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장인 홍화보(洪和輔)는 무신이었지만 사실 몸이 가냘퍼서 마치 여인과 같았다. 키도 작아서 어느 누가 보아도 무인처럼 보지 않았다. 그럼에도 용맹은 남보다 뛰어났으며, 타고난 성품이 호탕하여 병법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좋아하였다. 1761년(영조 37)에 장상(將相)과 대신들에게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장수가 될 만한 자를 천거하도록 하였더니 모두들 홍화보를 추천하여 훈련원 초관(訓鍊院 哨官)이 되었다.
홍화보의 인품과 명성이 세상에 드러난 것은 사도세자가 죽을 때였다. 1762년(영조 38) 영조와 사도세자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당시 집권 세력들은 사도세자가 향후 조선의 국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영조 역시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세자가 국왕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세자에 대한 많은 오해의 사건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사도세자가 평양에 있는 군대를 동원하여 아버지 영조를 죽이고 왕이 되고자 역모를 준비하고 있다고 한 것이다. 평소 아들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였는데 이러한 거짓 내용을 들으니 영조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그래서 창경궁 휘령전으로 아들을 불러오게 하여 칼을 주고 자살하라고 지시하였다.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게 살려달라고 애원하였고, 앞으로는 공부 열심히 하고 아버지가 원하는 아들이 되겠다고 눈물을 흘리며 빌고 또 빌었다. 그러나 영조는 매정하였다. 아들인 사도세자에게 칼을 주고 자결하라고 지시하였다. 사도세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칼을 잡고 자결하려고 하였다. 이때 사관들이 말려서 자결을 하지 못하자 바닥과 벽면에 있는 돌에 머리를 찧어 자살하려고 하였다. 머리에 피가 줄줄 흐르자 사관들은 어의를 불렀다. 그때 어의 중 최고의 지위에 있는 태의(太醫)인 방태여(方泰輿)가 사도세자를 치료해 주었다. 그리고 우황청심환을 올려 마음의 안정을 찾게 하였다. 방태여는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다.
머리 대신 상투 한 올을 베어 바친 지혜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영조는 엄청나게 진노하였다. 자신은 아들에게 죽으라고 명령을 하였는데, 의관이 세자를 치료해 주었으니 임금인 자신을 능멸하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영조는 선전관으로 있는 홍화보에게 방태여의 머리를 베어오라고 명령을 하였다. 홍화보는 영조의 명을 듣고 방태여의 집으로 갔다. 머리를 베어오라는 국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홍화보는 떨고 있는 방태여의 머리카락 한 올을 베어서 영조에게 갖다 바쳤다. 방태여의 머리를 베어오라고 명령을 하였는데 선전관인 홍화보가 머리카락 한 올을 베어서 바쳤으니 영조는 너무도 화가 났다. 그래서 홍화보 역시 유배를 보내고 방태여의 머리를 다시 베어오라고 명령하였다.
이 때 홍화보는 영조에게 자신이 왜 머리카락을 베어왔는지를 이야기하였다 “전하! 우리 조선에서는 상투를 머리와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상투가 잘리는 것은 곧 머리가 잘리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합니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머리를 자르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상투 전체를 자르나 상투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자르나 모두 같습니다. 상투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잘라도 조선의 선비들은 치욕을 느낍니다. 그러니 상투의 머리카락 한 올을 자르는 것은 머리를 베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제가 머리 대신 상투 한 올을 자른 것입니다.”
영조는 이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 홍화보를 유배 보냈지만 다음 날 유배에서 풀어주었다. 만약 자기가 화가 난 기분대로 하였으면 조선에서 가장 뛰어난 의관을 죽이는 일이 생길 수 있었는데, 홍화보의 지혜와 용기있는 행동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홍화보는 위급한 순간에도 자신의 안위를 뒤로하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 이러한 품성과 용기가 훗날 사위인 다산에게로 전해진 것이다. 다산이 매사에 신중하고 깊이있는 행동을 할 수 있었던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장인으로부터의 가르침 때문이었다. 늘 옳은 것을 배우고자 노력하는 것, 이것이 바로 다산의 정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