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정씨 포은 정몽주(1337~1392)는 경북 영천 출신으로 고려 문하시중을 역임하였고 문무를 겸한 충신이었다. 연안이씨 저현 이석형(李石亨 1415~1477)은 경기관찰사 호조참판을 지내고 연성부원군에 봉해졌고 문장가이었으며 정몽주의 손자 정보(鄭保)의 딸과 혼인했다.
2. 묘를 쓴 경위
* 정몽주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이 보낸 자객에 의하여 피살당했는데 개경인근에 假매장되었다. 1406년 고향 영천으로 이장하려고 운구를 하던 중 풍덕천에 이르러자 명정이 바람에 날려가서 현재 묘가 있는 곳에 떨어졌고 모두 그 곳이 좋다고 하여 안장하였다.
* 정몽주의 고손녀인 정보의 딸은 이석형에게 시집가서 산후병으로 요절하였고 이에 정보가 슬퍼하여 자기의 신후지에 묻었고(현재 정보의 묘는 포은 묘의 백호쪽에 있다) 뒤에 이석형이 1477년 죽자 이 곳에 합장하였다.
3. 누구 묘가 진혈인가?
* 정몽주의 묘소는 명당으로 소문이 났고 선조의 비 의인왕후의 능지로 천거되기도 하였으나 선조가 충신무덤을 손댈 수 없다고 반대하여 무사했다. 그런데 이석형의 후손 중에서 영의정과 대제학이 배출되면서 번창하자 이석형의 묘가 진혈이라는 유력한 견해가 대두되었다. 누구 묘가 진혈인가?
* 두묘를 비교해보면, ①전체적인 구도가 포은 묘가 중앙이고 이석형 묘는 청룡이다. ②포은 묘는 입수에서 단단하게 내려와서 당판을 크게 펼쳤는데 이석형 묘는 당판이 앉은 자리(혈처의 방석이라 할 수 있다)가 좁아서 기운이 새어나가기 쉽다. ③포은 묘는 이석형 묘가 가까운 청룡이 되지만 이석형 묘는 고개를 내밀어 바람을 맞는다. 이석형 묘를 포은 묘보다 나란히 또는 뒤로 옮겨야 맞다. ④관룡자로 재어보니 포은 묘는 생기가 가득한데 이석형묘는 위로 옮겨야 생기가 있게 된다.
포은 묘는 발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성삼문은 절손되고 묘도 사람의 발길없이 쓸쓸하다) 이석형의 후손 발복처는 달리 찾아야 된다.(202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