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편에서 계속>
7사단은 압도적인 중공군에 밀려 흩어져 있던 무렵인 5월 28일 새벽 2시에 미 10군단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았다. 인접한 미 2사단 지역으로 중공군 공세가 몰려 돌파구가 더 크게 넓혀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미 10군단은 더 몰리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방어선을 새로 조정하는 차원에서 7사단의 이동을 명령했다.
당시 7사단의 인원 손실은 3300여 명에 달했다고 육군본부의 <현리-한계 전투>는 적고 있다. 그럼에도 7사단은 풍암리로 이동한 뒤 급속한 재편성에 들어갔다고 한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전선을 돌파당한 뒤 벌써 이틀이 지날 무렵이었다.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7사단이 이동한 지역을 향해 다가왔다. 7사단이 이동했던 풍암리라고 하는 지역은 인접한 횡성과 속사리 쪽으로 병력을 옮기는 길목에 해당했다. 따라서 풍암리를 다시 내준다면 중공군은 서쪽의 횡성, 동남쪽의 속사리로 진출하면서 자신들의 돌파구를 대규모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셈이다.
중공군은 5월 18일 오후 5시 무렵에 풍암리로 진출하면서 7사단을 향해 공격을 벌여왔다. 국군 7사단의 3연대와 5연대가 천신만고 끝에 후퇴작전을 벌인 뒤 방어진지를 다시 구성한 지 겨우 1시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48시간 이상을 잠도 자지 못한 채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며 쫓겨 내려왔던 7사단 장병은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군이 두려웠던 중공군
비록 미 8군 예비로 있다가 급거 동부전선으로 이동했던 미 3사단 15연대의 지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완강하게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고 한다. 일종의 배수진(背水陣)과 같은 심리적인 작용도 있었을 법하다. 결국 7사단 3연대와 5연대 장병은 이곳을 추가 점령해 자신의 돌파구를 크게 확장하려 했던 중공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에 비해 국군 5사단의 형편은 좀 나았다. 이들은 중공군의 초반 공세에 그렇게 맥없이 물러서지는 않았다. 중공군은 역시 12군과 27군, 모두 6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5사단의 전면을 공격했다. 공세를 벌인 시점과 방식도 같았다. 역시 거센 사전 포격으로 5사단의 진지를 때렸다. 그러나 5사단은 완강하게 저항을 펼쳤다. 전방에 선 5사단의 35연대와 27연대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진 시간은 5월 17일 새벽 3시 30분경이었다. 중공군에게 급격하게 밀린 형국이 아니었다. 방어선을 돌파한 중공군과 거듭 교전을 벌이다가 우측으로 인접한 국군 7사단이 급거 후퇴함으로써 생긴 공백 때문에 물러섰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평소의 훈련과 준비가 부족했던 5사단의 지휘체계도 곧 혼선을 빚고 말았다.
7사단은 압도적인 중공군에 밀려 흩어져 있던 무렵인 5월 28일 새벽 2시에 미 10군단으로부터 철수명령을 받았다. 인접한 미 2사단 지역으로 중공군 공세가 몰려 돌파구가 더 크게 넓혀질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미 10군단은 더 몰리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방어선을 새로 조정하는 차원에서 7사단의 이동을 명령했다.
당시 7사단의 인원 손실은 3300여 명에 달했다고 육군본부의 <현리-한계 전투>는 적고 있다. 그럼에도 7사단은 풍암리로 이동한 뒤 급속한 재편성에 들어갔다고 한다. 중공군의 공격으로 전선을 돌파당한 뒤 벌써 이틀이 지날 무렵이었다. 중공군은 여세를 몰아 7사단이 이동한 지역을 향해 다가왔다. 7사단이 이동했던 풍암리라고 하는 지역은 인접한 횡성과 속사리 쪽으로 병력을 옮기는 길목에 해당했다. 따라서 풍암리를 다시 내준다면 중공군은 서쪽의 횡성, 동남쪽의 속사리로 진출하면서 자신들의 돌파구를 대규모로 확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는 셈이다.
중공군은 5월 18일 오후 5시 무렵에 풍암리로 진출하면서 7사단을 향해 공격을 벌여왔다. 국군 7사단의 3연대와 5연대가 천신만고 끝에 후퇴작전을 벌인 뒤 방어진지를 다시 구성한 지 겨우 1시간 정도 지난 시점이었다. 48시간 이상을 잠도 자지 못한 채 중공군과 교전을 벌이며 쫓겨 내려왔던 7사단 장병은 이번에는 물러서지 않았다.
미군이 두려웠던 중공군
비록 미 8군 예비로 있다가 급거 동부전선으로 이동했던 미 3사단 15연대의 지원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이들은 완강하게 중공군의 공격에 맞서 싸웠다고 한다. 일종의 배수진(背水陣)과 같은 심리적인 작용도 있었을 법하다. 결국 7사단 3연대와 5연대 장병은 이곳을 추가 점령해 자신의 돌파구를 크게 확장하려 했던 중공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그에 비해 국군 5사단의 형편은 좀 나았다. 이들은 중공군의 초반 공세에 그렇게 맥없이 물러서지는 않았다. 중공군은 역시 12군과 27군, 모두 6개 사단 병력을 동원해 5사단의 전면을 공격했다. 공세를 벌인 시점과 방식도 같았다. 역시 거센 사전 포격으로 5사단의 진지를 때렸다. 그러나 5사단은 완강하게 저항을 펼쳤다. 전방에 선 5사단의 35연대와 27연대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진 시간은 5월 17일 새벽 3시 30분경이었다. 중공군에게 급격하게 밀린 형국이 아니었다. 방어선을 돌파한 중공군과 거듭 교전을 벌이다가 우측으로 인접한 국군 7사단이 급거 후퇴함으로써 생긴 공백 때문에 물러섰던 것이다. 그러나 역시 평소의 훈련과 준비가 부족했던 5사단의 지휘체계도 곧 혼선을 빚고 말았다.
- 중공군 5차 2단계 공세가 펼쳐지기 전 미군들이 전차에 올라타 이동 중이다.
중공군 31사단이 다음 공로(攻路)를 결정하지 못하고 2시간 이상을 지체했다는 점이다. 이들은 후방 깊숙이 진출해 한국군의 후방을 차단하라는 임무를 받은 상태였다. 그러나 공격을 펼치는 과정에서 미군 전차를 만나자 매우 당황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는 아군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지체’였다. 그 만큼 중공군이 미군을 마음속으로 두려워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중공군 31사단 또한 한국군 7사단 정면을 때린 뒤 반나절 만에 25㎞를 이동해 오마치 고개를 압박한 중공군 60사단에 못지않은 임무를 지니고 있던 상태였다.
중공군 31사단은 인제~횡성~속사리를 잇는 전략 요충인 풍암리를 점령하면서 아군의 후방 요충을 장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따라서 종심기동으로 국면을 크게 전환하려는 중공군 수뇌부에게는 중공군 60사단 못지않게 매우 중요한 일을 맡았던 부대였다. 그러나 이들은 결국 길에서 만난 미군 전차부대 때문에 상당한 지체를 했다. 아울러 전력을 수습한 5사단 각 연대의 분전으로 제 시간에 종심기동을 펼쳐 당초의 목적지에 도달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지체하고 말았다.
- 6.25전쟁 중의 국군 모습이다. 정신교육의 장면으로 추정할 수 있는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