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카타의 밤 >
어둠이 찾아온 도시의 밤은 가로등과 네온사인 등 각종 불빛으로 곱게 단장하며,
낮보다 더욱 활기차고 현란해 졌다.
호텔을 나온 이준호는 최지수가 알려준 장소로 향했다.
호텔에서 약속 장소까지는 걸어서 갈 만 했다. 하카다 일대는 그가 여행시 수차례
들린 곳이고, 더욱이 독립된 도시였던 하카다가 19세기 후반에 후쿠오카시로 편입되기
전까지는 동아시아 무역의 중심지 역할을 하여, 한반도의 정몽주 및 신숙주등 역사적
인물들도 잠시 머물렀던 지역이라 괜스레 낯설게 느껴지지 않아 부담없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규슈에서 가장 큰 도시인 후쿠오카 시의 현관이자 교통의 중심지로, 백화점들까지
들어서 있는 대형복합건물 JR 하카다 역은 직장인, 여행자, 쇼핑객들이 뒤엉키며
안팎으로 무척 혼잡스러웠다. 게다가 역전에서는 극우파의 검은 차량들까지 가세
하여 확성기로 그들의 주장을 쏟아내고 있어 시끄럽기까지 했다. ‘아니 저 인간들
은 퇴근도 안하고... ’ 이준호는 속으로 짜증을 내며, 복잡해도 각지에 흩어져 사는
회원들의 교통 편의를 위해 이 지역에서 모임을 갖게 됐으리라 생각했다.
모임 장소는 하카다 역의 남쪽 출입구인 치쿠시구치에서 길 하나 건넌 곳의 건물 1층에
위치했다. 그는 일본의 대중 술집 체인점인 와타미란 상호의 이자카야로 들어섰다.
실내는 전형적인 일본풍에 규모가 컸으며, 이미 취기가 오른 손님들로 떠들썩했다. 샤
미센으로 연주하는 비틀즈의 헤이 쥬드가 작게 흐르는 가운데 종업원의 안내로 테이블
좌석들을 지나니, 한쪽편의 기다란 다다미방에서 회원들이 막 모임을 시작하려던 차였
다. 최지수가 보자마자 일어나 한국에서 취재차 여행 온 작가라며 이준호를 소개했고,
회장을 포함하여 모두가 따뜻한 미소로 맞아 주었다.
잠시 후, 먼저 주문한 생맥주와 기본 안주가 나왔고 큰 키에 30대 중반으로 보이는 회장의
인사말이 있었다. 유적지 탐사 계획 및 다가오는 송년회 일정 등을 통보하며, 그 간에 회원
들의 신상 변동사항이 추가된 주소록도 배포했다. 또 지난번 모임의 몇 가지 결정사항에
대해서는 시간관계상 추후에 개별 통지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이어서 회장의 건배 제창
에 일제히 자기 앞의 잔을 들어 마셨고,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각자의 기호에 맞춰 다양한
술과 새로운 안주를 시키는 등 분위기는 점차 화기애애해졌다.
이준호는 하이볼을 한 잔 신청한 후에, 옆자리의 최지수가 갖고 있던 주소록을 보자 하여
대충 살펴봤다. 회원은 총 35명으로, 오늘 참석한 수는 23명이었다. 연령층은 20대부터
시작하여 30대가 주류를 이뤘으며, 직업은 그야말로 다양했다. 학생, 교사, 시인, 박물관
학예원, 우체국 직원, 여행사 직원, 경찰, 가정주부 및 기타 자영업 등으로 역사연구라는
공통 관심사가 없으면 회원구성의 이해가 어려울 정도의 재미 난 모임이었다. 직업란에
무직이라 쓴 백수 회원도 서너 명 있었다. 거주지는 도쿄, 오사카 지역을 포함하여 전국에
퍼져 있었으나, 북 규슈의 후쿠오카현, 오이타현, 사가현, 구마모토현 회원들이 거의 과반
수를 차지했다.
그리고 모임의 정식 명칭은 우라보시카이(裏星會)라 적혀 있었다.
우라보시... 이성, 뒷쪽의 별이란 뜻인가? 생소해서 최지수에게 작은 목소리로 물어 보았다.
“뭐라더라... 바위에 붙어사는 산야초 이름에서 따왔다고 하던데, 잘 모르겠어요.”
그녀의 대답도 시원치 않았다.
그 때, 앞자리에 조용히 앉아있던 오우치 히로코(大內 弘子)란 회원이 최지수와 함께 셋이
서 건배하자며 제의해 왔다. 귀여운 얼굴에 맑은 목소리였다. 몇 마디 나누며 슬며시 주소
록을 보니 32세, 후쿠오카 현의 고쿠라에 사는 가정주부였다. 그가 주소록을 찾아 본데는
까닭이 있었다. 처음 자리에 앉을 때부터 어디선가 본 듯 했으나 생각이 나지 않았기 때문
이었다. 기시감이 진하게 들었다.
고쿠라는 여행 한 적이 없었고, 타 지역에서 마주치기에는 주부라는 신분상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딜까. 혹시나 해서 한국에 여행을 간적이 있었냐고 물어보니, 가보고
싶은 곳이나 아직 못가 봤다고 했다.
‘그럼, 전생에 인연이 있었던 관계였을까... 아니면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속으로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준호는 모임의 공동 화제에 귀를 기울였다. 요즈음 일본 사회의 한류와 그에 반하여
걱정 될 정도로 심화되고 있는 혐한 시위에 관하여 얘기를 했고, 나중에는 두 나라의 우호
관계로 까지 발전하더니 급기야는 서기 663년의 백촌강 전투로 이어지고 있었다.
백촌강 전투란 한국에서는 백강 전투라 불리며 당시 왜의 야마토(大和)조정에서 400여척의
전함에 27,000명의 군사를 실어 규슈의 하카다항에서 백제로 구원군을 보내 전투가 벌어졌던
역사적 사건으로, 구원군이 합세한 백제 부흥군은 지금의 백마강 하류에서 나당연합군에게
대패했었다. 하지만 그 때 신속한 대규모 군사지원이 가능했던 연유는 아직까지도 수수께끼로
남아있는 전투였다. 이준호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라, 서먹함이 사라지며 열띤 토론 속으로
쉽게 섞여 들어갔다. 백제 역사의 한 부분에 관한 해석을 일본인들로부터 직접 듣고, 자신의
소견도 피력하다 보니 모임에 참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예상치 못했던 뜻밖의
소득이었다.
시간이 흐르고 자리가 무르익어 갈 무렵, 회장이 히로코의 옆자리로 옮겨 앉으며 이준호에게
지포라이터에 담뱃불을 붙이고 싶어 왔다고 했다. 그가 지포라이터를 사용하는 걸 눈 여겨 봤던
모양이었는데, 담배를 내밀며 허스키한 목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대학생 시절의 애인이 지포라이터 애호가였었죠. 지금도 그 라이터의 여닫는 금속성 소리와
기름 냄새가 가끔씩 그리워져요.”
초면에 당돌하다는 느낌은 잠깐이었고, 거리낌 없는 자연스러움이 좋았다. 가까이서 마주 본 짙은
눈썹 아래의 눈빛이, 빨려 들어 갈 듯 깊은 여자였다. 거기에 다듬지 않은 듯한 긴 머리 스타일과
인디언블루 계통 색의 옷으로 감싼 전체 분위기는 신비스럽게까지 보였다.
그녀는 담배 연기와 함께, 조금 전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만나 뵈어서 반갑고, 백촌강 전투에 대해서 몰랐던 부분의 말씀도 잘들었습니다.”
묘한 여자였다. 이준호도 답례 인사를 했다.
“뭘요, 많이 알지 못합니다. 하여간에 대단들 하시네요. 통상... 남자들과는 달리 역사에 관심을
가진 여자들만의 모임이란 게 쉬운 일이 아닐텐데, 더구나 백제를 포함한 고대사의 접근은 미로와
같아서 더 어렵고요. 역사에서 무엇을 찾고 어떤 매력을 느끼시나요?”
그녀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는 눈빛으로 생각에 잠기더니, 담담하게 말했다.
“역사는 무한하고, 인생은 풀잎에 맺힌 아침이슬이나 물에 뜬 거품 같은 것이죠. 더 긴 설명이
필요 할까요?”
“......”
밤 10시 40분. 긴 밤을 즐기려는 도시의 불빛은 여유로웠지만, 막차 시간이 다가옴에 따라 하카다 역
주변 사람들의 발걸음은 빨라지고 있었다.
술집의 한 귀퉁이를 차지한 우라보시카이의 회원들도 서둘러야 했다.
첫댓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년 말 모임도 많으실텐데.
술은 사양치 못하드라도 안주는 찿아드시고
속도 또한 쉬엄 쉬엄.. 虎視牛行
그래야지요~ 모임, 볼 사람은 많고, 만나서 술한잔 안하면 섭섭한 12월이니..
사시사철 평상시에도 송년회처럼 마구~ 마셨던 '선수'입장에서는, 달력에서 12월이 없어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