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1일 [대림 제1주일]
루카 21,25-28.34-36
예수님 인격적으로 만나는 법: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곳에 빛이 떠오른다
오늘 복음은 실상 세상의 마지막 때를 예언하고 계십니다.
세상 마지막 때는 고통의 때 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사람의 아들이 권능을 떨치며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법입니다. 마지막은 항상 새로운 시작입니다.
목동들은 그 마지막 때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시 목동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직업이었습니다. 고통받는 이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보이시는
주님을 생각해볼 수 있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엔 이런 이사야서의 인용이 있습니다.
“어둠 속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고장에 앉아 있는 이들에게 빛이 떠올랐다.”(마태 4,16)
별은 밝은 도시가 아니라 깜깜한 시골에서 더 잘 보입니다.
우리가 죽음 직전까지 가지 않으면 생명이신 분이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신학교에 들어가서 매우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행복을 찾아 들어갔지만,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행복하게 해주지 않으면 죽여달라는 마음으로
일주일 단식을 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때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한번의 만남의 힘으로 지금까지 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시간』이란 책에는 봉하령 요셉 신부의 기도 체험인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결정적인 사건, 죽을 고비」라는 꼭지가 있습니다.
봉하령 신부는 부모의 낙태 시도를 이기고 3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돌도 되기 전, 매서운 한파가 몰아치던 1월 동네 할머니가 아기를 업고 우물물을 길으려다
20미터 우물 속으로 떨어져 돌아가셨습니다. 아기도 죽었지만, 그를 구한 분이 침을 놓아 살렸습니다.
열 살 때는 친구들과 놀다가 경운기에 끼여 왼 팔은 잘렸고 오른 팔은 처참할 정도로 뭉게져버렸습니다.
오른 팔은 하루 꼬박 걸린 수술로 회복할 수 있었으나 왼 팔은 잃었습니다.
그 무렵 성당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는 팔을 감추고 본심도 감추었습니다.
그러다 ‘선택’이란 청년 피정에 가서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게 되었고 그때 자신이 자신을 부끄러워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청년이 되어서도 장애로 인해 취업을 할 수 없었던 그는 수도회에 입회하기로 합니다.
장애인을 받아주는 수도회가 없었지만, 갓 만들어지기 시작한 중증장애인을 돌보는
‘작은예수 수도회’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1998년 서른셋의 나이에 한국 신학교에도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2008년에 부제품을 받았으나 15년 동안 어떤 이유에서인지 사제품을 받지 못했습니다.
2023년 사제품을 받을 때까지 부제로 15년 정도 살아야 했습니다.
이때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뛰쳐나가고 싶고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풍선처럼 목구멍까지 차올랐고 숨을 쉴 수 없을 때가
많았습니다.
봉 신부는 이때 ‘기도’를 선택했습니다.
늘 입에 이 노래를 달고 살았습니다.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하느님, 내 하느님 어찌 저를 버리셨나이까.
암사슴이 시냇물을 그리워하듯 내 영혼 생명의 하느님을 그리워하나이다.”
결국 숨이 막혀 죽기 직전에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에 오신 것도 고통을 당하시고 죽으신 것도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것도 다 “너를 위해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봉 신부는 “고통이 없었다면, 아픔이 없었다면, 좌절이 없었다면 나는 그토록 애절하게 주님을
찾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면 그분을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죽을만큼 원해야 생명이신 분을 만날 수 있는 것은 너무나 확실합니다.
‘엄마 찾아 3만리’를 보십시오.
엄마는 아들 마르코를 살리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먼 아르헨티나까지 돈을 벌러 갔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만큼 멀리 있습니다.
그분을 만나려면 나도 생명을 바쳐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너무 좋은 것들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 40일 단식하시며 광야에서 기도하신 만큼 절실히 주님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제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한 5년은 가슴이 저미는 고통을 느꼈습니다.
성체조배를 하면 잠깐 사라졌습니다.
지금도 그렇게 바라고 싶습니다.
그래서 다시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생명의 빛을 보고 싶다면 최대한 어둠이 되어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1일 [대림 제1주일]
루카 21,25-28.34-36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저희 공동체 전례 담당자이신 어르신 신부님께서 수심이 가득한 얼굴로 “대림 시기 시작하는데, 대림환 어쩔거요?” 하고 물으셨습니다.
말씀이 떨어지자마자 저는 부랴부랴 창고에서 아이 키 만한 큰 초들을 쇠톱으로 자르고 칼로 다듬었습니다.
시골스럽게 대성당과 소성당에 대림환을 설치해놓으니, 그제야 어르신 신부님 얼굴에 화색이 환하게 돌았습니다.
대림환 장식은 초기 양성기 형제들이나 젊은 형제들, 아니면 봉사 오시는 자매님들의 몫이라 생각했는데, 깊은 시골이라 어쩔 수 없습니다. 웬만한 것은 직접 다 해야 합니다.
열심히 초를 자르고 깎던 제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이번 대림 시기 초를 깎는 마음으로, 나를 깎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
하늘을 찌르는 교만을 깎고, 나태함과 게으름의 나를 깎고, 하느님께 대한 불신과 불충실한 나를 깎으며 그렇게 한 달을 살아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오늘 전례력으로 새해 첫날, 돌아보니, 지난 한 해도 어김없이 결핍과 상처투성이의 삶, 실패와 부끄러움의 삶을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제 깊은 상처 그 틈 사이로 크신 주님의 자비가 흘러들어왔음을 실감합니다.
대림 시기를 시작하는 오늘 예수님께서는 각별한 당부 말씀을 우리에게 건네고 계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 날이 너희를 덫처럼 덮치지 않게 하여라.”(루카 복음 21장 34절)
돌아보니 참으로 많은 시간을 헛되고 의미 없이 보냈습니다.
내 인생 여정에서 앞으로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금쪽같은 시간을 흥청망청 놀고, 먹고, 마시는데 소모했습니다.
모든 것 하느님 자비하신 손길에 맡겨드리지 못하고 부끄럽게도 오랜 시간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놀고, 먹고, 마시는 일에 대한 지나친 관심은 우리의 시야를 좁게 만듭니다.
한 치 앞만 내다보게 되니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게 만듭니다.
남아있는 시간, 남아있는 인생을 주님 권고에 따라 살아가야겠습니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
(루카 복음 21장 36절)
깨어있음은 언제나 기도와 연결돼 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이란 깨어있는 상태로 하느님을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일정 시간은 잠을 자야 하는 인간이기에 항상 깨어있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 하루의 많은 시간을 생업에 몰두해야 하는 게 우리네 삶입니다.
그러나 잠드는 순간, 잠자는 순간조차도 하느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감사하며 살아간다면, 그것이 곧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일할 때 역시 주님께서 내 옆에서 내를 지켜보시고 나를 도와주신다고 생각하고 일을 하면 그 역시 깨어있는 것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결국 깨어 기도함을 통해 우리는 주님 재림의 날에도 굳건하고 기쁘게 서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1주일 강론>
(2024. 12. 1.)(루카 21,25-28.34-36)
<대림 시기는 ‘믿음’을 점검하고 바로 세우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해와 달과 별들에는 표징들이 나타나고,
땅에서는 바다와 거센 파도 소리에 자지러진 민족들이 공포에 휩싸일 것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닥쳐오는 것들에 대한 두려운 예감으로 까무러칠 것이다.
하늘의 세력들이 흔들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때에 ‘사람의 아들이’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볼 것이다.
이러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들어라.
너희의 속량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여,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으로 너희 마음이 물러지는 일이 없게 하여라.
그리고 그날이 너희를 덫처럼 갑자기 덮치지
않게 하여라.
그날은 온 땅 위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들이닥칠 것이다.
너희는 앞으로 일어날 이 모든 일에서 벗어나 사람의 아들 앞에 설 수 있는 힘을 지니도록
늘 깨어 기도하여라(루카 21,25-28.34-36).”
1) 여기서 ‘방탕과 만취’ 라는 말은, ‘세속 생활의
즐거움과 재미’ 같은 것에 취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잠자는 이들은 밤에 자고 술에 취하는 이들은 밤에 취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낮에 속한 사람이니, 맑은 정신으로 믿음과 사랑의 갑옷을 입고 구원의 희망을 투구로 씁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노의 심판을 받도록
정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차지하도록 정하셨습니다(1테살 5,5-9).”
무슨 죄를 짓는 것은 아니더라도, 사는 것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생활에 부족하거나 불편한 일도 없고, 하느님께 특별히 뭔가를 청할 일도 없을 때, 그런 때도 ‘취해 있는 때’입니다.
<사실 신앙생활에서는 그런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날마다 생활이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할 때에는
그 상황에 대해서 ‘감사기도’를 드리게 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게 그렇게 안 되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하느님을 잊어버리거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우리는 하는 일마다 잘 될 때 더 조심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도 마귀가 파 놓은 함정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일상의 근심’은 앞에서 말한 것과는 반대 상황입니다.
사는 것이 힘들고, 불안, 근심, 걱정 등이 계속 생길 때, 그런 일들 때문에 신앙생활을 더 간절하게 잘하게 되는 경우도 있고, 반대로 그런 일들만 생각하느라고 신앙생활을 소홀히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일상의 근심’은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연결됩니다.
“가시덤불에 떨어진 것은, 말씀을 듣기는 하였지만 살아가면서 인생의 걱정과 재물과 쾌락에 숨이 막혀 열매를 제대로 맺지 못하는 사람들이다(루카 8,14).”
<‘인생의 걱정’과 ‘일상의 근심’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먹고사는 일에 대한 걱정을 비롯해서,
누구든지 살아가면서 만나게 되는 크고 작은 걱정거리들, 근심거리들, 고민거리들입니다.>
그런 것들 때문에 숨이 막힐 정도라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가시덤불을 제거하든지, 아니면 그것에서 빠져나가든지 해야 하는데, 첫 번째 해결 방법은 ‘믿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요한 14,1-2ㄱ).”
주님 말씀을 믿으려고 노력하면 지금 숨 막힐 정도로 나를 억누르고 있는 가시덤불을 제거할 수 있고, 아니면 최소한 그것에서 빠져나갈 수 있습니다.
한 번에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꾸준히,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3) 대림 시기는 각자 자신의 믿음을 점검하고,
더욱더 단단하게 믿으려고 노력하는 시기입니다.
‘방탕과 만취’에 빠지면 ‘믿음’이 희미해집니다.
<‘믿음’이 희미해지면 더욱 쉽게 방탕과 만취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니 ‘믿음’을 다시 세우는 것이 곧 방탕과 만취에 빠지는 것을 예방하는 것이고, 또 그런 것에 빠졌더라도 그런 것에서 벗어나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일상의 근심’에 억눌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근심 때문에 믿음이 약해지기도 하고, 믿음이 약해졌기 때문에 근심에 억눌리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믿으려고 노력해야 하는가?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썩어 없어지는 씨앗이 아니라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 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통하여 새로 태어났습니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원히 머물러 계신다.’ 바로 이 말씀이
여러분에게 전해진 복음입니다(1베드 1,23-25).”
허무하게 사라질 것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주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생명을 준다는 것을 믿고, 그 말씀에만 의지해야 합니다.
<방탕과 만취와 일상의 근심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 ‘기도’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은데, 기도를 강조하기 전에 먼저 믿음을 강조해야 합니다.
믿음 없이 바치는 기도는 빈말이고,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