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주작 덕룡 산행에 같이 했던 전용택 감독
"감자심포니" 의 이야기 입니다.
연대 불문과를 졸업해 곧바로 광고계 빅3 중 하나인 제일기획에 입사한 전용택 감독은 CF 조연출로 장래 총망한 광고연출가였다. 그러나 3년째 되던 해 불현듯 사표를 던지고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8대학에서 영화 공부를 시작했다. 학창시절 소설가의 꿈을 키우던 그는 영화야말로 20세기 소설이라고 믿어 영화감독으로의 삶을 선택했다.
만 5년여의 영화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또 한 번 일을 냈다. ‘열정! 대한민국영화 1954~2004’이라는 한국영화 회고전을 기획해 개최한 거다. ‘영화제’ 라는 타이틀을 걸고도 하기 힘든 일을 영화감독지망생의 신분으로 혼자 해낸 것이다. 한국 영화 50년을 총망라하는 54편의 영화를 선정해 모두 영어자막을 넣어 상영했다. 모두 안 될 거라고 고개를 저었지만 그가 해냈다. 반응도 뜨거웠다.
그 뒤 한국영화전 기획자로서 높게 평가받아 관계자들로부터 러브콜을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그가 정말 하고 싶었던 일은 다 만들어진 영화기획전이 아닌 좋은 영화를 직접 만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 ‘감자심포니(가제)’를 제작(2007~2008)하고 개봉을 앞둔 전용택 감독은 영화를 사랑하고 아끼다 못해 올인까지 했다. 자, 이제 그의 영화인생스토리 1막 1장이 시작된다.
* 감자심포니 :
전용택 감독이 2001년 쓴 시나리오로 2006년 한국영화진흥위원회 HD 영화제작지원작품 시나리오 심사에 통과해 5억 원을 지원받아 만든 독립영화다. 영화배우 유오성, 유양근 프로듀서, 의상을 담당한 최선임 씨 등은 전용택 감독의 초·중·고 동창들로 영월에서 학창시절을 함께한 동창생 4명이 영월을 배경으로 제작한 영화로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는 지방도시에서 자라고 성인이 되어가는 고교 동창들이 세상의 자극에 반응하면서 자신들의 콤플렉스와 정면으로 대결하는 성장영화다.
-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은 언제 했나?
고교 때 작가로 살고 싶다는 결심이 섰다. 그런 열정이 꿈이 되고, 확신이 되는 과정과 시간이 필요했을 뿐. 영화감독이란 현실적으로 외로운 직업이다. 그래서 대학 내내 고민을 했었고 그 때는 분명한 확신이 없었다. 시·소설 극작을 하다 대학 때 연극에 빠져 연극대본을 쓰기도 했다. 그리고 미래계획이 완벽하게 없는 상황에서 영상과 사운드를 이용해 뭔가 만들어보고 싶었다. 그래서 광고 일을 선택한 거다.
방송국과 광고회사 중에 고민하다가 제일기획에 들어갔다. 그런데 3년 있다 보니 여기 더 있다가는 정말 광고인이 되겠구나 싶었다. 내면적 갈등이 있었다. 어느 순간 직장이 싫어서 떠난 게 아니라 ‘작가로 살려면 지금 결정하자’ 그래서 무조건 떠났다.
- 작가가 되기 위해 여러 길이 있을 텐데, 왜 프랑스 유학을 선택했나?
대학 전공이 불문학이고 프랑스문학과 작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문학적 영웅이 많다 보니 프랑스 문화를 접하고 싶었다.
1994년 1월 말에 퇴사하고 유럽과 미국을 다니며 여행을 했다. 그러면서 각 학교 커리큘럼을 살펴봤다.
또 뉴욕에서 지낼 때 하루에 연극을 두 편씩 보고 다녔다. 당일 공연 남은 좌석을 반 가격에 파는 곳 있어 거기서 표를 끊기도 했다. 좋은 공연을 보면 무대 뒤로 가서 꼭 인사도 했다. “잘 봤다, 좋았다” 인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친구도 사귀었다. 그래서 초대받아 공연을 보러 다녔다. 뉴욕에서 연극을 하면 도와줄 사람도 있을 거 같아 눌러 앉아 공부할까도 생각했다. 뭔가 바로 만들 수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그만큼 에너지가 많은 곳이다. 거기서 살았다면 또 다른 삶이었을 거다. 전혀 후회하지 않을...
만 6년을 프랑스·미국·벨기에에 있었는데 처음엔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고 갔다. 문학인들에겐 부채의식이 있다. 나도 다른 작가에게 영향 받은 것이 있고, 인생에 대해 배운 것이 있으니 나도 뭔가 좋은 작품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마음이 자리해 있었다.
- 결단할 때, 일어서야 할 때, 행동해야 할 때. 타이밍 참 잘 아는 것 같다.
나는 계획대로 움직이는 편이 아니다. 광고회사 그만 둘 때는 절박함이 있었다. 광고일이 익숙해지고 재미있어졌다. 친구들도 말이 잘 통하고, 딱딱한 업무가 아니라 직장스트레스도 별로 없었다.
그러나 광고는 자본주의 시장의 첨병이고 꽃이다. 그래서 가치관적으로는 행복하지 않았다. 내가 마음속에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부인하고 있다고 생각해 자학이 됐다. 그래서 술도 많이 마셨다.
이제 '내가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은 하자'라고 결심했다. 조금 더 인정받고 급여도 올라가고 나면 나오기 힘들겠다 싶었다.
광고인의 삶은 잘나가는 걸 찾아다니고 남들보다 세련되는 것을 1초라도 먼저 알아야 하고 전해야 한다. 당시 TV 아침뉴스에선 보스니아내전 소식이 나오는데 거기서 오는 괴리감이 있었다. ‘내가 저기 가 있어야 하는 사람 아닌가’ 라는 자문도 했다.
1970년대 한국 작가들도 월남에 자원입대를 많이 했었다. 물론 낭만적 결정일 수도 있지만 작가에게 필요한 정신이다. 또 자신이 얼마나 대책 없이 낭만적인 사람인지 깨달을 필요도 있다. 작가는 그렇게 살아야한다고 생각했다.
- 프랑스에서는 어떻게 생활했나?
처음엔 직장생활하며 모은 돈으로 생활했지만 나중엔 파리에서 여행가이드로 생활비를 마련했다. 아마 루브르미술관을 50번 이상 들어갔을 거다. 그 때 미술사 공부도 열심히 했다. 참 매력 있는 학문이다. 나는 전공이 영화이긴 하지만 예능계학과 박사과정이라 그 학생증으로 프랑스 독일 이태리 미술관과 박물관을 무료로 관람하는 혜택도 누렸다.
- 오자마자 한국영화 회고전을 기획했나?
아니다. 2000년 4월에 돌아왔으니까 4년 뒤, 회고 영화 기획전은 2004년 가을이었다.
한국에 와서 영화사에 시나리오를 돌렸다. 첫 시나리오는 ‘Famous blue raincoat'였다. 그 외에도 시나리오를 여럿 써 놓았다. 전통적으로 눈물을 짜는 멜로가 아닌 물음표가 있는 고급스럽고 현대적인 멜로다. 보여준 영화사마다 반응이 좋았고 그 중 한 곳과 계약을 하고 들어갔는데 1년 이상 기다렸다. 스폰서가 여의치 않으니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하는데 답답하고 화가 나서 못 견디고 나왔다. 기다리느니 스스로 뭔가 하자 싶었고, 그래서 회고전 기획도 하게 됐다.
친구가 허리우드 극장 전문경영인이었다. 당시 허리우드극장 점유율이 7%가 안 됐다. 시사회로 겨우 운영할 정도였다. 그 곳에 경영기획안을 내고 아트 하우스로 바꾸자고 설득했다. 내가 볼 땐 이것만이 살 길이었다. 특히 인사동과 가까워 외국인이 오기도 쉽다. 서울에 언제든 외국인들이 와서 볼 수 있는 영화관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3개 영화관 중 1개관은 언제든 외국인이 볼 수 있도록 영어자막을 넣자고 주장했고 그 제안이 받아들여졌다. 유서 깊은 극장이지만 테마가 바뀌는 시점에서 한국영화 회고전을 기획했다.
- 총 52편의 한국영화 회고전인 ‘열정! 대한민국영화 1954~2004’의 진행 과정은 어땠나?
한 명도 ‘해봐라’ ‘좋다’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필름 빼오기 얼마나 힘든 줄 아냐?’ ‘안 될 거다’라는 냉랭한 반응이었다.
이전까지 제일 규모가 컸던 것이 한국영화 20편을 상영한 것이었다. 한국 영화계에 얼굴 알려진 사람도 아니고, 인맥도 없고, 영화잡지에 필름명이 알려진 사람도 아니었다. 그런데 해보니까 되더라. 처음부터 50여 편 모으리라는 생각 못했다. 그리고 어디 지원을 받아 한 것도 아니었다. 아마 필름 주지 않고 후회한 사람 많았을 거다.(웃음)
반면 부산영화제나 부천영화제에서 달라고 해도 안 주던 곳에서 설득의 설득 끝에 허락을 받아 내기도 했다. 김홍준 전 부천영화제 위원장도 어떻게 다 모았냐고 놀라워했다. 외국영화 50~60편 모으는 거 보다 한국 영화 7편 모으는 것이 10배는 더 힘들다고 말했다.
- 결과는 성공적이었다고 들었다.
행사가 굉장히 잘 되었다. 자원봉사자와 지인들의 도움을 받았다. 모든 행사와 관객과의 대화는 동시통역으로 진행됐다. 이대 동시통역과 학생들이 자원봉사를 해 주었다. 폐막식에 왔던 사람들이 "모 영화제보다 더 국제적이었다"라고 평가해줬다. 그도 그럴 것이 참여한 사람의 반 이상이 외국인이었다.
- 그 뒤 영화제작은 바로 이어졌나?
그렇진 않다. 영화제 이후 기획력과 추진력을 높이 사 여러 제안을 받았다. 프랑스 영화제에 백지위임을 받아 한국영화 10편을 선택해 보낸 일도 있었다. 한국에 백지 위임장을 받은 것은 임권택 감독 이후 처음이었다.
그리고 한국영화 월드투어를 하자는 제안도 받았다. 한국영화 프로그램 만들겠다는 해외 영화제 관련자에서도 연락이 왔다. 수천 편 영화 가운데 50편을 고르는 것은 정확한 기준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자부심을 느낀다. 하지만 난 어차피 작품을 하려고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더 이상 집착해선 안 된다고 판단했다. 이 일로 성공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1~2년 지나면 감독과의 길은 또 멀어질 수 있겠더라.
이것은 다른 사람의 길이다. 사실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사는 길이 더 귀찮고 어렵겠지만 ‘나처럼 한국영화판에 아무 끈 없는 사람도 해냈는데 영화계 몸담고 있는 사람은 좀 더 편하게 할 거다’라는 생각 때문에 거절했다. 내 역할은 여기까지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 결단력이 대단하다. 한 번 더 맡아 인지도를 높일 수도 있었을 텐데.
물론 유혹도 있었다. 내가 하나의 성공에 집착하면 ‘배를, 강을 건너는 수단으로 여기지 못하고, 강을 건너고 나서도 배를 두고 가기 아까워 집착하는 것’이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과감히 버렸다.
- 그리고 첫 영화를 제작한 것이 감자심포니였나?
한국영화 회고전 이후 메이저 영화사에서 제안이 왔지만 진행이 잘 안 되었다. 그러다보니 현실적으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웠다. 대학에 영화 강의를 나갔지만 용돈도 안 되는 벌이었다. 1년이 지나도 결과가 안 나왔다. 2005년에 1회 제천 영화제에 시나리오를 출품해 제작비 지원 확답을 받았지만 이도 경영위원회에서 취소되었다.
그 해 프랑스대사관으로부터 제안을 받았다. 프랑스에서 황우석 박사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통역 및 한국측 진행자로 투입된 거다. 당시 황우석 박사가 이슈화 되던 해였고 3박4일 그와 동행 취재했다. 3주 후 프랑스 제작팀이 돌아가고 편집할 무렵 황우석 박사 사태가 터졌다.
그 뒤 난 한 달 반 이상을 전쟁처럼 살았다. 그리고 훌쩍 네팔로 떠났다. 히말라야는 언젠가 꼭 가고 싶은 곳이었다. 최정상은 아니었지만 한 겨울에 안나푸르나를 혼자 23박24일 걸어갔다. 가이드나 포터도 없었다. 그리고 6개월 동안 네팔 인도 태국 등을 다녔다. 인도에서는 과거의 영웅 라즈니쉬와 간디의 발자취를 밟고 명상도 했다.
이제 남의 결정에 기다리는 것이 지치고 싫었다. 심지어 영화계를 떠날까 생각도 했었다. 나는 영화 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시장의 기후 때문에 이렇게 긴 시간이 걸리니까.
그래서 2006년에 한국영화진흥위원회 HD 영화제작지원작품 시나리오 공모전에 지원했고 당선이 되어 5억 원을 지원 받았다.
그 뒤로 ‘시나리오가 재미있으니 큰 규모로 영화를 제작하자’는 메이저영화사의 제안을 받았지만 그 때는 아무리 저예산이라도 남의 도움이나 결정에 맡기지 않겠다고 다짐했기에 거절했다. 그렇게 저예산독립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2006년 가을에 지원 확정이 되었고, 2007년 초에 발표가 났으니까 6년의 기다림 끝에 드디어 영화를 만들게 됐다.
- 오래 기다린 세월이 약이 되지 않았나?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자기 합리화다. 20살에 만들 수 있는 영화, 30, 40에 만들 수 있는 영화가 있는데 난 조금 젊었을 때 영화를 만들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다.
어차피 난 좋은 작품 만들고 싶은 사람이다. 영화가 예술치고는 교묘한 예술이어서 시장에서 어느 정도 성공의 담보가 안 되면 다음 작품하기가 어렵다. 그러면 완전히 초저예산으로 만들어야 한다.
감독은 자기 작품이 관객과 만나는 장소가 없을 때 외롭다. 그래서 되도록 일반 극장에 걸 수 있는 영화 만들고 싶어 하는데 나 역시 그랬다. ‘내 영화는 몇 명만 봐도 상관없어. 하지만 10년 뒤라도 꼭 내 작품을 알아줄 거야’라고 생각했다면 처음부터 디지털 영화를 만들었을 거다. 그러나 나는 커뮤니케이션 루트를 확보해 놓은 뒤 영화 만들고 싶었다. 또 가능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 결정권은 늘 투자자에게 있기에 오래 걸렸다.
-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투자자가 나타난다면 언제든 독립영화가 아닌 상업영화를 만들겠나?
당연히 그렇다.
- 감자심포니 찍을 때는 순조로웠나?
그렇진 않았다. 독립영화 제작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고 싶어 진짜 독립적으로 했다. 나도 한국영화계에서 수많은 비애를 맛본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영화에 출연한 배우는 유오성 빼고는 오디션을 4차까지 보고 뽑았다. 배우의 유명도도 영향 받지 않았다. 단지 이 배역에 어울리는가만 봤다.
유오성은 친구지만 그래도 유명배우다. 시나리오 쓸 때부터 유오성에게 잘 어울릴 것 같은 배역이 있었는데 우리 같은 저예산영화에 ‘같이 하자’고 할 수 없었다. 배우간의 균형도 맞지 않고, 예의도 아니었다.
그런데 정말 고맙게도 유오성이 먼저 제안을 했다. ‘네가 영화 만드는데 내가 가만 있을 수 있냐? 우정출연도 좋고 카메오도 좋으니 언제든 불러 달라’고 말이다.
그래서 해서 함께 작업하게 됐다. 그리고 정말 순수하게 말 그대로 노 개런티 출연이었다. 이 이야기는 좋은 홍보거리가 될 수 있는 미담이지만 싸구려 가십거리로 풀고 싶지 않아서 그동안 얘기하지 않았다. 떠들고 다녀서 남들 관심 끌고 싶지 않았다.
영화 자체만으로도 자신감이 있다. 굉장히 좋은 영화다. 탄탄하고, 연기 좋고, 영화 리듬도 잘 살아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울고, 웃고, 가슴 조이다가 끝나면 긴 여운이 있는 영화다.
독립영화가 일반적으로 지금까지 시장에서 봐 온 영화와는 다르니까 낯설어 시장 진입이 어렵다. 아트하우스에서 소규모로 개봉될 지 상업영화관에서 꽤 많은 관객을 만날지는 아직 모르겠다. 배급 결정이 안 되어서 계속 접촉 중이다.
이번에 워낭소리가 워낙 작은 배급방식으로 시작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 전례가 생겼기 때문에 여러 가지 기대의 폭이 넓어졌다. 그동안 뻔한 구조의 인체 유해한 양념이 들어간 상업영화 시스템에 익숙해져 독립 영화는 받아들여지지 않거나 단관 개봉해왔다. 아트 하우스에서 작게는 몇 백 명에서 몇 만 명 관객을 만나는 것으로 그쳤지만 워낭소리가 큰 댐 장벽 하나를 허물어 주었다. 물론 한 번에 그치면 예외가 되겠지만.
지금까지의 인스턴트처럼, 화학조미료 넣은 유치한 유머, 뻔한 반전으로 지겹다 싶다면 좋은 영화의 길이 보인다.
- 감자심포니라는 타이틀도 직접 구상했나?
그렇다. 감자는 강원도의 상징이다. 실제 인물도 강원도 지방도시에 사는 사람들 이야기다. 그리고 처음부터 교향곡 구조로 시나리오를 썼다. 1악장은 알레그로로 가볍게, 2악장은 아다지오로 진지하게, 3악장은 스케르쪼로 유머 해학을 담았다. 형식에 날 얽어매고 2악장에 유머를 넣고 싶어도 꾹 참고 3악장에 몰아넣었다.
-워낭소리 이후 독립영화 관심 많아졌다. 이 시점에서 영화 관객에게 당부하고 싶은 이야기는?
난 당부라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느낌을 말하자면 대부분 일반 상업영화에서 꺼내 만들어지는 기획영화 70~80%는 뻔한 작품이다. 아니, 상품이다. 이보다 재미있는 독립영화가 훨씬 더 많다. 그러나 홍보도 안 하고 소규모 예술극장에서 개봉하다보니 관객에게 알릴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보고 나면 나를 돌아보게 하고, 재미있고 감동 있는 영화가 많다.
물론 ‘몇 천 원 내고 영화를 보면서 스트레스 푼다’는 마인드를 가진 관객이 많다면 먹히는 코드로 버무려 재생산하는 영화가 계속 될 것이다. 그러나 내가 영화를 보는 가장 큰 이유와(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영화 만들게 된 계기가 바로 인생에 대한 관심이다.
나에 대한 관심, 나와 맞물린 이웃에 대한 관심, 더 깊이 알고 싶고, 들여다보고 싶은 관심이다. 좋은 책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지만 강열한 만남이란 자기 인생을 확장시키는 요인이 있다. 영화 보는 한 시간 반이 잊고, 털어버리는 시간이 아니라 찾고, 경험하는 적극적 의미라고 한다면 독립적이고, 만드는 체취가 느껴지고, 세계관이 바로 코앞에, 마음에 와 닿는 방식의 영화가 훨씬 더 재미있다.
그런 시야를 깨주는 것이 대학 등 영화 강의와, 영화 잡지 등 교육이 해야 할 일이다. 어린 시절 주말의 명화 예고할 때 늘 “이 영화 놓치면 안 됩니다.”라고 말하던 정영일 씨와 같은 역할이 아쉽다.
자본이라는 것 자체가 천박함을 지향하는 것 같다. 문화라는 것은 이런 것과 싸워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문화의 껍데기를 쓰고 있다.
- 그렇다면 좋은 영화 보는 기준이나 팁을 달라.
내 인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다고 느끼는 영화. 그런 작품이 진지한 작품이라 생각한다. 나의 인생과 연관될 수 있고, 영화가 끝나면 오랜 울림이 있는 영화, 누군가와 바로 얘기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영화, 그 때 누군가 말시키면 화나게 만들 만큼 혼자 여운을 간직하게 만드는 영화가 좋은 영화가 되지 않을까.
- 워낭소리를 일각에선 ‘진정한 독립영화냐?’ 하는 부정적 목소리도 있다.
아직 워낭소리를 보진 못했다. 하지만 독립영화가 그렇게 수많은 관객을 확보한 것은 참 좋은 결과라고 본다.
그런데 세부적으로 들어가서 ‘그것이 원래 공중파 방송용으로 기획되었다’는 등에 큰 벽을 둔다는 것은 ‘너 원래 시 쓴다더니 소설 썼네’하는 것과 같다. 중요한 것은 힘이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 몇 십억 원을 들여 만든 영화보다 소중하고 격조 높고 작품성 있는 TV 작품도 많다. 그런 경계선을 긋는 사람들은 무슨 의도가 있는 사람으로 보인다. 기득권 싸움 같기도 하고.
- 좋은 영화 만들 거라고 했는데 앞으로 도전해보거나 만들고 싶은 영화는?
내가 좋아하는 것이 다양하고 많다. 성격 자체가, 호기심도 많다. 영화에 관심 갖게 된 것은 정통드라마의 영향이다. 인간의 삶을 다루는 휴먼드라마에 감동 받아 영화를 좋아하게 되었다. 닥터지바고 등 우리 역사상 위대한 영화 중 하나다. 프랑스에 가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많이 봤고 영화에 눈을 떴다. 세계 명작을 몇 년간 하루에도 몇 편씩 봤다. 웨스턴 장르, 필름느와르,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를 섭렵했다.
감자심포니에도 첫 영화지만 여러 장르가 악장별로 들어 있다. 액션, 드라마, 코미디 등을 4악장에 고루 넣었다.
앞으로 만들려는 영화도 다양하다. 고비사막까지 찾아간 눈 먼 여인을 그리는 전형적인 그리스 비극도 있고, 무술 사무라이 영화 장르를 빌린 고독한 무사 이야기, 그리고 서민적 코미디도 있다.
헐리우드에 머물면서 느낀 점을 LA 폭동사건 등의 문제는 한국영화가 다뤄줘야 한다고 점이었다. 한국역사와 세계사에 중요한 사건인 만큼 관심이 많다. 그런데 이 테마의 영화는 아무리 싸게 찍어도 최소한 100억 원은 필요한 영화다. 그래서 앞으로 몇 작품 더 만들어 ‘저 사람이라면 그 영화도 가능하겠구나’ 하는 연출가로서 인정받은 뒤에 가능한 영화일 거다. 아마 영화는 평생해도 재미있을 것 같다.
- 독립영화 감독이라는 타이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나?
사실 반반이다. 분명히 인디펜던트하게 영화 만들었으니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한 편으로 영화 작품의 성격을 규정한다면 바람직하지 않은 오해가 있을 수 있겠다. 흔히 ‘독립영화는 재미가 없을 거다, 어려울 거다’라는 편견과 통념을 갖게 된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영화는 모든 사람이 보면 내 이야기처럼 볼 수 있는 영화다. 재미있는 영화가 가진 요소인 긴장·유머와 액션 등 볼거리까지 있다. 단지 작은 예산으로 알뜰히 쓰면서 좋은 영화 만들자는 취지로 만든 영화다.
- 독립 영화 제작 배급 지원 줄었다고 들었다.
줄어드는 추세는 맞는 거 같다. 그러니 살아남는 놈이 강한 놈이다. 그러다보면 다양성은 희생될 것 같다. 기본적으로 관객을 즐겁게 하려는 의도가 없는 영화도 있고, 듣기 싫지만 들어야하는 쓴 소리 내는 영화도 있는데 이런 영화는 점점 살아남기 어려울 거다.
있어야 할 목소리가 없어진다면 과연 건강한 사회인가? 그렇다면 보호해 줄 영화를 보호해주지 못하는 거다.
- 영화 개봉을 앞두고 있는데.
원래 기본적으로 실력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국이라는 곳이 인간관계에 많은 영향을 받기 때문에 인맥이 별로 없어 늦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방법을 찾고 있다. 새로운 배급방식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도 있다. 앞으로 영화를 계속 만들 거니까 최대한 남에게 의지하지 않고 영화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뭘까 찾는 것이 숙제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