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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후 인간의 처지를 결정하는 것 6
/ 악을 행한 뒤 슬퍼하는 마음과 내세에 대한 걱정
- 악을 행한 뒤 슬퍼하는 마음에 대해
인간의 내면은
결코 단층적인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그 속은 서로 다른 방향으로 당겨지는
이중적이고 모순된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
내 안의 악을 처리하지 못해 괴로워하는
마음의 밑바닥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면,
솔직히 그 악이 싫어서라기보다는
그 악이 좋아서 스스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발견된다.
다만 금지된 선을 넘었다는 사실 앞에서
'또 저지르고 말았네.'라는 자책감이 고개를 들 뿐이다.
그러나 이 자책감의 성격을 더 깊이 추적해 보면
그 안에는 두 가지 전혀 다른 동기가 얽혀 있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죄악이 주님의 선하심에 반한다는
영적 슬픔에서 비롯된 탄식이 존재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 악의 대가로 내세에 어두운 곳에 떨어질까
두려워하는 이기적인 공포가 훨씬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악을 향한 맹렬한 끌림과 지옥에 대한 본능적 두려움이
서로 교전하는 상태 속에 있는 인간을 향해,
주님은 어떠한 섭리를 펼치시는지 그 원리를 살펴본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참고로 이 구절에 대해 스베덴보리는 AE 22에서
‘애통하는 자들은 진리의 결핍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
또한 거짓과 악 때문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의미한다.
'위로를 받을 것이라'는 것은 그들이 진리와 선으로 교훈을 받고
천국을 얻게 됨을 의미한다.’ 라고 설명한다.
즉 여기서의 애통(mourn)은
단순히 가족을 잃은 슬픔이나 세상적인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 안의 악 때문에 슬퍼함, 교회 안의 거짓 때문에 슬퍼함,
선과 진리가 없는 상태 때문에 슬퍼함을 말한다.
그리고 ‘위로를 받는다.’는 것도
감정적인 위안이 아니라 진리를 받게 되고,
선으로 인도되며, 결국 천국의 생명으로 들어감을 뜻한다.
또 하나 중요한 곳은 AE 365 이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이사야 61장의
‘슬퍼하는 자를 위로하신다.’를 설명하면서,
그 슬픔은 선을 원하는데
아직 선 가운데 있지 못한 상태를 뜻한다고 풀이한다.
즉 악을 좋아해서 슬픈 것이 아니라
선을 원하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상태를 슬퍼하는 것이다.
그리고 HH 548 에서 스베덴보리는
‘양심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은 천국적 사람이며,
양심이 없는 사람은 악을 행해도 전혀 슬퍼하지 않는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악을 행할 때,
겉 사람은 그 쾌락과 유혹에 매료되어 자발적으로 복종한다.
이때의 자책은 악 자체를 미워해서가 아니라,
그로 인해 초래될 징벌이나 불안이 두려워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즉, 지옥의 형벌이 무서워 덜덜 떨면서도
손에는 여전히 악의 쾌락을 놓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이중적 갈등의 실체이다.
주님의 신성한 섭리가 개입하기 전의 인간은
이 모순된 두려움과 애정 사이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을 상실하고 있다.
하지만 비록 그 두려움이 지옥에 대한 이기적인 공포에서 비롯되었다 할지라도,
주님께서는 바로 그 두려움마저도 거룩한 방어막으로 사용하신다.
만약 지옥의 결과에 대한 두려움조차 없다면,
인간은 악의 매혹에 이끌려 망설임 없이 파멸의 길로 질주할 것이다.
주님은 이 두려움을 통해 겉 사람의 폭주를 제어하시고,
영혼이 완전히 어둠에 함몰되는 것을 막아내는 안전장치로 삼으신다.
이러한 교전 상태 속에서 영혼이 구원에 이르는 과정은
겉 사람의 두려움이 속사람의 사랑으로 전환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지옥의 형벌이 무서워 떨던 이기적 두려움은,
진정으로 주님을 거스른 자신의 악을 슬퍼하는 거룩한 회개로 깊어져야 한다.
우리가 매일의 투쟁 속에서 악의 유혹을 거부하고 주님의 생명을 선택할 때,
비록 그것이 지저분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을지라도 그 마음의 밭에서 악은
점차 뿌리가 뽑히며 내세의 정화 과정을 통해 완전히 떨어져 나가게 된다.
주님은 우리의 순전하지 못한 동기나 이기적인 두려움까지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것을 우리의 구원을 위한 거룩한 방어막으로 사용하신다.
우리가 비록 악에 끌리면서도
두려움 속에 주님을 찾는 그러한 연약한 자리에 머물지라도,
주님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으시고 마침내 우리 안의 모든 어둠을 걷어내어
온전한 빛으로 채워주시는 크신 은총을 베푸신다.
이와 같이 주님께서 연약한 영혼을 붙들어
어둠에서 건져내시는 구체적인 양상은,
스베덴보리의 가르침 속에서 다음과 같은 영적 원리로 명백히 드러난다.
<그러나 악한 것을 행하면서도 그것이 악임을 알고 그에 대해 슬퍼하는 자들은,
비록 유혹에 넘어졌을지라도 아직 싸움을 포기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악을 의도적으로 사랑하는 자들이 아니라,
여전히 악과 선 사이의 영적 갈등 가운데 있는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그들을 그 싸움 속에 머물게 하시며,
그 악들로부터 점차 분리해 가신다.>
먼저 한 가지를 분명히 하는 것이 좋다.
비록 악을 슬퍼하는 것 자체를 곧 영적 싸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슬픔은 사람이 아직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지이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자신의 악을 인정하지 않는 한
결코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사람이 악을 악으로 보지 않고 변명하거나 즐긴다면,
그 악은 그의 생명과 더욱 깊이 결합된다.
그러나 자신의 악을 깨닫고 그것을 미워하기 시작하는 순간,
비록 아직 완전히 이기지는 못하였더라도
그는 이미 중생의 길 위에 서게 된다.
이러한 상태는 악과 화해한 상태가 아니라,
아직 악을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의 삶의 교리 9~10 연산)
그는 또 참된 회개란 단순히 죄를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악을 살펴보고 그것이 죄임을 인정하며,
다시는 그것을 행하지 않기를 원하는 데 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마음은 아직 완전한 승리를 의미하지는 않지만,
악을 사랑하는 의지와는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므로 악을 슬퍼하는 마음은
그 자체가 영적 싸움은 아닐지라도, 사람이 여전히 주님 편에 서기를 원하며
싸움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살아 있는 증거가 된다.
(참된 기독교 530~535 연산)
또 시험 가운데서는 사람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주님께서 사람을 위하여 싸우신다고 거듭 말한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여러 번 넘어질지라도,
악을 악으로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한
그는 아직 그 영적 전투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람을 그 싸움 가운데 보존하시며,
그의 자유를 지키시고 악이 그의 생명이 되지 않도록 끊임없이 역사하신다.
(AC 8172, 9937 연산)
그리고 중생의 완성은 악이 단번에 사라지는 데 있지 않다.
스베덴보리는 악은 즉시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사람을 선 가운데 두심으로써 점차 멀어지고 분리된다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반복되는 실패 속에서도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살아 있다면,
그 사람은 정체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한 섭리 아래에서 조금씩 악으로부터 분리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악을 슬퍼하는 마음은 절망의 증거가 아니라,
아직 중생이 계속되고 있다는 희망의 표지가 된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반복되는 실패만 바라보시는 분이 아니라
그 실패 속에서도 악을 떠나 주님께 향하려는 마음을 끝까지 붙드시며,
그 마음을 통하여 평생에 걸쳐 우리를 악에서 선으로 이끌어 가신다.
이것이 사람의 자유를 존중하시면서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시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의 깊은 사랑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할 점이 있다.
그것은 악을 행한 뒤 슬퍼하는 마음 자체를
곧 영적 시험이나 영적 싸움이라고 규정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시험은
선과 악이 실제로 충돌하는 영적 상태이며,
그 싸움은 단순한 감정이나 후회보다 훨씬 깊은 의미를 가진다.
그러므로 악을 행한 뒤 슬퍼한다고 해서
그 슬픔 자체가 곧 싸움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슬픔의 의미가 영적으로 가벼운 것은 또 아니다.
오히려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는 마음은,
사람이 아직 악과 화해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표지이다.
악을 즐기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내적인 싸움이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악을 행한 뒤에도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며 슬퍼하는 사람은,
비록 넘어졌을지라도 아직 악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주님께 향하려는 뜻을 완전히 버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그 슬픔은 싸움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이 아직 영적 싸움에서
이탈하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을
즉시 그 갈등에서 벗어나게 하시기보다, 그 싸움 속에 머물게 하신다.
이것은 사람을 고통 가운데 방치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주님께서는 그 싸움이 계속되는 동안에도 사람의 자유를 보존하시고,
선을 향하려는 아주 섬세한 마음까지도 보호하시며,
그 과정을 통하여 사람과 악을 조금씩 분리해 가신다.
사람이 아직 악을 미워하며 주님께 향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면,
비록 여러 번 넘어질지라도
그는 이미 주님의 신성한 섭리 안에서 중생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다.
흔히 구원이란 악의 유혹이 완전히 사라지고
더 이상 넘어지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스베덴보리가 설명하는 중생은 그러한 단번의 변화가 아니다.
주님께서는 사람의 자유를 해치지 않으시면서,
오랜 시간에 걸쳐 악과 선을 분리하신다.
그 과정에서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거듭 경험하기도 하고,
같은 악 때문에 반복하여 탄식하기도 한다.
그러나 바로 그 반복되는 갈등 속에서 주님께서는
사람이 악을 자신의 생명으로 받아들이지 않도록 끊임없이 붙드시며,
선을 향한 의지를 조금씩 굳건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악을 행한 뒤 느끼는 슬픔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것이 사람을 직접 구원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슬픔은 주님께서 아직 사람 안에서 역사하실 수 있는 문이
닫히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악을 미워하는 마음이 살아 있는 한, 사람은 아직 싸움을 포기한 것이 아니며,
주님께서는 그 사람을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싸움의 한복판에서 사람을 붙드시고, 보이지 않는 섭리를 통하여
악과 사람을 조금씩 분리하시며,
마침내 선과 진리 안에서 참된 자유를 누리도록 이끌어 가신다.
시험과 영적 싸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 원리가 적용된다.
악과의 싸움이라고 하면 악을 완전히 이겨 내는 상태만을 떠올리지만
스베덴보리의 저서를 자세히 살펴보면, 주님께서 보시는 시험과 영적 싸움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고 오래 지속되는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사람은 유혹 가운데서 언제나 승리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때로는 악에 넘어지고, 같은 악을 반복하며,
자신의 연약함 앞에서 낙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그러한 사람은 이미 싸움에서 떠난 사람일까?
스베덴보리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준다.
사람이 악을 행한 뒤에도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 일로 인해 마음 아파하며,
다시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서 주님께 향하려 한다면,
그는 아직 싸움을 포기한 사람이 아니다.
비록 겉으로는 악에 넘어졌을지라도
그의 내면에서는 여전히 선과 악 사이의 갈등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바로 그 갈등과 자유로운 선택의 자리에서 사람을 이끌어 가신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악을 범한 뒤에도 그것을 슬퍼하고
다시 주님께 돌아가려는 마음은 결코 헛되지 않다.
주님께서는 그 마음을 붙드시고,
그 상태를 신성한 섭리 안에 두셔서 조금씩 사람과 악을 분리해 가신다.
오늘은 하나의 악에 넘어지고, 내일도 같은 악에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그것이 악임을 인정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한다면,
주님께서는 그 반복되는 실패조차도 중생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신다.
이것은 악을 허용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허용된 악까지도 선을 이루는 섭리 안으로 이끄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마음이 어느 편에 서 있는가 하는 것이다.
악을 사랑하여 그것과 하나가 되려 하는 사람과,
악을 미워하면서도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넘어져 괴로워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같은 상태가 아니다.
후자는 아직 싸움 가운데 있는 사람이며,
주님께서는 그 싸움을 통하여 그의 자유를 보존하시고,
악과 점차 분리하시며, 선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신다.
이러한 과정은 하루아침에 끝나지 않는다.
스베덴보리가 말하는 중생은 평생에 걸쳐 조금씩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더딘 변화만 바라보며 낙심하기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끊임없이 역사하시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를 신뢰해야 한다.
우리가 진심으로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주님께 향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한,
주님께서는 그 작은 마음까지도 붙드셔서
마침내 우리를 악에서 자유롭게 하시는 길로 이끌어 가신다.
설령 자주 넘어지며 그로 인해 쉽게 낙심할지라도
그가 중시해야할 것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넘어졌을 때 악과 화해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악을 미워하며 다시 주님께 향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는 한,
주님께서는 그 반복되는 실패까지도 중생을 위한 수단으로 돌리시기 때문이다.
악은 사람을 자기 것으로 삼으려 하지만,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싸움을 통하여 사람을 악으로부터 조금씩 떼어 내신다.
이러한 의미에서 주님의 보호는
사람을 싸움 밖으로 옮겨 놓으시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싸움 속에서도 악에 완전히 사로잡히지 않도록 붙들어 주시는 데 있다.
영적 갈등과 고통은 반드시 주님의 부재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주님께서 사람의 자유를 지키시면서
중생을 이루어 가시는 현장일 수 있다.
사람이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그것에서 돌이키기를 원하며,
비록 여러 번 실패하더라도 다시 주님께 향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있다면,
그는 이미 신성한 섭리의 인도 아래
악으로부터 조금씩 분리되어 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싸움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낙심하기보다,
그 싸움마저도 선을 이루는 데 사용하시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를 신뢰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사람을 단번에 완전한 상태로 만드시는 것이 아니라,
자유를 보존하시면서 평생에 걸쳐 악과 선을 분리하시고,
마침내 참된 자유와 평안으로 이끄신다.
언제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악을 미워하며
주님께 도움을 구하는 마음을 잃지 않는다면,
그 싸움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주님께서는 그 모든 과정을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생명 안으로 이끌어 가신다.
우리를 악의 한복판에 두시면서도 지키시는 그분의 기묘한 사랑을 깨달을 때,
인간은 비로소 자신의 나약함마저도
그분의 구원 계획 속에 녹아있는 은혜임을 깨닫게 된다.
- 악을 행하며 느끼는 자책과 내세에 대한 걱정은
결코 패배의 신호가 아니다.
앞에서 인간의 내면은 단층적이지 않다고 했다.
현재 느끼는 '악에 대한 끌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자연적 자아(Natural Self)의 반응이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의 육체와 연결된 감각적 자아는
악이 주는 쾌락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도록 유전되어 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끌림을 느끼는 '나' 외에
그것을 보며 '자책하고 걱정하는 또 다른 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만약 본질이 완전히 악에 장악되었다면
자책이나 사후에 대한 걱정 자체가 일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이중적 갈등은 당신의 속사람(Internal Man)이 여전히
주님의 빛과 연결되어 악의 영향력에 저항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인간의 내면이 단층적인 구조가 아니라
이중적인 갈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은 영적 성숙을 향해 나아가는
모든 이들이 겪는 보편적인 여정이다.
악을 행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괴로워하는 마음을 들여다볼 때,
그 악이 주는 쾌락에 잠시 몸을 맡기고 있다는 자각은
인간 본연의 자연적 자아가 지닌 유전적인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베덴보리는 인간이 지닌 육체적 감각과 연결된 자연적 자아는
악이 주는 쾌락을 본능적으로 탐닉하도록 기울어져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악 그 자체에 머무는 마음이 아니라,
그 악을 바라보며 아파하고 내세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는
또 다른 자아의 존재이다.
만약 인간의 본질이 완전히 악에 장악되어 있다면,
악을 행하는 순간에도 어떠한 가책이나 슬픔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의 악을 보고 괴로워하며
주님께 반하는 행동임을 자각하고 두려워하는 그 마음은,
실상 그 영혼의 속사람이
주님의 빛과 여전히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명징한 증거이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악을 행한 뒤에도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슬퍼한다면(미워한다면),
그는 아직 악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시험 가운데 있는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그의 양심 안에서는 여전히 선과 악의 대립이 계속되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영적 갈등 속에서 사람을 붙드시고
악으로부터 점차 분리해 가신다.
이는 곧 영혼 안에서 천계와 지옥이 치열하게 교전하고 있다는 신호이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싸움의 현장에서
인간을 악으로부터 분리하여 건져 올리시는 중이시다.
AC 4249
‘사람이 영적 시험을 겪을 때처럼
선이 첫 자리를 차지하여 진리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기 시작하면,
내면으로부터 흘러드는 선과 함께 사람의 속사람 안에 저장되어 있던
수많은 진리들도 함께 작용한다.
그러나 선이 주도권을 잡기 전에는
그 진리들이 사람에게 분명하게 드러나거나 인식되지 않는다.
선이 주도권을 잡으면 자연적 인간은 선으로부터 빛을 받기 시작하며,
그 결과 자연적 인간 안에서
무엇이 선과 일치하고 무엇이 일치하지 않는지가 드러난다.
바로 여기에서 영적 시험의 전조가 되는 두려움과 답답함이 생겨난다.
왜냐하면 영적 시험은 속사람의 속성인 양심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러한 시험에 들어갈 때에는
자신의 두려움과 답답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와 함께 있는 천사들은 그것을 아주 잘 안다.
사실 시험은 천사들이 사람을 선과 진리 안에 붙들어 두는 한편,
악한 영들은 그를 악과 거짓 안에 붙들어 두려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항목에서 특히 이 주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장은
마지막 두 부분이다. ‘영적 시험은 내적 인간의 속성인 양심에 작용한다.’
그리고 ‘시험은 천사들이 사람을 선과 진리 안에 붙들어 두는 한편,
악한 영들은 그를 악과 거짓 안에 붙들어 두려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이 두 문장은 ‘악을 행한 뒤에도 그것을 슬퍼(미워)하는 사람은
아직 영적 싸움에서 이탈한 것이 아니다.’라는 논리를
매우 강하게 뒷받침한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에 따르면, 양심이 살아 있어
두려움과 괴로움을 느낀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천사들이 그 사람을 선과 진리 안에 붙들고 있는 상태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악과 선 사이의 영적 갈등이 아직 계속되고 있다는 직접적인 증거가 된다.
사실 이 두 문장은 굉장히 중요하다.
그 이유는 사람은 넘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천사들은 그를 선 안에 붙들고 있고,
악한 영들은 악으로 끌어당기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즉 한 사람이 악에 넘어졌다고 해서
곧바로 악을 의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부분을 좀 더 설명해본다.
AC 4249에서 스베덴보리는
영적 시험이란 양심(conscience)에 작용하는 상태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시험은 천사들은 사람을 선과 진리 안에 붙들고 있고,
악한 영들은 사람을 악과 거짓 안에 붙들려 하기 때문에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붙들고 있다(maintain)'는 표현이다.
천사와 악한 영이 동시에 한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 안에는 아직 두 방향의 힘이 함께 작용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는 사람이 실제로 어떤 악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행위 하나만으로 그의 의지 전체가 악과 결합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의 양심은 여전히 살아 있어서 악을 악으로 느끼고,
선을 향한 끌림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행위는 악으로 기울었을지라도
의지의 중심까지 악으로 넘어간 것은 아닐 수 있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언제나 한 번의 행위가 아니라
사랑(love)과 의지(will)의 지배적인 방향으로 판단한다.
어떤 사람이 순간적으로 넘어졌더라도
그가 그 악을 미워하고 괴로워하며 다시 주님께 향하려 한다면,
그의 지배적인 사랑은 아직 악이 아니다.
반대로 악을 즐기고 정당화하며 더 이상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면,
그때는 악이 그의 의지와 결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점은 AC 8393의 가르침과도 연결된다.
스베덴보리는 악은 단번에 제거되지도 않고,
사람과 단번에 완전히 결합되는 것도 아니라고 설명한다.
사람 안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선과 악이 분리되는 과정이 계속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반복해서 넘어지더라도,
그가 아직 악을 미워하고 선을 원한다면
주님께서는 그를 악에서 점차 분리해 가신다.
또 새 예루살렘의 삶의 교리 10 에서는
사람이 죄를 죄로 보지 않으면 그것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어 보면, 죄를 죄로 본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아직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것을 자신의 생명으로 승인한 상태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주제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악을 행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곧 악을 의도적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가 여전히 그 악을 악으로 인정하고 슬퍼하며
주님께 향하려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면,
그의 양심 안에서는 아직 천사들이 선과 진리 안에 붙들고 있고,
악한 영들은 악과 거짓으로 끌어당기는 영적 갈등이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비록 넘어졌을지라도 아직 악과 하나가 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신성한 섭리 아래에서 중생의 과정을 계속 걷고 있는 사람이다.>
이 설명은 AC 4249의 논리와 매우 잘 부합한다.
다만 한 가지 균형을 유지해야 할 점도 있다.
반복적으로 악을 선택하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거나 즐기기 시작한다면,
그 상태는 더 이상 단순히 유혹에 넘어지는 상태라고 볼 수 없다.
스베덴보리는 사람이 지속적으로 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
그 악이 의지와 결합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핵심은 넘어졌는가가 아니라,
넘어진 뒤 그 악을 어떻게 대하는가에 있다.
그것이 중생의 방향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하지만 여기 ‘넘어진 뒤’라는 표현이
시간 순서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에 좀 아쉬울 수 있다.
왜냐하면 스베덴보리가 강조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내적 의지와 태도이지, 사건의 전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표현이 더 적합하다.
‘따라서 핵심은 악에 넘어졌는가가 아니라,
그 악에 대하여 마음이 어떤 방향을 취하는가에 있다.
그것이 중생의 방향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를 조금 더 저서의 어조에 가깝게 표현하자면,
‘따라서 핵심은 악에 넘어졌는가가 아니라,
그 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그것을 악으로 인정하고
떠나기를 원하는가에 있다.
이것이 중생의 방향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이 표현이 가장 스베덴보리답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스베덴보리는 사람을 행위 자체보다 '자기 것으로 만드는가(appropriation)'를
기준으로 설명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따라서 핵심은 넘어짐 자체가 아니라, 그 악을 받아들이는가 아니면
그것을 미워하며 주님께 돌이키려 하는가에 있다.
이것이 중생의 방향을 가르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러므로 악을 행하며 느끼는 슬픔과 자책과
그리고 내세에 대한 걱정은 결코 패배의 신호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악을 자신의 본질과 결합시키지 않으려는 영혼의 거룩한 저항이다.
주님께서는 인간이 스스로의 힘으로 악을 완전히 뿌리 뽑지 못할지라도,
그것을 미워하고 배척하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한
그 영혼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사후 영계에서 악이 분리되는 것은 그 악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끝까지 악으로 인정하며
주님의 자비만을 의지했던 영혼에게 주어지는 섭리의 결과이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보고 괴로워하는 것은
주님의 빛이 그 영혼에 비추고 있다는 뜻이다.
그 빛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슬퍼하는 마음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만들어 두신 천국의 작은 틈새이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틈새를 통해 우리를 악의 구렁텅이에서 건져 올리신다.
스스로를 악하다고 자책하는 그 순간에도
주님은 우리의 아픈 마음을 붙들고 계시며,
우리가 그 악을 끝내 자신의 것으로 승인하지 않도록
끊임없이 은혜를 부어주고 계신다.
이 고통스러운 싸움은 우리가 지는 전쟁이 아니라,
주님의 구원을 증명해 내는 거룩한 섭리의 과정이다.
주님의 섭리는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도
그분의 사랑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음을 일깨워주신다.
우리가 악을 미워하고 그로부터 돌이키고자 하는 그 작은 소망조차
사실은 주님께서 우리 안에 불어넣어 주신 그분의 생명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지성을 넘어선 그분의 위대한 자비를
온몸으로 감각하게 된다.
그분은 오늘도 우리의 갈등과 탄식 속에서 구원의 역사를 써 내려가시며,
우리를 악의 결박에서 풀어내어 당신의 영원한 평안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형벌에 대한 걱정
다음은 이 주제와 관련하여
스베덴보리 저서 여러 곳에서 설명한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DP 139, AC 6072, HH 543, Life 9–10, TCR 530–535 연산)
‘형벌에 대한 두려움과 세상적 수치심에 대한 염려는,
비록 그것이 영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인간이 악을 행하는 것을 억제하는 수단이 된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파괴하지 않으면서도,
그 두려움을 사용하여 인간이 악의 충동을 외적으로나마 억제하게 하신다.
이는 인간이 내면의 악을 자신의 의지로 완전히 받아들여 확정 짓는 것을 막아,
나중에라도 그가 선으로 돌이킬 수 있는 여지를 보존하시려는 섭리적 조치이다.’
‘인간은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인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보시며,
그가 악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방어막을 설치하신다.
사후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옥에 대한 공포는,
주님께서 인간의 의지를 악의 불꽃으로부터 격리하기 위해
둘러친 보이지 않는 울타리와 같다.
만약 이 두려움조차 없다면, 인간은 제지 없이 악의 심연으로 달려가
그 악을 자신의 영원한 생명으로 삼고 말 것이다.’
‘지옥의 형벌을 두려워하여 악을 멈추는 것은
비록 가장 낮은 단계의 양심이지만,
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심의 형태를 띠고 있다.
그것은 인간의 악한 본성이 전적으로 발현되지 못하도록
묶어두는 사슬의 역할을 한다.
비록 그 동기가 순수한 선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롯되지 않았더라도,
주님께서는 그 두려움을 통로 삼아 인간이 악과 하나가 되는 것을 막으시고,
그 영혼 안에 구원의 가능성을 붙들어 두신다.’
사후 세계에서 형벌을 두려워하거나
어두운 곳에 떨어질까 봐 걱정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인간의 가장 깊은 본질이
악과 완전히 하나가 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스베덴보리는 이러한 두려움이 악으로 치닫으려는
의지의 폭주를 막아주는 일종의 '방어막' 역할을 한다고 설명한다.
스베덴보리 저서에서 가장 직접적인 근거가 되는 문구는 다음 세 곳이다.
첫째는 AC 6072이다.
‘모든 하나님 예배는 거룩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선한 자에게는 상을 주시고
악한 자에게는 벌을 주신다는 생각이 들어 있다.
어린아이들과 단순한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것을 믿어야 한다.
그들이 두려움 때문에 감히 악을 행하지 않기 시작하면,
점차 사랑과 함께 선이 그들 안에 스며들고, 그때 비로소 모든 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고 악은 자기 자신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문장은 '두려움이 처음에는 악을 억제하는 수단이 된다'는 점을
거의 그대로 말하고 있다.
둘째는 DP 139이다.
‘지옥의 형벌에 대한 두려움은
외적 사고에 영향을 미치지만, 그것은 잠시 동안만 그러하다.’
여기서 스베덴보리는 지옥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을 완전히 개혁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외적 행동을 억제하는 기능은 인정한다.
다만 그것만으로는 중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분명히 덧붙이고 있다.
셋째는 HH 543 이다.
‘지옥에서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악을 억제하는 유일한 수단이다.’
또한 악한 영들은 반복되는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악행을 어느 정도 억제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이것은 사후 세계에서도
두려움이 외적 억제력으로 작용한다는 중요한 증거이다.
이 세 문구를 종합하면, 사후 세계에서 형벌을 두려워하거나
어두운 상태에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그 자체로 사람을 중생시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러한 두려움은 아직 사람이
악을 거리낌 없이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보여 주는
중요한 표지가 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러한 외적 두려움까지도 섭리 가운데 사용하시어
사람이 악을 제어하고,
훗날 선과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길을 보존하신다.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에 악을 멀리하더라도,
그 과정에서 점차 선에 대한 사랑이
스며들어 참된 회개와 재생으로 인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는 악한 습관을 반복하고 있을지라도
내면의 두려움이 그 악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게 방해하고 있다면
그 악은 영혼의 핵심인 '속사람'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피부와 같은 '겉사람'의 영역에만 머물게 된다.
단, 이 방어막이 구원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인간이 그 두려움을 신호 삼아 자발적으로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악을 정당화하지 않으려는 자유의지의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사후 세계에 대한 두려움과 형벌에 대한 걱정은
흔히 신앙의 미숙함이나 믿음의 부족으로 치부되기 쉽지만,
주님의 섭리 안에서 볼 때 이는 영혼을 악의 심연으로부터 지켜내기 위한
거룩한 방어막이자 보이지 않는 사슬이다.
인간이 악을 행하면서도 그 쾌락에 온전히 젖어 들지 못하고
마음 한구석에서 자책과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그의 속사람이 악과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우리의 마음속에서는 매 순간 악이 주는 즐거움과 그것을 뒤따르는
영적 갈등 사이에 치열한 힘의 균형이 작용하고 있다.
악이 주는 쾌락이 아무리 매혹적이라 할지라도,
그 끝에서 맛보는 가책의 무게와 내세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면,
우리의 영혼은 결코 그 악과 영원한 동반자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 괴로움이야말로 악을 자신의 본질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영혼의 처절한 저항이며,
주님께서는 바로 그 저항을 통로 삼아 우리가 악의 결박에
완전히 매몰되지 않도록 붙들고 계시는 것이다.
따라서 악을 행하고 난 뒤 밀려오는 후회와 고통을
단순히 자신의 나약함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님께서 우리 영혼의 밭에 설치해 두신 안전한 울타리이며,
우리가 악의 심연으로 추락하지 않도록 잡아끄는 구원의 밧줄이다.
악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서 안식을 얻지 못하는
그 고통스러운 상태가 지속되는 한,
인간은 악과 완전히 결합한 상태가 아니다.
오히려 그 괴로움은 사후 영계에서 주님의 빛을 마주할 때,
우리를 가로막던 악들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가벼운 영혼으로 거듭나게 할 준비 과정이 된다.
인간이 자신의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그 두려움을 신호 삼아 주님께 자비를 구할 때,
그 두려움은 비로소 구원의 가능성을 보존하는 은혜의 도구가 된다.
우리는 때로 자신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러한 갈등과 두려움을 보며 스스로를 정죄하지만,
주님께서는 그 떨림 속에서 우리를 지키고 계신다.
악과 타협하지 않으려는 그 작은 흔들림이야말로
우리 영혼이 여전히 주님의 생명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이며,
그분의 섭리는 우리가 그 갈등을 통해 끝내 악을 미워하고
오직 그분의 사랑 안에서 참된 안식을 얻기를 기다리고 계신다.
이 주제는 주님의 신성한 섭리가 영혼 안에서 어떻게 역사하는지를
매우 섬세하게 보여 주므로,
우리는 그 의미를 진중하게 헤아려 볼 필요가 있다.
주님의 섭리는 우리가 완벽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기다리시는 대신,
우리가 악의 늪에서 허우적거릴 때조차 그 손을 놓지 않고 계신다.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은 결코 우리를 위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악의 늪에서 건져 올리시려는 그분의 세심한 배려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죄성마저도
그분의 구원 계획 속에서 해석하는 신비로운 감동을 마주하게 된다.
자신의 솔직한 욕망(악이 좋아서 끌어안고 있음)을 인정하는
그 정직함이야말로 주님께서 가장 귀하게 보시는 구원의 실마리이다.
인간이 이기적인 욕망에 이끌려 넘어지면서도
그 끝에 닿을 어둠을 두려워하며 떠는 그 나약함조차
주님은 영혼을 지키는 견고한 방어막으로 삼으신다.
비록 그것이 고결하고 순수한 사랑에서 비롯된 회개가 아닐지라도
지옥을 향해 폭주하려는 자아의 발목을 붙잡는
그 작은 두려움을 구원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주님의 섭리가 참으로 경이롭다.
완벽한 도덕성이나 흠 없는 삶이 아니라
악을 온전히 즐기지 못하고 한숨짓는 그 모순된 갈등 속에
이미 영혼을 파멸로부터 보호하시려는 주님의 자비가 깃들어 있다.
주님은 인간을 억지로 구원하지 않으시며
지옥을 선택할 자유마저 존중하시지만,
그 자유로운 의지로 단 한 조각의 빛이라도 붙들려 애쓰는 자에게는
온 우주의 인력을 동원하여 그를 어둠에서 건져내신다.
가장 낮은 수준의 두려움마저 영혼을 지키는 은혜의 사슬로 승화시키시어
마침내 무거운 허물을 벗고 빛의 세계로 이끄시는
주님의 세밀한 사랑에 깊은 경외를 느끼게 된다.
끝내 거부할 수 있는 자유 속에서도
빛의 따스함을 신뢰하기로 선택한 인간의 진심이야말로,
모든 악의 굴레를 벗겨내는 유일하고도 위대한 열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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