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창읍에서 그만 길을 잃고 말았습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오며 줄곧 이정표 하나에 의지해 여기까지 왔건만 갑자기 그 이정표가 사라져 버린 겁니다. 길을 가다보면 이런 경우가 허다하게 발생하긴 하지만 머나먼 타지에서 이런 일을 당하면 당황하게 됩니다. 운전하는 아내에게 길 좀 물어보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대답은 "노(NO)"입니다.
아내는 누구에게 길 물어보는 걸 제일 싫어합니다. 정말 이상하지요. 타지에서 길을 잃으면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게 당연한 일인데, 아내는 그걸 정말 싫어합니다. 그래도 신기하게 목적지까지 잘 찾아가니 할말은 없습니다. 사람에겐 특별한 재능이 한 가지 이상은 꼭 있다고 하는데 아내는 방향 감각이 정말 뛰어납니다. 이번에도 길을 물어보자는 저를 무시하고, 몇 블록을 돌아보더니 제대로 방향을 잡았습니다. 이정표가 다시 나타난 것이지요.
결국 오후 4시가 다돼서 선운사 주차장에 들어섰습니다. 사람들은 일찌감치 절을 돌아보고 나오는데 저희는 그제야 들어갑니다. 길 왼쪽으론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송악'이라는 나무도 보이는 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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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삼인리 ‘송악’, 천연기념물 제36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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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상철 |
| 이곳 동백꽃은 4월이 돼야 절정을 이룬다고 하는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진입로에 들어섰습니다.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을 이곳 선운사에서 꼭 보고 싶은데, 괜히 저희 마음만 앞선 것 같기도 합니다.
아스팔트길을 따라 일주문까지 아이와 장난치며 걸어갔습니다. 복분자, 따뜻한 어묵 국물, 지글지글 익어가는 감자전, 그리고 녹두전. 노점에 펼쳐진 이 맛있는 유혹들을 떨치기 위해 아이와 더 수다를 떨어야했습니다. 지금도 시간이 너무 늦었거든요. 그리고 드디어 일주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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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쉽다! 선운사 일주문이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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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상철 |
| 아마도, 일주문이란 사찰에 들어가기 전에 돈을 지불해야하는 첫 번째 관문인가 봅니다. 원래는 문의 기둥이 한 줄로 늘어서 있는 데서 유래한 명칭으로, 한 곳으로 마음을 모으는 일심(一心)을 뜻했다고 합니다만, 요즘 사찰의 입구에 일주문을 세운 것은 신성한 곳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주머니의 돈을 털어야 하는, 그렇지 않으면 절대로 문을 열어줄 수 없음을 뜻하는 곳으로 변한 것 같습니다.
세상과 절의 경계를 뜻하는 일주문, 그래서 이 문을 들어서면 불자가 아닌 나 같은 사람도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되는 게 정상인데, 도대체 누구의 발상일까요? 고창 선운사에 들어서면서 이런 의구심은 점점 깊어만 집니다.
일주문 아래쪽에 입장권을 받는 출입구를 만들 수 없었는지, 왜 하필 일주문을 통과하면서 도시의 지하철을 타는 느낌, 또는 대형 할인 마트에 들어가는 느낌을 들게 했는지 정말 궁금하군요. 얼마나 놀랐으면 매표소 직원에게 몇 번을 물었겠습니까?
"아저씨! 이 문이, 정말 일주문 맞나요?
직원은 고개를 가만히 끄떡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사진을 찍을 동안 잠시 옆으로 자리를 피해주었습니다.
그래도 일주문을 통과해 천왕문까지 이르는 길은 참 좋았습니다. 오른쪽 나무숲엔 이승에서 깨끗한 영혼으로 살다간 스님들의 부도가 모셔져 있고, 왼쪽 개울엔 찬란한 봄을 기다리는 나무들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며 세속의 때를 씻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빠져나가 이 길에서 저도 아주 잠깐이나마 세상의 시름을 모두 놓아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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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것이 진짜 나무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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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상철 |
| 천왕문에 으르러 아이는 두 손을 모으고 사천왕상을 보며 고개를 숙입니다. 어른들이 하는 모양을 보고 한두 번 재미로 해보더니 이제는 꼭 잊지 않고 인사를 합니다. 이럴 때면 의젓한 모습에 흐뭇해집니다만, 떠들지 말라는 말은 곧잘 잊어버리고 큰소리로 엄마, 아빠를 불러 아내에게 혼 날 때를 보면 영락없는 7살짜리 꼬마아이 입니다.
천왕문을 지나 선운사 경내에 들어섰습니다. 정면으로 만세루가 보이고, 왼쪽으로 단아한 모양의 절집이 눈에 들어오는 데, 정말 아늑하다는 느낌이 몸으로 전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만세루 좌, 우에 붙어있는 글귀는 전체적인 분위기와 영 어울리지 않습니다. 특히 '금연', 저 글귀를 붙인 이유는 누군가 절 안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얘긴데, 저로서는 납득이 가지 않는 일입니다. 누가 절에 들어와서까지 담배를 피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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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세루는 불법을 배우는 스님들의 강의실입니다. 도 유형문화재 제53호로 지정돼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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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상철 |
| 인적이 끊긴 절집 마당을 저희 가족 셋이 걸었습니다. 최대한 느릿느릿, 여유로운 마음으로 산사의 멋진 풍경을 즐겼습니다. 아들이 '엄마'를 찾는 소리에 깜짝 놀랄 일만 없으면, 가끔 지나가는 스님의 도포자락 휘날리는 소리만 들릴 뿐 저녁 무렵의 절집은 정말 고요합니다.
아내는 혼자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가 가끔 어디론가 사라져 버립니다. 대웅전 뒤쪽 동백나무 숲으로 사라졌다가, 또 금방 만세루 마루 위를 거닐고, 영산전에서도 보이다가 금방 없어지고, 한참 뒤에 보리수나무 뒤에서 나타나곤 합니다. 제가 사진을 찍는 사이에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이지요.
동백나무 숲 쪽에서 걸어오는 아내에게 조용히 물었습니다. "동백꽃 폈어?"라고요. 하지만 아내는 고개를 가로 젓습니다. 역시 저희가 너무 일찍 선운사에 왔나봅니다. 눈물처럼 뚝뚝 떨어지는 동백꽃을 못 봐서 참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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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웅보전, 보물 제290호. 현재 건물은 조선 광해군 5년(1613년)에 건립된 것이라고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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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창 삼인리의 동백나무숲, 천연기념물 제184호. 대웅보전 뒤에서 도솔암까지 약 3천여 그루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그 수령 또한 500~600년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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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방상철 |
| 해가 산으로 넘어가는 것을 보고서 절을 빠져나왔습니다. 들어올 때보다는 좀 더 빨리 걸었습니다. 금방 어둠이 찾아왔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일주문에 다다랐을 때 다시금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나중에 다시 선운사에 왔을 때, 그때는 다른 곳에 출입구가 생겼으면 좋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