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5. 서운동 순교 성지 성당
(청주 읍성순교성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대성로 41
서운동 성당은 1933년 6월 청주최초의 본당으로 설립되었으며 1963년 7월 현재의 자리로 신축 이전하였다. 관할 구역 안에 4곳의 순교 지와 1곳의 신앙 증거 터가 있어,2019년에 순교 성지 성당으로 지정되었다.
청주 진영 순교 지는 충청도의 5개 진영 가운데 하나로 병인박해 때 진천 지장골에서 체포된 오반지 바오로 복자가 압송되어 혹독한 형벌을 받고 교수형으로 순교하였다.
청주 남문 밖 장터 순교 지는 1866년 병인박해가한창일 때, 보은 멍에목에서 체포된 김사진 프란치스코 복자가 압송되어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고 목이 졸려 순교하였다.
충청 병영 순교 지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영 자리이며,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시복한 순교자들의 순교지요 신앙 증거 터이다.
이곳에서 원시보 야고보(1799년 4월17일) 복자와 배관겸 프란치스코(1800년 1월 7일) 복자가 순교의 화관을 썼다.
청주 북문 밖 장대 순교 지는 장 토마스 복자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진영으로 압송되어 사형 판결을 받은 뒤 참수형으로 순교한 곳이다.
청주 옥 신앙 증거 터는 옛 청주읍성 동문 안에 있던 곳으로 박해 때마다 곳곳에서 체포된 천주교 신자들이 옥살이의 고초를 당하면서 신앙을 지킨 증거 터이다.
청주읍성 순교성지를 가다
도심 속 순교터 거닐며 ‘현대의 순교’ 새겼다.
‘청주읍성’(淸州邑城)은 조선 시대 청주관아(官衙)와 민거(民居)를 둘러쌓은 성이었다. 현재 성벽은 없어졌지만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북문로, 서문동 일원의 도로와 성문터 표석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이 읍성은 신앙인들에게 특별한 순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전해주는 곳이다. 신유박해(1801년)부터 병인박해(1866년)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며 박해의 칼날 앞에 목숨을 내놓았던 순교자들 얼이 배어있다.
청주옥 신앙증거터. 서울 명동처럼 청주시의 대표적인 상권 지역으로, 표지석은 백화점 건물 앞 도로 바닥에 설치돼 있다.
복자 원시보(야고보), 배관겸(프란치스코), 김사집(프란치스코), 오반지(바오로), 장 토마스와 하느님의 종 김준기(안드레아), 전 야고보, 최용운(암브로시오)이 대표적인 순교자들이다.
이들이 신앙을 증거하고 순교했던 장소들, ‘청주읍성 순교성지’(이하 청주읍성성지)를 찾았다. 성지를 관할하는 본당이자, 복자 오반지(바오로)의 유해가 봉안된 청주 서운동성당을 시작으로 ▲청주진영 순교지 ▲청주 남문 밖 장터 순교지 ▲충청병영 순교지 ▲청주 북문 밖 장대 순교지 ▲청주옥 신앙증거터를 잇는 순례길이었다. 4㎞ 구간에 이르는 길을 서운동본당(주임 김웅열 신부) 순교자현양회(회장 민우식) 회원들을 따라 걸었다.
서운동성당 제대에 안치돼 있는 복자 오반지(바오로) 유해.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
서운동성당은 순례길의 출발과 마침이다. 복자 오반지 유해(아래턱 뼈)는 성당 제대에 안치돼 있다. 유해 앞에 서자 참수형을 선고 받은 후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고 외쳤던 복자의 음성이 마음 안에 울려왔다.
성당을 떠나 청주의 대표적인 전통시장인 육거리시장 어귀에 이르면 ‘청주진영 순교지’를 마주할 수 있다. 1866년 병인박해 후, 청주는 물론 진천·보은·옥천·영동 등지에 거주하던 신자들의 체포를 주도한 관청이 이곳 진영이었다. 복자 오반지와 하느님의 종 김준기, 전 야고보, 최용운 등이 순교한 장소이기도 하다. 현재는 청주제일교회가 들어서 있다. 교회 정문 오른쪽 한편에 ‘청주진영터 기념 표석’이 세워져 있다.
‘청주 남문 밖 장터 순교지’는 육거리시장 한복판,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발걸음 속에서 찾게 된다. 바닥에 설치된 동판 표석이 200여 년 전 박해의 시간으로 이끌고 가는 듯 했다. 당시 이 장터에서는 음력 2일과 7일에 장이 섰다. 복자 김사집이 많은 이들의 조롱 속에서 조리돌림(회술레)을 당하던 1801년 12월 22일 그날도 장날이었다. 덕산과 해미에서 형벌을 당한 뒤 청주로 이송됐던 그는 조리돌림 후 매를 맞던 중 순교했다.
이어서 발걸음을 옮긴 지점은 ‘충청병영 순교지’, 현 중앙공원이었다. 복자 원시보·배관겸 등이 순교의 영광을 안은 현장이다. 이들 외에도 이름 모를 순교자들이 신앙을 증거하다 순교했다. 청주교구는 이런 순교자들의 숭고한 넋을 기리기 위해 2002년 순교자현양비를 세웠다.
다음 순례 장소는 ‘청주 북문 밖 장대 순교지’. ‘장대’는 옛 청주읍성 북문 밖에 있던 군대 지휘소를 말한다. 여기서는 복자 장 토마스가 순교했다. 이외에도 손관보(베드로)와 여 요셉 등 순교자들이 참수형을 당했다.
‘청주옥 신앙증거터’는 서울 명동처럼 청주시의 대표적인 상권 지역에 있다. 박해 때마다 각처에서 체포된 신자들이 갇혔던 청주옥 자리다. 표지석은 백화점 건물 앞 도로 바닥에 설치돼 있다.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신앙을 증거한 순교자 모습처럼 다양하고 화려한 패션 문화공간 안에서 담담하게 신앙 증거의 장소를 표시하고 있었다. 다시 서운동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은 자연스럽게 ‘현대의 순교’를 묵상하는 시간이다.
청주읍성 북문 밖 장대 순교지. 이곳에서 복자 장 토마스가 순교했다.
일상 속의 순교터
이처럼 청주읍성성지는 일상 속에서 또 우리의 삶 가까이에서 옛 순교자들의 신앙 발자취를 찾아볼 수 있는 순례길이다. 청주읍성성지는 청주교구가 2017년 5월 28일 순교터와 증거터의 기념 표석 설치를 마무리 하면서 한국교회 주요 성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개편·발행될 「한국 천주교 성지순례」에도 추가로 수록될 예정이다. 관할 본당인 서운동본당도 이런 추세에 힘입어 ‘순교성지’로서의 면모를 갖추는데 박차를 가하고 있다.
김웅열 신부는 “순교터와 신앙 증거터로 이뤄진 청주읍성성지의 개발 자체가 영적 순교이며 기도가 될 수 있다는 면에서, 지역을 넘어선 한국 신자 모두의 기도와 도움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본당은 지난 5월부터 ‘만 명의 천사’ 성지개발 후원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문의 043-252-6984(순례), 010-3350-1356(성지 후원)
순례 코스를 설명하고 있는 서운동본당 주임 김웅열 신부.
이주연 miki@catimes.krrn사진 박원희 기자
복자, 원시보 야고보(5.29) 기본정보
원시보 야고보(元--, Jacobus)는 충청도 홍주 응정리(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성동리)의 양인(良人) 집안 출신이다. 그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몇 해가 지난 1788-1789년 무렵, 곧 그의 나이 60세가 다 되어서야 사촌 동생 원시장 베드로(元--, Petrus)와 함께 천주교 교리를 듣고 입교하였다. ‘시보’는 그의 관명(冠名)이다.
본디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정직하고 활달하였던 야고보는, 입교하자마자 교회의 가르침을 충실히 지키며 온갖 덕행을 실천하였다. 가난한 이들을 위해 재산을 희사하였고, 금요일마다 금식을 하였으며,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는 데 노력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은 점차 인근 지역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 신자들이 체포되기 시작하자, 홍주 관장은 포졸들을 보내 곧장 원 야고보와 사촌인 원 베드로를 체포해 오도록 하였다. 이때 원 야고보는 친구들의 권고에 따라 다른 곳으로 피신하였으나, 원 베드로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갖가지 혹형을 받은 뒤, 1793년에 순교하였다. 뒤에 이 소식을 들은 원 야고보는 사촌과 함께 순교의 영광을 얻지 못한 것을 뉘우치고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였다.
1795년 무렵, 원 야고보는 주문모 야고보 신부(周文謨, Jacobus)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나 첩을 두고 있다는 이유로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가서는 바로 첩을 내보냈다.
이로부터 2년 후에는 정사박해가 충청도 전역을 휩쓸게 되었다. 이 와중에서 원 야고보도 1798년에 체포되어 덕산 관아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 68세였다. 그러나 그는 갖가지 혹형에도 굴하지 않고, “천주를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고자 천주교를 봉행합니다.”라고 말하면서 신앙을 증거하였다. 그런 다음 홍주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덕산으로 끌려와 몹시 두들겨 맞았으며, 형벌로 인해 두 다리가 부러지고 말았다.
1799년 원 야고보는 감사의 명령에 따라 병영(兵營)이 있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가 덕산을 떠나는 날 아내와 자식과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따라가서는 안 되네. 모든 고통을 참아 낸다면, 기쁨 가운데서 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를 만날 수 있을 것이네. 그대들이 여기에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니 돌아가게. 이성을 잃고 대사(大事)를 그르칠 수는 없네.”
청주에 도착하자마자 원 야고보는 관장 앞으로 끌려 나가 문초를 당하였다. 관장은 그를 배교시키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순교의 원의로 가득 찬 그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다.
덕산에서 이미 두 다리가 부러졌던 원 야고보에게 다시 온갖 혹형이 가해졌으며, 그는 결국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말았다. 그때가 1799년 4월 17일(음력 3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9세였다. 원시보 야고보가 순교한 뒤 그의 육체는 이상한 광채에 둘러싸인 것 같았으며, 이 광경을 목격한 50가족가량이 천주교에 입교하였다고 한다.
원시보 야고보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배관겸 프란치스코(5.29) 기본정보
충청도 당진의 진목(현, 충남 당진군 석문면 장항리) 출신인 배(裵)관겸 프란치스코(Franciscus, 또는 프란체스코)는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지 얼마 안 되어 입교하였다. 관명(冠名)은 ‘발은’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고향 진목은 충청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이 전파된 내포 지역 안에 있었다.
배 프란치스코는 1791년의 신해박해로 체포된 적이 있었다. 이때 그는 신앙을 굳게 지키지 못하고 석방되었으나, 집으로 돌아와서는 곧바로 자신의 죄를 진실히 뉘우치고 다시 열심히 하느님을 섬겼다. 이후 그는 서산으로 이주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 이웃에 있던 면천의 양제(현, 충남 당진군 순성면 양유리)로 돌아와 교우들과 함께 신앙 공동체를 이룩하였다.
1794년 말 조선에 입국한 주 야고보 신부는 다음 해부터 지방의 신앙 공동체를 순방하기 시작하였다. 그때 배 프란치스코도 이 소식을 들었다. 이에 그는 1798년에 신부를 모실 수 있다는 희망을 갖고 교우들과 함께 양제 마을 안에 강당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당시는 이미 정사박해가 충청도 지역을 휩쓸고 있을 때였다. 실제로 양제의 교우들이 강당을 마련한 그해 10월 3일, 한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양제 마을로 들이닥쳤다.
포졸들은 곧바로 배 프란치스코를 체포하여 홍주로 압송하였다. 관장은 그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면서 ‘교우들이 있는 곳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갖다 바치라.’고 강요하였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이에 홍주 관장은 화가 나서 사실 그대로를 공주 감사에게 보고하였고, 감사는 프란치스코를 청주 병영(兵營)으로 이송하여 문초하도록 하였다.
청주에 이르러 배 프란치스코는 원 야고보 등 다른 교우들을 만나 고통을 함께하였다. 그의 신앙은 여전히 굳건하였으며, 온몸의 살이 헤어지고 팔다리가 부러져 뼈가 드러날 정도가 되어서도 그는 영웅적인 인내로 모든 것을 참아 내었다. 그러나 형리들의 매질이 계속되면서 끝내 이를 이겨 내지 못하고 순교하였으니, 그때가 1800년 1월 7일(음력 1799년 12월 13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약 60세가량이었다.
배관겸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해 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김사집 프란치스코(5.29) 기본정보
‘성옥’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던 김사집 프란치스코(金--, Franciscus)는, 충청도 덕산의 비방고지(현, 충남 당진군 합덕읍 합덕리 창말)에 있는 양가(良家)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공부를 하던 도중에 천주교 신앙을 접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세속 학문을 버리고 교리를 실천하는 데에만 노력하였으며, 일상을 기도와 독서로 보냈다.
김 프란치스코의 타고난 슬기와 재능, 가난하고 외로운 이들에 대한 희사와 애긍은 복음 전파의 훌륭한 수단이 되었다. 그는 자신의 학문을 바탕으로 교회 서적을 열심히 필사하여 가난한 교우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소에 효성이 지극하였던 그는 부모님이 세상을 떠나자, 2년 동안 육식을 삼가면서 교회의 가르침대로 예를 다하였다.
1801년에 신유박해가 일어난 뒤, 김 프란치스코가 교우들에게 나누어 준 책들은 하나둘씩 포졸들에게 압수되었다. 이내 그의 이름이 관청에 보고되었고, 관청에서는 배교자 2명에게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도록 하였다. 실제로 그들이 김 프란치스코의 집을 탐문하고 돌아간 지 얼마 안 되어 포졸들이 그의 집으로 들이닥쳤다.
덕산 관아로 압송된 김 프란치스코는 관장에게 유혹과 형벌을 번갈아 받으면서도 신앙을 굳게 지켰다. 관장이 죄수들에게 매질을 하는 천한 임무를 그에게 맡겼지만, 이것마저도 그의 마음을 바꾸지는 못하였다. 김 프란치스코는 옥중에서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내 “천주님과 성모 마리아의 도우심에 의지하여 교우답게 살아가는 데 힘쓰도록 하여라. 그리고 다시는 나를 볼 생각은 하지 말아라.” 하고 당부하였다.
같은 해 10월, 김 프란치스코는 해미로 이송되어 치도곤 90대를 맞아야만 하였다. 그런 다음 2개월 뒤에 상처투성이가 된 몸을 이끌고 청주 병영으로 이송되었다. 엄동설한에 해미에서 청주로 가는 3일간의 180리 길은 김 프란치스코에게 극복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인종(忍從)과 마음의 평온을 조금도 잃지 않았다.
청주로 이송된 지 얼마 안 있어 김 프란치스코는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런 다음 많은 구경꾼이 모여 있는 장터(현, 충북 청주시 남주동)로 끌려 나가 곤장 80대를 맞고는 그 자리에서 순교하고 말았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25일(음력 1801년 12월 22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8세였다.
목격한 증인들의 말에 따르면,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신 · 망 · 애 삼덕(三德)이 끝까지 아주 열렬한 것 같았고, 마음이 철석같이 굳었다고 한다.
김사집 프란치스코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오반지 바오로(5.29) 기본정보
오반지 바오로(吳盤池, Paulus)는 충청도 진천의 반지(현, 충북 진천군 이월면 사곡리)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던 집안 출신으로, 비교적 풍요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장성할 때까지 공부와는 담을 쌓았으며, 혼인한 뒤에는 방탕한 생활로 재산을 다 날려 버리고 말았다.
오 바오로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은 40세가 훨씬 지난 1857-1858년 무렵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 되었는데, 어느 날에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가족과 함께 진천의 지장골(현, 충북 진천군 진천읍 지암리)로 이주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그리스도교적인 체념으로 가난을 참아 견디었으며,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자신의 본분을 아주 정확하게 지켜 나갔다.
오 바오로의 열심은 이내 주변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그래서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청주 병영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를 체포하기 위해 지장골로 들이닥쳤다. 그는 한 젊은이와 함께 체포되어 진천에 투옥되었다가 청주로 이송되었으니, 이때가 3월 13일(음력 1월 27일)이었다.
청주 병영으로 압송된 오 바오로는 모진 형벌과 문초 가운데서도 교회 일을 조금도 누설하지 않았으며, 단지 ‘나는 천주교인이요.’라는 말만을 되풀이하였다. 한번은 형벌을 받고 옥으로 끌려갈 때, 형리들이 몽둥이로 그의 머리를 내리쳐 피가 솟아나자, 오 바오로는 대뜸 “나를 죽이고 싶으면 죽여도 좋소. 하지만 관장의 명령도 없는데 왜 마음대로 때리는 거요”라고 항의하였다.
당시 옥에는, 오 바오로와 함께 체포된 젊은이와 새로 체포되어 온, 배 바오로라는 교우가 있었다. 관장은 이들 세 사람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므로 ‘배교한다.’는 한마디만을 얻어 내려고 여러 방법으로 유혹하였지만, 오 바오로는 조금도 이러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권면에도 함께 갇혀 있던 동료들은 관장의 유혹에 넘어가고 말았다. 오 바오로가 옥중에 있을 때 아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은 당부의 말이 적혀 있었다.
“교우로서의 본분을 잘 지키고 남의 빚을 갚도록 하여라. 그리고 만일 체포되면 주님을 위해 순교하도록 하여라.”
관장은 어떠한 형벌과 유혹으로도 오 바오로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음을 알고는 마침내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였다. 이때 오 바오로는 “만 번 죽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할 수 없다.”는 말로 신앙을 증언하고, 청주 남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런 다음 사형 집행을 관장하는 관리가 마지막으로 배교를 유도하려고 종이를 갖다 주자, 그는 끝까지 ‘배교한다는 말을 쓸 수 없다.’고 단언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오반지 바오로의 옆에 있던 사형 집행인이 그에게 달려들어 군중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목을 졸라 죽이고 말았다. 이렇게 오 바오로가 순교한 날은 1866년 3월 27일(음력 2월 11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3세였다. 그가 순교한 날에는 ‘백일청천에 무지개가 떠서 그의 시체에서부터 하늘까지 닿았다.”고 한다. 오반지 바오로의 시신은 아들과 신자들 몇 명에 의해 지장골로 옮겨져 그 인근에 안장되었다.
오반지 바오로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복자, 장 토마스(5.29) 기본정보
경기도 수원 느지지(현, 경기도 화성시 양감면 요당리)에서 태어난 장 토마스(張, Thomas)는 1866년에 순교한 장주기 요셉(張周基, Josephus) 성인의 육촌 형제로, 그와 함께 천주교 신앙에 대해 듣고 입교하였다. 이후 그들은 참된 신앙생활을 위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도왔다. 그러다가 장주기 요셉 성인은 충청도 배론(현, 충북 제천시 봉양면 구학리)에 정착하였고, 장 토마스는 진천 배티(현, 충북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에 정착하였다. 당시 배티에는 장 토마스의 인척으로 생각되는 장 시몬 회장이 거주하고 있었다.
장 토마스는 이때부터 열심히 계명을 지키는 생활을 하면서 하나뿐인 아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이 무렵 가까운 인척과 친구들은, 그의 본심이 순량한 탓에 그에 대해 말할 때면 언제나 ‘착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된 뒤, 장 토마스는 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오로지 주님의 명령만을 따르기로 작정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청주 포졸들이 들이닥쳐 그와 가족들을 모두 체포하였다.
이내 진천 관아로 압송된 장 토마스는 관장 앞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관장이 “천주교를 배반하면 죽이지 않을 것이며, 너의 세간을 돌려주어 살 수 있도록 할 것이다.”라고 말하자, 그는 “세간과 목숨은 버릴지언정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 토마스는, 군대가 주둔하는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을 때 다시 영장이 “천주교를 배반하지 못하겠느냐?”라고 묻자, 여전히 “만 번 죽어도 천주교를 배반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한결같이 대답하였다.
이윽고 장 토마스에게 사형이 선고되고, 포졸들은 그를 군대 지휘소가 있는 장대(將臺, 현,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로 끌고 나갔다. 바로 그때 장 토마스는 자기의 대자가 배교하려는 것을 목격하고는 “주님을 위하여 천주교를 봉행해 왔는데, 이런 기회를 버리고 목숨을 건진다면 장차 천주님의 벌을 어찌 면할 수 있을 것인가?”라고 권면하였다. 그런 다음, 칼날 아래 목을 드리우고 순교의 영광을 얻었으니, 당시 장 토마스의 나이는 51세였다.
장 토마스는 대전교구에서 열린 제6회 아시아 청년대회에 참석하고자 한국을 사목방문한 교황 프란치스코(Franciscus)에 의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동료 순교자 123위와 함께 시복되었다. 시복미사가 거행된 광화문 광장 일대는 수많은 순교자와 증거자가 나온 조선 시대 주요 사법기관들이 위치했던 곳이며, 또한 처형을 앞둔 신자들이 서소문 밖 네거리 · 당고개 · 새남터 · 절두산 등지로 끌려갈 때 걸었던 순교의 길이었다.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들은 매년 5월 29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한다.
‘하느님의종’ 전야고보(?~1867)
전야고보는 청주 금봉(현 충북 청원군 미원면 월룡리) 출신으로 시각장애인이었다. 그는 13살 때 보은 멍에목 교우촌 회장인 매부 최용운(암브로시오)로부터 교리를 배워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전야고보는 세례받은 직후부터 한결같은 마음으로 동정을 지키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러다가 1866년 병인박해 때 아버지와 형이 멍에목 신자들과 함께 청주 포졸들에게 체포돼 옥에 갇히자 밥을 빌어 옥중의 신자들을 도왔다. 관원들은 그럼에도 야고보가 시각장애인이어서 체포하지 않았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버지와 형도 얼마 뒤에 석방됐다.
그러나 이듬해인 1867년 10월 청주 포졸들이 금봉으로 몰려와 전야고보와 그의 동생 마티아를 체포해 청주로 압송했다. 전야고보는 청주로 끌려가던 도중 동생에게 은밀하게 “나는 맹인이라 석방될지도 모르지만, 순교를 각오하고 있다. 너는 본디 마음이 약해서 형벌을 받으면 굴복할 수도 있으니 내 생각하지 말고 네 재주껏 도망가라”고 했다. 그러자 동생은 형의 말이 옳다고 여겨 몰래 수갑을 벗고 도망했다.
청주 관아 형관이 전야고보를 보고 “천주교가 무엇인지 맹인이 어찌 알겠느냐? 어서 빨리 놓아주도록 해라”고 명하자 그는 형관에게 “제가 비록 눈으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맹인이지만, 마음으로는 한결같이 천주를 받들어 공경하고 있습니다”라며 큰소리로 주요 기도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전야고보는 끝까지 신앙을 지켜 순교의 영광을 얻었다.
‘하느님의 종’ 최용운(암브로시오, 1836~1868)
최용운은 1836년 충주에서 태어났다. 그는 세속 학문을 배우던 중 우연히 천주교 교리를 접한 후 신자들이 비밀리에 모여 살던 보은 멍에목 교우촌(현 충북 보은군 속리산면 구병리)으로 이주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여요한에게 교리를 배워 최양업 신부에게 세례를 받고 입교했다.
최용운은 입교 후 누구보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했다. 그의 굳은 신심은 모든 이의 시선을 끌었다. 그 결과 그는 1864년 멍에목 교우촌을 방문한 한 선교사로부터 그곳 회장으로 임명됐다.
최용운은 이때부터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교우촌 신자들에게 열심히 교리를 가르쳤다. 그러던 중 1866년 병인박해가 시작되자 멍에목에서 가까운 상주 장재동(현 경북 상주시 화남면 동관리 장자동)으로 피신해 신앙생활을 계속했다.
박해는 더욱 거세져 1868년 서울에서 파견된 포졸들에 의해 멍에목 교우촌이 발각됐다. 멍에목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있던 여요한과 교우들을 체포했다. 그런 다음 여요한을 앞세워 최용운 회장이 살고 있던 상주 장재동으로 몰려왔다.
체포된 최용운과 여요한 등은 보은 지역을 관할하던 청주 진영으로 압송됐다. 이때 최용운은 진영 옥에 갇혀 있으면서 관장 앞으로 끌려가 문초와 형벌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조금도 굴복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교리 스승인 여요한이 신앙을 되찾아 순교에 이를 수 있도록 열심히 권면하기까지 했다.
최용운은 1868년 4월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에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2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