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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봉의 <문화유산답사> | 32화 찾는 이 없는 서원, 적막만이 감도네[문화유산답사41] 경남 함양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02.11.08 14:25l최종 업데이트 02.11.08 16:01l
우리 살아가는 사회에 소위 '뼈대있는 가문'이 있는가 하면 '뼈대있는 고장'도 있게 마련이다. 이때 뼈대있는 고장을 들라 하면 보통 경북 안동을 떠올리게 마련이다. 아마도 조선시대 내내 많은 석학들을 배출한 고장이자, 세파에 휘둘리지 않는 나름의 심지 굳은 양반 문화를 발전시켜 온 곳이기에 안동을 떠올리는 데 주저하지 않는가 보다. 그런데 뼈대있는 고장에 과연 안동만 있는 것일까.
옛말에 '좌(左) 안동 우(右) 함양'이라는 말이 있다. 즉 왼쪽에는 안동이 있다면 오른쪽에는 함양이 있다는 이야기인데, 도성 한양에 있는 왕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 왼쪽에 안동이 있고 오른쪽에 함양이 있으니 그른 말은 아닐 것이다. 지리산 북쪽 자락과 덕유산 사이에 위치한 함양은 거연정이나 덕천서원, 정여창 고택 등에서 볼 수 있듯 양반 문화가 발전한 지역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경북 안동 못지 않은 '뼈대있는' 고장이다.
지난 늦여름, 배낭 하나 둘러메고 찾은 남계서원(藍溪書院)과 청계서원(靑溪書院)은 함양의 학문을 잘 대변해 주는 곳이다. 아직 소수서원이나 도산서원 등에 비해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서원들이지만, 우리 성리학사(史)에 있어 무시하지 못할 의미를 갖는 이와 관련된 곳이기에 더욱 조심히 살펴보게 되는 것이 이들 서원이다.
'우 함양'의 기틀을 잡은 정여창…그리고 남계서원
▲ 서원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사당 담장 아래 배롱나무 옆에 서면 풍영루 너머로 남계천과 개평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개평마을은 정여창이 태어나 자란 마을이다. | |
ⓒ 권기봉 |
남계서원은 경북 영주에 있는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째로 설립된, 역사가 깊은 서원이다. 정여창 사후 약 49년 만인 명종 7년(1552년)에 설립된 이후 명종 21년인 1566년에 이미 왕으로부터 사액받았고,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에 의해 추진되었던 서원철폐 때에도 다른 46개의 서원들과 함께 살아남아 명맥을 꾸준히 유지했다. 앞에서 이런 유서 깊은 서원과 관계가 있다는 인물이 바로 정여창으로, 남계서원이 모시고 있는 학자가 바로 정여창이다.
보통 조선 성리학 5현을 꼽으라면 이황과 조광조를 비롯해 김굉필, 이언적, 정여창을 들게 되는데, 특히 남계서원은 바로 이 정여창과 관계가 깊다. '우 함양'의 기틀을 잡은 이가 바로 정여창(鄭汝昌, 1450~1504)으로 불리는 만큼 대학자로서의 정여창은, 당시 함양군수로 있던 도학자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했다.
수많은 천거에도 불구하고 공직에 나가지 않았지만 성종 21년인 1490년에 과거에 급제해 현재 함양 지역인 안음에서 현감 등을 지내기도 했다. 당시 일을 공정히 잘 처리한다는 말도 들었고 한때 연산군을 모시기도 했지만, 정작 연산군 4년인 1498년에 일어난 무오사화로 인해 멀리 함경도로 유배되었을 뿐만 아니라 갑자사화 때는 부관참시를 당하기도 했다. 다소 비극적인 인생 역정을 보인 정여창이긴 하지만 그의 문하에는 많은 유생들이 몰려드는 등 성시를 이루었고, 그의 사후 서원을 이룰 만큼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남계서원에서는 정여창을 모신 서원답게 곳곳에서 그의 흔적이 느껴진다.
연꽃을 사랑한 정여창
▲ 풍영루는 남계서원의 실질적인 정문 구실을 하는 건물로, 누에 오르면 몸과 마음도 시원해진다. | |
ⓒ 권기봉 |
일단 남계서원이 자리잡은 곳이 남계천 너머로 정여창이 태어나 살던 개평마을이 보이는 작은 구릉이다. 실제로 서원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고 할 수 있는 사당 담장 아래 배롱나무 옆에 서면 풍영루 너머로 남계천과 개평마을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원이 자리한 위치뿐만 아니라 건물에 붙여진 이름에서도 정여창의 숨결이 느껴지는데, 재실의 이름이 정여창이 좋아했던 연꽃에서 이름을 딴 애련헌(愛蓮軒)이다. 애련헌이 홀로 외롭지 않으라는 배려인 지 풍영루와 동·서재 사잇길 양쪽에 있는 네모난 연못엔 연이 그득해 물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정여창 사후에 지어진 이후 지금까지 온갖 풍상을 다 겪었을 남계서원. 연꽃이 있었기에, 연꽃을 사랑한 정여창의 숨결이 서원 곳곳에 서려있기에, 그의 학문을 숭상하는 유생들이 있었기에 그리 쓸쓸하진 않았으리라.
▲ 풍영루를 이루고 있는 목조 구조물 중 하나로 꽃무늬가 선명할 뿐만 아니라, 그 위에 보이는 세 마리의 오리가 인상적이다. | |
ⓒ 권기봉 |
한편 남계서원 옆에 자리잡은 청계서원은 역시 정여창과 동시대 인물인 김일손(金馹孫, 1464~1498)을 모시고 있는 사당으로, 남계서원보다는 다소 작은 규모로 자리했다. 김일손은 정여창보다 먼저 이미 무오사화 때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고난이 그치지 않았으나, 살아서는 훈구파 고관들의 부패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등 불의에 굽히지 않는 자세를 보여준 바 있다.
찾는 이 없는 서원, 적막만이 감도네…
한때는 영남 사림의 중심을 이뤘던 서원들이지만, 지금은 남계서원이나 청계서원 할 것 없이 찾는 이 거의 없는 쇠락한 서원일 뿐이다. 특히 청계서원은 홍살문이 굳게 닫혀 있어, 당시 이 서원을 세웠던 유생들과 그들이 섬겼던 김일손의 자취를 온전히 느낄 방도가 없었다. 가끔씩 찾아오는 답사 단체들이나 개인적인 길손들, 제사를 지내기 위해 오는 일부 사람들을 빼면 거의 찾는 이가 없다는 동네 주민의 설명이 있고 보면, 이들 서원은 우리네 관심사 밖의 영역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즈음에는 어떠한 참된 '이론'이나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 공부를 한다기보다는 각종 고시 패스를 목표로 혹은 조금이라도 몸값을 높여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이 젊은이들의 관심사이고 보면, 이런 방치가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 정여창이 사랑했다고 하는 연꽃. 풍영루와 동·서재 사이의 길 양쪽에 각각 네모난 연못이 있다. 풍성한 연 때문에 물빛이 보이지 않을 정도이다. | |
ⓒ 권기봉 |
그러나 아무리 각박한 세상이요, 영어 단어 하나 더 외울 시간, 컴퓨터 수업을 들을 시간이 절실하더라도 잠시 관심을 돌려보자. 이들 서원이 으뜸으로 치는 사람은 벼슬이 높거나 재산을 많이 모은 선비가 아니다. 벼슬은 높지 않더라도, 재산은 많지 않더라도 수양을 통해 확립한 자신의 생각을 믿고, 올곧은 말을 하고, 또 그것을 행동으로 옮겼던 정녕 '바른' 사람이었다. 이 말이 아무리 현실과 동떨어진 외로운 외침이라 할 지라도 그 '적막'의 세계로 한번쯤 짬을 내 찾아가 보기를 권한다. 가서 그 적막이 갖는 의미를, 내 주변에서 돌아가는 세상사의 천박함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해 볼 수 있다면 그 '짬'은 여느 짬과는 다를 것이다.
▲ 남계서원의 강당으로 쓰이는 명성당이다. 한때는 수많은 유생들의 강독 소리가 그치지 않았을 테지만 지금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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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계서원의 동재와 서재로, 학생들이 기숙하던 곳이다. 명성당을 중심으로 양쪽에서 서로 마주보고 서 있다. 각각의 건물 면적의 절반을 차지하는 대청마루를 눈여겨볼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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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계서원의 동재와 서재로, 학생들이 기숙하던 곳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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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면에서 어느 정도의 간격을 두고 지은 것으로 보아 제사 용구나 서책 등을 보관하던 창고로 보인다. 헤진 단청이 오히려 단촐하고 정갈한 맛을 풍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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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성당 뒤에 바로 붙어 있는 언덕 위에는 서원의 중심 건물이라 할 사당이 자리잡고 있다. 조용히 계단을 따라 올라가 보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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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북 영주 소수서원에 이어 두 번 째인 명종 7년(1552년)에 세워진 남계서원은 정여창과 강익, 정온 세 분을 모시고 있는데, 1566년에 왕으로부터 사액받았다. 사진은 사당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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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계서원 옆 청계서원. 정여창과 동시대 인물인 김일손을 배향하고 있는 사당으로, 남계서원보다는 다소 작은 규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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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여창이 무오사화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되었을 때, 김일손은 능지처참을 당하는 등 고난이 그치지 않았다. 그는 살아서 훈구파 고관들의 부패를 적극적으로 공격하는 등 불의에 굽히지 않는 자세를 보여준 바 있다. 청계서원은 이런 그의 자세와 학문적 성과를 높이 사는 유생들에 의해 꾸준히 가꾸어져 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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