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오디오와 컴퓨터 원문보기 글쓴이: 관운
대한인 국민회 [大韓人國民會] "미주 한인 최고 민족 운동 기관, 한인 사회의 구심점이 되다"
사탕수수 노동자로 이주하여 하와이 한인사회를 형성하다
재미한인사회의 형성은 하와이 사탕농장주들이 저임금 노동력 확보를 위해 중국·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노동이민을 추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1903년 1월 13일 하와이에 도착한 것을 시작으로 1905년 8월까지 7,226명의 한인이 하와이로 이주하였다. 이주 후 하와이 한인들은 동족상애(同族相愛)를 목적으로 자치회(自治會)나 친목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던 중, 1905년 1월 하와이 한인들이 대한제국에 영사 파견을 요청하자, 이를 기회로 일제는 해외한인을 일본 영사의 통치하에 두어 감독·지배하려 하였다. 이때부터 하와이 한인사회는 항일운동과 일본상품 배척을 내세우며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1905년 11월 을사늑약 강제 체결로 주미한국공사관이 철폐되고 1906년 2월에는 대한제국정부마저 “해외한인은 일본영사의 보호를 받으라”고 하는 등 사실상 망국민으로 전락하자,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민족운동단체를 결성하고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하와이의 민족운동단체는 1903년 8월 호놀룰루에서 설립된 신민회(新民會)를 비롯하여 1907년 9월까지 동회(洞會)를 포함한 24개 단체가 조직되었다. 1907년 국내에서 정미조약(丁未條約)과 고종의 강제 퇴위, 의병전쟁 등이 일어나자, 하와이 한인사회는 분산된 단체를 통합하여 통일된 민족운동을 전개하고자 하였다. 1907년 9월 24개 단체 대표자 30여명은 합동발기대회를 열고 5일 간의 회의 끝에 하와이 한인단체를 통합하여 한인합성협회(韓人合成協會)를 창립하였다. 한인합성협회는 1909년 2월 북미(北美)의 공립협회와 통합하여 국민회(國民會)를 창립할 때까지 하와이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며 구국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한편, 하와이 한인들은 1905년부터 노동조건과 임금이 후한 미국 본토로 이주하기 시작하여 1910년에는 약 2천여 명이 미국 캘리포니아주를 비롯한 서해안 일대에 자리잡으면서 한인사회의 거점을 마련하였다. 이후 미주한인사회는 하와이와 북미의 한인사회를 중심으로 활동하게 된다. 1903년 9월 북미에서는 안창호(安昌浩) 등의 주도로 샌프란시스코에서 친목회를 결성하였다. 그러나 하와이 한인들의 북미 이주가 급증하자, 안창호 등은 친목회를 확대·발전하여 1905년 4월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창립하였다. 공립협회 창립 후 북미지역에는 공립협회를 포함하여 4개의 민족운동단체(대동보국회, 공제회, 동맹신흥회)가 설립되었으나, 북미 한인사회를 선도한 것은 공립협회였다. 하와이와 마찬가지로 북미지역에서도 1907년부터 단체 통합여론이 형성되었다. 특히 1908년 1월 박용만(朴容萬)의 애국동지대표회(愛國同志代表會) 제의 와 3월 장인환(張仁煥)· 전명운(田明雲)의 스티븐스 처단 사건은 미주 한인단체의 통합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그 결과 1908년 10월 하와이 한인합성협회와 북미 공립협회는 합동발기문을 발표하고 통합을 선언하였다.
1910년대 재미한인사회의 최고통일기관으로 ‘임시정부’를 자임하다
1909년 2월 1일 재미한인의 통일기관인 국민회(國民會)가 탄생되었다. 국민회 탄생과 함께 한인합성협회는 하와이지방총회, 공립협회는 북미지방총회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이때 국민회에 합류하지 않은 대동보국회(大同保國會)는 1909년 7월말 시애틀의 동맹신흥회(同盟新興會)와 통합하여 활동하다가 1910년 2월 국민회로 통합을 이루었다. 이에 국민회는 같은 해 5월 10일 회명을 대한인국민회로 개칭하고 명실상부 미주한인의 최고통일기관임을 선포하였다.
국민회가 창립 후 가장 주안점을 둔 것은 공립협회 시절부터 추진한 ‘통일연합기관(統一聯合機關)’을 완성하는 일이었다. 통일연합기관은 당시 한인단체가 국내를 비롯하여 미국·러시아·만주 등지에 산재한 점을 고려하여 공립협회가 중심이 되어 국내외 각 지역에 공립협회 지회에 해당하는 ‘연합기관’을 설치한 후 이를 통일하여 국권회복과 함께 공화정체(共和政體)의 독립국을 건설하려는 것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공립협회 시절, 국내에는 신민회(新民會), 1908년 9월에는 러시아 스찬(水淸) 신영동(니콜라예브카)지역에 수청지방회, 1909년 1월에는 블라디보스토크에 해삼위(海蔘威)지방회를 설립한 바 있다. 이를 계승한 국민회는 멕시코를 비롯한 러시아와 만주 등지에 특파원을 파견하여 지방회 설립을 추진한 결과, 1909년 멕시코지방회를 비롯하여 1911년까지 원동(遠東) 지역에 수청지방총회·시베리아지방총회·만주지방총회를 설립하는 등 5개 지방총회에 116개 지방회를 거느리는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자리잡았다. 이처럼 북미·하와이·멕시코는 물론 국내와 만주·러시아 등 한인이 거주하는 거의 모든 지역에 지방회가 설립되자, 국민회는 해외 한인의 최고기관으로 각지의 지방회를 통괄하기 위한 중앙총회 설립을 서둘렀다.
1910년 8월 대한제국이 일제 식민지로 편입되자, 국민회는 10월 5일 기관지 『 신한민보(新韓民報)』를 통해 「대한인의 자치기관」이란 논설을 발표하였다. 이 글에서 국민회는 ① 중앙총회는 ‘대한 국민’을 대표하여 임시정부 자격으로 입법·행정·사법 등 3대 기관을 설치하고 자치제도를 행할 것, ② 국내외 산재한 ‘대한 국민’에게 의무금 징수, ③ 병역의 의무 실시 등을 표명하였다. 이는 대한제국 멸망을 공식화하고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인 최초로 국민국가에 바탕한 임시정부 수립을 표방한 선언이었다. 이에 따라 국민회는 1911년 1월 박용만(朴容萬)을 초빙하여 중앙총회와 임시정부 설립을 위한 여론을 환기시키고, 그해 8월 중앙총회를 발족시켰다. 또한 1912년 11월 중앙총회 제1회 대표원 회의를 소집하고 20일에는 정식으로 중앙총회 결성 선포식을 결행하였다. 이 선포식에서 국민회 중앙총회는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으로 자치제도를 실시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에 북미지방총회는 1913년 미국 국무장관으로부터 국민회를 재미 한인의 대표기관으로 인정받는 한편, 미국 상공부와 교섭하여 국민회 증서로 여권없이 입국을 허락하는 등 사실상 ‘정부’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러한 국민회의 임시정부를 위한 노력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남으로써 만주지방총회·시베리아지방총회·수청지방총회는 해체되거나 활동이 금지되어 자유로운 활동을 전개한 것은 북미지방총회와 하와이지방총회 뿐이었다.
이승만의 하와이 한인사회 장악과 국민회의 분열
1912년 12월 하와이로 건너온 박용만의 지도에 힘입어 하와이지방총회는 1913년 하와이정부로부터 자치기관으로 인정받고 특별경찰권까지 허락받는 등 자치정부로서 역할하였다. 이어 국민의무금제도를 실시하여 재정의 안정을 꾀하는 한편, 1914년 6월에는 박용만을 단장으로 하는 대조선국민군단을 설립하는 등 독립군 양성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1915년을 계기로 하와이지방총회는 분열되기 시작하였다. 1913년 박용만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온 이승만은 교육·언론·선교사업을 통해 한인사회 지도자로 서서히 부각하였다. 그러던 중, 1915년 하와이지방총회 총선거에서 박용만 계열의 인물들이 당선되자, 이승만은 자신의 지지세력을 중심으로 임시대의원회를 개최하여 지난 총선거와 모든 법안을 무효화시키는 한편, 국민회 개혁을 명분으로 박용만 계열의 임원을 축출하고 자신의 세력으로 임원을 교체하였다. 하와이지방총회 장악후 이승만은 1917년부터는 국민회 재정까지 자신의 수중에 넣고 자의로 처리하려 하는 등 모든 재정의 장악을 꾀하였다. 이에 대해 국민회 북미지방총회는 「누가 국민회를 없애코저 하느뇨」라는 논설을 6회 연속 게재하면서 이승만의 전횡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처럼 하와이지방총회가 중앙총회의 명령을 무시하고 이승만 체제로 운영되던 중, 1918년 이승만의 국민회 재정남용이 일어났다. 이를 조사한 조사원들이 이승만에게 해명을 요구하였으나 이승만은 얼버무리는 바람에 이를 둘러싸고 회의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회의 도중 싸움이 일어나 유혈사태로 번지게 되었다. 이에 이승만은 자신에게 재정 남용 조사를 요구하는 대의원들을 살인미수로 하와이법정에 고발하는 한편, 법정 증언에서도 본 사건과 직접 관련도 없는 박용만의 대조선국민군단 문제를 거론하여 사건의 본질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재판을 유도하였다. 3월 하와이법정 판결 결과, 이승만의 고소는 모함으로 판명되었고, 살인미수 역시 기각되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 사건의 배후를 박용만으로 몰아붙이면서 박용만파를 축출하려고 하였다. 이에 박용만 지지세력들은 국민회 재정남용 문제에 대한 정확한 조사를 촉구하기 위해 1918년 3월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그러나 문제가 해결될 기미가 없자, 연합회는 7월 하와이국민회 임시중앙연합회를 정식 결성하였는데, 이 단체를 흔히 갈리히연합회로 불렀다. 이후 하와이 한인사회는 국민회 하와이지방총회와 갈리히연합회로 양분되면서 국민회 중앙총회의 위상도 급격히 약화되었다. 이에 따라 중앙총회장 안창호는 11월 연합회 해산을 권고하였으나 연합회는 기관지 『태평양시사』를 창간하여 이승만의 『태평양잡지』와 여론 대결을 펼쳤다. 그 결과 미주한인사회는 안창호·이승만·박용만 계열로 3분되었고, 10여 년간 해외한인의 최고기관으로 기능했던 대한인국민회의 지도력은 북미와 멕시코·쿠바지역으로 축소되는 등 커다란 타격을 입게 되었다.
국민회 중앙총회 해체와 하와이지방총회의 개편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이승만은 8월 말 한성정부 집정관 총재 명의로 구미위원부를 설치하였다. 워싱턴에 설치된 구미위원부는 유럽과 미국 등에 대한 외교전담기구이자 재미한인들로부터 필요한 재정을 모금하였다. 구미위원부 설치후 하와이지방총회가 중앙총회의 권한을 무시하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등 독자적 행동을 보이자, 중앙총회는 1920년 초 하와이지방총회 개조에 나섰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하와이지방총회는 중앙총회의 관할에서 벗어났고, 1921년 3월 임시정부의 내무부령 제4호 「임시교민단제」에 의거하여 하와이대한인교민단으로 개편되었다. 이처럼 하와이지방총회가 해체되어 이승만의 지지세력으로 이탈해나가자, 북미지방총회는 1922년 12월 29일부터 1923년 1월 4일까지 대의원회를 개최하여 중앙총회 폐지, 북미지방총회의 ‘대한인국민회 총회’로의 개칭을 결의함으로써 하와이 한인사회와 완전 분리되었다.
1920년대 북미한인사회가 대한인국민회 총회를 중심으로 움직인 반면, 하와이 한인사회는 이승만 계열의 하와이대한인교민단과 1919년 3월 설립된 박용만 계열의 대조선독립단(大朝鮮獨立團) 세력이 양분되어 활동하면서 극심한 분열상태를 보였다.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복설과 북미 대한인국민회의 부흥
1929년 11월 국내에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하와이 한인사회는 민족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고, 이를 기회로 한인단체의 통합 움직임이 재개되었다.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한 이승만은 친위조직인 동지회(同志會)를 중심으로 하와이대한인교민단을 흡수·통합하고자 하였다. 1930년 7월 호놀룰루에서 하와이교민단과 동지회(同志會)가 연합하여 미국과 하와이내 이승만 지지세력의 대표회를 열었다. 이른바 미포대표회(美布代表會)이다. 이 대표회에서 김원용(金元容)을 대표로 선임하여 개혁작업을 맡겼으나, 이승만과의 충돌로 인해 김원용- 김현구(金鉉九) 등의 교민단 세력과 이승만 친위조직인 동지회 간의 분쟁이 일어나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 1931년 1월 하와이대한인교민단은 국민회 재건운동을 전개하여 1933년 1월 교민단을 자체 해소하고 2월 하와이대한인국민회를 다시 설립하였다. 이를 미주 한인들은 ‘국민회 복설(復設)’이라고 불렀다. 1934년에는 박용만 계열의 대조선독립단과도 통합함으로써 하와이 국민회는 다시 한인사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한편, 북미의 대한인국민회는 하와이처럼 분열된 것은 아니였으나, 1920년대 활동은 부진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을 계기로 1930년부터 북미 각 지역을 중심으로 공동회(共同會)가 설립되었으나, 각 지방 중심의 분산적인 활동이었다. 이에 북미 국민회는 1936년 5월 각 지방 대표자들을 소집하여 국민회의 부흥대책을 협의하고 새로운 헌장을 채택하면서 변화를 꾀하였다. 북미 국민회는 1937년 집단지도체제인 위원제도로 변경하고, 본부를 샌프란시스코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전하는 등 새롭게 탄생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하와이대한인국민회와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 지원을 강화함과 동시에 이승만 계열의 동지회와도 합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동지회측의 연합기구 제의로 합동 대신 1941년 4월 해외한족대회를 개최하여 미주의 모든 단체가 참가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를 설립하였다. 북미와 하와이 국민회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주도권을 쥐고 연합위원회를 이끌어 나갔다. 1944년 워싱턴사무소를 개설하여 주미외교를 담당하는 한편, 1945년 4월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연합국회의에 ‘민중대표단’을 파견하였고, 해방 직후에는 ‘대표단’을 국내로 파견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국민회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존속하며 재미한인사회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