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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숙님
2월 2일
불법 사드철거 김천 평화 촛불 제 974회
저녁을 먹고 역으로 오니 하늘엔 초승달이 맞이해 준다. 추위가 좀 누그러진 것 같다. 그치만 월요일부터 또 춥다고 한다.
의자를 끄집어내고 현수막을 꺼내고
준비해온 따뜻한 차와 먹거리,
현수막을 달고 있고,
낑낑거리며 앰프를 끌고 오고,
대략적인 준비가 끝났다.
따뜻한 대추차와 강정, 설 연휴 뒤끝이 실감난다.
오늘의 사회자는 김종희 사드배치반대 김천시민대책위 기획팀장.
묵념과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그리고 구호, "전쟁을 반대한다! 평화에 살자! 사드 뽑고 평화 심자!"
우리 모두 소중한 집회 참가자들이다.
유영재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연구소 연구위원 발언.
"이제 음력설이 지났으니까 진정한 의미의 을사년이 시작이 됐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을사년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우리가 중요하게 기억하고 있는 1905년의 을사년과 1965년 을사년 이야기를 하면서 올해 을사년은 또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눠보도록 하겠습니다."
1. 1905년 을사년 - 을사늑약 체결의 해
을사늑약이 1905년 11월 17일에 체결 됐습니다.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일본인 통감을 두어서 조선의 내정에 간섭할 수 있는 통로를 연 게 핵심 내용입니다. 초대 통감이 누구였죠? 이토 히로부미.
을사늑약이 체결되게 된 그 정치적 또는 지정학적 배경을 한번 살펴 보면 좋을 것 같은데요.
1894년 동학 농민들이 들고 일어나서 조선의 부패한 왕조에 대한 항의와 그다음 2차 봉기 때는 일본이 침탈하는 것에 맞서서 척양척왜를 외치면서 투쟁을 전개하다가 수많은 희생을 치렀는데, 청일 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면서 중국을 밀어낸 거에요.
그 뒤에 이어서 벌어진 게 러일 전쟁이죠. 1904년부터 5년까지 예상을 깨고 일본이 승리를 합니다.(1905. 9. 5)
그러니까 러일 전쟁이 끝난 직후에 한 두 달도 안 돼서 을사늑약이 체결된 겁니다.
러일 전쟁이 벌어지는 와중에 카스타테프트 밀약 다 아시죠? 그게 체결이 된 겁니다. 미국으로부터 일본이 조선을 관할한다라고 하는 것을 양해를 받고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는 식으로, 그다음에 영일동맹도 또 있었죠.
그래서 이제 청나라와 러시아를 밀어내고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조선에 대한 일본의 관할권을 인정받는 이런 과정들을 거쳐서 을사늑약이 체결이 된 겁니다.
그 결과가 어떻게 됐죠? 1907년도에 군대가 해산되고요. 1910년에 경술 국치를 맞이하게 되는 거죠.
1910년에 국권이 완전히 침탈당하기 전에 이미 1905년에 외교권이 먼저 박탈되고 그다음에 1907년에 군대가 해산된 것이죠.
그러니까 한 나라를 대외적으로 대표하는 가장 핵심적인 외교권 국방권 이거를 먼저 상실한 이후에 바꿔 말하면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과 국방권을 먼저 박탈한 이후에 조선의 국권을 완전히 일본이 차지하게 된 것이죠.
이후 40년에 걸쳐서 일본이 가혹하게 식민지 지배를 해 왔습니다.
그런데 러일 전쟁과 관련해서 2015년에 지금은 총 맞아 죽은 아베 전 일본 총리가 종전 70주년 담화를 하면서 뭐라고 얘기를 하냐면 '러일 전쟁은 식민지 지배 하였던 많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처구니가 없죠. 러일 전쟁의 결과로서 을사늑약이 체결됐는데 아베는 완전히 우리와 180도 다른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는 겁니다.
바로 그런 관점에서 아베가 군사 대국화를 추구하고 집단 자위권을 하고 그다음에 식민지배에 대한 부정을 계속해 왔고 그것을 그 이후 일본의 정권들이 계속 이어서 가고 있는 거죠.
그런 점에서 이 을사늑약은 우리의 주권이 침탈되기 시작한 그런 의미를 갖는 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분 을씨년스럽다는 얘기 아시죠? 을사늑약으로 인해서 그 뒤에 조선에서 펼쳐진 그 침통하고 음울한 그런 분위기를 을씨년스럽다라는 이야기로 그렇게 어원이 되었다라는 게 정설로 이어지고 있다고도 합니다.
그 정도로 을사늑약이 조선 민중들에게 가져온 충격이라고 할까 이런 것들을 알 수가 있는 거죠.
2. 1965년 을사년 – 한일국교수립의 해
이른바 한일 기본 조약이 체결되고 거기에 부속해서 청구권 협정, 어업 협정, 문화재 협정, 재일교포 지위 협정 이런 4개 협정이 체결이 됩니다.
그 한일 기본조약의 가장 쟁점이 되는 내용은 2조인데요.
그 내용이 뭐냐 하면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 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입니다.
그런데 이 조문에 대한 해석에서 일본과 한국이 건널 수 없는 차이를 보이고 있습니다.
일본과 미국의 이 한일 기본 조약 2조에 대한 해석의 핵심 차이 핵심적인 인식의 차이는 뭐냐 하면, 1910년도와 그 이전에 있었던 조약과 협정이 이미 무효다 이렇게 돼 있는데, 우리는 1910년과 그 이전에 맺었던 조약과 협정 그 자체부터 무효다 이렇게 인식을 하고 있는 반면, 일본은 그것은 유효하고 합법이고 - 한일 강제 병탄 조약이나 이런 것들은 다 합법이고 1945년도 종전 즉 일본의 패전으로 해서 그 시점부터 이미 무효가 되었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 얘기는 멀리로는 1905년부터 45년까지 가깝게는 1910년부터 45년까지의 일제 식민 지배를 불법으로 보는 것이냐 합법으로 보는 것이냐 그 차이입니다.
우리는 당연히 일본의 35년에 걸친 식민 지배가 불법이다 이렇게 주장을 하는 거고 그렇게 인식을 하고 있는 거잖아요. 그런데 일본은 그렇게 인식하지 않고 있는 거죠.
그래서 일제 식민 지배는 합법이라고 한 겁니다. 그러니까 그 인식에 기초하면 조선인 노동자들에 대한 강제 동원 이것도 합법인 거예요.
왜냐하면 일제 식민지배가 합법이었기 때문에 그 조건에서 각종 법령을 만들고 그에 기초해서 조선인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했기 때문에 그것은 불법이 아니라고 보는 겁니다.
또 한 가지 이제 문제는 어업 협정도 체결했는데요. 이승만이 반민특위를 해체하고 친일파들을 등용했다고 하지만 이승만 개인으로서는 일본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화선이라는 것으로 독도에 대한 관할권 이런 것들을 확보하려고 그랬는데,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이 어업 협정에서, 독도 인근을 한국과 일본의 공동어로수역으로 설정함으로써 독도 영유권에 대한 논란을 야기한 겁니다.
김종필과 오히라 사이에 비밀 협상을 했는데 그때 독도 문제가 논란이 되니까 김종필이 '독도를 완전히 폭파해 버리자' 이런 얘기까지 할 정도로 이게 문제가 됐던 겁니다.
그러니까 이 한일 국교 정상화 과정에서 독도에 대한 한국의 영유권을 확실히 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한테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줬다는 거죠.
아까 러일 전쟁 얘기를 했는데 러일 전쟁을 하면서 맨 처음 일본에게 침탈된 영토가 바로 독도입니다. 일본은 러일 전쟁에 군사적으로 쓸 목적으로 독도를 점령했던 거예요. 그게 처음으로 독도가 일본에게 침탈된 영토입니다.
그런데 65년에도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일본이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했다는 거죠.
그다음에 청구권 협정, 이 핵심은 '두 나라와 국민의 재산과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샌프란시스코조약 제4조 (a)에 규정된 것을 포함하여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확인한다.'(2조 1항) 인데 당시 우리는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 지배에 대한 배상금이다 이렇게 주장을 하기도 했지만 일본은 뭐라고 얘기했습니까? 그것은 한국의 독립 축하금이라고 얘기를 했어요.
그러면서도 이 두 나라와 국민들의 '재산이나 청구권에 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으로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 뒤에 위안부 문제라든지 강제 동원 문제라든지 한국인 원폭 피해자 문제라든지 이런 문제들을 해결하는 발목을 잡아온 겁니다.
그런데 아까 제가 합 6억 달러라고 말씀드렸죠. 그런데 필리핀은 얼마를 받았냐? 합 8억 달러를 받았습니다. 필리핀이 오히려 더 많죠. 근데 우리는 최소 35년 동안 일제 식민 지배를 받았지 않습니까?
그런데 필리핀은 얼마 동안이냐? 일본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면서 동시에 필리핀을 침략을 했고 42년부터 필리핀을 지배했어요. 그러니까 길게 잡아도 한 4년밖에 안 되는 겁니다.
실제 전투를 점령한 것에 기초해 본다면 그렇다면 이 점령 기간으로 보면 사실상 거의 10배가 차이가 나는 거잖아요. 그런데도 필리핀이 8억 달러를 받았는데 우리는 상업 차원까지 해도 6억 달러밖에 못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그 당시에 많은 국민들이 들고 일어난 거예요. 재야 세력, 대학생들이 들고 일어나 가지고 데모하고 시위하고 이렇게 하니까 결국 윤석열이 했던 것 같은 계엄령을 선포했던 거예요.
그래서 보통 뭐 6.3 사태 이렇게 얘기를 하잖아요. 6월 3일 날 계엄령을 선포했기 때문에 6.3 사태라 하는 겁니다.
그렇게 국민들이 들고 일어났던 이유는 어느 면으로 보나 우리가 용납할 수 없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제대로 명확히 하지도 못하고,어업협정 청구권 협정 뭐 이런 모든 문제들에서 굴욕적인 그런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굴욕 협상 굴욕적인 대일 수교 협상 반대한다는 그런 투쟁이 전국적으로 벌어졌던 겁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해서 피해 당사자들이 지속적으로 투쟁을 하고, 한국의 법원에서 한국인 노동자들이 일제에 의해서 강제 동원된 그 부분에 대해서 일본 기업이 배상을 하라는 판결을 했단 말이에요.
2018년도에 최종적으로 대법원에서 그런 판결을 했는데 그걸 누가 뒤집었습니까?
윤석열이 뒤집었죠. 이른바 제3자 변제안이라는 것으로. 그러니까 일제가 우리를 불법 식민 지배했고 그에 기초해서 한국인 노동자들을 강제 동원해서 강제 노동을 시켰기 때문에 일본 기업이 배상하라 이게 대법원 판례인데 이거를 뒤집어서 일본 정부나 일본 기업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고 국내외 기업이나 이런 데들이 모금을 통해서나 변제를 하도록 함으로써 일본의 불법적인 식민지배 그로 인한 일본의 한국인 노동자들의 강제 동원 이것에 면죄부를 줬단 말입니다.
그것은 정확히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평통사가 그런 굴욕적인 협상 결과 그런 대안을 내놓은 것에 대해서 이 '매국적인 윤석열 정부 퇴진하라'는 그런 입장을 당시에 발표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런데 1965년도에 왜 이런 한일 수교가 맺어졌을까 생각해 보면 이것도 역시 한미일 정권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입니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 때부터 지속적으로 한일 간의 수교를 요구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서 1949년도에 유럽에서 나토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만든 것처럼 이 동아시아에서도 아시아판 나토를 만들려고 하는 미국의 오랜 요구가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 정권 때부터 계속 한일 수교를 요구했어요.
그렇지만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적어도 이승만은 일본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훨씬 더 많은 배상 요구를 하고 일본에 대해서 굉장히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던 겁니다. 그래서 한일 국교가 수립이 안 됐던 거예요.
근데 박정희 정부가 수립되면서 당시 미국 입장에서는 국제 정세가 여러 가지로 복잡하고 본인들에게 불리한 여러 가지 상황들이 있었습니다.
중국과 프랑스가 수교를 한다든지, 미국이 북베트남을 침공을 한다든지, 중국이 핵실험을 64년도에 성공한다든지 이런 일들이 있으면서 미국 입장에서 볼 때는 한일 간의 국교 수립이 굉장히 절박하게 요구되는 그런 시기였어요.
또 일본으로서는 전범국, 패전국이라고 하는 이거를 하루빨리 벗어 던지고 싶은 거예요. 이른바 말하자면 보통 국가로 빨리 전환을 하고 싶은 거예요. 그리고 자본주의가 성장하면서 자본의 해외 진출 이런 것들이 필요했던 거죠.
그러니까 일본으로서도 한일 간의 국교 정상화를 통해서, 한국을 말하자면 경제적 분업 구조에서 하위 체계로 만들어서 일본의 자본 진출을 꾀하는 그런 요구도 있었기 때문에 일본도 역시 한일 국교 수립을 강력히 원했던 겁니다.
박정희 정부로서는 군사 쿠테타를 하니까 정통성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것을 극복하려면, 국민들을 무마하고 국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경제 발전을 해야 해요.
근데 경제 발전하려면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그 자금이 필요했던 거죠.
그래서 한미일의 이해관계가 정권들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져서 한일 국교 정상화가 이루어졌던 겁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주권은 제대로 지켜지지 못하고 굴욕적인 협상을 함으로써 지금까지 65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일 간의 과거사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계속 쟁점으로 남아 있게 된 것입니다.
3. 2025년 을사년 – 민주의의와 평화의 봄을 부르는 해
올해 역시 을사년이죠. 올해 을사년은 어떤 해로 기억되어야 할까요? 네 윤석열 파면으로부터 시작이 돼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마도 윤석열 정권이 계속되었다면 윤석열 정권이 지난 3년 가까이 해왔던 한미 동맹의 강화, 한미일 동맹의 추구 이런 것들이 훨씬 더 급속히 더 많이 진전됐을 가능성이 높죠. 구체적으로 얘기하면 한일 군수지원협정이 체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런데 다행히도 어찌 보면 역설적으로 고맙게도 윤석열이 뻘짓을 해서 그게 일단은 차단이 된 거죠.
미국 입장에서 볼 때는 이게 너무 아까운 거죠. 윤석열이 미국의 오랜 숙원인 이 한미일 동맹을 추진하는 데 정말 효자 노릇을 한 거잖아요.
근데 이제 이게 어그러지게 생긴 거예요. 그러니까 미국이 겉으로는 '이 내란 사태에 대해서 한국 국민들의 민주주의 회복력을 지지한다' 이런 얘기를 하고 있지만, 사실은 미국의 핵심적인 이익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의 오랜 숙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한미일 동맹이 흔들리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보려고 지금 갖은 방법을 동원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야당에 대한 각종 압력과 길들이기가 다방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12월 7일 날 있었던 1차 탄핵 소추안에 한미일 동맹 강화에 대한 한일 관계 강화에 대한,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경원시 적대시하는 이런 내용이 1차 탄핵 소추안에 들어가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미국의 전문가들이 총동원돼 가지고 '한미일 관계 강화가 탄핵 사유에 포함되는 것은 충격적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서 야당에 대한 압력을 행사해 왔습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31일 날 미국 의회 보고서가 있거든요. CRS라고 하는데 CRS 보고서에 어떤 내용이 나오냐면 미국의 속내가 아주 그대로 드러납니다.
제가 그 부분을 좀 길지만 읽어드리면요.
'윤 대통령은 2022년 취임한 이후 북한, 중국, 일본, 우크라이나 문제와 관련해 미국과 더 긴밀히 공조해 왔다. 민주당은 완전히 다른 정책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다.'
'또 윤 대통령은 미국 주도의 인도 태평양 동맹과 파트너쉽 네트워크에 한국을 통합시키고 한국을 민주주의의 가치를 옹호하는 글로벌 중추 국가로 만들고자 했지만 다수의 진보주의자들은 윤석열의 이런 정책을 비판해 왔다'라고 야당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런 미국의 이 십자포화에 야당이 무릎을 꿇습니다.
그래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는 '한미일 협력이 앞으로도 지속될 거다' 이렇게 얘기했고, 민주당은 최근에 한미 동맹 강화 결의안을 발의했습니다.
트럼프 정권 출범과 동시에 이런 식으로 미국이 십자포화를 퍼붓는 것이고 그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서 이재명 민주당 대표와 민주당이 이렇게 미국 눈치를 보면서 미국 좋을 만한 그런 말들을 하고 있는 겁니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서 볼 때 2016년 촛불 혁명이 문재인 정권에서 실패했던 것처럼, 2025년 조기 대선에서 민주당이 정권 교체에 성공하더라도 적어도 한미동맹 한미일 동맹 이 분야에 있어서는 커다란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렵다 이렇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뼈 아프게 경험하고 있듯이 박근혜 정부 하에서 사드 배치가 결정되고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 때 사드가 1차 배치하는 것을 보면서,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 정권 교체가 되면 사드 문제가 해결되겠지 그런 기대를 가지지 않았습니까?
근데 그 기대를 문재인 정부가 뒤통수를 쳤잖아요.
마찬가지로 2025년 설사 정권이 교체된다 하더라도 이 사드 문제나 한미일 동맹 문제, 한미동맹 강화 문제에 있어서는 국민의힘이나 민주당이나 본질적인 차이가 없을 수 있다 이런 겁니다. 슬프게도 안타깝게도. 그러나 이런 인식을 우리가 가지지 않으면 문재인 정부 때처럼 또다시 우리가 뒤통수를 맞을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인식은 엄정히 냉정히 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트럼프가 등장해서 약탈적 패권주의가 강화돼서 방위비 분담 10배 내라, 관세도 더 올리겠다, 한미 FTA 재협상하자 이런 요구가 쏟아질 가능성이 있습니다.
사드 추가 배치 얘기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암울한 정세가 예상되기도 하지만 또 반면 쉽지는 않겠지만 북미 대화가 재개된다면 ,북핵 미사일 동결이나 폐기와 맞물려서 대북 적대정책의 철회 방안으로 한미 연합연습이 중단되고 이어서 주한미군 감축이나 철수의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트럼프가 기존의 미국 주류와는 다른 그런 출신과 그런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가능성을 쉽지는 않지만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바로 이런 정세들을 보면서 우리가 우리 스스로 우리의 힘으로 사드를 뽑아내고 한미일 동맹을 저지하는 그런 각오를 다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정세이기 때문에 2025년 을사년은, 1905년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등 강대국의 야합에 따른 을사늑약으로 인한 주권 유린, 1965년 미국과 일본의 패권적 요구에 따라서 식민지배의 불법성을 명확히 하지 못한 채 지금까지 식민지배 유산을 청산하지 못한 교훈을 새기면서, 안으로는 지속되는 대란을 윤석열 파면과 중형 선고 등을 통해 확실히 진압하고, 그래서 이런 것들을 통해서 흔들림 없는 국민주권을 확고히 세우고, 밖으로는 미국과 일본 등의 부당한 지배와 간섭을 극복하고 한미동맹 폐기와 한미일 동맹 저지를 통해서 주권과 평화를 지켜내기 위해 경각심을 가지고 단단한 준비 태세를 갖춰서 중단 없이 흔들림 없이 적극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한 해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내란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는 희망의 근거를 발견하고 있습니다.
바로 2030 여성들을 중심으로 한 응원봉 시위대들이 여의도와 광화문에서 남태령과 한남동에서 각양각색의 응원봉을 들고 밝고 아름다우면서도 강인하고 지속적인 투쟁에 나서는 모습을 보면서 오랜 기간에 걸친 우리 기성세대들의 투쟁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또한 우리 진보 평화 운동의 새로운 가능성을 확인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무엇보다 이번 동원봉 시위의 소중한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2030 세대들이 사회운동 주력으로 성장해서 다시 만난 세계는 계엄도 전쟁도 없는 민주주의 꽃이 만발하고 평화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마지막으로 설 연휴 기간에 제가 영화를 한 편 봤는데요. '하얼빈'이라는 영화.
아는 내용이잖아요. 근데 시나리오를 잘 짰다는 생각이 들었고, 연기 영상 음악 다 수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혹시 안 보신 분 있으면 보시면 좋겠고요.
거기에 나온 한번 같이 좀 기억하면 좋겠다고 생각되는 대사를 읽어드리고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어둠은 짙어오고 바람은 더욱 세차게 불어올 것이다. 불을 밝혀야 한다. 사람들이 모일 것이다. 사람들이 모이면 우리는 불을 들고 함께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우리 앞에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절대 멈춰서는 아니 된다. 금년에 못 이루면 다시 내년에 도모하고, 내년, 내후년, 10년, 100년까지 가서라도 반드시 대한국의 독립권을 회복한 다음에라야 그만둘 것이다.
그렇게 해서 기어이 앞에 나가고, 뒤에 나가고, 급히 나가고, 더디 나가고, 미리 준비하고 뒷일도 준비하고 모든 것을 준비하면 반드시 이루고자 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까지 우리는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가야 한다. 불을 들고 어둠 속을 걸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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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봉란 어머니가 예쁘게 차려입고 나오셨다.
평상이 있는 국숫집
- 문태준
평상이 있는 국숫집에 갔다
붐비는 국숫집은 삼거리 슈퍼 같다
평상에 마주 앉은 사람들
세월 넘어온 친정 오빠를 서로 만난 것 같다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손이 손을 잡는 말
눈이 눈을 쓸어 주는 말
병실에서 온 사람도 있다
식당 일을 손 놓고 온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평상에만 마주 앉아도
마주 앉은 사람보다 먼저 더 서럽다
세상에 이런 짧은 말이 있어서
세상에 이런 깊은 말이 있어서
국수가 찬물에 헹궈져 건져 올려지는 동안
쯧쯧쯧쯧 쯧쯧쯧쯧,
큰 푸조나무 아래 우리는
모처럼 평상에 마주 앉아서
이어서 노래 '낙엽따라 가버린 사랑'
'홍시'
'안동역에서'
시낭송과 노래를 불러준 우리의 젊은 어머니, 건강하소서.
그렇게 끝난 오늘 집회, 우리도 응원봉 구할까 우스개 소리도 하며 의자들을 옮긴다.
그래도 뚜벅뚜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