今日は
오수현
'일기는 사람의 훌륭한 인생 자습서다.'
소설가의 입문서 ‘문장강화’를 지은 이태준님이 한 말이다. 그의 책인 ‘문장강화’의 일기편에 나와 있다. 일기란 그날 하루의 중요한 문장, 상황, 감상 등을 적은 것으로서 자신이 오늘 보낸 시간에 대한 것들을 글로 옮겨 적으며 스스로 반성하는 글이라고 한다. 나는 이번 학기에 일기를 열심히 썼다. 그래서 이번 에세이 형식은 조금 특별하게 일기처럼 써보려고 한다.
03.05 MON.
3학년이 되었다. 우리 9기는 특별하다. 논문 1차발표를 1학기에 하기 때문이다. 그것도 10기가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오기도 전에말이다. 많은 친구들이 1차를 목표로 하며 논문을 바쁘게 써가기 시작했다. 논문 주제도 하나 둘 잡아가기 시작했다.
03.07 WED.
오늘은 논문 코디와의 첫만남이 있었다. 자신이 쓴 논문 계획서를 바탕으로 주제와 목표등을 무대위로 나가 발표하는 자리이다. 친구들은 한명씩 발표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친구들이 나를 호명하지 않았으면 했다. 왜냐하면 주제를 아직 못정했기 때문이다. 앞에 나가서 할말이 없었다. 한 명 한 명 발표를 하는데 갑자기 막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제발 내 차례가 오지 않았으면 했다. 엄청 울었던 이유는 간단하다. 울고 있으면 부르지는 않겠지.... 그 때, 채운이가 날 불렀다. 온갖 생각이 머리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가서 무슨 말을 해야하지?’ 부터 ‘왜 하필 울고 있는 나를 불렀지?’ 까지. 결국 무대 위에 올라갔다. 손에는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은 논문 계획서 뿐이었다. 나는 떨면서 말했다. “주제는 아직 없구요, 논문 3차때 발표할꺼에요.”
05.21 SUN.
오늘 나는 논문정지를 먹었다. 듣고 보면 굉장히 어이가 없을 수도 있다. 처음에 나도 그랬고, 친구들도 그렇게 생각했으니깐. 이 날은 9기와 11기 남자들이 저녁에 다 함께 모여서 영화를 보는 날이었다. 나는 오늘 친구들과 외출을 가지 않고 고등에 있는 형들과 함께 놀았는데 놀다보니 어느새 영화를 보기로 약속한 시간이 지나있었다. 그 때 함께 놀던 영주형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받은 영주형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전화를 바꾸니 민정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로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이 나를 걱정하며 찾아나선 것이였다. 사감쌤은 학교와 고등식당을 세 번이나 왔다갔다 하셨고 읍내에 계신 쌤들은 차를 몰고 나오셨다. 고등건물 안에서 훈쌤을 기다리는 사이 나는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이 상황을 모면할 몇가지 거짓말을 지어내고 있었다. 훈쌤이 오셔서 나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
주된 주제는 “너는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만 본다.” 였다. 처음에는 영화 한 번 약속시간 늦은걸로 왜 이렇게 길게 말하지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계속 이야기를 들어보니 나는 남을 위한 적이 거의 없음을 알게 되었다. 8기때 논문발표 ppt를 도와준 것도 사실 내가 ppt를 잘만드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였고 거의 모든 도움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그게 친목이든, 돈이든, 명예든 나는 목적없이 남을 도운적이 없었다. 그리고 남을 위해서 한 학기를 살아보라며 논문정지를 내렸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피하고 싶었기에 “7시에 고등식당에 갔었는데 아무도 없었다.”라고 준비된 거짓말을 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사감쌤은 7시 반까지 고등식당에서 나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쌤들에게 실망을 다시 한 번 안겨드렸다.
06.04 MON.
나는 남휴 청소이다. 오늘 아침 청소시간에 현빈이와 장난을 치다가 보드마카를 땅에다가 던졌는데 터졌다. 근처에 있던 기타부터 바닥까지 잉크가 묻어서 난장판이 되었다. 이걸 알고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혼자이기 때문에 조용히 넘어가려고 했다. 청소시간이 끝나고 준서가 와서 잉크가 터져있는걸 보고 이게 뭐냐고 물어봤는데 나는 “어? 남휴 청소 할 때는 못봤는데..”라며 발뺌을 했다. 쌤들과 친구들이 와서 여러 가지를 물어볼 때 거의 영화 ‘독전’에 나오는 류준열급으로 내가 아닌 척 연기를 하였다. “범인을 꼭 잡아야 한다”, “어제 저녁에 했을 가능성이 크다”며 내가 아닌 척을 하였고 아무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아침시간 반모임때 남휴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그 때 이렇게 또 넘어간다면 저번에 논문정지때와 같이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지 못하고 상황을 피하려고만 할까봐 자백하였다. 친구들은 모두 놀랐고, 당황스러워 했다. 친구들에게 미안하다 사과를 하고 자백을 하니 훨씬 속이 후련하고 좋았다.
06.16 SAT.
오늘은 1차논문발표날이다. 너는 논문 언제해? 라고 물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절대 논문을 안하고 싶은건 아니다. 그저 아직 주제를 못잡았을 뿐이다.
나는 2학년 겨울방학때부터 논문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방학식 전 쑥쌤이 추천해주신 제인 ‘영어로 논문 쓰기’를 해보려고 열심히 영어공부를 하였다. 학원 수강할 때도 영작 수업을 추가로 들었으며 그 때까지만 해도 1차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동안 나를 보면 생각하는 ‘학습적인 이미지’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학습적인 이미지가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꼭 학습적인 것 말고도 다른 것도 잘한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주제를 관둔 가장 큰이유는 재미가 없어서 이다.
한동안 주제를 못잡고 방황했다. 이 사이에 논문 코디와의 첫만남도 있었다. 아무 목표없이 지내다가 활동분기때 했던 ‘뮤지컬 수업’이 나에게는 무척 흥미롭고 재미있었던 수업이였다. 일주일간 하나의 작품을 만들기 위해서 엄청나게 노력해야 했다. 대본 외우는 것은 물론, 안무, 가사, 연기까지 모두 공부하며 연습해야했다. 나는 이 일주일이 너무 맘에 들었고 그래서 논문 주제까지 끌고 갔었다. 한동안 뮤지컬 대본을 손으로 쓴다고 잠을 제시간에 안잔적도 많았다. 하지만 이 주제도 포기했다. 이번에는 나의 끈기가 부족했는지 활동분기때만큼 에너지가 일어나거나 흥미가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주제는 미디작곡이였다. 같은 주제를 하는 친구들도 꽤 있어서 동기부여도 되었고, 무엇보다 작년 여름방학때 미디작곡에 대하여 쪼끔 공부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더 잘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논집기때는 시퀀서(작곡 프로그램)가 없어서 피아노를 열심히 쳤고, 시퀀서가 다운된 이후에는 하루종일 방송실에 있을 정도였다. 그래서 첫작품도 미디작곡하는 친구들중에서 가장 먼저 나왔고 논문중간제출 또한 이 주제에 관한 글로 적어서 쌤들에게 제출했다. 그렇게 논문이 잘 진행되던 어느 날, 논문정지를 먹었던 것이다. 나는 미디작업을 위한 PC와 피아노가 있는 방송실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없어졌다.
이제는 어느정도 걱정이 되었다. 논문 1차발표는 이미 글러먹었다고 생각했고, 논문 정지 상태이니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때동안 바쁘게 산 나머지 용돈봉투에는 쓰지 않은 용돈이 쌓여있었다. 그 주 주말, 모은 용돈을 털어 평소에 사고 싶었던 ‘GUCCI FLORA’향수와 ‘페라리 라이트 에센셜’을 사게 되었다. 점점 향수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고 DDP에서 한 러블리마켓데이날에 조향사를 만나 이야기도 나눠보고 향수도 하나 더 구입했다. 나만의 향수 만들기 원데이클라스도 수강하고 일기에 향수 관련 이야기와 그림을 그리며 잠깐 비공식적으로 향수에 대하여 탐구해보았지만 가면 갈수록 돈이 많이 든다는 것을 인지하고 관두게 되었다.
아직도 내 논문주제는 없다. 하지만 논문주제가 없다고 논문을 안쓰는건 아니다. 논문주제를 잡기위해 여러가지를 알아보고 탐구하는 과정 또한 논문의 일부라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이번 여름방학에는 논문주제를 잡고 놓치지 않고 끝까지 하기를 위하여 뽜이팅할꺼다.
06.27 WED.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번 학기에는 일기를 열심히 썼다. 논문정지때부터 일기를 쓰게 되었는데, 훈쌤과 이야기한 이후로 오늘 하루 아무도 모르게 남을 위해서 봉사한 것들을 적기 위하여 쓰기 시작했다. 여기서 아무도 모르게 남을 위해서 봉사한 것이란 아침시간에 물을 주거나, 더러운 곳이 보인다면 쓸거나, 청소시간이 끝나고 어지럽혀진 걸레 빠는 곳을 정리하는 것 등이다. 계속해서 일기를 쓰다보니 부지런해진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일기가 밀려서 하루에 이틀치를 쓴적도 많지만 계속해서 쓰다보니 점점 나아졌다. 가끔씩 지난 날의 일기를 펴보며 자기성찰을 할 수도 있고, 이런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고, 논문에 대한 이야기도 정리해볼 수 있었다. 여러 방면에서 나를 도와준 내 일기이자 논문노트에게 고맙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논문 주제 잡기부터 내가 숨기려다 더 커진 일들까지..
만약에 내가 컵에 담겨있던 물을 엎지르게 된다면 다시 주워 담을 수는 없지만 내가 했다고 말하고 책임질줄은 알아야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그냥 흘려보내거나 감추려하지않고 더 나은 결과를 위해서 노력해야함을 이번 학기에 배웠다. 어서 논문주제를 잡아서 더 멋지고 알찬 2학기를 보낼 수 있도록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