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찾아온, 가장 오래된 국어사전
심의린은 1925년 10월 이 사전을 출간하고 2년 뒤에는 조선어연구회(한글학회의 전신)의 기관지 『한글』 창간을 주도하였고, 다시 다음 해에는 조선광문회에서 『조선어사전』 편찬을 위한 조사위원으로 활동한 훌륭한 교육자이자 국어학자였다. 그는 광복 이후에도 한글학회의 강습회에서 교사들을 가르치고 국어교육학회 부회장을 지냈다.
이 사전은 역사적이고 학술적인 의미와 무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에게 너무나도 늦게 찾아왔다. 이 사전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2004년 박형익 교수가 1930년 재판본을 학계에 소개하면서부터이다. 그전까지 학계에서는 1938년에 출간된 문세영의 『조선어사전』이 가장 오래된 국어사전으로 알려져 왔다. 박형익 교수는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의 재판본을 가지고, 서울의 이문당 출판사에서 발간하고 『조선어독본』에 나오는 4,985개의 단어와 그것을 보충하는 967개의 단어를 표제어로 삼아 자음과 모음 순서로 뜻풀이를 한 것으로 소개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1925년 초판본의 존재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출간된 지 83년만인 2008년 9월, 이 사전의 1925년 초판본을 내과의사인 이성동 선생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하면서 세상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성동 선생의 선친인 이경락 선생은 일본 릿쇼대학을 졸업하고 평양 숭인상업학교와 안동사범학교 교수를 지낸 지식인으로 안동의 본가에 수많은 서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성동 선생은 고향인 안동의 사당에 보관되어 있던 초간본 『조선어사전』을 발견하고 선문대 사학과 교수인 처남을 통해 박물관에 기증하게 된 것이다.
끊임없는 기증, 빛바래지 않는 뜻
이 글의 청탁을 받고 필자는 현재 부산에 계신 이성동 선생께 전화를 드렸다. 선생은 대구에서 사셨고, 도로가 확장되어 이사할 때 댁에 책이 많았다고 했다. 그래서 그 책들을 어디에 줄까 고민하시다가 을유문화사에서 책박물관을 만든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연락했으나 을유문화사가 발행한 책들만 전시한다는 답을 듣고 다시 수소문하던 차에 한 교과서 회사에서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뜻 1톤 트럭 분량의 책을 기증하였다. 나중에 감사패를 보내주었는데 당시 기증한 책에는 광복 직후 군정청 교과서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기증했던 교과서 회사는 회사 사정으로 문을 닫았다고 한다.
선생은 선친의 서적들뿐 아니라 서울교육대학 전신이었던 사범대학을 졸업한 누님께서 가지고 계신 책과 노트를 모두 기증하였고, 『대일본백과사전』은 국립도서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선생은 기증 이야기 도중에 간간이 자신의 집안 어른과 살아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안동지역에 널리 알려진 학자였던 조부께서 1968년 돌아가실 때 삼베로 상복을 만들었는데, 자식과 며느리의 서드래와 지팡이가 다른 것을 요즘 사람들은 잘 모른다면서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오신 옷, 생활용품 등 안동 사당에 보관되어 오던 민속품들을 경산에 있는 대구대학교 박물관에 기증하였다고 한다. 이 밖에 천장의 유리기구와 유리로 만든 옛 변기는 연세대 박물관에 기증하셨고, 또 다른 근대의 생활용품들은 부산에 있는 개인 박물관에서 몇 상자 가져갔다고 하였다.
처음 선생은 『보통학교 조선어사전』이 어떠한 사전인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조선일보에 난 최초의 국어사전이라는 기사를 보고 사전의 판권을 확인하게 되었다. 사실 기증 당시인 2008년에는 이미 근대 발간물의 희소가치가 상당히 올라간 터라, 어째서 매도하지 않으셨냐고 넌지시 여쭤보았다. 그러나 선생은 가격으로 환산해보지도 않았고 필요한 곳을 찾아 기증하는 것이 옳다고 여겼던 것 같다. 여기에 아드님도 기꺼이 동의했다고 하였다.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 사람이 간행한 최초의 사전은, 심의린의 서문과 목차 그리고 본문으로 이루어진 198쪽의 작은 책이다. 이성동 선생의 관심이 없었다면 언제 세상에서 빛을 보았을지 알 수 없다. 선생은 대구대학, 경북대학, 연세대학, 교과서연구소 등에 문화재를 기증하였고 선생께는 다만 감사패만 남아있지만, 서운해 하지도 자신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선생은 전화 말미에 현재 선생 댁에는 아직 융희4년에 작성된 호적과 고유섭 선생의 조선미술문화사논총이 있는데 하시면서, 늘 그래 왔듯 기증할 곳을 묻는다. 1937년생이라고 한 선생과의 긴 전화 통화를 끊고 필자는 선생의 구수한 억양과, 가까운 과거의 기억들이 쉽게 잊혀가는 세태에 대한 걱정 어린 말씀들이 한참동안이나 귓가에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