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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412 성주간 화 – 133위 117° 박태진 마티아
“베드로가 다시 여쭈며 다짐하였다.
‘주님, 어찌하여 지금은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주님을 위해서라면 저는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나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겠다는 말이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요한 13,37-38).
133위 117° 박태진 마티아
이름 : 박태진 마티아, ‘하느님의 종’ 박선지 마르코 사촌형, 대전교구 박재만 타대오 신부 高祖代
출생 : 1819년, 원머리(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순교 : 1868년, 교수, 수원
박태진 마티아의 본관은 밀양이며, ‘태진’은 그의 보명(譜名: 족보에 기록된 이름)이다. 그의 고향은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로, 그의 선대에 박해를 피해 이곳에 정착하여 염전을 일구면서 살았다.[1]
원머리 일대에는 일찍부터 천주 신앙이 전파되었으나, 박태진 마티아의 집안에서는 뒤늦게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집안의 비신자 어른들 때문에 교리를 실천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으며, 신부가 올 때마다 성사를 받기도 어려웠다. 그럼에도 그는 사촌인 ‘하느님의 종’ 박선진 마르코와 함께 교우들과 연락하면서 꿋꿋이 신앙을 지켰다.
1866년과 1867년에 원머리 교우들 몇몇이 체포되어 순교했으나, 박태진 마티아와 박선진 마르코는 체포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868년 가을에 원머리로 들이닥친 수원 포교들에게 함께 체포되어 수원으로 압송되었다.
박태진 마티아는 수원 관아에 이르러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자 잠시 마음이 약해지게 되었다. 이때 사촌인 박선진 마르코가 그에게 “이제는 배교하여도 죽을 것이다. 그러니 큰 임금을 배반하고 죽어서 지옥의 영원한 벌을 받아 어찌하겠느냐?”고 권면하였고, 이에 박태진 마티아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박해자들 앞에서 꿋꿋이 신앙을 증언하였다. 그런 다음 옥에 갇힌 지 15일 만에 사촌 박선진 마르코와 함께 교수형으로 순교했으니, 당시 박태진 마티아의 나이 49세였다.[2]
박태진 마티아와 박선진 마르코가 순교한 뒤, 그들의 시신은 같은 마을에 살던 서덕행이 거두어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3번지)에 나란히 안장하였다.[3][3.1]
[註]__________
[1] 최효근, 「원머리 순교자의 내역」(필사본), 1989; 천주교 신평 교회, 「원머리 순교자 묘역의 내력」, 1989.4.
[2] 『치명일기』, 정리 번호 373.374번; 『병인치명사적』, 1권. 11-12면. 천주교 대전교구 박재만 타대오 신부는 그의 5세손이다.
[3] 『병인치명사적』, 1권. 11면과 최효근의 앞의 글을 참조. 이후 박태진 마티아와 박선진 마르코의 무덤은 1989년 4월 3일에 발굴되었으며, 그 유해는 신평 성당 구내로 이장되었다가 2009년 11월 3일에 본디 있던 원머리 묘역으로 다시 이장되었다.
[3.1] ‘당진 원머리 순교사와 교회사의 의의’(차기진) & ‘신평지역의 공소사 연구’(김정환)
I. 당진 원머리 순교사와 교회사의 의의/차기진(양업교회사연구소)
<목차>
1. 머리말
2. 원머리 순교사의 지역적 배경
1) 내포 지역사와 당진 원머리의 위치
2) 조선 후기의 홍주목과 원머리 지역사
3. 내포 천주교회의 확대와 원머리 지역
4. 원머리 교회사와 병인박해 순교자
1) 원머리 신앙 공동체의 형성
2) 병인박해와 원머리 순교자의 탄생
3) 원머리 순교자들의 주요 행적
5. 원머리 순교자의 유해 이장 과정
1) 첫 번째 이장 : 원머리에서 신평 성당으로
2) 두 번째 이장 : 신평 성당에서 원머리로
6. 맺음말 : 원머리 순교사의 특징과 의의
1. 머리말
당진 원머리(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는 아산만 남쪽, 삽교천 서쪽에 위치한 한적한 농촌 마을로, 여러 차례의 간척 사업으로 경지 면적은 넓어졌지만, 대체로 예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또 원머리 순교자 묘역은 물론 1956년에 건립된 이웃의 음섬이 공소 강당(신평면 매산리, 일명 음샘이), 1960년에 축성된 새터(신평면 매산리) 공소 강당, 1962년에 건립된 원머리 공소 강당 등도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따라서 큰 변화가 있기 전에 사목상의 조치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필자는 일찍이 내포(內浦) 지역의 옛 교우촌과 공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원머리와 그 인근 지역이 내포 지역은 물론 한국 천주교회사에서도 주목할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최근의 순교자 유해를 본래의 자리로 재이장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이 지역의 교회사적 의미를 다시 한번 되새기게 되었다.
그러면 왜 당진 한 모퉁이에 위치한 이 작은 마을에 교회사의 의미를 부여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첫째로 이 지역이 병인박해기(丙寅迫害期)의 교회 순교록(殉敎錄)에서 확인되는 순교자들의 본향 즉 순교사가 시작된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또한 보기 드물게 당시에 조성된 순교자의 묘가 현재까지 보존되어 오고 있는 특별한 장소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원머리 일대는 내포 지역의 유명한 순례지인 홍주(지금의 홍성)․해미와 같은 순교자들의 처형지요 순교사가 완성된 장소와 하나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본고에서는 먼저 원머리 교회사의 배경으로서 지역적 배경은 물론 내포(內浦) 교회사로 설명되는 넓은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신앙의 흐름을 살펴봄으로써 이에 대해 폭넓은 이해를 구해 보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원머리 지역 교회사를 순교사의 관점에서 서술해 보았다. 여기에는 원머리 신앙 공동체의 형성 시기, 이 지역에서 탄생한 병인박해 순교자의 현황과 순교자들의 주요 행적이 포함될 것이다. 이와 함께 본고에서는 원머리 순교사가 지니는 특징과 역사적 의의를 함께 밝혀줌으로써 순례지로서의 원머리 개발에 타당성을 부여해 주는 역할도 해 보고자 하였다.
2. 원머리 순교사의 지역적 배경
1) 내포 지역사와 당진 원머리의 위치
그림1) 대동여지도의 대진과 돈곶(유궁진)
현재의 ‘당진 원머리’ 즉 조선 후기의 ‘홍주 원머리’(현 충남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지역을 포함하는 아산만 일대는 당시 ‘내포’라는 이름으로 통칭되었다. 내포는 순수한 우리말로 ‘안개’라는 일반 명사이지만, 대동지지(大東地志)에서 “대진(大津, 한나루) 이남을 통칭하여 ‘내포’라고 한다”고 기록한 것처럼, 당시에는 충청도의 특정 지역을 의미하는 고유명사처럼 사용되었다. 또 당대의 지도에서 볼 때 대진(한나루)은 좁은 의미에서 홍주 대진(현 당진시 송악면 한진리)을, 넓은 의미에서는 수원 대진(현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원정리)에서 홍주 대진을 잇는 지역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내포 지역에 대해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를 통해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충청도에서는 내포가 가장 좋다. 공주에서 서북쪽으로 200리쯤에 가야산이 있다. 서쪽은 큰 바다이고 북쪽은 경기의 바닷가 고을과 큰 못(즉 아산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곧 서해가 쑥 들어온 곳이다. 동쪽은 큰 들판이고, 들판 가운데에는 또 큰 포구[大浦] 하나가 있으니, 이름이 유궁진(由宮津)으로, 밀물이 들어오지 않으면 배를 이용할 수 없다. 남쪽으로 오서산(烏棲山)에 막혀 있는데 가야산(伽倻山)으로부터 온 맥으로, 단지 동남쪽으로 공주와 통한다.
가야산 앞뒤에 있는 열 개 고을을 함께 내포라 한다.…… 그중에서 보령의 산천이 가장 아름답다.…… 북쪽에는 결성․해미가 있고, 서쪽에는 큰 개 너머에 안면도가 있다. 세 읍은 가야산의 서쪽에 위치한다. 또 북쪽에는 태안과 서산이 있다.…… 서산 동쪽은 면천과 당진이며, 동쪽으로 큰 개를 건너면 아산이다.…… 이 네 읍은 가야산의 북쪽에 위치한다. 가야산의 동쪽은 홍주와 덕산이다. 모두 유궁진의 서쪽에 있는데, 개 동쪽의 예산·신창과 더불어 뱃길로 한양과 통하는데 몹시 빠르다.…… 이 11개 고을은 모두 오서산의 북쪽에 있다.
이중환은 이처럼 내포 지역은 ‘가야산 앞뒤에 있는 10개 고을’을 지칭한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보령·결성·해미의 세 읍, 태안·서산·면천․당진의 네 읍, 홍주·덕산·예산·신창의 네 읍 등 모두 11개 고을을 내포로 보고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내포 지역을 규정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그림2) <동국지도>의 범근내포
그림3) <동국여지승람>의 범근내포
이와 함께 이중환은 내포의 중심지로 가야산을 거론하고, 아울러 내포 지역과 유궁진(由宮津)이 깊이 연관되어 있는 것으로 설명하였다. 가야산의 동쪽의 큰 들판 가운데 있는 큰 포구가 유궁진이고, 그 주변에 있는 고을들이 내포 지역을 형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최남선(崔南善)도 “내포라 함은 충청도 서남 모퉁이의 가야산맥 주위에 있는 여러 고을을 삽교천의 상류, 유궁진의 안쪽에 있다고 해서 이르는 말”이라고 설명하였다. 현재 이 유궁진은 대동지지의 덕산현 돈곶포(頓串浦. 현 아산시 선장면 돈포리의 돈곶) 즉 증보문헌비고의 융진(戎陣)에 비정(比定)되고 있으니, 지금의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는 지점(현 예산군 신암면과 아산시 선장면 접경 지역)이 바로 이곳이다.
유궁진 하류(현 삽교천 방조제 안쪽)에는 범근내(犯斤乃 혹은 犯斤內) 조창 앞에 해당하는 범근내포가 있었다. 실제로 조선 시대의 <동국지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범근내포’가 유궁진 입구에 표기되어 있으며, <동국여도>와 <대동여전도>에는 그 위치에 ‘내포’(內浦)가 표기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내포의 포(浦)는 대진(한나루) 아래쪽이요 유궁진의 입구에 해당하는 범근내포의 ‘포’에서 유래된 것으로 생각된다. 또 내포의 본래 한자는 乃浦였는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內浦로 굳어지게 된 것 같다.
물론 내포의 지역적 범위는 이중환이 말하는 가야산과 유궁진 인근의 10~11개 고을에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조선 후기의 영조대에는 이보다 훨씬 넓은 지역적 의미로서의 내포라는 용어가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영의정) 이광좌(李光佐)가 아뢰기를, “호서 내포의 18개 고을이 이미 적지(赤地)로 판명되었으니, 청컨대 박사창(朴師昌)을 어사로 파견해 떠도는 백성을 편안히 수습하고 수령을 염찰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위의 기록에서 설명되고 있는 내포 지역 18개 고을은 홍주 진관(洪州鎭管)에 속한 18개 군현에 비정되고 있다. 내포의 지역적 범위 안에는 이처럼 많은 고을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당진 원머리도 여기에 속하는 마을 가운데 하나였다.
한편 천주교회사의 기록에도 내포라는 이름이 나타나는데, 그 지역적 범위도 위에서와 같이 폭넓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우선 교회사에서는 ‘충청도에서도 서해로 불거져 나온 지방’을 내포라고 했으며,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가 복음 전파를 한 지역’이 내포평야라고 하였다. 이후 내포 지역 교회는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1861년 10월에는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S. Berneux, 張敬一) 주교에 의해 전국이 8개의 지역 본당으로 구분되면서 내포 지역에만 2개의 지역 본당이 설립되었다. 즉 같은 해 4월에 입국하여 조선어를 배우던 랑드르(J. M. Landre, 洪) 신부가 ‘성모왕고구역’으로 이름이 붙여진 하부 내포 본당(충청도 해안)을 담당하게 되고, 1845년부터 조선에서 활동해 오던 다블뤼(A. Daveluy, 安敦伊) 주교는 ‘성모성탄구역’으로 이름이 붙여진 상부 내포 본당(충청도 홍주와 내륙)을 담당하게 된다. 원머리와 인근 지역은 하부 내포 본당에 속해 있었다.
지금의 당진 원머리는 이처럼 지역적으로는 내포 지역에 속해 있었고, 교회사에서 본다면 하부 내포 본당에 속해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의 여러 지도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원머리 지역은 내포 지역이 시작되는 북쪽 끝자락의 해안가에 위치해 있어 어염(魚鹽) 자원이 풍부하고, 해로로는 홍주 대진을 통해 수원과 경기도 해안 지역과 연결되어 있었으며, 육로로는 내포 남부 지역으로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2) 조선 후기의 홍주목과 원머리 지역사
그림4) 홍주목 대동여지도
그림5) 홍주목 지도(1872년)
홍주목은 조선 태종 13년(1413)에 설치된 뒤 조선 후기까지 큰 변화 없이 그대로 내려오다가 고종 32년(1895년) 5월 26일에 공포된 칙령 제98호 <지방 제도 개정에 관한 안건>에 따라 전국을 23부제로 개편할 때 홍주부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896년 8월 4일에 공포된 칙령 제36호 <지방 제도와 관제 개정에 관한 안건>에 따라 전국을 8도제(23부제)에서 13도로 개편할 때, 충청남도 홍주군이 되었다.
지금의 당진 원머리 일대는 고려 초까지 신평현(新平縣)에 속해 있었다. 그러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 신평현이 홍주에 편입되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신평현이 홍주목의 속현이 되면서 이 지역이 현내(縣內)·신남(新南)·신북면(新北面) 등 3개 면으로 나뉨과 동시에 원머리 지역은 홍주목 현내면에 속하게 된다. 그러다가 1895년의 지방 제도 개정 때 면천군에 편입되었으며, 1914년의 지방 행정 구역 개편 때 다시 당진시 신평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원머리는 바닷물을 막아 간척지로 사용하기 위해 제방[堰]을 쌓은 곳의 끝부분 즉 ‘제방머리’ 즉 ‘언두리’(堰頭里)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새 간척지로 형성된 ‘신원들’의 머리 부분에 있는 마을이다. 조선 후기 원머리의 인근 마을로는 한정·고역·신대·하절·상절·상후·하후 등이 있었으며, 다음의 <대동여지도>에서 보는 것처럼 1895년 이전까지 현내·신남·신북면(현 신평․송악면)에서 합남·합북면 지역(현 합덕읍)까지는 홍주목의 월경지(越境地) 즉 비입지(飛入地)였다. 이는 한 고을의 토지가 소속 군현 지역과 연결되어 있지 않고 다른 군현의 토지 안에 떨어져 있는 경우로, 홍주(현 홍성)에서 위의 지역에 가려면 필히 덕산현을 거쳐야만 하였다. 위의 지역들은 1895년 면천군에 편입되면서 월경지라는 꼬리표가 사라지게 된다.
이처럼 현내면·신남면·신북면·합남면·합북면 지역이 월경지가 된 이유는 고려 시대 홍주목에 속해 있던 당진현·여미현·면천군·정해현·덕풍현 등이 여러 차례에 걸쳐 분리 독립한 반면에 옛 신평현 지역만은 태종 13년에 홍주목의 속현이 된 이래 그대로 남게 된 때문이다. 또 이들 지역이 오랫동안 홍주의 월경지로 남게 된 이유는 어염 생산 및 조달, 조운 등의 요충지였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 후기까지 남아있던 홍주 북쪽 70리에 있던 신남면의 홍주 북창(北倉, 현 순성면 중방리 소재)의 존재도 이를 잘 설명해 준다.
<표 1> 조선 후기 홍주목 현내·신남·신북면의 마을 현황
면 | 마을 | 현 재 |
현내 | 하후(下後), 상후(上後), 부수(富壽), 하구(下舊), 도성(都城), 상구(上舊), 중촌(中村), 언두(堰頭), 전곡(全谷), 상절(上切), 하절(下切), 옹정(瓮井), 신대(新垈), 고역(古驛), 한정(寒井) | 신평면 매산리, 한정리, 부수리, 운정리, 신당리, 신흥리, 남산리 |
신남 | 거산장(巨山場), 상궁(上宮), 하궁(下宮), 신성(新城), 백업(白業), 송림(松林·松五), 상오(上梧), 하오(下梧), 상예(上芮), 하예(下芮), 평리(坪里), 창리(倉里), 일양(日陽) | 신평면 거산리, 상오리, 신송리 순성면 중방리 우강면 세류리 |
신북 | 고잔(古棧), 마항(馬項), 금천(金川), 소대(小垈), 오사(梧寺), 세곶(細串), 대대(大垈), 월곡(月谷), 전대(全垈), 상초(上草), 하초(下草), 진두(津頭), 내도(內島), 오산(鰲山), 부곡(富谷) | 신평면 금천리, 초대리 송악면 한진리, 고대리, 부곡리, 오곡리, 월곡리 |
천주교가 전파되어 나가던 18~19세기의 홍주목은 충청도 5개(공주·충주·홍주·천안·청주) 진관(鎭管)의 하나로, 목사(牧使, 정3품)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서천·서산·태안·면천·온양군의 4개 군과 홍산·덕산·청양·대흥·비인·결성·남포·보령·아산·신창·예산·해미·당진·평택현 등 14개 현 등 모두 18개 군현을 관할하고 있었다. 또 군사 제도상으로는 목사가 겸임하던 첨절제사(僉節制使)가 폐지되고 영장제(營長制)가 설립된 후 별도로 파견된 영장(營長, 즉 정3품의 鎭營長)이 군사권을 행사하면서 도적을 잡는 토포사(討捕使)를 겸하였다. 당시 홍주 진영은 충청도의 5개 진영 중 전영(前營)에 해당하였고, 영장의 집무처인 전영 동헌이 목사의 동헌과 별도로 설치되었다.
천주교 박해 때 현재의 당진 원머리를 비롯하여 충청도 남부 지역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일단 홍주로 압송되어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된 이유는 이러한 행정과 군사 체제 때문이었다. 그러나 다음에 설명한 것과 같이 1868년 이후에는 행정․군사 관할 지역과 상관없이 홍주 전영은 물론 수원과 해미 포교들까지도 원머리 지역에서 신자들을 체포한 것으로 나타난다. 수원과 해미에서 순교한 원머리 출신 신자들이 나타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3. 내포 천주교회의 확대와 원머리 지역
충청도의 천주교회는 1784년 겨울에 서울 수표교(水標橋, 현 서울 중구 수표동과 종로구 관수동 사이의 청계천에 있단 다리) 인근에 있던 이벽(李檗, 세례자 요한)의 집에서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인 1784년 말 혹은 1785년 초부터 형성된 내포 신앙 공동체 즉 내포 천주교회에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 교회를 설립한 사람은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출신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곤자가)으로, 그는 고향인 여사울에서 내포 전 지역으로 천주 신앙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 천주교회의 사도’라 불리게 된다.
이후 내포 천주교회는 19세기에 계속된 천주교 박해기 내내 한국 천주교회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신앙 공동체의 뿌리가 깊은 데다가 천주교 전파의 폭도 아주 넓었다는 데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연유로 내포 천주교회는 ‘신앙의 못자리’로 불리게 되었고, 1791년의 신해박해(辛亥迫害)와 1801년의 신유박해(辛酉迫害) 때부터 1866년의 병인박해 때까지 수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킴으로써 ‘순교자의 묘자리’라는 이름도 얻게 된다.
내포 천주교회의 확대 과정에서는 당진 원머리 지역을 포함하는 서부 해안 지대에도 천주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 주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A-① 요즈음(1788년) 듣자 하니 호우(湖右, 즉 충청도) 일대는 거의 집집마다 (천주교 서적을) 소장하여 전하면서 암송하고 있으며, 언문으로 번역하거나 베껴서 부녀자와 아이들에게까지 미쳤다고 합니다. 관장이 이를 금하여도 안 될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도리어 본받는 법으로 삼고 있다고 하니, 실로 급히 이들을 구제하지 않는다면 말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를 것입니다.
A-② 이수하(李秀夏, 보령 출신으로 승지를 지낸 인물)의 집은 충청도 보령현에 있는데, 사학이 더욱 성한 곳입니다. 그 고을의 현감 이일운(李日運)이 천주교 신자 10여 명을 징계하여 다스렸어도 효과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매번 간행하여 비밀히 감추어둔 (천주교) 서적들을 찾아내려고 하였지만, 워낙 비밀히 감추어 둔 탓에 마침내 찾아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 충청도에서 천주교 서적이 성행한다는 것은 이수하의 말뿐만이 아닙니다. 진산 군수 신사원(申史源)이 앞서 예산에 있을 때, 민간에 있는 요사한 서적들을 거두어 관리에게 맡겼다는 것을 전에 이미 저에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또 이번에 (신사원이) 저에게 회답한 편지 가운데서 이르기를 “예산의 촌민들이 가지고 있는 언문 번역본 또는 베낀 서적들을 刑吏의 궤 속에 맡겼는데, 그중에서 성교천설(聖敎淺說), 만물진원(萬物眞源) 두 책은 모두 증거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A-③ 이수하가 말하기를, “저의 집이 호중(湖中, 즉 충청도)에 있는데, 이곳에서는 사대부가 서학을 한다는 말을 듣지는 못하였고, 다만 염전의 일꾼이나 농부들이 많이 사교(邪敎)에 빠져있다는 것을 듣고는 마음으로 매우 놀랐지만, 그 늘어나는 형세가 금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위의 세 기록은 모두 1791년의 신해박해 이전 상황을 설명한 것으로, 내포 천주교회가 설립된 지 얼마 안 되어 여사울이 속한 예산 지역은 물론 남쪽의 보령 지역까지 천주교가 전파된 사실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뿐만 아니라 A-③에서 볼 때, 해안 지대에 거주하던 염전의 일꾼이나 내포평야 지대의 농부 등 하층민 출신들이 대거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1791년 이전에 이미 당진·면천·홍주 지역 여러 곳에 천주교가 전파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B-① (배관겸, 裵大得으로 추정)프란치스코(1740~1800)는 당진 고을에 있는 ‘진목’[長項] 마을 출신이었다. 선천적으로 선하면서 확고한 그는 거의 천주교가 한국에 전파되자마자 천주교 (교리를) 배웠고, 1791년에 그의 고을 수령에게서 박해를 받고 난 후 서산 고을 두름바위(Touroum Pahoi)로 이주하였으며, 거기서 열성으로 (교리를) 실천하였다. 그는 몇몇 다른 천주교인들의 동의 아래 신부를 맞이할 수 있도록 또다시 면천 고을 ‘양제’(楊堤)로 이주하였다. 거기서 그들은 경당까지 준비하였고, 열성으로 불붙어 있었는데, 1798년 혹은 1799년에 한 천주교인 배교자(즉 밀고자 조화진)가 홍주의 포졸들과 함께 나타났다. 프란치스코가 붙잡혔고 이 도시로 인도되었다.
B-② (1791년의 박해 때) 면천이라는 마을은 투옥된 신자의 엄청난 숫자로 주목을 받았다. 여러 달째 옥에 갇혀 있는 교우들을 보면서 박(취득, 朴取得) 라우렌시오(?~1799)는 가슴 깊이 그들을 마음 아파했고, 여러 차례 그들을 찾아가 위로하였다.……즉시 그는 붙잡혔고, (관장은) 그의 목에 무거운 칼을 씌우더니 그를 가혹하게 매질했다.……라우렌시오는 해미(海美) 관아로 보내어졌다가 곧이어 홍주 관아로 보내졌는데, 거기서 그는 혹독하게 곤장을 맞았으나 변하지 않았다.
B-③ (원시장) 베드로(1732~1793)는 홍주 고을에 있는 ‘응정리’ 출신으로, 한 양인(良人) 집안의 자손이었던 그는 상당한 재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성격의 격함으로 이름이 나서, 어른이나 아이, 노소, 그 누구도 그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없었고, 사람들은 그에게 호랑이라는 별명을 붙였다. 1789년 혹은 1790년에 매우 특별한 은총에 의해 50이 넘는 나이에 천주교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듣고 난 후, 그는 즉시 (천주교를) 받아들였다.…… (원시보) 야고보(1730~1799)는 1793년에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의 사촌 형으로 그와 함께 홍주 고을 ‘응정리’에 살면서 그와 같은 시기에 천주교 (교리를) 배웠다.
B-④ 김진후(金震厚) 비오(1739~1814)는 면천군 ‘솔뫼’의 양가(良家)에서 태어나……나이 50세쯤(1790년경) 되었을 때 비로소 천주교 이야기를 들었으나……감사 밑에서 어떤 조그마한 구실(관원)을 하나 얻어 하게 되자, 그는 친아들(즉 맏아들 김종현)의 권고를 그냥 오랫동안 물리쳤다. 그러나 끝내는 그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께 끌려갔으니 그는 관직을 버리고……‘계원’이라고도 불리는 김종한(金宗漢) 안드레아(?~1816)는 면천 ‘솔뫼’ 사람……
B-⑤ (방) 프란치스코는 면천 고을 ‘여름이’ 마을 출신이었다. 그는 지방 감사 밑에 비장이라는 조그만 직책을 갖고 있었다. 그의 입교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으나 보통을 넘는 열성을 가진 자로 알려져 있었고, 순교를 갈망하고 있었다. 1798년 혹은 1799년에 홍주 포졸들이 그를 붙잡으러 왔다.
위의 B-①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당진 진목(현 당진시 고대면 장항리)의 배관겸(프란치스코)은 천주교가 전파되자마자 천주 신앙을 수용했으며, 이후에는 면천 양제로 이주하여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또 박취득(라우렌시오)은 일찍이 서울의 지황(池璜, 사바)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했는데, B-②의 기록에 나타나는 것과 같이 면천 지역에 거주하던 이들 가운데서는 1791년 이전에 이미 천주 신앙을 수용한 신자들이 많았다. B-⑤에 수록된 방 프란치스코도 면천 여름이(현 당진시 면천면 대티리) 출신으로 나타난다. 배관겸·박취득·방 프란치스코 등은 1797년에 일어난 충청도의 정사박해(丁巳迫害) 때 체포되어 1799년과 1800년에 순교하였다.
B-③에 나타나는 것처럼 홍주 응정리(현 당진시 합덕읍 성동리 ☞鷹井里, ‘매물’ 당진시 합덕읍 석우리 428-8, 9번지, ‘매물앞골’ 합덕읍 성동리 45-3)에 살던 원시장(베드로)과 원시보(야고보)는 1789~1790년에 입교했으며, 원시장은 1793년에 홍주에서, 그의 사촌 형인 원시보는 1799년에 청주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또 B-④에서 보는 것처럼 1790년경에는 면천 솔뫼(현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 지역에도 김대건(안드레아) 신부의 종조부인 김종현에 의해 그 집안에 천주교가 수용되었다. 이후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김진후는 1814년에 해미에서, 종조부인 김종한은 1816년 대구에서 각각 순교하였다.
이 밖에도 사학징의에는 면천의 김진오(金辰五)가 1801년 이전에 물고된 사실이 나오며, 서울의 송운서(宋雲瑞, 일명 云瑞, 宋福明의 자)가 몇 해 전에 면천으로 이주해 살았고, 1791년에는 천안의 최천명(崔千明)에게 교리를 전했는데, 1801년 이전에 사망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또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홍주 신리(현 당진시 합덕읍 신리)에 거주하던 밀양 손씨 집안에서도 일찍이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즉 1839년의 순교자 손경서(孫敬瑞, 안드레아)의 조부(밀양 손씨 明泉公派 10세 손)인 손점수(孫點壽, 1744~1789)가 1785~1789년 사이에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 신리의 신앙이 응정리로 전파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러나 밀양 손씨 집안의 순교 행적에서 볼 때, 손점수가 아니라 그 아들 대인 11세 손 손후대(孫厚大)․손후설(孫厚卨)․손후언(孫厚彦) 때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실제로 당시의 전교 활동 기록과 내포 교회사의 위치에서 볼 때, 신리의 손씨 집안보다는 응정리의 원씨 집안에서 먼저 천주 신앙을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1784년 말 혹은 1785년 초에 내포 천주교회가 창설된 이후 1791년의 신해박해 때까지 충청도 서부 해안 지대에 거주하던 염전의 일꾼이나 내포 평야지대의 농부 등 하층민 출신들이 대거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리고 1790년대에는 원머리 인근 지역인 당진 진목, 홍주 응정리·신리, 면천 솔뫼·양제·여름이 등지에 천주 신앙이 전파되거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으며, 이 지역의 신앙은 훗날까지 이어지게 된다. 따라서 1790년대에는 지금의 당진 원머리 지역에도 이미 천주교의 존재가 알려졌을 것으로 생각된다.
4. 원머리 교회사와 병인박해 순교자
1) 원머리 신앙 공동체의 형성
사학징의에는 1801년의 신유박해 때 면천의 이일선(李日先)과 박유복(朴有卜)·김순재(金順才)·김만업(金萬業) 등이 유배형을 받은 것으로 나온다. 또 앞에서 언급한 노상추 일기에는 신유박해 때 면천 주흥리(朱興里)의 조군이(趙軍伊, 세곶리 조춘봉의 아들), 당진 신북면의 원경득(元京得), 면천 역촌의 서개음금(徐介音金), 면천의 김부응(金富應)이 체포된 것을 비롯하여 다음의 표에 정리한 것과 같이 홍주 신북면 세곶리(현 당진시 송악면 부곡리의 가는고지)와 현내면 언두리(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의 원머리)에 거주하다가 체포된 신자 8명의 이름이 나타난다.
<노상추 일기에 나타난 원머리․부곡리․한진리의 신자 현황>
당시 거주지 | 현 마을 이름 | 신자 성명 | 비고 |
현내면 언두리 | 한정리 원머리 | 양남산(梁南山) | |
최천돌(崔天乭) | |||
신북면 세곶리 | 부곡리 가는고지 | 조춘산(趙春山) | 조춘봉(趙春奉)의 동생 |
조덕순(趙德順) | 조춘산의 조카 | ||
조덕신(趙德申) | ″ | ||
조병인(趙丙仁) | 조춘봉의 아들 | ||
조사철(趙士哲) | ″ | ||
이명득(李命得) |
이러한 기록을 토대로 1801년 이전에 이미 면천 지역에는 물론 홍주 현내면 언두리와 인근의 신북면 세곶리에도 천주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내포 천주교회가 설립되고, 그 신앙이 당진·면천·홍주 지역으로 확산되어 가던 1790년대에 홍주의 월경지인 현내면·신북면 지역 즉 지금의 당진 원머리·가는고지 등지에도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특히 가는고지의 신앙 공동체는 이미 사망한 조춘봉(趙春奉, 조춘산의 형)에 의해 형성된 가정 공동체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신북면 진두리(현 송악면 한진리의 나루머리·한나루)에 살고 있던 조덕금(趙德金)도 고발되었으나 체포된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데, 그 또한 세곶리의 조씨 집안과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위의 8명 중에서 홍주 원머리의 양남산과 최천돌은 이전에 체포되었다가 방면된 이들로, 문초 때에는 “번번이 죄도 없이 체포되었는데, 이는 남과 잘 사귀지 못한 데서 있게 된 일”(每每無罪被捉者然, 是乃矣身不善交人之致)이라고 해명한 뒤에 곧 방면된 것으로 보인다. 또 홍주에 투옥된 가는고지 신자 6명도 더 이상의 기록이 없는 점에서 볼 때 방면된 것 같다.
신유박해 이후 원머리와 인근 지역의 천주교 신자에 대한 기록은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는다.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거나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였고, 혹은 교회를 멀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다가 1825년 면천 강문이(현 당진시 우강면 강문리)에 살던 1800년의 청주 순교자 배관겸(프란치스코)의 아들인 배정모(아우구스티노, 혹은 배청모)와 면천에서 입교한 하 바르바라가 체포되어 해미에서 형벌을 받은 사실이 나타난다. 그리고 1839년에는 전 베드로가 체포되어 공주 감영에서 순교했는데, 그는 면천 양제 출신으로 고향에서 입교했으며, 한때 냉담했으나 덕산 황무실(현 예산군 고덕면 호음리의 황매실)로 이주한 뒤로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원머리와 인근 지역에 거주하던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기록이 다시 나타나는 것은 1866년의 병인박해 이후인데, 이때 순교한 원머리 출신 신자들과 그 행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C-① 1867년 순교자 양 도미니코 회장(50여 세) :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 수계하며 이웃 친척을 많이 권화하여 성교에 들어오게 하였다.
C-② 1868년 순교자 최 베드로(1819~1868) : 삼촌에게 성교를 배워 후에 열심 수계하며, 본성은 둔하나 열심은 간절하여 외교인 아내(즉 1868년 순교자 김 루치아)를 얻어 성교 도리를 부지런히 가르쳐 함께 열심하였다.
C-③ 1868년 순교자 최 아우구스티노(50여 세) : 최 베드로의 일가. 소년 때 문교하여 성교를 봉행하였다.
C-④ 1866년 순교자 양정수(1837~1866) : 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성교 도리를 부지런히 배워 열심 수계하였다.
C-⑤ 1868년 순교자 박선진(마르코, 1836~1868) : 부친은 외교인이라 성교를 엄금하나, 모친이 문교(聞敎)하여 성교에 열심이었고,……성교 도리를 배워 혼자 수계하며 자식을 가르쳐 경문(經文)을 배우게 하였다.
C-①에 수록한 양 도미니코 회장은 순교 당시의 나이가 50여 세였다고 하므로 대략 1810년대에 태어났을 것이고,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고 하므로 1810년대 이전에 이미 그의 집안에서는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C-②③에 수록한 최 베드로(1819년생)는 삼촌에게 교리를 배웠다고 하며, 그의 일가 최 아우구스티노(1810년대생)으로 소년 때 교리를 배웠다고 하므로 원머리의 최씨 집안에서는 대략 1820~1830년대에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또 C-④에 수록한 양정수(1837년생)의 경우에는 ‘부모에게 교리를 배웠다’고 했으므로 1837년 이전에 그의 집안에서는 이미 천주교에 입교했음이 분명하다. 반면에 C-⑤에 수록한 박선진(마르코, 1836년생)의 집안에서는 모친이 뒤늦게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고, 부친은 그때까지도 외교인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원머리 지역에 다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것은 1810년대 이전부터 1830년대에 이르는 시기였고, 이때 양 도미니코 회장 집안, 최씨, 또다른 양씨, 박씨 집안에서 천주 신앙을 받아들여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다. 또 원머리의 구전에 따르면, 이곳에는 박씨·조씨·문씨 등이 처음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고 하는데, 이 중에서 박씨 집안과 문씨 집안에서만 순교자가 탄생한 것으로 나타난다. 한편 이 무렵에는 원머리 이웃인 음섬이(현 당진시 신평면 매산리)와 통포안(현 당진시 신평면 신흥리)에도 천주교가 전파되었는데, 이를 설명해 주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D-① 1867년 순교자 김자선의 모친(1805~1867) : 홍주 엄섬이(즉 음섬이)에서 살았다. 당초 부자였는데, 신유·기해군난에 세간을 다 버리고 신창 창말(현 아산시 선장면 대흥리)로 와서 성교를 열심히 하였다.
D-② 1867년 순교자 송춘일(1813~1867) : 홍주 통포안 살던 송춘일이는 본디 신창 용당리실(현 아산시 선장면 가산리) 중인이다. 본디 외교인으로 교우 집에 처가살이를 와서 살다 문교하여 차차 열심이 간절하더니, 중년에 산중에 들어가 10여 년을 놀랍게 수계를 하다가 도로 들로 나와 살면서도 수계함이 전과 같이하고 지냈다.
D-①에 수록한 김자선의 모친 행적에서 말하는 신유·기해군난은 증언상의 표현으로 생각되는데, 그녀의 나이가 1867년에 63세(1802년생)였던 사실을 감안한다면 신유박해가 아니라 ‘1839년의 기해박해’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처럼 보인다. 이처럼 김자선의 모친은 1839년 이전에 음섬이에서 천주교에 입교해 신앙생활을 하다가 기해박해 때 가산을 버리고 교우촌인 신창 창말로 이주하였다. 또 D-②에 수록한 송춘일의 혼인 나이에서 볼 때, 통포안에는 1820년대 후반에서 1830년대 초에 천주교가 전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지금의 당진 원머리·가는고지 지역에는 내포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인 1790년대에 이미 천주 신앙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곳 신자들이 1801년의 신유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방면된 이후로는 오랫동안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1810년대 이전부터 183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양 도미니코 회장 집안, 최씨, 또 다른 양씨, 박씨 집안에서 다시 천주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또 같은 시기에 원머리 이웃인 음섬이와 통포안에도 천주 신앙이 전파되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교우촌이 아니었고, 따라서 신자들은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1866년의 병인박해 때에 가서야 원머리 순교자들이 탄생하는 이유도 이 때문일 것이다.
2) 병인박해와 원머리 순교자
1861년 10월 이후 하부 내포 본당(성모왕고구역)을 담당하던 랑드르 신부는 이후 덕산 황무실에 사목 중심지를 활동하다가 1863년 9월 15일에 선종하여 그곳에 안장되었다. 따라서 1861~1863년 사이에 원머리와 인근 지역은 랑드르 신부의 사목 관할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 같다. 그리고 1863년 이후에는 다블뤼 주교가 랑드르 신부가 담당해 오던 하부 내포 본당 지역까지 담당한 것으로 생각되며, 따라서 원머리 지역의 신자들도 병인박해 이전까지 다블뤼 주교에게 성사를 받았을 것이다.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것과 같이 내포 지역의 병인박해는 1866년 3월 11일(음력 1월 25일), 거더리(신리)의 손치호(니콜라오) 회장 집에 있던 다블뤼 주교가 체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 위앵(Huin, 閔) 신부, 오메트르(Aumaître, 吳) 신부, 황석두(黃錫斗, 루카) 등이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었으며, 제천 배론 신학교의 집 주인 장주기(張周基, 요셉)가 이들과 함께 문초를 받았다. 그런 다음 이들 5명은 3월 30일(음력 2월 14일) 보령 수영으로 이송되어 그곳 갈마진터(渴馬津頭, 현 충남 보령군 오천면 永保里. 일명 ‘갈매못’)에서 순교하였다. 이후 내포 전역에서 신자들이 체포되었으며, 홍주를 비롯하여 공주․해미․청주 등지에서 많은 순교자가 탄생하게 된다.
원머리와 그 인근 지역에서도 병인박해가 시작된 1866년부터 신자들이 체포되어 순교하였고, 이러한 체포와 순교가 1868년까지 이어졌다. 그 결과 다음의 표에서 보는 것과 같이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원머리 출신 순교자는 모두 16명에 이른다. 다만, 이들 중에서 순교 행적이 유사한 1866년의 홍주 순교자 양명삼 회장과 1867년의 홍주 순교자 양 도미니코 회장을 같은 순교자로 본다면, 그 수는 15명으로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증언 기록의 순교 연도가 각각 다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일단 다른 순교자로 보았다. 또 원머리 순교자들과 관련이 있는 이들은 최 아우구스티노, 홍 베드로 등 2명이고, 인근 지역인 음섬이·통포안 출신 순교자는 김자선의 모친과 송춘일 등 2명으로 나타난다.
<표 2> 병인박해기의 원머리 출신 순교자(16명)
순서 | 성명 | 세례명 | 출생지 거주지 | 신분 | 체포일 | 순교일 (나이) | 순교지 (형식) | 관련 자료 | 비고 |
1 | 한 | 마티아 | 원머리 | 1866. 2(1차) 1866.10.20 (2차) | 1866 (26세) | 홍주 (교수) | 사적 23-113 | 순성면 가울에 안장 | |
2 | 양정수 | ″ | 1866 | 1866 (30세) | 홍주 (교수) | 사적 2-14 / 일기 617 / 증언록 120 | |||
3 | 홍 | 베드로닐라 | ″ | 1866 | 1866 (50세) | 홍주 (교수) | 사적 2-10 / 일기 616 / 증언록 120 | 홍 베드로의 사촌누이 | |
4 | 양명삼 | ″ | 회장 | 1866 | 1866 | 홍주 | 사적 6-75 | 양 도미니코 회장과 동일인(?) | |
5 | 김 | 마리아 | 홍주 빗티 원머리 | 1867. 6 | 1867. 6 (42세) | 홍주 | 사적 6-75 / 일기 612 | 원씨의 동서 유복자 양봉이도 체포됨 | |
6 | 원(여) | 원머리 | 1867. 6 | 1867. 6 (30여 세) | 홍주 | 일기 613 | 김 마리아의 동서 | ||
7 | 양(梁) | 도미니코 | ″ | 회장 | 1866(1차) 1867. 2. 13 (2차) | 1867. 10 (50여 세) | 홍주 (교수) | 사적 1-104, 2-5 / 일기 604 / 증언록 92․120 | <1939년 치명일기>에는 백지사로 나옴 |
8 | 박(朴致雲) | 요한 | ″ | 1868. 5. 2 (혹 윤4월) | 1868. 5. 23(42세) | 해미 (생매장) | 사적 1-109 / 일기 718 / 증언록 93 / 성책 | 문 마리아의 사위 |
순서 | 성명 | 세례명 | 출생지 거주지 | 신분 | 체포일 | 순교일 (나이) | 순교지 (형식) | 관련 자료 | 비고 |
9 | 문(文召史) | 마리아 | ″ | 1868. 5. 2 (혹 윤4월) | 1868. 5. 23(61세) | 해미 (생매장) | 사적 1-110 / 일기 719 / 증언록 93 / 성책 | 박 요한의 장모 | |
10 | 박선진 | 마르코 | ″ | 1868 | 1868 (33세) | 수원 (교수) | 사적 2-11 / 일기 373 / 증언록 120 | 박 마티아의 사촌. 원머리에 안장 | |
11 | 박태진 | 마티아 | ″ | 1868 | 1868 (52세) | 수원 (교수) | 사적 2-11 / 일기 374 / 증언록 120 | 박 마르코의 사촌. 원머리에 안장 | |
12 | 최(崔法尙) | 베드로 | ″ | 1868. 5 | 1868. 6 (50세) | 홍주 (생매장) | 사적 2-7 / 일기 608 / 증언록 120 / 성책 | 김 루치아의 남편 | |
13 | 김(金召史) | 루치아 | ″ | 1868. 5 | 1868. 6 (50세) | 홍주 (생매장) | 사적 2-7 / 일기 609 / 증언록 120 / 성책 | 최 베드로의 아내 | |
14 | 김(金召史) | 마리아 | ″ | 1868. 5 | 1868. 6 | 홍주 (생매장) | 일기 610 / 증언록 120 / 성책 | 최 베드로의 제수 | |
15 | 원(李召史?) | 아나스타시아 | ″ | 1868. 5 | 1868. 6 (40여 세) | 홍주 (생매장) | 일기 611 / 증언록 120 / 성책 | 최 베드로와 함께 순교 | |
16 | 양 | 아우구스티노 | ″ | 미상 (32세) | 홍주 (교수) | 사적 2-15 / 일기 618 / 증언록 120 |
<표 3> 원머리 관련 순교자 및 인근 지역 출신 순교자(4명)
순서 | 성명 | 세례명 | 출생지 거주지 | 신분 | 체포일 | 순교일 (나이) | 순교지 (형식) | 관련 자료 | 비고 |
1 | 최 | 아우구스티노 | 1866 | 1866 (50세) | 홍주 | 사적 2-8 /0 일기 614 / 증언록 120 | 최 베드로 일가. 시신 거둠 | ||
2 | 홍 | 베드로 | 내포 | 회장 | 1866(1차 배교, 재체포) | 1866 (50여세) | 홍주 (교수) | 사적 2-8 / 일기 615 / 증언록 120 | 홍 베드로닐라 사촌 |
3 | 김자선의 모친 | 음섬이 신창 창말 | 1867 | 1867 (63세) | 홍주 (교수) | 사적 11-16 / 일기 663 | |||
4 | 송춘일 | 신창 용당리 통포안 | (중인) | 1866(1차) 1867(2차) | 1867 (55세) | 홍주 (교수) | 사적 11-44 / 일기 673 |
16명의 원머리 출신 순교자들을 먼저 순교 시기별로 살펴보면, 1866년의 순교자가 4명, 1867년의 순교자가 3명, 1868년의 순교자가 8명이며, 연도 미상자는 1명이다. 또 남자 순교자는 9명, 여자 순교자는 7명이었다.
다음으로 이들을 순교 형식별로 살펴보면 교수형이 7명으로 가장 많고, 생매장형이 6명이며, 순교 형태가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3명이다. 이 중에서 1867년의 홍주 순교자 양 도미니코 회장의 순교 형식에 대해 교회 순교록에는 모두 교수형으로 기록되어 있는 반면에 1939년에 발견된 또 다른 증언 기록인 <병인·정묘년 치명일기>에는 백지사(白紙死)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홍주에서는 백지사가 행해진 예를 찾을 수 없다는 점에서 교수형이 맞는 것으로 생각된다.
순교 장소는 홍주가 12명으로 가장 많고, 해미와 수원 순교자가 각각 2명으로 나타난다. 해미와 수원 순교자 4명은 모두 1868년의 순교자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무진년에 다시 박해가 확대되면서 행정․군사 관할 지역과 상관없이 천주교 신자들을 체포 처형한 때문이었다.
<표 4> 원머리 순교자의 순교 연도, 성별, 순교 형식, 순교 장소
구분 | 순교 연도 | 성별 | 순교 형식 | 순교 장소 | ||||||||
1866 | 1867 | 1868 | 미상 | 남 | 여 | 교수 | 생매장 | 미상 | 홍주 | 해미 | 수원 | |
인원 | 4 | 3 | 8 | 1 | 9 | 7 | 7 | 6 | 3 | 12 | 2 | 2 |
3) 원머리 순교자들의 주요 행적
원머리 순교자들은 대부분 굳은 순교의 용덕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이는 순수한 종말론적(終末論的) 영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훗날의 증언에 나타나는 순교 행적이 소략한 탓에 ‘열심히 수계 생활을 했다’는 사실 외에는 특별한 육화론적(肉化論的) 영성 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회장 소임을 맡아 활동한 양 도미니코 회장의 경우에는 “이웃 친척을 많이 권화하여 성교에 들어오게 하였고, 후에 회장 책임을 받아 교우를 잘 가르치며 위험 중이나 신부 영접을 편히 하여 교중(敎中)을 잘 다스렸다”고 한다. 또 양 아우구스티노의 경우에는 다음의 증언 내용과 같이 독실한 수계 생활을 위하여 산곡에 들어가 살기도 하였고,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여러 일가 친척들에게 천주 신앙을 전파하였다.
양 아우구스티노는……부모의 가르침을 받아 열심 수계하며, 본성이 양선하고 뜻이 정직하여 독실히 수계하기 위하여 고향을 떠나 산곡으로 이사하여 착실히 수계하더라. 후에 도로 본 곳에 와 살며 여러 일가를 권하여 성교에 들어오게 하고, 일가를 권하여 열심 수계하게 하며 본업을 극진히 하였다.
원머리의 박선진(마르코)의 경우는 먼저 천주 신앙을 받아들인 모친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되는데, 외교인이던 부친이 천주교를 엄금한 까닭에 어렵게 신앙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의 부친은 사제가 원머리에 와서 성사를 줄 때마다 가족이 그 자리에 참석하지 못하도록 금하기까지 하였다. 이처럼 그는 부친으로부터 가정 박해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모친의 뜻에 따라 열심히 수계하는 모범을 보여주었고, 원머리 교우들과도 비밀리에 교류하면서 신앙을 굳게 지켰다. 이러한 내용과 함께 교회 순교록에는 그의 순교 행적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박 마르코는……무진년(1868년)에 수원 포교에게 잡혀 본래 세간이 있고 본읍에 권도(權道)가 조금 있으나, 수원으로 갈 때 그 부모께 하직하며 위로하되 “우리 가서 죽음이 육정에 박절함이 없으리이까? 그러나 주명(主命)대로 위주(爲主)하여 죽는 것이 구령(救靈)하기 편한 일이오니, 부디 과히 염려 마옵시고 훗일을 조심하라” 하고, 그 사촌(즉 박 마티아)과 한가지로 수원에 가 관장 추열(推閱)에 그 사촌이 배교함을 보고 민망히 생각하여 권하되 “네 이제는 배교하여도 죽을 것이니, 구태여 대주(大主)를 배반하고 죽어 영벌(永罰)을 받으려 하느냐?” 하매, 그 사촌이 마음에 깨달아 배교함을 뉘우치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성교함을 바로 설명하고, 옥에 있은 지 15일 후 그 종형제 한가지로 교(絞)하여 죽인 후……
위의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과 같이 박 마르코는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었을 때 이미 굳은 순교 원의를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수원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는 가운데 마음이 약해진 사촌 박태진(마티아)을 권면하여 순교의 영광을 얻을 수 있도록 하는 용덕도 보여주었다.
이들 밀양 박씨(密陽朴氏) 집안은 본래 삼형제였는데, 각각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살다가 한 명은 공주로 이주하고, 다른 한 명은 경기도 고량(포천)으로 이주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이 한정리(원머리)로 이주해 와 염전을 일구어 소금장수로 생활했다고 한다. 위의 증언에 나오는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가 바로 원머리에 정착한 박씨의 후손으로,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이들 집안에서는 양씨·최씨 집안보다 늦게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박 마르코의 부친은 병인박해 때까지도 입교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원머리 순교자들 가운데는 처음 체포되었을 때 마음이 약해져 배교를 했다가 다시 체포된 뒤에는 용덕을 보인 뒤에 순교한 이들도 있었다. 우선 양 도미니코 회장은 석방된 뒤에 스스로 이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순교를 다짐했다고 하는데, 다른 증언에는 그가 뉘우치게 된 배경에 간양골 박 안드레아 회장의 권면이 있었다고도 한다. 또 원머리 홍 베드로닐라의 사촌인 내포 홍 베드로 회장은 배교하고 나온 뒤 딸의 권면에 힘입어 순교를 다짐하고 있다가 다시 체포되어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그는 홍주 옥중에서 사촌 누이 홍 베드로닐라를 권면하여 그녀가 어린 아들에 대한 육정을 버리고 순교에 이를 수 있도록 인도하기까지 하였다.
5. 원머리 순교자의 유해 이장 과정
이름이 밝혀진 신평지역의 순교자 16명 중 무덤이 남아 있는 분은 둘뿐이다. 1868년 수원에서 함께 순교한 박선진(마르코)와 박태진(마티아)의 시신은 같은 동네에 사는 서덕행에 의해 운구되어 원머리의 순교자 묘역에 묻혀 오늘날까지 전한다. 두 순교자의 유해는 두 차례에 걸쳐 이장되었는데 첫 번째는 원머리 순교자 묘역에서 신평 성당 구내로, 두 번째는 그 반대로 이루어졌다.
1) 첫 번째 이장 : 원머리에서 신평 성당으로
일시 | 내용 | |
1988년 | 05. 16 | 교구청에 순교자묘 이장 위한 답사 신청 |
05. 25 | 부교구장과 박만식 교수 신평 성당을 내방하여 이장 장소 지정 | |
10. 14 | 순교자묘 이장 결정. 교구성지위원회(솔뫼) | |
10. 25 | 교구장 주교 묘역 방문. 이장 장소 결정 | |
11. 02 | 순교자 묘역에서 미사 봉헌 | |
11. 06 | 순교자묘 이장위원회 결성 | |
1989년 | 03. 29~ 04. 04 | 9일 기도 시작 |
전문위원 | 주교대리, 부교구장 | |
교회법학자 | 백남익 신부 | |
교회사 | 김진소 신부, 조광 교수 | |
의사 | ||
서기 | 고영환 신부 |
두 순교자의 유해를 신평 성당 구내로 이장하는 예식은 1989년 4월 3~4일 이틀에 걸쳐 이루어졌다. 이를 위한 사전준비는 한 해 전부터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장 첫날인 4월 3일 오후 2시부터 진행된 이 작업의 공식 명칭은 "원머리 순교자묘 신평 성당 구내 이장"이었다. 이날의 참석자는 신평본당의 신자들과 두 순교자의 유족들, 대전교구 서기 자격으로 고영환 신부가 참석했고, 윤여홍 신부, 윤종학 신부(합덕본당 주임), 박재만 신부 등이 참석하였다. 순교자 유해의 발굴은 호남교회사연구소 김진소 신부와 전북의대 해부학과 이무삼 교수가 전적으로 진행하였다.
시작 예식인 말씀의 전례는 신평본당 주임 윤여홍 신부가 주례하였고, 홍보국장 고영환 신부가 강론하였다. 고 신부는 '우리는 신앙의 후예이므로 순교자 현양을 열심히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교구는 순교자 현양에 그동안 너무 등한히 해왔다.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도 증언도 거의 다 잊어버려 가고 있었는데 이 원머리 순교자들의 묘 이장을 계기로 순교자들에 대한 현양이 교구 내에서 꽃을 피우기를 기원한다.' 취지로 말하였다.
당시 두 순교자의 묘역에 비석은 없었고 나무 십자가만 세워져 있는 상태였다. 두 무덤의 봉분을 파내는 작업은 신자들에 의해 동시에 진행되었으나 유해가 드러나는 지점부터는 김진소 신부와 이무삼 교수가 대나무 삽, 호미 등을 이용한 수작업으로 한 쪽부터 차례로 진행하였다. 검은 물체들이 조금씩 드러나면 미리 마련된 백지 위에 올려놓고 이무삼 교수가 유해인지 아닌지를 판명하며 천천히 진행되었다.
유해 중 제일 먼저 드러난 것은 하악골과 두개골이었다. 두개골을 측정한 결과 머리끝부터 턱까지 16cm, 좌우는 8cm였고 치아는 14개가량 남아 있었다. 이어 차례로 목뼈, 갈비뼈, 팔과 다리뼈, 골반뼈가 드러나 전체 신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되자 김진소 신부가 키를 측정하고 이무삼 교수가 수첩에 유해 전반을 스케치하였으나 수기는 남아 있지 않다. 발굴된 유해는 순서대로 백지에 싸서 미리 마련된 하얀 상자 안에 담아 윤여홍 신부에게 넘겨졌다.
첫 번째 묘의 유해 발굴은 오후 5시 55분경에 마무리되었고 작업이 늦어져 두 번째 묘의 발굴은 더 이상 진행되지 않았다. 밤사이에 혹시 남은 묘의 유해가 손상될까 하여 김진소 신부가 백지를 이용하여 간단히 봉인한 후 신자들이 포장을 덮어 타인이 만지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였다. 먼저 발굴된 유해는 인근 신자 집에 임시 안치하고 신자들이 밤새 그것을 지켰다.
둘째 날인 4월 4일에는 오전부터 작업이 진행되었다. 전날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참관하는 가운데 주모경, 순교자 호칭기도, 자유 기도로 시작 예식을 한 후 김진소 신부와 이무삼 교수가 동일하게 작업을 진행하였다. 작업이 끝나자 이틀에 걸쳐 발굴된 두 순교자의 유해가 담긴 상자를 무덤 앞에 두고 윤여홍 신부가 참석자들에게 원머리와 인근 지역 순교자들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하였다. 이후 박선진 순교자의 후손인 박노진과 박영태(분도)가 유해함을 모시고 검은색 승용차에 탑승하여 신평 성당으로 운구하였다.
성당에는 안장을 위해 이미 광중이 마련되어 있었으며, 두 순교자의 이름과 《치명일기》의 내용을 적은 두 개의 묘비, 성모상 앞에 돌로 세워진 제대도 갖춰있었다. 유해가 도착하자 윤여홍 신부가 성수를 뿌려 안장할 장소를 축복하였고, 이무삼 교수가 함에서 유해를 하나씩 꺼내어 광중에 백지를 깔고 본래의 사람 모습대로 뼈를 배열하였다.
유해를 흙으로 덮지 않은 가운데 성당의 종을 치고 참석자들과 더불어 유해 곁에서 순교자 현양 미사를 봉헌하였다. 신평본당 신자들과 이장 작업 참관자들 외에 변갑철 신부, 매산리에서 귀농생활을 하는 서 로벨토 신부(골롬반외방전교회 소속)과 몇몇 신부들이 추가로 참석한 가운데 윤종학 신부가 미사를 주례하였다. 김진소 신부가 강론하였는데 '이 작업을 위해 수고한 이무삼 교수에게 감사하고 순교자들의 삶을 우리 생활 안에서 실천하자'는 취지였다. 미사 끝에 윤여홍 신부가 무덤에 성수를 뿌리고 분향한 후 유해를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들었다.
2) 두 번째 이장 : 신평 성당에서 원머리로
신평 성당 구내에 있던 두 순교자의 유해를 본래의 자리인 원머리로 이장하는 작업은 2009년 11월 3일에 있었다. 본래의 묘역에 순교자를 모신 후, 지금도 보존되어 있는 한정리(원머리) 공소 강당과 더불어 순례지로 조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한 때문으로 판단된다. 그간 원머리에는 두 순교자의 유해가 있던 자리에 작은 기념비와 함께 빈 봉분을 만들어놓고 안내판을 세워 이전의 사실을 기념하고 있었다.
이날 작업의 공식 명칭은 "박 마르코, 마지아 순교자 유해 봉송 및 이장"이었고 참석한 사람들은 다음과 같다.
활동 내역 | 명 단 |
참석 신자 | 신평과 인근 본당 신자 150여명과 회장단 |
교구 파견 사제 | 곽명호 신부(사무처장), 이용호 신부(교구법원장), 김정환 신부(서기) |
공식 기록원(동영상, 사진) | 이진용 신부(사무처 차장), 정재영(홍보국), 류귀선(내포교회사연구소) |
참석 사제 | 박재만 신부, 이원순 신부, 윤인규 신부, 홍광철 신부, 권선민 신부, 박종운 신부 |
당일 오전 7시 30분 신평 성당 구내의 순교자 묘역에서 두 봉분을 파내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유해가 담긴 항아리가 드러날 때까지 흙을 제거하고 뚜껑을 열어 서기 신부가 유해를 확인하고 공식 기록원들이 촬영하였다. 항아리 안에는 '박 마지아', '박 말구'라고 적힌 플라스틱 푯말이 들어있었다.
10시 30분 본당 주임 정필국 신부의 주례로 이장 전 예식을 거행하였다. 예식이 끝난 후 유해 항아리를 흰 보자기로 싸서 미리 마련한 꽃상여에 올려 신자들과 몇몇 신부들이 교대로 메고 신자들이 성가를 부르고 뒤따르며 성당 정문 → 신평면사무소 앞 → 신평초등학교 앞 → 색동어린이집 앞 → 금전1리 경로당 앞고개 → 미류리 고개 → 한정리 초입 언덕 → 원머리 묘역 순으로 운구 행렬하였다.
11시 40분 상여가 원머리 묘역에 도착하였고 이어 안장 예식이 시작되었다. 신자들과 관계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 항아리를 본래에 있던 자리에 안치하였다. 서쪽(정면에서 왼쪽)에 박 마티아, 동쪽(오른쪽)에 박 마르코의 유해를 안장하고 서기 신부의 확인과 기록원들의 촬영이 있은 후 흙으로 덮어 봉분을 만들었다. 이날 있었던 이장 예식의 순서와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예식(장소) | 내 용 |
시작예식(성당구내) | 시작성가 |
참관 사제 입장 | |
시작기도: 순교자들께 드리는 기도 | |
순교자 묘 이장 경과보고: 한정리성지개발특별위원회 위원장 | |
취지 말씀: 곽명호 신부(교구 사무처장) | |
출관 기도 | |
분향과 성수 예절 | |
본당 신부와 회장단의 큰절 | |
안장식(원머리묘역) | 시작성가 |
모든 신자들 유해에 큰절 | |
분향과 성수 예절 | |
하관기도 | |
본당 회장 감사인사 | |
주임 신부 감사인사와 관계자 소개 | |
원머리 성역화를 위한 기도 | |
마침성가 |
안장이 이루어진 후 신평 성당 구내에 있던 두 순교자의 묘비도 옮겨와 두 무덤 앞에 각각 세웠으며, 두 무덤의 동쪽(정면에서 오른편)에 "순교자 박선진(말구) 박 마지아 현양비"를 세웠다. 이 현양비는 2000년 11월 21일 새 성당 봉헌식을 하면서 성당 구내 순교자 묘역에 세워졌었으나, 2009년 원머리로 두 순교자 유해를 다시 모실 때 함께 옮겨졌고 현양비 하단에 그 사실을 기록하였다.
원머리로 순교자 유해를 다시 모시면서 토지 소유권에 변화가 있었다. 두 순교자는 교회의 공적인 인물이지만 그들이 묻힌 묘역의 땅(한정리 233번지)은 방계 후손들인 밀양 박씨 집안의 소유였고 묘지 관리도 그들이 맡고 있었다. 최종 소유주인 박재수(요한) 회장은 2009년의 이장을 계기로 이 땅 347평을 대전교구에 기증하여 공적인 자산이 되도록 하였다. 이렇게 이장이 이루어진 후 신평본당 신자들은 매달 첫 목요일에 성당에서 원머리 순교자 묘역까지 정기적으로 순례하고 있다.
6. 맺음말 : 원머리 순교사의 특징과 의의
그림6) 원머리 순교자 묘
당진 원머리와 인근 지역에는 1801년의 신유박해 이전에 이미 천주 신앙이 전파되었다. 즉 1784년 말 혹은 1785년 초에 내포 천주교회가 창설되고, 그 신앙이 당진·면천·홍주 지역으로 확산하여 가던 1790년대에 신앙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다. 실제로 신유박해 때는 원머리와 그 인근의 가는고지에서 8명의 신자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이후 원머리 지역에는 1810년대 이전부터 1830년대에 이르는 시기에 양 도미니코 회장 집안, 최씨, 또 다른 양씨, 박씨 집안에서 다시 천주 신앙을 받아들였고, 이웃 음섬이와 통포안에도 천주 신앙이 전파되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었다. 그 결과 1866년의 병인박해 이후에는 원머리에서 16명의 순교자가, 인근 지역에서 4명의 순교자 탄생하게 된다.
16명의 원머리 출신 순교자들은 1866년에 4명, 1867년에 3명, 1868년에 8명이 순교했는데, 나머지 1명은 순교 연도를 알 수 없다. 이 중에서 남자는 9명, 여자는 7명이었다. 또 순교 형태는 교수형이 7명, 생매장형이 6명, 미상자가 3명이고, 순교 장소는 홍주가 12명, 해미와 수원이 각각 2명으로 나타나며, 대부분 굳건한 순교 용덕을 보여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원머리 순교사의 첫 번째 특징은,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순교자들의 순교 사실이 관변 기록을 통해서도 입증된다는 점이다. 이는 훗날의 증언을 바탕으로 기록한 순교 행적에 대한 의문을 불식시켜 준다는 점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 관변 기록이 바로 공충도사학죄인성책(公忠道邪學罪人成冊, 이하 ‘성책’으로 약칭함)으로, 여기에는 ‘남연군묘 도굴 미수 사건’ 직후인 1868년 윤4월(음)부터 8월까지 공주·충주·해미·홍주 등지에서 복법(伏法)된 순교자(처형자)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성책에서 발견되는 원머리 출신 순교자는 다음과 같이 6명에 이른다.
<표 5> 원머리 순교자에 대한 성책과 순교록 비교표
성명(세례명) | 순교일 | 순교지 | 순교형식(순교록) | ||
성책 | 순교록 | 성책 | 순교록 | ||
박치운(朴致雲) | 박 요한 | 1868. 5. | 1868. 5. 23 | 해미 | 생매장 |
문조이(文召史) | 문 마리아 | 1868. 5. | 1868. 5. 23 | ″ | ″ |
최법상(崔法尙) | 최 베드로 | 1868. 6. | 미상 | 홍주 | ″ |
김조이(金召史)① | 김 루치아 | 1868. 6. | ″ | ″ | ″ |
김조이(金召史)② | 김 마리아 | 1868. 6. | ″ | ″ | ″ |
이조이(李召史 ?) | 원 아나스타시아 | 1868. 6 | ″ | ″ | ″ |
이 중에서 1868년 5월 해미에서 순교한 사위·장모 사이인 박치운(요한)·문조이(마리아), 1868년 6월 홍주에서 순교한 최법상(베드로)·김조이(루치아) 부부, 그리고 루치아의 동서인 김조이(마리아)는 순교일과 출신지(홍주) 등 비교 확인 과정에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교회 순교록에 최법상(베드로)과 함께 순교한 것으로 나오는 ‘원 아나스타시아’는 성책의 1868년 6월 조에 보이지 않으며, 대신 홍주 ‘이조이’가 최법상·김조이①․ 김조이②와 함께 수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성책의 이조이가 순교록에 원 아나타시아로 잘못 기록된 것일 수도 있다.
둘째, 원머리 순교자들은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생매장형으로 순교한 경우가 많다는 특징이 있다. 지금까지 교회 순교록에 나타나는 생매장형 순교자는, 원머리 출신 순교자 6명을 비롯하여 덕산 황무실 출신으로 1868년 5월 박 요한, 문 마리아와 함께 해미에서 순교한 것으로 성책과 순교록에 함께 나오는 ‘방 마리아’ 등 7명뿐이다. 따라서 원머리는 현재의 홍성․해미 순교사는 물론 한국 천주교회 순교사에서도 보기 드문 남형(濫刑)으로 간주되는 생매장 순교사가 시작된 곳으로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일반적으로 조정에서는 삼복제(三覆制) 규정에 따라 신앙을 고수하는 천주교 신자들을 결안(結案, 사형 판결) 후 정법(正法), 즉 참수형이나 교수형, 효수형 등의 사형에 처하도록 했으며, 해당 신자의 거주지에서 사형을 집행함으로써 그곳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준다는 목적에서 해읍정법(該邑正法)의 영을 함께 내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러나 홍주․해미와 같은 지방 관아에서는 박해 초기부터 정해진 옥송(獄訟, 일종의 형사 소송) 절차나 행형 규정에 따라 사형 판결을 내린 경우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법전의 결옥일한(決獄日限)을 넘겨 수감하는 경우도 많았고, 결안 없이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하는 경우도 많았다.
병인박해기에 와서도 이러한 현상은 마찬가지였다. 특히 대원군이 내린 선참후계령(先斬後啓令)에 따라 지방 각처에서 수시로, 그리고 한 번에 여러 명의 신자를 처형하면서 참수형보다는 교수형이나 갖가지 남형 즉 법외형(法外刑)이 사용되었다. 원머리 순교자 중에 교수형 혹은 생매장형 순교자가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이처럼 천주교 신자들에게 적용된 법외형은 조선의 전통적인 행형 제도에 대한 인식을 왜곡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셋째, 원머리 순교사의 특징 중에서도 교회사적으로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순교자들의 무덤이 현존하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원머리에 살다가 1868년 수원 포교에게 체포되어 수원에서 순교한 박선진(마르코)과 사촌 형인 박태진(마티아)이 그 주인공으로, 교회 순교록에는 이들의 시신 안장 사실이 “옥에 있은 지 15일 후 그 종형제 한가지로 교(絞)하여 죽인 후 시체를 찾아 ‘본 곳’에 장사하니, 시체 정결함은 산 이와 같으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후 박 마르코와 박 마티아의 시신이 안장된 ‘본 곳’ 즉 거주지였던 원머리에 조성된 무덤(현 당진시 신평면 한정리 233번지)은 박원근(朴元根, 바르나바 : 박재만 신부의 조부), 박갑득(증언자 윤귀순의 남편)의 집안, 박영진(치릴로 : 박재만 신부의 재당숙) 등이 차례로 보살펴 왔다. 또 1929년 8월에는 서산 소길리(현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출신으로 명동의 성가기숙사 사감으로 재임하던 신인식(바오로) 신부가 촬영한 ‘원머리 순교자 묘와 신자들’이란 사진이 현존하는데, 이때 신인식 신부가 처음 순교자 묘를 조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후 순교자들의 묘는 1989년 4월 3~4일 신평 성당(현 당진시 신평면 금천리 907번지) 구내로 이장되었다가 2009년 11월 3일 본래의 묘역으로 재이장되었다.
모든 역사적 기념물은 본래의 자리에 보존되어 있을 때 더욱 빛이 나는 법이다. 따라서 원머리 순교자들의 유해가 훼손되지 않은 채 본래의 진토가 있던 묘역으로 재이장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유해 재이장 작업은 첫 번째 이장 때에 순교자들의 유해를 옹기에 담아 안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원머리 순교자 묘역은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을 위한 자발적인 기도와 공경 운동의 장소요 이를 위한 순례지로 자리 매김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묘역 단장을 위한 추가 작업이 필요할 것이고, 순례자들을 위한 공간도 확보해 둘 필요가 있다. 이곳 순교자들의 시복 시성이 이루어진 뒤 올바른 유해 공경이 가능하도록 준비해 두는 작업도 필요할 것이다.
이와 함께 원머리 생매장 순교자들의 신앙과 생애를 이해하고 그들의 용덕을 본받을 수 있도록 그 순교사의 시작(원머리)과 끝(홍주, 해미)을 이어주는 압송로를 조사 확인한 뒤, 이를 ‘순례자의 길’로 개발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압송로는 신앙 선조들이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도 천상 탄일을 열망하면서 마지막으로 걸었던 증거자의 길인 동시에 순교자의 길이라는 점에서 어느 순례자의 길보다 깊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아울러 사목적 차원에서는 현존하는 음섬이 강당, 새터 강당, 원머리 강당의 보존을 위한 공소 사목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II. 신평지역의 공소사 연구/김정환(내포교회사연구소)
<목차>
1. 머리말
2. 신앙자유기의 신평지역 교회사
1) 선교사들의 재입국과 사목방문
2) 합덕본당의 설립
3. 신평지역의 공소들
1) 원머리 공동체의 부활
2) 원머리와 새터
3) 음섬이와 주변 공소들
4. 신평본당의 설립
5. 맺음말
1. 머리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를 혹독히 경험한 내포지방의 신앙공동체는 병인박해(1866년) 이후 공동체가 와해되어 사라지거나, 본래의 지역에 공동체가 다시 형성되더라도 그 구성원들이 바뀌는 경우가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신평지역을 대표하는 신앙공동체인 원머리 일대에는 박해를 피해 다른 곳으로 이주했던 기존의 신자들 상당수가 다시 돌아와 병인박해 후 30년이 지나지 않아 공동체가 복원되었다. 이후 이곳에는 원머리(한정), 새터(매산), 음섬이 공소가 차례로 설립되었고, 후대에는 맷돌포공소까지 분가하여 전국에서 보기 드물게 한 지역 안에 가장 많은 공소와 신자가 밀집한 신앙공동체로 성장하였다.
박해의 영향이 점점 사라지고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시기가 되면서 1890년에 이르러 이 지역 최초의 합덕본당이 설립되었다. 이후 1960년 신합덕본당이 설립되고, 1975년 신평본당이 설립되면서 원머리(한정), 새터(매산), 음섬이 세 공소는 차례로 그 소속이 변경되었지만, 변함없이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지역 복음화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제 그 공동체의 역사를 보면서 어떤 원동력에 의해 신앙공동체가 되살아나고, 또한 그들이 지역 사회 안에서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신앙자유기의 신평지역 교회사
1) 선교사들의 재입국과 사목방문
1873년 대원군이 실각한 후에도 병인박해의 영향은 여전하여 선교사들이 쉽게 재입국할 수 없었다. 1876년에 이르러서야 블랑, 드게트 신부가 조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입국할 수 있었고, 1877년에는 리델 주교, 두세, 로베르 신부가 차례로 입국하였다.
대원군이 실각한 후 조선 정부는 언제까지나 쇄국정책으로 일관할 수 없다는 것을 점차 깨달았다. 조선은 변해가고 있었고 그것을 보여주는 것 중 하나가 리델 주교의 추방사건이었다. 1877년 조선에 재입국한 리델 주교는 이듬해 1월 서울에서 체포되었으나 북경 주재 프랑스 공사의 요청에 따라 중국 정부가 개입하여 6월에 중국 국경을 통해 추방되었다. 밀입국한 프랑스 선교사가 처형되지 않고 추방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외세 앞에 풍전등화 같던 조선은 이 시기에 이르러 급격한 대외적 변화를 겪었다. 한미수호통상조약(1882), 제물포 개항(1883), 한러수호통상조약(1884), 한이수호통상조약(1884)이 이루어졌다. 1882년에 한미조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도 한국과의 조약체결을 시도하였으나 종교자유에 대한 문제로 조약체결에 난항을 겪다가 1886년에 이르러서야 한불수호통상조약(한불조약)이 이루어졌다. 다른 나라에 비해 조약이 늦어진 이유는 프랑스가 선교의 자유를 보장해 줄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교회’(敎誨)라는 말을 조항에 추가하여 선교사들의 가르침만을 허용하는 선에서 타협이 되었다. 이 조약 이후 프랑스 선교사들은 호조를 지니고 조선 내지를 자유롭게 여행할 수 있었으며 이전처럼 상복을 입고 다니지 않고 성직자 복장을 할 수 있었다.
한불조약 이후 1900년대 초반까지 한국교회는 완전한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였다. 정부의 공식적인 박해는 없었으나 민중들 사이에 퍼져 있는 뿌리 깊은 박해 의식을 극복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신앙의 자유가 용인되었으나 완전한 자유를 얻지 못한 상태로 표현될 수 있는 시기였다.
이러한 가운데 선교사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의 내지를 순회하며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하였는데 신평지역이 속한 내포지방을 순회한 첫 선교사는 두세(Doucet, 정가미 가밀로) 신부였다. 1883년 가을에서 1884년 봄에 이르는 시기의 첫 방문에서 원머리와 새터에 신자들이 살고 있음을 확인하고 그해부터 정기적으로 사목방문을 하였는데 그가 작성한 교세통계표의 두 지역 신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원머리(한정) | 새터(매산) | ||
신자(명) | 성인영세자 | 신자(명) | 성인영세자 | |
1884 | 미상 | 미상 | ||
1885 | 78 | 1 | 72 | 1 |
1886 | 117 | 2 | 119 | 3 |
1887 | 92 | 2 | 110 | 3 |
1888 | 10 | 140 | 4 | |
1889 | 54 | 2 | 120 | 6 |
1890 | 84 | 2 | 81 | 1 |
원머리와 새터는 신평지역을 대표하는 신자 거주지로서 합덕본당이 설립될 때까지 꾸준히 성장하여 이 지역 복음화의 한 축이 되었다.
2) 합덕본당의 설립
병인박해로 철저히 파괴되었던 내포지방은 박해의 영향이 사라지면서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거나 새 신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충청남도 지역 최초의 본당이 이곳에 세워졌는데 1890년에 함께 설립된 합덕본당과 공세리본당은 두 축이 되어 충청남도의 거의 모든 지역을 담당하였다.
합덕본당 | 공세리본당 | |||
공소 이름 | 현주소 | 공소 이름 | 현주소 | |
소길리 | 서산시 팔봉면 금학리 | 간양골 | 예산군 예산읍 간양리 | |
가재 |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 해사동 |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 |
대방이 | 서산시 성연면 명천리 | 샘재 |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1구 | |
서낭골 | 부원골 |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4구 | ||
안면도 | 태안군 고남면 누동리2구 | 넛직막이 | 천안시 광덕면 광덕리 4구 | |
마새 | 당진군 대호지면 마중리 | 보산원 | 천안시 광덕면 보산원리 | |
황소고개 | 서산시 고북면 용암리 | 원당이 | 천안시 풍세면 삼태리 | |
강당이 | 서산시 운산면 용현리 | 가래기 | 아산시 선장면 가산리 2구 | |
원머리 | 당진군 신평면 한정리 | 명지게미 | 아산시 송악면 수곡리 | |
새터 |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 | 숫골 | 예산군 대술면 송석리 | |
양촌 | 예산군 고덕면 상궁리 | 뒷내 | 아산시 음봉면 동천리 | |
진말 | 예산군 신암면 계촌리 | 당개 | 아산시 영인면 창룡리 | |
도덕골 | 예산군 신양면 여래미리 | 덕지 | 아산시 음봉면 덕지리 | |
우라네 | 서들골 | 천안시 목천읍 송전리 서덕동 | ||
닥밧실 | 부여군 은산면 거전리 | 쇠골 | 천안시 광덕면 매당리 1구 | |
나마리 | 배티 | |||
방고개 | 궁말 | 천안시 성환읍 안궁리 (혹은) 풍세면 풍서리 궁천 | ||
강경 | 논산시 강경읍 강경상고 | 우헐리 | 천안시 성환읍 우신리 | |
판서골 | 보령시 천북면 신덕리 | 우헐리 새터 | 천안시 성환읍 우신리 2구 | |
월봉 | 서천군 판교면 심동리 | |||
용화실 | 서천군 마서면 덕암리 | |||
작은재 | 서천군 판교면 금덕리 | |||
독뫼 |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 |||
여내골 | ||||
도앙골 | ||||
고당 | 부여군 구룡면 용당리 | |||
솔티 | 청양군 정산면 송학리 | |||
공주 | ||||
안골 | 공주시 정안면 내문리 | |||
요골 | 공주시 유구면 명곡2리 | |||
새터 | 공주시 정안면 광정리 | |||
만악골 | ||||
사기점골 | 공주시 유구면 명곡1리 | |||
삼배실 | 공주시 이인면 운암리 | |||
총 1,951명 | 총 1,143명 |
신평지역을 관할하는 합덕본당의 시작은 1890년에 초대 주임인 퀴를리에 신부를 이 지역으로 파견한 데서 비롯된다. 이전에도 두세 신부가 이곳을 방문하여 판공을 치르곤 하였으나 본당 주임신부의 역할은 아니었다. 아직 박해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 이 지역을 관할하는 본당을 설정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합덕본당이 처음부터 합덕(합덕읍 합덕리)에 자리를 잡은 것은 아니었다. 초대 주임신부가 작성한 사목보고서를 보면 초기 2년 동안은 어느 곳에 본당을 세워야 할지 고심하던 중 신자가 가장 많은 서산 소길리(서산시 팔봉면 금학리)에 자리를 잡으려 하였으나 마침내 1892년 양촌(예산군 고덕면 상궁리)에 정착하였다. 양촌과 지척에 있는 신리는 병인박해 순교자 다블뤼 주교, 위앵 신부, 오메트르 신부가 거처하던 곳이고 수많은 순교자가 배출된 땅이었다. 하지만 양촌은 미래의 발전 가능성을 보건대 본당으로써 적합한 곳이 못 되었기에 초대 신부는 조그마한 언덕이 있고 큰길가에 위치해 있어 교통이 편리한 창말, 즉 현재의 합덕 성당이 있는 곳으로 본당 자리를 옮기기로 결정하였다.
합덕으로 이주했을 당시 주변에는 2~3호 정도의 신자들만이 살고 있었으나 개종 운동이 일어나고 신자들이 이주하면서 교우촌으로 변모하였다. 교세가 증가하자 1929년에 당시로서는 보기 드문 큰 성당을 지으며 또 한 차례 도약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합덕본당은 1908년 서산, 1927년 예산, 1939년 당진 본당을 차례로 분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대전교구가 설정되던 1948년 충청남도지역(대전 포함)에서 가장 큰 본당이었다. 신평지역은 1960년 신합덕본당이 설립될 때까지 합덕본당 소속이었으며 원머리 일대의 공소들에 신자 대부분이 거주하고 있었다.
3. 신평지역의 공소들
1) 원머리 공동체의 부활
신평지역의 교회사에서 뿌리가 되는 곳은 원머리로 여기에 첫 공소가 설립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이전부터 신자들이 살았던 원머리에는 이곳 태생의 신자들과 외지에서 이주해온 신자들에 의해 나름대로 신앙공동체를 형성하였다. '갯벌을 막는 둑의 첫 지역'의 우리말 표현인 '언머리'에서 이름이 유래된 원머리는 그 이름에서 보듯이 새로 개간된 땅이 많은 곳이어서 외지에서 이주해오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곳에 처음 이주해온 사람들은 주로 신자들이었거나, 후일 신자가 된 이들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양씨, 마씨, 한씨, 박씨, 조씨 순이었다고 한다. 《노상추 일기》의 기록을 보면 1801년 원머리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 중에 양남산이란 인물이 있고, 박해시대 때부터 원머리에서 대를 이어 살아온 양씨, 박씨, 조씨의 후손들이 동일한 증언을 하는 것으로 보아 성씨별 이주 순서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원머리는 신자들과 비신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마을로 농업과 어업(예를 들어 염전)을 하는 이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병인박해의 연장인 무진박해(1868) 이후 원머리의 신자들은 순교하거나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박해가 진정되면서 상당수의 신자가 다시 고향으로 되돌아와 신앙공동체의 주역이 되었다.
병인박해 기간 중 이름이 밝혀진 순교자만도 4명이나 되는 양씨 집안은 박해로 후손들이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으나 그중 몇몇이 다시 돌아와 원머리에서 대를 이으며 살았다. 순교자의 무덤이 있는 밀양 박씨 집안도 마찬가지로 박해로 흩어졌던 그의 집안도 박해가 진정되면서 일부가 원머리로 되돌아왔다. 원머리 순교자 박선진(마르코)의 후손들도 원머리로 되돌아와 살았고 다른 일가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15대째 신자 집안으로 원머리에 대를 이어 살아온 박재수(요한) 회장의 증언은 박해 이후의 상황을 잘 말해준다. 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선대는 멀지 않은 원치리(당진군 우강면)로 피신하였다가 박재수의 아버지 박영진(치릴로)이 4살 무렵인 1923년경에 원머리로 돌아와 살았다. 본시 박해 전에는 농토가 많은 집안이었으나 돌아온 이후에는 어렵게 살 수밖에 없었다. 이때 원머리에는 대대로 살아온 비신자 양반인 파평 윤씨 집안이 있었는데 두 집안 간에 사이가 좋아 박씨 집안이 신자라는 이유로 곤란한 상황에 부딪히면 적극적으로 보호해주었다고 한다.
박재수의 어머니 조정외(비르짓다) 집안 역시 비슷한 삶을 살았다. 원머리에서 대를 이어 신자로서 살아온 조씨 집안도 박해를 피해 흩어졌다가 다시 원머리로 돌아왔다. 그녀의 증조부(이름은 기억 못함)는 박해로 인해 냉담한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적극적으로 권면하는 일을 업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 일을 위해 한 번 집을 나서면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2~3개월씩 전교에 나서곤 하였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되살아난 원머리 신앙공동체는 인근 삽교천 중류변의 신리 공동체와는 차이를 보인다. 조선 후기 박해 기간 동안 신리는 전국에서 가장 큰 교우촌으로 주민 400여 명이 모두 신자일 만큼 튼튼한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박해가 일어나자 신리 교우촌은 초토화되어 이후 재기하지 못하였고 189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신리는 천주교에 적대적인 사람들이 사는 비신자 마을로 변해 있었다.
반면 원머리 일대는 1885년의 교세 통계에 원머리에 78명, 인근 새터에 72명의 신자가 있을 정도로 신앙공동체가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 원인은 박해시대의 원머리가 비신자들과 함께 섞여 사는 마을이었다는 점과 이곳에 뿌리를 내린 주요 성씨들 안에서 어느 정도 답을 찾을 수 있다. 원머리에 대를 이어 거주하던 양씨, 마씨, 한씨, 박씨, 조씨 등은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의 원머리 관련 자료들을 참조하면 같은 성씨 안에서도 신자들이 아닌 사람들이 있었다. 한편 위에서 언급한 박재수(요한) 모자(母子)의 증언 내용에서도 보듯이 파평 윤씨와 같이 아무도 신자가 아닌 집안도 함께 거주하는 마을이었다. 이점이 신리와 다른 점으로 박해를 받는 상황에서는 큰 장점으로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박해 이전부터 함께 생활하던 비신자들이, 피난했던 신자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는 기반이 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로 말미암아 박해시대나 그 이후의 시기에도 같은 집안이 같은 지역에서 신앙생활을 계속해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 원머리와 새터
박해 이후 되살아난 원머리 신앙공동체는 빠르게 성장하여 1883~1884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 두세 신부가 처음 이 지역을 방문했을 때에는 원머리(한정)와 새터(매산)를 분리하여 사목방문을 할 만큼의 공동체가 성장해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1890년 합덕본당이 설립되었을 때 두 곳은 신평지역을 대표하는 공소가 되었다. 1891년 이후 계속 보고된 두 공소의 신자 현황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원머리(한정공소) | 새터(매산공소) | ||
신자 | 성인영세자 | 신자 | 성인영세자 | |
1891 | 83 | 1 | 69 | 3 |
1892 | 110 | 1 | 100 | |
1893 | 95 | 3 | 120 | 5 |
1894 | 보고 없음 | 보고 없음 | ||
1895 | 115 | 170 | 5 | |
1896 | 105 | 1 | 보고 없음 | |
1897 | 115 | 3 | 113 | 8 |
1898 | 118 | 120 | ||
1899 | 112 | 1 | 113 | 3 |
1900 | 110 | 3 | 129 | 5 |
1901 | 111 | 4 | 135 | |
1902 | 200 | 4 | 122 | 1 |
1903 | 100 | 127 | ||
1904 | 94 | 1 | 127 | 2 |
1905 | 1909년까지 보고서 없음 | |||
1910 | 120 | 132 | 3 | |
1911 | 120 | 138 | ||
1912 | 110 | 1 | 143 | |
1913 | 109 | 136 | ||
1914 | 122 | 1 | 133 | |
1915 | 119 | 2 | 132 | |
1916 | 128 | 136 | ||
1917 | 129 | 144 | 1 | |
1918 | 148 | 1 | 153 | 3 |
1919 | 150 | 161 | ||
1920 | 129 | 162 | ||
1921 | 172 | 130 | ||
1922 | 119 | 1 | 154 | 2 |
1923 | 119 | 162 | 3 | |
1924 | 121 | 166 |
두 공소는 합덕본당 초창기부터 줄곧 규모가 큰 공동체로 1891년 보고서에 따르면 원머리에는 소규모의 학교가 있었다.
“공소전(公所錢)으로 운영비의 일부를 충당하고 있는 학교는 세 개인데, 원머리에 하나, 고당에 하나, 그리고 소길리에 있습니다. 두세 신부가 충청도를 떠난 후로는 원머리 학교 하나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이 학교는 제게 크게 만족을 주지 못했습니다. 제가 그곳에 공소를 하러 갔을 때, 학생이 5명뿐이었는데, 선생은 급료를 충분히 받지 못한다는 구실로 낙심되어 있었습니다."
합덕본당은 신자들만을 위한 주일학교가 아닌 일반 학생들의 교육까지도 담당하는 학교로 성장시키기 위해 몇 곳에 이러한 학교들을 설립하였으나 당시의 여건상 운영이 쉽지 않았다. 원머리의 학교는 학생 수가 1897년에 7명, 1894년에 4명으로 나타는데 이후 일반 학교가 아닌 주일학교로 변모된 듯하다.
합덕본당에서 학교 못지않게 신경을 쓰는 것이 고아들의 양육이었다. 박해시대인 1854년 프랑스로부터 성영회(聖孾會, l'Oeuvre de la Sainte Enfance)를 도입한 이후 한국교회는 고아들의 양육과 죽어가는 어린이들에게 대세를 베푸는 일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894년의 연례보고서에 따르면 합덕본당에는 총 12명의 고아를 각 가정에서 돌보고 있었고 그중 새터(매산)공소의 성 안드레아와 최 바오로 집안에서 각각 1명씩 양육하였다. 한편 1899년의 기록에 의하면 새터에는 신학생이 한 명 있었다. 페낭 신학교 출신의 신학생이었을 것으로 보이는 박 프란치스코는 안타깝게도 새터에서 사망함으로써 사제의 길을 가지는 못하였다.
이상과 같은 사실은 원머리와 새터공소가 병인박해 기간 동안 엄청난 박해를 겪은 공동체였음에도 불구하고 단시간 안에 되살아나 활발한 활동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1899년 뮈텔 주교가 두 공소를 방문했을 때 적어놓은 기록 속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눈이 오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협소한 공소 집에 신자들이 모여 4일 동안 원머리에서는 80여 명, 새터에서는 90명이 고해성사를 보는 모습은 짧은 기록이지만 인상적이다.
박해 이후 희망의 모습을 보여주던 두 공소에서도 그늘은 있었다. 1902년의 기록에 의하면 원머리와 새터는 혹독한 자연재해를 당하였다. 그해 봄부터 계속된 가뭄으로 두 마을에서는 8월 중순이 되도록 아무것도 심을 수가 없었다. 인근에 저수지나 별도의 수리시설을 갖추지 못한 곳이었기에 피해는 더 심각하여 합덕본당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지역이었다.
한편 1904년의 기록에는 비신자들과 섞여 사는 원머리의 난점이 지적되고 있다. 온전히 신자들로 구성된 교우촌 공소와 달리 원머리 지역은 주일을 제대로 지키며 살기가 어려운 조건이었다. 비신자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 박해를 극복하는 상황에서는 도움이 되었으나 온전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데에는 난점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이점은 공소회장을 비롯한 지역 신자들의 열성으로 점차 극복되었다.
1920년 중반의 기록을 보면 원머리공소의 회장이 냉담자를 찾아내고, 예비자의 교리교육을 조직하는데 열성을 보이는 모습이 모범적인 사례로 꼽히고 있다. 원머리, 새터, 음섬이 공소에는 각각 주일학교가 운영되고 있어 교리교육은 물론, 공소 운영 전체가 원활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박원근(바르나바) 회장의 역할이 돋보였는데 그는 오랫동안 공소회장을 역임하면서 원머리공소의 틀을 잡아 놓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한편 신자들의 모범적인 삶의 모습은 주변을 감화시켰다. 장례를 통해 이 모습을 잘 드러내었는데 마을에 한 비신자가 대세를 받고 죽자 신자들 모두가 하나 되어 음식과 술을 금하며 장례를 엄숙하게 치름으로써 주변에 큰 영향을 주었다.이와 같은 노력에 힘입어 신자들이 늘어나자 예전과는 반대로 신자들의 생활방식에 비신자들이 적응해서 살아가거나, 아예 입교하여 신자의 삶을 살아가는 형태로 마을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제강점기에 들어 원머리와 새터는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1914년 행정 개편에 의해 한국의 지명들이 한자(漢字)로 표기되기 시작하면서 원머리는 한정공소로, 새터는 매산공소로 이름이 바뀌었다.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된 두 공소는 일제강점기를 지나면서 매산공소가 점차 더 커졌다. 그 결과 매산공소에는 모임을 위한 강당이 별도로 있었으나 한정공소는 그렇지 못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매산공소는 활동도 활발해져 1929년 성탄절에는 구유헌금을 모아 서울 명동에서 운영되고 있는 고아원에 성금을 전해주기도 하였다.
두 공소는 지역적인 조건으로 인해 공산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일제강점기에 공산주의 활동이 한국에 침투하면서 소작농이 많은 평야지대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한정리와 매산리 역시 그러한 곳이었다. 1929년 한정리에는 공산당에 가입했던 마름이 있어 반종교적인 선전을 함에 따라 한 때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1950년 6․25전쟁기에 이르러 공산주의로 인한 어려움은 극명하게 드러나 두 공소의 회장들이 수난을 당하였다. 공산세력이 신평지역을 점령한 이후 원머리(한정)공소의 박원근 회장과 새터(매산)공소의 박영옥(안드레아) 부회장이 체포되어 당진 내무서에 수감되었다. 그해 9월 중순 공산군들은 모든 수감자들을 사살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박원근 회장은 총상을 크게 입고 목숨을 건졌으나, 박영옥 부회장은 피살되었다. 박 부회장은 병인박해 기간인 1867년 예산 간양골에서 체포되어 순교한 박 안드레아 회장의 증손자로서 순교의 맥을 이었다.
1960년에 이르러 매산공소는 새로운 공소 강당을 신축하고 6월 15일에 천여 명의 인파가 운집한 가운데 교구장 주교를 모시고 봉헌식을 가졌다. 강당 신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감동적인 기사가 전한다.
"이 공소 건립 운동은 1956년부터 시작되어 교우들은 성미(誠米) 운동을 일으켜 기금을 저축하여 기성회를 설치한 지 어언 5년 이곳 교우들의 정성을 가상히 보신 라리보 주교님은 50만 환의 원조를 베푸심으로 그들의 열성을 북돋아 주었으며 합덕본당 박 신부로부터 35만 환의 협조를 얻어 지난 4월에 건평 36평 되는 양옥 건물을 기공하여 순전히 교우들의 헌신적인 노력 제공으로 공사가 완료된 것인데 인부의 품값을 가산하지 않은 총공사비가 2백 39만 6천 6백 환이며 여기에 동원된 교우들의 연인원수는 9백 명(남자 6백 여자 3백)이나 되어 여교우들은 치마로 흙과 모래를 나르고 우마차를 동원하는 등 그야말로 눈물겨운 열성의 산물로서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1961년의 신자가 338명에 달했던 매산공소는 늘어나는 교세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새 강당의 신축이 꼭 필요하였다. 공소 신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 신축 의지를 보이고 행동하자 교구와 관할 본당에서 지원하여 어엿한 새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3) 음섬과 주변 공소들
음세미, 음섬이 등으로도 불리는 음섬(陰島. 신평면 매산리)은 삼면이 바다로 되어 있어서 섬처럼 보인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여기에서는 피아티라는 곳에서 공소가 시작되었는데 피난터가 변화된 말이라고 한다. 행정구역상 음섬과 같은 마을에 속한 매산공소가 점점 커지자 1915년경부터 공소를 분리하여 시작한 것이 음섬공소의 기원이라고 한다. 이는 신자가 많아지자 외떨어져 있는 음섬 지역에서 우선 모임을 할 수 있도록 배려해준 조치인 듯하고, 정식으로 독립된 공소로 분리된 해는 1929년이었다. 1920년대 중반부터 합덕본당의 신자들이 큰 폭으로 증가하자 그 해에 음섬공소를 포함하여 다른 지역에 세 개의 공소가 더 독립하였다. 나아가 음섬공소는 1957년에 새로운 강당을 신축하고 7월 10일에 교구장 라리보(원형근 아드리아노) 주교와 각지의 신자들이 함께한 가운데 봉헌식을 가졌다. 이후 성장을 거듭한 음섬공소는 1987년에 68세대 337명에 달할 정도가 되자 이듬해에 맷돌포공소를 분가해주기도 했다.
한정리(원머리)와 매산리(새터와 음섬)를 벗어나서 신평지역에서 공소가 생긴 첫 마을은 신송리였다. '소루지'로도 불리던 이 마을의 신자들은 다른 공소에 소속되지 않고 합덕 성당으로 미사와 성사를 보러 다니다가 신자가 증가하자 1922년부터 독립된 공소로 변모하였다. 하지만 초창기 신송공소는 공소로 쓰이는 집이 비신자 집들의 가운데에 자리하고 있어 주일 모임이 불가능한 상태였고 공소회장의 활동도 변변치 않아 1922년에 24명, 1923년 30명, 1924년 28명에 불과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1920년대 중반부터 합덕본당 전체에 복음화의 바람이 불자 1928년에 신송리에도 죽음을 앞두고 대세를 청하는 비신자들이 현저히 늘어났고, 이듬해에는 신자도 34명에서 44명으로 증가하였다.
연도 | 매산(새터) | 음섬 | 한정(원머리) | 거산 | 신당 | 신송 | 초대 | 금천 |
1949 | 260 | 158 | 214 | 81 | 151 | 50 | ||
1950~1952년 전쟁기간 중 통계 없음 | ||||||||
1953 | 280 | 173 | 252 | 75 | 119 | |||
1954 | 314 | 182 | 260 | 82 | 129 | 76 | ||
1955 | 330 | 154 | 263 | 82 | 126 | |||
1956~1960년 공소별 통계 없음 | ||||||||
1961 | 338 | 216 | 295 | 94 | 130 | 35 | 58 | |
1962 | 347 | 226 | 293 | 73 | 147 | 54 | 57 | 52 |
1963 | 376 | 226 | 312 | 77 | 141 | 95 | 63 | 76 |
1964 | 399 | 237 | 334 | 77 | 153 | 113 | 65 | 90 |
신송공소 외에 다른 공소들의 설립 연도는 신당공소(신평면 신당리) 1926년, 거산공소(신평면 거산리) 1946년, 초대공소(신평면 초대리) 1958년, 운정공소(신평면 운정리) 1962년, 금천공소(신평면 금천리) 1962년, 전대공소(송악면 전대리) 1976년 순이다.
우리나라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인 1967년 대전교구에서는 형편이 어려운 공소들을 위해 로마에 원조를 요청한 바 있다. 당시 기록된 기록과 사진을 통해 몇몇 공소들의 사정을 엿볼 수 있다.
우선 1946년 설립된 거산공소는 신자가 늘어나자 초대리에 공소를 분가해주었음에도 불구하고 1967년에 이르러서는 신자 75명과 예비자 20명에 이르렀다. 하지만 신자들의 형편이 어려워 그때까지 공소 강당이 따로 마련되어 있지 않아 초가집 한 채를 공소 집으로 사용하고 있었기에 결국 원조를 요청했던 것이다. 어려운 중에도 꾸준히 성장하던 거산공소는 산업화의 영향으로 이농현상이 발생하자 차차 작아져 1984년에는 44명의 공소로 남아 있었다.
거산공소에서 분가한 초대공소의 첫 신자는 안 마리아와 신 세실리아 두 처녀로 1953년에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 초대리에서 전교하여 1957년에는 여자 5명, 그다음 해에는 남자 2명이 더 입교하자 1958년 10월 13일 이곳을 관할하던 합덕본당 주임 박노열(바오로) 신부가 방문하여 미사를 봉헌함으로써 공소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작은 공소로 출발하였으나 10년 후인 1967년에는 신자 82명, 예비자 15명인 큰 공동체로 성장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공소 강당이 마련되지 않아 사랑채를 빌려 주일마다 공소예절을 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한국이 산업화하면서 초대공소 역시 거산공소와 같은 길을 걸었고 1984년에는 36명의 공소로 작아졌다.
4. 신평본당의 설립
과거 신평지역 신자들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곳이 한정(원머리), 매산(새터), 음섬의 세 공소였으므로 1960년 이후 이 지역에 두 차례에 걸친 본당 분가가 이루어질 때 원머리 일대는 본당이 설 자리로 검토되기도 하였다.
그 첫 번째인 신합덕본당이 신설될 때 원머리 지역 신자들은 본당이 당연히 자신들의 지역에 세워져야 한다고 여겼다. 1961년의 통계를 보면 한정공소 신자가 295명, 매산공소 338명, 음섬공소 216명으로 세 공소의 합이 849명이어서 신합덕본당 전체 신자 1,915명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므로 그들의 주장은 타당성이 있었다. 이에 적극적으로 본당 유치를 추진하였으나 결국 버그내장터가 있는 신합덕에 본당이 들어서고 말았다.
1975년 신평본당이 신설될 때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신평면에 있는 매산, 한정, 음섬, 금천, 신당, 초대, 거산, 운정 8개 공소가 신설 본당에 소속되었는데 역시 대부분 신자는 원머리 일대에 있었다. 후대 자료인 1988년의 통계를 보면 매산공소 신자가 400명, 한정공소 297명, 음섬공소 290명으로 합계 987명이어서 신평본당의 총 신자 1,928명의 절반이 넘는 상태였다. 하지만 신평본당의 신설 때도 역시 행정과 교통의 중심지에 본당이 설립되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겨 면 소재지며 시장이 있는 금정리에 새 본당이 자리하였다.
금천리의 신평본당 자리는 1962년 52명의 작은 공동체로 출발한 금천공소에서 비롯되는데 1967년에는 120명, 예비자도 43명을 헤아릴 만큼 빠르게 성장하였다. 이곳 역시 작은 공소 집에서 시작하였으나 금천리가 면 소재지인데다가 향후 크게 성장할 가능성이 보이자 강당을 짓는 일이 시급하였다. 그리하여 먼저 대지를 마련하였고 공소 집을 팔아서라도 강당을 지으려 했으나 그 일도 쉽지 않아 1967년에는 로마에 원조를 신청한 바 있다.
대전교구의 결정에 따라 1975년 4월 10일부로 신평본당이 설립되었을 때 금천리에는 여전히 대지만 마련되어 있어 성당과 사제관으로 쓰일 이렇다 할 건물이 없는 상태였다. 이에 원머리공소에서는 자신들이 경작하던 간척지 7,636평을 매각하여 성당 건축기금으로 내놓아 공사를 착수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신자가 공소와 구역별로 신축공사에 노력 봉사하였는데 가장 많은 신자가 사는 원머리 일대 신자들의 참여가 그만큼 더 많았던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노력에 힘입어 본당 설립 다음 해인 1976년 3월 19일 교구장 황민성 주교를 모시고 성당(89평)과 사제관(32평)을 봉헌할 수 있었다.
신평본당이 설립되고 한국의 산업화가 진행되어 이농인구가 점점 증가하는 가운데에도 원머리 일대의 공소들은 1980년대 중반까지도 활발하였다. 1984년의 통계에 따르면 매산공소의 신자는 442명, 한정공소 337명, 음섬공소 312명으로 절정에 달하고 있었다. 하지만 4년 후인 1988년의 통계를 보면 매산공소 400명, 한정공소 297명, 음섬공소 290명으로 상당 부분 감소한 상태였고 1992년에는 모든 공소가 폐지되어 본당의 구역으로 편성됨으로써 신평지역을 대표하던 당당한 공소들로서의 위상은 쇠퇴하였다. 2011년 현재 한정(원머리), 매산(새터), 음섬, 신당, 전대 공소 5곳은 '공소'의 이름을 갖고 있고 레지오 마리애가 자체적으로 운영되고 있으나 봄과 가을에 상징적으로 판공성사와 미사를 행할 뿐이어서 전통적인 공소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5. 맺음말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의 영향이 약해지면서 한국을 담당하는 프랑스 선교사들이 다시 입국하여 내포지방을 처음 사목방문한 것은 1883년이었다. 병인박해를 가장 혹독하게 경험하여 생매장 순교자들이 생겨나기까지 하였던 원머리 일대에는 이때 벌써 원머리(한정)와 새터(매산)에 신자공동체가 다시 형성되어 있었다. 1890년 이 지역 최초로 합덕본당이 설립되자 이들은 그 관할의 공소가 되어 신앙의 여정을 걸어갔다.
원머리 일대의 신앙공동체가 지닌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박해를 경험한 신자 중 상당수가 다시 모여들어 대를 이어 계속하여 신앙생활을 영위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현상은 조선시대 가장 큰 교우촌이었던 신리가 한 때 완전한 비신자 마을로 변하였다가 전혀 다른 사람들로 채워진 것과는 대조된다. 그 이유는 신리와 달리 원머리 일대는 박해 이전에 신자와 비신자가 어우러져 사는 마을이어서 박해로 피난했던 신자들이 다시 돌아올 때 비신자인 마을 사람들이 기존의 신자들을 받아들이는 기반이 되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머리(한정)공소와 새터(매산)공소가 중심이었던 이 지역 신앙공동체는 점차 확대되어 인근 음섬에도 공소가 생겨났다. 이러한 과정에서 신자들의 비율이 점점 높아져, 박해 후 신앙공동체가 다시 형성된 초기에는 비신자들의 생활에 신자들이 적응해 살던 마을 환경이 반대로 신자들 중심으로 변해갔고 결국 지역민 거의 모두가 신자인 마을들로 바뀌었다.
원머리 일대의 세 공소, 즉 원머리(한정), 새터(매산), 음섬 공소는 신평지역에서 가장 많은 신자가 거주하는 지역으로 신자 수나 신앙생활의 전통 면에서 보면 본당으로 될 만한 곳이었다. 하지만 행정과 교통의 중심에서 벗어난 지역 조건으로 말미암아 1960년 신합덕본당, 1975년 신평본당이 설립될 때 전체 교세의 절반을 넘나드는 신자가 사는 지역임에도 본당의 위치를 점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역의 복음화뿐만 아니라 본당의 발전을 위해 현대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의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신평지역 복음화의 역사는 원머리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땅에 우리 교회가 수용된 초창기에 복음을 받아들인 후 희망을 품고 살아온 이 지역의 신앙공동체는 병인박해의 풍파 속에 한 때는 와해된 적도 있었다. 그런데 혹독한 박해를 경험한 신자들과 그 후손들이 다시 모여들어 공동체가 재건되어 이 지역 복음화와 본당이 설립되는데 산파의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박해보다 더 무서운 산업화의 물결로 인해 농촌인구가 감소하면서 활기찬 옛 공소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다.
세상의 변화 속에서 많은 것이 사라졌으나 원머리 일대의 신앙공동체가 남겨놓은 영적 자산은 그대로 남아 있어 이제는 신평지역을 넘어 더 넓은 지역으로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박해시대 가장 혹독한 형벌로 꼽히는 생매장 순교자들의 터전이 있는 땅, 대를 이어 간직해온 원머리 순교자들의 무덤, 박해시대와 그 이후의 시대를 거쳐 끊임없이 이어져 온 공동체의 역사는 이제 새롭게 주목받고 있으며 영적 자산을 나누어주고 있다.
<각주>_____________
1) 편집자 주: 유해 이장 과정은 김정환(내포교회사연구소)이 작성하였다.
2) 차기진, <내포 지역의 교우촌과 공소 : 원머리(한정리) 교우촌>, 교회와 역사 220․221호, 1993.9․10. 또 최근에는 신앙 자유기의 당진․면천 지역 공소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원머리와 인근 지역의 공소들에 대해 언급한 글도 있다(김가람, <내포 지역 공소 연구 : 당진과 면천 지역 옛 공소들의 현재 위치> 1․2, 교회와역사 372․373호, 2006.5․6.
3) 1866년(고종 3년)에 시작된 병인박해는 엄격하게 말해서 ‘1866년에 전개된 박해’를 말한다. 그러나 이전과 달리 병인박해는 1866년 9~10월의 병인양요(丙寅洋擾) 이후 확대되다가 1867년 말과 다음 해 초에는 일시 완화되는 듯하였으나, 1868년 4월 17~26일(양력 5월 9~18일) 홍주 이웃의 덕산에서 독일 상인 오페르트(Oppert)의 주도로 발생한 ‘남연군묘(南延君墓) 도굴 미수 사건’으로 인해 다시 확대되었다. 따라서 1868년의 박해를 ‘무진박해’(戊辰迫害)로 설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본고에서는 1866년 이후 1870년대 초까지 계속된 박해를 ‘병인박해’의 연장으로 이해하였다.
4) 교회에서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諡福) 조사를 시작한 것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조선에 다시 입국하는 1876년부터였다. 이후 시복 조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 즉 ‘교회 순교록’이 정리되었다. 현존하는 병인박해 순교자들에 관한 교회 순교록 중에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은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 신부에 의해 예비 조사 단계에서 정리된 치명일기(1895년 간행)이다. 그리고 조사 수속 단계에서 교황청 재판(교구 위임 재판) 단계까지 계속 보완 수집된 자료들을 책자 형태로 묶은 병인치명사적(절두산순교기념관 소장, 필사본)과 드브레(Devred, 兪世俊) 보좌 주교가 정리해 놓은 일련의 증언 자료집(즉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한국교회사연구소, 1987)이 있다. 이 중에서 가장 내용이 풍부한 병인치명사적은 1923~1925년 사이에 총 25권으로 필사 정리되었으나, 현존하는 것은 22권뿐이다. 나머지 3권은 직접 순교자 시복에 관계된 것으로, 교황청 비밀문서고에 소장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대동지지 권5, 충청도 홍주.
6) 이중환, 택리지, 八道總論, 충청도.
7) 이중환이 말한 내포의 10개 고을은 오서산 남쪽의 보령을 제외한 나머지 10개 고을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임선빈, <내포 지역의 특성과 사회 구조>, 내포 천주교회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천주교 대전교구 솔뫼성지, 2002, 5쪽).
8) 최남선, 朝鮮常識, 풍속·지리·제도편2, 인문류, 내포와 維麻.
9) 김추윤, 삽교천의 역사 문화, 당진문화원, 1995, 95쪽.
10) 영조실록 권45, 영조 13년 8월 계미.
11) 임선빈, 앞의 글, 9쪽.
12) Ch. Dallet,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27쪽, 321쪽.
13) 한국 천주교회사 하, 324~325쪽.
14) 고종실록 권33, 고종 32년 5월 26일.
15) 고종실록 권34, 고종 33년 8월 4일.
16) 조선 후기까지 남아 있던 전국의 월경지들은 광무 10년(1906년) 9월 24일의 칙령 제49호로 모두 사라지게 되었다(고종실록 권47, 고종 43년 9월 24일).
47) 고종 43년 9월 24일).
17) 규장각 소장, <1872년 지방도>, 충청도 홍주 ; 여지도서 충청도 홍주, 방리 ; 한글학회 편, 한국 지명 총람 4(충남편․상),
1988.
18) 여지도서, 충청도 홍주. 이 18개 고을에는 홍주 진관에 속한 대흥이 누락되어 있는데, 이는 편찬자의 착오로 보인다(임선빈, 앞의 글, 9쪽).
19) 조선 후기 홍주의 행정과 군사 제도에 대해서는 다음의 연구들을 참조하였다. 임선빈․오석민, <홍주 관아 복원을 위한 기초 연구>, 市道硏究 3호, 2000 / 이해준, <제2편 역사 : 제6장 조선시대>, 洪州大觀 상, 홍주대관편찬위원회, 2002 / 임선빈, <조선 후기 內浦地域의 統治構造와 外官 - 洪州牧을 중심으로>, 호서사학 40, 2005.
20)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활동과 천주교 전파 과정에 대해서는, 차기진, <예산 여사울과 내포의 사도 이존창>, 한국 사회와 천주교, 다자인 흐름, 2007, 47~85쪽을 참조.
21) 이기경 편, 벽위편 권1, 홍낙안대친책문(洪樂安對親策文), 무신(1788년) 정월 10일. 이규경(李圭景)의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홍낙안의 책문 내용이 “을사년(1785) 봄과 작년(1787) 여름에는 호우 일대가 거의 집집마다 천주교 경전[聖經]을 외우고 전하며 한문으로 된 글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베껴서 아래로 부인들과 아이들에게까지 이르렀습니다”라고 되어 있다(같은 책, 경사편 3).
22) 위의 책 권1, 전가주서홍낙안재차문계(前假注書洪樂安再次問啓), 신해(1791년) 11월 2일; 정조실록 권33, 15년 11월 3일 ; 승정원일기, 같은 날.
23) 이만채 편, 벽위편 권2, 신해진산지변(辛亥珍山之變) ; 정조실록 권33, 15년 11월 5일 병자 ; 승정원일기, 같은 날.
24) 지금까지 배관겸(1740~1800)의 한자 성명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관명 ‘발은’(Pal eun)의 한자도 찾을 수 없다. 발은이란 관명은 A. Daveluy의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조선 주요 순교자 약전,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 p. 98)에 나온다. 한편 노상추일기 3권(국사편찬위원회, 2005) 신유 4월 10일조에 보면, 면천 역촌(현 현 당진시 순성면 양류리의 대촌) 출신 서개음금(徐介音金) 관련 기록에 “서개음금은 사학의 괴수로 매를 맞아죽은 죄인 배대득(裵大得)의 집을 매입하였다. 한 조각의 문서가 압수되었는데, 버선본에 쓴 언문체로 되어 있는 천주학의 글이었다. 매질하면서 문초했지만, 단지 배대득이 남긴 종이라고만 하였다” 는 구절이 보인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배대득을 면천 양제(현 당진시 순성면 양류리)에 경당을 매입했던 배관겸으로 볼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노상추(盧尙樞, 1746~1829)는 1801년 1월부터 7월까지 홍주 영장을 지낸 인물이다.
25)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p. 98.
26)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조선 순교사 비망기), 한국교회사연구소 소장(필사본), p. 50. 박취득의 한자명은 승정원일기 권96과 일성록 권28(정조 23년 6월 21일)에 나온다.
27)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pp. 89, 95~96.
28) 김진후(비오)는 김대건(金大建, 안드레아) 신부의 증조부인데, 그의 집안에서 처음 천주교를 받아들인 사람은 김진후의 맏아들(김대건 신부의 백부)인 김종현(金淙鉉)이었다(일성록 순조 을해 6월 19일, 일성록 헌종 기해 8월 7․13일).
29)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 226․240.
30) 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p. 99.
31) Ch. Dallet 저, 안응렬․최석우 역주, 한국 천주교회사 상, 분도출판사, 1979, 411쪽.
32) 방상근은 최근의 연구를 통해, 이존창에 의해 형성된 여사울 공동체 외에 김종현·배관겸·박취득의 입교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내포 지역의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는 과정을 폭넓게 이해해 보고자 하였다(방상근, <18세기 말 내포 천주교회의 형성과 발전에 관한 시론>, 한국 천주교회사의 빛과 그림자, 디자인흐름, 2010, 264~267쪽).
33) 사학징의 권1, 傳敎奏啓, 전라감사 김달순의 密啓 ; 來關秩, 신유 3월 19일 및 3월 29일.
34) 김성태, <신리 교우촌과 밀양손씨>, 교회사연구 35, 2010, 166쪽, 172~174쪽 및 각주 30.
35) 손치호(니콜라오, 1812~1868) 회장의 순교 행적에 ‘3대 교우이다’(병인치명사적 권11, 6쪽)라는 내용이 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3대는 12세 손인 손치호, 부친이요 11세 손인 손후설(1783~?), 조부요 10세 손인 손점수(孫點壽, 1744~1789)를 말한다(김성태, 위의 글, 173~175쪽). 반면에 1839년에 순교한 손경서(孫敬瑞, 안드레아, 1798~1839)의 순교 행적에는 ‘부모가 다 열심히 봉교하였다’고 나오며(기해일기, 손 안드레아 경서), 손치호 회장의 조카인 손자선(니콜라오, ?~1866) 성인의 순교 행적에는 ‘조부 때부터 교우였다’(병인치명사적 권7, 4쪽) 혹은 ‘3대째 천주교 집안 태생이었다’(한국 천주교회사 하, 423~424쪽 ; A. Launey 저, 안응렬 역, 79위 순교 복자전, 가톨릭출판사, 1970)고 나온다. 즉 손경서의 부친인 11세 손 손후대(1770~?), 손자선의 조부요 손후대의 아우인 11세 손 손후언(1787~1824) 때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36) 당시 밀양 손씨 집안의 전교 활동 기록은 교회사에 나타나지 않지만, 원시장의 경우에는 “그 자신이 아는 외교인들을 권면하기 시작하여 그들 중 30가족 이상이 입교하였다”(A. Daveluy, Notices des Principaux martyrs de Corée, p. 90)고 하며, “학문은 이단원(즉 이존창)의 집에서 찾고 배는 원동지(즉 원시장)의 집에서 불린다는 속담까지 있었다”(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 28)고 한다.
37) 사학징의 권1, 내관질(來關秩) 및 각도죄인작배질(各道罪人作配秩).
38) 노상추일기, 순조 신유 원년 가경 6년 일기, 2월 23일, 3월 4일, 4월 10일, 6월 8일.
39) 방상근, 앞의 글, 277쪽 ; 노상추일기, 순조 신유 원년 가경 6년 일기, 2월 21․23․25․29일.
40) 기존에는 원머리 지역에 천주 신앙이 전파된 시기를 1801년의 신유박해 이후라고 추정하였다. ‘한국 교회 초기의 대박해가 있은 이후 신자들이 이 지역으로 이주해 왔다고 전해졌기 때문’이다(천주교 신평 교회, <원머리 순교자 묘역의 내력>, 1989. 4 ; 崔孝根, <원머리 순교자의 내역>). 한편 1868년의 수원 순교자 박선진(마르코)의 집안을 예로 들면서 ‘원머리 교우촌이 형성된 시기는 1850년대’로 추정한 경우도 있다(차기진, <내포 지역의 교우촌과 공소 : 원머리 교우촌>, 교회와 역사 220호, 31쪽).
41) 편집자 주: 황무실은 당진군과 예산군의 경계지역으로 양쪽 모두에 속해있는 얕은 구릉이다. 천주교 대전교구 성지위원회에서는 프랑스 선교사 메스트르와 랑드르 신부의 묘가 있던 지역을 기준으로 하여 2011년부터 황무실의 주소지를 ‘당진군 합덕읍 석우리’(재오지)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42) A. Daveluy, Notes pour l'Histoire des Martyrs de Corée, p. 269, pp. 455~457.
43) 병인치명사적 권2, 5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44) 병인치명사적 권2, 7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45) 병인치명사적 권2, 8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46) 병인치명사적 권2, 14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47) 교회 순교록에는 그의 이름이 ‘박 마르코’라고 나타나지만, <원머리 순교자 묘역의 내력>에는 그 이름이 ‘선진’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자료들은 현 대전성모병원장으로 있는 박재만(타데오) 신부가 제공해 준 자료들이다. 박 신부는 바로 원머리 순교자들의 후손으로 그곳에서 태어나 사제로 서품되었다. 한편 최근에 정리된 <원머리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천주교 신평 교회, 타자본)에서는 이들 순교자의 이름과 순교 행적에 대한 근거 자료를 <밀양박씨기백공파보>(密陽朴氏幾伯公派譜) 하권(박병식 발행, 272~278쪽), 박영진(마르코의 사촌, 박인근의 3대 손)의 증언, 박갑득의 부인 윤귀순(마리아)의 증언 등으로 밝혀 놓았다. 그러나 필자가 1993년에 원머리 지역을 조사할 때만 해도 마티아의 이름(즉 태진)을 알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의 본관(즉 밀양)도 알 수 없었다(차기진, <내포 지역의 교우촌과 공소 : 원머리 교우촌>, 교회와 역사 220호, 30~32쪽 및 221호, 30쪽).
48) 병인치명사적 권1, 11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49) 앞에 수록한 <원머리 순교자 묘역의 내력> 중 ‘윤귀순 마리아의 증언’ 참조. 윤귀순은 박씨 집안의 며느리(박갑득의 부인)로 1988년 9월 25일 증언 당시의 나이는 78세였다.
50) 원머리의 문씨 집안 사람으로는 1868년의 순교자 ‘문조이 마리아’가 순교록에 나타난다. 그리고 조씨 집안 사람으로는 훗날 양 도미니코 회장, 홍 베드로, 최 베드로 등의 순교 행적을 증언한 ‘조 바오로’가 있다.
51) 병인치명사적 권11, 16쪽.
52) 병인치명사적 권11, 44쪽.
53) 신창 창말에는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교회 순교록을 보면 1866년 공주에서 순교한 김 수산나, 고선양 부자와 며느리, 백 프로타시오, 수원에서 순교한 권중심, 박영서, 서울에서 순교한 조치호, 1867년 서울에서 순교한 박 필립보 회장과 신정노 내외, 1868년 갈매못에서 순교한 박 베드로, 해미에서 순교한 조유진 등이 이곳에서 살았다.
54) A. Launay, Mémorial de la M.E.P(1658~1913), Paris, 1916, p. 356. 그에 앞서 1857년 12월 20일에는 황무실에 사목 중심지를 활동하던 매스트르(A. Maistre, 李) 신부가 선종하여 그곳에 안장된 적이 있었다(Ibid., p. 173). 매스트르 신부와 랑드르 신부의 무덤은 1970년에 발굴되었으며, 그 유해는 당시 합덕 성당 구내에 안장되었다가 2003년 대전가톨릭대학교 성직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55) 차기진, <박해기의 신리(거더리) 공소와 순교사>, 208~209쪽.
56) 다음의 내용은 교회 순교록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다만, 박선진(마르코)과 박태진(마티아)의 이름은 앞에 수록한 <원머리 순교자 묘역의 내력> 및 <원머리의 순교자 박선진 마르코와 박태진 마티아>에 근거했으며, 박치운(요한), 문조이(마리아), 최법상(베드로), 김조이(루치아), 김조이(마리아), 원(혹은 이) 아나스타시아 등의 이름은 최근에 발견된 관변 자료인 '공충도사학죄인성책'(다음의 본문 참조)에 근거하였다.
57) <병인정묘년 치명일기>(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필사본)는 양 도미니코 회장과 함께 순교한 간양골(현 예산군 예산읍 간량리) 출신의 홍주 순교자 박 안드레아 회장, 유(劉 혹은 柳) 서방, 김동(金童)의 순교 행적을 함께 기록한 것이다. 이 일기 내용은 매산리(현 당진시 신평면) 회장으로 있다가 원골 공소(현 서산군 운산면 수평리)로 이주한 박의래(朴義來, 베드로) 회장이 기록했으며, 증언자는 간양골 유 마태오, 박 안드레아 회장의 미망인 박 루치아, 기록자 박의래 회장의 모친 등으로 나온다. 또 일기 끝에 “이 증언이 1939년 3월 15일 매산리 박의래 베드로(81세)의 것임을 증명합니다”라고 하는 페랭(P. Perrin, 白文弼) 신부(당시 합덕 본당 주임)의 추기와 자필 서명이 있는 것으로 볼 때, 박의래 회장이 매산리에 거주할 때 기록한 것을 페랭 신부가 1939년 3월 15일에 발견하였고, 그가 위의 사실들을 확인한 뒤 인수 보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58) 병인치명사적 권2, 5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증언자는 홍주 원머리 살던 조 바오로.
59) 병인치명사적 권2, 15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증언자는 홍주 새터(매산리) 살던 삼종제 양 야고보.
60) 병인치명사적 권1, 11쪽, 1923년 2월 2일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위의 내용을 증언한 사람은 박 마르코의 아우로 홍주 원머리 살던 ‘박 요셉’으로, 증언 당시의 나이는 30세로 나온다. 따라서 형인 마르코의 나이(33세)와 순교 연도(1868년) 등을 감안해 볼 때, 박 요셉의 증언 시기는 병인치명사적의 기록 날짜가 아니라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예비 조사가 시작된 1876년 이후의 어느 시기라고 생각된다. 한편 위의 증언에는 박 마티아의 나이가 ‘50세’로 나오는데, 다른 순교록에는 ‘52세’로 나온다(치명일기, 정리 번호 374번). 증언자 박 요셉은 이후 강경으로 이주했다고 한다(<원머리 순교자 묘역의 내력> 중 ‘윤귀순 마리아의 증언’ 및 ‘박영진 치릴로의 증언’ 참조). 증언자 박영진은 원머리에 살면서 순교자들의 무덤을 돌보던 사람으로, 1989년 3월 20일 증언 당시의 나이는 65세였다.
61) 앞에 수록한 <원머리 순교자 묘역의 내력> 중 윤귀순(마리아)의 증언 참조.
62) 병인치명사적 권2, 5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 내포교회사연구소 소장, <병인정묘년 치명일기>.
63) 병인치명사적 권2, 8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증언자는 홍주 원머리 살던 조 바오로.
64) 병인치명사적 권2, 10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증언자는 홍주 새터에 살던 베드로닐라의 조카 정 바르톨로메오.
65) 이틀에 걸친 이장 작업 일체는 대전교구 홍보국에서 비디오로 촬영하였고, 이를 위해 두 순교자의 행적과 묘지 안장에 대해서 조사한 소책자인 《원머리 순교자 묘역의 내력》과 최효근이 작성한 《원머리 순교자 내역》 인쇄물이 발간되었다. 첫 번째 이장 작업에 대해서는 홍보국의 비디오 자료(1시간 59분 29초 분량으로 편집됨)와 당시 참석한 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재구성하였다.
66) 기념비에는 "원머리(한정리)에서 출생하여 신앙생활을 하시다 1868년(무진년)에 순교하여 천주께 대한 굳건한 믿음과 영광을 드러내고 여기에 묻히셨던 박태진(마디아)과 박선진(말구) 종형제의 거룩한 얼을 높이 기리고자 2007년 6월 15일 이 표석을 세웁니다."라고 적혀 있었다.
67) 안내판에는 "이곳에는 병인박해 2년 후에 순교로 신앙을 증거한 두 분 순교자의 묘(1989년 신평 성당 구내로 이장)와 아직 연고를 모르는 묘(2기)가 안장되어 있는, 순교의 얼이 살아 숨 쉬는 거룩한 묘역으로 2007년 5월 신평본당 신자들이 기도와 정성을 모아 이 묘역을 새로 단장하고 앞으로 성역화사업을 계속 추진하고자 합니다. 2007. 06"이라고 적혀 있었다.
68) 1989년의 첫 번째 이장 작업 때 두 순교자의 유해는 항아리 없이 사람 모양대로 뼈를 배열하여 매장한 바 있었으나 이후 성당 구내에서 두 번의 이장이 있었다. 1989년 당시의 자리는 현재의 성당 마당 후문 어귀의 언덕이었으나 새 성당 신축공사가 시작되면서 현재의 성당 앞 성모상 있는 부분으로 한 차례 옮겼다가 2000년 3월 14일에 마당 정문 옆의 자리, 즉 2009년 원머리로 다시 옮길 때 최종적으로 묘가 있던 자리에 묘역을 정비하였다. 성당 구내에서 이장하는 과정에서 유해를 항아리에 담아 안장하였다.
69) 현재 이 자료는 절두산순교기념관과 규장각에 각각 소장되어 있는데, 전자의 표지에는 “공충도사학죄인성책”이란 제목이, 후자에는 “公忠道各鎭各邑去四月朔內所捉邪學罪人居住姓名及譏校姓名並錄成冊”(규장각 도서 번호 17149)이란 제목이 붙어 있다. 그러나 둘의 내용은 동일하다. 이 성책에는 천주교 신자들을 처형한 달과 체포한 달, 처형지, 신자들의 출신지와 성명, 신자들을 체포한 기찰 포교의 성명이 수록되어 있으며, 매달 끝에는 관찰사 겸 순찰사 민치상(閔致庠)의 수결이 첨부되어 있다.
70) 성책에 수록된 순교자들은 모두 ‘복법’으로만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 순교 형식을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 복법은 ‘정법(참수)했다’ 는 의미가 아니라 단순히 ‘처형했다’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 같다.
71) 이들 외에도 1868년 5월 해미에서 박치운(요한) 등과 함께 순교한 35명, 1868년 6월 홍주에서 최법상(베드로)과 함께 순교한 27명도 생매장으로 순교했을 가능성이 있다(차기진, <홍성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연구> 및 <해미 지역의 천주교와 순교사 연구>, 홍성·해미 성지 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2006, 29․34~35쪽, 224․228쪽).
72) 순교자가 아닌 배교자의 경우에는 태형(笞刑)․장형(杖刑)을 가한 뒤 석방해 주거나 도형(徒刑) 혹은 유형(流刑)에 처하였다. 또 성직자(선교사)나 대표적인 평신도 지도자와 같은 교회 지도층은, 사형이 확정된 후 대기하였다가 추분 이후부터 입춘 이전에 날짜를 정하여 사형을 집행하는 대시(待時) 집행이 아니라 부대시(不待時) 집행의 판결에 따라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였고, 10악(十惡)에 해당하는 모반죄 혹은 부도죄(不道罪)의 판결을 받는 경우에도 부대시에 따라 능지처사(陵遲處死)를 당하였다.
73) 조선시대에 지방의 군․현 수령은 장형 이하, 관찰사는 유형 이하의 옥송만을 처리할 수 있었고, 사형은 삼복제의 절차에 따라 왕의 윤허를 얻어야만 하였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는 결안 정법이 흔해지면서 삼복제의 효력이 점차 약해지게 되었다.
74) 조선 시대의 결옥일한은 대사(大事)인 사죄(死罪)가 한 달(30일), 중사(中事)인 유죄(流罪)나 도죄(徒罪)가 20일, 소사(小事)인 장죄(杖罪)가 10일이었다(대전회통 권5, 형전, 결옥일한).
75) 고종실록 권3, 3년 12월 28일 계축.
76) 병인박해기에 가장 많은 순교자를 탄생시킨 대전교구의 순교자수는 공주 193명, 홍주 89명, 해미 52명이고, 이 숫자를 전국 순교자 8천 명에 대비하면 공주 순교자는 최대 1,503명, 홍주 순교자는 최대 692명, 해미 순교자는 최대 405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차기진, <병인박해와 충청남도 순교자에 대한 연구>, 145~146쪽). 이들 가운데 순교자의 이름과 함께 무덤이 현존하는 곳은 원머리와 성거산 성지뿐인데, 성거산의 순교자들은 아쉽게도 무명 순교자나 교우촌 신자들과 한 묘역(성거산 제1줄무덤)에 안장되어 있다. 한편 순성면 가울(현 당진시 면천면 본리의 嘉谷)에 안장되었다고 하는 한 토마스의 무덤은 그 후 실묘된 상태이고, 최 아우구스티노의 시신은 거두어졌지만 어디에 안장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
77) 병인치명사적 권1, 11쪽 ;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 정리 번호 120번. 당시 박씨 집안에 순교자들의 시신을 찾아 준 사람은 그 집안에서 생활하던 서덕행이란 외교인이었다. 그는 순교자들이 수원 포졸에게 잡혀갈 때 주인의 권유에 따라 작은 배를 타고 뒤쫓아갔지만, 실제로 순교자들이 당한 문초 과정은 보지 못하고 그들이 순교한 뒤 시신만은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발각되어 모진 매를 맞았으며, 이로 인해 단명하여 순교자들과 같은 묘역에 묻혔다(최효근, <원머리 순교자의 내역> 참조). 서덕행은 귀골이 장대하고 힘이 좋았으나, 마음이 착하여 ‘덕행(德行)’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는데, 1989년 3월 19일 후손에 의해 그의 무덤이 이장될 때 그 시신을 보고 신체 건장함을 알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는 달리 서덕행이 박씨 집안의 딸(박 마르코의 여동생)을 탐내 포졸들에게 순교자들을 밀고했고, 그들이 순교한 뒤 시신을 숨겨두고 ‘딸을 주겠다’는 박씨 집안의 이야기를 듣고는 그 시신들을 가족에게 인계했다고도 한다(<원머리 순교자 묘역의 내력> 중 ‘윤귀순 마리아의 증언’ 참조). 그러나 서덕행이 박 마르코의 여동생과 혼인했고, 사망한 뒤 순교자들과 같은 묘역에 묻혔던 점에서 볼 때, 또 박씨 집안과 서씨 집안이 가까이 지냈던 점에서 볼 때 서덕행이 밀고자는 아니었던 것 같다(차기진, <내포 지역의 교우촌과 공소 : 원머리 교우촌>, 교회와 역사 221호, 30쪽).
78) 차기진, <내포 지역의 교우촌과 공소 : 원머리 교우촌>, 교회와 역사 221호, 30쪽.
80) 한국교회사연구소 편역, 《천주교 대전교구 통계자료집》, 천주교 대전교구, 1990, 18~19쪽.
81) 숫자에 착오가 있는 듯하다. 그해 판공성사를 본 신자가 70명이었다.
82) 천주교 대전교구 홍보국, <공소 탐방: 한정리 공소>, 《둠벙》 59호, 1989, 12쪽.
83) 위의 책, 12쪽.
84) 순교자 박선진의 후손인 박노진과 박영태(분도)는 1989년 원머리의 순교자 유해를 신평 성당 구내로 이장할 때 유해 상자를 메어 운구하였다(2011년 11월 12일 박재수의 증언); 위의 책, 13쪽 참조. 박재수의 아버지는 박영진(치릴로)이고 큰아버지는 박갑득(요한)이다. 박갑득은 원머리 순교자 묘를 관리해오다가 고향을 떠나면서 박재수에게 묘의 관리를 위임했다.
85) 2011년 11월 12일 김정환 신부가 원머리에서 박재수와 그의 어머니 조정외(비르짓다, 87세)의 증언을 듣고 녹취하였다.
86) "우리는 아름다운 合德池 둑길을 따라가고 있었는데, 그 저수지는 우리가 횡단하고 있는 굉장한 평야에 물을 대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도착하기 조금 전, 왼쪽으로 신리 마을이 보였는데, 그곳은 다블뤼 주교가 거처하던 곳이고 또 1866년에 체포된 곳이다. 그리고 좌우의 세거리와 거더리 두 마을은 1866년 이전까지는 완전히 교우들 마을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은 모두가 외교인일 뿐만 아니라 어느 곳보다도 완고한 외교인들이다. 박해는 이 가련한 영혼들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다"(《뮈텔 주교 일기》, 1896년 10월 16일).
87) 《구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 166쪽.
88) 《뮈텔 주교 일기》 1899년 12월 29일.
89) 《뮈텔 주교 일기》 1899년 12월 28~31일.
90) 《구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 225쪽.
91) 위의 책, 238쪽.
92) 위의 책, 385쪽.
93) 위의 책, 406~407쪽.
94) 위의 책, 408~413쪽.
95) 위위 책, 399~400쪽.
96) 1916년 라리보 신부의 보고서; 《경향잡지》 386호(1917년 11월). 원머리의 옛 공소 강당은 그곳의 순교자 묘역 바로 앞에 있었는데 언제 건립되었는지는 모른다. 작은 토담집으로 남자와 여자 칸이 수수대로 엮은 흙 바른 벽으로 나뉘어 있었다(2009년 11월 3일 박재수(요한)의 증언).
97) 《경향잡지》 678호(1930년 1월), 30쪽.
98) 《구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 413쪽.
99) 《천주교 당진본당사》, 129쪽.
100) 《대전교구 60년사》, 28쪽.
101) 《가톨릭신문》 235호, 1960년 6월 26일자, 4면.
102) 《둠벙》 48호, 1988, 16~17쪽.
103) 《구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 413쪽. 한편 1928년의 기록에 따르면 음섬에는 주일학교가 따로 운영되고 있었다(같은 책, 407쪽).
104) 1957년 7월 10일에 촬영한 자료 사진에는 '매산리공소 축성식'이라고 되어있는데 '음섬공소'와 혼동한 것이다. 행정구역상 같은 매산리에 위치해있어 잘못 표기한 듯하다.
105) 위의 책, 378쪽.
106) 《대전교구 교세통계표》, 380~421쪽.
107) 《구합덕본당 100년사 자료집》, 408~412쪽.
108) 한국가톨릭농민회, 《한국 천주교 농촌 공소 실태조사연구보고서》, 분도출판사, 1984, 420쪽; 《대전교구 교세통계표》.
109) 1967년 거산공소 이주창(안드레아)가 작성한 원조요청서에는 공소가 1947년에 설립되었다고 한다.
110) 《농촌 공소 실태조사 연구보고서》, 420쪽.
111) 1967년 초대공소 신해철(바오로) 회장이 작성한 원조요청서.
112) 《농촌 공소 실태조사 연구보고서》, 420쪽.
113) 《대전교구 교세통계표》, 534쪽; <가톨릭신문> 1975년 4월 6일, 1면.
114) 대전교구 공문 사목 500-74(1975년 3월 26일).
115) 《대전교구 30년》, 104쪽.
116) 1967년 이철우(요셉) 회장이 작성한 원조요청서. 이 요청서에는 금천공소가 1962년 3월 10일 23명의 신자로 출발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대전교구에 보관된 교세통계표에 따르면 여자 22명, 남자 30명으로 총 52명이었다(《대전교구 교세통계표》, 574쪽).
117) <대전주보> 223호, 7면.
118) 《농촌 공소 실태조사 연구보고서》, 420쪽. 하지만 이 통계는 실제 각 공소에 거주하는 신자와 다를 수 있다. 도시로 떠난 신자들이 교적을 정리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는 경우가 허다한 때였기 때문이다.
119) 1988~1999년까지 매산리에서는 골롬반 외방전교회 서 로벨토 신부가 귀농생활을 한 바 있다(기쁨과 희망 사목연구원, 《기쁨과 희망》 창간준비호, 2008, 183~1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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