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기회에 접한 암벽등반, 바위하기는 마치 술처럼 비처럼 몸에 쏙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바위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고 더 높은 곳을 향하는 마음과 열정은 체계적인 교육에의 갈망으로 이어졌고 나름 이름있는 등산학교에 신청 및 접수를 하게 되었고 해당 교육을 수료한 바 있다.
90년초 당시 산잡지에 올라온 정승권등산학교는 교육기간이 하루인 단기 등반교육이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개인의 이름을 내건 등산학교였다.
지금은 없어진 우이산장앞 마당에 모여 인사 및 이론교육을 받고 계곡길(무당골)로 들어가 곰바위에서 슬랩과 크랙 등 암벽등반 실습을 한 것이 등산학교 정규 교육 내용이었다.
그렇게 등반교육을 받았지만 회사의 업무특성도 있었고, 연애 및 결혼도 있어 등반은 지속적으로 이어지지 않았고 시간이 흘러버렸다.
어느 정도 안정이 찾아온 몇 년 후에 다시 암벽등반을 시작하고픈 마음에 모 등산학교에 신청해서 교육을 받게 되었다.
이번에는 6주 짜리 장기&정규(?)교육이었다.
당시에는 주 5일 근무 이전이라 토요일 오전 근무를 끝내고 오후 퇴근 후 집으로 가서 베낭을 꾸려 산으로 튀는 일상이 이어졌다.
여느 등산학교처럼 그 등산학교 역시 졸업할 때 우수한 성적으로 교육을 마친 수료생에게는 표창과 부상이 주어졌다.
당시 여학생 중에 유일하게 상을 받은 여학생이 있었다.
등산학교에 들어와 등반을 처음 배우는 초보자가 아닌 그 녀는 등반을 아주 잘했으면서도 굉장히 조용하고 여성적인 성격이었다.
까다로운 슬랩에서 발레를 하듯 사뿐히 나비처럼 올라가는 모습은 교육생 뿐 아니라 강사들의 감탄과 칭찬을 자아내기도 했다.
생각해보니 그 녀는 이미 기존 산악회에서 실력을 닦은 베테랑이기에 말을 많이 하지 않으면서 한 걸음 물러서서 관조할 수 있는 여유가 있지 않았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여자후배들이 남자들에게 '형'이라고 부르는 호칭이 일반적이었는데 그 녀는 내게 '오빠'라고 불렀었다.
그 녀가 내게 그렇게 스스럼없이 대했던 이유는 아마 나에게 다른 남자에게는 없는 '퇴폐/낭만'적인 요소가 많아서 그랬지 않았을까 싶다.
속된 말로 만만하게 보였다는 것.
당시 그 녀에게는 사귀는 남자가 있었고, 가깝게 지내는 산악회의 선배여서 친하게 지내게 된 것이 연인으로 발전되었다고 했다.
등산학교를 수료하고 난 뒤 모두 각자의 산악회로 돌아가 등반에 몰두하고 지내게 되었는데, 나 역시 친한 후배들과 산악회를 만들어 바위를 하며 지내면서 까맣게 그 녀를 잊고 지냈다.
까맣게 잊고 지낸 것이 어디 그 녀 뿐일까.
등산학교 수료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녀가 그 산악회 선배와 결혼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렇게 지내기를 몇 년, 여느 때처럼 베낭을 메고 석굴야영장을 향해 땀을 흘리며 오르고 있을 때였다.
내 앞에서 어린 아이의 손을 잡고 지나던 어떤 여인이 있었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고 그 들을 추월해 지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리고 바라보다가 낯익은 얼굴로 내 눈에 들어온 그 녀는 아기 엄마로 변한 등산학교 동기인 그 녀였다.
그 녀 역시 나를 보고 놀라며 무척 반가워했고
어떻게 지내고 있느냐는 안부인사와 근황을 물으며 걷고 있었다.
그렇지만 걸으면서 다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음을 느낀 우리는 도봉산장으로 들어갔고 원두커피를 앞에 두고 앉아 예전 이야기를 풀어내었다.
6주 동안의 기간이었지만 일주일 중에 하루 반 정도의 시간이었고 그것도 등반하는 시간을 빼면, 공유하고 공감할 수 있는 추억이 많지 않았을 텐데도 우리는 스스럼없는 대화꺼리가 있었나보다.
그게 산사람들만의 독특하고도 풍부한 공감대가 아닐까 싶었다.
암튼 그 녀는 전문등반을 하는 남자이자 산선배인 등반파트너를 만나 좋아하는 등반을 실컷 할 수 있게 된다는 기대감으로 결혼생활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이가 태어나고 가정과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남자는 등반보다는 생업에 몰두해야 했고, 목수라는 직업의 특성상 비가 오는 날씨에만 쉴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니 등반은 꿈도 못꾸고 그 녀 역시 아이를 키우고 돌보느라 등반은 커녕 산에도 거의 못갔다고 했다.
남편이 산에 자주 가는 상황이라면 그녀도 아이를 데리고 함께 야영도 하고 워킹도 하고 먼발치에서 등반하는 모습이라도 볼 수 있으련만, 그럴 수 없는 현실은 큰 스트레스로 쌓여갔다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 그 녀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오빠, 사실 나 결혼 한 거 후회하며 살고 있어요." 였다.
그렇게 말하며 힘없는 얼굴로 돌아서는 그 녀를 뒤로하고, 후배와 계획했던 표범길을 오르던 내내 그 녀 생각이 머리 속을 헤집어 놓았다.
도봉산장에서 헤어지며 그 녀의 청에 핸드폰 번호를 주었지만 그 뒤 그 녀에게 별다른 연락은 없었다.
어린 딸이아의 손을 꼭 쥐고 산을 오르던 그 녀의 모습에서 그래도 산보다 등반보다 더 소중한 자식의 존재, 그리고 엄마의 모습이 더 크게 보였었다.
세월은 다시 유수처럼 흘렀고 가끔 그 녀가 생각날 때가 있었고 그럴 때면 함께 생각나는 것이 있는데,
지금도 그 녀는 결혼을 후회하며 그렇게 살고 있을까
아니면,
등반과 산을 잊은 채 행복한 가정생활을 이어가고 있을까,
그것도 아니면 생활을 정리하고 예전처럼 등반을 이어가며 살고 있을까.
인생에 가정은 의미가 없다고 누가 말했던가.
'그 때 내가 그 녀에게 과감하게 속마음을 털어놓았더라면'
'내가 그와 헤어지지 않고 결혼을 했더라면'
...
...
"만약 그랬더라면"
우리 인생은 나의 인생은 어땠을까,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 녀의 인생은 과연 행복했을까!
나의 인생은 행복했을까!
<물안개>
"세월이 이따금 나에게 묻는다.
사랑은 그 후
어떻게 되었느냐고
물안개처럼
몇겁의 인연이라는 것도
아주 쉽게 부서지더라."
류시화
첫댓글 ㅎㅎㅎ 그러니깐 가끔은 애들도 좀 돌봐줘야지....
평행우주이론에 따라..
우주 어느 별에선가 거기에선 행복한 등반을 하며 즐겁게 지내고 있을거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