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박성은리아입니다.
이번에 다녀 온 성지는 배티성지입니다. 예전 친구와 차 타고 지나다가 아름다운 성당이 있길래 들려 보았 던 바로 그곳이더라구요.
그 땐 참 예쁜 곳이구나 라고 생각만 했었지 성지라고는 생각을 못했었는데 이곳이 성지라는 걸 알게 되고 벼르고 별러 드디어 다녀왔습니다. 생각보다 꽤나 넓고 역사도 깊은 곳이었습니다.
배티성지는 한국 천주교 대표 성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첫째, 최양업 신부님과 선교사들의 사목 중심지,
둘째, 조선대목구 최초의 신학교,
셋째, 복자 오반지 바오로와 무명 순교자들의 안식처,
넷째, 박해 시대 비밀 교우촌 이라는 한국 천주교의 중요한 역할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기록 상으로 정확히 확인 되는 것을 아니지만, 1801년 신유 박해 이후 예로부터 사람들이 거의 살지 않던 오지인데다 충청도와 우도, 경기도의 접경 지대인 이곳으로 박해를 를 피해 천주교 신자들이 숨어 들기 시작한것으로 추정합니다. 1801년 신유 박해 이후 이후 박해가 계속 되면서 신자 수는 점차 늘어나게 되고 1830년대 초에 와서는 믿음살이를 영위하는 신자들이 거주하는 안전하고 훌륭한 교우촌들이 산재하게 되었습니다.
1837년 5월에는 모방(나베드로) 성인 신부님이 배티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였습니다. 당시 교회 밀사로 활동하던 김프란치스코의 집도 이곳이었습니다.
1850년에는 다블뤼(안 안토니오) 성인 신부님이 조선대목구 신학교를 설립한 뒤 배티 교우천에 두칸짜리 초가집을 매입하여 학교 건물로 사용 하였습니다. 1853년 여름부터는 최양업 신부님이 이 초가집에 살면서 전국 다섯개 도에 흩어져 있는 교우촌을 순방하는 한편 틈틈이 신학생들을 지도하였습니다. 최양업신부님에 이어 배티 교우촌을 방문한 사제는 메스트르(이 요셉)신부님과 페롤(권 스타니슬라오)신부님이었습니다. 특히 순교자 프티니콜라(박 미카엘) 신부님은 1858년 10월부터 배티 교우촌을 자신의 사목 활동 거점으로 정하고 이곳에 있는 초가집을 성당겸 사제관으로 삼았습니다 다블뤼 주교님이 배티 교우촌에 와서 견진 성사를 집전한것도 이때였습니다.
1866년 병인 박해가 발생 한 뒤에도 경상남도를 순방하던 칼래(강 니콜라우) 신부님이 삼박골 교우촌으로 피신 해 와서 보름 남짓 머물며 미사를 봉헌 하고 성사를 집전하다가 소학골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후로 계속된 박해 때 배티와 인근지역에 흩어져 있던 교우촌에서는 수 많은 순교자들이 탄생합니다. 기록상으로 확인되는 순교자만 34명입니다.
*성지 둘러보기*
구불구불 배티 고개를 돌고 돌아 오르고 올라 내려 가는길에 '14인 무명 순교자의 묘' 라는 표지판을 보고 차를 세웠습니다. 드디어 성지 순례길의 시작 인가 봅니다.
표지판 옆의 좁은 오솔길은 돌 계단으로 차분히 채워져 걷기 좋았습니다.
그 길 끝에는 정말 순교자의 묘가 있었습니다.
마치 하얀 나비들이 내려 앉아 있는듯 작은 십자가들이 그들이 있는 장소를 말 없이 알려 주고 있었습니다.
순교자의 묘를 지나 내려 오는길에 최양업 신부님의 옛 성당을 만났습니다. 이곳은 제가 가장 가보고 싶었던 장소 이기도 했습니다.
이 초가집이 최양업 신부님의 성당겸 사제관입니다.
병인 박해 순교자 오 데레사의 묘입니다.
성인 최경환 프란치스코,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 복녀 이성례 마리아의 흉상입니다.
우리나라 두번째 신부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입니다.
최양업 신부의 옛성당 옆에 있는 십자가의 길입니다.
옛성당에서 내려와 길을 걸어 내려 오면 최양업 신부님의 박물관이 나옵니다.
박물관의 외관은 최초의 조선대목구 신학생인 최양업이 동요 최방제(프란치스코 하비에르), 김대건(안드레아)과 함께 유학 했던 마카오의 조선대목구신학교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 건물과 인근에 있는 성 안토니오 성당의 외관을 그대로 재현한 것입니다.
이 다리는 양업교라는 다리입니다. 이 양업교는 마카오(박물관)와 조선(배티순교성지)을 이어 주는 배를 상징하며 그 아래를 흐르는 양백천 상류는 서해를 의미합니다.
최양업 신부 박물관은 유물 전시관으로서의 박물관이 아니라 누구나 보고, 느끼고, 기도할 수 있는 스토리 텔링 체험관으로서의 박물관입니다. 현재의 최 첨단 정보 기술을 이용하여 한국에서는 최초로 시도 된것입니다.
전체 주제는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 시성을 기원하는 '만남과 동행'이고 5개의 체험관과 1개의 기획실, 1개의 시복 시성 기원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제1 전시실입니다. 한국 천주교회를 회상하고 발자취를 다라가는 공간으로 나뭇가지에 걸린 연표를 따라 가노라며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한국 천주교외의
특수한 성립 과정,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극복해 간 신앙의 역사를 확인 할 수 있답니다,
제2 전시실 최양업 신부님의 생애와 숨결을 느낄 수 있는 곳입니다.
제3 전시실에서는 최양업 신부님의 사목 여정을 동행 하며 사목 활동을 체험 할 수 있습니다.
이곳은 최양업 신부님과 함께 기도하는 장소라고 제 맘대로 해석해봅니다.
제4 전시실은 최양업 신부님의 저술 및 관련 자료를 알아 보는 공간입니다.
이곳은 5관 멀티홀이다. 순례객들이 모여 시청각 매체를 통해 순교 영성을 깨우고 배울 수 있는 공간입니다.
제6 전시실은 카톨릭 미술가 초대전, 박물관 소장품 교환 전시 및 지역 문화 예술가들이 활용할 수 있는 전시 공간입니다.
박물관을 나와 양업교를 건너 오른쪽 언덕을 오르다 보면 최양업 신부 탄생 성당이라고 불리는 윗성당이 나옵니다.
성당 내무 모습입니다.
성전 왼편에 성인 유해실이 있습니다.
가장 오른쪽은 오반지 (바오로), 그 오른쪽에 긴대건 신부 그리고 최경환(프란치스코)입니다.
성전 우측엔 성체 조배실이 있습니다.
윗성당은 제가 생각지도 못한 감동과 은혜를 느낄 수 있었던 장소였습니다.
윗성당을 나와 소나무길을 걸어 오르다 보면 십자가의 길로 이어 집니다. 그 오르막길을 걸어 오르다보면
저~ 멀리 성모 마리아님이 반겨 주시는 장소가 나옵니다. 이곳은 6인의 무명 순교자의 묘와 야외 미사를 드릴 수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성당입니다.
대성당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보며 박해를 피해 이곳으로 숨어 들었던 천주교 신자들의 믿음의 뿌리를 느끼며 배티 성지 순례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