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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齋全書卷百五十四 / 審理錄二十
京畿豐德府金有奉獄 威逼金召史。第七日致死。實因初檢自盡。覆檢餓死。○本道啓。一死矢心。七日斷穀。宜正兇身之常刑。以洩貞女之幽寃。成獄該倅。爲先罷職。
判。近因憫旱。審理判京外獄案。夜以繼晷者爲七日。而似此絶可憤絶可悖者。亦可謂刱覯 是如乎。荒江短碑。史著曹娥。脩竹叢薄。詩稱漢姬。而烈哉金女。曾無愧色 是置。靑春孤節。矢死靡他。白晝強盜。舍生揮却。斷食七日。從容取義。其貞操姱行。凜如秋霜。雖求之江漢之游女。未易多聞。亟令地方官表其閭 爲旀。兇身金有奉 段。敢爲生前之劫辱。欲貽死後之累名。檢庭納招。至兇極獰。誠不忍泚筆以傷貞女之寃魂。似此罪囚。豈可尋常訊推。該府使罷職之代。過齋後。令該曹口傳差出。待下批。使之當日辭朝。馳卽至邑。先樹烈女之旌門。仍又嚴刑兇身。卽捧遲晩招。以爲快施當律之地事回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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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齋全書卷百五十七 / 審理錄二十三
京畿豐德府金有奉獄 刑曹啓。右議政李秉模以爲尙未置法。大關幽鬱。臣等以爲敢做生前謊說。欲貽身後穢名。若慰貞女幽寃。可得東海甘雨。
判。殺人者亦人也。聖人好生之心。何必制爲刑而懸其象。獨於殺人之人。殺無赦者。誠以不如此。無以禁暴而止亂。西京之法網雖闊。殺人者死 是置。有奉 段。雖異於手以刃之。足以踢之。逼辱貞女以至於死。其罪與殺之等。不可以貞女旌貤之已施。或忽於有奉之同推。使之仍推。見丁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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京畿豐德府金有奉獄 威逼金召史。第七日致死。實因初檢自盡。覆檢餓死。○本道啓。一死矢心。七日斷穀。宜正兇身之常刑。以洩貞女之幽寃。成獄該倅。爲先罷職。
判。近因憫旱。審理判京外獄案。夜以繼晷者爲七日。而似此絶可憤絶可悖者。亦可謂刱覯 是如乎。荒江短碑。史著曹娥。脩竹叢薄。詩稱漢姬。而烈哉金女。曾無愧色 是置。靑春孤節。矢死靡他。白晝強盜。舍生揮却。斷食七日。從容取義。其貞操姱行。凜如秋霜。雖求之江漢之游女。未易多聞。亟令地方官表其閭 爲旀。兇身金有奉 段。敢爲生前之劫辱。欲貽死後之累名。檢庭納招。至兇極獰。誠不忍泚筆以傷貞女之寃魂。似此罪囚。豈可尋常訊推。該府使罷職之代。過齋後。令該曹口傳差出。待下批。使之當日辭朝。馳卽至邑。先樹烈女之旌門。仍又嚴刑兇身。卽捧遲晩招。以爲快施當律之地事回諭。
심리록 제29권 / 정사년(1797) 2 ○ 경기 / 풍덕(豊德) 김유봉(金有奉)의 옥사
김유봉이, 과부 김 여인이 혼자 거름밭에 가는 것을 엿보아 뒤를 밟아 가서 능욕을 하려 하자, 김 여인이 반족(班族)으로서 수치와 분노로 음식을 먹지 않아 17일 만에 죽었다.
[형증] 하복부가 창자에 붙었고, 온몸이 홍색이었다.
[실인] 굶어 죽은 것이다.
정사년(1797, 정조21) 4월에 옥사가 성립되었다.
[본도의 계사] 한번 죽기로 마음먹고 열흘 동안 곡기를 끊었으니, 의당 정범을 상형(常刑)에 처하여 정절녀의 원한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옥사를 성립시킨 해당 수령은 우선 파출하소서.
[판부] 근래 가뭄을 염려하여 심리를 하면서 경외의 옥안에 대해 밤새우며 판부를 내린 것이 7일째인데, 이렇게 몹시도 분통터지고 패악한 것은 처음 본다고 하겠다. 황강(荒江)의 단비(短碑)로 역사에서는 조아(曹娥)를 드러내었고, “훤칠한 대숲이 우거져 있다.[脩竹叢薄]”는 구절로 시에서는 한희(漢姬)를 칭송했다. 열녀로다 김 여인이여, 그들에 비해 손색이 없도다. 청춘 나이에 외롭게 수절하면서 죽을지언정 다른 남자에게 가지 않으리라 맹세하여, 대낮에 강도를 만나 목숨을 내버릴 각오로 물리치고 열흘 동안 단식하여 차분하게 의(義)로 나아갔으니, 그 곧은 지조와 아름다운 행실이 엄정하기가 추상(秋霜)과 같다. 비록 강한(江漢)의 유녀(游女)에서 찾아보더라도 그런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속히 지방관으로 하여금 그 집에 정표(旌表)하도록 하라.
범인 김유봉은 감히 생전에 겁탈하려는 마음을 먹었고 사후에까지 누명을 씌우고자 하여 검정(檢庭)에서 공초한 것이 몹시 흉악하고 모지니, 실로 붓으로 그 내용을 적어 정절녀의 원통한 영혼에 상처를 주는 일을 차마 하지 못하겠다. 이런 죄수를 어찌 심상하게 신추(訊推)할 수 있겠는가.
장계로 파출된 해당 부사의 대임은, 재계(齋戒)가 지난 뒤 해조로 하여금 구전으로 차출하게 해서 하비(下批)하거든 그날로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고 말을 달려 즉시 고을에 도착하여 먼저 열녀의 정문(旌門)을 세워 주고, 이어 범인을 엄히 형신하여 즉시 지만하는 공초를 받아 시원스레 해당 형률을 시행하도록 하라고 회유하라. -5월-
[형조의 계사]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는 “아직까지 법에 따라 처치하지 않은 것은 억울함과 크게 관계가 됩니다.” 하였습니다. 감히 생전에 있지도 않은 황당한 얘기를 지어내어 사후에 오명을 씌우려 하였습니다. 정절녀의 억울함을 위로해 준다면 동해(東海)의 단비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판부] 살인자도 사람인데, 성인(聖人)의 살리기를 좋아하는 심정으로 하필 오형(五刑)을 제정하여 그 형상을 보여 주시면서 유독 살인한 사람에 대해 죽이고 용서하지 말도록 하신 것은 실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포악함을 금하고 혼란함을 저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漢)나라의 법망(法網)이 너그러웠지만 살인자는 사형에 처하였다. 김유봉은 칼을 잡고 찌르고 발로 찬 것과는 다르지만 정절녀를 욕보여 죽게 하였으니, 그 죄는 살인과 마찬가지이다. 정절녀에게 정문을 이미 세워 주었다는 것으로 혹시라도 김유봉을 동추하는 데 소홀함이 있어서는 안 되니, 계속 추문하도록 하라. -무오년(1798, 정조22) 5월-
[주-D001] 황강(荒江)의 …… 드러내었고 : 조아(曹娥)는 후한 때의 효녀로, 아버지가 익사하자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강에 투신하였다. 한단순(邯鄲淳)이 그의 비문을 지었고 후에 채옹(蔡邕)이 ‘황견유부 외손제구(黃絹幼婦外孫虀臼)’란 8자의 비문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後漢書 卷84 列女傳 孝女曹娥》[주-D002] 훤칠한 …… 칭송했다 : 인용한 시는 출전이 자세하지 않으며, 한희(漢姬) 또한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두보(杜甫)의 〈가인(佳人)〉 시에 “날씨는 춥고 푸른 옷소매 얇으니 해 저물 제 긴 대나무 숲에 의지해 있노라.[天寒翠袖薄 日暮倚脩竹]” 한 구절이 있는데, 날씨가 추워져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 대나무에 의지했다는 의미로 정절이 있는 여인을 지칭하는 고사로 많이 쓰인다. 이로 볼 때 아마도 이 구절의 원용이 아닌가 하며, 따라서 ‘한희’도 특정 인물이라기보다는 시의 대상이 된 중국 여인을 의미하는 듯하다. 《古文眞寶前集 卷3》[주-D003] 강한(江漢)의 유녀(游女) : 《시경(詩經)》 한광(漢廣)에 “한수(漢水)에 놀러 나온 여자가 있으니, 구할 수 없도다.[漢有遊女 不可求思]”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부분의 주석을 간추려 보면, 강한(江漢)의 풍속은 여자들이 놀기를 좋아하였는데 문왕(文王)의 교화가 미치자 풍속이 변하여, 놀러 나온 여자들이 하나같이 단정하고 정숙하여 전날처럼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내용이다.
ⓒ 한국고전번역원 | 강여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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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덕(豊德) 김유봉(金有奉)의 옥사->번역문의 원문이 다름, 원문이미지는 번역문과 같고 원문과 다름
*김유봉이, 과부 김 여인이 혼자 거름밭에 가는 것을 엿보아 뒤를 밟아 가서 능욕을 하려 하자, 김 여인이 반족(班族)으로서 수치와 분노로 음식을 먹지 않아 17일 만에 죽었다.
[형증] 하복부가 창자에 붙었고, 온몸이 홍색이었다.
[실인] 굶어 죽은 것이다.
정사년(1797, 정조21) 4월에 옥사가 성립되었다.
京畿豐德府金有奉獄 威逼金召史。第七日致死。實因初檢自盡。覆檢餓死。○本道啓。一死矢心。七日斷穀。宜正兇身之常刑。以洩貞女之幽寃。成獄該倅。爲先罷職。
->이 번역문의 원문은 다르고 원문이미지는 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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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齋全書卷百五十四 / 審理錄二十
京畿龍仁縣朴三奉獄 威逼朴召史。第四日致死。不檢。○本道啓。服滷旣有詞證。威逼亦甚明白。末後變招。情益狡惡。
判。此獄與豐德獄案。如印一板。此獄之三奉。卽豐德有奉之假面。而豐德金女之斷食者十日。卽此獄朴女之滷飮於四日 是置。眞所謂善惡無不對。向於金女。褒之曰
烈哉金女。曾無愧色於曹娥漢姬。而貞操姱行之凜如秋霜。求之江漢游女。未易多聞。
今於朴女之旌褒也。豈容他語。誦諭判語。呼寫此案。龍仁朴女。亟令地方官表其閭 爲旀。兇身朴三奉。依豐德金有奉例。嚴飭推官。卽捧遲晩招。以慰烈女之幽寃 爲有矣。有奉案判付一通後錄。下送於該邑之意。分付道臣。
심리록 제29권 / 정사년(1797) 2 ○ 경기 / 용인(龍仁) 박삼봉(朴三奉)의 옥사
박삼봉이 청상과부 박 여인을 겁간하려고 밤을 틈타 묶어 갔는데, 박 여인이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와서는 간수를 마시고 4일 만에 죽었다.
검시하지 않았다.
병진년(1796, 정조20) 11월에 옥사가 성립되었다.
[본도의 계사] 간수를 마신 데 대해 사증(詞證)이 있으며, 위협하고 핍박한 것도 명백합니다. 끝에 가서 공초를 바꾼 것은 정상이 더욱 교활하고 악랄합니다.
[판부] 이 옥사는 풍덕(豊德)의 옥안과 마치 한 판에서 찍어 낸 것처럼 똑같다. 이 옥사의 박삼봉은 바로 풍덕 김유봉(金有奉)과 얼굴만 바뀐 것이고, 풍덕 김 여인이 열흘 동안 단식한 것은 바로 이 옥사에서 박 여인이 간수를 마시고 4일 만에 죽은 것과 같으니, 참으로 이른바 선과 악이 그대로 대응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김 여인을 기리면서 “열녀로다 김 여인이여. 조아(曹娥)와 한희(漢姬)에게 비겨도 손색이 없도다. 곧은 지조와 아름다운 행실이 엄정하기가 추상과 같으니, 강한(江漢)의 유녀(游女)에서 찾아보더라도 그런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제 박 여인을 정표(旌表)하는 데 어찌 다른 말을 하겠는가. 그때 판부한 말을 읊어 주어 이 옥안에 쓰면 될 것이다. 용인 박 여인은 속히 지방관으로 하여금 정려(旌閭)하게 하고, 범인 박삼봉은 풍덕 김유봉의 예에 따라 추관을 엄히 신칙하여 즉시 지만하는 공초를 받아 열녀의 억울함을 위로해 주도록 하되, 김유봉 옥안의 판부 한 통을 뒤에 기록해서 해읍에 내려 보내라고 도신에게 분부하라. -5월-
[형조의 계사] 우의정 이병모(李秉模)는 “박 여인에게 정표하라는 하교가 해와 별처럼 밝게 게시되었으니, 박삼봉의 위협하고 핍박한 죄가 어찌 해당 형률을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결박당하여 부르짖으며 울고 간수를 마시고 자진하였는데, 삼생(三生)의 원수는 아직도 떳떳한 형률을 받지 않고 있으니, 구천에서도 억울함이 풀어질 날이 없을 것입니다.
[판부] 이 옥사의 박삼봉은 바로 풍덕의 김유봉이고, 풍덕의 김 조이는 이 옥사의 박 조이이다. 억울함을 풀어 주고 포악함을 다스리는 것은 풍덕의 옥사와 마찬가지이니, 정표는 이미 시행하였고 범인이 손을 댔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끝내 논의하기 어렵다고 말하지 말고 계속 추문하도록 하라. -무오년(1798, 정조22) 5월-
[주-D001] 풍덕(豊德)의 옥안 : 풍덕 김유봉(金有奉)의 옥사로 이 역시 능욕을 당한 과부가 10일 동안 단식하여 자살한 사건이다. 《심리록》 제29권 〈풍덕(豊德) 김유봉(金有奉)의 옥사〉에 자세한 내용이 있다.
ⓒ 한국고전번역원 | 강여진 (역) |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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弘齋全書卷百五十七 / 審理錄二十三
京畿龍仁縣朴三奉獄 刑曹啓。右議政李秉模以爲朴女旌褒之敎。昭揭日星。三奉脅逼之罪。詎逭當律。臣等以爲讎寃尙逭常憲。幽鬱無時可洩。
判。此獄之三奉。卽豐德之金有奉。豐德之金召史。亦此獄之朴召史。雪幽寃而戢暴亂。與豐德獄一也。莫曰綽楔已施。兇身終難議到於手犯與不手犯之間。使之仍推。見丁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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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21년 정사(1797) 5월 22일(신유)
21-05-22[42] 용인(龍仁)의 박 조이(朴召史)에게 정려하고 죄인 박삼봉(朴三奉)에 대해서는 즉시 지만(遲晚)한다는 공초를 받으며, 영흥(永興) 윤 조이(尹召史)의 옥사는 영흥 부사에게 지시하여 다시 자세히 조사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 경기 감사 이재학의 장계에,
“용인의 죄인 박삼봉이 박 조이를 위협하고 핍박하여 4일 만에 죽게 한 사건입니다. 병진년(1796, 정조20) 11월 18일 용인 현령(龍仁縣令) 정우태(丁遇泰)의 첩정(牒呈)에 ‘본현(本縣)에 사는 이 조이(李召史)의 공초에 「작년에 사위가 죽어서 제 딸이 젖먹이를 데리고 와서 저와 서로 의지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달 26일 같은 면에 사는 박삼봉이 이웃에 사는 홍설운(洪雪云)ㆍ김금선봉(金金先奉) 등과 작당(作黨)하여 밤중에 제 딸이 혼자 자는 방에 쳐들어와서 보쌈해 갔습니다. 제 딸은 밤새도록 소리쳐 울다가 날이 밝자 도망쳐 돌아와서는 29일에 간수를 마시고 자살했습니다. 즉시 관에 정소(呈訴)하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에게 맞은 것이 아니고 스스로 간수를 마시고 죽었기 때문에 즉시 발고장을 제출할 수 없어서 관에 넣고 땅에 묻었습니다. 그러나 여식이 자살한 것은 박삼봉이 겁탈하려 했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니 법에 따라 처분해 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박삼봉의 공초에는 「저는 가난 때문에 나이 서른이 다 되도록 아직 장가를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이번에 죽은 여인이 다른 사람에게 개가(改嫁)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같은 마을에 사는 김금선봉 등과 함께 그 여인의 집으로 가서 저 혼자 방으로 들어가 이불에 싸서 메고 왔습니다. 하지만 그 여인이 발악을 하며 따르지 않으므로 날이 밝기를 기다려 풀어 주고 조금도 손을 대지 않았는데, 그 여인이 스스로 간수를 마시고 죽었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옥사는 당초 발고한 것이 매우 늦었기 때문에 미처 검험을 실시하지 못했지만 끝에 가서 상세히 구비된 고을의 보고에 따라 연달아 동추(同推)하였습니다. 간수를 마신 상황에 대해서는 이미 사증(詞證)이 있고 위협하고 핍박한 일 또한 매우 명백하니 검장(檢狀)이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이유로 옥사를 성립시키는 데에 의심을 가질 수는 없습니다. 박 여인의 늠름한 절개는 진실로 가상하고 감탄스럽기 그지없으며 박삼봉의 음흉하고 간특한 정상은 일시적으로 강포(强暴)한 짓을 한 부류보다 더 심합니다. 법문 가운데 강간하기 위해 위협하고 핍박하여 사망하게 한 데 대한 형률을 그가 어찌 감히 피할 수 있겠습니까. 각별히 엄히 형신하여 기어이 자백을 받아 내겠습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이 옥사는 풍덕(豐德)의 옥안과 마치 한판에서 찍어 낸 것처럼 똑같다. 이 옥사의 박삼봉은 바로 풍덕의 김유봉(金有奉)과 얼굴만 바뀐 것이고, 풍덕의 김 여인이 열흘 동안 단식한 것은 바로 이 옥사에서 박 여인이 간수를 마시고 4일 만에 죽은 것과 같으니, 참으로 이른바 선과 악이 그대로 대응되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김 여인을 기리면서 ‘열녀로다, 김 여인이여. 조아(曹娥)와 한희(漢姬)에게 비겨도 손색이 없도다. 곧은 지조와 아름다운 행실이 엄정하기가 추상과 같으니, 강한(江漢)의 유녀(游女)에서 찾아보더라도 그런 사람이 많다는 말을 듣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이제 박 여인을 정포(旌褒)하는 데 어찌 다른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때 판부한 말을 읊어 주어 이 옥안에 쓰면 될 것이다. 용인 박 여인은 속히 지방관에게 지시하여 정려(旌閭)하게 하고, 범인 박삼봉은 풍덕 김유봉의 예에 따라 추관(推官)을 엄히 신칙하여 즉시 지만한다는 공초를 받아 냄으로써 열녀의 억울함을 위로해 주도록 하되, 김유봉의 옥안에 대한 판부 한 통을 뒤에 기록해서 용인읍에 내려보내라고 도신에게 분부하라.”
하였다. 또 장계에,
“용인 박 조이의 옥사는, 시친(屍親)이 매장한 지 여러 날이 지난 뒤에 발고했기 때문에 검험을 시행하지는 못했지만 사증이 구비되었고 사건의 정황도 명백하여 법에 따라 옥사를 성립해야 하므로 요점을 추려서 급히 보고합니다. 형조에서 상께 여쭈어 처리하게 해 주소서. 일전에 심리(審理)할 때에는 미처 살옥 문안에 입록(入錄)되지 않았기 때문에 장계를 작성하여 올릴 때 조검(照檢)하지 못하고 지금에야 뒤미처 아뢰게 되었기에 황공하여 대죄(待罪)합니다.”
하여, 전교하기를,
“살피지 못한 책임을 피하기 어려우니 경은 추고하겠다. 다시 누락된 사건이 없다고 어찌 장담하겠는가. 상세히 살펴서 만약 누락된 사건이 있다면 다시 즉시 녹계(錄啓)하라고 회유(回諭)하라.”
하였다.
○ 형조가 아뢰기를,
“영흥부(永興府)의 살옥 죄인(殺獄罪人) 윤 조이(尹召史)의 옥안에 대해 판하하신 대로 본조의 낭관을 보내 대신에게 문의하였습니다.
좌의정 채제공은 ‘오 조이(吳召史)가 사망한 것이 전적으로 윤 조이가 떠밀었기 때문임은 여러 문안을 살펴볼 때 전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정상을 따져 보면 윤 조이가 일시적인 분을 이기지 못해 두 번이나 떠밀게 되었지만 반드시 죽이려는 마음에서 그런 것은 아닌 만큼 반드시 죽어야 할 곳에서 살릴 방도를 생각해야 한다는 판부는 참으로 죄수를 불쌍하게 여기는 성인의 뜻에서 나온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두 여인은 시어머니가 없는 상태에서 형제가 한집에 살고 있으며 이른바 손아래 동서는 시집온 지 불과 반년밖에 되지 않았고 나이도 스무 살이 채 안 되니 손위 동서는 바로 시어머니나 마찬가지입니다. 설사 손아래 동서가 자기에게 말을 불손하게 했다 하더라도 깨우치고 나무라서 동서 간의 우의를 보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사소한 일 때문에 갑자기 편협하게 독기를 부려서 부엌 바닥으로 떠미는 바람에 뾰족한 돌의 모서리에 얼굴이 부딪혀 상처가 이미 낭자하였는데, 간신히 일어서자 거듭해서 손을 놀려 더 사납게 떠밀어 가슴팍에 중상을 입고 얼마 안 되어 숨을 거두게 하였습니다. 그 광경을 상상해 보면 윤 조이가 사납고 매섭게 굴 때에 전혀 사람의 도리가 없었다는 것을 저절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오 조이의 남편이 그 처의 죽음을 이미 어쩔 수 없는 일로 돌리고 형수를 위해 악을 감추어 주려 했던 점은 가상한 일로 죄를 줄 수 없는데 감영과 영흥부에서 이것을 죄로 삼아 엄히 다스리고야 말려고 한 것은 소견이 너무도 미치지 못한 것입니다. 윤 조이의 죄는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따질 것 없이 진실로 죽이고 용서하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윤 조이가 살아서 옥문(獄門)을 나서게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우의정 이병모는 ‘여성은 비록 급한 상황이라도 남자만큼 사납게 손찌검을 할 수는 없고, 돌이 비록 뾰족하더라도 부딪혔을 때 쇠만큼 심한 상처를 입히지는 못합니다. 그런데 여인의 손으로 돌에 떠밀어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듯합니다. 그 광경을 상상해 보면 필시 두 번째 떠밀고 넘어뜨릴 때에 따로 손과 다리를 썼을 것인데, 등에 짓찧고 밟은 흔적이 없는 데다가 검험의 보고에서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이것 때문에 따로 새로운 의문을 제기하여 사안(死案)에 덧붙일 수는 없지만 동서 간에 친애해야 하는 지극한 우의는 잘 모르고 매양 서로 꺼리고 싫은 것만 우환거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묵은 앙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진실로 옥사를 판결하는 체모에 맞지 않으며 풍속을 징계하는 정사로 보아 남남 간에 싸운 것보다는 배로 엄하게 다스려야 할 것입니다. 또 그 남편이 능히 처를 가련하게 여기는 마음을 버리고 이렇게 형수를 위해 숨겨 준 것은 진실로 성상의 하교와 같이 어리석은 백성이 쉽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니 이는 장려할 만한 일이지만 저쪽은 더욱 가증스러운데 갑자기 참작하여 결단하는 것은 혹 죽은 여인에게는 조금은 억울한 단서가 될 듯합니다. 바라건대 상께서 재결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옥안을 되풀이해서 살펴보고 반복해서 궁구해 보건대 대체로 서로 싸운 단서는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고, 이치에 근거하여 나무라고 훈계하는 말을 한 것이니 동서 사이에 어찌 이렇게 살인의 변고가 날 것이라고 생각했겠습니까. 다만 오 여인의 성정과 행실이 정숙하지 못하여 순종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더하여 말대꾸를 하며 욕을 했으니 분이 나서 여러 차례 떠민 것은 대체로 무식한 상것들이 본래 으레 하는 습관입니다. 그런데 마침 부엌에서 넘어진 곳에 여기저기 돌이 있었고 모두 뾰족하였으니 요해처인 가슴팍과 명치가 부딪혀 긁혔을 것은 당연한 형세입니다. 그 심정을 따져 보면 비록 고의로 저지른 죄는 아니지만 그 행적을 보면 해당 형률을 어찌 피하겠습니까. 옥사가 성립된 데에 겁이 나서 물에 빠져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은 그 정상을 따져 볼 때 더욱 지극히 교활하고 간특합니다. 도신에게 분부하여 각별히 엄히 형신하여 기어이 자백을 받아 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여, 전교하기를,
“대신의 수의(收議)와 경들의 회계 내용이 대체로 같은데, 모두 한쪽으로 치우쳐 반대쪽을 보는 데 소홀함을 면치 못하였다. 행적이나 증거로 보아 누군들 의심스러운 경우에 해당하여 가볍게 형을 주자는 쪽으로 논의하려고 하겠는가마는, 정리와 형세와 사리와 광경에 대해 해당 수령으로 하여금 공평한 마음으로 죄수의 안색과 언사 및 고을의 여론에서 자세히 조사하게 하고, 이어 다시 직접 가서 부엌의 돌 있는 데를 세세히 살피게 한다면 틀림없이 파악할 단서와 근거할 자료가 있어 필시 수의나 회계 내용과는 서로 어긋나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도신에게 지시하여 주추관(主推官)을 엄히 신칙하여 신문하여 보고하게 하고 보고를 받은 다음 도신도 의견을 갖추어 장계로 보고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주-C001] 신유 : 원문은 ‘辛卯’인데, 간지 순서에 따라 ‘卯’를 ‘酉’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01] 용인의 …… 사건 : 박삼봉(朴三奉)이 청상과부 박 여인을 겁간하려고 밤을 틈타 묶어 갔는데 박 여인이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와서는 간수를 마시고 4일 만에 죽은 사건으로, 검시하지 않았다. 1796년(정조20) 11월에 옥사가 성립되었다. 《국역 심리록 제29권 정사년 경기》[주-D002] 풍덕(豐德)의 옥안 : 풍덕 김유봉(金有奉)의 옥사를 말한다. 김유봉이 대낮에 강간하려 하자 능욕을 당한 김 조이(金召史)가 10일 동안 단식하여 자살한 사건이다. 《국역 심리록 제29권 정사년 경기》[주-D003] 조아(曹娥)와 한희(漢姬) : 조아는 후한(後漢) 때의 효녀로, 아버지가 익사하자 자신도 아버지의 뒤를 따라 강에 투신하였다. 《後漢書 卷84 列女傳 孝女曹娥》 한희는 정확히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 수 없지만, 앞의 5월 18일 기사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두보(杜甫)의 〈가인(佳人)〉 시에 “날씨는 춥고 푸른 옷소매 얇으니, 해 저물 제 긴 대나무 숲에 의지해 있노라.〔天寒翠袖薄 日暮倚脩竹〕”라는 구절이 있는데, 날씨가 추워져도 지조를 바꾸지 않는 대나무에 의지했다는 의미로 정절이 있는 여인을 지칭하는 고사로 쓰이는 것으로 볼 때 아마도 특정 인물이라기보다는 시의 대상이 된 중국 여인을 의미하는 듯하다.[주-D004] 강한(江漢)의 유녀(游女) : 《시경》 〈한광(漢廣)〉에 “한수(漢水)에 놀러 나온 여자가 있으니, 구할 수 없도다.〔漢有遊女 不可求思〕”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 부분의 주석을 간추려 보면, 강한의 풍속은 여자들이 놀기를 좋아하였는데 문왕(文王)의 교화가 미치자 풍속이 변하여, 놀러 나온 여자들이 하나같이 단정하고 정숙하여 전날처럼 구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는 내용이다.[주-D005] 김 여인을 …… 하였다 : 풍덕(豐德)의 김 조이(金召史)가, 김유봉(金有奉)이 대낮에 강간하려 하는 것을 뿌리치고 열흘간의 단식 끝에 사망한 사건에 대한 판부에서 그 지조와 아름다운 행실을 이와 같이 기렸다. 《日省錄 正祖 21年 5月 18日》[주-D006] 영흥부(永興府)의 …… 옥안 : 윤 여인(尹女人)이 동서인 오 여인(吳女人)이 순종하지 않는다고 꾸짖으며 부엌의 돌 있는 곳으로 떠밀어 그 자리에서 죽게 한 사건으로, 오 여인의 남편이 형수가 사형되는 것을 면하게 하려고 죄를 감추어 주었다 하여 함경 감사와 검관(檢官)이 죄를 청하였으나 정조는 정상을 참작할 만한 점이 있다 하여 좌상과 우상에게 문의하고 보고하게 하였다. 《日省錄 正祖 21年 5月 18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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