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문화탐방이 시작되었다.
첫 탐방길은 도선사 - 봉황각 - 손병희 선생 묘소 참배이다.
성신여대역에서 경전철 우이선으로 환승하여 우이역에 내렸다.
도선사로 가는 셔틀버스로 5분 정도 올라가니 도선사 일주문이 보였다.
전에도 몇 번이나 와본 곳이기는 하나 사찰 법당의 위치가 많이 변해있어서 낯설어 보였다.
도선사는 신라말 경문왕 도선국사가 창건해서 호국불교 도량, 참회기도 도량으로 면면히 불교역사를 이어온 곳이다.
1960년대 부터 1970년 대 사이 박정희 대통령 시절 영부인 육영수 여사와 청담 스님과 인연으로 삼각산 깊은 산중 도선사는 아스팔트길을 닦으며 많은 대중들과 마주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고 대중들의 기도도량으로 거듭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명부전에는 고 박정희대통령, 고 육영수 여사 영정 사진와 고 정주영 현대스룹 회장 부부 영정 사진이 봉안되어 있었다.
도선사 마애석불은 20미터 암벽에 8미터넘는 거대한 부처님을 조성되어 있다. 석불의 풍화를 막기 위해 보호각이 설치되어 있고, 200여평의 야외법당을 만들었다.
도선사 오른편으로 올라가서 청담스님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쉬엄쉬엄 3 `1운동이 산지 봉황각으로 갔다.
도선사에서 봉황각까지 내려오는 동안 해빙기를 맞은 계곡물 소리가 높아지고, 봄바람도 부드러웠다. 3월 중순이니 곧 꽃소식도 도착하리라 생각하며 오랜만의 산행이 즐거웠다.
도선사로 갈 때마다 스쳐갔던 천도교수도원은 100 년이 넘는 현대식 건물과 봉황각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신문물의 산지였던 붉은 벽돌 건물은 방정환선생이 근무했던 곳인데 50년 전 이 곳으로 옮겨 복원시켰다고 한다.
안채에는 천도교 3대 교주였던 손병희 선생이 1912년부터 1919년까지 거주하며 독립운동을 주도했던 봉황각이 있다. 기와를 얹은 건축양식으로 지금도 의창수도원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손병희 선생은 이곳에서 일제강점기로 주권을 잃은 나라를 독립시키기 위해 천도교 포교와 독립운동의 산실이 되도록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손병희 선생은 당시 여성교육을 위해 동덕학원을 개교시키기도 했다는 원장님 설명이 있었다.
창신동 동덕여중고를 다닐 때 손병희 송공비가 있었고, 조동식박사 동상을 보며 다녔던 기억이 떠올라서 참 인연은 이렇게 닿는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봉황각에서 회원들과 함께 만세 3창을 외치고, 손병희선생 묘소를 참배했다.
그저 스쳐가던 곳에 독립운동의 산실이 있었다고 하니, 문화탐방회가 아니면 돌아볼 생각도 못할 것이다.
다음 주 초안산 내시묘 탐방도 기대되었다.
첫댓글 그 옛날 여름방학때면 20번 뻐쓰타구 우이동 종점에서 내려 너른 물 따라 가재잡이 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지금두 동글동글 자갈 위로 넘쳐흐르던 따가운 햇빛 받으며 흐르던 맑은 물이 눈에 선합니다. 지금 어느 곳에서 소리칠 수 있는 공간이 있을까요 ~ 후배님처럼 만세 삼창 한 번 어느 곳서 소리쳐 보구 싶은 맘 솟구칩니다. 생생한 영상소개에 감사드립니다......*
저도 창동으로 미꾸라지 잡으러 갔던 기억이 납니다. 오빠 친구들 하고 갔다가 거머리에 물려서 피를 흘리고 울던 초등시절이 아득합니다.
기대했던 문화탐방이 시작되어 반갑습니다.
직접 체험하지는 못하지만 목후배님이 꼼꼼하게 기록해 전달해 주시니 많은 도움이 되기 때문이지요.
백운대 오름길에 있는 도선사는 무수히 지나쳤으나 정작 육영수 여사 덕분에 아스팔트 깔린 산길을 오르며 편함을 즐겼을 뿐이니 도량으로서의 모습은 찾은적이 없었거든요.
그리고 독립운동의 산실이었던 천도교수도원도 마찬가지구요.
그리고 사진중 포화대상의 아랫배가 까만 이유가 궁금합니다..ㅎㅎ
각 사찰 포대화상마다 손 때로 얼룩진 것을 보니....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 보입니다.
@목필균 (18회) 사람들의 욕심이 뭍어있는 손때가 넉넉한 포대화상님의 아랫배를 그지경으로 만들어 버렸군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