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의 종 김홍범 요한(1822〜1867)
◦ 1822년 서울 문안에서 출생. 이후 장동에서 거주함
o 1867년 우포도청 에서 물고로 순교
김홍범(金私範) 요한은 서울 문안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모친에게 천주 교리를 배워 실천하였다. 그의 형제들은 비록
가난했을지라도 착하고 후덕한 성품을 지닌 데다가 착실했으므로 차츰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의 두 형 가운데 한 명인 김종운(金宗S)
은 1839년의 기해박해 때 체포되었다가 석방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사 망하였다.177>
요한은 기해박해가 일어나던 1839년에,즉 그의 나이 17세 때에 김
씨를 아내로 맞이하여 두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상처하고, 25세(1847년) 무렵에 김아기〔金阿H〕마리아와 재혼하였다. 기록에 따르면 요한의 두 번째 아내인 마리아는 1870년에 체포되어 좌포도청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온다. 또 마리아의 모친은 요한과 함께 우포도청에서
순교한 것으로 나온다.178)
이후 언제부터인가 요한은 서울 장동(長洞, 현 서울 중구 남대문로3 가 • 회현동)에 살면서 집 앞에 잡철전(雜鐵塵)을 열고, 자신은 대궐의 문기수(門旗手)로 일하였다. 이때 그는 동료들이 모두 탄복할 정도로 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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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치명일기』, 정리 번호 40번 :『우포도청등록』, 정묘(1867) 3월 6일 : 『박순집 증언록』권1, 30쪽. 증언록에는 요한이 태중교우라고 나오며,
포 도 청 등 록 에 는 1 0 세 무 렵 에 모 친 으 로 부 터 교 리 를 배 운 것 으 로 나 온 다. 또 증언록에는 그의 세례명이 ‘베드로’ 로 나오는데, 이는 오기인 것 같다.
178)『치명일기』, 정리 번호 41번 ••『좌포도청등록』, 경오(1870) 8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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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다하였다고 한다.
요한이 다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1849년에 정의배(丁義 塔, 마르코) 회장을 만나면서였다. 이때부터 그는 교리와 기도문을 익 히는 데 열중하였고, 홍봉주(洪鳳周,토마스)가 모셔온 베르뇌 (S. Berneux, 시메온) 주교에게 성사도 받았다. 또 자신의 집에 공 소를 차리고 베르뇌 주교를 모셔와 많은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도 록 했으며, 비신자에게 교리를 가르쳐 입교시키는 일에도 정성을 다하 였다.179)
그러던 중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요한은 베르뇌 주교의 시신 을 안장하는 데 참여하였다. 또 교우들을 구하려는 생각에서 방물장수 신자로 하여금 ‘양민을 잘못 체포하고 있다’ 는 말을 사방에 퍼뜨외도록 한 적도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1867년에는 교우들이 도움을 청하기 위 해 중국으로 배를 보낼 때 . 700냥의 돈을 후원하기도 하였다.180)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요한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게 되었고, 그 결 과 그는 1867년 2월에 자신의 집에서 체포되어 우포도청으로 압송되었 다. 이때 친구로 지내던 포교와 문기수들이 여러 차례 그를 찾아와 “배교 하고 나가서 자식과 집안을 보존하라.”고 달랬지만, 그는 “말씀은 고맙 지만, 나는 이미 죽기로 작정 한 사람이니 다시는 그런 말씀을 하지 마시 오.”라고 대답하면서 자신의 결심을 드러내곤 하였다.181> 또 포도청에서 의 문초와 형벌 중에는 다음과 같이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오랫동안 천주교를 믿어왔으니 배교할 수 없습니다. 비록 매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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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병인치명사적』권9, 15쪽 :『박순집 증언록』권1, 30쪽 :『우포도청등 록』, 1867년 3월 6일 :『좌포도청등록』,1868년 8월 16.21일,1869년1월 30일, 1870년 10월 5일,18기년 2월 4일.
180)『치명일기』, 정리 번호 40번 :『좌포도청등록』, 1868년 3월 30일 :『
포도청등록』, 1867년 3월 6일 :『박순집 증언록』권1,30쪽.
181)『박순집 증언록』권1, 31쪽 ;『병인치명사적』권9, 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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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 죽는다고 하더라도 천주학을 버 릴 마음은 조금도 없습니다.”182》
이후 문초와 형벌이 계속되자 요한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않기 위해 자신의 혀를 깨물었다. 중국 으로 배를 보낸일을 숨기기 위해서 였다고한다. 그런 다음 1867년 4월 12일(음력 3월 8일) 이후에 포도청에서 물고(物故:)로 순교했으니 , 당시 그의 나이 45세였다.1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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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우포도청등록』,1867년 3월 6일.
183)『우포도청등록』, 1867년 3월 8일. 이날 요한을 물고(物故)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한편 요한이 1867년 5월 17일(음력 4월 14일)에 옥중 순교하 여 이튿날 소경재에 안장되었다는 기록도 있고(『치명일기』, 정리 번호 40 번 :『박순집 증언록』권 1. 31쪽), 1867년 4월(음력) 옥중에서 교수형으 로 순교했다는 증언도 있다(『병인치명사적』권9, 1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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