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갈 수 없는
정한용
어느 가난한 나라에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겐 빛은 없고 빚만 있다고 한다. 내일이라는 방에는 오래전부터 전등이 켜지지 않는다. 오늘의 끄트머리에 배치된 방문에 벌써 어둠이 배어들고 있다. 문을 열고 내일로 가려면, 문지방에 걸려 넘어지지 않으려면, 앞 사람의 옷자락을 잡고 잘 따라가야 한다. 내 옷자락엔 누군가 가난한 또 다른 사람이 매달려 있다. 가난이 가난의 꼬리를 잡고 있다. 앞으로 가면서도 옆으로 가는 것인지 뒤로 가는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하루를 건너 닿은 곳이 종종 어제가 된다. 앞으로 가는 때보다 자꾸 뒤로 가는 일이 더 많다 보니, 그 나라의 노인들은 자주 어린이가 되곤 하는데, 정작 젊은이들은 늙은 어린이와 섞이는 걸 거부한다고 한다. 레트로액티브*처럼 과거로 돌아간 미래는 빛이 없어 창백하기도 하고, 빚이 많아 납작납작 얇아지기도 한다. ‘우리는 누구인가’ 같은 둥근 질문도 여기에선 모두 찌그러진다. ‘정의는 살아있는가’ 같은 둥근 요청은 기피 과목이어서 폐강이 된 지 오래라 한다. 그래서 밥그릇도 세모나 네모, 심하게는 무한각형이라고, 이런 환경에 적응해 온 탓인지 이 사람들은 세모나 네모, 심지어는 무한각형의 심장을 갖고 있다고 한다. 모두 그럴듯한 낭설이다.
* 레트로액티브 (Retroactive) : 1998년 개봉된 미국 영화 제목. 반복해 짧은 과거로 돌아가 파국적 상황을 원래대로 되돌리려 애쓰는 상황을 설정함.
정한용
19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평론 당선과 1985년 <시운동>에 시 발표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유령들』, 『거짓말의 탄생』, 『천 년 동안 내리는 비』 외, 영문시선집으로 『How to Make a Mink Coat』, 『Children of Fire』 등을 냈음. 미국 아이오와와 콜로라도, 독일 쇠핑엔, 아이슬란드 라가바튼 등에서 레지던스 작가로 활동. 시작품이 미국, 영국, 호주, 아일랜드, 일본, 캐나다, 보스니아, 마케도니아, 시리아, 스페인, 아랍에미리트 등지에서 현지어로 번역 발표됨. ‘천상병시문학상’, ‘시와시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