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는 지난 25년간 한결같은 시선으로 청학동의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을 작품에 담아온 사진가 류은규의 ‘첫 번째 대규모 청학동사진전’이다. 그동안 류은규는 ‘교도소’, ‘잊혀진 흔적’, ‘韓人面貌∼조선족 이야기’ 등의 개인전과 크고 작은 단체전에 출품해 온 중견작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를 그의 첫 번째 대규모 전시라고 하는 것은 ‘청학동’을 작품의 주제 내지는 소재로 다듬어 온 작가의 남다른 애정 때문이다. 사반세기동안 찍어온 그의 청학동이야기에는 청학동 사람들, 그들의 종교와 가치관, 일상적인 삶의 모습, 청학동의 자연과 풍광 등이 담겨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현실 공간인 ‘청학동’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통해 우리 한국인에게 ‘청학동’이 갖고 있는 관념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시 한 번 이상향에 대한 꿈을 꿀 기회를 제공한다.
글 / 변청자(미술비평)
청학동~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 청학동은 한국 남부에 위치하는 지리산 깊은 산 속, 해발 850미터 정도에 위치한 마을이다. 청학동은 한국인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지명이다. 이 지명이 역사에 등장한 것은 지금부터 1000여 년 전인 신라시대 이며, 그 후에도 여러 문헌에서 ‘청학동’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신선이 푸른 학을 타고 다니는 지상의 낙원, 세속의 어떤 혼란과도 무관하며 이곳에서 살면 무병장수하고 죽어서는 신선이 된다는 전설의 마을이다. 그러나 청학동이 어디인지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아 지금의 청학동이 전설에 등장하는 그곳인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내가 이 마을 장로로 부터 들은 이 마을의 역사는 다음과 같다.
언제부터 여기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지는 모르지만 일제시기 나무를 벌초하는 목재공출기지로서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다가, 6.25때 빨치산이 산다는 이유로 공비숙청을 당해 마을이 소멸되었다. 그 후 1960년대 초, 옛날 전통을 지키고 세속의 문명을 거부하는 ‘유불선합일갱정유도’ 신도들이 사람의 눈을 피해 이곳에서 살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이 사람들이 지금의 청학동 주민들이다. 당시는 아직도 동굴 속에서 공비습격으로 죽은 사람의 뼈가 여기저기에 있는 만큼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깊은 산속이었다. 그러다가 이곳에 사는 사람이 점점 많아지자 1970년대 이 마을 주민들이 이 지역을 관할하는 경상도 하동군청에 마을 이름을 ‘청학동’이라고 제출하면서 청학동이라는 지명은 정식으로 이 마을의 것이 되었다.
내가 처음 청학동을 찾아간 것은 1982년 여름이었다. 그 몇 년 전 지리산국립공원 안에 신비의 마을이 있다는 보도를 접하였는데, 이 마을이 등산객에 의해 우연히 발견되어 세상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신기한 마을이 있을까 라는 흥미만으로 나는 대학 사진과 동료와 함께 여름 방학 때 청학동을 찾았다. 지금은 서울에서 차로 다섯 시간이면 갈 수가 있지만 그 당시는 15시간에서 20시간이나 걸렸다. 기차를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종점(당시 묵계)에서 산길(3~4킬로)을 걸어 올라가 우리는 겨우 청학동(당시는 진주암, 미륵골이라고 하였다)에 도착했다. 그곳은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 듯 신비한 곳이었다. 1970~80년대는 한국의 고도경제성장 시기로 사람들의 생활이나 가치관도 크게 변해가고 있는 시기였다. 그러한 시기에 왜 이곳 사람들은 시대에 역행하듯 이곳에서 숨어살까? 나는 놀라움과 함께 청학동 사람들한테 끌려 가는듯한 매력을 느꼈다. 그 다음부터 나는 혼자 청학동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하동 마을에서 산 쌀가마니를 메고 청학동까지 산길을 올라갔다. 나는 이 집, 저 집 다니면서 사진을 찍었다. 당시에는 민박집도 없었고, 어느 집에서 자도 돈을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사진스튜디오에서 근무하기 시작했을 때도 나는 일 년에 몇 번씩 이 마을을 찾았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라기보다 세속의 잡다한 일에 힘든 마음을 위로받고 싶어서 청학동을 찾았다. 산길을 올라가면 내 눈앞에 나타나는 마을 청학동…. 거기에는 나의 나이와 비슷한 청년들도 있어서 그들과 밤 세워 이야기하는 것이 나에게는 큰 즐거움이었고, 때로는 마을 사람들이 모두 일하러 나간 방 안에서 혼자 들어 누워 졸기도 했다. 청학동 사람을 찍는 일은 그리 쉽지가 않았다. 몇 몇 노인 분께서는 끝내 내 카메라 앞에 서는 것을 거부하였다. 도시에서 흥미진진하게 찾아오는 관광객이나 사진가들 중에는 ‘우리는 원숭이가 아니야! 사진 찍지 마!’ 라고 지팡이를 들고 쫓아오는 할아버지한테 카메라를 습격당하기도 하고 필름을 빼앗기기도 했다. 특히 이 마을 여자들은 사진 촬영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몇 번씩 그 집을 찾아가 아들친구로서 대접 받기 시작하고 나서 겨우 그 집 어머니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이곳 마을 어린이들은 당시 정부가 정한 보통학교에 다니지 않고, 마을에 있는 서당에서 사서삼경, 수학, 예의범절 등을 배우고 있었다. 또한 이곳 청년들은 보통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군대도 가지 않았다. 백의한복을 입고, 결혼 전에는 남자도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결혼 후에는 상투를 틀고 갓을 썼다. 마을 사람 모두가 윤리도덕을 엄하게 지켜 옛 전통을 소중히 지키면서 자급자족 생활을 하고 있었다. 1980년대 후반, 야쿠르트 광고에 청학동이 등장하면서부터 이 마을을 찾는 관광객이나 사진가가 부쩍 늘었다. 세속 사람들의 염치없는 요구에 따라 이곳 사람들은 식당, 민박, 선물가게 등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 전반, 아직 전화도 차도 없었던 마을에 갑작스럽게 문명의 물결이 밀려왔던 것이다. 다들 경쟁하듯이 백의의 마을 사람들을 길에 세워 어색한 포즈를 취하게 하며 셔터를 눌렀다. 마을의 자급자족 체제는 급속히 무너지고 생계를 위해 현금수입에 유지할 수밖에 없는 청학동 사람들은 이젠 사진 찍히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그런 시기에 청학동의 일부 주민들이 세속에 때가 묻는 것을 피해 산을 내려갔다. 어떤 사람은 도시에 살면서 한복을 벗지 않고 자신의 생활신조를 지키고 있고, 어떤 사람은 다른 농촌에 정착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청학동에는 결코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을. 그것이 바로 그들의 신념이다. ‘유불선합일갱정유도’ 란 유교를 기본으로 하여 불교, 기독교 등 교리를 융합시킨 하나의 신흥종교이다. 세계를 덮은 추운 겨울이 지나가면 온 세상에 봄이 오는데, 그 때 청학동이 이 세상의 중심이 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다. 조선 말 사회 혼란기에 민중 사이에 여러 종교가 보급되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동학’이다. ‘유불선합일갱정유도’도 바로 이 시기에 창시되었는데 전국에 흩어져 살던 신도들이 교리에 따른 생활을 실천시키기 위해 지리산 깊숙이 들어가 살기 시작했고, 그것이 바로 지금의 청학동의 전신이다. 마을에는 대제당이라는 건물이 있고 ‘유불선합일갱정유도’의 시조를 모시고 있다. 사람들은 집집마다 자기 조상을 모시는 제사를 지내고 일 년에 몇 번 대제당에 모여 전통 의식을 거행한다.
사회 윤리가 무너지고 아이들 예절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여러 사회문제가 생기고 있는 지금 한국 사회에서는 오히려 청학동의 전통교육이 주목을 받게 되었다. 또한 학교교육에서 그 동안 소홀히 했던 한자 교육의 필요성이 높아지면서 한자에 능통한 청학동 사람들이 대접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도시에 정착하여 자그마한 서당을 열어 겨우 생계를 유지해왔던 청학동인이 지금은 학생 수도 많아지고 잘 된다고 하고, 점으로 매스컴의 인기를 끄는 사람도 있다. 지리산 청학동에서는 방학 때 청학동에 ‘유학’해오는 도시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대규모 서당도 줄지어 생겼다. 세속과 멀리 떨어져서 살았던 청학동이 지금은 한국의 청소년 교육기지로서 인식을 받고 있다. 동시에 관광지화 된 청학동 주변에는 신도가 아니라 장사 목적으로 이주해온 사람들도 많아 청학동 주변의 환경변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구유출이 심각한 한국 농촌 중에서 유일하게 인구가 불어나는 곳이 바로 청학동이며, 장가 못가는 농촌총각의 비애를 아랑 곳 하지 않고 이곳에 시집온 도시여자들이 많다.
내가 청학동을 찍기 시작한지 올해로 25년째다. 그러나 나는 기록사진을 찍겠다는 마음으로 그 동안 청학동을 찍었던 것은 아니다. 내가 끌리는 것이 거기에 있기에 나는 청학동을 끊임없이 다녔던 것이고, 그때그때 내 마음에 끌리는 것만 촬영을 했다. 여기에 정리한 작품은 나의 종착점이 아니다. 카메라를 들고 움직일 수 있는 한 나는 앞으로도 청학동을 찍을 생각이다. 세상에는 지금 청학동을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 신선들이 사는 도인촌 이라고 듣고 찾아왔는데 으리으리한 기와집에다 고급 승용차를 타고 다니는 청학동인을 보고 실망했다 등 다른 농촌과 다름이 없다 등등.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일시적인 향수로 이곳에 와서 청학동 사람한테만 불편한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난 3~40년을 뒤돌아봐서 우리 주변에 변하지 않았던 것이 도대체 얼마나 있을까? 공동화장실, 연탄보일러,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바람, 부뚜막에 불을 피우며 큰 솥으로 짓는 밥……. 서울에서 태어난 나만 해도 그 동안 생활해오면서 얼마나 큰 변화를 겪어 왔는지 모른다. 우리 주변 환경 중 변하지 않았던 것은 하나도 없지 않은가? 변하고자 하는 것들을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변해가는 것은 변하지 않고 있는 것 보다 훨씬 쉽다. 그러나 청학동에는 한 가지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생활양식은 변해도 그들에게는 변하지 않는 신념이 있다. 그러기에 바로 청학동이 존재한다. 변하지 않은 것이 또 하나 있다. 청학동을 찍는 나의 시선이다. 그 동안 나의 생활도 많이 변했다. 그러나 내가 청학동 사람들에게로 렌즈를 돌릴 때의 마음은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다. 당시 여덟 살짜리 코 흘리게 꼬마가 지금 아들 둘이 있는 서른네 살의 중년이다. 나도 그들과 함께 같이 늙어 간다. 요즘 나는 ‘시간이여 빨리 흘러라. 세월이여 빨리 지나가라’ 라고 생각한다. 시간의 무게가 쌓이면 쌓일수록 내가 찍은 청학동이 세상에서 평가 받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에게 사진이라는 매체가 있기에 이런 기록이 남았다. 세월이 흐르는 사이에 변한 것과 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이 작품을 보는 분들도 같이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글 / 류은규(사진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