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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묵상글 (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 하느님께 미치려면.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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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하느님께 미치려면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미쳤다는 소문을 들은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온 짧은 얘기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미친 짓 하지 말고 고향에 돌아와
정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친척들은 생각한 겁니다.
이 짧은 얘기를 묵상하면서 정상적인 삶이란 무엇이고,
정상을 벗어난 미친 것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되고,
거창하게는 인생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생각하게도 됩니다.
거창하게 생각하면 인생이란
안정이나 안주와의 싸움이고,
안정과 안주에서 벗어나 어딘가 도달하려고 끊임없이 싸우는 인생 같습니다.
주님께서 미쳤다고 오늘 친척들은 생각하는데
그런데 ‘미치다’의 한 뜻이 정신이 정상이 아니라는 뜻이고,
다른 한 뜻이 ‘도달하다’, ‘가 닿거나 이르다’는 뜻이며,
또 다른 뜻이 어디에 ‘몰입하다’, ‘빠지다’는 뜻이지요.
이것을 얼핏 보면 전혀 다른 뜻들 같은데
제가 생각하기에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도 같습니다.
무엇이든 어떤 경지에 도달하려면 웬만큼 해서는 안 되고,
정상이 아닐 정도로 거기에 몰입해야만 되지요.
반대로 어디에 미치면 그 외에 다른 것은 할 수 없을 정도로
거기에 빠져(몰입하여)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되지요.
옛날 제가 소설에 미쳐 소설을 끄적이던 때가 있었는데
한번 그 소설 속으로 들어가면 마치 지금 젊은이들이 게임에 빠지면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하듯 저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해
수도자로서의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더랬지요.
그래서 하느님께 미치기 위해 소설을 포기했는데
이처럼 하느님께 미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하느님께 제대로 도달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의 정상적이고 안정적인 삶에 안주하는 것은 포기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상적인 삶이라고 하면
때가 되면 결혼하고,
일정한 직업을 가지고 있고,
정상적으로 대인 관계를 유지하고,
역마살 낀 사람처럼 돌아다니지 않고 한곳에 정착하는 등의 고정 관념이 있지요.
이런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정상적이지 않고,
성인들 특히 프란치스코와 같은 성인도 전혀 정상적이지 않았는데
이것이 다 하느님께 미쳤기 때문이고 하느님 나라에 생각이 꽂혔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다가 죽어 하느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서 정상적인 삶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삶은 살 수 없었지요.
그러므로 성인들은 그리고 신앙인 중에서 열심이면 열심일수록
사람들이 정상적인 삶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생이란 정상이라든지 평범이라든지 안정이라든지 안주라든지
이런 것들은 얼마간 또는 많이 벗어나야지 하느님께 도달하고,
하느님 나라와 가까워지게 됨을 묵상케 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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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오늘 <복음>은 두 개의 절로 되어 있는 짧은 본문입니다.
<첫 번째 절>(20절)에서는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내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곧 복음으로 ‘물들어가고 섞여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마치 배추벌레가 배추를 먹으면서 배추색깔로 변해가듯이 말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절>(21절)에서 복음사가는 말합니다.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1)
여기에서, “붙잡다”(krateo)라는 말은 ‘손에 쥐다, 제지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니, 친척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러 나섰다’는 뜻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곧 ‘자신들의 손에 쥐고 조정하고 흔들려고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수난예고 하셨을 때, “베드로가 당신을 꼭 붙잡고 반박하였”(마르 8,32)자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구나.”(마르 8,33)라고 하셨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활동을 제지하려고 붙잡는 이는 그가 비록 제자라 하더라도, 혹은 친척이라 하더라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 사탄의 행위가 되고 맙니다.
그러니, 우리는 명심해야 할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부르신 것이지, ‘나를 붙잡으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님을 따를 뿐 붙잡으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곧 자기의 뜻으로 예수님을 붙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시서 막달레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을 때도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말라.”(요한 20,17)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붙들린 사람’, ‘예수님께 붙잡힌 사람’, ‘하느님께 사로잡힌 사람’(앙드레 루프) 일 뿐입니다. 곧 우리가 하느님을 제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제지하시도록 승복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하느님의 그 제지는 우리의 굴복이 아니라 우리의 자유로운 응답을 통하여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지금 내가 원하는 바를 얻으려고 예수님을 붙잡으려 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께 붙들려 사로잡혀 따라가고 있는지 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먼저 붙드셨고, 우리는 주님의 사랑에 매달려 있는 이들인 것입니다.
사실,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나선 이유는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붙들린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생각에 붙들려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생각에 붙잡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의 생각은 하느님이 아니라 한갓 우리가 만들어 놓은 우상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에서 ‘미치신 분’이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아버지께 사로잡히신, ‘아버지께 미치신 분’이십니다. 동시에,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비가 올 때나 눈이 올 때나, 내가 배신하고 무관심할 때마저도, 언제나 나에서 눈을 떼지 않으시는 진정, ‘나에게 미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마르 3,21)
주님!
당신께 사로잡힌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붙잡힌 자로 살게 하시고
나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사로잡혀 살게 하소서.
사람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일에 붙들려 살게 하시고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조정에 승복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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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몰이해와 소문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이 바쁘게 지내셨습니다(마르3,20). 악령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쳐주며 어둠에 갇혀 있던 이들에게 기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행위를 곱지 않은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를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기존의 규범과 관습을 따르기를 고집하며 새 것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있었고 급기야 소문을 듣게 된 친척들조차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거룩한 사람이나 죄인이나를 상관하지 않으시고 모두를 아우르고 품으셨습니다. 사회적, 종교적 관습을 뛰어넘는 이러한 행동을 보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가족과 친척들조차 처음에는 그랬습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주변 사람들로부터 오해를 살 수 있습니다. 때로는 견제심리에서 모함하기도 하고, 시기와 질투에서 헛소문을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꾸준히 할 일을 하면 빛이 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 어떤 소리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함에 있어서 외딴 곳을 찾아 기도하시고 한적한 곳을 찾아 침묵하심으로써 항시 행할 바를 일깨우셨습니다. 그러나 귀가 얇은 사람은 쉽게 흔들리는 법입니다. 특히 위신과 체면을 중시하는 이들은 겉포장에 현혹되기 마련입니다.
“줏대란 노와 같아요.
배를 타는데 꼭 있어야 할 노와 같아요.
줏대 없는 돌이 아빠는
노 없는 배를 탄 것처럼
남의 말에 흔들려요.
줏대 있는 순이 아빠는
노를 저어 가는 배처럼
누가 뭐래도
자기 갈 길을 가요”-이규경-.
우리도 일상 안에서 이런 저런 소리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진심을 가지고 살면 됩니다. 흔들리지 말고 그야말로 ‘줏대’를 가지고 예수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그분이 오해 받으시고 모함 받으셨는데 하물며 우리가 하는 일이야 말해서 뭣하겠습니까?
선을 선으로 보고 기뻐하는 이도 있고, 그 선을 흠집 내려고 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엔 이런 사람도 저런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그들은 다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러니 지금 주님의 일을 한다면 흔들림 없이 기쁨으로 하십시오! 소문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것입니다. 사람이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소문을 듣고 그것을 믿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기마련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헛된 소문 때문에 그 진실을 알게 되니 은총이기도 한 것입니다.
간혹 우리는 “너에게만 말하는 것인데”하면서 접근하는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할 때도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그 말하는 의도, 속셈을 알게 됩니다. 헛된 소문에 휘둘리지 말고 주님 안에 흔들림 없는 삶을 살아야겠습니다. 그리스도로, 덕행으로 가슴을 채우고 예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변해도 좋습니다. 주 하느님, 당신 안에 뿌리내리면!”(십자가의 성 요한).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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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예전에 동창 신부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동창 신부님은 공부를 잘 하였습니다. 담임선생님은 동창 신부님이 'SKY' 대학에 지원하기를 바라셨습니다. 본인에게도 좋고, 학교에도 좋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동창 신부님은 굳이 ‘서울 신학교’에 가겠다고 했습니다. 선생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름도 잘 들어보지 못한 대학으로 간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미친 짓’이었습니다. 선생님은 ‘협박’도 하고 ‘회유’도 하면서 설득했지만 동창 신부님의 강경한 주장을 꺾을 수 없었습니다. 벌써 4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저는 동창 신부님처럼 우수한 성적은 아니었기에 ‘미친 짓’이라는 소리를 듣지는 않았지만 담임선생님도 약간 의아하게 생각하셨습니다. 신학교에서 배운 교가는 이렇습니다. “진세를 버렸어라. 이 몸마저 버렸어라. 깨끗이 한 청춘을 부르심에 바쳤어라.” 교가의 내용도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보면 ‘미친 짓’인지 모르겠습니다. 배움의 목적은 채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배움의 목적은 성공, 명예, 권력을 향한 사다리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신학교에 지원하는 학생들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미친 짓’을 선택하려는 학생들이 줄고 있다고 합니다. 가정에서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기도는 ‘미친 짓’을 하는 방법을 알려줍니다. 가정에서 말씀을 읽는 시간이 줄어들었기 때문입니다. 말씀은 ‘미친 짓’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려줍니다. 예수님께서는 ‘미친 짓’을 하지 못했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기도하지 않고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미친 짓’을 몸소 행하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벗을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남에게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고, 죽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사하기 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사제들이 참된 행복을 찾기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먼저 찾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미친 짓’이 신앙의 기준으로는 ‘참된 행복’의 길입니다. 거름이 되기보다는 화려한 꽃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십자가를 남에게 떠넘기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보화를 쌓아야 하는데 세상의 창고에 보화를 쌓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그 말씀 때문에 가슴이 벅차야 하는데 말씀이 바람처럼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면서 촛불이 재가 되어야 하는데 기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형식과 관습의 ‘틀’에 갇혀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몸은 세상의 것들에 머물면서 말은 천상의 것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제들이 있다면, 자비를 베푸는 사제들이 있다면, 온유한 사제들이 있다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제들이 있다면, 믿음 때문에 세상의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는 사제들이 있다면 그래서 ‘미친 짓’을 하는 사제들이 행복해 한다면 성소는 다시 불처럼 타오를 것입니다. 불쏘시개가 없는데 밑불이 없는데 불이 타오르기를 바라는 것은 헛된 꿈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미쳤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살면 손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는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살과 피를 기꺼이 내어주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어제 내가 보낸 시간은 어떤 시간이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 시간이 참된 행복의 시간이면 좋겠습니다. 어제 내가 했던 행동은 어떤 행동이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그 행동이 참된 행복의 행동이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라도 기도에 머물며, 말씀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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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신학생 때 등산을 좋아했습니다. 시간만 있으면 무조건 산에 갈 정도였습니다. 왜냐하면 정상에 오르는 것이 커다란 성취감으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즉, 이 산을 정복했다는 성취감이었습니다. 그래서 산 정상에 오르는 맛에 지도를 펼쳐서 정상에 오른 산을 하나 하나 표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산도 정복하고, 저 산도 정복하고…. 거의 이런 식이었습니다.
어느 날, 험한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상황에 놓였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하산하는 길을 찾기가 힘든 상태였습니다. 여기에 비까지 쏟아집니다. 갑자기 산이 너무나도 커 보였습니다. 자연의 힘이 얼마나 큰지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고생하고 난 뒤, 산을 정복했다는 말을 쓰지 않습니다. 산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산 정상에 다녀온 것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긴 고양이가 내 머리 위에 올라갔다고 해서 사람을 정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 역시 정상에 갔다 온 것뿐이고 조금 더 알 수 있게 된 것뿐입니다.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하는 분이 많습니다. 그들의 열심을 보면서 커다란 존경심도 갖게 됩니다. 그런데 때로는 열심히 하시지만 정복자의 모습을 보이는 분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고, 자기 기준에 맞춰서 다른 이를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는 정복자가 있을 자리가 없습니다. 교회 한 가운데 주님께서 계시는데, 주님께서 먼저 가장 낮은 자의 모습으로 커다란 겸손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을 알고 함께 하기 위해 우리 역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판단하고 단죄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인정하고 지지하는 겸손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정복자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친척이었습니다. 음식을 들 시간조차 없을 정도로 바쁘게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하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친척들이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지요.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구름같이 몰려드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붙잡으러 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예수님과 가까운 친척 관계라서 잘 안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미쳤다면서 활동 자체를 하지 못하게 합니다.
아마 친척들은 당시의 높은 지위라고 할 수 있는 종교 지도자들의 말만을 굳게 믿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많이 배웠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그들이 허튼소리를 할 리가 없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께서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했던 그들은 실제로 몰라도 너무 몰랐습니다.
자기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가정 안에서, 교회 안에서, 또 사회 안에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습니까? 정복자입니까? 아니면 겸손한 사람입니까? 정복자의 모습을 통해서는 예수님과 절대로 함께할 수 없습니다. 지금 당장 정복자의 모습을 가감하게 버리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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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의 일을 훌륭하게 하기 위한 최선의 준비는 바로 오늘 일을 훌륭하게 완수하는 것이다(엘버트 허버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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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불광불급(不狂不及)
-“제대로 미치면 성인(聖人), 잘못 미치면 폐인(廢人)”-
오늘 복음은 아마 매일 미사 복음중 가장 짧을 것이니 단 두절입니다. 짧지만 느낌은 강렬합니다. 두절중 마지막 절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한 것이다.’(마르3,21).
아마도 당시 평범한 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의 행태가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미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을 것입니다. 제 경우도 수도성소로 인해 늦은 나이에 모두를 버리고 수도회에 입회할 때 주변의 반응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어찌보면 제대로 미친, ‘신의 한 수’와도 같은 성인들의 공동체가 우리 요셉 수도공동체란 생각도 듭니다.
이 복음을 대할 때 마다 강론 제목은 언제나 동일합니다. 앞으로도 그러할 것입니다. “불광불급(不狂不及)-제대로 미치면 성인,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야말로 제대로 미친 성인의 원조라는 것입니다.
자주 반복합니다만 인생 광야 여정중 세 부류의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라는 것이 제 지론이니 성인, 폐인, 괴물입니다. 사람이라 다 사람이 아니라 본인은 모를지 모르지만 폐인같은, 괴물같은 사람도 참 많습니다. 본래의 참나의 성인이 되는 것이 삶의 유일한 목적이요 공부요 아마도 가장 중요하고 힘든 평생숙제일 것입니다.
참으로 누구나 미칠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생각됩니다. 미칠 광자가 들어가는 말마디들이 이를 입증합니다. 광인, 광기, 광신, 광분, 광란, 광폭등 무수한 단어들입니다. 참으로 제대로 미쳐 참나의 참사람인 성인이, 달인이, 장인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제 분야에서 아마추어가 아닌 진정 프로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주로 선호하는 책은 평전이나 자서전이요 일간지나 주간지에서 반드시 정독하는 기사도 제 분야에서 어느 경지에 이른 전문가의 인터뷰 기사입니다. 바로 제대로 미친 참사람을 만나고 싶은 갈망의 표현인 것입니다. 사실 깊고 좋은 분을 만나면 책 몇권 정도의 효과가 있습니다.
정말 제대로 미쳐 참나의 참사람이 되는 평생 수행, 평생 훈련이 참 중요합니다. 불광불급, 미쳐야 미칩니다. 미치지 못하면 미치지 못합니다. 제대로 미치면 참사람의 성인이지만 잘못 미치면 폐인입니다. 무지성, 무이성, 무상식의 폐인이요 말그대로 무지의 사람들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런 폐인이나 괴물같은 이들을 주변에서 목격하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는 참으로 제대로 미친 무수한 보물들은 지니고 있으니 바로 아름답고 매력적인 성인성녀들입니다. 제가 자주 권하는 “성인이, 성녀가 되라”는 덕담입니다. 사실 성인이 되고자 하는 청정욕, 깨끗한 욕심은 언제든 좋습니다.
이탈리아에는 혹독한 로마 박해 시절에 순교한 4대 성녀가 있습니다. 시칠리아의 성녀 아가타와 루치아, 그리고 로마의 성녀 세실리아와 아녜스입니다. 바로 오늘은 이 넷중 한분인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아녜스는 그리스어로 ‘순결’, ‘양’을 뜻하며 성녀는 291년에 태어나 304년에 순교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13세 어린 나이에 순교한 전설적인 성녀입니다. 나이에 관계없는 성덕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암브로시오 성인은 ‘유약한 나이에 보여준 성녀의 위대한 신앙의 힘’을 높이 칭송했습니다. 오늘 성녀의 고백과도 같은 아침성무일도시 즈카르야 후렴은 얼마나 깊고 아름다웠던지요!
“보라, 나는 내가 갈망하는 것을 보았고, 희망하는 것을 얻었으며, 지상에서 온 마음으로 사랑한 분을 만났도다.”
다음 전설처럼 전해오는, 순교시 임종어와도 같은 저녁성무일도 마리아의 후렴도 참 아름답고 감동적입니다.
“성녀 아녜스는 두 팔을 벌리고 ‘내가 사랑하고 찾으며 갈망하던 거룩하신 성부여, 당신께 나아 가나이다’하고 기도하였도다.”
기념하고 기억할 뿐 아니라 믿는 이들 모두가 성인이 되라 있는 성인 축일입니다. 세례 받아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 모두 본래의 참나의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으며 이보다 더 중요한 평생공부와 과제도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제가 요즘 강조하는 구체적 수행 방법이 “선택-훈련-습관”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 참 좋으신 신망애의 주님을, 진선미의 주님을 선택하여 부단한 훈련을 통해 습관화하여 제2천성이 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이런면에서 평생, 매일 규칙적 일과에 따라 바치는 시편성무일도 미사공동전례기도는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자 동시에 참 좋은 선택에 영적 훈련이요 습관입니다.
사랑의 수행입니다. 사랑을 가득담아 평생, 매일 한결같이 공동전례기도만 잘 바쳐도 성인이 될 것입니다. 작년 2022년 12월 대림시기부터 지금 설 명절을 앞둔 올해 2023년 1월 후반부까지 제가 고백성사시 보속으로 드리는 말씀처방전은 단 하나입니다.
“주님과 함께 항상 기뻐하십시오. 거듭 말합니다. 기뻐하십시오. 사랑하는 형제님(자매님)”(필립4,4)
여기에 덧붙여 여섯가지 사항에 의식적 노력을 다할 것을 권합니다. 1.화내지 않고, 2.기쁘게, 3.웃으며, 4.행복하게, 5.평화롭게, 6.감사하며 사는 영적훈련에 전념하므로 습관화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느님 은총으로 나도 환해지고 주변도 환해질 것이라 말하곤 합니다.
어제도 오늘 출국을 앞두고 가족과 함께 수도원을 찾은 젊은 학생에게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아 나를 통해 주님을 만난 것은 최고의 선택이었다’며 극찬하고 위와 같은 말씀처방전을 써줬습니다. 무엇보다 이런 말씀처방전을 써주다 보니 제 자신이 이렇게 변화되는 듯 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성덕의 선택과 훈련, 습관화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분이 바로 새계약의 중개자인, 바로 미사를 집전하는 대사제 파스카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제1독서 히브리서가 고맙고 은혜롭게도 이를 명쾌하게 밝혀 줍니다.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가리킵니다. 우리 각자 삶의 자리가 성인이 되라 불림받고 있는 꽃자리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각자 삶의 꽃자리에서 참나의 성인이 되어 살게 하십니다. 끝으로 구상 시인의 “꽃자리”로 강론을 마칩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고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고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묶여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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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1.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집으로 가셨다. 그러자 군중이 다시 모여들어 예수님의 일행은 음식을 들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의 친척들이 소문을 듣고 그분을 붙잡으러 나섰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미쳤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마르 3,20-21)
찬미 예수님
다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요? 주님께서 계신 곳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오는 일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요?
사람들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머무시는 집으로 찾아갑니다. 모르긴 몰라도 저마다 각자의 소망을 가지고 찾아갔을 것입니다. 어떤 이는 치유를 위해, 어떤 이는 소망을 위해, 어떤 이는 평화를 위해….
우리도 주님을 찾아 나섰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구름처럼 일어나 주님을 찾아 나서기를 희망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주님보다 돈을 찾고, 소망을 이루기 위해 눈으로 확인될 수 있는 다른 수단을 찾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몇 푼 들여 손에 쥔 종이를 찾기 때문입니다.
찾으십시오. 구름처럼 일어서서 찾아 나서십시오. 주님께서 계신 곳에 이른다면 우리들의 소망과 바램을 말하십시오.
오늘의 복음처럼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니 찾아 나서십시오.
평생 함께 걸어가야 하는 친구 ‘외로움’
태양이 떠올라 우리를 비추면 반듯이 나타나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림자입니다. 태양이 존재하는 한 그림자는 우리에게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가 태양 아래 서 있는 한 그림자는 늘 우리에게 붙어 있습니다.
외로움은 바로 그림자와 같습니다. 우리가 태양 아래 서 있는 한, 삶을 살아가는 한 외로움은 우리와 함께합니다.
어떤 이는 이런 외로움을 숨기려 합니다. 어떤 사람은 외로움을 극복하려 합니다. 자기 내면에서 사라지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 노력은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외로움은 사라지거나 제거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외로움은 여리고 여린 아이와 같습니다. 그래서 외로움은 늘 보살핌이 필요합니다. 상냥한 말이 필요합니다. 따듯한 포옹이 필요합니다.
우리 내면에 자리한 여리고 여린 외로움을 오늘은 한번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 어떨까요? 상냥한 말로 ‘잘 지냈어? 요즘은 어때?’라고 인사하는 것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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