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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호주 워홀생활의 하이라이트, 호주일주가 시작됐다.
가장 중요한 자동차 점검도 마쳤고, 음식도 넉넉히 사뒀고,
모든 준비가 끝났다.
혹시 빠진 게 있어도 상관없었다.
가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채우고 불필요하면 버리면 되니까.
무엇이든, 어디에서든 우린 즐길 준비가 돼 있었다.
그런데 사람 맘이란 참 알 수가 없다.
막상 출발일이 다가오자 몸은 계속 피곤하고,
날 얼른 짊어지고 떠나주시오 하는 산더미 같은 짐들이 부담스럽기만 하다.
한국집으로 보내고 줄이고 줄이고 또 줄여봐도
하루하루 백팩에서 먹고 자고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는 배낭여행이 아니라
차에서 먹고 자는 캠핑 여행인 탓에 기본적인 살림살이를 다 챙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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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모든 짐을 매일 아침저녁으로 앞좌석과 뒷좌석,
트렁크에 옮기는 일을 담당했던 남편에게 심심한 위로와 감사를 전하며,
여행을 떠나던 날 차에 실려 있던 물건들의 실제 목록을 적어본다.
일단 조리 기구부터.
2구 가스레인지와 4.5kg 휴대용 LPG 가스통,
밥 지을 작은 냄비 하나, 라면 등 찌개용 냄비 하나.
작은 프라이팬 하나.
숟가락, 젓가락 칼, 포크, 스테인리스 접시, 대접 각각 두개씩.
도시락 등 음식 저장용으로 쓸 플라스틱 용기 4개.
과도, 도마, 가위, 김말이(김밥을 싸 먹을 생각을 다 하다니)에 키친타월.
이제부턴 본격적인 식재료다.
한인 마트가 있는 다음번 대도시, 퍼스 까지 대략 한 달 정도 걸릴 걸 예상해서
넉넉하게 고추장 2kg, 된장1kg, 쌀 10kg, 라면 한 박스, 김치 10kg, 김 한 박스,
마른 미역 한 봉지, 국수와 메밀소면과 거기에 넣을 육수 몇 병,
계란, 식빵, 딸기 복숭아 자두 잼과 스프레드 치즈,
기본양념으로 소금, 후춧가루, 고춧가루, 간장, 식용유, 참기름,
국 간장 대용으로 쓸 멸치액젓(세상에!)까지 챙겨 넣었다.
거기다 분위기 있는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위한 필수품 텀블러 두 개.
물은 생수를 사 먹기로 했다.
침구류는 가볍지만 부피가 컸다.
에어 매트리스와 매트리스 펌프, 침대커버, 베개와 침낭 각각 두 개씩,
그리고 세탁세제, 섬유유연제.
(이제 거의 다 왔다.)
샤워할 때 쓸 목욕용품 바구니, 물티슈, 화장지, 전등,
지도책 두 권과 가이드북, 노트북,
각종 여행 책자며 영어소설(여행 중에 영어공부도 할 수 있을 줄로 착각했다) 등
읽을거리가 한 박스.
테니스 라켓과 스노클 장비 두 세트.
정말 마지막이다.
여름, 가을 옷 위주로 각각 대 여섯 벌과 추울 때 입을 두꺼운 모자 티셔츠 두 개씩,
바람막이 잠바, 수영복, 선크림, 클렌징 제품들,
스킨, 에센스, 로션, 립글로스 등 화장품 한 꾸러미,
운동화, 샌들, 슬리퍼, 일반 수건, 비치용 수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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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날.
애들레이드에서 곧장 플린더스 산맥으로 가지 않고
애들레이드 힐을 지나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를 거쳐 가기로 했다.
애들레이드 힐이 플린더스 산맥으로 이어지기도 하는데다
잠시나마 일했던 포도농장 주변을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바로사 밸리는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의 마가렛 리버(Magaret River),
스완 밸리(Swan Valley), 뉴 사우스 웨일즈의 헌터 밸리(Hunter Valley) 등과 더불어
호주를 신흥 와인산업국으로 만든 주역이자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의 호주여행 주요 관광지다.
호주 와인의 25%가 여기서 생산되며 특히 블랙 페퍼 쉬라즈(Black Pepper Shiraz)는
세계 최고로 꼽히는 명품 와인이다.
호주여행하는 동안 와인을 마실 일이 생기면 우리는 늘 “바로사 밸리산 쉬라즈!”를 외치며
한때나마 이곳에서 일한 자로서 의리를 지켰다.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야영지를 정하고,
뒷좌석부터 트렁크까지 가득 찼던 짐들을 앞좌석으로 옮겼다.
뭔가 엉성한것이 영 만족스럽지가 않다.
적응이 되면 나아지겠지 하며 에어매트리스에 몸을 뉘였다.
6시 30분.
해가 지기 시작하자 지나가는 차가 거의 없다.
이 산중에 우리 둘 뿐이라는 게 조금은 긴장이 된다.
또 한 번, 이 생활에 곧 적응이 되겠지 하며 이제 정말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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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9시가 조금 못돼서 도착한 윌페나 파운드 비지터 센터에는
벌써 등산복 차림의 여행자들로 북적였다.
비지터센터 바로 옆에는 카라반파크가 있었는데
지난 밤 노숙한 덕분에 1박에 32$, 자동차 입장료 8.5$ 총 38.5$를 아꼈다.
우린 왕복 7.2km 약 3시간이 소요된다는
왕가라 전망대 Wangarra lookouts 까지 가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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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좋고 오랜만에 발을 움직여 땅을 밟으니 기분이 좋다.
넓은 등산로는 거의 평지라 어린 아이와 노인도 꽤 있었다.
야생캥거루 가족도 만나고, 오예~ 첫 날부터 횡재다.
국립공원이 아니라 마치 개인 정원을 거니는 듯 한가하고 조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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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에서.
거대하고 광활하고 건조한 호주 특유의 자연환경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의 호주 여행이 어떤 식으로 펼쳐질지에 대해 가늠할 수 있었던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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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맥이 원형경기장처럼 둘러 있는 능선도 좋았지만,
곳곳의 비포장도로에서 만난 야생화들이 참 아름다웠다.
이번 여행 기간 서호주는 야생화가 전성기에 이른다는데...
봄은 이렇게 조용히 다가왔고,
우린 저 들판에 피어 있는 꽃들처럼
절정을 향해 부지런히 달려가고 있었다.
호주 전국 일주.
지금껏 내가 해 온 그 어떤 것보다 대단한 모험이 되겠지.
난 앞으로 내가 겪을 날들이 무척 기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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