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3. 예수께서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4. 그 사람이 쳐다보고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런 다음에, 그가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 하셨다.(막8:22-26)
22. They came to Bethsaida, where some people brought a blind man to Jesus and begged him to touch him. 23. Jesus took the blind man by the hand and led him out of the village. After spitting on the man's eyes, Jesus placed his hands on him and asked him, “Can you see anything?”
24. The man looked up and said, “Yes, I can see people, but they look like trees walking around.”
25. Jesus again placed his hands on the man's eyes. This time the man looked intently, his eyesight returned, and he saw everything clearly. 26. Jesus then sent him home with the order, “Don't go back into the village.”
헬렌 켈러는 작가 사회 운동가 사회 사업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말하지 못하는 3중의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장애는 생후 19개월 때의 열병으로 인한 것입니다.
생후 19개월이니 이제 엄마 아빠를 부르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그리고 한 5년을 듣도 보도 말하지도 못하는 세상에 살다가 6세 때 설리번 선생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렇다 보니 꽃에 꽃이라는 이름이 있고 물에는 물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입니다.
배고프고 화나면 괴성을 지르고 바닥을 뒹굴었을 것입니다.
선생님 앤 설리번이 헬렌의 집에 도착하자 그 녀에게 인형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 녀는 그 인형을 건네 주면서 그 녀의 손바닥에 'd-o-l-l'이라고 글자를 썼습니다.
그 때 헬렌 켈러는 어리둥절 했을 것입니다.
선생님은 헬렌 켈러에게 인형을 줄 때마다 그 작업을 반복했습니다.
선생님의 뜻은 이것에 인형이라는 이름이 있다는 알라는 것입니다.
그 이름이 이렇게 쓰인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녀에게는 선생님의 이 행동이 귀찮았을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녀는 수시로 소리를 지르면서 인형을 잡아 던져 버렸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선생님의 작업은 계속 반복되었습니다.
모든 물건마다 그 일을 했습니다.
컵을 만지게 하고 cup라고 썼습니다.
이번에는 선생님이 그 녀의 손을 컵 안에 담긴 물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그 녀의 손바닥에 water라고 썼습니다.
펌프에서 쏟아지는 차거운 물에 헬렌 켈러의 손을 씻겨 주었습니다.
또다시 그 녀의 손 위에 천천히 물이라고 썼습니다.
그 일을 수만 번 반복했을 것입니다.
그 날도 설리반 선생님은 헬렌 켈러의 손바닥에 글자를 썼습니다.
순간 헬렌 켈러는 설리반 선생님을 껴안고 소리 내어서 울었던 것입니다.
아마 두 사람은 며칠간을 껴안고 울었을 것입니다.
소경이 눈을 뜬 것입니다.
모든 사물에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차거운 것에 이름이 water였습니다.
우리 중에 물에 물이라고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을 보고 물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말하기 때문에 물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물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선생님의 수없는 발음 교정을 통해서 말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녀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되는데 나는 벙어리가 아니다라는 말입니다.
I am not dumb.
이 말은 설리번의 엄청난 노력의 결과였습니다.
설리번은 헬렌 켈러의 두 번째 탄생을 위해서 산고를 치렀던 것입니다.
“나는 말할 수 있다.” 제가 이 말을 했다면 우리 중 누가 감격의 눈물을 흘리겠습니까?
하지만 헬렌 켈러에게 이 말은 눈물이 쏟아지는 감격이었습니다.
설리번에 대한 감사였습니다.
그런 가르침을 받은 후에 그 녀는 3중 장애를 가진 사람으로서는 세상에서는 처음으로 대학을 졸업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말하고 듣고 보는 일에 장애가 없습니다.
하지만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한 우리는 그 나라를 본 적이 없고 들은 적이 없으며 따라서 말하지 못합니다.
또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 일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수없이 손을 물에 담그며 인형을 만지며 우리의 손바닥에 글을 쓰시는 주님은 만나게 하는 것입니다.
헬렌 켈러가 어느 날 숲길을 걷고 온 친구에게 그 소감을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고 간단히 답했습니다.
그런데 헬렌 켈러는 그 친구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헬렌 켈러는 들을 수 없지만 그 친구는 숲길을 걸으며 새소리와 물 흐르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헬렌 켈러는 볼 수 없지만 그 녀는 푸른 숲과 피어있는 꽃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보고 듣고 말할 수 있는데 어떻게 그 숲길에 특별한 것이 없을 수 있을까?
그 녀가 50살에 「사흘만 볼 수 있다면」이라는 수필을 썼습니다.
- 내가 사흘 동안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에는.......
나는 친절과 겸손과 우정으로 내 삶을 가치 있게 해준 설리번 선생님을 찾아가, 이제껏 손끝으로 만져서만 알던 그녀의 얼굴을 몇 시간이고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 모습을 내 마음속에 깊이 간직해 두겠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 바람에 나풀거리는 아름다운 나뭇잎과 들꽃들, 그리고 석양에 빛나는 노을을 보고 싶다.
우리의 한 인생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그 유일한 헬렌 켈러의 삶에 그 가치를 부여했던 사람은 설리반이었습니다.
그 녀로 보게 해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오늘 성경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오늘 읽은 성경 본문의 위치가 중요합니다.
이 본문은 주님의 공생애의 마지막 기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그것은 주님의 마지막 만남의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주님은 전혀 다른 길을 가실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입니다.
그 제자들과의 마지막 시간에 주님께서는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교훈을 유언처럼 남기실 것입니다.
주님의 공생애를 결산하시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과연 무엇인가?
헬렌 켈러가 쏟아지는 샘물에 손을 담그고 water의 뜻을 알아챈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마지막 시간에 죄인들이 눈을 떠서 드디어 보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을 떠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놓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십자가를 지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십자가를 바로 눈앞에 두고도 이 십자가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은 멸망할 것입니다.
오직 이 십자가를 제대로 보는 사람들만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보는 일은 생명을 좌우하는 일이었습니다.
22. 그리고 그들은 벳새다로 갔다. 사람들이 눈먼 사람 하나를 예수께 데려와서,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2. They came to Bethsaida, where some people brought a blind man to Jesus and begged him to touch him.
주님이 벳새다로 가셨습니다.
벳새다는 주님께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던 곳입니다.
20. 예수께서는 그 때에, 자기가 기적을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꾸짖기 시작하셨다.
21. "고라신아, 너에게 화가 있다. 벳새다야, 너에게 화가 있다. 너희에게서 행한 기적들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마11:20,21)
설리번은 배고픈 헬렌 켈러 앞에 불고기를 두고 손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불고기 한 조각을 입에 넣어준 다음 그 일을 다시 반복했습니다.
배고픈 헬렌 켈러는 그 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녀는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습니다.
눈먼 사람을 주님께 데리고 온 것입니다.
주님은 틀림없이 그를 낫게 하실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를 통한 육체의 치유를 확실하게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는 손바닥에 하나님 나라라고 쓰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 당장 눈을 뜨게 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눈뜨는 일을 통해서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보라는 것입니다.
주님은 그들의 시선의 방향을 수없이 교정하고 계셨습니다.
주님께서 귀신 들려 눈멀고 말 못 하는 사람 고쳐주신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바리새파 사람들이 귀신의 대장 바알세불의 힘으로 귀신을 몰아냈다고 예수님을 매도했습니다.
주님은 그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28.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영을 힘입어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마12:28)
주님은 지금 너희는 귀신 나간 사람만 보고 있는데 너희 눈이 보지 못했던 나라가 이미 임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달내 교회에 앉아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여러분은 보이지 않는 분을 보아야합니다.
그 보이지 않으신 분으로 인해 감격의 눈물이 흐르나요?
65.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아버지께서 허락하여 주신 사람이 아니고는, 아무도 나에게로 올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요6:65)
여러분은 달내 교회까지 타고 오셨다가 주차해 놓은 자동차만 보이는지 모르겠는데 주님의 말씀은 여러분을 이 자리까지 끌고 오신 주님의 손이 보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손이 여러분을 이 교회의 장의자에 앉혀 두셨다는 것입니다.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앉아 계시는 것으로 이미 증거가 된 셈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특별한 방식이 있느냐고 물으실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께서 손을 대시는 이 방식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보증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22. 손을 대어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22. They begged him to touch him.
몇십 년 전 손오공 만화 영화가 생각이 납니다.
손오공이 우랑바리 나빠롱...... 궁시렁 궁시렁하면 구름이 휙 날아왔습니다.
구름이 날아오는 것은 손오공이 꼭 그 주문을 외울 때였습니다.
제 앞에 구름이 나타나지 않은 것도 그 손오공이 외우던 그 주문을 제가 모르기 때문입니다.
천일 야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열려라 참깨 바로 그 주문입니다.
호박 오이 들깨 그것들이 문을 열어 줄 리 없습니다.
23. 예수께서 눈먼 사람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바깥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 두 눈에 침을 뱉고, 그에게 손을 얹으시고서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23. Jesus took the blind man by the hand and led him out of the village. After spitting on the man's eyes, Jesus placed his hands on him and asked him, “Can you see anything?”
주님은 먼눈에 손을 대서 고쳐 달라는 이 요청을 받으시고 가장 먼저 눈먼자를 마을 사람들로부터 격리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눈먼 사람의 치유를 사람 없는 곳에서 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왜 그 일을 숨어서 하셨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이렇게 저렇게 추정할 뿐입니다.
누구도 그 원인을 제대로 입증하기 힘듭니다.
한가지 다만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기적을 목격하는 것이 사람들에게 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경험하고 이런 행동을 했습니다.
14. 사람들은 예수께서 하신 표적을 보고 "이 분은 참으로 세상에 오시기로 된 그 예언자다" 하고 말하였다.
15.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와서, 억지로 자기를 모셔다가 왕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요6:14,15)
이 분이 왕이시면 우리가 평생에 굶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행위에 전혀 동의할 수 없으셨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능력을 인정해서 그 분을 왕으로 삼겠다는데 나쁠 것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그 주님의 기적을 보더니 예수님을 그들의 비젼을 성취하려는 방식으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비젼을 크게 가져라!
주님은 사람들의 비젼에 놀라셨고 그들을 피해 숨으셨습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더 비젼에 충만한 사람들을 주님께서 피하십니다.
그리고 사람을 치유하셨는데 주님께서는 침을 뱉으셔서 그 손을 얹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치유의 방식은 사람들이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치유를 위해 침을 뱉어서 사용하실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주님의 침은 특별히 효력이 있더라 이런 이상한 구절은 성경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런 미신은 없습니다.
제가 시무하던 제주도의 교회에 집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이 저에게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그 부부가 축귀하는 자리에 갔는데 목사님이 귀신 들린 사람을 가운데 두고 찬양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 귀신이 남편을 덮친 것입니다.
갑자기 낭패를 당한 것입니다.
이 일로 집사님은 전국의 유명하다는 부흥사들을 다 찾아다녔습니다.
생활은 해야 하는데 남편은 직장을 잃고 돈은 돈대로 들어가는데 차도는 없지.......
용한 부흥사도 다 소용이 없었습니다.
하다하다가 지친 집사님이 남편을 두고 “아이고, 예수님 예수님 우리 남편 살려주세요.
날 보고 어떻게 하라는 것입니까?
하나님 나 좀 살려주세요.”
남편을 두고 대성통곡을 한 것입니다.
“아이고, 예수님 예수님.......
이 놈의 귀신아 나가라”
다만 소리 높여서 하소연을 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남편이 말짱해진 것입니다.
목사님이 오셔서 먼저 영험한 가운을 걸쳐 입은 다음에 소나 양을 죽이고 30분 깊은 묵상을 하고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 아닙니다.
집사님은 그가 쓰던 일상의 그 언어를 가지고 오직 예수님께 간절하게 간절하게 원통함을 호소를 했을 뿐입니다.
아이고 하나님
아이고 예수님
아니고 성령님
단 두 가지가 중요합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도움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 대상이 중요합니다.
두 번째 그 하나님을 향해서 소리 지르며 눈물 흘리며 발버둥 했는지....... 그 진실성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문을 여는 열쇠였습니다.
도무지 예수님의 방식을 정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갑자기 침을 사용하실지!
지붕을 뚫고 내리는 방식도 있고
몰래 가서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방식도 있고
나무 위로 기어올라가는 방식도 있고
뚫어지라고 말씀만 집중하는 방식도 있고.......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의 중심을 보십니다.
오직 주께만 도움을 구하는가?
그에게 진실성이 있는가?
그런데 오늘 본문의 기적에는 아주 특별한 점이 있습니다.
여태껏 주님은 주님의 일을 하시고 그것이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그것을 확인하신 적은 없었습니다.
아직 덜 나았어?
주님은 다섯 개의 떡을 두고 기도하셨습니다.
그것을 나누어 주셨는데 1차에 실패하셔서 2차에 성공하셨던 것이 아닙니다.
아니면 일단 1,000 명 분은 해결하셨는데 나머지 4,000 명의 식량을 준비하기 위해서 다시 기도하신 것이 아닙니다.
빵은 일단 성공하셨는데 물고기는 실패하셨던 것도 아닙니다.
그러신 적이 없었습니다.
언제나 그러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을 때 그 말씀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단번에!
하지만 이번은 달랐습니다.
그것도 주님께서 먼저 질문을 하셨습니다.
“제대로 치료되었느냐?”
주님의 질문이 있는 유일의 기적입니다.
헬렌 켈러는 설리번 선생님이 그의 손바닥에 doll 이라고 글자를 단 한 번만 쓴 것이 아닙니다.
water 라고 단 한 번 손바닥에 쓴 것이 아닙니다.
설리번의 기적은 그 성실한 사랑을 이릅니다.
그 희생과 인내입니다.
그 나라에 관한한 우리 역시 헬렌 켈러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눈멀고 귀먹은 자입니다.
주님은 지금 우리들의 영적 3중 장애자를 치료하는 과정입니다.
그 치룐느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셨습니다.
그 과정은 엄청난 인내를 요구합니다.
한 사람이 제대로 눈을 떠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기까지 그리고 한 사람이 변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변화하기까지 주님은 수없이 사람들의 손바닥에 하나님의 나라라고 글을 쓰셔야 하셨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12. 내가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요, 또 이미 목표점에 이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단 한 가지입니다. 곧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만을 바라보고,
14.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를 향하여 달려가고 있습니다.(빌3:12-14)
우리가 가장 놀라는 것은 주님은 변함없으신 사랑과 신실하심입니다.
우리 눈이 열려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될 때까지 하나님은 우리의 손바닥에 하나님의 나라라고 글을 쓰시는 것입니다.
21. 그러나 마음 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23. "주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의 신실이 큽니다."(애3:21-23)
여러분 이제 무엇이 보입니까?
24. 그 사람이 쳐다보고서 말하기를 "사람들이 보입니다. 나무 같은 것들이 걸어 다니는 것 같습니다" 하였다.
24. The man looked up and said, “Yes, I can see people, but they look like trees walking around.”
놀라운 일입니다.
모조리 깜깜했는데 형태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정확해서 사물이 제대로 구별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나무처럼 보이는 것이니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예수님이 마치 사회 복지사같이 보였다는 것입니다.
혹은 암을 낳게 하시는 능력 있는 의사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GNP 보장하시는 경제 전문가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세상의 왕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렇게라도 시력이 회복되었으니 엄청난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나무 같이 보이는 것이 단순한 시력의 차이를 이르는 것입니까?
시력이 0.1 혹은 0.2
흐릿하게 보이고 뚜렷하게 보이는 차이에 불과한 것입니까?
이런 시력으로 예수님을 보니 예수께서 세상의 왕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양적인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문제입니다.
그들은 이제 세상의 왕이 구원자 그리스도와 뚜렷하게 구별될 때까지 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비젼이 하나님의 뜻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는 날이 올 때까지 제대로 치료를 받아야합니다.
베드로도 그랬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그 자리에서 그는 엉뚱한 말을 했습니다.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22. 이에 베드로가 예수를 꼭 붙들고 "주님, 안 됩니다. 절대로 이런 일이 주님께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하면서, 예수께 항의하였다.
23. 그러나 예수께서는 돌아서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셨다.(마16:21-23)
그 때 그의 눈에 하나님의 일이 마치 사람의 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것은 영적인 시력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죄인들의 시력 교정을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주님의 승천 때까지도 그 시력이 제대로 회복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17. 그들은 예수를 뵙고, 절을 하였다. 그러나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18. 예수께서 다가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았다.
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20.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아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다." (마28:17-20)
주님의 마지막 현장에서 그들은 주님을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시력이 제대로 회복이 안되었던 것입니다.
25. 그 때에 예수께서는 다시 그 사람의 두 눈에 손을 얹으셨다. 그런 다음에, 그가 뚫어지듯이 바라보더니, 시력을 회복하여 모든 것을 똑똑히 보게 되었다.
25. Jesus again placed his hands on the man's eyes. This time the man looked intently, his eyesight returned, and he saw everything clearly.
그 치료 후에 주님은 두 번째로 치료를 다시하셨습니다.
물론 눈먼자도 뚫어지게 본 것입니다.
그렇게 그 사람이 제대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일어나야 합니다.
욥이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의 고난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주님도 분명히 하셨지만 욥이 의로워서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8. 주께서 사탄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종 욥을 잘 살펴 보았느냐? 이 세상에는 그 사람만큼 흠이 없고 정직한 사람, 그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없다."(욥1:8)
그의 의는 이렇게 드러났습니다.
21. 이렇게 말하였다. "모태에서 빈 손으로 태어났으니, 죽을 때에도 빈 손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주신 분도 주님이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님이시니, 주의 이름을 찬양할 뿐입니다."
22. 이렇게 욥은, 이 모든 어려움을 당하고서도 죄를 짓지 않았으며, 어리석게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았다.(욥1:21,22)
그는 그렇게 의로웠기 때문에 이번에는 건강마저 잃게 되었습니다.
욥이 대충 의로웠더라면 일 차 고난으로 그쳤을 것입니다.
그 때 그의 친구들이 욥을 찾아온 것입니다.
욥의 친구들의 시력은 사람이 나무처럼 보이는 시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 친구들의 시력으로는 삼박자가 맞아야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충만은 만사형통 신학!
욥의 친구들은 의인이 당하는 고난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욥을 향해서 초지일관 네가 불의 했으니 그런 일이 네게 일어났다고 주장하며 욥을 괴롭혔습니다.
친구뿐 아니라 그의 부인도 바로 그 말을 했습니다.
9. 그러자 아내가 그에게 말하였다. "이래도 당신은 여전히 신실함을 지킬 겁니까? 차라리 하나님을 저주하고서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욥2:9)
이 성경의 본문의 위치입니다.
주께서 공생애를 마치시는 바로 그 시각에 눈먼자를 치유하시는 기적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 순간은 영적 시력이 회복(해석)되어야만 할 때였습니다.
예수께서 이제 공생애를 마치시고 십자가를 지실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첫째 이렇게 예수님께서 떠나야하실 시간이므로 시급히 그들의 시력이 회복 되어야합니다.
둘째 그들이 예수님의 역사적인 십자가를 목격하게 될 텐데 그들은 이 십자가를 영적인 시각으로 바로 보아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 비참한 십자가
그 억울한 십자가
불의가 의를 죽이는 사건
그들의 영적인 눈이 뜨이지 않는다면 그들은 그 십자가를 완전히 오해할 것입니다.
그들은 십자가에서 메시야의 구원의 사역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눈이 회복되어서 고난 가운데 그 그리스도가 보여야 했습니다.
나무와 사람이 확실하게 구분이 되어야 합니다.
26. 예수께서 그를 집으로 돌려보내시며 말씀하시기를 "마을로 들어가지 말아라" 하셨다.
26. Jesus then sent him home with the order, “Don't go back into the village.”
그런데 주님은 그 일을 하시면서 분명하게 주의를 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제 눈을 뜨게 된 봉사에게 주의하셨습니다.
그 마을 사람들 앞에 눈뜨고 나타나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을 만나서 경험한 기적을 마을 사람이 못 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들의 육적인 관심은 예수님을 오직 눈뜨게 하시는 이로 알게 할 것입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면 옳거니 내가 세상의 성공 방식을 찾았다 할렐루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기적이 감추어지는 것이 더 영적입니다.
그렇게 주께서 이 공생애의 마지막 기적으로 사람들의 눈을 떠서 보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회복된 우리의 눈으로 무엇을 보기를 바라시는 것인가?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3:16)
그 일은 2,000년 전 예루살렘이라는 역사적인 장소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냄새를 맡았던 일입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피 흘리시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걷던 것을 눈으로 보았습니다.
그 길바닥에서 선명하게 피로 찍힌 주님의 발자국을 보았습니다.
로마 군병의 회초리가 하늘을 가르는 소리
동시에 주님의 외마디 비명 소리를 귀로 들었습니다.
그 주위는 온통 피비린내를 코로 냄새 맡았습니다.
그 역사적인 현장을 눈으로 보아서 확인하라는 것입니다.
그 광경을 보면서 영적 눈이 뜨이지 않은 사람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3.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를 받고, 버림을 받고, 고통을 많이 겪었다. 그는 언제나 병을 앓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돌렸고, 그가 멸시를 받으니, 우리도 덩달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사53:3)
욥의 친구들과 같이 그 비참한 십자가는 예수님 본인의 죄의 결과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들은 욥에게 시종일관 죄지었으니 그런 벌을 받는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의 훈계를 제대로 들으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눈이 뜨인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4. 그는 실로 우리가 받아야 할 고통을 대신 받고, 우리가 겪어야 할 슬픔을 대신 겪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
5. 그러나 그가 찔린 것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고, 그가 상처를 받은 것은 우리의 악함 때문이다.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써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매를 맞음으로써 우리의 병이 나았다.(사53:4,5)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전혀 다른 것을 보았습니다.
이타적인 시각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십자가에서 주님의 죄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에서 자신들의 죄를 보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충격입니다.
그러다 보니 모조리 이기적인 관점에서 십자가의 희생을 해석한 것입니다.
4. 그러나 우리는, 그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받는다고 생각하였다.(사53:4B)
내가 받아야 할 그 고난을 예수님께서 대신 당하실 수 있다는 것을 죄인들은 생각조차 하지 못 했던 것입니다.
그 이타적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의 사건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랑은 우리가 경험해 왔던 사랑과는 그 색깔이 달랐습니다.
사랑이라니 남녀 간에 손잡고 공원에 가는 일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닙니다.
정의와 사랑이란 상반되는 내용성을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정의를 이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희생하신 사랑의 근본 원인은 정의의 문제였습니다.
인간에게는 의를 행할 의사가 없었습니다.
그 인간의 불의 때문에 주님께서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의의 문제로 인해서 그 의의 회복을 위해서 십자가에 처절하게 댓가를 지불하신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은 정의의 회복의 문제입니다.
의의 문제를 간과하고 사랑 운운하는 것은 언어도단입니다.
간신배 짓을 하며 거짓을 일삼고 교회 가서 두손 들고 눈물 흘리는 것은 기독교 종교 쑈 하는 일입니다.
사랑은 정의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눈이 떠져서 이제는 십자가에서 뚜렷하게 정의가 보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십자가의 사건으로 인해서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일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16. 누구든지 그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요3:16)
결국 보게 될 것은 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존재에 주어지는 멸망하지 않는 하나님 나라의 영생입니다.
누구든지 믿기만 하면 그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영적인 눈이 열리면 우리는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제대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