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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하는 믿음 / 이정원 목사
히 11:5-6
어떤 믿지 않는 남편이 어느 주일 아침 교회에 나가겠다고 따라나섰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기쁜 마음으로 남편과 함께 교회로 향하던 아내의 마음에 갑자기 걱정이 생겼습니다. “오늘 목사님의 설교가 남편의 마음을 열어서 주님을 영접하게 만드는 내용이어야 할 텐데…” 그런데 그 날 주보를 보니 설교 본문이 창세기 5장이었습니다. 아내가 보기에 그 본문에는 복음의 내용이 없었습니다. 계속해서 죽었다는 말만 되풀이되고 있는 본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의 염려와는 달리 이 남편은 그 날 이후로 착실한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 날 본문에 계속 나오는 ‘죽었더라’라는 말이 그에게 충격을 주어 주님을 영접하게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런데 창세기 5장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단 한 사람 에녹은 죽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5절) 에녹은 죽음을 이기고, 죽음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품속으로 바로 들어갔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았기에 유독 그만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께로 올라갔을까요? 그는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신앙의 전기
에녹은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창세기 5장은 에녹이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창5:21-22)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고 난 후부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이 말씀은 에녹의 삶이 므두셀라를 낳기 전에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므두셀라를 낳은 것이 어떤 계기가 되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았을 때 심판에 대한 어떤 메시지를 주셨던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 이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유다서는 에녹이 당시 사람들에게 심판을 경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7대 손 에녹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1:14-15)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주셨고, 에녹은 그 심판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전했습니다.
그런데 에녹은 언제 하나님께로부터 이 심판의 계시를 받았을까요? 그가 아들 므두셀라를 낳을 때였습니다. 그의 아들의 이름 므두셀라가 이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에녹은 아들을 낳고 이름을 므두셀라고 지었는데, 그 이름은 ‘창을 던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고대에서는 전쟁할 때 ‘창을 던지는 사람’이 맨 앞에 서서 적의 공격을 막아냈습니다. 만일 창을 던지는 사람이 죽으면 그 성은 멸망을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므두셀라’라는 이름과 관련해서 “그가 죽으면 심판이 온다.”라는 메시지를 추론해낼 수 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므두셀라가 노아 홍수가 일어나던 해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므두셀라가 죽은 후 하나님께서 에녹에게 계시하셨던 심판이 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에녹이 므두셀라를 낳을 때 하나님께로부터 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았을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에녹은 그 때부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사람마다 예수 믿게 된 동기가 있고, 그 중에서도 더욱 정신 차리고 신앙생활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가까운 사람의 갑작스런 죽음이 계기가 되어 하나님께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버지가 되어 아이를 안고서 그 아이의 눈을 들여다보는 순간에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예수 믿게 되었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마도 아이를 안고 인생의 본질적인 문제를 생각해봤더니 하나님 외에는 달리 갈 곳이 없음을 느끼게 되었겠지요. 또 어떤 사람은 유치원에 다니는 딸아이가 “아빠 하나님은 정말 계셔요?”하고 묻는 말에 대답을 못하고 얼버무렸는데, 하루 종일 그 질문을 생각하다가 결국은 하나님께로 나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어떻게 해서 예수님께로 나오게 되었습니까?
에녹은 므두셀라를 낳은 것이 전기가 되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심판의 메시지를 받고 완전히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렸으며, 하나님께 인정을 받았고, 죽음을 이긴 믿음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오늘 당신도 이 말씀을 듣고 막연한 신앙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기 바랍니다.
심판을 기억하라!
라인홀드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는 “현대인들이 심각한 부도덕 속에 빠지는 이유는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심판을 믿는다면 변화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심판하실 것을 믿습니까? 우리가 매일 새벽마다, 주일마다 고백하는 사도신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우리는 심판을 믿으며, 매일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행한 모든 일들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고전5:10) 우리는 예외 없이 다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고 산다면, 우리는 지금과는 다르게 살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목사인 저도 하나님의 심판 때문에 참는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에 일치함
그런데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아모스3:3은 두 사람이 동행하려면 두 사람의 ‘뜻이 일치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뜻이 같지 않은데 어찌 동행하겠으며” 사람이 아무리 결혼을 하고 한 집에서 살아도 뜻이 일치하지 않으면 동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본성적으로 무엇이든지 내 뜻대로 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과 뜻을 합하여 동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내 뜻을 모두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들여 순종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시고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기도하신 후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고집과 주장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
우리는 머릿속으로만 하나님을 생각하며 신앙생활을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오는 것만으로 하나님 믿고 산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는 무의식중에 교회에만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고방식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실제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임재해 계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 즉 임마누엘이야말로 성경전체를 꿰뚫고 있는 주제입니다. 이 하나님의 임재를 언제나 생생하게 느끼며 사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요셉은 아무도 없는 곳에서 보디발의 아내의 유혹을 받았을 때 “내가 어찌 하나님 앞에 득죄하리이까?”라고 말하면서 그 곳을 도망쳐 나왔습니다. 그는 감옥에 갇혔을 때나 애굽의 총리가 되었을 때에도 한결같이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를 항상 지켜보고 계신다는 것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살았습니다. 바로 그것이 요셉이 모든 환난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으로 양을 칠 때나, 사울을 피하여 도망 다니던 때나,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나, 한결같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언제나 사람보다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다윗은 무슨 일에나 하나님께 물어 하나님의 뜻을 구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도 언제나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살았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께서 자기와 함께 하시며 자기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생생하게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말씀하셨다”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 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언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행23:11)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행27:23-24)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나로 말미암아 선포된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이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딤후4:17) 바울의 위대함은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이와 같이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사는 것을 말합니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항상 당신과 함께 계신다는 것을 기억하고 경험하면서 삽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며 온전히 신뢰하면서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성도는 매일의 삶 속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든 사물 속에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있습니다. 역사와 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는 삶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교제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는 말씀묵상과 기도가 그 기본입니다.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며, 그렇게 할수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매일 진지하게 말씀을 묵상하는 성도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을 민감하게 들으며,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순종하게 됩니다. 늘 기도에 힘쓰는 성도는 나의 모든 생각과 일들을 하나님께 다 말씀드리게 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하나님께 나의 모든 것을 말씀드리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주님을 닮게 됩니다. 만일 주님을 닮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결혼해서 살다보면 부부가 서로 닮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각이나 습관, 말만이 아니라 생김새까지도 닮아갑니다. 가족들이 서로 닮은 것도 오랜 세월을 함께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목사를 닮는다고 합니다. 오랫동안 그의 설교를 듣고, 그의 행동을 보아왔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어떻게 주님을 닮지 않겠습니까? 오늘 당신은 주님을 닮고 있습니까?
만일 우리가 주님을 닮지 못했다면,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그 사람이 하는 봉사나 찬양이나 가르침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될 수 없고, 주님께서 기뻐하시며 인정하시는 것도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님을 닮아가고 있습니까? 주님과 동행하는 가운데 주님을 위해 충성하며 봉사하고 있습니까?
우리에게는 불가능한가?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삶은 옛날처럼 한가하던 시대에나 가능하지 오늘처럼 바쁘고 피곤한 시대에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에녹이 그렇게 할 일 없이 한가하게 살았다고 생각한다면 오해입니다. 그는 삼백 년 동안이나 자녀를 낳으며 하나님과 동행했습니다. 우리는 대개 5년 내지 10년 동안만 자녀를 낳으면서도 얼마나 바쁘고 피곤하게 삽니까? 그런데 삼백 년 동안 자녀를 낳았다면 몇 명이나 낳았을 것이며, 그 식구들을 부양하느라 얼마나 바쁘고 피곤했겠습니까? 더구나 에녹은 7대 족장이었습니다. 당시에 족장은 지금의 왕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는 우리 보다 더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때는 지금처럼 죄악이 심하지 않았으므로 그러한 삶이 가능했을 것이나, 오늘처럼 죄악이 가득 찬 세상에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노아의 때와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가 똑같이 죄악된 시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서도 당시의 시대상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7대 손 에녹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1:14-15) 그 때도 지금처럼 죄악이 극심했습니다. 에녹이 이렇게 빛나는 이유도 죄악이 심한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죄와 유혹이 많은 세상일수록 하나님과 동행하는 축복과 영광은 더욱 큽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아벨은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제사를 드렸으며,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해서 말한 후 히브리서 기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6절)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롬8:8)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하지 않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14:23하) 그래서 가인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며, 하나님을 흔들림 없이 신뢰하며,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으로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당신은 이 믿음으로 살고 있습니까? 모든 것을 다 이 믿음으로 하고 있습니까? 이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바쁘고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살수록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더욱 절실한 일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서 얻는 은혜와 위로와 축복은 우리를 이 죄악된 세상에서 더욱 거룩하고 능력 있는 성도가 되게 합니다. 에녹은 하나님의 임재를 실감하고 살면서 매사에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에녹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인정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의 축복이요 영광입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로 인정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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