 북송의 사신 서긍이 서기 1122년 고려에 올 때 신주 2척에 객주 6척의 사신선단을 이끌고 왔다.
고려의 무역선은 송나라의 무역선과 사신선의 장점을 따고 우리 고유의 조선기술을 이용해 송나라 무역선보다 튼튼했다. 또한 가공목재가 아닌 자연목재를 이용해 배 한 척 만드는 건조시간이 짧아 많은 수의 배를 빠른 시간 안에 만들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건조비용도 적게 들었다.
게다가 송나라 무역선보다 속도가 훨씬 빨라서 <원사(元史)> 고려전을 보면 고려의 배는 송나라까지 가는데 3일이 걸리고, 아침에 고려를 출발하면 저녁에 일본에 도착할 수 있다는 기록이 있다.
군선이 주류를 이룬 고려의 배
고려는 용도별로 여러 종류의 배를 만들어 썼다. 크게 나누면 군선·조운선·무역선인데, 이 중에서 군선의 종류가 가장 많았다. 주력군선은 대선(大船)과 과선(戈船)으로, 대선은 왕건이 백제의 나주를 공략할 때 탔던 길이 약 37m의 큰배로서 갑판 위에 누각이 설치되어 있으며 말이 달릴 수 있도록 넓고 크게 만든 지휘선이다.
과선은 뱃머리에 쇠로 만든 철각뭉치를 달아 적의 군선으로 돌격, 들이받아 부수는 격파선이다. 또 뱃전 사방에는 날카로운 창 또는 단검을 촘촘히 꽂아 적병이 기어오르지 못하도록 했다.
고려문종이부시랑 벼슬을 했던 문신 김상기(金上琦)가 쓴 <고려사>를 보면, 여진해적에 잡혔다가 고려수군이 구출한 일본여자 내장석여(內藏石女)가 과선에 대해 진술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고려군선의 선체는 높고 크며 적선을 충돌 파괴하도록 뱃전은 철각구조로 되어 있다.’
이순신 장군의 거북선이 나타나기 전 최강의 군선이었던 과선을 만든 이유는 여진해적을 막기 위해서였다. 후에 중국의 청나라를 세운 여진족은 건국 전에는 만주지방에 흩어져 살았지만 일부는 해적으로 변해 우리나라 동해안 지역을 끝없이 침입하고 괴롭혔다.
고려 현종 2년(1011)부터 100여 척의 해적선으로 경주를 침입 약탈하기 시작해 숙종 2년인 1097년까지 85년간 20회 이상 동해안 일대와 대마도, 일본을 침범해 노략질했다. 이를 막기 위해 고려조정은 해군기지 사령부인 선병도부서(船兵都府署)를 동해안 요지에 설치하고 특수 군선인 과선 75척을 만들어 여진해적들을 물리쳤다.
여진은 물론 일본과 중국 등 이웃나라들이 무서워했던 과선 외에 관용으로 쓰이는 배는 해안을 순찰하는 순선(巡船), 행정 지도선인 관선, 관청이나 군수물자를 운반하는 소나무로 만든 송방선과 보통 배인 막선 등이 있었다.
고려의 군선 중 가장 많이 만들어진 일본 원정선에 대한 상세한 기록이나 유물이 발견되지 않아 그 구조와 규모를 간접적인 기록으로 추정해 볼 수밖에 없다. 려몽 연합군이 일본을 쳤을 때 이 전투에 출전했던 일본 장수 죽기계장(竹奇季長)이 1291년 이때의 전투상황을 그려 만든 병풍 몽고습래회사(蒙古襲來繪詞)를 보면 일본원정선의 모양을 대강 짐작할 수 있다.
이 병풍그림에 있는 배는 당시 고려가 만든 군선으로 몽고군이 타고 있는데, 노와 돛으로 항해했고 뱃머리인 선수가 위로 치솟았으며 배가 풍랑으로 심하게 요동할 때 병사나 물건들이 바다로 떨어지지 않도록 갑판 주위에 울타리가 둘러쳐져 있다. 또 정박용 닻줄을 감는 도르래까지 달려 있는 것으로 보아 큰 군선임을 알 수 있다.
고려의 수군이 사용한 배들은 평저형에 앞뒤가 반달모양으로 굽어져 위로 치솟았고 심한 풍랑을 만나도 전복되지 않도록 배 밑창에 돌이 깔려 15。 기울기에도 원상회복이 빠르도록 만들어져 있다. 또한 배 안으로 물이 들어왔을 때 퍼낼 수 있도록 배나무로 만든 물펌프까지 갖추었다. 당시로서는 상당히 과학적으로 만들어진 배였다.
일본의 관인(寬仁) 3년인 서기 1019년 북규슈의 태재부가 관인왕에게 올린 고려해적에 관한 보고서에는 이따금 일본해안을 침범한 고려배에 대한 기록이 있다. ‘배의 길이는 70∼80자(21∼24m)요, 배마다 30∼40개의 노를 가졌고 선원 수는 20∼60명인데 선원을 합쳐 활통을 맨 자 70∼80인이 탄 고려배는 빠르기가 달아나는 것 같다’는 내용이다. 이 기록을 보면 고려배가 확실히 일본배보다 우수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군선 다음으로 나라 살림을 하는데 절대 필요했던 배가 세곡 운반선인 조운선(漕運船)이다. 백성으로부터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곡물을 임금이 사는 개경의 국가창고로 운반하는 조운선은 내륙의 강에서 사용하는 강선(江船)과 해안 바닷길에서 사용하는 해선(海船) 두 가지가 있다.
강운선 또는 참운선(站運船)이라 불렀던 강선은 곡물 200석을 운반할 수 있는 평저선으로 노와 삿대를 사용해 다녔다. 고려의 조운선으로 추정되는 유물로는 1984년에 발굴한 완도선을 들 수 있다.
이 배는 지금까지 발굴된 배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것으로 고려 문종 때(1047∼1087)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소나무와 상수리나무로 만든 평저선이다. 길이 9m에 너비가 3.5m, 높이가 1.7m인 이 완도 발굴선은 쇠못이 아닌 나무못으로 조립해 방수처리한 한국고유선인 한선(韓船)의 시원형으로 추정된다.
해안의 바닷길을 오가는 조운선은 초마선(哨馬船)이라 했는데, 곡물 1천 석을 운반할 수 있는 반 첨저형의 큰배다. 강선이나 수레, 소, 사람들이 내륙에서 운반한 세곡을 모아둔 서해와 남해안 11곳의 조창에서 세곡물을 싣고 바닷길을 통해 개경을 오가던 해운선이다. 이 해운선을 `초마선`이라 부르게 된 이유를 학자들은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고려에 조운제도가 확립되기 전 태조 왕건과 후백재 견훤의 대형 군선들은 전쟁이 없을 때는 말을 운반하는데 주로 쓰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말을 싣고 다니는 큰 배라 해 초마선이라 불렀고, 후에 조운제도가 생겨 그 모양대로 만들어 조운선으로 사용하자 원래의 이름 그대로 초마선이라 불렀다는 얘기다.
초마선은 한두 개의 돛과 노 그리고 키가 달려 있고 정박용 닻줄을 감는 도르래가 설치된 전형적인 한선이었을 것으로 학자들은 추정하고 있다.
세 번째로 큰 배는 해상(海商)들이 바다를 누비며 무역할 때 쓴 무역선이다. 그렇게도 활발하게 바다를 주름잡았던 고려의 무역선에 대한 기록은 여기저기서 발견되고 있지만 확실한 유물은 아직까지 찾아 볼 수 없어 유감이다. 그러나 발달한 조선기술과 좋은 목재로 송나라 무역선의 장점만 따서 만들었기 때문에 송나라 무역선보다 우수했을 것이라고 학자들은 믿고 있다.
고려의 군선이나 해양선은 튼튼하게 발전했다. 고려 23대 고종 때 문장가 정2품 벼슬 문하시랑평장사였던 이규보는 그의 저서 <동국이상국집>에 ‘고려의 배는 남중국과 월남 등 동남아 제국은 물론 멀리 대식국(아라비아), 마필국(인도), 섬라곡국(태국)까지 왕래했다’고 적고 있다. 배가 튼튼하고 항해용 장비와 항해술이 발달하지 않고는 아라비아까지 항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무역선을 만들어 해상교역에 나선 고려
고려 무역선 규모를 상세히 알 수 있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다만 고려의 해운선으로 보이는 배가 그려진 구리거울인 동경(銅鏡)이 출토되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뿐이다. 학자들은 고려 무역선이 동경의 그림대로 돛 1개를 달고 갑판 위에 선실이 있는 첨저형 배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고려의 무역선 구조를 뒷받침하는 유물이 바로 신안 앞바다 속에서 후세에 발견된 상선이다. 1976년에 발견된 신안해저유물선은 1만3천여 점의 각종 진귀한 상품을 싣고있어 무역선이 틀림없는 것으로 보인다. 아직까지 완전히 복원하지는 못했지만 고려전기인 14세기 초에 제작된 대형 해운선으로 추정된다.
신안해저유물선은 선체 길이가 약 29m, 너비는 6.6m, 높이는 2m이고 배 밑창에 있는 척추격인 거대한 용골이 배 전체를 지탱하는 첨저형 배다. 뱃머리는 사다리꼴 모양으로 용골에 고정시킨 두 개의 돛대가 있는 쌍범선인데, 긴 항해에서 식수난을 해결하기 위해 선체 한 구석에 마련해둔 나무 수조(水槽)가 무역선임을 증명하고 있다.
이 외에도 <고려사>에는 11세기 초 송나라와 교역이 왕성해지기 시작할 즈음 70인승 고려 상선이 송나라에 갔다는 기록도 있어 고려의 해운선이 송나라 무역선과 버금가는 훌륭한 배였음을 짐작해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설명할 고려의 배는 중국이나 일본과 정치적 교류를 하기 위해 타고 다닌 사신선(使臣船)이다. 고려에서 정치적 교류를 위한 사신들의 중국 파견이 활발했던 것은 건국 때부터 서기 1150년까지였다.
이 시기를 견사항해시대(遣使航海時代)로 보고 있는데, 사신들이 사용한 배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신라시대 때 신라인들이 만들어준 일본의 당나라 파견용 견당선의 발전형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학자들은 고려의 사신선이 삼국통일로 고려에 흡수된 신라의 우수한 조선기술과 풍부한 항해 경험을 바탕으로 고려 초기 왕건이 사용한 군선을 항해용으로 개조한 튼튼하고 빠른 배였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와 더불어 고려사신선 건조에 큰 영향을 준 것은 송의 사신선인 신주(神舟)와 이를 호위하는 여러 척의 객주(客舟)였다.
신주는 길이가 30m인 객주의 3배나 될 만큼 큰배로서, 북송 사신 서긍이 서기 1122년 고려를 방문할 때 신주 2척과 객주 6척으로 조직한 사신선단을 타고 왔다는 기록이 있다. 신주는 길이 90m 전후로 성능이 뛰어나고 2개의 돛과 여러 개의 노로 항해했으며 갑판 위에는 사신이 쉬거나 전망할 수 있는 선실이 설치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고려 사신선이 신주만큼 불필요하게 크지는 않고 조선시대 중기부터 쓴 일본 파견용 통신사선과 비슷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