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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제물을 받으심
창 8:13-22
13 육백일 년 첫째 달 곧 그 달 초하룻날에 땅 위에서 물이 걷힌지라 노아가 방주 뚜껑을 제치고 본즉 지면에서 물이 걷혔더니
14 둘째 달 스무이렛날에 땅이 말랐더라
15 하나님이 노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6 너는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며느리들과 함께 방주에서 나오고
17 너와 함께 한 모든 혈육 있는 생물 곧 새와 가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 이끌어내라 이것들이 땅에서 생육하고 땅에서 번성하리라 하시매
18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의 아내와 그 며느리들과 함께 나왔고
19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1)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21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 그 중심에 이르시되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계획하는 바가 어려서부터 악함이라 내가 전에 행한 것 같이 모든 생물을 다시 멸하지 아니하리니
22 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하리라
창 8:12-22 / 노아는 또 다시 이레를 기다렸다가 세 번째로 비둘기를 밖으로 날려 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비둘기가 되돌아오지 않았다. 13) [새로운 시작] 노아가 601세 되던 해 정월 초하루, 물이 모두 빠져 땅이 말라 있었다. 노아는 배 뚜껑을 열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정말 땅이 말라 있었다. 14) 그해 2월 스무이렛날 물이 완전히 빠져 땅이 다 말랐다. 15)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이르셨다. 16) `너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과 함께 배에서 나오너라. 17) 또 네가 만든 배에 함께 탔던 짐승들 곧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에 기어다니는 길짐승이 모두 다 배에서 나오게 하여라. 그래서 그 짐승들이 이 땅위에서 살아가면서 부쩍부쩍 불어나 온 땅에 가득하게 하여라' 18) 그래서 노아는 아내와 아들들과 며느리들을 데리고 배 밖으로 나왔다. 19) 또한 땅 위에서 살던 짐승들 곧 땅 위에 기어다니던 길짐승과 집짐승과 들짐승과 새들도 각각 그 종류대로 배 밖으로 나왔다. 20) 노아는 먼저 여호와께 제사를 올릴 제단을 쌓았다. 그리고 제물로 드리기에 적합한 깨끗한 짐승과 새를 각 종류대로 가려내어 제물로 잡아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21) 여호와께서는 그 제물의 향기를 맡고 흐뭇해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본디 사람이란 어릴 때부터 나쁜 생각을 품고 살아가게 마련 아닌가? 설령 인간들이 어떤 짓을 한다해도 인간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는 않으리라. 이번에 내가 홍수를 내려서 모두 쓸어버린 것처럼 땅위에서 살아 숨쉬는 것들, 다시는 쓸어버리지 아니하리라. 다시는 그리하지 않으리라. 22) 땅이 이렇듯 있을 동안은 씨 뿌리고 거두어들이는 일,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끊임없이 이어지리라.'
홍수는 노아가 600세 되던 해 2월 17일에 시작되었습니다(창 7:10-11). 그리고 땅이 회복된 때는 노아가 601세 되던 해 2월 27일이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방주에서 나와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습니다.
땅이 말랐더라(13-14) 노아가 방주 뚜껑을 열고 땅 위의 물이 걷힌 사실을 안 때는 그의 나이 601세 1월 1일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땅 위의 물이 마른 것을 확인한 날은 2월 27일이었습니다. 이는 방주가 아라랏 산에 도착한지 7개월 10일이 되던 때이며, 지면에 물이 걷힌 것을 확인한지 57일째 되던 때였습니다. 걷힌지라, 걷혔더니, 말랐더라라는 용어가 쓰여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주체를 밝히지 않았지만 당연히 이 일을 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여 이르시되(15-19) 하나님은 아직까지 방주 안에 머물고 있는 노아에게 방주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또한 방주에 있는 생물들이 땅 위에서 생육하고 번성할 수 있도록 다 이끌어내라고 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자신과 그의 가족들이 모두 방주에서 나오고 땅 위의 모든 동물들을 이끌어냈습니다. 노아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에 의지하여 행동하지 않고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행동했습니다. 지상의 대홍수에도 하나님은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방주에 탔던 모든 동물들을 약속하셨던 대로 구원해 주셨습니다.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20-22) 노아는 방주에서 나온 후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정결한 짐승을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제사했습니다. 이것은 노아의 신앙을 잘 보여주는 행위입니다. “여호와께서 그 향기를 받으시고”라는 기록대로 하나님은 노아의 제사를 기쁘게 받아주셨습니다. 노아의 제사를 받으신 하나님께서 홍수로 깨어진 자연의 질서와 생태계의 회복을 약속했습니다. 낮과 밤의 규칙적인 교차와 1년 사계절의 정기적인 순환을 약속했습니다.
적용: 노아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방주에서 나왔는데 우리의 생활은 어떠한가요?
부흥되는 교회는 그만큼 기도의 맴버들이 기도로 밑받침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한 예배 준수와 함께 노아처럼 온갖 힘을 다해 우리 영의 제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사는 삶이 예배로 이어져야 합니다(롬 12:1-2).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인생의 제일 되는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 안에 성령으로 새 삶을 사십시다. 그러기 위해 말씀으로 충만하십시다. 성령으로 충만하십시다. 예배를 잘 드리십시다. 그래야 하나님께서 영육 간의 형통함과 새로운 복으로 가득하게 부어주실 것입니다.
< 설 교 >
방주에서 나오라
한순간 폭우가 쏟아져도 시야가 가려 운전하기가 어렵습니다. 언젠가 모임이 있어 포항으로 가던 중 폭우가 쏟아졌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아 자동차를 길가에 세우고 30분간 기다렸다가 운전했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창이 열려 하늘에서 물이 쏟아지고 샘이 터져 물이 뿜어 나왔으니 어떠했겠습니까?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라 40일간 주야로 쏟아지고 뿜어 올라오니 세상이 물바다가 된 것입니다. 바다와 육지의 경계도 없고 강과 저수지가 따로 없는 물 천지가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 오로지 노아의 방주만 있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이 탄 배 한 척만 지붕 위의 외로운 참새처럼 물바다를 둥둥 떠다닙니다.
그러니 노아가 불안하게 생각하면, 걱정하려들면 걱정이 한이 없는 것입니다. 방주에서 그대로 끝날 수 있습니다. 또 땅의 물이 마른다 해도 방주가 태평양이나 대서양이나 지중해의 한복판에서 침몰하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노아는 방주 안에서 즐거워합니다. 새들과 함께 새들의 노래 소리를 즐거워하며 지냅니다.
왜입니까? 방주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께서 방주를 무사히 안착시켜주시고 그들을 살려 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대로 하나님께서는 노아와 모든 생물을 권념하시어 바람을 일으키셔서 물을 다 말리셨습니다. 150일이 되니 배가 아라랏 산에 안착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은 ‘아! 이제는 배가 정착했구나.’하고 안심했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교회 방주, 예수 방주 안에 있지만 때로는 세상이 망망한 바다 같습니다. ‘내 인생의 배가 침몰하지는 않을까?’ 내 직장, 내 사업, 내 가정의 미래가 불확실하고 불안합니다. 사고와 병이 많은 이 세상을 보면 순간순간 걱정할 일이 많고, 실제로 걱정할 수밖에 없는 풍랑들이 밀려오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주님의 방주, 교회의 방주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방주에 삿대도, 돛대도, 키도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바람으로 방주를 잘 인도하셔서 아라랏 산에 정착시키신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도 성령의 바람으로 인도하셔서 끝까지 보호하여 주시고 천국의 아라랏 산에 정착시키십니다. 그래서 그곳에서 우리가 새 생활을 하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거하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시편 4:8)
『오직 주에게 피하는 자는 다 기뻐하며 그의 보호로 인하여 영영히 기뻐 외치며 주의 이름을 사랑하는 자들은 주를 즐거워하리이다』(시편 5:11)
『나를 눈동자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 감추사』(시편 17:8)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의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신명기 32:10)’
우리는 염려할 일이 없습니다. 염려할 일이 생기고 풍랑을 만나도 하나님께서 우리 배를 잘 인도하시어 천국의 아라랏 산에 정착케 하시는 것입니다.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하는 주 예수님 이 배의 사공이라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 할렐루야!
우리의 미래를 하나님께서 운전해 주십니다. 우리 인생의 배의 선장은 예수님이십니다. 양곡교회의 선장도 예수님이십니다. 여러분 가정의 선장도 예수님이십니다. 담대하게 평안을 누리며 나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배가 안착된 후에도 노아는 더 기다려야 했습니다.
배가 안착된 날이 7월 17일이었는데, 2개월 13일이 지난 10월 1일이 되어서야 비로소 산봉우리들이 보였습니다. 또 40일을 기다렸다가 창을 열고 까마귀를 내보냈습니다. 그런데 까마귀가 썩은 고기를 파먹느라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깨끗한 비둘기는 접촉할 땅이 없으니 그냥 돌아왔습니다. 또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비둘기를 내보냈습니다. 그날 오후에 비둘기가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왔습니다. 그것을 보고 노아가 압니다.
“야! 산천초목이 살아 있구나. 이 세상이 물에 잠겨 있었는데도 살아 있었구나. 이제 골짜기도 땅이 말랐구나.”
또 일주일을 기다렸다가 비둘기를 날려 보냈습니다. 그 때는 비둘기가 맑고 깨끗한 땅에 깃들일 수 있어서 돌아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노아가 “야! 이제 땅이 다 말랐구나.”하며 방주의 뚜껑을 엽니다. 그 날이 새해 1월 1일입니다.
노아가 방주의 뚜껑을 열고 햇살을 받으며 동서남북을 살피니 땅이 다 말랐습니다.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나오라 하지 않으십니다. 57일을 또 기다려 2월 27일이 되니 그때서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노아야, 너와 네 아내와 네 아들들과 네 자부들과 모든 혈육 있는 것, 새들과 짐승들과 기는 것들을 다 나오게 하라. 이것들이 거기서 번성하고 번성하리라.”
2월 27일이 되어서야 노아가 하나님 말씀을 듣고 나와서 새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신앙생활은 기다리는 것이다.”
잘 기다려야 됩니다.
노아는 40일간 폭우가 쏟아질 때도 마냥 기다렸고, 물이 걷히는 150일 동안도 마냥 기다렸습니다. 방주가 아라랏 산에 안착된 다음에도 2개월 13일을, 또 40일을, 또 일주일을, 그리고 또 일주일을 기다렸습니다. 방주의 뚜껑을 연 다음에도 또 57일을 기다렸습니다.
노아가 기다리는 데 실패했으면 큰 사고를 당했을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라.”라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85세가 되어도, 90세가 되어도, 95세가 되어도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기다립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아들을 주십니다. 95세에 아들을 얻는 것보다는 100세에 아들을 얻는 것이 더 큰 간증거리가 됩니다. 그것을 듣는 사람들이 “야!”하며 얼마나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고 얼마나 큰 은혜를 받겠습니까? 95세와 100세는 차이가 있습니다.
기다릴 때 시험이 많았을 것입니다.
‘나도 남자로서 정욕이 식었고 아내는 경수가 끊어졌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다리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다시 건강하게 하시고 사라를 재창조하셔서 신혼부부처럼 결혼생활을 하게 하시어 아들을 낳게 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기다릴 때 시험거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잘 이겨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12절에 말씀하십니다.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고린도전서 10장 13절에는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초등학교 4학년에게는 고등학교 2학년 시험 문제를 내지 않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풀 수 있는 문제를 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을 주지 않으십니다. 감당할 수 있는 시험만 주십니다. 시험을 주실 때는 피할 길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8절에도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시험을 이기는 사람이다. 나는 문제를 이기는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기다릴 때 방해거리가 있어도 우리는 이길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길 수 있는 문제만 허락하시고, 문제를 피할 길도 이미 주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문제를 이기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이긴다. 나는 이길 수 있다. 주님께서 도우신다.”
이런 믿음으로 승리하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때가 가장 좋은 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8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까? 학자들이 그 이유를 발견하고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사람은 수술을 받을 때나 사고를 당할 때 피를 많이 흘리면 죽는데, 피가 응고되기 때문에 죽지 않고 삽니다. 피가 응고될 때 비타민k와 프로트롬빈이 필요한데 갓난아기에게는 이 성분이 부족하답니다. 생후 3일이 되면 33%가 생기고 차츰차츰 올라가서 생후 8일이 되면 110%가 되고 9일째부터 내려가기 시작하여 100%가 된 다음에는 일생 그것이 유지된답니다. 그러니 사람에게 피를 응고시키는 능력이 가장 강할 때가 바로 생후 8일째인 것입니다. 그것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바로 그때, 응고의 피크타임에 할례를 하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지혜를 찬양합시다. 할렐루야!
마리아와 마르다 가정의 가장인 나사로가 병들었을 때 누이동생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시지 않고 나사로는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장례식에도 오시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1장 17절에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라고 말씀하시니 나사로가 부활했습니다.
병들었을 때 일어나는 것보다, 죽은 그날 일어나는 것보다, 무덤에 있은 지 나흘이 되어서 살아 나오는 것이 하나님께는 더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사로 까닭에 많은 유대인이 가서 예수를 믿음이러라』라는 요한복음 12장 11절의 말씀대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또 마르다와 마리아는 오빠가 무덤에서 살아났으니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하나님의 때가 제일 좋은 것입니다.
기도의 응답이 늦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응답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되는 것입니다. 전도해도 그 사람이 믿지 않는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믿을 때까지 기다려야 됩니다. 충성하며 십일조를 하는데도 부자가 되지 않는다고 포기하면 안 됩니다. 기다려야 됩니다.
갈라디아서 6장 9절에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할렐루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약속을 지켜 주십니다. 시험거리가 있어도 이기고 잘 기다리는,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 여러분과 제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또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은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햇살이 밝게 비치고 땅이 말랐으니 노아는 하루라도 빨리 방주 밖으로 나가서 자유롭게 지내고 싶었을 것입니다. 방주가 두둥실 떠다닐 때는 재미라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방주가 안착해 있는데 그 안에 있으면 얼마나 갑갑하겠습니까? 얼마나 밖으로 나가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제 방주에서 나오라.”라고 말씀하실 그때 나갔습니다.
따라 합시다.
“신앙인은 말씀에 따라 움직인다.”
신앙인은 내 감정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내 느낌, 내 지혜, 내 경륜, 내 판단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장로님인데도 교회를 정하지 않고 주일마다 교회를 옮겨 다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선거운동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위해서 드려야 합니다. 자기 사업을 위해, 자기 정치를 위해 예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예배는 오직 주님을 위하여(For the Lord) 오직 주님께(To the Lord) 드리는 것입니다.
말씀에 따라 예배하고, 말씀에 따라 충성하고, 말씀에 따라 아내와 남편을 사랑해야 합니다. 내 감정에 따라 살면 안 됩니다. 내 감정에 따르면 내가 결혼했어도 때로는 ‘아, 저 청년이 괜찮아 보이네. 저 아가씨가 괜찮아 보이네.’하며 마음이 흔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도 우리에게는 정욕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혼은 새로워집니다. 하지만 살에는 음욕이 꿈틀거리고 피에는 혈기가 있고 뼛속에 교만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령으로 이기고 말씀으로 이겨야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따르지 않고 감정에 따르면 남편이 있는 아내에게 “I love you.”하다가 초라하게 되고 가정이 파괴되고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푸쉬킨은 소망을 주는 시를 많이 쓴 러시아 문학의 아버지입니다. 저는 푸쉬킨을 좋아하여 어릴 때부터 그의 시를 자주 애송했습니다.
‘생활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설움의 날을 참고 견디면 정녕 기쁨의 날도 오리니’
얼마나 멋집니까?
러시아가 낳은 이런 인물이 한 여자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의 부인이 자신의 감정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어느 젊은 장교를 사랑했는데, 그 소문이 퍼졌습니다. 푸쉬킨은 ‘내가 하늘같이 믿는 여자가 그럴 수 있나?’ 하며 확인해 보니 그 소문이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여자를 두고 두 남자가 총을 가지고 결투를 하기로 했습니다.
남자들만 따라 하십시오.
“세상에 목숨 걸 여자 없다.”
제가 만일 그때 거기에 있었다면 “푸쉬킨, 그러면 안 돼요. 그런 여자 때문에 목숨 걸 필요 없어요.”라며 말렸을 것입니다.
장교는 총으로 사는 사람이고 문학가는 펜으로 사는 사람이니 결투의 결과는 하나마나 뻔합니다. 결국 그 결투에서 푸쉬킨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가정이 파괴되는 것은 감정을 따라 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썩은 감정, 썩은 사랑입니다. 말씀에 따라 남편에게 순종하고, 젊어서 취한 아내를 말씀에 따라 아끼고 사랑하며, 말씀에 따라 부모를 공경하고, 말씀에 따라 교회에서 충성하고, 직장생활을 말씀에 따라 귀하게 해야 합니다.
만일 노아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 전에 방주에서 나왔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물웅덩이, 질퍽질퍽한 비탈길이나 벼랑에서 코끼리가 넘어져 죽고 소가 떨어져 죽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풀들이 많이 자라지 않았을 테니 토끼는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딸기도, 사과도 열리지 않아서 사람도 먹을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57일을 더 기다리게 하신 것입니다. 그동안 풀이 자라고, 딸기가 나오고, 포도가 맺히고, 도토리가 열렸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과 생물들이 방주에서 나왔을 때 먹을 것이 가득해서 그것을 먹고 산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사야 55장 8절에서 9절에 말씀하십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할렐루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것이 높은 길이고 잘 되는 길이며, 생명이고 복입니다.
미국의 한 정비회사에 독실한 크리스천이 있었습니다. 경건한 생활을 하다 보니 술좌석이나 단합대회에 빠지는 일이 많았습니다.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그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과장님이 ‘팀웍을 깨는 사람, 분위기를 망치는 사람’이라며 늘 미워하고 평가 점수를 나쁘게 주어서 승진도 못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회사에서 왕따를 당했지만 그는 인내하며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 말씀대로 사람에게 하듯하지 않고 주께 하듯하며 신실하게 열심히 일했습니다.
7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사장님이 그를 불렀습니다. 덜덜 떨며 사장실에 들어간 그에게 사장님이 말했습니다.
“당신에게 이 회사를 맡기고 싶으니 당신이 이 회사의 사장이 되어 주시오.”
“사장님, 저는 돈이 없습니다.”
“나도 알고 있소. 나는 지금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신실한 사람을 찾고 있소. 내가 지금까지 지켜보니 당신이 가장 신실한 사람이었소.”
그래서 그가 그 회사의 사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때가 되면 반드시 세워 주십니다. 그러니 내 감정, 내 경륜, 내 지혜로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됩니다.
신명기 15장 4절, 5절에 말씀하십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우리는 이미 구원은 다 받았습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구원은 이미 받았다. 예수 믿은 첫날 다 받았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서 복을 받아야 됩니다.
직장에서도 잘 되고 비즈니스도 잘 해서 하나님을 위해 큰 일을 할 수 있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되는 길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뿐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방법은 쉽습니다.
신명기 30장 11절에서 14절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한 이 명령은 네게 어려운 것도 아니요 먼 것도 아니라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가서 그 명령을 가지고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하게 할꼬 할 것이 아니요 이것이 바다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니 네가 이르기를 누가 우리를 위하여 바다를 건너가서 그 명령을 우리에게로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들려 행할게 할꼬 할 것도 아니라 오직 그 말씀이 네게 심히 가까워서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은즉 네가 이를 행할 수 있느니라』
따라 합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벌써 우리에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시간 시간 설교로 말씀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말씀이 가득합니다. 그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십니다.
누가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드로야,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주여, 밤이 맟도록 수고를 했으나 얻은 것이 없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주님 말씀에 순종하니 그물이 찢어지도록 물고기를 잡습니다.
요한복음 21장에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대로 순종하니 큰 물고기 153마리가 잡혔습니다.
누가복음 7장 11절 이하에 보면, 나인성의 한 과부가 아들을 잃었습니다. 아들은 시신이 되어 실려 가고 아들을 잃은 과부는 슬피 울며 그 뒤를 따라갑니다. 마침 그때 예수님께서 그 성에 들어가시다 그것을 보시고는 측은히 여기셔서 말씀하십니다.
“여인아, 울지 마라.”
그리고 그 관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십니다.
“청년아(Young man),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I say to you, get up!)”
청년이 살아납니다.
따라 합시다.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된다.”
주님의 말씀은 그대로 됩니다.
요한복음 9장에 나면서부터 소경인 자가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십니다.
이것을 비판하려고 하면 “아무리 소경의 눈이라도 그렇지, 왜 침을 뱉아 진흙을 이기시나? 물로 해도 되는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소경에게 ‘네가 지금 치료를 받고 있다.’라는 것을 알려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침을 발라 진흙을 이겨 소경의 눈에 바르신 다음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 말씀대로 순종하니 소경의 눈이 밝아집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말씀하신 대로 다 됩니다. 대저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과학자들이 하나님의 창조를 보고 깜짝 깜짝 놀란다고 합니다.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 가정하고 원숭이에게 계속해서 말을 가르쳤는데 아무리 가르쳐도 원숭이는 말 한 마디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원숭이는 사람을 죽여도 살인죄를 적용시키지 않습니다. 중국에서는 원숭이를 묶어 놓고 머리를 쳐서 그 골을 뽑아 먹기도 한답니다. 만일 원숭이가 사람의 조상이라면 어떻게 그렇게 하겠습니까? 어떻게 동물원에 가두어 놓고 놀리겠습니까? 또한 사람은 흑인이든 백인이든 황인이든 혈액형이 같으면 서로 수혈을 해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원숭이 피를 사람에게 수혈하면 사람이 즉시 죽습니다. 이것은 원숭이와 사람은 종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다윈의 진화론을 가르치지 않는 나라가 생기고 있습니다. 진화론은 가설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모든 피조물을 지으셨습니다. 놀랍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그대로 되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순종할 때 그 말씀이 우리에게 실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깨닫게 되는 교훈은 신앙인은 질서 있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 합시다.
“신앙인은 질서 있게 살아야 한다.”
만일 코끼리, 다람쥐, 사자, 토끼, 돼지, 쥐, 병아리가 무질서하게 방주에서 나왔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코끼리의 발에 다람쥐와 토끼가 죽고, 소의 발에 병아리가 밟혀 죽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들은 없어졌을 것입니다. 생명은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에드워드 쿤 클린 교수가 말했습니다.
“생명은 절대로 그냥 형성되지 않는다.”
생명이 그냥 형성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냥 형성되는 것을 확률로 비유하면, 인쇄소가 폭발했을 때 거기에 있는 ABCD……의 활자들이 공중에 떴다가 떨어지면서 저절로 붙어 대영백과사전이 만들어지는 확률과 같다는 것입니다. 인쇄소가 폭발하여 저절로 대영백과사전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생명이 그냥 형성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생명은 하나님께서 만드셔야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질서가 없으면 많은 생명을 잃게 됩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모든 생물들이 방주에서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종류대로 나오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람쥐 부부가, 토끼 부부가, 돼지 부부가, 곰 부부가 손잡고 “노아 할아버지, 감사합니다.”하며 질서 있게 나와서 다 살았습니다.
극장에 불이 났을 때도 질서 있게 차례차례 나와야지, 한꺼번에 밀려 나오려 하면 다 죽습니다. 질서가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고린도전서 14장 33절에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린도전서 14장 40절에는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할렐루야!
따라 합시다.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우리도 질서 있게 살아야 됩니다.
교회는 질서의 교회입니다. 성가대원은 성가 대장님의 말을 들어야 하고 지휘자의 지휘를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뿐 아니라 직장에서나 학교에서나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회사의 사원은 사장님과 부장님을 존중하고 잘 따라가야 회사가 됩니다. 학교의 학생은 선생님을 잘 따라야 공부가 되는 것입니다.
엊그제 어느 여학교에서 이런 일이 있었답니다. 선생님이 교실에 들어왔는데도 학생들이 계속 떠들어서 “조용히 해라. 조용히 해라.”라고 했답니다. 그런데도 한 여학생이 계속 떠들어서 그 학생의 이름을 부르며 조용히 하라고 해도 여전히 떠들었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빗자루로 그 학생의 등을 때렸답니다. 그러니 그 여학생이 선생님의 뺨을 치고 밀어서 선생님이 상처를 입었답니다. 그런 무질서한 교실에서 공부가 되겠습니까?
질서가 있어야 됩니다.
어느 책에서, 전화기의 부속품이 474가지인데 그것을 8명의 전문 기술자가 순서대로 조립한다는 글을 보았습니다. 만일 474가지의 부속품을 그냥 막 섞어 놓으면 전화기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만들어 놓은 것으로 전화를 할 수 있겠습니까?
공부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음 주 목, 금, 토요일에 학기말 시험을 친다고 합시다. 그러면 월요일에는 국어와 수학 공부를 하고, 화요일에는 무슨 과목을 하고, 이렇게 계획을 세워서 해야지, 아무런 계획도 없이 국어 공부를 하다가 “아이고, 영어를 해야 되겠다.”하며 영어 공부를 하고, 그러다 또 “아이고, 수학이 더 급하지.”하며 수학 책을 꺼내면 공부가 되지 않습니다.
하루를 살아도 계획을 세워서 질서 있게 살아야 합니다.
“아침에는 성경 읽고 기도하고……, 사람을 만나기 전에도 먼저 기도하고…….”
아무리 바빠도 질서가 있어야 합니다. 출근할 때 바쁘다고 구두를 먼저 신고 그 다음에 양말을 신으면 되겠습니까? 아무리 바빠도 양말을 신은 다음에 구두를 신어야 합니다.
질서가 얼마나 중한지 모릅니다.
아름답고 복된 신앙인이 되려면 기다릴 줄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말씀에 따라 움직여야 됩니다. 또 질서 있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살아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드리고, 우리는 축복의 동산에서 복을 누리며 사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