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
문희봉
열세 살 트로트 신동이 불러주는 ‘그물’이라는 노래 가사가 내 맘을 사로잡는다. ‘그물’은 고기를 잡는 어구이다. 사랑이란 그물에 산 채로 잡힌 주인공은 애초에 빠져나갈 생각은 없었다. 노랫말이 참 곱다.
‘당신이 던져 놓은 그물에 산 채로 잡혀 버렸다. 그물이 촘촘하진 않아도 빠져나갈 맘은 애초부터 없었다. 그물을 올려라. 사랑의 그물을 당겨라. 놔 주지도 마라. 놔 주지도 마. 어차피 잡힌 거 그냥 살란다.’ ‘그물’이란 노래의 가사 일부다.
아내와 만난 것이 벌써 50년이다. 그간 숱한 고생을 했다. 엊그제는 고목이 약한 바람에 넘어가듯 주방 앞에서 쓰러졌다. 그것도 욕실에서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대개의 경우 욕실에서 쓰러지면 십중팔구 고관절이 나가 고생하다 운명을 달리한다.
아침 해의 찬란하면서도 붉은 색조의 광채를 지니고 내게 온 사람이다. 까탈스럽지 않아 좋은 상(相)을 가진 사람이었다. 나에게로 온 날 내 안에 푸른 신전을 짓고 무명 요 위에 새살림을 차렸다. 태어나면서 이미 누군가에 압류당한 몸이었다고 했다.
눈물도 세월만큼 나이를 먹는다. 깨꽃으로 지순하게 피어 있던 사람이었다. 아내가 피워내는 것은 꽃이 아니라 희망이었다. 아내 안에서 진한 인정의 체취를 맡다 보면 황량한 세상살이에서의 찌든 삶은 어느새 스스로 증발되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소라가 야영하는 금 모래밭을 선물로 주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그게 아니다. 넘기 어려운 고비마다 흔들렸지만 독하게 살자 다짐하던 아내가 지금은 움직이는 종합병원이 되어 있다. 웃음으로 슬픔 말리고, 웃음으로 눈물 말리며 살아온 세월이다. 가죽 부대 틈새로 밀고 들어오는 홍조를 바라보는 내 가슴은 찢어진다. 그러니 내 마음의 냇가에 살얼음이 언다.
오늘 내가 주운 단풍잎을 자세히 보니 흠이 있다. 다섯 손가락 중 하나가 잘렸다. 검버섯이 핀 푸석한 얼굴이다. 그 단풍잎에는 가난한 아내의 닳고 닳은 신발이 보이고, 숨어서 운 질곡의 눈물도 소금 빛깔로 어려 있다. 비 오는 날은 우산 위를 걷는 절제된 악보를 펼쳐놓고 나에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노래를 불러주던 아내였다.
아내는 원래 어떤 섬에 굳게 자리하고 있던 거대한 바위였다. 그 바위는 내 가슴에 예쁜 공원 하나 일궈 놓았다. 직행열차는 싫다고 완행열차가 되어 속도를 내지 않고 서서히 달리면서 나에게 온갖 것들을 진저리치도록 보여주었다.
다시는 아프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기억의 한 쪽이 또 우지끈 무너진다. 불현듯 녹슨 지퍼를 열고 뛰어나오는 고통의 파편들이 아내를 괴롭히고 있다. 일이 쌓이면 병부터 들어와 주인이 됐고, 마음이 가난하여 깨진 소리를 냈다. 뼈마디가 쑤시는 것처럼 살아온 날이 몸살을 앓는다.
상처를 치료하려면 진한 눈물이 필요하다. 눈물이 나는 건 바람 때문인가, 연기 때문인가? 아내는 내게로 와서 섬이 되었다. 그 섬은 두 개의 봉우리와 큰 산을 품고 있었는데 노을이 빨갛게 타는 날이면 해당화가 되어 타고, 바람이 부는 날이면 마타리꽃이 되어 흔들렸다. 나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그 섬에서 여러 가지 보물을 캤다. 요즘 들어 그 섬은 차츰 높이가 낮아지고 있다. 이따금씩 아내는 외줄 타는 원숭이가 되었다. 그래도 아내는 녹슨 시간을 닦던 몸으로 우리 가족의 겨울바람을 막아주고 있다.
지금은 웃음 내린 찰진 시간의 꽃대, 세월을 비낀 유풍한 눈주름이 지난 세월을 말해주고 있다. 아무리 다림질을 해도 주름살을 펼 수가 없지만 그래도 좋다. 큰 산처럼 변함없는 아내의 품에 안긴다는 것은 영광이다. 다색의 그림이 곱게 가라앉은 가을색을 연출하는 아내다.
아내의 웃음 속에는 장미꽃 망울처럼 터지는 그리움이 있다. 나는 그 웃음을 사랑한다. 나는 아내를 싣고 다니는 자동차가 되고 싶다. 그간의 질곡 같은 어려움 떨쳐내고 고운 신발 신겨 전국을 유람하고 싶다. 아내와 나 사이에 녹슨 추억을 순금 목걸이로 변형시켜 목에 걸어 주고 싶다.
열매가 떨어지듯 새벽잠에서 깨어나 부스스 눈 비비고 나를 주시한다. 그 눈시울 속에 산새 몇 마리 들어앉아 길을 안내한다. 뜨는 해에 행복을 담고 오늘도 아침상 앞에서 환하게 웃어본다.
나는 그물에 갇혀 퍼덕거리던 물고기가 말라 죽지 않도록 열심히 물을 갈아줄 것이다. 텃밭에는 무수하게 찍힌 아내의 신발 자국이 지워지지 않도록 표고를 해둘 것이다. 오늘은 햇살이 방안까지 놀러 왔다. 두 손 벌려 받아 보니 어둔 내 가슴에 불이 켜졌다. 밖엔 평화롭고 따사로운 광채에 짐짓 감은 눈이 갑자기 환해진다.
내 늦가을의 시간을 생동하는 봄으로 변형시켜 아내에게 선물하고 싶다. 아내의 몸속엔 아픈 남편 어루만져 주던 어머니의 손길 같은 ‘마음의 보석 상자’가 오늘도 빛을 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