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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그늘
조 정 래
ㅡ지금까지 67년에 걸친 할아버지의 생애는 참으로 위대하고 위대하시며, 거룩하고 거룩하시며, 자랑스럽고 또 자랑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찬란하게 빛나는 업적을 어찌 자손 만대에 남기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아니, 만대로서는 부족합니다. 억만대에 걸쳐 남겨야 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자서전이 종이로 만들어져서야 되겠습니까. 그건 앞을 내다보지 못한 단견이 저지른 시행 착오입니다. 물론 책을 만드는 종이 중에서 질이 제일 좋다는 모조지를 쓰긴 했습니다만, 그 수명은 고작해야 2백 년 정도밖에 못 갑니다. 자손 만
대, 아니 억만대까지 전해야 할 위대하고 거룩하고 자랑스러운 할아버지의 생애를 그따위 종이에 적어서야 되겠습니까
할아버지, 저에게 기막힌 아이디어가 한 가지 있습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금이야말로 아무리 긴긴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도 녹슬지도 썩지도 않는 쇠붙이가 아닙니끼. 할아버지의 재력이라면 영구 보존을 위한 몇 권을 순금으로 만드는 것쯤 뭐 대수로울 게 있겠습니까. 기특하다고 저를 칭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할아버지의 손자이며, 아버지의 아들로서 핏줄을 이어받았으니 그 정도 머리 쓰는 것쯤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잠을 깨자마자 손자 원규놈의 편지 구절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노트종이 다섯 장에 앞뒤로 빼곡하게 쓴 편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야유와 조소로 차 있었다. 손자놈의 어금니 다져문 고집스러운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입 안에 신음을 물며 눈을 내려 감았다. 밤새껏 잠자리가 어수선하고 산란스러웠다. 깊은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지 젖은 옷을 입고 있는 것처럼 전신이 눅눅하고 묵지근했다. 그 음습하고 칙칙한 기분은 분명히 전신으로 느껴져왔다. 그는 어떤 예감과 함께 왼쪽 팔을 번쩍 치켜들었다. 그러나…… 왼쪽 팔은 침묵으로 그의 의지를 배반했고, 기대를 묵살했다. 왼쪽 반신은 분명 마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의식 속의 감각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 습관성 착각에 번번이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회복에 대한 기대가 범하는 어리석음이었다. 그 어리석음을 되풀이할 때마다 절망의 눈금이 한금씩 높아지는 것을 의식해야 했다. 그는 뭉텅이로 솟아오른 한숨을 일단 어금니로 물어 삭여서 가늘게 내쉬었다. 절망감이 어느 때 없이 진하게 가슴을 눌러왔다. 손자놈의 편지에서 받은 충격 때문일 것이었다.
“기분은 좀 어떠세요?”
언제부턴가 건성으로 느껴지기 시작한 아내의 물음이었다.
느리게 눈을 떴다. 손자놈의 편지를 감추었듯이 지금의 감정도 내색하고 싶지가 않았다.
“괘 앤치 않아…….”
그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대꾸했다. 몸은 비록 반쪽이 마비 상태에 빠져 있지만 말만은 똑똑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마비 증상은 혀에까지 미쳐 말이 제대로 되어 나오지를 않았다. 그 어늘하게 늘어빠지는 소리는 자신이 들어도 영락없는 반편이였다
“아줌마하 의원님 일어나셨어요오.”
아내는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자개 장식이 요란한 커다란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질하며 목청을 크고 길게 뽑았다.
그런 아내의 태도는 남편이 중환자라는 근심스러움이나 걱정스러움이 거의 없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1년 6개월 가까운 세월을 거치면서 차츰 나타난 변모였다. 그동안 병 수발을 해오면서 지치기도 했을 것이고, 중풍이라는 병에 대해 알 만큼 알게 되면서 어느 정도 체념도 했을 것이디. 완치가 어려운 병을 짊어지고 있는 그의 입장으로서는 아내가 조바심하거나 안달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약간 둔감해졌거나 태평스러운 것이 더 마음 편한지도 몰랐다.
―젊은 할머니께서도 여전히 아름다우시고 건강하시 겠지요.
손자 원규놈의 야유는 아내한테까지 서슴없이 뻗치고 있었다. 원규놈이 ‘젊은 할머니’라고 꼬집지 않았더라도 마흔세 살인 아내의 젊음이 자신의 의식의 한쪽 구석을 불안으로 채우지 않는 바도 아니었다. 여자 나이 마흔셋이면 결코 젊다고 할 수 없었지만 자신과 24년이 차이 나는 아내는 젊은 나이일 수밖에 없었다. 아내는 아이를 낳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몸 가꾸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아직도 탄력 있는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다 아내는 자신의 솜씨로 길들여놓은 소리 잘 내는 악기였고, 반응 민감하게 방향을 잡는 영리한 한 필의 말이었다. 풍을 맞은 것이 젊은 것하고 너무 야하게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스런 생각은 진즉부터 했던 것이고, 언제부턴가 무성의해지기 시작한 아내의 태도가 혹시 딴 데 마음이 팔리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언뜻언뜻 들기도 했고, 사흘거리로 그리도 뜨거운 몸짓과 함께 달게 울던 울음을 1년 반 가깝게 참아내고 있다는 사실에 불현듯 의혹이 생기기도 했다.
“아줌마아 의원님 일어나셨다는데 뭘 하고 있어요.”
아내는 아까보다 한결 목청을 돋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아내에 대한 불유쾌한 생각을 얼른 털어버렸다. 그런 생각에 빠져드는 것은 피차를 위해 피해야 했다. 아무런 근거 없이 아내를 의심하는 것도 죄 될 일이었고, 그런 생각에 빠질수록 자신의 초라한 꼴만 확대될 뿐이었다.
“의원님, 편히 주무셨어요?”
안성댁이 훨체어를 밀고 들어오며 꾸벅 인사를 했다.
의원님이란 호칭과 훨체어, 그건 전혀 어울리지가 않았다. 그러나 그 어울리지 않음이 자신이 처해 있는 거역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어느 날 느닷없이 덮쳐온 중풍은 그에게서 건강만 빼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국회의원이란 사회적 지위도, 삶의 의미도 남김없이 빼앗아가고 말았다. 변함없이 남겨진 것이 있다면 재산이었다. 그러나 그건 병마 앞에서는 본연의 절대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력하기만 했다. 그는 평생 동안 신봉해 마지않았던 돈의 절대 위력을 뒤늦게 수정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아내와 안성댁에게 들려 훨체어에 실려졌다. 또 답답하고 지루한 식물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날과 달리 구체적인 일과가 마련되어 있었다. 아내가 외출을 한 다음에 손자 원규놈의 편지를 차근차근 읽어볼 작정이었다. 어제는 화가 치밀고 흥분을 한 나머지 제대로 읽지를 못했던 것이다.
그는 화장실에서도, 식탁머리에 앉아서도 원규놈만을 생각했다. 놈은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공부에 열성을 보인 믿음직스러운 장손이었다. 건장한 체구와 번듯한 인물이 가문의 번창을 그대로 입증하는 것이었다. 내심으로 얼마나 든든하고 흡족했던가. 그런데 놈은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 태도가 돌변해 버렸다. 8개월 남짓한 시차(時差)로서는 손자놈을 경찰서에서 빼내와야 하는 돌변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와 대학이라는 차이점으로 놈의 급격한 태도 변화를 설명하고 납득할 방법밖에 없었다. 그러나 고등학교와 대학이라는 것이 아무리 하늘과 땅 차이가 난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로 손자놈의 행위를 이해하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했다 그는 꾸짖기도 했고 타이르기도 했지만 손자놈은 전혀 달라지지가 않았다. 오히려 날이 갈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손자놈이 던지고 있는 투망에 바로 자신도 걸려들어 있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하고 저지른 어리석음이었던 것이다.
“저 그럼 다녀오겠어요.”
큼지막한 가방을 든 아내가 말했다. 그는 무감각하게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아내는 헬스 클럽을 거쳐 서예 학원을 다녀오는 그녀의 일과를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아줌마 의원님 시간 맞춰 약 드시게 해야 돼요.”
“걱정 말고 다녀오세요.”
녹음 테이프를 틀어놓은 것 같은 대화였다. 그는 소리를 버럭 질러버리고 싶은 충동에 떨었다. 언제까지 이런 꼴로 살아 있어야 한단 말인가 하는 절망감이 일으키는 충동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순일곱이고, 그 나이가 되면 어떤 병이든 얻을 수 있다는 보편적 사실을 용납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주위의 50대가 부끄러워할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고 있었다. 풍을 맞기 전날에도 50객들을 누른 골프를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하릇밤 사이에 반신불수가 되다니… …. 1년 반이 되어가는데도, 그동안 의원직을 박탈당하고(손수 사퇴서를 쓰긴 했지만 그건 요식 행위였을 뿐이다), 회사의 실권을 거의 아들에게 넘기고 했으면서도 그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수긍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휠체어에 매달아놓은 조그만 종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의원님, 저 여기 있습니다.”
안성댁이 두 손을 앞치마에 닦으펴 허리를 굽혔다. 그저 종소리가 울렸다 하면 그녀는 민첩하게 휠체어 앞에 나타나 꼬박꼬박 ‘의원님’을 부르며 허리를 굽히곤 했다. 그러나 그는 안성댁의 그런 날렵한 몸놀림이나 깍듯한 예의 바름에 대해 별다른 호의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한테는 회사 과장급과 맞먹는 월급이 지급되고 있었다. 그런 월급이면 그 정도의 근무 충실은 누구든지 할 수 있는 것이라고 그는 간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나서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오기가 차올라 ‘의원님’이란 호칭을 쓰지 못하게 할까 어찔까를 망설인 적이 있었다. 그것 말고도 호칭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니 ‘회장님’이나 ‘사장님’보다는 ‘의원님’이 어느 모로 보나 나았던 것이다. 옛날에 대감을 한차례 해먹으면 자손 대대로 그 직함을 팔아먹고 살았는데, 피치 못할 병으로 자리를 물러났을 뿐인 자신이 ‘의원님’ 소리 듣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고, 당당한 권리기도 했던 것이다.
“어제 그, 그…….”
‘편지’라는 발음이 쉽게 되지 않자 말이 더듬거려졌다. 받침이 붙거나 혀를 움직여야 하는 말은 쉽게 하기가 어려웠다.
“의원님, 혹시 편지 말씀이신가요?”
안성댁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그래…….”
그는 묽은 웃음을 지으며 더디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안성댁이 장식장 서랍에서 편지를 꺼내와서 접힌 자리를 조심조심 폈다. 그리고 그의 무릎 위에 편지를 놓고 물러섰다. 그는 편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거리가 멀어 글씨를 알아볼 수 없는 편지지 위˙에 손자 원규놈의 얼굴이 떠올랐다. 또 입술에 비웃음을 물고 있는 모습이었다.. 놈이 사랑스러웠던 고등학교 적 모습을 떠올리려고 애썼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보기 싫은 대학생 때의 모습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안성댁이 편지 위에 안경을 조심스럽게 놓고 돌아섰다. 그는 오른손으로 천천히 안경을 집어 들었다. 편지를 자세히 읽어나가다 보면 감정이 어떻게 변하게 될지 모르지만 현재로선 담담한 심경이었다. 아마 어제 충격을 받을 만큼 받았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는 안경을 끼고 나서 편지를 집어 들었다. 검정색 볼펜 글씨가 또렷또렷하게 윤곽을 드러냈다. 번듯한 생김처럼 단정하게 쓴 글씨였다. 놈이 샛길로만 빠지지 않았어도……. 아쉽고 안타까운 새끼사랑의 정이 물큰 솟아올랐다. 그는 쓸쓸하게 웃었다. 자신의 아래로 쏟아지고 있는 사랑은 지극히 일방적인 것일 뿐이었다. 손자놈은 그런 맹목적인 사랑을 거부하고 있었다. 할아버지라는 존재를 서슴없이 야유하고 비판하는 편지를 보ㅙ온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ㅡ아버지가 보내준 할아버지의 자서전을 한 줄도 빼놓지 않고 열독했습니다. 할아버지께서 그렇게도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그렇게도 열렬한 애국자이시고 우국지사이시라는 사실을 가슴 떨리는 감격과 감동으로 읽었습니다. 할아버지의 그런 휘황찬란한 생애를 책으로 읽어 할아버지의 선거구에 널리 배포하여 할아버지의 빛을 더욱더 눈부시게 하고, 그 빛을 받아 아버지가 차기선거에 출마하자는 계획은 『삼국지』의 조조나 제갈공명도 탄복할 만한 작전입니다. 할아버지께서 내뿜으시는 빛은 그대로 국회로 통하는 튼튼한 다리가 될 것이 분명하며, 아버지는 훌륭하신 할아버지의 뒤를 잇는 자랑스러운 자식이 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편지의 서두였다. 고이얀 놈……. 그는 마땅찮은 소리를 이빨 사이에 물어 길게 늘였다. 손자놈의 버르장머리 없음도 마땅찮았지만 아들의 경솔함이 더 마땅찮았다. 손자놈의 비비꼬이고 시건방진 속셈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아들이 어쩌자고 자서전을 손자놈에게 보냈는지 그 의도를 알 수가 없었다. 아들이 그런 경솔한 짓만 하지 않았더라면 이렇게 신경을 소모하고 기분이 언짢을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자서전을 읽혀 손자놈의 마음을 다시 한 번 돌이켜보려 했던 것인가. 만일 그랬다면 아들은 손자놈보다 한 수가 모자라는 것이었다. 손자놈은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 있었다. 그 정도로 마음이 돌아설 놈 같았으면 아예 최전방에 끌려가 고생을 하고 있지도 않을 것이다 그것이 아니고, 자서전을 보내지 않으면 왠지 속이는 것 같은 켕기는 마음 때문이었을까 만일 그랬다면 아들은 손자보다 두수가 모자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야심을 품었다는 자가 그런 소심증을 가졌다는 것이 한 수 모자라는 것이었고, 손자놈의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공박이 가해져 오리라는 것을 계산하지 못한 것이 또 한 수가 모자라는 것이었다. 손자놈의 배짱을 아들이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얼핏 그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끄응, 그는 신음 같은 소리를 흘렸다
다시 편지로 눈길을 돌렸다.
할아버지께서 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된 동기가,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잔악한 식민 정책을 좌시할 수가 없어 교육 현장에 뛰어들어 아동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는 한편 그것이 조국 광복을 앞당기는 첩경임을 자각한 사명감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아 그 선견지명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으며, 그 애국심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독립운동을 한답시고 적지를 피해 만주니 상해니 중국 대륙을 배회한 사람들에 비하면 적지에서 수행한 할아버지의 투쟁은 얼마나 값지고 용맹스러운 것입니까. 못난 어른들의 불찰로 나라를 잃어버리고, 말까지 마음대로 못하게 된 가엾은 어린 아동들에게 민족정신을 일깨우며 조국 광복을 위해 분투하시는 할아버지의 모습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장하고 장하십니다.
그는 편지를 무릎 위에 놓으며 눈을 감았다. 손자놈의 비웃음 소리가 어디선가 음산하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농가인 그의 집안도 빈궁을 면할 길이 없었다. 산비탈 밭뙈기라도 조금 가지고 있는 그의 집안은 그래도 다른 집들에 비해 나은 편이었다. 그 밭농사에서 고구마나 옥수수 등속을 거둘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척식주식회사의 농토를 소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살림살이는 언제나 배가 고팠다. 그는 일곱 살 때 천자문을 노래부르듯이 달달 외워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입으로만 외울 수 있을 뿐이었지 글씨를 제대로 쓰지는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정식으로 서당 공부를 배운 것이 아니라 윗마을 서당을 제멋대로 드나들면서 귀동냥을 한 결과였다. 누구보다도 놀라고 감격한 것이 그의 부모네였던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아이고 내 새끼야, 귀동냥만 해가지고 어찌 그 어려운 천자문을 줄줄 외운단 말이냐.”
그의 어머니는 그를 얼싸안고 눈물마저 글썽였다.
“으응, 그냥 그렇게 된 거라구”
그가 눈을 깜박이며 한 대꾸였다.
돼지가 새끼를 몇 마리만 더 많이 낳아도 소문이 되곤 하는 마을에서 그가 신동(神童)으로 소문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흥분을 감추지 못한 그의 아버지는 다음 날로 깔깔하게 풀 먹인 두루마기를 차려입고 서당을 찾아갔다. 물론 아들의 손을 잡고서였다. 아버지에게 손을 잡혀 서당으로 가는 동안 그의 가슴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줄곧 뛰었다. 무뚝뚝하고 어렵기만 한 아버지가 처음으로 자기의 손을 감싸 잡아준 것이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고, 자기도 이제부터 당당하게 훈장님 앞에 앉아 글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다.
“경재야 앞으로 정말 글공부 열심히 하겠느냐?”
아버지가 걸음을 우뚝 멈춰 서며 물었다. 그는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버지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버지의 키가 무지무지하게 커보였다. 그는 똑똑하게 대답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자기를 내려다보고 있는 아버지의 눈이 똑똑하게 대답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예, 열심히 하겠어요.”
그는 아버지를 올려다본 채 힘차게 말했다. 그런데 고개를 너무 치켜들어서 그런지 목소리가 약간 막혔다.
“그래 열심히 해야 한다. 그 약속을 아부지하고 하지 말고 저 당산나무 앞에서 해라.”
아버지의 말을 듣고서야 그는 자신이 멈춰 서 있는 곳이 윗마을 초입의 당산나무 앞이라는 것을 알았다.
“돌을 하나 던지고, 앞으로 글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하고 소리내서 아뢰어라”
아버지가 그의 손을 놓으며 명령했다·그는 가슴에서부터 자지 끝까지 무언가가 찌르르 통하는 것을 느꼈다. 그건 무섬증 같기도 했고, 찬 물줄기가 뻗치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 종잡을 수 없는 것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몸을 똑바로 갖추게 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는 땅바닥을 유심히 살펴 동글동글하게 잘생긴 돌멩이 하나를 골라 들었다. 그리고 당산나무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당산나무는 평소에 오가며 보았던 당산나무가 아니었다. 아버지의 키가 갑자기 무지무지하게 커 보였듯이 당산나무도 평소보다 무지하게 굵고 커 보였다. 평소에도 당산나무 옆을 오가면서는 침을 뱉지도 않고 떠들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더욱 어깨가 움츠러들고 목이 기어들어가는 것 같았다. 울긋불긋한 천이 끼워진 굵은 새끼줄을 몸뚱이에 친친 감고 있는 당산나무를 향해 그는 돌멩이를 힘껏 그러나 빗나가지 않게 온 신경을 다 써 던졌다. 돌멩이는 당산나무 바로 아래, 돌무더기가 수북이 쌓인 곳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깨를 부리며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신령님, 앞으로 글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는 가슴 앞에 두 손바닥을 모아 머리를 깊이 숙이며 한달음에 말했다. 어머니나 동네 아주머니들이 하는 몸짓을 그는 그대로 흉내 내고 있었다.
“그래, 아주 잘했다”
그는 얼른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버지가 보일듯 말 듯 고개를 끄덕이며 웃고 있었다. 파아란 하늘 속에서 웃고 있는 아버지의 얼굴은 너무나도 잘생겨 보였다. 그런 아버지에게 안기고 싶다고 생각하며 그는 왈칵 아버지 쪽으로 달렸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자신의 그런 마음을 안 것일까. 몸이 붕 떠오르며 자신이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었던 것이다
“경재야, 너는 신령님 앞에 약속을 했다. 니가 그 약속을 잘 지키면 신령님이 너를 도우실 것이고, 니가 약속을 못 지키면 신령님이 너한테 벌을 내리실 것이다. 약속을 잘 지킬 수 있겠냐?”
아버지는 웃음이 가신, 약간 화가 난 것 같은 얼굴로 말하고 있었다.
“예, 잘 지키겠어요.”
그는 신령님한테 말했을 때와 똑같은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래, 니가 내 속에서 나온 신동이 틀림없다면 열심히 글공부해 큰 인물 한번 되어봐라.”
아버지는 그를 땅으로 내려놓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는 내색을 하지 않았지만 아버지가 하는 말씀을 다 알아들었다.
서당을 다니기 시작하면서 그는 진짜 신동으로 소문이 났다. 그의 특출한 기억력은 훈장이 한차례도 회초리를 들 필요가 없게 했다.
1년 동안 서당 공부를 마친 그는 소학교에 들어갔다. 그는 소학교에서도 계속 1등을 차지했다. 그는 공부만 잘한 것이 아니었다. 싸움도 곧잘 했다. 그는 성질이 칼칼해 누구와 싸움이 벌어지건 그냥 맞고 물러서지를 않았다. 주먹으로 싸우다가 기운이 달리게 되면 선뜻 돌멩이를 집어 드는 악착스러운 데가 있었다. 또래의 아이들이 무슨 놀이가 있을 때마다 그를 대장으로 내세운 것은 공부를 잘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그런 면이 또 동네 어른들의 부러움을 샀다.
“아 참, 아깝다. 정말이지 아깝다. 저것이 조센징만 아니었으면·…….”
양조장을 하는 이시하라가 게다짝으로 땅바닥을 울려대며 혀를 찰 정도였다. 이시하라는 그와 동급생인 둘째 딸 말고도 딸이 셋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소학교를 졸업하게 된 그는 더 이상 상급 학교에 진학할 수가 없었다. 소작을 부치고 있는 가정 형편으로 소학교까지 마친 것만도 무리를 한 것이었다.
“니 재주야 읍내에 소문난 재주니까 몇 년 독학을 하며 실력을 기르고 있으면 읍사무소 같은 데서 자연히 부르지 않겠냐.”
아버지의 힘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내심으로는 자신이 읍사무소 서기가 되기를 얼마나 간절히 바라고 있을 것인가를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당산나무 앞에서 ‘큰 인물’ 되기를 바란 것을 그는 잊은 적이 없었다. 가난한 농부인 아버지의 입장에서 읍사무소 서기는 ‘큰 인물’일지 몰랐다. 그러나 그는 읍사무소 서기 정도는 눈에 차지 않았다. 최소한 소학교 훈도 정도는 되어야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분명 소학교 훈보도 ‘큰 인물’이라고 생각지 않았다. 그런데 소학교 훈도가 될 수 있는 길마저 캄캄하게 막혀 있었다.
그는 가을날 어느 일요일 아침나절에 정 부자 집을 찾아갔다. 그 집은 동급생 정분임이네 집이기도 했다.
“아니, 니가 우리 집에 어쩐 일이지?”
분임이는 별로 예쁘지도 않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며 물었다.
“니네 아부지 만나러 왔다.”
그가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우리 아부지? 니네 아부지 심부름 온거니?”
분임이는 약간 새침해진 태도로 따지듯이 물었다.
“너 같은 여잔 알 필요 없는 일이야. 니네 아부지한테 손님 왔다고 빨랑 전하기나 해.”
그는 눈을 치뜨며 화가 난 것처럼 말했다.
“피이, 지가 무슨 손님이야.”
분임이는 입을 삐쭉거리면서도 금세 기가 꺾여 돌아섰다.
그가 지은 표정은 학교에서 급장으로서 짓는 표정이었고, 산술을 잘 못하는 분임이는 시험을 치를 때마다 슬쩍슬쩍 그의 덕을 보는 처지였던 것이다.
그는 분임이네 아버지 정 부자 앞에 넙죽 큰절부터 했다.
그리고 찾아온 용건을 침착하게 말했다.
“허, 그놈 참 소문에 듣던 대로 똑똑하구나. 헌데 똑똑한 것은 똑똑한 것이고, 날 찾아올 수 있는 그 배짱은 또 어디서 생긴 것인가!”
정 부자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얼굴로 감탄하고 있었다.
그 똑똑함에 그 배짱, 저것이 잘 풀리면 큰 인물이 될 것이고, 잘못 풀리면……. 정 부자는 단정하게 무릎을 끓고 앉은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학비를 빌려줄 수 없다면 어쩔 텐고?”
어떤 대답이 나오나 보자 하는 짓궂은 생각으로 정 부자는 묻고 있었다.
“그건 어르신의 마음이니 제가 어찌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어르신께서는 덕을 갖추지 못한 부자라는 것을 스스로 나타냈기 때문에 아무한테도 존경을 받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허……!”
정 부자는 입을 헤 벌린 채 기가 막힌 듯한 표정으로 말을 잃고 있었다. 어린것이 군자나 해야 할 말을 한다 싶었고, 그 말을 듣고 보니 꼼짝없이 함정에 빠진 기분이었다. 그 말재주가 더없이 영특한 것 같기도 했고, 어떻게 생각하면 나이에 걸맞지 않게 교활한 것 같기도 했다. 정 부자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그를 찬찬히 뜯어보고 있었다.
“네가 날 찾아온 걸 네 아버지도 알고 있느냐?”
정 부자는 ‘알고 있지?’ 하고 단정을 하려다가 녀석의 당돌성이 얼핏 마음에 걸려 말을 바꾸었다.
“제 아부지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아부지께서는 제 학비를 못 대는 것 때문에 괴로워하시는데 더 괴로움을 끼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영특함이란 나이와 상관없이 어른의 소견을 갖추는 것이라는 옛말을 정 부자는 실감하고 있었다.
“왜 하필이면 날 찾아왔는고?”
“어르신께서 제일 부자이신 데다가 저와 분임이는 한 반이라서…….”
“녀석 참…….”
그는 학자금을 빌리는 데 성공했다. 무이자로 빌리되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해서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그 소문이 펴지자 정부자는 금방 마음씨 좋은 지주요 덕망 있는 부자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그건 정 부자가 예상하지 않았던 소득이고 칭송이었다.
“너야말로 대일본제국이 필요로 하는 인재다. 네가 천황폐하 앞에 충성을 맹서하고 일본인으로 환골탈태하면 네 앞에는 평생토록 서광이 비칠 것이다. 맹서할 수 있겠느냐!”
사범학교에 합격한 그에게 만년필을 선물로 내놓은 교장이 엄숙하고도 근엄하게 한 말이었다. 그는 부동자세를 취하며 ‘하이’라고 크게 대답했다. 그는 당산나무 앞에서와는 다른 기분으로 시뻘건 불덩어리를 향하여 충성을 맹세했다. 당산나무 앞에서 두 손을 모았을 때는 막연한 두려움과 중압감을 느꼈는데 일장기 앞에서는 분명한 사명감과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그러나 두 경우가 다 경건하고 엄숙한 예식이라는 사실은 그의 가슴에 동일한 의미로 화인(火印)되었다.
“애비가 애비 노릇을 제대로 못하면서 무슨 할 말이 있겠냐. 부디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
역에까지 전송을 나온 아버지는 먼 하늘에 눈길을 보낸 채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나 그는 파아란 하늘 속에서 웃고 있던 당산나무 앞에서의 아버지를 잊지 않고 있었다. 아버지는 당신의 힘으로 학비를 댈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가슴에 품은 소망은 그때보다 훨씬 크고 절실하리라고 그는 짐작하고 있었다.
그는 자취 생활을 하면서 오로지 공부에만 몰두했다. 빚으로 쌓여가는 학자금으로 지탱하는 학업인데 촌각도 다른 일에 허비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상적이거나 감상적인 생각을 스스로에게 용납하지 않았고, 퇴폐적이거나 쾌락적인 생활에는 아예 눈을 돌리지도 않았다. 그는 현실을 직시하고자 했고 중요시했으며, 그 현실을 토대로 한 확실한 미래를 향해서 계단을 쌓아 올리고자 했다. 그가 인식하는 거대한 현실은 일본이었고, 확고 부동한 미래 또한 일본이었다. 그에게 일본은 거부할 수도, 극복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그러므로 타협하고 동화하는 길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곤 했다.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불덩어리인 일장기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신의 영육이 그 속에 녹아드는 기분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그는 일본의 식민 통치와 민족의 장래 같은 것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은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일본의 거대한 존재만 점점 확대되고 그 위압감 앞에서 상대적으로 왜소해지는 열등감과 절망감에 빠질 뿐이었다. 그는 일회성일 뿐인 인생을 무모하게 소모하거나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런 판단을 절대로 입 밖에 낸 일이 없었다. 그러나 그 궤도를 따라 생활하다 보니 그는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아무런 외로움도 불편도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에 방해가 되지 않아 좋았다.
3학년 겨울 방학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그는 정 부자에게 인사를 갔다.
“우리 분임이가 어떤가?”
간소한 주안상을 놓고 마주 앉은 정 부자가 불쑥 꺼낸 말이었다.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예상하고 있었던 일도 아니었다. 다만 정 부자의 제의가 있을 수도 있는 일이라는 정도로 받아들였다.
“본인의 뜻이 좋다면 저도 좋습니다.”
그는 담담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정 부자는, 계집이 소학교나왔으편 됐지 더 배울 필요 없다는 완고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분임이는 그야말로 시집갈 날만 기다리고 있는 신세였다.
“자네 집안이 가난하달 뿐 뼈대야 양반 뼈대가 아닌가 이 겨울에 일을 해치우세. 모든 건 내 다 알아서 할 테니까.”
그래서 그는 정 부자네 사위가 되었다. 학자금 빚은 자연히 없어지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분임이가 논 열 마지기를 달고 오는 바람에 소작농 집안이 갑자기 자작농으로 바뀌게 되었다. 그것은 실로 어둠에서 빛으로의 전환이었다. 그런 변화가 그에게 기쁨일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감정적 갈등을 아내인 분임이나 식구 그 누구에게도 표현하지 않았다. 일단 현실로 받아들였다. 그의 학업 생활은 전과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장인의 의견을 묵살하고 자취 생활을 계속했으며 공부에만 전념했다 그는 결혼이나 아내라는 것을 일상생활의 일부로 간주했다. 그러므로 결혼이나 아내는 필요하면서도 편안한 것이어야지 부담스럽거나 불편한 것이어서는 안 되었다.
그는 전교 수석으로 사범학교를 졸업했다. 부모나 장인은 고향에서 근무하기를 원했지만 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읍에 있는 학교와 시에 있는 학교가 똑같은 소학교일 수가 없었다. 그는 촌로(村老)들의 감상주의를 따를 수는 없었다. 자신의 인생은 완성이 아니라 이제 시작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는 아내를 불러올려 비로소 신혼 생활을 꾸림과 동시에 꿈이었던 훈도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훈도 생활을 학창 시절에 공부에 몰두하듯 열성을 바쳐 해나갔다. 그러나 6개월이 지나고, 1년을 넘기면서 그는 구체적으로 회의하기 시작했다. 나이 든 동료들의 무기력하고 기계적인 모습에서 내일의 자신을 보았고, 언제까지나 코흘리개들이 대상일 뿐인 반복적인 가르침이 학문일 수도 없었다. 남다른 기회와 혜택을 얻어 최고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교장이었다. 그것은 대체로 삼사십 년의 세월을 바친 다음의 결과였다. 남아의 일생을 다 바쳐 소학교 교장 자리에 오르는 것, 그것이 과연 삶의 최상의 의미가 될 수 있는가. 그것이 과연 삶의 만족할 만한 결과일 수 있는가. 그의 내부에서는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의 젊은 피는 보다 크고 넓은 세계, 진취적이고 생동적인 삶을 욕구하고 있었다. 같은 가르침의 생활이라 하더라도 소학교 위에 중학교, 중학교 위에 전문학교나 대학이 있었던 것이다. 대학 진학을 심각하게 고려하기 시작했다. 사범학교에 진학하고자 했을 때처럼 그의 욕구를 가로막는 것은 역시 경제 문제였다. 또 ‘처가 덕’을 피할 도리가 없는 현실에 그는 곤혹을 느꼈다. 그러나, 주먹으로 싸우다가 안 되면 돌을 집어 들었듯 그는 곤혹스러움을 물리칠 명분을 금방 마련해 냈다. 사위도 엄연히 자식일 뿐만 아니라 딸의 행불행은 사위의 성공 여부로 좌우되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그런데, 가토가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한 것이 바로 그 즈음이었다. 그는 처음에 가토의 행위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우선 가토한테서는 군인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가토는 체구가 큰 것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성격이 호탕하거나 적극적이지도 않았다. 1년 동안 겪어본 바로는 냉정하고 치밀한 성격이었고, 남에게 지는 것을 싫어하는 점이 눈에 띄는 편이었다. 그가 맡은 반이 청소에서나 운동 시합에서나 언제나 1등 아니면 상위권에 들어 있는 것은 바로 그의 그런 점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점은 여성적 경쟁 심리지 군인적인 요소는 될 수 없다고 그는 판단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생명의 위협이 전혀 없는 훈도 생활에서 왜 생명의 위협을 당해야 하는 길로 스스로 걸어가느냐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래도 궁금증을 풀 수가 없어 개인적인 송별 술자리를 빙자해서 가토와 마주 앉았다. 가토가 어느 정도 취기가 돌기를 기다려 그는 지나치는 말처럼 지윈 이유를 물었다.
“글세…… 조선인인 자네로서는 소학교 훈도가 큰 출세일지 모르지만, 아니, 이 말은 자네를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현실적 여건을 놓고 하는 말이니 기분 나쁘게 듣진 말게. 난 말이지, 난 여기서 만족할 수가 없네. 더 큰 출세, 평생 백묵 가루를 마시지 않아도 되는 더 높은 자리를 향해서 가는 거네.”
“그런데 왜 하필 군인인가?”
가토는 취한 눈으로 그를 빤히 건너다보다가 픽 웃음을 흘렸다.
“역시 자넨 조선인이야. 남아가 출세의 대망을 가졌으면 그 대망을 성취시키기 위해 천하 대세를 판가름할 줄 아는 눈을 가져야 하는 법이지. 지금 대일본제국의 힘은 7월의 태양처럼 세계를 향하여 뻗치고 있네. 이미 중국 대륙을 포함한 동남아시아가 일본의 햇살 아래 있잖은가. 일본의 빛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전 세계를 비추게 될 것이네. 그건 역사의 필연이고, 우주의 섭리야. 그러므로 그 어떤 인간 집단의 힘으로도 막을 수가 없네. 그런데 그 성스러운 과업을 누가 수행하고 있는가. 그 주역이 누군가 말야. 바로 천황폐하의 군대가 아닌가. 남아의 대망을 성취시키려면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그는 남에게 지기 싫어하는 가토의 성미가 결코 여성적 경쟁 심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다. 그리고 가토의 넓은 시야와 적극적인 결단력에 놀라움과 함께 열등감을 느꼈다.
“자네의 말이 옳은 것 같군. 그러나 말일세, 내 말 기분 나쁘게 듣진 말게. 내가 보기엔 자넨 기질적으로 군인에 어울리지가 않는 것 같네.”
그의 말에 가토는 한참을 흐흐거리고 웃었다.
“자네 말 무슨 뜻인지 알겠네. 허나 자넨 진정으로 딱하구만. 군대가 전부 용장(勇將)으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말일세. 지장(知將)이 없으면 용장이 나오지 않는 법이네. 지장이 두뇌라면 용장은 팔다리와 같은 것일세. 지금 일본 군대에서는 많은 지장을 필요로 하고 있고, 우리 같은 사범학고 훈도 출신들을 특히 환영하고 있네.”
가토의 말로 그가 품었던 두 번째의 의문까지 풀렸다. 지장이 되는 경우 생명의 위협은 그만큼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었다.
“자네도 지원하지 그래!”
정종잔을 불쑥 내밀면서 가토가 느닷없이 던진 말이었다.
“엉?”
그는 소스라치며 상체를 곧추세웠다. 우리 같은 사범학교 훈도 출신들을 특히 환영하고 있네. 하는 말을 곱씹고 있던 참이었던 것이다.
“뭐 그리 놀랄 건 없네. 기왕 일본제국의 국민이 되기로 작정했다면 큰 물줄기를 타보라는 뜻이니까. 자네는 마음속에 딴생각을 품고 있는지 모르지만, 아까 말했다시피 일본의 힘이 세계로 뻗치고 있는데 조선의 독립이란 요원한 얘길세. 미안한 얘기지만, 조선인의 독립 투쟁이란 참새가 독수리에게 덤비는 격이고, 토끼가 호랑이에게 덤비는 격일세. 이런 상황에서 현명한 생존이 무엇인지는 내가 말하지 않더라도 두뇌 명석한 자네가 더 잘 알겠지.”
―책장을 넘길수록 가열되어 가는 할아버지의 애국심으로 제 몸까지 뜨거워지려고 합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자꾸만 우러러보여 고개를 뒤로 젖히다 보니 제 목이 부러질 지경입니다. 그러나 위대하시고 거룩하신 할아버지를 우러러보다가 저 같은 놈 목 좀 부러지는 것쯤 무슨 대수이겠습니까. 저같이 못난 자손으로선 그것이 바로 끝없는 영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하 할아버지께서는 또 한 번 애국적인 용단을 내리셨더군요. 날이 갈수록 일본의 식민정책은 잔악하고 포악해지는데 아동들만을 상대로 소극적이고 미온적인 광복운동을 할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광복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자각과 함께 할아버지께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하셨습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이 만고의 진리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 할아버지께서는 바로 호랑이 굴로 들어가는 육탄적 용맹성을 발휘하신 것이라니, 그 지혜, 그 용맹에 감읍할 따름입니다. 육사를 거쳐 관동군에 배속된 할아버지께서는 그때까지 흉중에 깊이 감추고 계시던 광복 운동을 마침내 본격적이고도 적극적으로 전개하셨습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만주 일대에 산재해 있는 독립군을 암암리에 지원하고, 위기에 처한 독립군에게 퇴로를 잡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불행하게 잡혀온 독립군을 도주시킨 횟수만도 부지기수였다니, 자신의 생명을 내걸고 감행한 할아버지의 그 용맹, 하늘도 감동하여 떨 수밖에 없습니다. 그 악명 높은 관동군에 배속된 조선놈들은 모두 독립군을 잡는 사냥개 노릇이나 하고, 독립군의 등에 총질이나 일삼은 개새끼들인 줄만 알았는데 그 속에 바로 할아버지 같은 애국 투사가 암약하고 있었을 줄이야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할아버지야말로 독립군의 아버지셨으며, 조국 광복의 아버지셨으며, 한민족의 아버지셨습니다. 아니, 이 정도의 말로 어찌 할아버지께서 세우신 혁혁한 공훈을 다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독립유공훈장을 열 개, 아니 백 개를 목에 걸어 드린들 그 공훈에 값하겠습니까. 그런데 할아버지께서는 독립유공훈장 같은 것은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습니다. 밀정을 한 자들이 훈장을 받으려 도모하고, 공공연하게 친일행위를 한 자들이 국가 포상을 받으려고 설치는 세태에서 할아버지의 그런 초연함은 만대의 귀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할아버님, 너무 감복하여 큰절을 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서 절 받으십시오.
이런 발칙한 놈……. 자제력이 흔들리면서 그의 가슴이 뜨거워져왔다. 글씨들이 겹쳐져 보이고 팔이 무거워 그는 편지를 무릎 위에 떨구었다 어제 읽지 못하고 지나쳤던 대목들이 그의 감정을 자극하고 있었디. ……독립군의 등에 총질이나 일삼은 개새끼들……. 그는 눈을 감았다. 왼쪽 부위에 경련이 일어나는 입술 사이로 신음이 흘러나왔디. 아슴한 의식의 저 편으로부터 한 줄기 회오리바람이 몰아쳐오고 있었다. 맴돌이질하며 곤두서서 달려오고 있는 그 상봉에 얼굴 하나가 실려 있었다. 코에서 흘러내린 한 줄기 피를 입술에 문 채 가소로운 듯, 불쌍하다는 듯 웃고 있는 얼굴.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북쪽으로 구릉을 등진 그 마을은 쉼 없이 휘몰아치고 있는 눈 속에 파묻혀 있었다. 만주벌판은 눈으로 덮이기 시작하면서 더 광막하게 넓어지는 것이었다. 그건 사물의 윤곽을 완전히 덮어버린 흰색이 부리는 조화 때문이었다. 전후좌우의 지평선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그 숨 막히도록 넓고 넓은 땅에 온통 눈이 덮여버리면 방향 감각을 상실하는 것은 물론 정신까지 혼미해지는 것이었다. 거기다가 눈보라까지 휘몰아치게 되면 만주벌판은 그대로 사지(死地)였다. 겨울의 시작과 함께 바람이 거칠게 몰아치는 만주벌판에는 눈발도 언제나 거칠게 난무하게 마련이었다. 눈보라가 치기 시작하면 시야가 차단되기 때문에 길을 잃고 끝없는 눈 속을 헤매다가 변을 당하기가 십상이었다. 그래서 만주벌판의 사람들은 겨울이면 결코 먼 길을 떠나지 않았다. 그들이 며칠째 계속되고 있는 눈보라를 무릅쓰고 작전을 나선 것은 그런 상식을 몰라서가 아니었다. 그만큼 중대한 정보를 입수했기 때문이었다. 소대 기마 병력을 이끌고 있는 그가 찾아내야 하는 것은 독립군 거물이었다. 그자는 소만 국경을 넘어 중경으로 가고 있는데, 계속된 추격을 교묘하게 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자가 한 마을에 잠입 했다는 정보가 들어온 것이다.
“이 소위, 절호의 기회를 주겠소. 그놈은 독 안에 든 쥐니까 생포만이 남았소. 반드시 성공하도록 하시오. 성공하면 1계급 특진이고, 실패하면 1계급 강등이오.”
히다카 대장은 처진 입 꼬리에 챠가운 웃음을 물었다.
눈보라가 치는 속에서 그는 마을을 포위시켰다. 60여 호 남짓한 농가들이 서로 의지하듯 오글오글 모여 있어 포위하기가 손쉬웠다. 포위 완료 신호를 확인한 그는 권총을 발사하며 마을 정면으로 말을 몰았다. 그의 발사에 따라 포위를 하고 있는 부하들이 일제히 공포를 쏘아댔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속에 난사되는 총성은 싸늘하게 퍼져나갔다.
마을 사람들은 겁 질린 얼굴로 다투어 튀어나왔다.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밖으로 나와라! 애새끼들도 다 데리고 나와!”
중사가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어지럽게 말을 몰아대고 있었다. 그는 권총의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채 남자들만을 골라 날카로운 눈길을 번뜩이고 있었다. 중국인·조선인·일본인, 그들이 한 종류의 옷을 입고 있는 경우 정확하게 구별해 내기란 용이한 일이 아니었다. 중국인은 비교적 몸집이 크며 피부가 진득거리는 느낌으로 기름지고, 일본인은 비교적 체구가 작으며 희멀건한 피부에 헤식은 느낌이 들고, 조선인은 체구가 그 중간쯤이며 피부가 건조해서 야물거나 단단한 느낌이고…… 그러나 그런 식별법은 어디까지나 ‘비교적’이거나 ‘느낌’일 뿐으로 막연하고 믿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더구나 하나같이 중국 옷을 입고 있는 남자들을 놓고 그 식별법을 대입하다 보면 혼란만 가중될 뿐이었다. 경험을 토대로 한 직감으로 구별하는 것이 적중률이 훨씬 높았다.
“모두 꼼짝 말고 서 있어! 수상하게 움직이면 쓴다!”
중사는 공포를 쏘아가며 계속 소리를 질러댔다.
작전을 지시한 대로 부하들은 포위망을 차츰차츰 조여가고 있었다. 그는 남자들을 거의 다 살펴나갔지만 그런 인물로 짚이는 자가 없었다. 하나같이 겁먹고 기죽고 주눅 든 무지렁이 농투성이 얼굴들이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실망하지 않았다. 그의 직감으로 구별해 낸 조선인이 20명 남짓이었고, 그런 활동을 전개하는 정도의 인물이라면 위장을 위해서도 정말 중국인이나 일본인 같은 생김이거나 무지렁이 같은 인상일 수도 있었다. 이쪽에서 밀정이나 첩자로 쓰고 있는 자들의 대개가 그랬고, 독립군을 체포하고 보면 그런 경우가 적잖았다.
“다 나왔습니다!”
중사가 형식적인 거수 경례를 붙이며 보고했다.
“재차 확인.”
그가 명령했다
중사는 부하 서너 명을 차출하여 수색을 지시했다. 눈보라는 멈추지 않고 있었다. 풍속의 차이에 따라 간헐적으로 그 정도가 심해졌다 약해졌다 할 뿐이었다. 만주의 눈은 하늘에서 내리는 것도 대단했지만 적설이 강풍에 휩쓸려 날리는 것 또한 대단했다. 그러니까 만주에는 두 가지 눈이 있는 셈이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과 땅에서 솟아오르는 눈이 그것이었다. 내리는 눈과 솟아오른 눈이 뒤섞이는 그 끝없는 눈안개 밭 속에 갇히면 인간은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았다.
눈보라 속에서 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병이 깊은 듯한 골골거리는 기침 소리도 바람 속에 흩어지고 있었다. 그는 얼핏 얼굴을 모르고 있는 아들을 생각했다. 사관학교를 떠나오기 직전에 아내가 아들을 낳았다는 편지를 받았었다. 그리고 아버지를 생각했다. “니 큰 뜻은 좋다만 문사가 느닷없이 무사가 되다니…….” 아버지가 생략해 버린 말이 이상하게도 긴 여운으로 가슴에 오래 남아 있었다.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도 없습니다.”
“좋아!”
그는 마음을 가다듬으며 안장을 고쳐 앉았다. 말이 코를 불며 몸을 푸드득 떠는 느낌이 그의 내장을 타고 올랐다. 그는 왼쪽 고삐를 조정해서 말을 사람들 쪽으로 천천히 몰아갔다 눈보라 속에 웅크리고 선 사람들은 모두 5백 명 가까이 되었다 저 속에 소만 국경을 넘어 중경으로 가는 거물이 있다……. 소련을 넘나드는 놈이라면 공산주의자가 틀림없고, 공산주의에 물들어 독립 운동을 하는 놈이라면 보통 독종은 아닐 것이었다. 그는 어금니를 맞물며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다들 똑똑히 들어라. 너희들은 우리가 왜 여기 왔는지 잘 알 것이다. 너희들 중에 대일뵨제국에 대항해서 독립을 하겠다는 조센징이 숨어 있다. 우리는 그자를 잡으러 왔다 그자를 잡는 데 너희들이 협조만 잘하면 너희들의 생명과 재산은 절대로 피해를 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협조를 하지 않는다면 너희들의 생명과 재산은 모두 불더미 속에 처넣어질 것이다. 내 말을 명심하도록!”
말을 마친 그는 중사에게 눈짓을 했다. 중사는 괴성처럼 ‘하이’를 외치며 앞으로 나섰다.
“모두 눈 감앗! 눈 뜨는 자는 당장 쏴 죽인다. 다 눈 감았으니 아무도 보지 못한다. 하나 둘, 셋을 세는 동안 손가락질만 하면 된다. 눈 뜨는 자는 쏴버린다!”
중사의 탄력 강한 목소리는 잠시 약해진 눈보라 속으로 살벌하게 퍼져나갔다. 어느 여인네는 아이를 자기의 품 쪽으로 돌려세워 꼭 안고 있었고, 어떤 여자는 예닐곱 살 먹은 아이의 눈을 아예 광목 수건으로 가려서 동여맸다.
“하나아아, 두우울, 세에'궤옛!”
그러나 손가락질을 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는 마상에서 차가운 눈길로 사람들을 내려다본 채 잔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모두 눈 떠! 너희들 정말 불구덩이에 처박혀 타 죽고 싶어!”
중사가 벌겋게 흥분해서 소리 지르고 있었다. 그로서는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다. 중국인과 조선인은 일본에 대해서 동지적 입장에 있었다. 똑같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로서 당연한 결과였고, 그런 결속이 만주라는 광활한 지역적 특성과 어우러져 독립군의 게릴라화를 가능하게 했다. 그래서 관동군은 그 결속을 깨려고 온갖 수단을 다 동원했고, 그것이 불가능해지자 독립군의 거점이 되고 있거나 협조하는 기미가 보이는 마을에 대해서는 초토화 작전을 개시하게 된 것이다. 주민과 가옥이 송두리째 불타버려 흔적도 없이 사라진 마을이 부지기수였다. 그런데도 독립군의 게릴라화는 근절되지 않았다. 그건 토착민의 협조가 끈덕지게 계속되고 있다는 증거 였다.
그는 말에서 뛰어내렸다.
“여기 조센징들은 전부 손들엇! 한번 보면 금방 아니까 속이려 들지 말엇. 속이면 그대로 총살이야!”
그는 표독스럽게 소리쳤다.
사람들이 엉거주춤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다. 대충 쉰 명 남짓이었다
“팔을 더 번쩍 치켜들어!”
중사가 빽 고함을 지르며 공포를 쏴질렀다. 그는 재빨리 여자들쪽을 살피고 있었다. 두 여자가 어린아이를 업고 있었다.
그는 중사를 불러 한참 동안 귓속말을 했다. 건조하고 매운 바람이 쌩쌩 몰아치는 속에서 사람들은 모두 돌덩이처럼 굳어져 있었다.
중사가 부하 셋을 불러 무엇인가를 지시했다. 조선인들은 그때까지도 한쪽 팔을 들어 올리고 있었는데, 거의가 반쯤씩 처져 내려 있었다. 어디선가 곧 숨이 넘어가는 것 같은 강아지의 비명이 날카롭게 찢어지고 있었다.
중사한테 무언가 지시를 받고 물러갔던 세 병사는 강아지 한 마리를 뒷다리를 잡아 거꾸로 치켜들고 나타났다. 강아지는 마구 몸부림을 치고 있으면서도 소리는 내지 않았다. 강아지의 입은 군용 노끈으로 친친 결박되어 있었던 것이다. 중사가 그 강아지를 받아 들었다.
“다들 똑똑히 들어라. 너희들이 협조를 못하겠다면 협조를 하게 만들어주겠다 다들 똑똑히 봐!”
증사는 뿌드득 이빨을 갈아붙였다. 눈에 살기가 돌았다. 그는 강아지를 거꾸로 든 채로 아름드리 나무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잘들 봐뒤!”
나무 앞에 다다른 중사는 사람들을 향해 으르렁대는 것처럼 소리쳤다. 그리고 강아지 뒷다리를 두 손으로 잡는가 싶자 높이 치켜들었다. 다음 순간, 강아지의 처절한 비명이 눈보라 치는 허공을 갈가리 찢었다. 중사는 높이 치켜들었던 강아지로 아름드리 나무를 후려친 것이었다. 아무리 입을 결박당했다고는 하지만 치명상을 입는 순간 강아지의 입에서는 그리도 처절한 비명이 터져 나온 것이었다. 중사는 강아지를 높이 치켜들었다 강아지는 머리통이 으깨지고 눈알이 튕겨져 나온 채 뚝뚝뚝뚝 피를 떨구고 있었다. 눈 위에 새빨간 꽃잎들
이 문득문득 피어나고 있었다.
“자아, 실시!”
중사가 강아지를 내던지며 소리쳤다. 대기하고 있던 네 명의 병사가 날쌔게 사람들 사이로 뛰어들었다.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허둥거리며 병사들을 피하려 했다. 병사들의 표적은 아이를 업은 두 명의 조선인 여자였다. 병사들은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한 여자씩을 낚아챘다.
“안 돼요, 우리 애기 안 돼요오!”
두 여자의 절규가 거의 동시에 터져 올랐다. 조선말인 그 절규는 눈보라 속으로 길게 퍼졌다. 사태를 깨달은 사람들 사이에서 웅성거림이 일어났고, 공포에 떠는 단음들이 뒤섞였다.
“안 돼, 안 돼!”
“멋들 허는 짓거리여!”
두 남자가 조선말로 외치며 병사들을 향해 내달았다. 그러나 두 남자는 사정없이 내리치는 개머리판을 가슴에 맞고 짧은 비명을 토하며 눈 위에 나둥그러졌다
“우리 애기, 우리 애기, 안 돼, 안 돼애애!”
“내 새끼, 내 새끼, 안 되야 내 새끼!”
병사들에게 이미 아이들을 빼앗겨버린 두 여자는 팔딱팔딱 뛰는 몸부림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두 병사에게 안긴 아이들은 팔을 질정 없이 내두르며 울어대고 있었다.
“자아 준비잇!”
중사가 목을 뽑아 올리며 소리쳤다. 두 병사가 각기 안고 있던 아이들을 거침없이 발목을 잡아 거꾸로 들었다. 두 여자의 절규와 몸부림이 뚝 멎었다. 사람들도 일제히 굳어졌다. 거꾸로 들린 두 아이의 자지러지는 듯한 울음 소리만 눈보라 속에 선명하게 울려퍼졌다.
“자아, 실시, 하나!”
증사가 소리쳤고, 두 아이의 몸체가 눈보라 날리는 허공에 반원을 그리며 솟아올랐다.
“안 돼!”
“날 죽여라아!”
두 여자가 절규하며 앞으로 내달았다. 바로 그때였다.
“바로 나다!”
한 남자가 소리치며 눈밭 속으로 몸을 날리고 있었다.
“중지! 저놈이닷!”
그때까지 상황을 지켜보고만 있던 그가 발악적으로 소리쳤다. 타앙— 총성이 울렸다. 그것이 신호 역할을 한 듯 총성이 잇따라 울리기 시작했다.
“발사 중지, 중지!”
도망치고 있던 남자의 모습은 벌써 눈보라 속에 희끗거렸고,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엉뚱하게도 조선말이었다.
총성은 더 가열되고 있었다.
“발사 중지! 사격 중지!”
눈을 부릅뜬 그는 목이 찢어지라고 외쳐댔다 그러나 도망자를 뒤쫓으며 총을 쏘아대고 있는 병사들은 그의 명령을 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도 부하들이 몰려가고 있는 쪽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사격 중지! 중지!”
그는 달리면서도 외침을 포기하지 않았고, 어떤 개자식이 총질을 시작했어, 딱 총살감이다 치솟는 분노 때문에 숨결이 더 가빠지고 있었다.
그가 열서너 명째의 부하를 추월해서 달리고 있을 때 약속이나 한 것처럼 총성이 뚝 멎었다. 그는 순간 가슴이 쿵 내려앉는 소리를 들었다. 총에 맞았구나! 그의 뇌리를 불길하게 친 생각이었다.
도망자는 눈 위에 쓰러져 있었다. 눈에는 벌써 피가 낭자하게 번져 있었다.
“비켜, 요런 바보 같은 새끼들아. 누가 총을 쏘랬어, 누가!”
그는 닥치는 대로 부하들을 걷어차며 도망자 앞으로 나섰다. 도망자는 얼굴을 모로 하고 엎어져 있었다. 등의 두 군데 총상 자리에서는 호흡의 주기에 따라 피가 불컥불컥 솟았다. 치명상이었다. 그러나 혹시나 해서 그는 도망자를 거칠게 뒤집었다. 역시 관통상이었다. 몇 분을 살아 있기가 어려울 것이었다. 그는 도망자의 얼굴을 쏘아보았다. 거무튀튀한 피부에 수염이 더부룩한 평범한 얼굴이었다. 도망자의 감겼던 눈이 떠졌다. 도망자는 두어 번 눈을 껌벅거렸다. 초점이 고정되는 것 같으면서 눈에 생기가 돌았다. 그 순간 도망자의 얼굴은 신기하리만큼 딴 얼굴로 변했다. 별다른 개성도 특성도 찾을 수 없었던 평범한 얼굴이 눈을 뜸으로써 갑자기 한 사람의 냄새와 느낌을 갖춘 것이었다. 그것은 눈이 부리는 마술이었다. 얼굴의 다른 부분품들은 눈의 마술에 따라 조종되고 있었다. 장교로서 부하들을 통솔하는 데, 특히 수사 방법으로 눈의 중요성은 강조되어 왔다. 눈은 그 사람의 감정 80펴센트를 표현한다. 눈은 곧 한 사람의 정신 세계의 축소판이며, 그 사람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장교는 사람의 눈을 신속하고 정확하게 판독하는 능력을 갖취야 한다. 그러나 감겼던 눈이 뜨임으로써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렇게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고도 신비스러웠다. 도망자는 눈을 뜸으로써 추적 당하고 있던 ‘거물’의 본체를 드러냈다. 도망자의 눈길은 그의 눈을 향해 일직선으로 박혀왔다. 그런데, 그 눈길은 이미 도망자의 눈길이 아니었다. 태연했고 당당했고 편안했다. 그는 자신이 추적자가 아니라 공격을 받고 있는 것 같은 감정의 흔들림을 순간적으로 느꼈고, 그런 감정의 위축 현상을 보이지 않으려고 눈에 힘을 모았다.
“가엾은 친구, 난 그대가 조선인인 걸 알지. 그대가 하는 일본말에는 조선인의 혀가 들어 있어. 그게 피라는 거야. 일본을 너무 믿지 말게, 곧 망하니까. 내가 유도한 대로 날 쏘아줘서 고맙군. ……아…… 만주…….”
도망자는 감정이 표백된 어조로 느릿느릿 말했다. 말을 할 때마다 상처 자리에서는 진홍의 피가 물큰물큰 솟았다. 그 피 위에 떨어져 내린 눈발들은 이내 피가 되었다.
도망자는 코에서 흘러내린 한 줄기 피를 입술에 물고 가소로운 듯한, 불쌍하다는 듯한, 기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숨을 거두었다. 그는 그 얼굴이 섬뜩하게 느껴져 얼른 외면을 해버렸다. 그의 의식 속에서는 방금 들은 말이 실제의 목소리보다 몇 배로 크게 공명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는 두 손바닥을 모아 얼굴을 훔치며 천천히 일어섰다.
“생포한 것만은 못하지만, 수고했소. 내 관할 구역에서 사살을 했으니 어쨌든 내 체면은 선 셈이오. 약속대로 1계급 특진 상신을 하겠소.”
그는 그날 밤 오래도록 잠을 자지 못했다. “내가 유도한 대로 날 쏘아줘서 고맙군.” 그자는 살기 위해서 도망을 친 것이 아니라 총을 맞기를 바라며, 아니, 이쪽에서 총을 쏘게 하기 위해서 도망을 쳤다는 말이었다. 사실 그자는 두 다리만으로 도망을 치면서 살아나리라고 믿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대는 기마병이었다. 그자는 두 아이들을 살려내고, 자신의 생포를 면하기 위해서 도망을 친 것이었다. 그자는 조직의 기밀을 지키고, 고문의 고통을 당하며 죽지 않으려고 총 맞아 죽는 길을 택한 셈이었다. 그는 만주벌판에 와서 여러 차례 당황
하고 놀라곤 했다. 독립을 쟁취하겠다는 목적 하나만을 위해서 이국 땅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고생을 필사적으로 감수하고 있는 조선인들이 예상보다 많았던 것이고, 그들은 하나같이 일본이 망하고 기필코 조국 독립이 오리라는 것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보르네오를 거쳐 버마까지 장악한 상황인데 어쩌자고 그런 어리석은 믿음을 갖게 되었는지, 도대체 그들은 누구한테 그런 허황한 믿음으로 최면당했는지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는 사실 조선인을 잡아 고문을 명령할 때나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있는 것을 목격할 때 괴롭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몇 번은 그들을 설득시키고 회유하려고 노력도 해보았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은 완강했고 철저했고 질기고 독했다. 그는 구더기만도 못한 놈 버러지만도 못한 놈, 똥개보다 더러운 놈, 여우보다 교활한 놈이 되기 일쑤였고, 어떤 경우에는 얼굴에 침을 뒤집어쓰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생각이 나약한 감상주의의 소산이라는 결론을 내린 다음부터 그런 노력을 작파하고 말았다.
자신이 조선인인 것을 알면서도 그자는 직접적인 욕을 하지 않고 ‘가엾은 친구’라고 했다. 그런 부류의 사람한테서는 처음 들은 말이었다. 그건 분명 욕이 아닌데도 전에 들었던 심한 욕들보다 더욱 모멀감을 느끼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도 감정에 복받쳐 내뱉는 욕설을 들으면서는 같이 감정으로 맞서 이겨내면 그만이었는데, 그자의 말은 감정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오히려 가슴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훈도질을 하는 것도 적극적 친일 중의 하나지. 일본 의식을 심는데 앞장서고 있는 것 아닌가. 그것도 어린애들 머릿속에다가 말야. 그건, 변명의 여지없이 정신적 살육 행위야. 어떤 면에서는 자네처럼 군관으로 나서는 게 덜 죄짓는 것인지도 몰라. 군관이 아무리 항일하는 사람들을 죽인다 해도 훈도가 매년 죽이는 아동들의 숫자보다는 적을 테니까. 상식적·현실적 기준으로야 군관의 죄가 크겠지만 먼 앞날을 보자면 군관이 저지르는 물리적·구체적 살인보다 훈도가 저지르는 정신적·추상적 살인이 더 큰 죄지.”
그가 학교를 떠나기 직전 동료 최상범이 술에 취해서 했던 말이었다. 언제나 밝은 표정으로 생활해 왔던 최상범이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상상이 안 됐었다
그는 최상범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최상범은 그런 자학적 죄의식을 가지고 지금까지도 교단에 서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는 죄의식을 엉뚱한 경우에 깊게 느끼곤 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다른 부대의 조선인 장교를 맞닥뜨리게 될 때였다. 그때의 어색하고 곤혹스러움은 견디기가 어려웠다. 대개 상대방도 마찬가지 감정인 것 같았다. 그래서 조선인 장교끼리는 오히려 자리가 길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그는 독한 중국 술을 몇 모금 들이켜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의미가 불투명한 웃음이 담긴 그자의 얼굴은 그의 의식을 헤집고 눈앞에 불쑥불쑥 나타나곤 했다.
一마침내 할아버지께서 고대하시고 고대하시던 조국 해방의 날은 오고야 말았습니다. 그 벅찬 감격과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할아버지께서는 창피한 줄도 모르고 엉엉 목 놓아 우셨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 그런데 이 대목에서 한 부분을 반드시 고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건 할아버지의 잘못이 아니라 자서전을 대필한 사람의 실수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창피한 줄도 모르고’ 하는 부분을 빼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조국 해방이 된 ‘벅찬 감격과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우는 데 창피하고, 안 창피하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당연히 울고 또 울어야 할 감격과 기쁨인 것인데 창피한가 안 창피한가 남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이 부분은 할아버지의 순수하고 뜨거운 애국심을 손상시키거나 오해받을 위험이 큽니다. 그 부분을 다시 고쳐 쓸 필요 없이 그대로 빼버리면 할아버지의 애국심을 잘 나타내게 됩니다. 할아버지, 이 손자의 안목이 어떻습니까. 할아버지의 손자답게 똑똑하지 않습니까. 자서전은 해방을 맞는 부분부터 점점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합니다. 일제시대는 너무 옛날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고, 일제의 탄압 아래서 그렇듯 남들과는 다른 방법을 택하여 애국애족하신 할아버지께서 해방된 조국에서는 얼마나 눈부시게 활약하고 공훈을 세우셨는지에 대해 손자로서 기대에 부풀고 흥분까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과연 할아버지께서는 해방된 조국을 위해서
혁혁한 공훈을 세우셨습니다. 해방이 되면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사회가 혼란에 빠지고, 조국의 내일마저 풍전등화가 되어가는 것을 도저히 방관할 수가 없어 할아버지께서는 창설 국군에 투신하셨습니다. 시종일관 자기를 돌보지 않고 애국애족의 일념으로 살기를 각오한 할아버지께서는 그 가시밭길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군인의 몸으로 혼란에 빠진 조국의 현실을 바로잡기 위해 분투하신 할아버지의 공적은 참으로 감동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달리 탁월한 능력을 지니신 할아버지께서는 단순한 군인이 아니라 해방군인 미군을 상대로 외교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해방된 조국의 이익을 확보하고 지키신 것입니다. 남달리 탁월한 능력으로나 남달리 투철한 애국심으로나 할아버지께서는 확실히 범인이 아니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하늘이 내리신 인물이 분명하며, 저는 할아버지를 우러러 그저 머리 조아리며 주눅 들어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 다.
그는 편지를 무릎에 떨어뜨리고는 훨체어에 달린 종을 흔들었다.
“의원님…….”
안성댁이 민첩하게 휠체어 옆으로 서며 분부를 기다렸다.
“무울.”
그는 목이 말랐다. 아니, 사실은 술을 한잔 마시고 싶었다. 중퐁에 술은 극약과 같다고 해서 그동안 의도적으로 금주를 한 것이 아니었다. 몸에 치명적으로 해로운 것은 몸이 거부를 하기 때문인지, 아니면 심리적인 작용인지는 모르지만 발병 후로 술을 마시고 싶은 적은 없었다. 그런데 처음으로, 그것도 꽤는 심하게 술을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애써 그 욕구를 누르며 물을 시킨 것이다. 그의 감정은 상당히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의원직 박탈과 사업 일선으로부터의 후퇴, 여기까지만 해도 그의 심적 충격은 컸었다. 그런데 아들의 은근하면서도 질긴 요구에 못 이겨 자서전을 쓰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때 그는 그야말로 자신의 인생이 닫히는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자서전 집필을 맡기기 위해 며칠에 걸친 녹음을 끝내고 났을 때 그에게 남겨진 건 허탈과 외로움뿐이었다. 그런데 자서전이 책으로 묶여 나오자 신기하리만큼 그런 감정은 회복되었다. 자신의 일생이 기록된 책을 가졌다는 만족감과 성취감은 꽤 즐길 만한 맛이 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의 저 밑바닥에 질척하고 끈적하고 찜찜하고 석연찮게 남아있던 찌꺼기들을 말끔하게 치워버린 그 개운함과 시원함과 가뿐함을 갖게 된 것이었다. 책 속에 또렷또렷한 활자로 박혀있는 그 엄연한 기록은 그를 편안하고 당당하게 만들어주는 마술을 부렸다. 그런데 손자 원규놈은 그런 것들을 파괴하려 하는 것이었다. 심신이 괴롭고 피곤하더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했다. 원규놈은 혈연으로서의 손자가 아니었다. 그 점은 원규놈이 몇년 전에 확실하게 밝힌 것이었다.
“역사를 말하는 데 혈연이고 할아버지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혈연을 말할 때 역사가 죽는 것처럼 역사를 말할 때 혈연도 죽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를 비판하거나 공격하기 위해서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말하다 보니까 할아버지는 대상이 된 것뿐입니다. 그리고, 역사를 말하는 데 할아버지는 한 유형에 속할 뿐이지 하등 중요하거나 대단한 존재가 아니니 신경 쓰지 마세요.”
경찰서에서 풀려난 원규놈이 제 행동의 당위성을 내세우며 한 말이었다. 놈의 굽힐 줄 모르는 태도는 꼭 독립 운동에 가담했던 자들을 닮은 데가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는 온갖 고비 다 넘겨가며 한평생을 잘살아오고서는 말년에 이르러 어린 손자놈에게 일생을 되짚어 수사당하는 것 같은 불쾌하고도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최근 몇 년을 살았던 것이다.
그에게 ‘일본의 패망’은 바로 ‘태양의 소멸’이었다. 이글거리며 타오르던 그 불덩어리의 위세가 그다지도 허망하게 꺼져 버릴 줄은 몰랐다. 그의 눈앞에는 한치 앞도 분간이 안 되는 짙고 짙은 어둠의 장막만이 드리워져 있었다. 이글거리는 불덩어리만 너무 오래 바라보아왔기 때문에 어둠의 농도는 그 만큼 진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급 장교인 그가 전반적 전세의 불리함을 감각하기 시작한 것은 1945년에 접어들어서였다 그러나 그는 패망 같은 것은 아예 예감조차 하지 않았다. 그의 의식 세계에서 일본의 패망이란 상상으로도 가능하지가 않았었다.
관동군은 소련군에 의해 무장 해제를 당했다. 믿을 수 없는 일본의 패망은 확고부동한 현실로 나타났다. 그는 눈앞에 드리워진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그건 용이하지 않았다 무장 해제와 함께 그가 받아 든 것은 ‘자유 귀향’이었다
아 결국 이꼴이 되려고…….
그는 허탈과 죄의식과 불안감이 뒤범벅된 혼란에 빠져들었다. 그러나 그 혼란을 빨리 수습해야 했다 .전시보다 생명의 위협이 더 큰 상황에 내던져진 입장이었다.
그들은 똑같은 이유로 서로서로를 필요로 했다. 그래서 그들은 손이 닿는 범위 내에서 무리를 이루었다. 일본인들이 제일 두려워한 것이 보복이듯 그들도 장교복을 벗어던지고 만주벌판을 뒤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는 가토를 생각했고, 최상범을 생각했디. 가토는 얼마나 지장노릇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허탈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최상범은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계속 교단에 서 있었다면 지금은 어떤 심정일지 궁금했다. 자신처럼 허탈과 죄의식과 불안감이 뒤섞인 혼란을 겪고 있을 것인가. 그런 생각을 남모르게 품고 있었던 최상범에게 너무 늦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때 최상범의 말은 결국 자신의 육사 지원에 대한 비판이었던 것이다.
—가엾은 친구 ……일본을 너무 믿지 말게, 곧 망하니까. 그의 의식 속을 그 사람의 말과 모습이 줄기차게 맴돌고 있었다. 수염이 더부룩해서 나이가 조금 더 들어 보였는지는 모르지만 그 사람은 마흔쯤 되어 보였다. 그 사람의 목숨과 바꾸어진 중위 계급장은 이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의 의식을 어지럽히는 것은 그 사람만이 아니었다. 수많은 얼굴들한테 그는 괴롭힘을 당하고 있었다.
느린 기차에 실려 먹고 자며 반도 땅에 가까워져 가고 있는 그들은 거의가 우울하고 불안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서로 별다른 말을 나누지 않고 각자 생각에 잠겨 있었고, 어쩌다가 공동 관심을 끌 만한 이야기가 시작되면 그들은 이상스럽게 큰소리로 열을 올리는가 하면 터무니없이 크게 웃어젖히고는 했다. 그들의 공동 관심을 끄는 것은 대개 음담패설이었다. 그들은 군대에 관한 이야기는 약속이나 한 것처럼 단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그들이 품고 있던 불안감은 압록강을 건너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두려움과 공포로 바뀌었다.
해방 만세, 독립 만세
역에 이런 플래카드가 펄럭이고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디. 그런데 그 옆으로나 밑으로 나붙은 플래카드가 문제였다.
친일파와 지주 계급 처단하자
민족 반역자를 쳐죽이자
그들은 하나같이 질려 있었다. 반도 땅은 그들의 죄를 단죄할 준비를 이미 갖추어놓고 있었고, 그들은 귀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무덤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셈이었다.
“일본으로 삼십육계를 할 수도 없고, 참 환장할 일이로군.”
정보장교 노릇을 했다는 황상필이 걸직한 음담패설을 할 때와는 딴판으로 한숨인지 코웃음인지 분간이 안 되는 소리를 흘렸다.
그의 눈앞을 다시 그 짙고 짙은 어둠의 장막이 가로막았다. 일본의 패망 소식을 접하면서 어느 한순간 그도 일본으로의 도주를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그러나 그건 불가능한 희구였고 부질없는 욕심이었다. 일본은 이미 그들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지난날의 충성을 고려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다만 소모된 쓰레기에 지나지 않았다. 일본인들은 자기네 목숨을 지키는 것만도 힘겨운 일이었다. 그는 암울한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어둠을 헤쳐나가는 한 가지 명료한 의식이 있었다. 이대로 죽을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
“징역을 살든 몰매를 맞든, 무슨 일을 당하기는 꼭 당하리라고 각오는 했지만 ‘처단하자’ ‘쳐죽이자’는 좀 과한 것 같군.”
황상필의 건너편에 앉은 강이라는 사람이 노기 서린 얼굴로 말했다.
“니기미, 그렇게 허망하게 망하다니, 내 참 드러워서…….”
황상필은 담배 연기를 거칠게 내뿜으며 오만상을 찡그렸다.
그는 정보장교를 했다면서도 일본이 그렇게 무너질 줄은 모른 모양이었다.
“맞소, 용한 점쟁이도 그것만은 맞추지 못했을 거요. 그리될 줄 알았으면야 미쳤다고 만주벌판까지 기어가서 그 고생을 했겠소.”
강이라는 사람이 변명투로 말하고 있었다. 그는 두 사람의 말을 흘려들으며 자신의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무작정 고향으로 들어가서 괜찮을 것인가·…·그런 플래카드를 써붙인 건 어느 조직이나 단체인가……. 북위 38도선 이북을 소련이, 이남을 미국이 분할 점령했다는 사실 외에는 무엇 하나 제대로 아는 것이 없는 형편이라서 그 어떤 판단도 내릴 수가 없었다.
“형씨, 형씨도 무슨 말을 좀 해보시오. 사태가 이럴수록 우리끼리 중지를 모아얄 게 아니겠소.”
황상필이 그의 앞으로 상체를 숙이며 눈을 치켜떠 그를 바라보았다. 핏기가 서린 잔인스러운 눈이었다.
“글쎄요, 죽고 싶지 않은 것이 우리의 공통적인 심정인데, 국내의 형편 돌아가는 걸 뭘 좀 알아야 중지를 모으든 방법을 강구하든 할 텐데. 지금으로선 무슨 말을 하겠소.”
그는 무표정하게 말했다.
“아, 형편이야 다 보지 않았소. 처단하자 쳐죽이잔데 뭘.”
강이라는 사람이 답답하다는 듯 손짓까지 해댔다. 그러면서도 그 사람의 목소리는 낮았다.
“온 나라가 그렇다면 별수 없지요.”
“아니 그럼, 죽어야 한단 말요?”
황상필은 방정맞을 정도로 재빨리 말허리를 자르고 들었다.
“원 참 급하시긴. 다들 몸에 익힌 전술·전략이 있잖소. 각자가 그걸 최대한 활용해서 살아날 구멍을 찾아보는 것밖에 방법이 더 있겠소. 지역에 따라 형편이 다를 것이고, 우린 어차피 뿔뿔이 흩어져야 할 사람들이오. 뭉쳐 있을 수도 없지만 뭉쳐 있을수록 불리해요.”
그의 말을 끝으로 그들의 조심스러운 대화는 중단되었다.
기차 안에는 그들과는 정반대 입장인 젊은이들이 섞여 있었다. 일본군 졸병 군복을 그대로 입고 있는 젊은이들이었다. 그들은 강제 징집되었다가 죽음을 면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었다. 그들의 얼굴은 그을리고 메말라 있었지만 표정은 밝고 맑았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일본 군복은 때에 절고 헐어빠져 있었지만 그들의 몸 전체에서는 생기가 돋아났고 활기가 넘쳐흘렀다. 삐뚜름하게 쓴 낡은 모자며 때에 전 군복이 그대로 그들의 몸을 뒤덮고 있는 훈장이었다. 기차 안의 사람들은 거의가 그들을 반기고 치하했으며, 그들이 입은 일본 군복을 정겨운 손길로 쓰다듬거나 어루만졌다.
상황 변화에 따른 가치 전도가 얼마나 무섭고 냉엄한 것인가를 그는 아프게 실감하고 있었다. 그 실감은 예측할 수 없는 앞날에 대한 불안이나 두려움의 변형이었다.
평양에 가까워질수록 플래카드의 숫자는 많아졌고, 격문 내용도 더욱 살벌했다. 스탈린 원수 만세, 피의 프롤레타리아 혁명 완수 같은 플래카드도 빈번하게 눈에 띄었디. 그는 갈수록 압박감에 눌렸다. 친일파 처단과 공산주의의 득세 ― 그는 생존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강박감에 사로잡히고 있었고, 공산주의의 세력이 온 나라를 뒤덮었다면 살아날 재간이 없는 일이었다. 일본은 공산주의를 가장 큰 적으로 삼았고, 그 추종자들에게는 피눈물 없는 가혹한 처단을 감행했다. 소련은 제국주의를 제일의 적으로 삼았고, 혁명이란 깃발 아래 도열한 공산주의자들의 철저성이나 냉혹성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는 스물여섯일 뿐인 자신의 나이를 곱씹어 헤아렸다. 죽음 앞에 내놓기는 너무 아깝고 억울한 나이였다. 그는 최초로 죽음 앞에 똑바로 서보았다 그것은 끝없이 희거나 끝없이 검은, 형체도 크기도 없는 것이었다 아아 어떻게 해서든 살아날 수만 있다면…… 살아날 수만 있다면……. 그의 의식은 끝없이 죽음을 거부했고, 죽음으로부터 도주하고 있었다.
그는 참담한 심정인 채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자신의 처지를 재삼 확인해야 했다. 생명의 안전을 보장받을 수만 있다면 그곳이 어디든 서슴없이 가고 싶었다. 그러나 자신이 죽음을 거부하듯 반도 땅은 자신 같은 부류들을 거부하고 있었다. 일본이 그렇게 쉽게 망할 줄이야……. 그는 똑같은 안타까움을 되씹으며 북위 58도선을 넘었다.
그런데,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서울에 도착된 순간 그는 눈앞이 환하게 열리는 환희의 빛을 보았던 것이다. 그건 죽음의 올가미를 벗어날 수 있다는 직감이었고, 죽음을 피할 수 있다는 생존의 확인이었다.
서울역 플랫폼에는 위압적이고 공포스러운 콧수염을 붙인 스탈린, 바로 그자의 초상화가 붙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핏방울 뚝뚝 떨어지는 살벌한 플래카드도 펄럭이지 않았다. 그는 꼭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아 눈을 훔치고 또 훔치며 확인을 했다. 분명 그런 것들은 흔적도 없었다.
기차를 갈아타야 했기 때문에 어차피 서울에서 하릇밤을 묵어야 했다. 인파에 섞여 구름다리를 오르면서도 그의 마음은 조마조마했다. 그런데 서울역 광장에 나와서 그는 비로소 확실하게 안도할 수 있었다. 그때서야 그의 머리는 서울이 북위 38도선 이남이고, 이곳은 소련군의 점령 지역이 아니라 미군의 점령 지역이라는 사실을 떠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불안한 안도감은 금방 깨어지고 말았다. 서울역 벽면 여기저기에 격문의 포스터들이 어지럽게 붙어 있었던 것이다.
친일파를 색출 처단하라
민족 반역자를 색출 처단하라
뭉치자! 혁명의 붉은 깃발 아래
나가자! 포롤레타리아 혁명의 길로
그는 먼발치에서 포스터들을 넋 놓고 바라본 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미군 점령 지역의 포스터 내용들이 소련군 점령 지역의 내용들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미국도 공산주의 국가가 아닌가 착각할 지경이었다.
그는 플랫폼에서 느꼈던 그 밝은 빛이 차츰차츰 흐려져 어둠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보고 있었다. 미군이 점령을 했든 소련군이 점령을 했든 상관없이 반도 땅 전역에는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들을 처단해야 된다는 기운이 동일하게 넘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그 당연한 기운 앞에 머리를 떨구었다. 그것은 일본의 지배에 대한 증오의 표현이었고, 새 세상을 만들기 위한 청소 작업이었다. 그는 죽음이 성큼 다가서는 것을 느꼈다. 그건 피할 도리가 없는 올가미였다.
—가엾은 친구…….
그는 자신이 왜 가엾어야 했는지를 뒤늦게 깨닫고 있었다. 그 사람은 그때 벌써 자신의 목에 걸려 있는 오늘의 올가미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하루면 닿을 수 있는 고향을 생각했다 좁은 그곳에서는 자신의 존재가 너무 빨리 드러날 것이었다. 안전을 도모하기에는 넓은 서울이 안성맞춤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판단했고, 서둘러 수중의 돈을 확인했다. 며칠 정도는 묵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서울에서 묵기로 작정했다.
그는 역 부근을 뒤져 숙박비가 그중 헐한 여관을 골라 투숙했다. 지체하지 않고 아내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급히 돈을 장만해 오라는 것, 절대로 비밀을 지켜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혼자서만 와야 한다는 것 등을 적었다. 편지를 띄운 그는 다음 날부터 서울 시내를 눈 껌벅껌벅해 가며 배회하기 시작했다
남산공원에 올라가 보았고, 화신 앞을 거쳐 파고다공원을 가보았고, 바로 그 뒤편 안국동 쪽에 있는 천도교회관에도 가보았다. 그런 곳에는 어김없이 정치 열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새 조국 건설의 방향이나 방법을 제시하는 열변이 토해졌고,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들의 철저한 색출과 가차 없는 처단은 꼭꼭 언급되었고, 어떤 사람은 너무 흥분해서 소리치다가 비실비실 쓰러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기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찔끔거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은 촌극에 불과했고, 그런 곳을 압도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것은 공산주의 세력이었다. 친일파 지주 계급과 민족 반역자들을 처단하여 그 피와 시체를 거름 삼아 노동자, 농민이 주인이 되는 새 나라를 건설하자고 그들은 충동적인 열변을 토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미군정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그들의 열변에 귀 기울이며 섬뜩섬뜩했고, 미군정 아래서 어떻게 그렇게 공산주의가 득세를 하는 것인지, 의문과 혼란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천도교회관에서 열린 공산당 집회를 먼발치에서 구경한 그는 아연해 버렸다. 천 명 가까이 모인 그들의 집회는 격렬하고 무서운 힘이었다. 일본은 그리도 철저하고 집요하게 공산 세력을 근절시키려 했는데, 해방 한 달여에 천 명 가까운 공산주의자들이 집회를 벌인다는 것은 결과적으로 정책 실패를 입증하는 것이었다. 그 많은 수가 해방이 된 다음부터 공산 세력에 가담했을 리가 없고, 그들은 일제 치하에서 지하 조직망을 구축하고 있었다고 보아야 했다. 그가 아연해 하는 것은 바로 그 점 때문이었다. 조직력·수사력에서 세계 제일이라고 자처해 온 일본의 경찰력 아래서 그렇게 견뎌낼 수 있는 공산 조직이라면 일본은 미국의 원자 폭탄 앞에 항복을 하지 않았더라도 미구에 소련의 공산조직에 의해 무너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섬뜩하게 가슴을 훑었다. 그 생각은, 미군정도 어물어물하다가는 저들한톄 밀려날지도 모르고, 나도 결국 저들의 손에 죽어가게 될지 모른다는 데까지 이어졌다.
그는 며칠에 걸친 배회 끝에 머리를 어지럽히고 있는 의문과 혼란을 대충 정리할 수 있었다. 해방은 그동안 억눌려 살아온 모든 사람들이 감정을 폭발시키는 당연한 계기가 되었고, 그들은 일제시대에 당한 여러 가지 억울함이나 분함을 풀고 싶어했고, 그런 욕구는 앞으로 올 새 세상에 대한 기대로 바뀌었다. 그 세상이란 일제시대와는 완전히 다른 그 어떤 살기 좋은 나라였다. 억압도 없고, 착취도 없고, 가난도 없는 그 어떤 살기 좋은 나라― 그 막연한 것 같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들을 없애야 한다는 아주 구체적인 방안을 그들은 강구하고 있었다. 그건 곧 혁명의 요구였다. 그런 전체적 사회 분위기 위에 공산주의자들은 올라서 있었다. 그런 것들은, 여러분이 원하는 살기 좋은 나라, 여러분이 바라는 공평한 사회를 바로 공산주의가 이룩할 수 있다고 선동 자극하고 있었다. 그건 신속하고도 약삭빠른 정치적 선수였다. 이런 정리를 하고 나자 그는 한층 더 절박감을 느꼈다.
아내를 서울역으로 마중 나간 것은 편지를 보ㅙ고 9일 만이었다. 그리고 집을 떠난 지 5년 만이었다. 아내는 그를 보는 순간 가슴에 무언가가 컥 막히는 듯한 몸짓을 하더니 아무 말도 못하고 마구 눈물을 쏟았다. 아내는 그동안 많이 변해있었다. 기미가 끼고 메마른 얼굴에서는 스물여섯의 나이를 찾아낼 도리가 없었다. 더구나, 산술의 답을 보여달라고 발끝으로 교실 바닥을 콩콩거리던 소학교 때의 정분임이의 모습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그는 미안하기도 했고 짜증이 나기도 했다.
“그만 가지.”
그는 앞서서 걷기 시작했다. 공허감과 회한이 문득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여자가 멀 알까마는, 한 번 더 생각해 보는 것이 어떠시오. 얼마나 사는 인생살이라고…….” 5년 전에 아내가 눈치 보며 했던 말이었다. 그는 미간을 찡그리며 입맛을 다셨다. 입 속이 그지없이 썼다
아내는 여관에 다다를 때까지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만 그쳐, 남부끄럽게.”
그는 여관으로 들어서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분명 아내 때문이 아닌 짜증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벽 쪽으로 돌아서 치마를 걷어올리고 돈 전대를 풀었다. 그것을 서둘러 남편 앞으로 내밀며 물었다.
“몸은 좀 어떠시오?”
그녀가 남편한테 5년 만에 하는 첫마디였다.
“괜찮아”
그는 아내의 눈길을 피하며 담배를 빼 물었다. 허름한 여관방에서 이런 꼴로 아내를 대하자고 집을 떠났던 것이 아니었다.
“돈이 급하신 것 같아 되는 대로 챙겨 오느라고 얼마 안 돼요.”
“괜찮아 많이는 필요 없으니까.”
그는 식구들의 안부를 대충 듣고 나서 그쪽의 상황을 물었다.
“안 오시기 백번 잘했어요. 청년들이 자치댄지 치안댄지를 꾸며가지고 난리를 치고 있어요. 집에도 벌써 서너 차례 다녀갔어요. 당신을 찾는 거지요. 순사보로 있던 허씨라는 사람은 두들겨 맞아 죽었고, 지서 끄나풀 노릇 한다고 소문났던 배씨라는 사람은 다 죽게 되고, 그런 난리예요. 관공서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산속으로 도망을 가기도 하고·……. 어쨌거나 그런 사람들이나 밥술깨나 뜨는 부자들은 모두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로 몰려 꼼짝들을 못해요. 언제까지 그리 살아야 될지 모르겠어요.”
그는 벽에 등을 기댄 채 담배만 빨아대고 있었다. 무턱대고 집을 찾아들어 갔을 때 당했을 자신의 꼴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순사보가 맞아 죽고, 끄나풀이 맞아서 다 죽게 되는 판에……. 그는 꽁초를 비벼댔다.
“거긴 공산당은 없는가?”
“없기는요, 치안대 태반이 그 사람들인걸요. 그 사람들 말대로 앞으로 그 사람들 세상이 되면 우리 양쪽 집안은 정말 큰일이에요.”
그는 방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어…… 아버님이 그러시는데, 여기서 몸 숨길 데가 마땅찮으면 내려오라고요. 안전한 절을 한군데 봐놨거든요.”
“괜찮아 넓고 아는 사람 없는 여기가 제일 안전해. 당신은 오늘 밤 쉬고 내일 곧 내려가야 해. 집을 오래 비우는 것도 의심받는 원인이 될 테니까”
“그래야지요.”
그는 아내의 가느다란 한숨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만주벌의 찬바람처럼 그의 가슴을 훑고 지나갔다.
5년 만에 만난 아내를 하릇밤 만에 떠나보내고 나자 그의 심정은 더욱 참담해졌다. 그렇다고 여관방에만 누워 있을 수도 없었다. 시간이 너무 지루한데다 와기감만 커져갔다. 그는 계속 눈을 껌벅거리며 남산공원으로 파고다공원으로 하릴없는 걸음을 옮겨야 했다. 그를 고문이라도 하듯 공산당의 열기는 날이 갈수록 더해가기만 했다. 그는 매일 민족 반역자 처단이라는 열에 받친 소리를 소낙비 맞듯 했고, 그는 매일 조금씩 죽어가고 있는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의 정수리에 찬란한 구원의 빛이 뻗어 내렸던 것이다. 그 빛은 너무나 갑작스럽게 쏟아져 내린 은총이었고, 너무나 느닷없이 퍼부어진 은혜여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미군정은 모든 공산당 활동을 금지시키는 포고를 발하는 한편 일제하의 모든 공무원들을 현직에 복귀시킨 것이다. 그것은 권유가 아니라 명령이었고, 공무원 중에는 물론 경찰이 포함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국군을 창설함에 있어서 전 경력자는 빠짐없이 참예하라는 것이었다.
그 조치는 단순히 그의 목숨만을 구해준 것이 아니었다. 경력마저 그대로 인정하는 직장까지 마련해 준 것이었다. 그 획기적이고도 과감하며 역사적이고도 위대한 조치 앞에 그는 감읍하고 또 감읍할 따름이었다. 그 은총과 은혜로움을 무슨 말로 다 형용하고 표현할 것인가. 열 번의 말보다는 한 번의 행동으로, 분골쇄신하는 것만이 그 은총과 은혜에 보답하는 유일한 길임을 그는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그러나 경계를 소홀히 하지 않으며 그 건물 주위를 배회했다. 혹시 손쉽게 체포하려는 함정이 아닐까 하는 한가닥 의혹을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나흘째 되는 날 버글거리는 사람들 틈에서 함께 귀국했던 황상필을 만나게 되었다. 두 사람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이 없이 서로를 얼싸안았다
“이 사람아, 미국은 그런 나라가 아냐.”
가까운 호떡집에 자리 잡고 앉아 그의 염려를 들은 황상필은 대뜸 이렇게 말하며 그의 어깨까지 툭 쳤디. 황상필은 미국을 아주 잘 안다는 투였고, 말도 어느새 편안하게 놓고 있었다.
“물론 나도 첨엔 그런 의심을 안 한 게 아니었지. 우리가 누군데. 헌데 지금 형편으론 똥 묻은 개다 뭐다 가릴 형편이 아니거든. 좌익세력은 날로 번창하지, 미국은 자기네 세력을 구축해야 되겠는데 인물들은 모자라지, 정작 몸이 단 건 우리가 아니라 군정 쪽이라구.”
황상필은 호떡을 우물거리며 아주 여유만만하게 이야기했디. 황의 그런 태도는 허세 같기도 했고 아닌 것 같기도 했고, 종잡기가 어려웠다. 어쨌든 황의 그런 태도를 대하자 일단 안심은 되었고, 한편으로 그 조치에 그처럼 감지덕지했던 것이 창피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글쎄, 당장은 급하니까 우리 같은 것들도 가리지 않는다지만 어느 정도 체제가 잡힌 다음에야 어떻게 될지 모르잖는가. 자네도 잘 알다시피 군대에는 소모품이란 게 있으니까.”
그는, 우리가 바로 소모품 장교가 아니겠는가 하는 투로 황상필을 빤히 쳐다보았다.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글 필요는 없어. 물론 내가 수집분석한 정보로는 말야·…….” 황은 정보장교 출신다운 입버릇으로 전제를 해놓고 물을 한 모금 꼴깍 마시고는, “우리 관동군 출신들이 불리한 것은 사실이야. 성분이나 족보가 삐까번쩍한 자들이 많으니까. 독립군 정통이다, 어느 장군 휘하였다, 벼라별 인물들이 많은데다 학병출신들까지 끼어 있는 판국이니 우리가 똥개긴 똥개인 건 사실이야. 그래서 말이야…….” 황은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며 상체를 조금 굽히고는, “기회가 온 김에 족보를 독립군으로 싹 우라까이(뒤집다)해 버릴까 했었지. 그런데 그것도 뜻대로 안 되겠더군. 진짜가 하도 많아서 끝까지 거짓말을 꾸며대기가 어려운데다, 만약 들통이 나게 되면 똥 묻은 진짜 족보까지 인정을 못 받겠더라니까. 어쨌든 염려할 거 없어. 일단 문이 열렸으니까 도스께끼(진격) 정신을 살리는 거야. 세상살이란 다 제가 할 나름 아닌가”
황상필의 자신만만함 앞에서 그는 마음이 착 까부라져 있었다. 독립군이란 존재들을 의식하게 되자 그 조치로 소생했던 욕구가 전신에 맥이 빠지면서 함께 사그라지고 말았다. 그건 죄의식 때문도 아니고, 열등감 때문도 아니었다. 굳이 밝혀 내자면, 막강한 상대와 맞섰을 때 아예 싸울 의욕이 꺾여버리는, 전의 상실, 뭐 그런 것이었다.
“왜 그리 넋 놓고 있나?”
“아니, 뭐…….”
“뭐 요리조리 생각할 필요 없다구 생각해 봤자 그게 그 타령이구 배운 도둑질인데 이 길로 가야 쇼부가 빠르지 다시 뮐 새로 시작하겠어, 안 그래?”
“……”
그는 아무것도 보는 것 없는 눈길을 탁자 위에 던진 채 느리게 고개만 끄덕이고 있었다. 사실 그 조치가 내려지고 나서 잠깐이나마 진로를 생각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선생으로의 복귀 문제를 떠올려보긴 했지만 괜히 번거로울 것 같았고, 어린애들을 상대로 한 그 반복 생활로 다시 돌아간다는 것이 영 내키지를 않았던 것이다.
“자네 계급이 뭐였지?”
황이 호떡집 유리문을 옆으로 밀며 물었다.
“중위, 왜?”
그의 뇌리에는 그 웃음 머금은 얼굴이 일순간 스쳐 지나갔다. 그는 몸서리를 쳤다.
“진급이 빠른 편이었군. 카드에는 대위라고 쓰게.”
“왜?”
그는 걸음을 멈춰 서며 눈길로 황을 붙들어 세웠다.
“왠고 하니, 말로는 예전 계급 그대로 인정해 준다고 하지만 말야. 우리의 경우 과거의 죄를 징계하는 뜻으로 한 계급이나 두 계급씩 강등시킬지도 모를 일이거든. 독립군 출신 아이들이, 일본군 계급 그대로 인정하면 안 된다 하고 트집이라도 잠고 나서봐 요새 걔네들 입김이 얼마나 센지 알지?”
그는 지그시 웃으며 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황은 음담패설에만 자신보다 능한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한 수 먼저 가고 있음을 그는 신기해하고 있었다.
“왜, 마땅찮아?”
“아아니.”
그는 고개까지 저으며 웃어 보였다. 황의 계산은 전혀 터무니없는 것이 아니었고, 이미 그런 식으로 카드를 작성해 냈을 그의 면전에서 싫은 표정을 지을 수는 없었다. 좋든 나쁘든 호의로 한 말에 대한 대접이 아니었고, 이미 저지른 행동에 대해 모독감을 느끼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황의 행위는 나쁘게 보면 교활이고 사기였지만 다른 측면에서 보면 이미 시작된 생존 경쟁에서 철저한 자기 방어를 꾀하는 것이었다.
“내 말 명심하라구. 독립군 출신 아이들이 처음에 우리 관동군 출신 받아들이는 것을 극력 반대했었으니까”
그는 고개만 끄덕이며 걸었다. 만약 계급을 그대로 인정하면 어쩔 거냐는 말은 묻지 않았다. 대답은 빤한 것이었다.
그는 카드를 작성했다. 계급은 사실 그대로 적었다. 양심 때문이 아니었다. 정직하고 싶어서도 아니었다. 설령 강등 조치가 과잉 추측이나 소문이 아니고 내정된 사실이라 하더라도 결코 그 짓만은 하고 싶지가 않았다
계급의 강등은 없었지만 예측했던 대로 관동군 출신들은 주역일 수가 없었다. 그들 역시 구제된 삶에 고마워하고 만족하고 있을 뿐이었다. 사회적으로는 미군정의 그런 일련의 조치에 대해 반대와 비판이 일고 있었다.
그는 다른 관동군 출신들과는 달리 사령부에 배속을 받았다. 남다른 영어 실력 때문이었다. 그는 특출한 기억력 덕으로 사범학교 시절부터 영어를 잘했다. 단어를 많이 암기하는 것이 어학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귀가 닳도록 강조하는 영어 선생의 말을 따라 콘사이스 한 권을 다 외우려고 미련을 떨기도 했었다. 관동군에서도 영어 실력으로는 사령부에 근무할 수 있었는데 조선인이란 이유 때문에 그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일본은 내선일체를 강조했고, 자기네 군사교육을 시켜 장교를 만들어놓고서도 1급 군사 기밀을 취급해야 할 상황에 처하자 조선인임을 밝혀냈다. 그 사건은 그에게 조선인으로서의 한계를 인식시켜 주었고 동시에 조선인이 도달할 수 있는 한계의 극점이 어디까지인지 확인하고자 하는 오기를 유발시켰다. 그런데 그 확인은 중위라는 계급으로 끝나고 말았다.
―할아버지께서는 역시 앞날을 환히 내다보시는 혜안을 지니셨습니다. 해방된 조국을 위해 군인의 신분으로 애국하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시고 새로운 길을 찾으신 것입니다. 해방된 조국을 새로 건설하고 부강하게 키우기 위해서는 보다 현실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을 강구해야 한다는 자각을 갖고 과감하게 인생의 진로를 바꾸셨습니다. 해방이 되긴 했지만 조국의 현실은 궁핍할 대로 궁핍해져 있었고, 민족의 적인 일본이 물러가버린 상태에서 군인으로 안주할 수 없다는 그 자각은 얼마나 거룩한 애국 정신의 발로입니까 그래서 할아버지께서는 현실적 안정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부강한 조국 건설의 길을 닦기 위해 험난한 미국 유학을 감행하셨다니, 저 같은 졸장부로서는 그저 머리 조아릴 따름입니다. 할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이 애국과 애족에 바쳐졌을 뿐만 아니라 천
리 앞을 투시하는 혜안에 버러지 같은 제가 어찌 감히 머리를 들겠습니까. 할아버지의 판단은 적중하여, 동족끼리 싸움을 벌인 그 답답하고 안타깝고 기막힌 6·25라는 전쟁으로 초토가 된 땅에서 할아버지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건설의 역군이었고 애국자이셨습니다. 가끔 얼빠진 작자들이 시기심과 질투심이 발동하여 주둥아리를 놀려댈 뿐이지 할아버지께서 기업인으로서 세우신 공로는 영원히 꺼지지 않을 빛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 많은 표창장과 트로피와 훈장이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빠진 사실을 환기시켜 드리고자 합니다. 이 대목쯤에서는 할머니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이 있었으면 합니다. 돈독한 부부애에 관한 이야기는 할아버지의 고결한 인품과 청결한 품위를 유감없이 나타내 많은 사람들, 특히 여성유권자들을 감동시킬 것이며, 그 감동이 그대로 아버지의 지지로 바뀔 것입니다.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삽입시키는 것이 어떨는지요.
“요런…… ¨ 요런, 못된 놈이·있나……˙.”
그의 안면 근육이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 부분은 어제 전혀 읽지 못하고 지나쳤던 것이다 감정을 억제하려는 그의 노력은 이 부분에 들어서 깨어지고 말았다. 그의 감정은 흥분의 계단을 껑충껑충 뛰어오르고 있었다. 이놈이 아무리 야지를 하자고 작정을 하고, 아무리 버르장머리 없이 굴기로 작심을 했더라도 정도가 있는 게지 이럴 수가 있는가……. 그의 호흡이 가빠지고 있었다. 흔들리는 시야에 아내의 모습이 떠올랐다 피부 깊이에서부터 배 나오고 있는 듯한 고질적인 촌스러움을 바탕에 깐 슬픔과 외로움에 젖은 얼굴이었다. 그
는 눈을 꼬옥 감았다. 아내의 모습은 없어지지 않고 더 선명하게 다가들었다. 여보, 미안해, 미안해, 그는 주먹으로 이마를 힘껏 누르며 신음을 흘렸다.
새로운 군복, 새로운 계급장을 붙인 그는 새로운 힘이 솟고 새로운 의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건 의식의 피갈이였다. 그는 새생활에 전념하고 몰두함으로써 지난날의 흔적을 하루라도 빨리 지우려고 했고, 과거의 사슬로부터 한시라도 빨리 풀려나려고 했다 그가 일의 바쁨을 내세워 굳이 고향엘 가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일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것은 사실이었지만 이틀 정도쯤 짬을 낼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오금이 저려 서울역에 내리자마자 고향 가기를 작파해 버렸던 그때를 생각하면 보란 듯이 당당하게 고향 땅을 밟고 싶은 욕구도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고향은 갈 수가 없는 입장이었을 때 절실한 현실이었지, 마음 놓고 갈 수 있게 되자 그곳은 한갓 보잘 것없는 시골로 바뀌고 말았다. 이젠 두려움의 대상도 아니고 아무런 쓸모도 없는 그곳 사람들은 하등 의식할 의미가 없는 존재들이었다. 그들을 상대로 촌각이라도 낭비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었다. 이제 그의 엄연한 현실은 서울이라는 지명으로 압축 상징되는 새 세상이었고, 구체적인 상대들은 그 새 세상을 연출시키는 미군들이었다.
그에게 시급한 것은 아버지가 원하는 조상들 묘소의 성묘가 아니었고, 아내가 원하는 서울로의 합가도 아니었다. 미군들을 상대로 하는 데 그들이 만족해 할 만한 능란한 회화를 하루라도 빨리 습득하는 일이었다. 그의 영어 실력은 군사 관계의 서류를 번역하거나 작성하는 데 오히려 지나칠 정도였다. 그러나 회화에 있어서는 너무나 부족함이 많았다. 아무리 단어를 많이 알고 영작을 정확하게 할 수 있다 하더라도 발음이 너무 다른 회화를 하게 될 때면 그런 것은 거의 무용지물이었다. 그의 발음은 ‘다뜨 이스 아 도꼬(댓 이즈 어도그)’하는 식의 일본식 발음이었고, 미군들은 ‘레터’나 ‘워터’까지 ‘레러’ ‘워러’ 하는 식으로 발음했기 때문에 그 차이는 완전히 딴 나라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는 온 신경을 발음을 교정하는 데 집중시키고 있었다. 청각은 말할 것도 없이 시각이며 후각, 촉각까지 그는 몸의 모든 감각 기관을 총동원시키고 있었디. 시각은 그들의 입 모양이나 표정을 파악했고, 후각은 그들의 독특한 냄새를 감지했고, 촉각은 그들의 세포가 분비하는 미세한 감정의 전류를 포착했다.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자기, 거대한 힘이 필요로 하는 자기를 만들기 위한 그의 노력은 광적일 만큼 치열했다. 그는 발음의 차이가 심한 기초 단어부터 신속하게 조사를 끝낸 다음 한 단어를 발음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의식 속에 기
억되어 있는 미군의 발음과 같아질 때까지 수백 번씩 연습을 했다. 하루에 네 시간 이상을 자지 않았고, 실성한 사람처럼 하루 종일 입을 달싹이고 있었다. ‘잉크(INK)’라는 발음을 미군이 금방 알아듣게 고치기 위해서는 꼬박 나흘이 걸렸다. 그 단어 하나를 나흘 동안 줄기차게 발음해 댄 횟수를 계산했더라면 수만 번에 이르렀을 것이다. “좋하 좋아, 자넨 인물이 돼도 큰 인물이 될 게야.” 상관이 흡족해 했고, 미군은 만날 때마다 원더풀을 연발해서 그의 노력의 보람을 확인시켜 주었다. 말이라는 것은 이상한 것이어서 어느 만큼 숙달을 시키게 되면 그 다음부터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고 심화되는 것이었다. 그 신기할 정도의 효과는 언어가 갖는 연계성 때문이었다.
그가 아내를 서울로 불러올린 것은 회화의 불편을 어느 정도 해소시킨 다음이었다. 해가 바뀌어 봄이 오고 있을 무렵이었다. 군정하의 시국은 계속 어지럽고 복잡했다. 아내를 이사시키면서도 그는 고향엘 내려가지 않았다. 고향에 대한 생각에 변함이 없었는데다 신변에 중요한 변화가 생겨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대위로 진급을 함과 동시에 군정 사령부로 파견 근무를 나가게 된 것이다. 그 명령을 받던 날 그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맞잡아 쥐였다. 자신을 향해 곧게 뻗어 내리는 빛줄기를 보았기 때문이다. 그 빛줄기는 천천히 움직여 땅에 눕더니 그대로 곧은 길이 되었다. 그것은 바로 가토가 말하던 지장으로서의 길의 열림일 수도 있었다.
파견 근무를 시작하면서부터 그는 군대와는 판이한 세상살이에 차츰차츰 눈떠갔다. 군대가 명령으로 지배되는 직선적이고 획일적이고 단순하고 명확한 세계라면, 사회라는 것은 상호 이익으로 거래되는 곡선적이고 종합적이고 복잡하고 혼미한 세계였다. 군대의 그런 특성이 집약되어 나타나는 절정은 사열과 분열일 것이었다. 그 일사불란한 아름다움은 명령만이 창출해 낼 수 있는 것이었고, 사열대 위에서 그 아름다움을 지배할 수 있는 자리가 주어진다면 남자는 누구나 한번쯤 그 유혹에 솔깃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사회라는 것에는 그런 산뜻한 유혹은 없었다. 그러나 은근하고 끈끈하고 축축한 유혹들이 도처에 숨어서 속삭이고 손짓하고 간지럽히고 있었다 그 여러 가지 유혹들의 집약은 돈이라는 것이었다.
미군정은 조선총독부란 절대 권력의 이름 바꿈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파견 근무란 그 절대 권력의 말초 조직에도 직접 포함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 거대한 생명체의 심장부에 자리 잡고 앉아 그 심장이 정상 가동하는 데 세균 역할 정도는 해내고 있었다. 세균도 세균 나름이어서 심장에서 공생하는 세균과 항문에서 기생하는 세균의 격이 같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권력이라는 것은 언제 어느 때나 돈과 강간 관계를 맺고 그 짜릿짜릿하고 아릿아릿한 맛에 취하며 적당히 썩어가게 마련이었다. 그 적당히 썩어 있는 맛, 그것이 바로 인생의 진국이라는 사실을 그는 감지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살얼음 걷듯이 해가며 그 진국의 미각을 즐겼다. 그는 아내한테까지도 그 사실을 일체 비밀에 부쳤디. 사회 거물급 인사의 암살 사건이 발생하고, 지하로 잠적한 공산당의 테러가 속출하고, 쌀값을 중심으로 한 생필품 값은 하루가 다르게 치솟고, 사회의 어지러움은 계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들을 곁눈길로 지나치며 2년 세월을 꿈꾸듯이 보냈다. 그는 그때까지도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다. 다만, 하나였던 방을 둘로 늘렸을 관이다. 서울로 이사를 올 때 아내는 임신중이었기 때문에 아이가 둘이 되었던 것이다. 그는 누가 보아도 청렴하고 겸손한 젊은 장교였다.
그의 앞에 한희숙이 나타난 것은 파견 근무 5년째인 1948년 봄이었다. 그는 중령이 되어 있었고, 스물아홉이었다. 그의 영어 회화는 이미 통달한 상태에 있었고, 그 긴 파견 근무는 어디까지나 군정 사령부의 필요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다른 인사 명령이 작용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 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암암리에 박아놓고 있는 쐐기들은 물론 철저하게 은폐되어 있었다.
처음에 한희숙의 아버지 한우석을 소개 받았을 때 그에게는 그 흔해빠진 청탁자의 하나에 불과했다. 한우석은 영등포에 있는 방직 공장 소유권을 놓고 싸움을 벌이면서 사령부의 힘을 필요로 하고 있었다. 그의 앞에는 그런 식의 청탁이 산적해 있었기 때문에 전혀 흥미도 관심도 없었다. 그나마 눈길이 가는 것이 있다면 거액의 그것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크면 클수록 경계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되었다. 욕심 많은 뱀이 몸통 작은 생각 안 하고 입 큰 것만 생각해서 족제비를 덥석 문 채 죽어가야 하는 식의 어리석은 자살 행위를 범할 수는 없었다. 그는 그 건을 일단 제쳐놓았는데 그쪽에서는 중간인을 통해 끈덕지게 접촉을 시도해 왔다. 그러던 어느 날 어려운 사람으로부터 저녁 초대를 받았다. 초대에 응해 가서 보니 그곳이 한우석의 집이었다.
연보랏빛 바탕에 물방울 무늬가 찍힌 원피스를 입은 한희숙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녁을 마치고 거실로 자리를 옮긴 직후였다. 그녀는 차를 날라온 것이었다. 가벼운 목례(目禮)를 한 그녀는 다소곳하면서도 주저함이 없는 몸짓으로 세 사람 앞에 차례로 찻잔을 놓아갔다.
“이 중령님이시다, 인사드려라.” 한우석은 찻잔을 다 놓고 나서 두 손을 앞으로 모아 잡고 선 딸에게 말하고는, “제 딸년입니다” 하며 그에게 소개했다.
“처음 뵙겠습니 다. 한희숙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아, 예, 이경재라고 합니다.”
그는 당황한 듯한 몸짓으로 엉거주춤 일어서며 인사를 받았다.
“영문과를 다닌다고는 합니다만 미국 사람을 대하면 말 한 마디 제대로 못하는 처지 아닙니까. 물론 여러모로 바쁘시겠지만 앞으로 이 중령님께서 회화를 좀 지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 소견으로는, 말을 못하는 외국어 공부는 아무리 해도 무용지물이라는 생각입니다.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니니 이 중령님께서 앞으로 필히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한우석은 청탁 건은 까맣게 잊은 듯 딸의 회화 공부를 진지하게 부탁하고 있었다.
“그럼·…… 즐겁게 노시다 가세요.”
한희숙이 약간 고개를 숙여 보이고 물러섰다. 그와 그녀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또 가슴을 관통하는 전류를 느꼈다. 그녀와 눈 마주침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녀가 첫인사를 할 때 이미 눈길이 얽혔던 것이다. 그녀는 약간 고걔를 숙인다고는 했지만 눈길은 일직선으로 그를 향해 있었던 것이다. 잔잔하면서도 진득한 느낌을 담은 그 눈길은 순간적으로 그의 가슴에 파장을 일으켰다. 그가 당황스런 몸짓을 지었던 것은 그 갑작스러운 감정의 흔들림에 놀란 때문이었다.
이런 저런 시국담을 나누다가 10시가 가까워 자리에서 일어섰디. 그때까지도 한우석은 청탁 건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바쁜 시간 내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또 뵙게 되길 바람니다.”
한우석은 대문 밖까지 나와서도 끝내 부탁의 말은 하지 않았다. 한우석의 그런 태도가 어떤 계산된 결과라고 하더라도
그의 마음 한구석에서 전에 없었던 호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없는 일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줄곧 한희숙의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희고 갸름한 얼굴에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고 흔드는 힘을 지녔던 눈매. 웃음이 감돌면서도 어딘가 냉정한 것 같은 거리감을 느끼게 했던 분위기. 그는 마음의 출렁거림과 함께 강한 소유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불현 듯 놀랐디.
한희숙은 이틀 후에 전화를 걸어왔다.
“언제부터 회화를 지도 받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 전화 올렸습니다.”
차분하고도 단아한 음성이었다.
“저는 아무 때나 좋습니다…….”
그는 다음 말을 꿀꺽 삼켰다. 하마터면 ‘오늘 당장이라도 좋습니다’ 할 뻔했던 것이다. 그는 이틀 동안 그녀의 생각에서 놓여나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회화는 1주일에 세 차례씩 보아주기로 했다. 그녀를 만나는 횟수가 잦아질수록 그는 자신의 몸이 액체로 변해가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액체로 변한 자신을 끝없이 흡입하는 탈지면이었다. 아니, 그녀가 탈지면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그의 일방적 착각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녀 앞에서 혼미하게 흔들리면서도 한 가지 계략을 꾸미는 일은 잊지 않았다. 한우석의 청을 들어주긴 하되 시일을 끌 수 있는 대로 끌자는 것이었다. 그 시일은 그녀를 소유하게 될 때까지였다.
날이 갈수록 그는 그녀의 마력에 사로잡혀갔다. 3학년인 그녀는 졸업을 하고 미국 유학을 계획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학문적인 바탕도 갖추고 있었다. 그녀의 영문학적 지식은 그에게 생소한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그런 지식은 서구적인 세련미와 함께 그를 더욱 사로잡는 요인이었다.
“이 중령님은 결혼하셨어요?”
한 달이 가까워질 무렵 한희숙은 회화 공부의 한 대목인 것처럼 영어로 예사스럽게 물었다.
“아직 못했소.”
그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대답을 해놓고 나서 그 대답을 그리도 자연스럽고 태연하게 해치울 수 있는 자신에게 놀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내에 대한 죄책감보다는 한희숙이 마침내 보의준 관심에 가슴 벅차고 있었다.
일단 관심을 표명한 그녀는 한결 친숙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그를 바라보는 눈길이 그윽했고, 그에게 보내는 미소에 포근한 정이 담겨 있었다. 회화 시간은 차츰 밀회의 시간으로 바뀌어갔다. 두 달이 가까워질 무렵 마침내 그녀는 그의 소유가 되었다.
“안사람을 통해서 자네와 희숙이 얘길 들었네. 서로가 좋아한다니 기쁜 일이네.”
한우석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일이 해결된 다음 술자리를 마련하고는 더없이 만족스러운 기분에 취해 그를 아예 사위로 대했다.
한우석의 청은 그 한 건으로 끝나지 않았다. 적산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심은 끝이 없었다.
“내가 안 먹어도 누군가가 먹을 재산이고, 불법으로 먹자는 것이 아니라 똑같은 조건하에서 빽만 좀 동원하자는 것이네. 그러니 자넨 절대로 나쁜 짓을 하는 게 아니란 말일세.”
한우석은 새로운 건을 내밀 때마다 그에게 이렇게 말하곤 했다. 한우석은 욕심이 많을 뿐 틀린 말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나만 잘살자는 게 아니네. 자네 몫도 챙기고 있으니 그리 알게.”
한우석은 지나치듯 이런 말도 했다. 그 말은 그를 자극하기에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남한 단독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 몇 개월 동안에 걸쳐 그는 사회의 어수선함을 외면한 채 이권 취득에만 골몰해 있었다.
정부가 수립되면서 미군정이 막을 내렸다. 물론 미군은 주둔해 있었지만 그 기구는 대폭 축소되었다. 그의 파견 근무도 끝이 났다. 그는 원대 복귀를 하고 나서 전에 느끼지 못했던 묘한 이질감에 시달리게 되었다 파견 근무 6년 동안 몸에 익혔던 미군들과의 생활이 갑자기 바뀌면서 생겨난 것이었다. 우리말보다는 영어를 더 많이 썼고, 한글보다는 영문이 더 많은 공문을 대했던 생활이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영어를 한마디도 할 필요가 없고, 한자투성이의 공문을 대하게 되자 엉뚱한 곳에 잘못 와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는 특히 사무실 분위기에 심한 고역을 느끼고 있었다. 미군들의 사무실에도 명령은 엄존했다. 그러나 그들의 사무실에는 언제나 여유와 유연성이 흐르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군의 사무실은 그와 정반대의 긴장과 경직감으로 얼어붙어 있었다. 그것은 일본 군대의 분위기 그대로였다. 그는 그 이질감을 없애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안착감은 생기지 않고 날로 짜증과 싫증만 늘어갔다.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자신의 그런 증상은 외부적 환경의 변화만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그 원인은 내부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원대복귀한 생활에는 파견 생활에서 만끽했던 그 음성적인 속삭임이나 손짓이나 간지럼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는 3년 동안에 군인의 체질과는 거리가 멀게 변질되어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건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파견 생활을 후회하거나, 자신의 체질 변화를 염려하지 않았다. 그는 군대만이 아닌 또 다른 삶의 마당을 보았던 것이고, 그쪽 삶의 기기묘묘함에 마음 한 자락이 드리워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근무에 안정감을 찾지 못할수록 한희숙에게 몰
입했다.
그와 한희숙의 관계는 날이 갈수록 어찌할 수 없이 표가나게 되었다. 한우석은 이웃의 이목과 자식들의 교육 문제를 들어 정식으로 결혼에 대해 거론했다. 그런데 결혼의 시기상조를 내세운 것은 한희숙이었다. 결혼을 하면 대학을 그만둬야 하기 때문에 졸업 후로 미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는 공부를 중단하더라도 결혼을 시키려 했고, 그녀는 완강하게 버티었다.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10월이 저무는데 여순반란사건이 터졌다. 군부는 즉각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군대가 일으킨 반란인데다가, 진압이 필요했던 것이다. 군부 내에 침투해 있는 공산분자 일제 색출이 단행됨과 동시에 반란군 진압 작전이 전개되고 있어서 장교들의 전출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었다. 언제 전출 명령을 받게 될지 모를 뒤숭숭한 상황이었다. 행여라도 전출 명령이 떨어질지 모를 일이어서 그는 단단히 손을 써놓고 남쪽 끝 전라도 땅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를 신문으로만 읽고 있었다. 어떤 때는 근무 중에 읽었고, 어떤 때는 한희숙과 몸을 섞고 난 후 허탈한 상태에서 읽기도 했다.
“안 되겠네. 자네 희숙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가게, 자네도 더 나이 들기 전에 제대해서 공부를 해와 그게 군대 생활보다는 훨씬 나을 테니까”
한우석이 그를 불러 앉히고 단도직입적으로 한 말이었다. 그는 묵묵히 앉아 있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제대를 하고, 결혼식을 올리고, 미국으로 떠나는 일을 한 달 내에 처리하도록 한우석은 성급한 계획을 짜놓고 있었다.
“당신은 시골에 내려가 있어. 몇 년 미국으로 공부를 떠나야 하니까.”
그는 아내에게 이 한마디를 무뚝뚝하게 했고, 아내는 시키는 대로 이삿짐을 꾸렸던 것이다.
그는 계획대로 12월 중순에 한희숙과 함께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의 부모네들은 결혼만 서둘렀지 혼인 신고는 서두르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깜쪽같이 총각이었던 것이다.
한희숙은 영문학을 계속했고, 그는 장인의 권유를 따라 상과대학에 들어갔다. 그들은 4년 5개월 만인 1953년 4월에 귀국했다. 그동안 일어났던 6·25라는 전쟁은 휴전 협정이란 소문과 함께 계속 중에 있었다.
“둘 다 고생 많이 했고, 장하다. 자넨 고생 속에서도 공부를 다 마쳐 장하고, 희숙이는 남편 뒷바라지를 잘해서 장하고.”
장인 한우석은 넘치게 흡족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6·25 때문에 학비를 받아 공부한 것은 초기 1년 6개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다. 나머지 기간은 둘이서 힘을 합친 고학이었던 것이다.
“당신은 내 남편이에요. 남편이 나보다 학벌이 낮은 건 견딜 수 없는 일예요. 그건 내 자존심예요.”
한희숙이 자신의 공부를 포기하며 단호하게 한 말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해도 두 사람이 공부를 계속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한희숙은 놀랄 정도의 끈질김으로 그의 뒷바라지를 해냈던 것이다. 고생을 모르고 자란 그녀에게 그런 억척스러움과 인내심이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일이었다.
“자네, 고생해서 이룬 공부니 이제부터 크게 써먹어야지.”
그래서 그는 장인의 사업에 뛰어들었다. 장인은 벌써 파괴된 공장 일부를 복구시켜 가동하는 한편 수리 작업을 계속해 나가고 있었다.
“자넨 군인이었으니 전쟁터에서 어떻게 해야 살아날 수 있는지 나보다 더 잘 알겠지. 사업이란 바로 그 전쟁터나 마찬가질세. 하고, 작전이라는 것이 형편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져야 하듯 자네가 한 공부도 형편에 따라 활용을 잘해야만 할 것이네. 명심하게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그에게 장인이 엄한 어조로 한 말이었다.
장인이 주력하고 있는 사업은 방직 공장이었다. 휴전이 되고 사회 안정이 오편 틀림없이 번창하게 될 사업이라는 것이었다 인간 생활의 절대 요소인 의·식·주 중에 첫 번째에 해당하는 것이니 그로서도 장인의 확신을 납득할 수는 있었다. 그러나 그의 생각으로는, 전쟁이 끝나고 사회가 안정을 찾아가는 데 ‘의’가 먼저일까 ‘주’가 먼저일까를 따지고 있었다. 잿더미가 되다시피 한 서울 시가지를 아침저녁으로 보면서 하게 된 생각이었다. 옷감을 사고 팔자 해도 가게나 상점이 있어야 할 것이고, 도시의 꼴을 갖추는 데도 건물의 복구나 신축은 우선적으로 불가피할 것이었다. 그는 생각을 정리한 다음 장인에게 결론부터 말했다.
“건축업을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건축업?”
장인은 무슨 엉뚱한 소리냐는 반응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차근차근 설명해 나갔다.
“맞네, 자네 생각이 맞아!”
그의 설명을 반나마 들은 장인은 무릎을 치며 환호하듯 했다. 장인은 사업가답게 말을 빨리 알아들은 것이었다.
새 사업으로 건축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의 판단은 적중했다. 일거리는 많았고, 노임이 싼 노동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사업은 번창 일로였다
그러나 마침내 그의 앞에 파란이 닥쳐왔다 시한 폭탄일 수밖에 없는 그의 과거가 드러나고 만 것이다. 몇 년 동안에 걸쳐 철저하게 피임을 해왔던 한희숙이 평범한 여자의 삶을 살기로 작정하면서 임신의 필요를 느꼈고, 그전에 혼인 신고부터 해야 했던 것이다.
그가 세 아이의 아버지라는 사실은 한희숙네 집안을 발칵 뒤집는 사건이었다. 자신의 자식이 셋이라는 사실에 그도 놀랐다. 그는 미국으로 떠나면서 아내가 임신 4개월이었다는 것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다. 한희숙은 기절을 했고, 앓아누웠다. 그의 얼굴을 아예 보려고 하질 않았다. 그가 억지로 방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녀는 진저리를 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다가 하얗게 죽어가곤 했다.
“좋은 여자가 생겼을 거라는 눈치는 진작 챘었어요. 좋을대로 해야지요.”
아내는 무표정하게 말하며 도장을 찍었다. 그러나 문제는 이혼으로 해결되지 않았다. 한희숙은 혼인 신고를 거절했던 것이다 그녀는 그의 사죄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부모의 설득도 듣지 않았다.
“속이지 말았어야 해요. 사실대로 알면서 사랑하는 것하고, 속아서 사랑한 것하고는 천지 차이예요. 더러워요, 나가요, 나가요!”
그녀는 몸서리를 치며 부르짖었다.
설득에 지친 부모네는 그냥 혼인 신고를 마치고 말았다. 그러나 그녀는 마음을 돌리지 않은 채 병이 심해가고 있었다.
그는 사업에 열중하는 것으로 그 괴로움을 잊으려고 했다. 그래서 서너 가지의 사업이 모두 장인이 흡족해 할 만큼 번창해 나갔다.
“너무 애태우지 말게니. 충격이야 컸겠지만 인간사란 다 시간이 가면 해결되는 법이니까”
장인이 위로하곤 했다. 그러나 장인의 말은 맞지 않았다. 몸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녀는 1년이 가까워질 무렵 정신 질환을 일으켰다. 그녀는 6개월을 정신병원에 갇혀 있어야 했다. 퇴원을 하고 난 그녀는 전과 달리 그를 보고도 진저리를 치거나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그를 용서한 것이 아니었다. 그전의 태도가 감정을 잃은 무표정으로 바뀐 것이었다. 그녀는 전처럼 잠자리를 거부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몸은 싸늘하게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그로서는 그 무감각한 육신이 거부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다. 그녀는 아내가 아니라 동거인일 뿐이었다.
“이 서방을 용서해라…….”
장인이 그녀에게 남긴 유언이었다. 17년의 세월이 지나 있었다. 그때까지 그녀는 애를 낳지 못했다. 피임을 한 것이 아니었다. 심리적 요왼으로 영구 불임이 될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이었다. 5년째 되는 해에 그런 믿어지지 않는 진단을 받고나서 그는 전처가 키우고 있는 자식들을 위해 풍족한 돈을 내려보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녀는 25년 동안 동거인으로 있다가 그의 곁을 떠났다.
그는 경제적으로는 거부가 되었지만 가정적으로는 빈자로 산 세월이었다. 그는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전처를 들어앉히지 않았다. 이미 정을 통해오고 있던 젊은 여자가 있었던 것이다.
그가 국회의원에 뜻을 두게 된 것은 경제력으로만 만족할 수 없는 권력욕 때문인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그 다음에 사업에 도움이 될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국회의원에 당선되는 것은 사업을 일으키는 것에 비하면 식은죽 먹기였다. 그건 물론 돈의 신묘함이었다.
―할아버지, 그 불편하신 몸으로 자식을 위해 자서전까지 만드셨으니, 그저 감탄스럽고 놀라울 뿐입니다. 그 불굴의 정신력과 의지력은 할아버지가 아니고서는 발휘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할아버지께서는 역시 그렇게 남다른 면을 지니셨기에 위대하시고 거룩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어찌 제가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숩니까. 그리고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분이 또 한 분 계십니디. 아버지가 바로 그분입니다. 왜냐하면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그렇게도 위대하시고 거룩하시며 자랑스러운 생애와 업적을 길이 남기기 위해 책을 만들어내는 노역을 치렀고, 더욱이 할아버지의 생애를 착실히 뒤따르고 있으니 우리 가문을 그 얼마나 빛나게 하는 일입니까 저같이 못난 놈으로서는 감히 엄두도 못 낼 일을 실천하고 계시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할아버지, 제가 괜히 이렇게 긴 편지를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뒤늦게나마 깨달은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깨달음을 알려드리기 위해 섭니다. 할아버지, 기뻐해주십시오. 제가 바로 할아버지의 자서전을 새로 쓰겠습니다. 저도 뒤늦게나마 우리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해야 할 책임감을 느꼈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께 효도하는 자식이 돼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건 손자놈의 계속되는 비웃음과 야유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못된 놈, 내 자서전을 다시 써? 그래, 더 나이 들면 이 할애비 심정 알게 될 게다…….”
그는 편지를 들고 있던 오른손을 툭 떨구며 힘없이 중얼거렸다. 네댓 장의 편지가 아래로 어지럽게 흩어져 내렸다.
“의원님, 부르셨어요?”
안성댁이 옆에 와 서 있었다. 그는 허망한 눈길로 안성댁을 바라보며 무겁게 고개를 젓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 떨구어지며 종이 미약하게 흔들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안성댁이 고개를 가웃하며 돌아섰다. 그는 못 견디게 술을 한잔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안성댁을 부르진 않았다. 철저하게 교육을 받은 안성댁이 술을 줄 리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눈을 내려 감았다. 그의 아슴한 시야 속에서는 자신의 자서전이 낱낱의 낱장이 되어 삐라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19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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