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빙선/ 이미화
세상의 추운 4시들이 몰려드는 해역들마다엔 아직 연어의 눈알들이 우두커니 말라간다.
마시다 만 잔처럼 해가 떠 있고
월기(月期) 마지막 날
죽은 잎사귀들을 묶어 정원을 쓸었다
쇄빙선 한 척이 느릿하게 빠져나가는오후, 봄은 파열음으로 물결 운(雲)이다.
날렵한 꼬리에 쌍떡잎머리를 하고 있는 봄
녹다 만 달의 조각이 돌 틈에 끼어 있다
후륜의 힘들이 프로펠러에 묻어 있고
씨앗들은 회전하는 방향을 가늠하고 있겠지.
범고래 떼 같은 햇살이 몰려오는 방향으로 봄꽃들은 서로 겹쳐서 선수각(船首角)을 만들지.
수로들은 소리만 남겨놓고 물관부들을 찾아간다.
북극의 계절은 지금
다리우스 달력을 빠져나가는 중이다.
햇살은 아직 뿌리가 부실하다.
가끔, 쌀쌀한 선단(船團)이 지나가는 4시
봄의 속지에는 아직 솎아내지 못한 두유과(豆油科) 같은 기미들이 무성하다.
밤, 달이 쇄빙선처럼 하늘을 깨트리며 지나간다.
인쇄소마다 뒤늦은 농법일지를 찍어내는 야근이 한창일 것 같다.
소금의 맛은 차가운 맛이고
달력은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벽을 지나간다.
- 2011년 <현대시> 신인상 당선작
■ 이미화 시인
- 1959년 서울 출생
- 서울예술대 졸업
《심사평》
이번 공모에는 약 200여 분들이 응모를 해왔다. 지난 공모에 비해 응모 편수는 좀 줄었다. 십대의 고등학교 응모자부터 육십대의 응모자까지 응모 연령도 다양했으며, 시의 경향 또한 다양했다.
예심을 거쳐 아홉 분의 작품이 본심에 올라 우리레게 전달되었다. 본심에 오른 분들은 강연형, 김복희, 김유성, 김호성, 박민혁, 박채영, 백유진, 이미화, 황윤재 씨였다. 본심위원들은 오랜 고심 끝에 네 명의 응모자를 다시 선정했다. 김호성, 박민혁, 이미화, 황윤재 씨가 그들이다. 김호성의 「웰빙푸드 레시피」외 9편은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박민혁의 「안식년」외 9편은 순례의 욕망이라는 주제가, 황윤재 씨의 「발자국 상점」외 9편은 시를 안정적으로 조형하는 능력이 돋보였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두 몰개성이라고 할 만큼 기성 시인들의 시세계를 답습하는 데 그쳤다. 이미화 씨의 「쇄빙선」외 9편은 심사위원들의 의견이 엇갈렸으나 오랜 토의 끝에 신인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의견이 우세하여 새로운 시인으로 시단에 소개하기로 하였다.
이미화를 시인으로 추천한다. 최근 한 잡지를 읽으며 동일한 시적 분위기가 한 호를 채우고 있는 것에 적이 놀랐다. 소통의 문제가 비단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요즘처럼 첨예하게 ‘시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은 드물었지 않았나에서이다. 요즘의 시적 경향을 ‘새로운 독법’으로 읽어야 한다는 자성이 일기 시작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예술사가 그렇듯이 문학사 역시 내용과 사상에 기반하고 있기보다는 양식이나 기법에 치중한다. 이런 까닭으로 시가 기존의 규준에 저항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을 드러내고 싶어하는 욕망은 기원적이고도 태생적이다.
그래서일까? 최근 신인 투고 작품은 인생과 경험의 문제를 드러내기보다는 ‘양식적인 미학’을 드러내는 경향성을 보여준다. 공감보다는 공유를, 내용보다는 형식을, 진중보다는 경쾌를 시적 의장으로 삼는다. 이번에 당선한 이미화 씨의 작품 역시 그렇다. 사물과 대상을 왜곡시켜 다성적인 의미를 이끌어 낸다거나 탈골과 결절과 같은 일탈의 어법을 통해 입체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은 일련의 경향성을 반영한다. 「쇄빙선」은 얼음을 깨고 나가고 있는 배의 운동성을 삶의 운동성으로 치환하는 절제의 미를 보여준다. “연어의 눈알들이 우두커니 말라가”고 달력이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벽을 지나가”는 “세상의 추운 4시들”은 뿌리가 부실한 세상이다. 몸에 붙은 비늘이 다 떨어지도록 물가에 가려 해도 가지 못하는 불모의 세상이다. 그런가하면 「푸른 사과를 먹는 시간」에서는 고통을 증식하는 육체에 이는 겨울의 감정을 건조하게, 「하마다」에서는 낙타의 사전 속에 적기되어 있는 기도의 풍경을 삭막하게 점묘한다. 낙하와 침몰의 윤곽을 터질듯이 보여주는 「우리들의 공중 사용법」과 「화각」에서도 여전히 ‘세상의 추운 4시’들은 출몰한다. 이미화 씨의 시는 자신 안의 것을 드러내어 교묘히 외적인 것에 촉탁하는 개성을 발휘한다. 오랜 연마의 경험을 통해 나오는 그의 시가 그의 앞길을 환하게 밝히기를 고대한다. 진심으로 당선을 축하한다.
본지에 응모해주신 모든 분들게 감사드리며, 당선자에겐 축하의 말씀을 그렇지 못한 분들껜 심심한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
- 심사위원: 원구식 박주택 오형엽 조강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