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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일반삼(擧一反三)
하나를 들어 셋을 돌이켜 본다는 뜻으로, 한 가지를 가르치면 세 가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하거나 지혜가 있음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擧 : 들 거(手/14)
一 : 한 일(一/0)
反 : 되돌릴 반(又/2)
三 : 석 삼(一/2)
(유의어)
거일명삼(擧一明三)
문일지십(聞一知十)
출전 : 논어(論語) 술이편(述而篇)
하나를 들어 셋을 돌이켜 본다는 뜻으로, 한 귀퉁이를 가리키면 나머지 세 귀퉁이도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는 말로 한 가지를 가르치면 세 가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하거나 지혜가 있음을 비유한 말이다.
거일반삼(擧一反三)이란 한 가지를 들어서 세가지를 돌이켜 안다는 뜻으로, 한 가지 일을 미루어 모든 일을 헤아림 즉, 매우 영리함을 이르는 말이다. 원래는 한 귀퉁이를 가리키면 나머지 세 귀퉁이도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는 뜻으로, 한 가지를 가르치면 세 가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하거나 지혜가 있음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인류의 위대한 스승으로 평가 받는 공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배우는 이가 마음속으로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 주지 않으며, 표현하고자 애태우지 않으면 말문을 열어 주지 않으니, 사각형의 한 귀퉁이를 들어 주었는데 이것을 가지고 남은 세 귀퉁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다시 더 가르쳐 주지 않는다(子曰: 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 不以三隅反, 則不復也)." (述而 8)
이 글의 뜻을 끝 부분에서 네 글자를 골라서 성어하여 결론 지은 말이다. 이 글은 공자의 교육 방법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공자는 학문을 좋아하여, 마음속으로부터 분발하여 의욕을 나타내는 제자들에게는 그 다음 단계를 열어서 보여 주고, 하나를 들어 주어 세 가지를 이해할 만큼 무르익을 때까지는 또 다른 것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러한 공자의 교육 방법은 지식의 일방적인 전달보다는 제자의 적극적인 참여를 유도하기 위한 것이다.
공자는, 하나를 일러 주었음에도 나머지 셋을 미루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되풀이해서 가르쳐 주더라도 소용이 없고, 다만 그 셋을 알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음을 말한 것이다. 거일반삼(擧一反三)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이와 같이 영리한 사람을 뜻하는 말에 문일지십(聞一知十)이 있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으로, 공자의 제자 안회(顔回)는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고 해서, 문일지십이라는 칭송을 들었다.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온다. 반대되는 표현으로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 있는데, 이 말은 쇠귀에 경읽기 라는 뜻이다.
거일반삼(擧一反三)
하나를 알려주면 셋을 안다는 뜻으로, 매우 영리함을 이르는 말이다. 원래는 한 귀퉁이를 가리키면 나머지 세 귀퉁이도 미루어 헤아릴 수 있다는 뜻으로, 한 가지를 가르치면 세 가지를 알 수 있을 정도로 영리하거나 지혜가 있음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공자가 말하였다. "분발하지 않으면 열어 가르쳐 주지 않고, 표현하고자 하나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 더듬거릴 정도에 이르지 않으면 일으켜 주지 않는다. 한 귀퉁이를 들어 가르쳐 주었는데도 나머지 세 귀퉁이를 미루어 알지 못하면 되풀이하지 않는다(擧一隅 不以隅三 則不復也)."
공자는, 하나를 일러 주었음에도 나머지 셋을 미루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되풀이해서 가르쳐 주더라도 소용이 없고, 다만 그 셋을 알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음을 말한 것이다. 거일반삼은 여기서 유래하였다.
이와 같이 영리한 사람을 뜻하는 말에 문일지십(聞一知十)이 있는데,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안다는 뜻으로, 논어 공야장(公冶長)편에 나온다. 반대되는 표현으로는 우이독경(牛耳讀經)이 있는데, 이 말은 '쇠귀에 경읽기.'라는 뜻이다.
공자의 가르침에서 배우는 창의적 문제 해결과 비즈니스 혁신 전략,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해 큰 가치를 창출하는 중소기업 사례, 하나를 배우고 넷을 창출하라, 협업과 다각화로 성장하는 기업들.
거일반삼(擧一反三)은 스승에게 하나를 배우면 나머지 셋을 유추하여 깨닫는 학습 능력을 뜻합니다. 이는 단순히 학문적 깨달음에 그치지 않고, 현대 비즈니스 경영에서도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합니다. 특히 빠르게 변화하는 경영 환경에서 중소기업은 제한된 자원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활용하여 더 큰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필수적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거일반삼(擧一反三)은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이라는 현대적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거일반삼(擧一反三)의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
공자는 논어에서 학습자의 자발적 태도와 통찰력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기업이 요구하는 창의적 문제 해결 능력과도 일맥상통합니다. 대기업에 비해 자원이 부족한 중소기업은 제한된 정보를 활용해 다각적인 결과를 이끌어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대표적인 사례로 스마트 패키징 기업 A사가 있습니다.
A사는 기존 포장 기술의 문제점을 면밀히 분석하고 친환경 스마트 패키징으로 전환함으로써 변화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이들은 단순히 제품을 포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포장 과정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기반으로 물류 효율성을 개선하고 고객 경험을 향상시키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하나의 문제를 깊이 파악한 결과, 이를 통해 세 가지 이상의 새로운 솔루션을 창출해낸 것입니다.
이처럼 고사성어 거일반삼(擧一反三)은 현대 경영에서도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합니다. 학습과 경영의 공통된 핵심은 하나를 배우고, 나머지를 스스로 유추하여 창의적으로 적용하는 능력에 있다는 점에서, 중소기업들이 이를 효과적으로 실천하고 있습니다.
직원 교육과 혁신 문화, 공자의 교육 방식에서 배운다
직원 교육과 혁신 문화는 기업의 지속 가능한 성장과 경쟁력 강화를 위한 핵심 요소로 꼽힙니다. 공자는 논어에서 제자들에게 힌트를 주되 스스로 깨닫게 하는 학습 방법을 중시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기업이 직원들에게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부여하며 자율적인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중소 IT 기업 B사가 있습니다. IT 솔루션을 개발하는 B사는 매년 직원들이 자유롭게 아이디어를 제안하고 이를 실제 프로젝트로 발전시키는 혁신 캠프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이 캠프에서는 하나의 아이디어가 여러 팀의 협업을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구체화됩니다. 그 결과 신제품 개발뿐만 아니라 비즈니스 확장으로 이어지는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냈습니다.
이처럼 직원들의 자발적인 참여와 협업이 뒷받침되는 환경은 기업의 혁신 문화를 강화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공자가 강조한 학습법처럼, 기업도 직원들에게 자율성과 창의성을 발휘할 기회를 제공해야만 새로운 가능성을 열 수 있습니다.
업무의 다각화, 한 가지 노력으로 다중 효과를 창출하다
하나의 노력을 통해 다수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고사성어 거일반삼(擧一反三)은 현대 경영에서 다각화 전략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기업은 제한된 자원 속에서도 다각적인 접근을 통해 더 큰 가치를 창출할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이를 성공적으로 실현한 대표적인 사례로 농식품 스타트업 C사가 있습니다.
C사는 로컬 푸드를 활용한 음식을 개발하면서, 이와 동시에 온라인 교육 콘텐츠를 제작하고 지역 농산물 홍보 플랫폼을 운영하는 다각화 전략을 펼쳤습니다. 이들은 로컬 푸드를 중심으로 한 아이디어를 기반으로 세 가지 비즈니스 모델을 성공적으로 구축했습니다. 그 결과 매출 증대와 고객 만족도 향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 사례는 현대 경영에서 다각화가 얼마나 중요한 전략인지 보여줍니다. 하나의 노력이 다양한 결과로 이어지는 다각화 전략은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높이는 데 필수적인 접근법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거일반삼(擧一反三)의 정신은 이렇게 현대 경영에서도 유효한 교훈을 제공합니다.
정보 공유와 협업, 모퉁이를 돌아 세 모퉁이를 찾다
공자가 말한 모퉁이를 돌아서 나머지 세 모퉁이를 찾는 노력은 정보 공유와 협업의 중요성을 잘 보여줍니다. 기업 내에서 정보의 투명성을 확보하고 부서 간 협력을 강화하는 것은 제한된 자원을 극대화하고 효율성을 높이는 데 필수적입니다. 이를 성공적으로 구현한 사례로 제조업체 D사가 있습니다.
D사는 기존의 사일로(Silo) 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부서 간 협업 플랫폼을 도입했습니다. 이 플랫폼은 제품 설계, 생산, 마케팅 등 기업 활동의 전 과정을 긴밀히 연결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의 개선 아이디어가 여러 부서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며 전체적인 운영 효율성을 크게 향상시켰습니다.
이 사례는 현대 경영에서 협업과 정보 공유가 얼마나 중요한 성공 요인인지 강조합니다. 공자의 가르침처럼, 기업도 투명한 정보 공유와 원활한 협업을 통해 더 많은 가능성을 발견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이룰 수 있습니다. 모퉁이를 돌아 나머지 세 모퉁이를 찾는 노력은 지금도 유효한 경영 전략의 핵심입니다.
고사성어 거일반삼(擧一反三) 정신, 현대 비즈니스의 길잡이로
고사성어 거일반삼(擧一反三)은 학습과 경영에서 스스로 깨닫고 응용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이 가르침은 현대 비즈니스 환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합니다. 특히 국내 중소기업들은 제한된 자원과 정보를 효율적으로 활용해야 하는 상황에서 거일반삼의 정신을 실천하며, 큰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공자가 강조한 하나를 배우고 나머지를 스스로 헤아리는 지혜는 오늘날의 경영에서도 중요한 덕목입니다. 이러한 통찰력과 응용 능력은 기업이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혁신을 이뤄나갈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결국 거일반삼(擧一反三)의 가치는 고대 철학의 지혜를 넘어 현대 경영에서도 유효한 교훈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를 실천하는 기업은 창의적인 문제 해결과 다각화된 성과 창출을 통해 끊임없는 발전을 이루며, 앞으로도 더 큰 가능성을 열어갈 것입니다.
공자(孔子) 공부법
공자(孔子, 기원전 551~기원전 479년)는 중국 춘추시대의 위대한 학자이자 사상가이자 교육가로서 유학을 창시했다. 수십 년 동안 천하를 떠돌며 정치사상을 전파하다 만년에 고향 곡부(曲阜)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을 교육에 헌신했다. 교육자로서 평생 뛰어난 제자를 숱하게 배출해 만세사표(萬歲師表)로 추앙받고 있다.
세 살 때 아버지 숙량흘(叔梁紇)을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게 자랐다. 어머니 안징재(顔徵在)는 남의 집 일을 해주며 공자를 키웠는데, 특히 음악 교육에 정성을 쏟았다.
음악 교육의 중요성에 관해 안징재는 “사람이 되려면 뿌리와 기초가 무엇보다 중요하고, 일을 처리할 때는 원칙에 따라야 한다. 예악(禮樂)은 규칙이나 원칙을 중시한다. 연주법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연주하면 곡이 성립하지 않는다. 아이에게 (음악 교육을 통해) 일찍부터 예의·음률·등급을 알게 하면 훗날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공자 사상의 핵심인 예악의 기초가 어머니의 교육법을 통해 다져진 것이다.
젊은 시절 공자는 말단 관리부터 여러 관직을 경험했으며 50세에는 노(魯)나라 중도재에 이어 대사구가 되어 재상의 일을 섭정했으나 오래 있지 못하고 사직했다. 이후 여러 나라를 떠돌며 자신의 정치사상을 전파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만년에 조국 노나라로 돌아와 고대 문화 서적을 정리하고 후학을 양성했다.
공자는 평생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헌신했다. 70여 년에 이르는 공자의 삶이 반영된 언행록을 훗날 책으로 엮었는데, 그것이 바로 '중국인의 바이블'로 불리는 '논어'다.
공자의 공부법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정독(精讀)하고 또 정독하는 것이었다. 그는 스스로에 대해 논어 술이편(述而篇)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면서부터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옛것을 좋아하고 힘써 탐구하는 사람일 뿐이다."
공부는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부지런히 배우는 것이라 했다. 논어 계씨편(季氏篇)에서 공자가 "나면서 도를 아는 사람이 최상이요, 배워서 아는 사람이 그다음이요, 벽에 부딪혀 배우는 사람은 그다음이다. 벽에 부딪혀서도 배우지 않는 자는 최하라 한다"라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평소 공자는 논어 공야장편에서 "열 가구 마을에 충직과 믿음이란 면에서는 나만 한 사람이 반드시 있겠지만 공부하길 좋아하는 면에서는 나만 한 사람이 없을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공부에 관한 한 자부심이 대단했다.
또 독서(공부)는 반드시 배움과 생각을 함께 중시해야지 어느 한쪽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점을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라는 말로 논어 위정편에서 강조했다.
자신의 공부 경험을 전체적으로 되돌아보며 "내가 일찍이 종일 먹지도 않고 밤새 자지도 않고 생각에 빠져보았으나 이익이 없었다. 배우는 것만 못하다(논어 위령공편)"라고 했는데, 이 역시 공부[學]와 생각[思]의 균형 내지 조화를 지적한 고백이다.
만년에는 '역(易)'을 집중적으로 읽었는데, 책을 묶은 가죽 끈이 끊어져 세 번이나 바꿀 정도로 정독했다. 여기서 그 유명한 '위편삼절(韋編三絶)'이란 고사성어가 나왔다. 공자가 일찍부터 '역'을 소개하고, '춘추'를 정리하고, '시(詩)'와 '서(書)'를 깎아내고, '예(禮)'와 '악(樂)'을 정함으로써 육경이 보존되어 후세에 전해질 수 있었다고 한다.
공자는 평생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겨 후대에 ‘배우되 싫증 내지 않는’ 만고의 모범이 되었다. 그래서 북송 때 시인 소동파(蘇東坡)는 "공자라는 성인도 배움은 책을 보는 것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李氏山房藏書記 이씨산방장서기)"라는 말로 독서의 중요성을 간결하게 지적했다.
공자는 위대한 사상가였으며 교육자였다. 그 교육사상의 핵심은 인간을 교육하고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그가 추구한 정치(윤리)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 교육에 희망을 걸었다. 그가 창시한 유가의 교육사상이나 철학을 깊이 파고들면 그와 그의 뒤를 이은 유가 계통 사람들이 그저 교육을 통한 인간의 개조에만 중점을 두었다는 근본적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과 사상의 주안점이 대부분 정치와 윤리 도덕에 치우쳐 있다는 점도 유가의 문제점이다. 공자는 인간 세상의 질서와 제도의 정립, 인간의 관계 정립 등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학설을 주로 내세웠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 상하 위계질서를 중시하고 예교에 집착하는 형식주의, 개성의 무시 같은 경색된 사상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는 분명 오늘날 교육과 공부에는 맞지 않는다. 따라서 공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교육법도 뚜렷한 한계를 보일 수밖에 없다. 공자의 공부법을 이해하는 데 이 점을 유의해야 한다. 그럼에도 공자의 공부법에는 참신한 주장과 유용한 내용이 적지 않다. 이런 것을 현대에 맞게 재해석하는 유연성을 발휘한다면 지금도 충분히 본받을 만한 공부법인 것만은 틀림없다. 새로운 눈으로 공자의 공부법을 들여다보면 된다.
공자는 중국 역사상 공부법 이론에 관해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구체적인 방법론과 실천론을 제시한 인물이다. 그의 공부법을 그가 살았던 시대적 한계를 감안해 본다면 놀라우리만치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며 또 신선하다. 좋아서 즐겁게 하라는 공부의 심리적 기본을 언급한 대목에서는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복습의 중요성과 응용을 강조한 것 역시 오늘날 공부법에 비해 손색이 없으며, 특히 공부와 사유, 공부와 실천의 결합을 역설한 것은 인성 교육이란 면에서 대단히 중요한 지적이다. 가히 공부법의 원조라고 할 만하다. 이제 '논어'를 중심으로 공자의 공부법을 좀 더 상세히 알아보자.
좋아하고 즐겨라
논어 옹야편(雍也篇)에서 공자는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는 유명한 공부법을 언급하고 있다. 또 예기(禮記) 중용편(中庸篇)에서는 "배우는 것을 좋아하면 '앎'에 가까워진다(好學近乎知)"라고 했고, 논어 태백편(泰伯篇)에서 "배움은 미치지 못한 듯이 하고 오히려 때를 잃을까 두려워해야 한다(學如不及猶恐失之)"라고도 했다.
실제로 학문을 할 때 좋아서 즐겁게 공부하는 심리와 습관의 중요성을 지적한 말이다. 암기식, 주입식, 강압식 교육 행태가 여전히 판치는 오늘날, 공자의 공부법은 그 울림이 만만치 않다. 공부든 운동이든 그것을 즐기는 사람에게 당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공부법은 오늘날 선진 교육 이론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인자무적(仁者無敵)이란 말이 있듯 공부에서는 낙자무적(樂者無敵)이다. '피할 수 없거든 즐겨라'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넓게 배워서 요점으로 돌아와라
넓게 배워 많이 안다는 박학다식(博學多識)은 깊이 있는 공부나 학문을 위한 기초가 된다. 크고 높은 집을 짓기 위해서는 터를 넓게 다져야 하는 이치와 같다. 공자는 이와 관련해 논어 옹야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식인이 고전을 두루 배우고 예로써 요약한다면 어긋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공자 이후 그의 제자들이 종합한 '학(學; 배우고), 문(問; 묻고), 사(思; 생각하고), 변(辨; 분별하고), 행(行; 행동하라)'의 학습 과정은 '널리 배워서 요약하라'는 공자의 공부법을 실천으로 옮긴 것이다.
요즘 공부나 독서는 지식 습득이 문제가 아니다. 언제 어디서든 원하는 지식을 말 그대로 원 없이 얻을 수 있는 세상이다. 문제는 이 지식의 요점과 핵심을 파악하는 요령인데, 이런 점에서 '널리 배워서 요점으로 돌아오라'는 공자의 공부법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배우고 수시로 복습하라
공자는 논어 학이편(學而篇)에서 "배우고 수시로 복습하라(學而時習)"라고 말한다. 공부의 핵심이 이 짧은 문장에 농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에는 먼저 배운 다음 수시로 복습하라는 두 가지 중요한 공부법이 연계되어 있다. 공자는 목적과 방법을 정해 공부하고 독서할 것을 주장했다.
그래서 공자는 학문을 위해 독서해야 한다며 독서만을 위해 독서하는 것에는 반대한다. 말하자면 배운 것을 현실에 응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책에서 배운 내용에 집착한 나머지 "시경(詩經) 300편을 다 외워도 정치를 맡기면 처리하지 못하고, 사방 여러 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많이 외운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논어 자로편)?"
이런 의미에서 보면 수시로 복습하라는 공자의 말뜻은 언제 어디서든 반복해서 익히고 복습하라는 것이다. 복습해 응용력을 기르라는 말이다.
공부와 생각을 결합하라
앞에서도 언급했듯 공자는 공부와 생각의 균형 및 조화를 강조했다. 그래서 "배우지 않고 무엇을 행할 것이냐? 생각하지 않고 무엇을 얻을 것이냐? 얘들아 노력해라!"라고 말한다.
또 "배우고 생각하지 않으면 어둡고, 생각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하다"라고 했고, "배우지 않고 생각하기만 좋아하면 알더라도 넓어지지 않는다"라고 강조했다. 배움과 생각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말고 모두를 함께 중시하라는 뜻이다. "살펴서 묻고, 신중하게 생각하고 현명하게 가려야지" 그렇지 못하면 얻는 것 없이 까마득해진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는 공부는 대단히 위험하다. 공부와 생각은 자동차와 브레이크의 관계와 같다. 지식 만능주의는 브레이크 없는 자동차나 마찬가지다. 깊은 생각이 함께하는 참 지식은 남을 돕지만, 생각 없는 지식은 자기를 과시하기에 급급한 나머지 남을 해치는 무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생각 없는 얄팍한 지식과 한때의 경험에 집착해 변화하는 세상과 인심의 흐름을 무시하는 꽉 막힌 지식인이나 권력자가 지금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가. 이런 점에서 2,500여 년 전 공자의 공부법은 지금도 얼마나 유효한가.
공부와 실천을 결합하라
공부의 종착점은 행동이자 실천이다. 배우고 생각한 것을 자신의 삶에서, 나아가 세상 속에서 실천으로 옮기는 것으로 배움은 끝난다. 물론 모두가 이렇게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면서 살지는 못한다. 하지만 최소한 자신이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려는 노력은 해야 한다. 이럴 때 인간의 고귀함이 빛나고, 세상은 좀 더 밝고 따뜻하게 변화할 것이다. 물론 그 시작은 독서다.
공자는 스스로 배운 것을 하나의 큰 사상으로 정리하고 이를 세상에 전파하기 위해 장장 14년에 걸쳐 천하를 유력(遊歷)했다. 공부와 실천을 온몸으로 보여준 사람이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공부의 궁극적 목적이란 점에 착안해 공자의 공부와 행동의 결합, 즉 학행결합(學行結合)을 배워서 세상을 위해 유용하게 활용하는 ‘학이치용(學以致用)’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공자의 학행결합에는 이런 의미 외에도 '실천을 통해 공부를 촉진하고 실천을 통해 공부를 돕는다'는 실질적 의미와 함께 '실천이 곧 공부다'라는 적극적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 한편, 학행결합에는 조건이 따른다. 즉 배운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의문이 생기면 배운 것을 다시 생각하는 반사(反思) 내지 반성(反省)이 따라야 하며, 배우는 과정에서 의심이 생기면 실천을 통해 그것을 검증해 보아야 한다.
공자의 수제자 증자(曾子)는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을 반성했는데, "어설프게 배운 것을 남에게 전달하지는 않았는가(논어 학이편)"도 반성했다고 한다. 자신이 배운 것을 점검하는 과정을 말한다.
공자는 "덕을 닦지 않는 것, 열심히 배우지 않는 것, 옳은 것을 듣고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것, 좋지 않은 언행을 고치지 않는 것, 이런 것이 나의 근심거리다(德之不脩 學之不講 聞義不能徙 不善不能改 是吾憂也)"라고 말했다(논어 술이편). 공부와 실천 그리고 자기 수양의 관계를 솔직담백하게 고백한 대목이다. 독서든 공부든 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 목적의식을 갖고 해야 한다.
신구 지식을 연계하라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으로 대변되는 공자의 신구 지식을 연계하는 공부법은 많은 사람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공자는 과거의 지식과 새로운 지식은 내재적 관계에 있다고 보았다. 공부 과정 그 자체가 과거의 지식과 새로운 지식을 연계해나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옛것(고전)을 충분히 익혀 새로운 것을 알면 스승이 될 만하다(溫故而知新 可以為師矣/ 논어 위정편)고 말했다.
과거의 지식은 현재의 활용을 위한 기초가 되며,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미래의 나와 타인을 이끄는 스승 역할까지 할 수 있다. 다만 옛것을 익히되 무작정 외우거나 무조건 따라서는 안 된다. 그래서 예기 학기편(學記篇)에 보면 잡스러운 지식만 머리에 넣어두는 배움으로는 남을 가르칠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요컨대 옛것과 낡은 지식이라도 비판적 시각으로 보고 해석하면 새로운 사실을 유추하거나 남다른 것을 창출해낼 수 있다. 즉 옛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알아내라는 공자의 말은 축적된 지식과 지혜를 활용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라는 의미다. 공자가 즐겁게 공부하라고 강조한 것도 이처럼 새로운 창조를 염두에 둔 것이라 할 수 있다.
논술하되 견강부회하지 말라
흔히 술이부작(述而不作)으로 알려진 이 공부법에 대해서는 그동안 시비가 끊이지 않았다. 공부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선택한 텍스트와 관련해서는 원래 취지를 이해하고 작품 자체에 깃든 사상을 밝히는 데 주로 힘을 쏟아야지 주관적 견해나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해선 안 된다는 의미다.
공자는 '술이부작'에 이어 바로 "믿음으로 옛것(고전)을 좋아하니 가만히 노팽(老彭)이란 은자에 견주어보노라(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논어 술이편)"라고 말해 고전의 전승자를 자처했다. 같은 술이편에서 공자는 또 "알지도 못하면서 지어내는 자들이 세상에 있는 모양이나 나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주관적 견해를 마구 쏟아내는 것에 공자는 단호히 반대했다. 이런 학습 태도는 오늘날 논술에서 요구하는 명확한 근거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예로부터 전해오는 문화적 전통인 고전의 계승에 대한 공자의 자부심과 더불어 고전의 계승과 전파에 중점을 둔 공부법이란 점에서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하지만 공자의 이런 교육법은 현대 교육과 공부법에서 강조하는 창의적 사유나 자유로운 창작과는 상당히 어긋나는 것이 사실이다. 공자보다 조금 뒤에 등장한 묵자(墨子)는 '술이부작'을 비판하며 '과거의 좋은 것은 논술하고, 지금의 좋은 것은 창작할' 것을 주장했다.
말없이 생각하여 기억하라
공자는 논어 술이편에서 "말없이 생각하여 기억하고, 배움에 싫증 내지 않고, 남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하지 않는 것, (이것 말고) 나에게 또 무엇이 있으랴(默而識之 學而不厭 誨人不倦 何有於我哉)"라고 했는데, 여기서 '말없이 생각하여 기억한다'는 공부법을 하나 제시하고 있다. 공자의 이런 공부법은 현자들의 공부법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생각을 강조한 공부법과 맥락을 같이한다.
말없이 생각하라는 것은 차분히 생각해 현재 자신이 공부하는 것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체화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머리와 마음속에 단단히 각인된 지식이야말로 진짜 자신의 것이 된다. 싫증을 내지 않고 부지런히 배워서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식인의 진정한 역할이라고 공자는 확신했다.
오늘날은 지식의 해방 시대라 할 정도로 거의 모든 지식이 해방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식이 홍수처럼 넘친다. 문제는 쓸만한 지식을 가려내는 일이다. 쓸모 있는, 유익한, 지혜로 발전할 수 있는 지식을 찾아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그렇기에 '말없이 차분히 생각하여' '관련 지식에 대한 이해도를 심화시킴으로써' '확실하게 자신의 지식으로 만드는 공부를 하라'는 공자의 제안은 충분히 귀를 기울일 만한 가치가 있다.
일관되게 하나로 통합하라
모든 공부는 궁극적으로 통합을 지향한다. 자신의 전공과 죽는 날까지 해야 할 일에 대한 목표가 분명하다면 공부는 언젠가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 그리고 통합을 위한 그 과정에는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해야 하나의 이론과 자신의 견해나 주장이 나온다.
공자는 많이 배우고 많이 알 것과 공부와 생각을 결합할 것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배운 지식을 한데 융합해 통일함으로써 이론으로 승화시키고 실천을 위한 발판으로 삼아 행동의 지침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여러 차례 배우는 사람의 단편적 인식을 바로잡아 주면서 논어 위령공편에서 "나는 하나의 이치로 모든 것을 꿰뚫고자 한다(一以貫之)"고 했다. 그래서 제자들 앞에서 "내 길은 한가지로 일관되어 있다(吾道一以貫之)"고 자신 있게 말한 것이다(논어 이인편).
박학다식은 건축물에 비유하면 터를 닦는 것과 같다. 터를 넓게 닦아야 높은 건물을 올릴 수 있다. 하지만 터는 어디까지나 높은 건물을 올리기 위한 기초일 뿐이다. 궁극적 목적은 높은 집을 짓는 것이다. 학문도 비슷하다. 박학다식이라는 터에 자기만의 이론이나 주장이란 건물을 높이 올려야 공부가 완성된다. 그리고 쌓아올린 건물은 오로지 사람들의 편리함을 위해 기능해야 한다. 그 기능이 바로 공부에서는 일관성이자 통일이다.
하나를 알면 셋을 응용하라
공부와 독서의 유용성은 그 응용력에 있다. 무언가를 배워 알고도 실제에 적용하거나 응용하지 못한다면 그 지식은 쓸모없는 것이다. 하나의 지식을 습득한 다음 그 지식에 근거해서 서로 연관되거나 비슷한 더 많은 지식을 유추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공부나 독서의 주된 목적이다.
공자는 독서의 응용 문제와 관련해 논어 술이편에서 "배우려고 분발하지 않으면 깨우치지 못하며, 깨달은 이치를 표현하기를 애쓰지 않으면 입이 트이지 않으며, 한 귀퉁이를 들어 보여 나머지 세 귀퉁이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으면 반복하지 않는다(不憤不啓 不悱不發 擧一隅不以三隅反 則不復也)"라고 했다.
쉽게 말해 사각형의 한 모서리를 알려주면 나머지 세 모서리를 짐작하거나 문제 제기를 통해 유추해 사각형의 형태를 그릴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배우는 사람의 적극적인 자세가 전제 조건이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예기 학기편에서 이런저런 것을 알아 통달한다고 한 말이나, 하나를 알아 셋을 얻으라는 말 등도 다 같은 의미다.
이상 공자의 공부법을 열 가지 항목으로 분류해 비교적 상세히 살펴보았다. 공자의 공부법은 그 자체로 방대한 계통을 이루고 있고, 방법도 아주 다양하다. 위에 든 열 가지는 그중 대표적인 것일 뿐이다. 이 밖에도 오늘날 공부에 도움이 되거나 자극이 될 만한 것이 많다. 이를 간략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많이 듣고 많이 보라[多聞多見]. / 논어 위정편
○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말라[不恥下問]. / 논어 공야장편
○ 진실하게 물으면 그 물음에 성의껏 답해준다[叩其兩端]. / 논어 자한편(子罕篇)
○ 세 사람이 함께 가면 그중에 스승으로 삼을 만한 사람이 반드시 있다. 착한 이를 골라 본받고, 착하지 않은 이를 통해서는 나의 좋지 못한 면을 고친다[擇善而從]. / 논어 술이편
○ 많은 것에 귀를 기울이되 납득할 수 없는 것은 가만 두어라[多聞闕疑]. / 논어 위정편
○ 두루 배우되 뜻을 도타이 하라[博學篤志]. / 논어 자장편(子張篇)
○ 절실히 묻되 나 자신에 견주어 생각하라[切問近思]. / 논어 자장편
공자의 공부법이 제시하는 기본 정신은 독서와 공부 그리고 이를 삶에서 실천하는 삼자 통일이다. 아울러 공부하는 과정에서 지적 능력을 필요로 하는 요소와 그렇지 않은 요소의 통일, 찾아서 읽고 배워야 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통일도 함께 강조한다.
공자는 공부의 목적으로 '널리 배워 예로 요약'할 것과 '배워서 그것을 세상에 활용'할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 공부의 동기로 배움에 대한 의지를 보일 것, 공부하는 태도로 배움에 싫증 내지 않을 것, 공부하는 정취로 배움을 좋아하고 즐길 것, 공부에 대한 의지로 갈아도 닳지 않는 굳센 마음을 가질 것 등 공부 과정과 그 효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종합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교육자로서 공자는 누구를 가르칠 때 차별을 두지 않았다. 이를 유교무류(有敎無類)라 하는데, '가르침에 부류가 없다'는 뜻이다. 공자의 문하에는 다양한 계층의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공자는 그들에게 공부의 근본적 목적이 자신의 몸을 닦아 남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는 점을 특히 강조했다. 공부해서 타인과 세상을 위해 봉사하라는 정신은 오늘날에도 시들지 않는 시대적 의의와 문화적 경지를 갖추고 있다.
힘겹게 공부하는 것은 지식 추구의 수단일 뿐, 꼭 공명과 부귀를 위해서만은 아니다. 독서와 공부는 흥미가 있어야 하며, 지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더욱 다듬어진 사유와 깨달음을 요구한다. 지식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이를 통해 세상을 바꾸어나가는 실천 단계로 승화시키는 것이야말로 공부가 궁극적으로 지향해야 할 목표다. 공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목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유가에 맞선 묵자의 독서론
묵자(墨子, 기원전 약 468~기원전 376년)는 춘추시대에서 전국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이자 교육자로 공자의 유가(儒家)와 쌍벽을 이룬 묵가(墨家) 사상을 창시한 인물이다. 이름은 적(翟)이다. 선조는 송나라 사람으로 전하는데, 언젠가부터 노나라에 정착해 오랫동안 살았다(이름을 비롯해 출신과 국적 등에 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묵자는 비천한 출신으로 기술을 배워 장인이 되었다. 초기에는 유가 학술을 배웠으나 유가의 번잡한 ‘예(禮)’에 불만을 품고 새로운 자기주장으로 묵가학파를 창립해 당시 유가학파의 주요 반대파로 성장했다. 이로써 유가와 나란히 ‘현학(顯學)’으로 불리며 한 시대를 풍미했다(현학이란 표현은 한비자(韓非子)에서 나왔다).
묵자는 평생 '위로는 설득하고 아래로는 가르치는' 일을 했는데, 따르는 학생들을 데리고 노·송·초·제 등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했다. 그는 권력자를 설득해 노동자와 소생산자들의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개선하는 데 전력을 다했다. "주린 자는 먹게 하고, 추위에 떠는 자는 입게 하고, 지친 자는 쉬게 하고, 난을 피우는 자는 다스려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며 농민· 상인· 공인의 희망을 대변했다.
공부와 독서에 관해 묵자는 우선 지식을 문지(聞知)· 설지(說知)· 친지(親知)의 세 종류로 분류하고 "안다는 것은 들어서 아는 것, 유추해서 아는 것, 직접 경험해서 아는 것이 있는데, 이름과 실질이 합쳐져 이루어진다(묵자 경상편 經上篇)"고 했다. 독서를 통한 학습을 강조하면서 "지혜가 적은데도 배우지 않으면 이루는 것이 적을 수밖에 없다"고 했으며, 또 "지혜가 있어도 가르치지 않으면 이루는 것이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묵자 경설하편(經說下篇) 지식과 지혜 그리고 배움과 교육의 관계를 적절히 지적한 말이다.
묵자는 배움과 교육의 중요성은 물론 실천의 중요성을 동시에 강조했다. 그는 앉은 자리가 따뜻해질 겨를이 없었으며, 사는 집 굴뚝에 연기가 나는 날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사방을 돌아다니며 설교하고 경험하며 실천하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식인은 배웠다 하더라도 실천을 근본으로 삼아야 한다. 옛날 학자들은 좋은 말을 들으면 자신의 몸으로 실천했다. 지금 학자들은 좋은 말을 들으면 그걸로 남을 설득하는 데 힘을 쓰니 말은 지나치고 실천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 묵자 일문편(佚文篇)
공자의 공부법 중 '논술하되 견강부회하지 말라'는 '술이부작'에 반대하면서 '과거의 좋은 것은 논술하고 지금의 좋은 것은 창작할' 것을 제창했다. 묵자는 그 자신이 머리카락이 빠지고 발뒤꿈치가 닳도록 돌아다니며 천하를 이롭게 하는 데 힘을 쏟은 진정한 실천가였다. 그의 제자들 역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 속이라도 뛰어들고 칼날이라도 서슴지 않고 밟는 실천가였다.
묵자는 지식과 논리 같은 문제에 관해 탐구해 진리를 인식하는 세 가지 준칙을 제정하기도 했는데 이를 '삼표(三表)'라 한다. 묵자가 내세운 삼표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위로는 옛 성인의 일을 본으로 삼는다(有本之者). 둘째, 아래로는 백성의 눈과 귀가 어떤지 살핀다(有原之者). 셋째, 안으로는 나라와 백성의 이익을 꾀한다(有用之者).
묵자는 수신편(修身篇)에서 "의지가 강하지 못한 자는 무슨 일을 달성할 수 없다"고 하여 공부에서 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무조건 의지만 강해서는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는다며 공맹편(公孟篇)에서 "무릇 안다는 것은 그 능력이 이를 수 있는 정도를 헤아려 따라가야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아울러 지식 문제에 관해서는 실제 경험을 통해 얻는 지식이야말로 진정한 지식이라는 인식을 보인다. 그래서 묵자는 경상편에서 "안다는 것은 사물을 접하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실천가 묵자의 의식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묵자는 구세주를 자처하며 평생 미천한 사람들을 대변했다. 사람의 행위를 일일이 통제하는 번거로운 예의 규범을 앞세우는 유가에 맞서서 묵자는 근검절약과 실용을 중시하는 사상을 주장했다.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겸애설(兼愛說)도 차별적 사랑을 주장하는 유가와 날카롭게 맞선다.
정치와 윤리 중심의 공부를 강조하는 유가와 달리 묵자는 실생활에 유용한 기술 교육과 함께 대단히 진보적인 평등 교육을 내세웠다. 묵자의 이런 교육관은 유가에 대한 비판일 뿐 아니라 학벌을 중시하고 비실용적인 공부가 대부분인 오늘날 우리 교육 현실과 공부법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힌다. 묵자와 그 후학의 언행을 기록한 '묵자'는 현재 53편이 남아 있는데, 공부법을 비롯한 묵자 학설을 연구하는 기본 자료가 된다.
맹자(孟子) 공부법
맹자(孟子, 기원전 372~기원전 289년)는 전국시대의 사상가로 자는 자여(子輿), 이름은 가(軻)다. 추(鄒, 지금의 산동성 추현 동남) 출신이다. 선조는 노나라 귀족이었다. 공자의 손자인 자사(子思) 문하에서 공부했는데, 유가학파의 분류상 ‘사맹학파(思孟學派)’로 불리며 공문(孔門)의 적통을 대표한다.
그는 공자의 '인학(仁學)'에 중점을 두고 이를 더욱 발전시켜 '인정(仁政)'을 주장하면서, 상고시대 주나라의 토지제도 '정전(井田)'을 이상적 모델로 묘사하기도 했다. 무력을 통한 영토 개척을 강하게 비판하고 상대를 집어삼키는 전쟁을 반대했으며, 민을 괴롭히는 폭군과 탐관오리에 대해서는 엄격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렇게 해서 정치를 '민을 보호하는 자가 왕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맹자는 '민이 귀하고 군주는 가볍다'는 구호를 공개적으로 제기하며 군주와 민의 관계를 개선할 것을 호소했다. 성선설(性善說)에서 출발해 '인정'의 실행을 원동력으로 삼고 모든 것을 군자의 인심(仁心)에 의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이와 관련해 바른 지식인 양지(良知)와 바른 능력인 양능(良能)은 잘 지키고 조종하면 계속 보존할 수 있지만 버리면 바로 없어지므로 그것을 바로 기르는 양(養)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만년에 문인 만장(萬章), 공손추(公孫丑) 등과 함께 책을 써서 자신의 학설을 세우는 한편 교육에도 종사했다. 오경에 능통했으며, '시경'과 '서경(書經; 또는 尙書)에 특히 조예가 깊었다. 한서 예문지(藝文志)에 '맹자' 11편이 있다고 기록했으나 지금은 7편만 남아 있다.
맹자는 공자의 사상을 계승해 왕도정치에 의한 이상적 세계 건설을 주장하는 복고적 이상주의에 집착한 사상가였다. 훗날 유가가 독존의 자리를 차지하면서 공자 다음가는 성인이란 뜻에서 그를 아성(亞聖)으로 추앙했지만, 당시 정치판에서는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는 백성을 귀하게 여기는 민본사상을 주장해 사상의 질을 높였다. 공자와 함께 '공맹'으로 불리며, 성선설에 반하는 성악설(性惡說)을 주장한 순자와 나란히 거론되기도 한다.
맹자의 사상은 의외로 사나운 편이다. 어머니의 교육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고향 추현에 그의 무덤과 사당을 비롯해 어머니의 무덤인 맹모림과 맹모삼천지교(孟母三遷之敎)와 관련한 유지 등이 남아 있다. 맹자의 공부와 관련해서는 '맹모삼천지교'와 '단기지교(斷機之敎)'로 대변되는 그 어머니의 교육 방식이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다시 이야기할 것이다.
맹자의 공부법은 앞서 살펴본 공자의 공부법 못지않게 체계적이고 계통적이다. 먼저 독서와 관련해 맹자는 많은 책을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주관적이고 능동적인 작용을 중시해 맹자 진심하편(盡心下篇)에서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믿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했다.
공부는 자연스럽게 순서에 따라 차근차근 해나가야지 서두르거나 요령을 피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동시에 굳센 의지와 항상심을 가지고 꾸준히 한마음으로 해야지 용두사미식 공부는 절대 안 된다고 했다. 이런 맹자의 공부법을 몇 개 항목으로 나누어 살펴보자.
스스로 구하면 얻을 것이다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성경 말씀도 있듯이 맹자는 독서나 공부는 본인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는 진심상편(盡心上篇)에서 "구하면 얻고 놓으면 잃는다. 구하는 것이 얻는 데 유익한 것은, 구하는 것이 나에게 있기 때문이다(求則得之 舍則失之 是求有益於得也 求在我者也)"라고 말했다. 이 공부법을 간단하게 줄여 ‘자구자득(自求自得)’이라 할 수 있다.
맹자는 이와 관련해 고자하편(告子下篇)에서 또 이렇게 말한다. "무릇 도란 큰길과 같으니 어찌 알기 어려우리오! 사람이 그것을 구하지 않는 것이 병일 따름이오. 그대가 돌아가서 도를 구하기만 하면 스승이 될 사람은 많을 것이오(夫道 若大路然 豈難知哉 人病不求耳 子歸而求之 有餘師)."
맹자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루하편(離婁下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군자가 바른 도리로 깊이 탐구하는 것은 스스로 그것을 얻고자 함이다. 스스로 얻으면 삶이 편안해지고, 삶이 편안해지면 자질이 깊어지고, 자질이 깊어지면 좌우에서 취하여 그 근원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君子深造之以道 欲其自得之 自得之 則居之安 居之安 則資之深 資之深 則取之左右逢其原)."
이를 공부나 교육과 연관 지어보면, 스승이 학생을 보다 깊이 있는 공부로 이끄는 방법은 학생의 내적 동기를 유발해 스스로 얻게 하는 것이다. 즉 자신의 지적 욕구에 기대 적극적인 노력을 통해서 얻게 하는 것이다. 이를 다른 말로 '유도 계발법'이라고 할 수 있다.
꾸준히 한마음으로
맹자는 맹자 고자상편(告子上篇)에서 "학문의 길은 다른 것이 없다. 자기가 드러낸 마음을 찾는 것일 따름이다(學問之道 無他 求其放心而已矣)"라고 말했다. 이런저런 잡념과 딴마음으로 독서하는 태도를 맹자는 단호히 배격했다.
맹자는 천하에 바둑을 잘 두기로 이름난 혁추(奕秋)가 오로지 한마음으로 집중하는 사람과 사냥 따위에 마음이 팔려 있는 사람에게 바둑을 가르쳤을 때 어떤 결과가 나오겠느냐며 "마음을 오로지하고 뜻을 극진히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不專心致志 則不得也)"고 맹자 고자상편에서 강조한다.
공부에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총명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한마음으로 집중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머리가 아니라 자세의 문제라는 것이다.
맹자는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를 우물을 파는 일에 비유하며 진심상편에서 "뭔가 한다는 것은 비유컨대 우물을 파는 것과 같다. 우물을 아홉 길이나 파고도 물이 안 나온다고 우물을 버리는 것이다(有爲者辟若掘井 掘井九軔而不及泉)"라며 공부나 독서를 견지하지 못하면 끝내 헛공부가 된다고 지적했다.
독서나 공부는 축적이 핵심이다. 축적되지 않는 공부는 헛공부다. 쌓이는 과정 그 자체가 한 인간의 성숙도를 결정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가 한마음으로 꾸준히 공부하라고 한 것은 공부나 독서의 핵심과 그 효과를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다.
다 차거든 나아가라
인간이 성장 단계를 건너뛸 수 없듯 공부에도 단계가 있다. 지력과 관심의 정도에 따라 공부의 질과 양이 달라지지만 그 지력과 관심에는 단계가 있다. 쉽게 말해 성장 과정과 각자의 특성에 맞는 공부와 독서를 이끌어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는 진심하편에서 이렇게 말했다. "흐르는 물은 웅덩이를 채우지 않고서는 나아가지 못한다. 군자는 도에 뜻을 두어도 글을 이루지 못하면 다다를 수 없다(流水之爲物也 不盈科不行 君子之志於道也 不成章不達)." 물은 밤낮없이 흘러 웅덩이를 채워야만 다시 흘러 바다에까지 이를 수 있다. 맹자는 공부를 물에 비유해 점점 축적되는 지식, 순서에 따라 꾸준히 나아가는 공부법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
이 공부법은 앞에서 언급한 꾸준히 한마음으로 공부하라는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꾸준히 한마음'이 큰 테두리에서 공부의 태도와 자세를 말한 것이라면, 이 방법은 좀 더 구체적이다. 그런 자세를 견지하면서 순서를 밟아 단계적으로 공부하면 지식은 축적되고 지혜는 깊어져 보다 성숙한 사람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의미다.
거듭 생각하고 의심을 품어라
맹자는 오로지 마음이란 기관에 의지한 사유야말로 사물을 객관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보았다. 듣고 보고도 생각하지 않는 건 듣지 않고 보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우선 맹자 고자상편의 말을 들어보자. "귀와 눈은 생각을 할 줄 모르기 때문에 사물에 가려진다. 그래서 눈과 귀는 사물과 접촉하면 거기에 끌려갈 뿐이다. 마음은 생각할 줄 알기 때문에 생각하면 얻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게 된다(曰耳目之官 不思而蔽於物 物交物 則引之而已矣 之官則思 思則得之 不思則不得也)." 이 말은 인식이 감성 단계에 머물러 있지 않게 하라는 요구다. 반드시 사유를 거쳐 사물의 진실한 내면, 즉 본질을 파악해야 한다는 말이다.
맹자는 또 독서하면 의문이 생긴다고 주장하며 앞서 언급한 대로 "책에 나온 내용을 다 믿는 것은 책이 없는 것만 못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어떤 공부가 되었건 의문을 품을 줄 모르는 공부는 제대로 된 공부가 아니다. 독서나 공부의 출발점은 호기심과 관심이며, 그 호기심과 관심의 이면에 강한 의문이 함께 웅크리고 있어야 한다. 의문은 곧 모든 창조의 근원이다.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알라
맹자의 공부법에서는 작품, 특히 시를 해석하는 방법에 관한 언급이 눈에 띈다. 맹자 만장상편(萬章上篇)이다. "시를 말하는 사람이라면 글로 말을 해치지 않고, 말로 뜻을 해치지 않는다.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것이 시를 안다고 할 것이다(說詩者不以文害辭 不以辭害志 以意逆志 是爲得之)."
이 중에서 '자신의 뜻으로 작자의 뜻을 찾아 아는' 이의역지(以意逆志)라는 대목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논란이 적지 않았는데, 대체로 두 가지 해석이 유력하다. 하나는 청나라 때 학자들의 해석으로 '옛사람의 뜻으로 옛사람의 뜻을 찾는 것', 다시 말해 '시로 시를 논하는 것'이다. 작품 자체를 분석해 작가의 사상을 유추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한나라 이래 다수의 해석이다. 이 해석에 따르면 이의역지에서 의(意) 자를 독자의 사상· 지식· 경험 등으로 해석한다. 즉 작품을 읽는 사람의 뜻으로 작가의 뜻을 이해하거나 유추한다는 것이다.
맹자의 이의역지 공부법은 문학작품을 이해하는 데 유용하다. 우선 작가에 대한 상세한 정보와 다른 작품을 참조해 그것을 근거로 작품을 이해하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하나의 방법을 끌어낼 수 있다. 이와 달리 지금까지 자신이 쌓아온 지식이나 주관에 근거해 작품의 경향과 작가의 의도를 파악하는 방법도 가능하다. 어느 쪽이든 작품과 작가를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상당히 유용한 방법이다. 물론 이 두 가지 방법을 적절히 절충하면 더 효과적일 것이다.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라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한다는 지인논세(知人論世)는 그 방법과 의미를 확장하면 독서나 공부의 최고 경지에 이르게 된다. 맹자는 이를 우선 작가와 그 작품을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작품과 작가를 정확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인논세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맹자 만장하편(萬章下篇)에서 옛사람의 시를 외우고 글을 읽으면서 그 사람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옳은가? 그러므로 (그 다음으로는) 그 세상을 논하는 것이니, 이것이 옛날로 올라가서 옛사람을 벗하는 것이다(頌其詩 讀其書 不知其人可乎 是以論其世也 是尙友也)"고 했다.
진정으로 그 작품을 이해하려면 작가의 경력과 사상, 심지어 감정과 인격까지 파악해야 한다. 또 그 사람의 객관적 조건, 이를테면 그가 처한 시대적 환경 따위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좁게는 한 작가와 작품을 정확히 이해하는 방법이지만, 이 공부법이 확대되고 깊어지면 말 그대로 모든 부류의 사람과 세상을 알고 논하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치밀하게 공부하되 요약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공부는 지나온 과정을 종합하고 그것을 자기만의 생각과 견해로 요약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를 갖는다. 그것이 진짜 독서고, 제대로 된 공부다. 현자들이 한결같이 중시한 공부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중국의 유명한 현대 역사학자 전목(錢穆)은 '대담한 가설, 치밀한 고증'이라는 유명한 역사 공부법을 제안했는데, 여기서 대담한 가설이란 공부를 통해 이끌어낸 자기만의 견해나 이론을 말한다. 그 견해와 이론이 널리 인정받으려면 당연히 공부가 치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맹자는 이와 관련해 이루하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넓게 배우고 상세히 해설하는 것은 장차 되돌아가 요약하려는 것이다(博學而詳說之 將以反說約也)." 맹자가 말하는 '상세한 해설'은 읽고 공부한 것에 대한 정교하고 세밀한 연구를 통해 그 의미를 자세히 해석하는 것을 뜻한다.
책은 두껍게 읽어라(두텁게, 탄탄하게 공부하라는 뜻)라는 말과 뜻을 같이한다. 요약은 공부한 내용에 대한 간명한 개괄을 말한다. 공부는 먼저 넓고 치밀해야 하며, 그런 다음 이를 기초로 귀납하고 개괄해 명확하게 공부한 핵심을 파악해야 한다.
이상 살펴본 맹자의 공부법에서 발견할 수 있는 사실은 그 방법이 대단히 체계적이라는 것이다. 공부하는 자세와 태도부터 작품과 작가를 이해하는 방법, 나아가 그 모든 것을 종합해 자신의 주관으로 요약하는 단계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맹자의 공부법은 체계적일 뿐 아니라 단계적이기도 하다.
맹자는 '마음을 다한다'는 뜻의 진심상편에서 "부모 형제가 모두 아무 일 없이 살아 있는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하늘을 우러러보아도 땅을 굽어보아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천하의 재능 있는 인재를 얻어 교육하는 것이 세 번째 즐거움이다(父母俱存 兄弟無故 一樂也 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二樂也 得天下英才 而敎育之 三樂也)"라고 세 가지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이른바 군자삼락(君子三樂)이란 것이다. 인재를 교육하는 것을 낙으로 안 맹자이기에 공부에서도 대단히 적극성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맹자의 공부법이 추구하는 기본 정신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맹자 자신이 "구하는 데는 길이 있고, 얻는 데는 명이 있다(求之有道 得之有命/ 맹자 진심상편)"고 했듯이 공부에도 나름 규칙과 방법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규칙에 근거해 정확한 공부법을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또 하나는 자신이 공부하는 과정 자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그 방법을 알 수 있다." 즉 공부의 규칙을 확실하게 장악해 수시로 자신의 학습 행위를 그 규칙에 맞게 조정할 수 있다. 이것이 안 되면 평생을 공부해도 제대로 된 방법과 길을 모른 채 헤매다 평범한 독서인으로 남게 된다.
공부에 관한 맹자의 기본 정신은 대단히 엄격하다. 이는 맹자의 성격과도 관련이 있으며, 특히 그의 어머니가 지향한 교육법과도 관계가 있어 보인다. 맹자의 어머니는 누구나 알다시피 자식의 교육을 위해 세 번이나 이사를 했다. 이른바 ‘맹모삼천지교’는 지금도 자식 교육의 금과옥조처럼 추앙받고 있다.
맹모의 극성은 삼천지교에 머물지 않았다. 결단(決斷)이라는 단어가 있다. 뭔가 확고한 결정을 내리거나 결심을 굳힐 때 ‘결단을 내린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이 단어의 근원지를 추적해보면 공교롭게 또 한 번 맹모와 만나게 된다.
학업에 힘쓰던 맹자가 한번은 공부하다 말고 밖에 나가 논 적이 있다. 요즘식으로 말하면 수업을 빼먹고 땡땡이친 것이다. 청소년기에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는 지극히 정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행동이다. 그러나 맹자에게는 이 세상 누구보다 엄한 어머니가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맹모는 아들을 불러놓고 그 앞에서 한동안 열심히 짜놓은 베틀을 칼로 서슴없이 잘라버렸다.
맹자가 깜짝 놀라 이유를 묻자 맹모는 다음과 같은 말로 아들을 훈계했다. "베는 실 한 올 한 올이 연결되어야 한다. 학문도 마찬가지로 한 방울 한 방울 쌓여야 한다. 네가 공부하다 말고 나가 논 것은 잘려나간 이 베와 마찬가지로 쓸모없어진다는 것이니라." 이 일화에서 '베틀을 끊어 가르친다'는 단기지교(斷機之敎) 또는 단직교자(斷織敎子)라는 고사성어가 탄생했고, 여기서 '결단'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
맹모가 공부를 게을리하는 아들을 깨우치기 위해 짜던 베틀을 끊어버린 단기지교(斷機之敎)는 '삼천지교'와 함께 유명한 고사가 되었다. '삼천지교'나 '단기지교'나 모두 맹모의 극성맞은 교육열과 엄한 교육관을 잘 보여준다. 맹모의 삼천은 자식을 위한 교육 환경을 조성하는 차원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좋은 일화다. 단기지교 역시 공부를 게을리하는 자식에게 단호히 대응한 당찬 어머니의 모습을 끌어낼 수 있는 적절한 교육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 때문에 두 고사성어가 지금까지도 강력한 호소력과 설득력을 지닌 채 수시로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다.
인생의 참 지혜는 그 사람의 생활 속에서 나온다. 자신을 속이지 않고 남을 속이지 않고 살아온 인생, 그리고 자연의 섭리를 하루하루 보고 느끼며 철이 든 인성(人性)에 사악한 기운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엄격하고 극성맞은 어머니 밑에서 체계적으로 공부한 맹자. 그래서 그도 스승으로서 제자들을 엄하게 대했지만, 그가 시종 인간의 본성이 착하다고 확신한 까닭은 공부의 본질을 안 어머니의 믿음 위에서 성장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마천(司馬遷) 공부법
사마천(司馬遷, 기원전 145~약 기원전 90년)은 서한시대의 역사학자로 태사령이란 벼슬에 있던 사마담(司馬談)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마천이 살았던 시대는 한나라의 전성기이자 중국 역사상 몇 되지 않는 전성기인 무제 때였다.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고전을 공부했고, 스무 살 무렵에는 아버지의 권유로 견문을 넓히고 역사가로서 자질을 기르기 위해 전국을 답사했다. 그러다 서른여덟 살 때인 기원전 108년, 부친상을 당한 지 3년 만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관이 되어 정부의 각종 문서와 기록을 관리하며 역사서를 편찬하는 일에 종사했다.
사마천은 사관 집안으로서 자부심이 강한 아버지가 죽기 전 남긴 유언, 즉 역사서 완성을 필생의 사명으로 물려받았다. 또 아버지의 학문과 사상에서도 깊은 영향을 받았다. 사마담은 천문과 역학은 물론 도가(道家)까지 두루 섭렵한 뛰어난 학자였다. 태사령의 벼슬에 있던 사마담은 생전에 역사서 저술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아들 사마천에게 그 꿈을 물려주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권유로 스무 살 무렵 전국을 답사했고, 벼슬살이를 시작한 후로는 무제를 수행해 전국을 다녔다. 이런 현장 경험은 '사기'를 저술하는 데 막대한 도움이 되었다. 초나라의 애국 시인 굴원(屈原)이 자살한 멱라수(汨羅水)를 찾아 애도를 표했으며, 한신·소하 등 한나라를 세운 공신들의 고향을 찾아가 현지에 전해 내려오는 그들에 관한 일화를 모았다. 이런 자료는 '사기' 곳곳에서 내용을 더욱 실감나게 한다. 현지답사와 문헌기록을 변증법적으로 소화해낸 '사기'의 실증적 정신은 오늘날 역사가들이 본받아야 할 큰 장점이라 할 수 있다.
40대에 접어든 사마천은 조정의 일과 '사기' 저술이라는 두 가지 일을 열정적으로 해내며 정신없는 나날을 보냈다. 그는 친구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자신의 생활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대야를 머리에 인 채 하늘을 볼 수 없기에 빈객과의 사귐도 끊고 집안일도 돌보지 않고 밤낮없이 미미한 재능이나마 오로지 한마음으로 직무에 최선을 다해 천자의 눈에 들고자 했다."
하지만 가혹한 운명의 장난이 그런 사마천을 그냥 두지 않았다. 태사령에 임명된 지 10년째 되는 기원전 99년, 마흔일곱 살이 된 사마천은 인생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는 뜻밖의 사건을 맞이한다. 이른바 ‘이릉(李陵) 변호 사건’ 또는 ‘이릉의 화’라 부르는 사건이 그것이다.
훌륭한 인품의 소유자인 명장 이광(李廣)의 손자로 흉노 토벌에 빛나는 공을 세운 이릉이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흉노에 항복하자 불과 얼마 전까지 그의 승리에 환호하던 조정 대신들은 하루아침에 안면을 바꿔 일제히 이릉을 성토하고 나섰다. 패배를 책임질 희생양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답답한 무제는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풀어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밝히며 이릉을 변호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마천의 진심과 솔직한 변호가 역으로 무제의 불편한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사마천이 이릉을 변호하기 위해 언급한 작전상 실수가 궁극적으로 대장군 이광리(李廣利)를 지목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샀기 때문이다. 대장군 이광리는 다름 아닌 황제의 처남이었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을 옥에 가둔다. 사실 사마천은 이릉과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다만 이릉이 전쟁에서 승리할 때는 있는 칭찬 없는 칭찬 아끼지 않다가 흉노의 포로가 되자마자 무제와 실권자의 비위를 맞추려고 입을 모아 그를 비난하는 조정 대신들의 행태가 못마땅했는데 마침 황제의 하문도 있고 해서 이릉을 변호하며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꼬이기 시작했다. 이릉이 흉노에서 벼슬까지 받아 군대에 병법을 가르친다는 근거 없는 소문이 들려왔다. 이에 이성을 잃은 무제는 앞뒤 가리지 않고 이릉의 가족을 몰살한 다음 역적을 옹호했다는 죄목으로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황제의 화가 풀리면 별일 없이 풀려날 줄 알았던 사마천은 눈앞이 캄캄했다. 억울함이 북받쳤다. 일이 왜 이렇게 되고 말았는지 답답했다. 더욱이 아버지의 간곡한 유언이자 필생의 사업인 '사기' 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날벼락을 맞고 보니 어쩔 줄 몰랐다. 사마천은 고뇌했다.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죽음의 그림자가 사마천을 사정없이 휘감았다.
사마천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대로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나? 목숨을 부지할 방법은 없을까? 당시 한나라 법에 따르면 사형수가 죽음을 면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50만 전이라는 거금을 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성기를 절단하는 궁형(宮刑)을 자청하는 것이다.
사마천에게는 50만 전이 거금이었지만 돈 많은 사람에게는 별것 아니었다. 그러나 조정 대신 누구 하나 사마천을 변호하지 않는 상황에서 돈까지 내며 그를 구해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사마천은 황제의 심기를 건드린 괘씸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자가 아닌가. 사마천은 암담했다. 죽음을 면키 힘들어 보였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인 궁형을 자청하는 길밖에 없지 않은가. 하지만 궁형이 어떤 형벌인가. 남성의 상징인 성기를 절단하는, 말 그대로 죽음보다 더 치욕스러운 형벌이 아니던가. 많은 사람이 궁형을 당하느니 차라리 자결을 선택하지 않았던가. 사마천 역시 자결을 생각했다.
하지만 그에게는 할 일이 남아 있었다. 사마천은 말할 수 없는 치욕을 감수하며 궁형을 자청했다. 그때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듬해에 사마천은 사면을 받아 감옥에서 풀려났다.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사형보다 치욕적인 형벌을 자청한 것이다. 사마천은 친구 임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고백했다. "모진 치욕을 당하기로는 궁형보다 더한 것이 없소이다.··· 내가 화를 누르고 울분을 삼키며 옥에 갇힌 까닭은 차마 다하지 못한 말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서였소."
치욕스러운 형벌을 받은 사마천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은 궁형을 당해 쓸모없이 되었구나”라며 깊이 탄식했다. 그의 마음은 온통 울분으로 가득 찼다. 어디에도 마음을 둘 수 없었다. 미친 사람처럼 쏘다니기도 했다. 하지만 그 모든 치욕과 울분도 그에게 마지막 남은 일, '사기'의 완성이라는 대업을 막지는 못했다. 그가 궁형을 택한 것도 이를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는 곧 마음을 다잡고 남은 힘을 '사기'를 완성하는 데 쏟아부었다. 궁형은 치욕스러운 형벌이었지만 사마천의 선택은 위대했다.
사기는 그렇게 완성되었다. 하지만 사기의 완성이라는 표면적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사기의 내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그렇게 해서 사기는 사마천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혼이 되었다. 사마천은 사기 곳곳에서 세상의 부조리를 개탄하고, “믿음을 보여도 의심하고 충성을 다해도 비방한다”며 억울한 심경을 솔직히 표출했다.
부당한 억압을 딛고 통쾌하게 복수한 인물을 대거 편입시켰고, 역사의 흐름에 영향을 주거나 대세를 바꾼 사람이면 누구든 기록에 넣어 그 역할을 확실히 각인시켰다.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고 약자를 옹호했다. 사기는 영원히 보통 사람의 편이 되었고, 역사의 주역이 따로 없다는 참으로 소중한 역사의식을 사람들 마음 깊이 아로새겼다.
사마천은 기원전 90년 55세 전후로 세상을 떠난 것으로 보인다. 사인에 관해서는 아직 정설이 없다. 자연사와 병사설부터 자살설, 처형설, 행방불명설 등 여러 설이 제기되었다. 사마천의 고향인 섬서성 한성시(韓城市) 서촌(徐村)에 집성촌을 이뤄 살고 있는 그의 후손은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한 후 얼마 뒤 다시 황제의 심기를 건드리는 글 때문에 처형당했다고 믿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는 그의 피를 먹고 탄생했다. 주체할 수 없는 울분을 저술로 승화시킨 결과물이다. 어떤 이는 ‘분노의 붓에서 탄생한 위대한 기록 정신의 결정체’라고도 한다. 사기는 그 어떤 드라마보다 극적으로 탄생했고, 사마천의 삶은 그보다 더 극적이었다.
사기는 늘 사마천의 파란만장한 인생 드라마나 울분 그리고 깊은 원한과 결부되어 거론되어 왔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사기는 사마천 나름의 특별한 공부법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필생의 역작이기도 하다. 이제 사마천의 생애와 사기 저술 과정, 사기의 정신 등을 통해 사마천의 공부법을 이해해보도록 하자.
체계적 학습 단계
사마천의 공부는 그의 아버지 사마담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스무 살 때 천하 여행을 권유한 것도 아버지였고, 그전부터 아들을 지방 출장 등에 동행해 현장에 대한 감각을 익히게 하는 한편 지역 정보를 수집하는 방법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사기는 물론 사마천이 남긴 문장 어디에도 어머니에 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 것 역시 역으로 말해 아버지의 존재가 그만큼 컸다는 반증이다(물론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떴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사마천의 공부는 기록상 열 살 때부터 나타난다. 사마천은 사기의 맨 마지막 편인 태사공자서(太史公自序)라는 자전적 기록에서 자신의 어린 시절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언급했다. "천(사마천)은 용문에서 태어났다. 황하의 북쪽, 용문산의 남쪽에서 농사를 짓고 가축을 키우며 자랐다. 열 살 때 고문을 배웠다."
어린 시절 사마천은 고향에서 농사짓고 가축을 기르는 평화로운 생활을 하며 보냈다. 열 살 때 고문을 배웠다고 했지만 글은 아마 그전부터 배웠을 것이다. 지방지와 사마천의 고향인 섬서성 한성시에 남아 있는 유적 등에 따르면 사마담은 이곳에 서원을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고, 사마천도 4~5세 무렵에는 서원에서 글을 배웠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아들의 재능을 확인했고, 열 살 때부터 본격적으로 고문을 배워 역사학자로서 자질을 차근차근 쌓아가게 했다. 말하자면 뛰어난 자질을 타고난 아들을 위해 손수 체계적 학습 단계를 마련한 것이다. 아들의 재능을 확인한 아버지는 고문을 배우게 하는 한편 지방 출장에도 아들을 데려갔다. 열세 살 때는 황하와 위수 일대를 다니며 자료를 수집했다. 사마천의 현지답사 공부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역사 현장을 찾아서
열아홉 살 무렵 사마천 집은 시골 한성에서 수도 장안 근교 무릉(茂陵, 한 무제의 무덤을 축조하고 있던 신도시)으로 이사했다. 그 무렵 사마천은 당시 명망 높은 유협(游俠) 곽해(郭解)를 잠깐 만나게 된다.
사마천은 곽해를 보고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 행위가 꼭 정의에 부합하지 않아도 그 말에 믿음이 있고, 행동에는 결과가 있으며, 한번 약속한 일은 반드시 성의를 다해 실천하고,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남에게 닥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유협 곽해의 모습에서 젊은 사마천은 자신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협기(俠氣)를 느꼈다.
그렇게 사기 130권 중에서도 가장 강렬한 유협열전(遊俠烈傳)이 탄생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 현장을 답사한 경험과 자료를 모으고 이를 정리하는 실질적 공부 과정을 밟았기 때문에 19세에 유협 곽해를 만난 뒤 오늘날로 보자면 조직폭력배 두목들의 기록인 유협열전이라는 파격적인 열전을 구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는 유협열전을 쓴 동기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하고 빈곤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은 어진 사람의 자세다. 믿음을 잃지 않고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은 의로운 사람이 취하는 행동이다. 이에 제64 유협열전을 지었다."
사마천의 나이 스물에 아버지는 아들에게 천하 여행을 강력하게 권한다. 아들의 역사학자로서 자질을 확신한 아버지는 성년이 된 지금이야말로 역사의 현장을 구석구석 찾는 대여행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의도를 이해했고, 그 권유를 온 마음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서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공범이 탄생했다.
스무살 천하 여행은 사기의 현장감을 극대화하는 최고의 경험이자 현장 공부였다. 스무 살 약관 때부터 약 3년간 이어진 여행은 당시 한나라 제국의 전역을 포괄하는 30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남북한을 합친 면적이 약 20만 제곱킬로미터). 사마천은 이 여행에서 여러 차례 곤경에 처했다. 심지어 목숨을 위협받은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사마천은 포기하지 않았고, 역사에 유형·무형의 흔적을 남긴 수많은 사람의 족적을 일일이 확인했다. 그 결과 사기의 현장성과 사실성은 그 어떤 역사서보다 높아졌다. 이런 실증적 정신이 없었다면 어떻게 한나라를 건국한 고조 유방이 젊은 날 자주 찾은 술집 이름과 그 일화가 남을 수 있었겠는가. 사마천의 여행은 사기의 성공을 담보한 위대한 걸음걸음이었다.
사마천은 이때의 여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스무 살에는 남쪽으로 장강과 회하로 여행하며 회계산에 올라 우혈을 탐방한 다음 구의산을 살피고, 원강과 상강 두 강은 배를 타고 돌았다. 북으로 올라가 문수와 사수를 건너 제나라와 노나라의 수도에서 유가의 학술을 배우며 공자의 유풍을 살폈다. 추와 역 지방에서는 향사를 참관했다. 파·설·팽성에서는 곤욕을 치렀고, 양·초를 거쳐 돌아왔다."
사마천이 스무 살 성인이 될 때까지 아버지 사마담이 보여준 교육법은 자식의 역량과 재능을 가늠한 다음 이에 맞추어 정확한 방향으로 이끌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미를 갖는다. 여기에 스무 살 때 천하 유력을 적극 권유한 점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한 정말 기가 막힌 교육법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은 역사에 현장이 빠져선 안 된다는 것이 상식이지만 그 당시에 이런 인식을 갖고 실천으로 옮기게 한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마천의 여행을 기적이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욱이 현지답사 결과를 고스란히 반영해 사기를 인류 역사상 둘도 없는 생동감 넘치는 역사서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아버지 사마담의 역할은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라다. 물론 사마천의 적극적인 호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건 두말할 필요 없다.
당대의 스승을 찾아서
천하 유력에서 돌아온 사마천은 당대 유가학파의 양대 산맥 중 한 사람인 공안국(孔安國)에게 '상서' 등 고대 전적을 배우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공안국은 공자의 11대손으로 공자의 옛집에서 나온 고문 경전을 금문으로 번역하는 일을 맡는 등 당대 최고 학자로서 명성을 얻고 있었다.
사마천은 공안국 밑에서 상당 기간 고적을 심도 있게 배웠고, 28세를 전후해 예비 관료직에 해당하는 낭중으로 뽑혀서 입사했다. 사마천은 공안국뿐 아니라 유가 양대 산맥의 나머지 한 봉우리인 동중서에게도 학문을 배운 것으로 보인다. 특히 동중서의 전공 분야인 '춘추'는 사마천이 역사가로서 반드시 배워야 할 필수 과목이었기에 그 의미가 남달랐을 것이다.
20대에 접어든 사마천은 당대 최고 스승들을 찾아 자신의 공부에 깊이를 더하기 시작했다. 당대 최고 사상가에게 지식인으로서 반드시 배워야 할 유가 경전을 배우고 조언을 구한 사실은 대단히 의미심장하다.
동중서는 한 무제에게 절대 통치권을 담보할 수 있는 이데올로기를 제안해 다른 사상은 모두 배척하고 유가만 받드는 이른바 백가파출(百家擺黜) 유가독존(儒家獨尊)을 선언하게 한 장본인으로 당시 정치계와 사상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한 인물이었다. 또 공안국은 금문경학이 독주하던 당시 학계에 고문경학을 들고 나와 이른바 '고금(古今) 논쟁'의 단초를 제공한 인물로, 사상적인 면에서 동중서와는 또 다른 비중을 차지한 학자였다.
젊은 날 천하를 유력하며 역사 현장을 일일이 확인하고 돌아온 사마천은 다음 단계로 이런 대가들과 교류하며 학문과 사상의 균형점을 찾음으로써 역사가로서 균형 감각을 갖추어나갔다. 이런 점에서 두 대가와의 만남은 그가 역사가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뿐 아니라 역사 저술에 관통하는 사상적 맥락을 잡기 위한 대단히 귀중한 경험이자 공부라 할 수 있다.
공부의 범위를 넓히다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당시 사상적인 면에서 유가와 대립하고 있던 도가 계통의 황로학(黃老學)에도 정통한 학자였다. 그럼에도 사마담은 아들이 당대 최고 유학자에게 배우고 그들과 교류하는 것을 막지 않았다. 역사학자로서 사마천의 균형 감각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자질 중 하나인 것 같다.
낭중의 신분으로 입사한 사마천은 33세부터 황제인 무제를 수행해 지방 순시에 나섰다. 무제는 재위 54년간 30여 차례 지방 순시에 나섰는데, 기록상 사마천은 대여섯 차례 무제의 지방 순시를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이 수행을 통해 사마천은 민정을 살피고 지방 자료를 확보하는 한편 최고 통치자의 허실을 깊이 인식할 수 있었다. 특히 35세 되던 기원전 111년에는 직접 서남이 지방을 시찰하라는 명령을 받게 된다.
이에 대해 사마천은 태사공자서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조정의 명을 받고 서쪽으로는 파촉 이남 방면을, 남쪽으로는 공· 작· 곤명 등지를 공략하고 돌아와 복명하였다."
사마천은 서남이 지역에 대한 경략이 거의 마무리되어가던 시점에 파견되었다. 그때 사마천은 서남이 지역의 소수민족에 대한 폭넓은 정보를 수집할 수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훗날 서남이열전(西南夷列傳)을 남길 수 있었다.
이 열전의 상세한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당시 사마천이 서남이 지역에 대해 얼마나 많은 정보를 확보했는지 충분히 알 수 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 덕에 지방 자료 수집에 대해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실제로 경험한 사마천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로써 사마천은 역사에서 중앙과 지방 소수민족의 관계 및 그 역할에 대한 심도 있는 인식을 하나하나 체계적으로 갖추어나갈 수 있었다.
서남이 경략을 마치고 돌아오던 중 사마천은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는다. 사마담은 무제를 수행해 평생 단 한 번만이라도 주관해보고 싶던 천자의 제사 의식인 ‘봉선(封禪)’에서 배제되자 그 충격으로 쓰러졌다. 부랴부랴 낙양으로 와서 아버지를 찾았지만 회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시 상황을 사마천은 이렇게 쓰고 있다.
그해(기원전 110년, 사마천 36세)에 천자가 처음으로 한 황실의 봉선 의식을 거행했는데 주남에 머무르고 있던 태사공은 이 행사를 수행할 수 없게 되자 화병이 나서 그만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게 되었다. 당시 아들 천은 출장을 갔다 돌아오는 중이었는데 마침 황하와 낙수 사이에서 아버지를 볼 수 있었다. 태사공은 아들 천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당부했다.
아들을 역사학자로 키우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체계적 단계를 밟아 공부하도록 프로그램을 마련한 아버지, 하지만 그 단계에 만족하지 않고 역사 현장을 샅샅이 발로 확인하는 현장 탐방까지 권유한 아버지, 비록 자신의 사상 노선과는 다르지만 역사 저술에 반드시 필요한 유가 경전과 역사관을 이해할 수 있도록 당시 사상계의 동향 거목을 찾아가 진지하게 배움을 청하게 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가 쓰러진 것이다. 사마담은 자신의 뜻을 이어 역사서 저술을 반드시 이루어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사마천은 눈물을 흘리며 "소자가 비록 못났지만 아버지께서 정리하고 보존해온 중요한 기록을 빠짐없이 실어 역사서를 편찬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약속했다. 사마천은 아버지 대신 무제를 수행해 봉선 의식을 마쳤다. 그리고 3년 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되었다. 국가의 기록과 문서를 책임지는 막중한 자리였다.
얼마 뒤 사마천은 정확한 역사 기록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역법(曆法) 개정과 국가의 문물제도 개혁에 참여하는 등 국가 기록과 문물제도에 대한 전반적인 문서를 관리하는 실무에 매진한다. 이런 작업은 아버지와 그가 구상한 역사서 저술에 큰 도움을 주었다.
28세에 입사해 아버지의 죽음을 겪고 각종 제도 개혁에 참여하는 동안 사마천의 나이는 불혹인 마흔을 넘어섰다. 그 사이 친구도 만나지 못할 정도로 공무에 전념했지만 마음은 늘 아버지와 자신이 평생을 준비해온 역사서 저술에 있었다. 공무에 쫓겼지만 사마천은 틈나는 대로 정부 기록과 저술에 필요한 각종 자료를 섭렵했다.
무제의 지방 순시에도 계속 동행해 지방사에 대한 자료 확보는 물론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이제 붓을 들 일만 남았다. 역법 개정을 마무리한 사마천은 저술에 앞서 "내 어찌 이 일을 마다하겠는가"라는 말로 사기 저술을 위한 출사표를 던졌다.
뜻밖의 고난, 공부의 방향을 틀다
마흔 살을 넘기면서 사마천은 사기 저술에 박차를 가했다. 평소 “배우길 좋아하고 깊이 생각하면 마음으로 그 뜻을 알게 된다(好學深思 心知其意)”는 공부 자세로 아버지와 자신이 구상해놓은 방대한 3,000년 통사를 드디어 기술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동안에도 무제를 수행해 지방 순시에는 나섰지만 저술은 계속되었다.
그즈음 한나라는 안팎으로 곪기 시작했다. 내부적으로는 궁중의 권력 암투가 잇따라 터졌고, 대외적으로는 흉노와의 전쟁이 격화되었다. 장건이 비단길을 개척했지만 평화적인 문물 교류보다 정벌과 정복을 위한 길잡이 역할이 강했다. 문란해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각종 악법을 만들었지만 역효과만 냈을 뿐이다.
위태위태하던 상황에서 불행의 그림자가 얄궂게도 사마천을 덮쳤다. 그의 생애에서 살펴본 것처럼 ‘이릉 사건’으로 옥에 갇히고 사형을 선고받은 것이다. 그는 죽음보다 치욕스러운 궁형을 자청해 사형을 면하고 풀려났다. 그의 나이 47세에서 50세까지 일어난 일이다. 사기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그는 이를 완성하기 위해 궁형을 자청하는 독수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투옥에서 궁형 자청 그리고 출옥에 이르는 약 3년 동안 사마천의 신변에는 엄청난 변화가 찾아왔다. 무엇보다 그의 생각이 방향을 틀었다.
사기 저술을 시작한 시점부터 출옥까지 과정을 사마천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이리하여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했다. 7년 뒤 태사공은 이릉의 화를 당하여 감옥에 갇히자 이에 깊이 탄식하며 말했다.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이것이 내 죄란 말인가! 몸은 궁형을 당해 쓸모없이 되었구나.' 그리고 물러나와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무엇보다 그는 지금까지 모든 것을 다시 생각했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스러운 고뇌와 선택을 강요받았다. 수도 없이 자결을 생각했다. 하지만 사마천의 운명은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절체절명의 책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는 다시 일어났다. "천한 노복이나 하녀도 능히 자결할 수 있습니다. 하물며 저와 같은 사람이 왜 자결하지 못했겠습니까? 고통을 견디고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한 채 더러운 치욕을 마다하지 않은 까닭은 제 마음속에 다 드러내지 못한 그 무엇이 남아 있는데도 하잘것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후세에 제 문장이 드러나지 못할 것을 한스러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궁형을 자청하고 살아남았다. 하지만 사기는 방향을 틀었다. 3년에 걸친 죽음보다 고통스러운 고뇌의 과정을 고스란히 흡수해 사기는 지배자의 역사서에서 민중의 역사서로 거듭났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암흑 속에서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한 결과였다. 공부의 방향을 틀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심화되었다. 역사가의 처절한 고뇌가 고스란히 역사 서술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사기는 이렇게 역사적 사실의 기록을 넘어 철학적 경지로 승화되었다.
공부의 완성과 공부법의 완결
사기의 완성은 달리 말해 사마천 공부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사마천 공부법의 완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책을 통한 학문 탐구와 살아 숨 쉬는 역사 탐방을 결합한 그의 공부법은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며 깊은 사색으로 거듭 심화되고 승화되었다. 깊은 생각이 결합되어 공부 단계에서 화룡점정의 대미를 장식한 것이다.
사마천의 공부법을 사기 완성과 연계해 요약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단계를 거쳤다. ‘기초 공부 → 자료 수집 → 확인(고증·현지답사) → 심화 학습 → 비판 → 소화 → 흡수 → 종합 → 체계화 → 저술.’ 그리고 그 전 과정에 깊은 사색이 동반되었다.
성년이 되기까지 사마천의 초기 공부에는 아버지의 역할이 무엇보다 컸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로는 스스로 학문의 폭과 깊이를 확충해나갔다. 그리고 본격적인 저술 과정에서 수난을 당해 극적인 전환점을 맞이했지만 죽음의 신도 침범하지 못할 초인적 용기와 의지로 이를 극복하고 사기를 완성했다.
사기는 백과전서라고 불릴 정도로 종합적인 역사서다. 게다가 3,000년 통사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비롯해 각종 문물제도와 인간 군상의 활동상을 종합했더라도 이를 적절히 체계화하지 못하면 단순하고 무질서한 지식의 나열에 그치기 쉽다. 사기는 이 문제를 기전체(紀傳體)라는 탁월한 체제로 훌륭하게 극복했다.
그런 점에서 사마천의 체계화 공부는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홍수처럼 넘쳐나는 지식을 정리정돈하는 것은 물론 이를 나름의 원칙으로 체계화하지 못하면 경쟁에서 뒤처질 수밖에 없는 것이 오늘날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체계화해 마지막 저술 단계까지 나아간 사마천의 공부법은 그 어떤 공부법보다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다.
사마천은 역사가다. 사기는 역사 저술의 모범이다. 따라서 그의 공부법과 사기는 역사 공부와 역사서 저술의 모범이다. 무엇보다 사마천은 어려서부터 역사학의 기본인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과 통찰력을 기르는 훈련을 체계적으로 받았다. 이 점은 앞에서도 누누이 지적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하게 된 동기와 목적을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했다.
구천인지제(究天人之際) : 하늘(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한다.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횡적 연구(공간)를 가리킨다. 제(際)는 두 사물의 사이, 즉 공간을 말한다. 그 사이의 작용력에 대한 깊이 있는 사색과 통찰을 뜻한다.
통고금지변(通古今之變) : 과거와 현재의 변화를 통찰한다. 인간과 역사의 관계에 대한 깊이 있는 종적 고찰(시간)을 가리킨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과거와 현재의 상호작용을 고찰한다는 의미다. 통(通)과 변(變)이 시간을 나타낸다.
술왕사지래자(述往事知來者) : 지난 일을 기술하여 다가올 일을 알게 한다. 시공(時空)에 대한 위와 같은 인식을 바탕으로 현재의 입장에서 과거사를 서술해 다가올 미래를 알게 하는 역사서 저술로 이어진다.
성일가지언(成一家之言) : 일가의 문장을 이룬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을 종합한 문화적 사상 체계를 구축함으로써 자신의 역사관과 입장을 완성한다.
사마천의 역사서 저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원동력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당한 치욕스러운 궁형이다. 그는 이를 극복하고 사기를 완성했는데, 이를 발분저술(發憤著述) 정신이라 부른다. 고난에 직면했을 때 정당하게 울분을 표출하는 방법으로 자신의 경험과 생각을 기록으로 남기는 것은 훌륭한 공부법이 될 수 있다.
사회적 불평등과 차별에 대한 가장 소극적이면서 가장 적극적인 저항 방법이기도 하다. 글을 쓰는 행위는 당장은 누구에게도 영향을 줄 수 없다. 더욱이 자신을 핍박한 자에게는 어떤 위협도 되지 못한다. 하지만 이렇게 발분의 정신으로 완성한 글과 책은 그 어떤 무기보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그의 당대에는 물론 거의 영구적인 파워와 부가가치로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는 용기와 희망으로, 부당하게 권력을 휘두르는 자에게는 경고의 메시지로, 보통 사람에게는 삶의 좌표로 작용한다. 이것이 이른바 ‘문화 복수(復讎)’라는 것이다.
끝으로 언급할 것은 사기의 언어다. 정련된 언어의 소금과 같은 사기의 고사성어와 명언은 방대한 참고 자료와 현장 탐방이 조화를 이룬 결실이다. 생생한 고사와 표현은 언어의 묘미를 살리는 것은 물론 원전보다 훌륭하게 재탄생했다. 이런 표현 역시 사마천의 고뇌의 산물이다. 과거의 기록을 살리되 자신의 현장 경험과 고뇌를 결합해 재창조했다. 이런 점에서 과거의 문화유산으로서 서적이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갖는지 사마천의 사기가 역으로 입증하고 있다.
사기를 분노의 붓에서 탄생한 위대한 기록 정신의 표본이라고 한다. 사기가 서한 중기에 탄생한 것은 사마천 개인적 삶의 내력과 당시 역사적·문화적 배경이 긴밀하게 얽혀 있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통일 제국인 진나라가 10여 년 만에 무너지는 것을 경험한 사마천의 시대는 자신을 위해 과거사를 정리할 역사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누가 그 일을 짊어질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사마담은 그런 시대적 요구를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자각하고 있었고, 그 과업을 짊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아들 사마천에게서 확인했다. 이에 철저한 교육 단계를 마련해 사마천을 단련시켰다. 외아들 사마천을 끔찍이 아꼈으나 역사 저술로 고대 문화를 종합하고 이를 당대 통치의 이정표로 삼겠다는 염원과 이상을 아들의 어깨 위에 전이시키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살펴본 대로 사마천은 너무나 훌륭하게 그리고 너무나 가슴 아프게 이 책무를 완수했다.
최근 조성한 광장에서 바라본 사마천 사당과 무덤. 최근 조성한 광장에서 바라본 사마천 사당과 무덤. 사마천은 인간으로 태어나 공부하는 목적은 대체로 세 가지를 세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이를 삼립(三立)이라 하는데, 입신(立身)· 입언(立言)· 입덕(立德)이 그것이다.
이 셋은 별개이면서도 단계성을 띤다. 즉 입신으로 시작해 입언의 단계를 거쳐 입덕의 단계에 이르는 길은 공부의 심화 단계와 같다. 입덕은 공부의 최고 경지인 셈이다. 입신은 취업, 출세, 명예, 부귀, 권력 등 세속적 가치를 추구하는 공부 단계다. 입언은 자신의 사상이나 철학, 학문적 성과를 글(책)로 정리해 세상을 바른 쪽으로 이끌고자 하는 사회적 책임감을 동반하는 공부 단계다. 마지막 입덕은 공부의 최고 단계이자 최선의 경지로 이 단계에 오른 사람이라야 정치와 통치를 할 자격이 있다고 했다.
사마천은 입덕의 경지는 언감생심이라 생각하고 입언, 즉 사기의 완성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렇게 하는 것이 시대가 자신에게 부여한 책무이자 사명을 완수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기꺼이 그 책무를 받아들였고, 그 사명을 완수했다.
서양 음악사에 ‘베토벤 콤플렉스’라는 것이 있다. 당시 유명 작곡가들, 예를 들면 브람스와 바그너 등은 서로 베토벤의 음악을 자신이 계승했다고 주장했고, 이 논쟁은 100년 넘게 이어졌다. 중국 사학사에도 ‘사마천 콤플렉스’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사마천과 사기를 둘러싼 기나긴 논쟁이 있었다.
이 논쟁은 무려 2,000년 넘게 계속되었다. 제왕을 중심으로 한 2,000년 왕조 체제의 역사와 늘 함께해온 이 논쟁은 사마천이나 사기의 정신을 누가 계승했느냐가 아니라 사마천과 사기에 대한 비난과 이에 대한 수세적 방어가 대부분이었다. 봉건적 정통주의에 매몰된 유학자들에 의해 촉발된 사마천에 대한 비난은 왕조 체제가 붕괴되고 나서야 비로소 살기등등한 위세가 꺾였고, 지난날 이들이 무차별적으로 가한 비난은 오히려 사마천과 『사기』의 가치를 더 높여주는 양념 구실을 하고 있다.
사마천은 자신이 죽은 뒤 사기가 시비와 비난에 시달릴 것을 예상했다. 그래서 사기를 명산 깊이 보관했다가 훗날의 평가에 맡기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실제로 사기는 세상에 선보인 직후부터 숱한 오해와 몰지각한 비난에 시달렸다. 하지만 오해받은 만큼, 비난받은 만큼 사기의 가치는 역으로 입증되었다. 인간과 세상을 누구보다 정확하게 깊이 통찰한 그의 역사관은 지금 더 강렬한 빛을 발하고 있다.
제갈량(諸葛亮) 공부법
제갈량(諸葛亮, 181~234년)은 삼국시대 촉의 대신이자 걸출한 정치가로 자는 공명(孔明)이다. 낭야(琅邪) 양도(陽都, 지금의 산동성 기남(沂南) 남쪽) 사람으로 후세 사람들은 그의 자를 따서 흔히 ‘제갈공명’ 또는 ‘공명 선생’이라 불렀다. 동한 말 세상이 혼란에 빠지자 숙부 제갈현(諸葛玄)을 따라 형주로 와서 유표(劉表)에게 몸을 맡겼다.
제갈량은 남양(南陽) 융중(隆中, 지금의 호북성 양번 서쪽)에 은거하며 농사를 짓고 살았다. 당시 그는 스스로를 춘추시대 제나라 환공을 최초의 패자로 만든 대정치가 관중(管仲)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 악의(樂毅)에 비유했다.
건안 12년(207년) 유비(劉備)가 그의 명성을 듣고 삼고초려(三顧草廬) 끝에 그를 발탁했다. 제갈량은 동으로 손권과 연합하고 서로는 형주와 익주를 근거지로 삼아 남으로 이(夷)·월(越)과 화친하고 북쪽의 조조에게 대항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다 중원을 도모해야 한다는 이른바 융중대책(隆中對策)을 건의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천하삼분지계(天下三分之計)다. 이렇게 해서 이후 촉한 정권의 전체적 전략이 마련되었고, 제갈량은 유비의 유력한 참모가 되었다.
이듬해인 208년 조조가 남쪽 정벌에 나서자 제갈량은 강동의 주유·노숙과 힘을 합치기로 하고 몸소 동오로 가서 손권을 설득, 손권과 유비의 연합을 이끌어냄으로써 적벽대전(赤壁大戰)의 승리를 창출했다. 이후 유비가 형주의 네 군을 얻는 일을 돕고 군사중랑장(軍師中郞將)이 되어 출정했다. 후에 형주에서 군대를 이끌고 장강을 거슬러 촉으로 들어가서 성도를 공격하는 유비를 도와 유장 정권을 엎고 익주를 빼앗았다. 이후 군사장군(軍師將軍)으로 승진했다.
유비가 정벌에 나서면 제갈량은 성도를 지키며 후방을 튼튼히 하고 군량 보급선을 확보했다. 유비가 황제를 자칭하며 제갈량을 승상·녹상서사(錄尙書事)로 임명했다. 장무 3년(223년), 유비는 자신의 병이 가망 없다는 것을 알고 제갈량에게 아들 유선(劉禪)을 부탁하고 죽었다. 유선이 유비의 자리를 잇자 제갈량은 승상이 되어 정치를 보좌하는 한편 익주목을 다스리며 무향후(武鄕侯)에 봉해졌다. 유선은 어리석고 나약해 조정의 모든 일이 제갈량에 의해 결정되었다.
정치를 담당하는 동안 제갈량은 주로 형주에서 데려온 측근에 의지하는 동시에 원래 유장의 부하와 익주의 권문세족을 발탁하는 데 눈을 돌렸다. 출신은 보잘것없어도 재능이 있으면 큰 힘을 들여서라도 등용했다. “때를 맞추어 능력 있는 사람을 최대한 쓸 줄 알았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신불해(申不害)와 한비자의 법술을 믿어 법과 명령을 엄격하게 적용했으며 상과 벌이 분명했다. 누구든 법을 어기면 엄격하게 징벌했다. 참군(參軍) 마속(馬謖)을 무척 아꼈지만 군령을 어겨 위나라 군대에 패하자 눈물을 흘리며 그를 죽이고 사람을 잘못 기용한 죄를 물어 자신의 관직을 강등시켜달라고 자청한 일화는 유명하다. 읍참마속(泣斬馬謖)이란 고사가 여기서 나왔다.
익주의 권문세족은 유장 이래 오랫동안 멋대로 권력을 휘두르며 군신의 도를 무시해왔는데 제갈량은 그들의 불법 행위에 대해서도 가차 없이 엄단했다. 이런 조치 덕에 촉은 정치적으로 어느 정도 투명성과 통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제갈량은 서남쪽의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강경책과 온건책을 병행했다. 건흥 3년(225년) 남중(지금의 운남성과 귀주성 지역)에서 권문세족의 반란이 일어나자 몸소 대군을 이끌고 불모지 깊숙이 들어가 토벌을 단행, 우두머리에게 타격을 가하는 동시에 그 지역의 세력가를 끌어들이는 데 주력했다. 그들 중 일부는 지방장관으로 기용했다. 이로써 이 지역의 통치는 기본적으로 안정을 얻었고, 촉에 필요한 물자와 병력을 제공하는 근거지가 되었다.
제갈량은 오나라와 연맹 관계를 유지하면서 여러 차례 북벌을 단행했다. 심혈을 기울여 조조의 위나라를 멸망시키고 한 황실을 부활시키려 했으나 현격한 역량 차이를 극복하지 못해 계속 실패했다. 건흥 12년(234년) 마지막 북벌 중 전방 오장원 전투에서 패하고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나니, 시호는 충무후(忠武侯)다. 후대 봉건 통치자들에게 있는 힘을 다해 충성하되 죽어도 유감을 남기지 않는 충신의 전형으로 평가받았다. 24편, 10만 자에 이르는 제갈량집(諸葛亮集)을 남겼다.
제갈량의 공부법을 살피기에 앞서 제갈량의 인품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고 넘어가자. 제갈량은 지금의 호북성 양번에 해당하는 남양 융중이란 곳에 은거해 농사를 지으며 살았는데, 은둔생활을 하면서도 천하 정세를 놓치지 않고 파악하고 있었다.
'삼고초려'하며 그를 찾은 유비에게 천하를 삼분하는 거시적 방략인 이른바 융중대책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도 차분하고 냉정하게 천하 정세를 분석하고 파악했기 때문이다. 그가 아들에게 강조한 '냉정하지 않으면 멀리 내다볼 수 없다'는 충고는 다름 아닌 그런 자신의 경험을 압축한 것이다.
게으름과 그로 인한 때늦음에 대한 경고, 자기 수양과 노력의 강조, 맑고 투명한 의지 그리고 끊임없는 자기 계발(공부), 나라를 위한 일편단심, 온몸이 부서지도록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 등 제갈량은 그의 삶 자체가 만세의 모범이었다.
중국인은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또 한 사람 주은래(周恩來) 전 수상이 죽자 ‘국궁진력(鞠躬盡力)’이란 네 글자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는데, 이것은 제갈량이 출정에 앞서 유선에게 바친 그 유명한 후출사표(後出師表)에 나오는 말이다. 제갈량은 이 글에서 “신은 죽을 때까지 있는 힘을 다할 것입니다”라며 비장한 결의를 나타냈다. 전·후 두 편의 출사표는 중국의 역대 문장 가운데서도 명문으로 꼽히는데, 제갈량의 인간됨을 이보다 잘 나타내는 글은 없다는 평이다.
책에 담긴 실질과 요점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깨쳐라
삼국지 촉서(蜀書)에서는 제갈량을 두고 “정치가 무엇인지 아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관중과 소하에 견줄 만하다··· 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면서도 아끼는 인물이었다”라고 평했다.
제갈량의 이런 인품은 그의 공부법과도 관련이 있어 보인다. 제갈량은 공부를 치밀하게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공부법도 단순했다. 관련된 일화를 중심으로 제갈량 공부법의 특징을 알아보자.
먼저 위략(魏略)을 보면 제갈량이 형주에서 공부하던 때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의 공부법과 성격에 관한 단서를 제공한다. "제갈량이 형주에 있을 때 석광원(石廣元), 서원직(徐元直), 맹공위(孟公威)와 함께 공부했다. 세 사람은 열심히 책을 정독하고 숙독하는데 제갈량은 그 대략만 보았다. 매일 아침저녁으로 조용히 무릎을 끌어안은 채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고는 세 사람에게 “세 분은 벼슬에 나가면 자사나 군수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소”라고 말했다. 세 사람이 그 까닭을 물었으나 제갈량은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았다." 훗날 제갈량은 촉한의 승상이 되었고, 석광원 등 세 사람은 제갈량의 예상대로 군수 정도의 중급 관리가 되었다.
제갈량의 공부법은 그 대략만 보는 것이다. 이를 관기대략(觀其大略)이라고 하는데, 제갈량에게 늘 따라다니는 수식어가 되었다. 오늘날 관점으로 보면 제갈량의 이런 공부법은 과학적 독서법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책에 담긴 실질과 요점을 마음으로 이해하고 깨치는 독서법이다. 또 ‘대략’이란 단어에는 전략적 통솔과 같은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이 대목에 대한 옛날 주석을 보면 “대략이란 그 대강만 파악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나의 문장이건 한 권의 책이건 모두 그 나름 가장 중요한 핵심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그것을 움켜쥔 다음 파고들면 전체의 주된 요점과 정신을 파악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천박하지 않은 깊이 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고, 나아가 시간과 힘을 덜 들이고 핵심을 관통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제갈량의 이런 공부법은 그가 젊은 날 수경(水鏡) 선생 사마휘(司馬徽) 문하에서 공부할 때 일화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사마휘는 엄격한 규율과 수업 방식으로 유명했는데, 3년 동안 수업을 받고 마지막 졸업시험을 통과해야 자격증을 주는 교육 방식이었다. 그런데 이 졸업시험이 여간 까다롭지 않아 학생들이 하나같이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였다. 커닝도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문제는 스승 사마휘가 직접 냈다.
3년간 수업을 마친 제갈량은 졸업시험 문제를 받아들고는 기가 막혔다. 어떤 문제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수경산장에 남아 있는 관련 비석의 내용을 보면 화가 난 제갈량이 시험장을 박차고 나갔다고 한다. 그러고는 책밖에 모르는 선생이 이따위 문제를 냈다며 3년간 낸 수업료를 돌려달라고 항의했다고 한다. 아마 책에 나오는 자잘한 내용 따위를 기억해 쓰게 하는 문제였던 것 같다.
사마휘도 이런 제갈량의 반응에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그의 성품과 포부 그리고 공부하는 방식을 잘 아는 터라 그를 1등으로 뽑고 나중에는 유비에게 제갈량을 소개하기에 이른다. 제갈량은 평소 자신을 춘추시대 제나라의 명재상으로 주군인 환공을 최초의 패주로 만들고 제나라를 부국강병으로 이끈 관중과 전국시대 연나라의 명장 악의에 비유하길 좋아했다. 그만큼 포부가 컸다.
하지만 제갈량은 포부만 큰 사람이 아니었다. 재상을 향한 꿈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식으로 공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재상의 가슴은 배 한 척을 포용하고도 남아야 한다는 말이 있듯 제갈량은 자신의 큰 포부를 실현하기 위한 공부를 결코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 공부가 바로 관기대략으로 표현되었을 뿐이다.
관기대략은 주변 정세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탐색하고 대세의 흐름이나 변화를 간파하는 식견을 기르는 공부법이다. 꿈과 포부가 큰 이라면 제갈량의 이런 공부법이 대단히 유용할 것이다.
배움이란 차분해야 뜻을 지극히 할 수 있다
제갈량은 자식 교육에도 상당히 정성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그가 남긴 계자서(戒子書; 또는 교자서敎子書)는 자식 교육과 관련해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제갈량의 공부법과 관련해 참고가 될 만한 문장이므로 아래에 소개한다.
무릇 사내(군자)의 행동은 차분함(냉정)으로 자신을 수양하고 근검절약으로 덕을 기르는 것이다. 맑고 투명하지 않으면 뜻을 바로 세울 수 없으며, 냉정하지 않으면 멀리 내다볼 수 없다. 모름지기 배움이란 차분해야 뜻을 지극히 할 수 있다. 타고난 것이 아니라면 노력해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노력해 배우지 않으면 재능을 넓힐 수 없고, 뜻을 세우지 않으면 배운 바를 성취할 수 없다. 게을러서는 분발해 정진할 수 없고, 사납고 급해서는 좋은 품성을 가질 수 없다. 나이는 세월과 함께 흘러가고 세운 의지도 시간과 함께 사라져 끝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허름한 초가집만 처량하게 지킨다면 그때 가서 후회해도 늦으리라!
한유(韓愈) 공부법
한유(韓愈, 768~824년)는 중국 당나라 때의 정치가이자 사상가다. 동시에 시인과 문장가로도 이름을 떨쳤다. 자는 퇴지(退之)다. 하내군(河內郡) 남양(지금의 하남성 수무현(修武縣)) 출신으로 선대가 창려(昌黎, 요녕성 금주(錦州))에 살았으므로 세상 사람들은 흔히 그를 한창려(韓昌黎)라고 불렀다.
세 살 때 고아가 되어 형수인 정(鄭) 부인 밑에서 컸다. 31세 때인 798년 진사과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섰다. 36세 때 감찰어사가 되어 경조윤 이실(李實)의 폭정을 공격하다 도리어 양산현(陽山縣, 지금의 광동성)의 현령으로 좌천되었다. 817년 50세 때 지방 군벌인 오원제(吳元濟)를 토벌해 그 공적으로 형부시랑(刑部侍郞)이 되었다.
819년 헌종(憲宗)이 불골(佛骨)을 궁중으로 맞아들이려 했을 때, 반불주의자인 그는 '불골을 논하는 표(表)'를 올려 막으려 했다. 그것이 천자의 노여움을 사서 겨우 사형만은 모면한 채 조주자사(潮州刺史)로 좌천당했다. 이듬해에 헌종이 죽자 복권되어 국자감좨주(國子監祭酒)로 소환되고 점차 세력을 넓혀 관리의 임면을 관장하는 이부시랑(吏部侍郞)에까지 올랐다. 그는 57세에 병으로 죽었다.
한유의 사상적 특색은 불교를 반대한 것이다. 불교 승려의 특권에 반대하고 봉건적 일상 윤리와 사회질서를 중시했다. 대표적 산문인 「원도(原道)」에서 그는 도가의 무정부적 원시생활의 동경이라든가, 불교의 출세간적 태도를 봉건사회의 군주·신민이나 부자의 신분과 사회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불교의 법통에 대항해 요· 순· 우· 탕· 문왕· 무왕· 주공·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유가의 도통론(道統論)을 내세우고 스스로 맹자의 계승자임을 자처하며 인의도덕을 바탕으로 유학 부흥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당시 중국 사상이 위진남북조에서 수·당에 이르는 700여 년 동안 노장과 불교의 세력 밑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후 당나라 말기부터 5대·북송·남송·원을 거쳐 명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800여 년에 걸친 이른바 ‘신유학’ 또는 ‘송명이학(宋明理學)’의 시대를 여는 선구적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문장가로서 한유의 최대 업적은 문체 개혁이다. 대구와 음조를 중시하는 화려한 변려체(騈儷體, 또는 변체문)를 배격하고 고문, 즉 한나라 이전의 자유스러운 산문체를 회복하자고 주장했다. 이 때문에 그는 훗날 ‘8대의 쇠퇴에서 문장을 일으킨’ 인물로 추앙받는 고문의 대가가 되었다. 8대란 동한· 조위· 위· 남송· 남제· 남양· 진· 수의 여덟 왕조를 가리킨다.
이는 공교롭게도 3~6세기 변체문의 전성시대이자 중국 문학의 암울한 시기와 맞아떨어진다. 한유는 변체문 이전, 즉 3세기 이전의 고문 체제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다. 즉 운율과 대구를 강조하지 않고 무엇이든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고문으로 복귀하자고 제안했다. 그 고문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산문이다.
한유를 필두로 한 고문부흥운동으로 변체문은 큰 타격을 입었다. 이후 변체문은 일부 사대부의 틀에 한정되어 황제의 조서 또는 대신들의 상소문에만 전문적으로 사용했다. 대다수 사대부는 점차 산문을 썼고 또 큰 성과를 거두었다.
한유는 고문부흥운동의 선구자로 문체 개혁을 주장했다. 그의 공부법도 그 과정에서 더욱 단련되었다. 유명한 산문으로 제십이랑문(祭十二郞文), 사설(師說), 장중승전후서(張中丞傳後序) 등이 있다.
제십이랑문은 평범하고 직설적인 문체로 조카를 잃은 침통함을 표현한 글이다. 이와 비슷한 작품으로 풍경에 대한 인상을 묘사한 유종원(柳宗元)의 영주팔기(永州八記)가 있다. 시문집으로는 그가 남긴 글을 문인 이한(李韓)이 편집해 엮은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이 있다.
한유는 조실부모하고 어렵게 공부했다. 하지만 고난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은 날이 없을 만큼 고학(苦學)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독서는 부지런히 끈질기게 해야 하고, 독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공부는 부지런함으로 정교해지고, 노는 것 때문에 망가진다. 행동은 생각에서 이루어지고, (생각 없이) 남 따라 하다가 망가진다(業精于勤 荒于嬉 行成于思 毁于隨/ 창려선생집 진학해 進學解)"는 공부를 권하는 역대 명언 중에서도 최고 명언으로 꼽힌다.
한유는 어린 시절 힘들게 공부한 경험을 회고하며 "입으로는 육예(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의 문장을 끝없이 중얼거리고, 손으로는 제자백가의 책을 쉴 새 없이 넘겼다··· 새벽까지 등잔불을 밝히고 늘 힘겹게 한 해 한 해를 보냈다"라고 말했다. 또 평소 먹고 자고 할 때도 책을 놓지 않을(황보식皇甫湜, 한문공묘지韓文公墓誌) 만큼 일심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부지런히 책을 읽는 것 외에 한유는 깊은 생각을 강조했다. 뭔가 새로운 것을 이야기하고 싶더라도 그것에 대한 인식이 한층 깊어진 후에야 진위를 인지하고 흑백을 가릴 수 있는 독창성을 얻게 된다고 했다. 또 독서는 반드시 폭넓게 하되 요약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고도 했다.
깊은 맛이 우러나는 의미심장한 옛 서적에 빠져 그 정수를 잘근잘근 꼼꼼히 씹어 참맛을 볼 수 있는 독서를 하라고 권했다. "능력 있는 사람이 되는 까닭은 뱃속에 시서가 들어 있기 때문이다. 시서는 부지런해야 가질 수 있지 부지런하지 않으면 텅 비게 된다." - 창려선생집 부독서성남(符讀書城南)
한유의 공부법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는데, 이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핵심을 낚아 올리는 독서법
한유의 공부법은 시종 부지런히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진학해'라는 글에서 그는 독서는 반드시 필기를 동반해야 한다며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이와 관련한 한유의 공부법을 ‘제요구현(提要鉤玄)’이라 하는데, 책의 요점을 파악하고 낚시하듯 그 핵심 정신을 낚아 올려야 한다는 뜻이다. 그 요점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먼저 어떤 책을 읽느냐에 따라 필기법도 달라야 한다. 사실을 기록한 역사책을 읽을 때는 요점을 필기해 요강을 파악해야 하고, 언론을 모아놓은 책을 읽을 때는 마치 낚시하듯 핵심을 낚아 올려 그 정신을 이해해야 한다. 요점을 기록할 때는 사건의 전후 맥락과 인과관계를 분명히 밝혀 이 사건과 다른 사건의 복잡하게 얽힌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핵심 정신을 낚아 올릴 때는 그 언론에 대해 깊이 있는 연구와 분석을 행해야 한다.
한유의 제요구현 공부법은 그 과정 자체가 기억력 증진에 도움이 되고 인식의 수준을 높이며 독립적 사고 능력을 길러준다. 한유는 또 공부와 생각, 실천의 관계에 대해 "독서는 많이 읽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생각은 분명하게 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한다. 만족하고 공부하지 않는 것을 걱정하고 배우고도 행동하지 않는 것을 걱정한다(증별원십팔협률 贈別元十八協律 8수 중 제5)"는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많이 읽어 무언가를 얻는 데 힘쓰되 배워서 유용한 곳에 쓰라는 의미다.
빠지되 빠지지 말라
한유의 공부법은 간단하지만 정확하고 오묘하다. 그는 독서에는 ‘빠지는 것’과 ‘빠지지 않는 것’이 다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자체로 모순인 것 같지만 한유 공부법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한유는 젊은 날 자신의 공부법을 회고하며 독서할 때는 푹 빠져야 깊이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빠지되 방향을 잃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빠지되 빠지지 말라’고 한 것이다. 흔히 독서나 공부의 초기 단계에 빠지는 것을 첫 번째 빠짐이라고 한다.
독서나 공부에서 무언가에 빠지지 않고는 깊이 있는 단계로 나아가기 어렵다. 빠지는 것 자체가 다음 단계 내지는 높은 차원으로 올라가는 원동력이 된다. 하지만 이렇게 빠지기만 한다면 공부의 방향을 잃기 쉽기 때문에 이를 방지하기 위한 두 번째 빠짐이 필요하다는 것이 한유의 생각이다.
한유는 이렇게 말한다. "인의(仁義)라는 길에서 행동하며 시서의 근원에서 노닐되 그 길을 헤매지 않으면 그 근원도 끊어지지 않는다. 나는 평생을 그렇게 할 따름이다."
이것이 오랜 세월 공부해 한유가 깨달은 경지다. 말하자면 흠뻑 빠지되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는 경지에 올라야 원리 원칙만 중시하는 고리타분한 교조주의의 질곡에서 벗어나 비로소 진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방법으로는 올바른 행동과 공부의 뿌리를 잊지 않는 자세가 필요하다. 한유가 바람직한 공부법으로 근면과 함께 독창성을 중시한 것도 그 때문이다.
주희(朱熹) 공부법
춘추전국시대 위대한 사상가의 성 뒤에는 대개 ‘자(子)’라는 글자가 붙었다. 한 시대를 이끈 것은 물론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친 스승에게 바치는 명예로운 접미사이기도 했다. 춘추시대 초기의 정치가이자 사상가 관자(管子)를 시작으로 안자· 공자· 노자를 거쳐 묵자· 맹자· 장자· 귀곡자· 순자· 한비자 등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제자백가(諸子百家)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사조는 중국 사상사를 통틀어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이후 유가가 독존의 지위를 차지하면서 사상계는 경색되기 시작했고, 송나라 때 주희(朱熹, 1130~1200년)가 나타나면서 철학을 넘어 종교적 단계로까지 심화되었다.
중국 사상사는 물론 고려 말 이후 한국 사상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친 주희는 흔히 주자(朱子)로 높여 부른다. 남송 시대의 이학가(理學家)로 자는 원회(元晦; 뒤에 중회仲晦로 고침), 호는 회암(晦庵) 또는 회옹(晦翁)·둔옹(遯翁)이다. 본적은 흡주 무원혐(지금의 강서성)이고, 검주 용계현에서 태어나 건주 숭안과 건양(모두 지금의 복건성)에서 성장했다. 고종 소흥 18년인 1148년 19세 때 진사과에 급제해 관계에 들어섰으나 일찌감치 벼슬을 버리고 저술과 강학에 전념했다.
효종 순희 연간(1174~1189년)에 여러 직책을 역임했으나 경원 2년인 1196년 반대파의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4년 뒤인 1200년에 71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그후 영종 가정 원년인 1208년에 ‘문(文)’이란 시호를 받아 주문공 또는 주자라는 존칭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정치적으로 주희는 당시 송 정부의 가장 큰 문제였던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북벌항금(北伐抗金)’을 주장했으나 그 뒤 수비를 주장하는 주수파로 돌아섰다. 지방관을 역임하며 여러 사회적 폐단을 시정하는 정치를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한탁주(韓侂胄)가 권력을 농단하며 조여우(趙汝愚) 등을 배척하고 도학을 금지하면서 주희도 탄핵당했다. 급기야 영종 경원 4년인 1198년에는 거짓 학문을 일삼는 역당 명단인 ‘위학역당적(僞學逆黨籍)’에 이름이 오르기까지 했다. 그리고 2년 뒤 주희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이동(李侗)을 스승으로 모시며 정호(程顥)·정이(精頤) 형제 등과 함께 의리(義理)의 학문을 전심으로 연구했다. 또 주돈이(朱敦頤)· 장재(張載)의 이론을 비롯해 불교·도교의 일부 학설까지 흡수했다. 효종 때에 이르러 그는 북송 이래 각 파의 이학(理學)을 집대성해 완전하고 계통적인 이학 체계를 세웠다.
주희의 이학은 철학의 의리와 윤리 도덕 학설을 포함한다. 그는 형이상학적이면서 정신적(유심적) 개념인 ‘이(理)’를 철학 체계의 기본 범주로 삼아 ‘이’와 ‘기(氣)’의 관계를 명확히 했다. 그는 이를 천지만물에 앞서 탄생한 것으로 본다. 다시 말해 기에 앞선 것이 이이며, 기는 이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만물에는 만 가지 이인 ‘만리(萬理)’가 있는데 만리의 총화가 ‘태극(太極)’이며, 태극은 곧 ‘천리(天理)’다. 그리고 이 천리에 대립하는 것이 ‘인욕(人欲)’이다. 따라서 성인의 가르침은 곧 사람들로 하여금 ‘천리에 따라 인욕을 없애게’ 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사회 모순을 완화하려 했는데, 결국 통치계급의 의중과도 일치하는 것이어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로 수용될 수밖에 없었다.
인성론에서 그는 인간의 천성은 본래 선하지만 각자 타고난 기에 따라 기질의 천성에 선하고 악한 차이와 현명하고 어리석인 구별이 나타난다고 했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주희는 ‘격물치지(格物致知)’, ‘정심성의(正心誠意)’, ‘거경(居敬)’ 같은 일련의 이론을 제기했다. 또 전통적 윤리 강상 학설을 이론화하고 통속화해 삼강오륜(三綱五倫)을 당시 사회의 최고 도덕 표준으로 올려놓고 강상 윤리는 마멸될 수 없는 영원히 존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사회 역사관에서는 하·상·주 3대의 정치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면서 ‘주공과 공자의 도’가 상존하길 원했다. 이는 복고적이고 보수적인 역사관이지만, 역시 통치계급에 의해 이학의 정통으로 인정받았으며 후대에 미친 영향력도 대단히 컸다. 더욱이 당시에는 불교가 널리 전파되고 농민 기의가 잇따르는 등 유가 사상과 왕조 체제가 심각한 도전에 직면해 있었기 때문에 기존 체제와 신분 질서를 옹호하는 그의 이론을 통치계급은 크게 환영했고 결국 지배층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확정되었다.
주희는 지식이 폭넓고 깊었으며 저술도 풍부해 철학 사상을 필두로 문학·역사·정치학·윤리학·자연과학 등 학문과 사회의 여러 방면에 두루 미치고 그 수준도 상당히 높았다. 주희의 문장을 모아놓은 방대한 주자문집(朱子文集)(회암문집 晦庵文集)이 대표적 저술로 꼽히며, 오경뿐 아니라 사서(四書; 논어, 맹자, 중용, 대학)를 유가의 핵심 경전으로 끌어올린 사서집주(四書集注)는 이후 유교의 기본 경전이라는 귄위까지 부여받기에 이른다.
주희는 생전에 정치적으로 높은 권력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는 강학에 따르는 학생이 많았고 수많은 저술로 영향력도 대단했다. 특히 중국 4대 서원 중 하나인 백록동서원을 중심으로 많은 인재를 길러내 북방에 대비되는 남방 민학학파(閩學學派) 형성의 주춧돌을 놓았다. 그가 죽은 뒤 그의 학설과 저작은 이종(理宗) 황제의 존중을 받았고, 이로써 주희의 학설은 이학의 정통이 되었다. 그와 함께 이학은 관방 철학이 되었고 주희 역시 역대 통치자들에게 ‘대현(大賢)’으로 존중받았으며, 그 학설은 후대에 거대하고 깊은 영향을 남겼다.
주희는 어린 시절 아버지를 따라 글자를 익히고 글을 읽었다. 그러면서 유가 경전을 공부했는데 여덟 살 때 효경(孝經)을 읽고는 그 책에 “이렇게 하지 못하면 사람이 아니다”라는 글귀를 써놓았다고 한다. 열 살 무렵부터는 매일 대학, 중용, 논어, 맹자 등을 끊임없이 읽으며 성인(聖人)이 되겠다는 뜻을 키웠다. 14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의 유언대로 호원중(胡原仲)·유치중(劉致中)·유언충(劉彦沖)을 스승으로 모시며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후 주희는 유가의 경전 외에 여러 학설과 기타 지식 영역을 두루 섭렵했는데, 불교학을 비롯해 병법서까지 보았다. 그는 모든 학문에 다 배울 것이 있다고 했다. 19세 때 진사과에 급제해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의 학문적 명성은 20대가 되기 전부터 알려졌지만 더욱 공부에 매진했다. 잠도 자지 않을 정도로 연구에 몰두했고, 천주에서 벼슬할 때는 이름난 스승을 두루 찾아다니며 논어와 맹자를 비롯해 주돈이·정호·정이·장재의 책을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그는 또 장서를 중시해 경사각(經史閣)이란 도서관을 세우고 사람들이 열람할 수 있게 했다.
주희는 평생을 개인 강학 활동에 종사하며 태주의 숭도관과 무이의 중우관 등의 교장을 역임했고, 무너진 백록동서원과 악록서원을 새로 세우거나 수복했다. 송대 이학의 집대성자로서 그는 한평생 독서에서 즐거움을 찾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학문의 길에 이치를 끝까지 따지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은 없다. 이치를 따지는 요령은 반드시 독서에서 시작된다. 독서법으로는 순서에 따라 치밀함에 이르는 것이 중요하다. 치밀함에 이르는 기본은 삼가 차분하게 뜻을 유지하는 데 있다. 성인의 책을 읽으려면 읽고 또 읽어야 하는데 매일매일 읽으면 성현의 말씀이 점점 의미 있게 느껴진다."
만년에 기력이 쇠퇴하고 병에 걸려서도 독서를 멈추지 않았으며 죽을 때까지 예서(禮書)를 저술했다. 그는 자신의 공부 경험을 종합해 다음과 같은 공부법을 제안했다. "무릇 독서란 책상을 정돈해 깨끗하고 단정하게 시작해야 한다. 서책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몸을 바르게 하여 책을 대하는 것이다. 글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꼼꼼히 들여다보며 분명하게 읽어야 한다. 한 자도 틀리지 않게,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한 자도 바꾸지 말고 소리 내어 읽고 억지로 외우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일찍이 독서에 ‘삼도(三到)’란 것이 있다고 했다. 이른바 마음이 가는 심도(心到)와 눈이 가는 안도(眼到)와 입이 가는 구도(口到)가 그것이다··· 이 삼도 중에서도 심도가 가장 중요하다. 마음이 갔는데 눈과 입이 어찌 가지 않겠는가?"
이는 독서와 공부법 그리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학습 지도법을 종합한 것으로 중국 독서사에 유익한 영향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 주희는 이런 방법으로 평생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또 배우고 깨달은 바를 책으로 남겼는데 저서가 그 자신의 키만큼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의 저술은 경전과 역사, 문집과 제자백가 등 모든 방면의 학문을 두루 섭렵해 그 학문의 방대함과 깊이 그리고 문화적 소양을 반영하고 있다.
이제 주희의 공부법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그는 지식을 얻기 위한 독서와 이치를 파고드는 독서 그리고 실천을 위한 독서를 공부의 기초로 삼아 그 나름의 독서법을 종합했는데, 그의 제자들은 이를 ‘주자의 독서법’ 등으로 불렀다.
주희의 공부법은 공자 이후 가장 체계적이고 단계적인 공부법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독서 이론과 독서 방법에 관한 한 가장 계통적이고 치밀하다. 그의 공부법은 널리 퍼져나가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에 중국의 독서 역사에 대단히 풍부하고 귀중한 정신적 유산으로 남아 있다.
순서에 따른 점진적
공부 주희는 공부와 독서는 일정한 순서에 따라 계통적·계획적으로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만약 두 권의 책이 있다면 한 권을 먼저 통독하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라고 했다. 같은 책도 편·장·절·문·구·맺음말 등으로 나뉘어 있으니 흩어지지 않게 순서대로 읽으라고 말한다.
한 장에 세 개의 구가 있으면 먼저 첫 구를 깨친 후 다음 구로 넘어가라. 그런 다음 장 전체를 다시 세밀하게 반복해 그 의미를 감상하라. 만약 해당 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면 선배들의 해설을 보고 다시 두 번 정도 더 읽어 다소 진전이 있어야 도움이 된 것이다. 요컨대 주희는 독서란 자신의 힘을 헤아려 행하되 좋은 기초 위에서 점진적으로 깊이 들어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숙독과 치밀한 생각
주희는 통독을 거듭해야 공부가 제대로 이루어지며, 공부와 생각을 결합해 철저히 이해하고 깨달아 단단히 기억하고 파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말을 다시 한번 들어보자. "무릇 독서란··· 글자 하나하나를 천천히 꼼꼼히 들여다보며 분명하게 읽어야 한다. 한 자도 틀리지 않게, 한 자도 빠뜨리지 않고, 한 자도 바꾸지 말고 소리 내어 읽고 억지로 외우려 해서는 안 된다. 여러 번 통독하면 자연스럽게 입에 붙어 오래도록 잊지 않게 된다. 옛사람들이 '천 번 독서하면 그 뜻이 절로 드러난다'고 한 것은 숙독하면 해설을 기다릴 것도 없이 그 뜻이 절로 환히 드러난다는 말이다." "만약 숙독한 데다 깊고 치밀하게 생각한다면 마음과 이치가 자연스럽게 하나가 되어 영원히 잊지 않게 된다."
치밀한 생각의 과정은 의심이 없는 상태에서 의심을 품는 단계이며, 또 의심을 품은 단계에서 의심을 푸는 과정이다. 이와 관련해 주희는 이렇게 말한다. "독서(공부)의 처음에는 의문이 생기는지 알지 못한다. 조금 지나면 점차 의문이 생긴다. 중간쯤 가면 곳곳에서 의문이 생긴다. 이런 과정을 한바탕 치르고 나면 모든 것이 한데 모여 하나로 관통하게 되고 모든 의심이 없어진다."
마음을 비우고 차분하게
주희의 공부법은 마음 수양과도 밀접한 관계에 있다. 그는 독서를 하려면 우선 마음을 비우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진지한 자세로 차분하게 책에 빠져서 주도면밀하게 생각하고 반복해 의미를 되씹고 여러 방법으로 검증해야 옳고 그름을 가리고 의문과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독서법이란 별다른 것이 아니다. 뜻을 단단히 하고 마음을 비운 다음 반복해서 상세히 음미하면 얻는 바가 있을 것이다."
직접 몸으로 체득하라
주희는 독서를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결합해 이해하고 추단하는 과정으로 보았다. 그는 "자신의 몸을 도리(道理), 즉 올바른 이치 속에 두면 점점 서로 친숙해져 곧 하나가 된다"고 했다. 동시에 공부는 자기 의견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공부와 체험을 겸해 자기 몸으로 체득하되 다른 사람들의 견해도 두루 살펴서 공통점을 확인하고 이를 합치는 것이 좋다고 했다. 자기와 다른 견해에 겁을 먹고 급히 서두르다간 오히려 더 더뎌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부지런히, 단단히, 힘 있게
독서는 부지런히 해야 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통된 인식이다. 주희는 이와 더불어 공부의 핵심을 단단히 움켜쥐고 상당한 힘을 기울여야 성공할 수 있다고 했다. "공부의 기간은 융통성을 가지고 길게 잡되 공부 과정은 팽팽해야 한다. 공부는 강단 있고 과감하게 결단해야지 유유자적해서는 안 된다."
주희는 독서 중 감정의 작용을 매우 중시해 정신적 분발과 긴장감을 요구했다.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신 상태를 마치 불을 끄듯, 병을 치료하듯 단단히 다잡으라고 강조하며 바다에서 노를 젓지 않으면 배가 침몰하는 것에 비유했다.
경건한 마음으로 뜻을 유지하라
주희는 공부와 독서는 모름지기 차분하게 하나에 집중한 심경과 흔들리지 않는 원대한 지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경건한 마음을 유지하라는 소위 거경(居敬)은 마음을 오로지 하나에 집중하라는 뜻이다. 여기에 게으름이나 안일함이 끼어들 여지는 없다. 심지어 주희는 일이 없을 때에도 이런 태도를 유지하라고 말한다. 그래야 일이 발생했을 때 그에 대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독서도 마찬가지로 경건하게 한마음으로 집중해야 한다. 동시에 공부는 뜻을 세우는 것이 먼저라고 했다. 뜻이란 마음이 가는 곳이자 공부의 목적이기 때문에 목적이 불투명하면 학문도 없다는 뜻이다. "뜻을 세우는 입지(立志)가 확고하지 않으면 어떻게 공부하겠는가?"
주희의 공부법을 보고 있으면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엄격한 틀에 짜인 커리큘럼이 떠오른다. 이것이 때로는 독서인을 질식케 한다. 하지만 진정으로 공부에 뜻을 둔 사람이라면 주희의 공부법은 아주 훌륭한 방법이자 가장 효과적인 과정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구도승의 수련 과정을 방불케 하는 주희의 공부법은 물질과 세속적 욕망의 노예가 된 현대인에게 던지는 구원의 손길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고염무(顧炎武) 공부법
명말청초 위기의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로 청나라 학풍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위기의 사상가’ 고염무(顧炎武, 1613~1682년)는 강소성 곤산(昆山) 출신이다. 자는 영인(寧人), 어릴 때 이름은 강(絳)이며 학자들은 정림(亭林) 선생이라고 불렀다.
젊어서는 당시 정치를 농단하던 환관과 권세가에 맞서 ‘복사운동(復社運動)’에 참여했고, 청의 군대가 남하하고 자신을 길러준 숙모 왕씨가 순국하자 곤산과 가정 일대에서 일어난 무장 항청 대열에 가담했다. 강소성이 청에 함락된 후 체포를 피하기 위해 고향을 떠나 망명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름을 장산용(蔣山俑)으로 바꾸고 열 번이나 남경에 있는 명 태조 주원장(周元璋)의 무덤을 참배함으로써 멸망한 명 왕조에 대한 절개를 나타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도망 생활 중에 민중에게 한발 더 다가설 수 있었다. 자신의 눈으로 직접 처절하게 고통받는 민중의 생활상을 목격했고, 이로써 왕조와 군주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심에서 벗어나 새로운 눈을 뜰 수 있었다.
이런 자각을 바탕으로 그는 마침내 당시 지식인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시대의 한계를 벗어나 ‘천하의 흥망은 백성 책임’이라는 진보적 사상을 갖기에 이르렀다.
만주족의 청 왕조는 정권이 안정되자 청에 저항하던 지식인에 대한 추적과 박해를 늦추었다. 세조 순치 14년인 1657년 45세의 고염무는 강남을 떠나 산동으로 북상하며 유랑 생활을 시작했다. 이 기간은 고염무의 일생에서 학술적 성취가 가장 볼만한 시기였다.
산동 노산(勞山)에 올라 노산이 유명해진 원인에 대한 그만의 독특한 견해를 제시했는데, 이는 자연 유람과 역사 고증 그리고 실지 조사를 한데 녹인 그의 학문하는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공부법은 고염무라는 학자이자 사상가를 특징짓는 지표가 되었다.
산동 역현(繹縣, 지금의 조장시)을 지나면서 이 지역의 농지가 황폐하고 백성의 생업이 시든 것을 보고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역사상 이 지역은 풍요롭기로 이름난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현지의 지방지 등 각종 기록을 조사해 그 원인을 찾기 시작했다.
그 결과 도자기 산업과 풍부한 철광을 바탕으로 한 야철업으로 부유한 생활을 누리던 이곳 백성이 도자기 산업과 야철업을 폐지시킨 정부의 조치 이후 변하지 않은 세금과 무리한 수리 공사 그리고 해마다 반복되는 흉년 등으로 땅을 버리고 도주함으로써 기름진 농지가 황폐해지고 백성은 생업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염무는 이렇게 책 속의 지식과 현장 조사를 결합한 공부를 통해 농업을 중시하고 상공업을 억압하는 전통적 봉건 경제사상으로는 생산을 증대시킬 수 없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농업만이 경제의 근본이 아니라 ‘공업도 상업도 모두 근본’이라는 논점을 제기하기에 이르렀다.
서른 살부터 고염무는 숱한 책을 읽고 그 내용과 요점을 일기 형식으로 남기는 습관을 길렀다. 그렇게 해서 30년 넘는 기록이 쌓였고, 고염무는 이를 다시 수정해 마침내 죽기 전에 완성을 보았다. 그가 이 책을 ‘날마다 쌓이는 지식의 기록’이란 뜻의 '일지록(日知錄)'이라 한 것은 사실상 그것이 그의 힘겨운 학문적 탐색과 그 여정을 입증하는 결과물이었기 때문이다.
일지록의 내용은 정치, 경제, 군사, 교육, 과학기술, 철학, 종교, 역사, 법률, 경학, 문학, 예술, 언어, 문자, 제도, 천문 지리 등 고금의 모든 학문 영역을 망라하고 있다. 일지록은 강희 9년인 1670년 회안에서 8권으로 처음 출간되었다.
그러나 67세 때 고염무는 과거 자신의 저서를 검토하다 학식이 넓지 못하고 견해 또한 깊지 않은 것은 물론 틀렸거나 빠뜨린 곳도 많다고 생각해 차근차근 증보해서 20여 권으로 늘렸다. 일지록에서 그는 정식으로 ‘천하의 흥망은 백성 책임’이라는 관점을 제기하며 ‘도탄에 빠진 세상을 구제하고 만세에 태평한 시대를 열겠다’는 웅대한 포부를 밝혔다.
일지록은 수필 형식의 작품으로 어떤 조목은 수십 자에 지나지 않지만 참고한 자료는 사실이고 분석은 진지하며 논단은 엄숙해 고염무의 근엄한 학풍과 문장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책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대단했다. 역대 학술 사상을 총망라한 청대의 '사고전서총목제요(四庫全書總目提要)'에서는 고염무의 '일지록'에 대해 “여러 학문을 두루 망라하고 여러 학자들의 주장을 한데 녹여 학문에 본원(本原)이 있고 넓으면서도 두루 관통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고염무는 근대 계몽사상가로 자리매김했다. 그의 일생과 학술 저작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애국주의와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사상적 경험이 관통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제기한 ‘천하의 흥망은 백성 책임’이라는 관점은 고대 애국주의 사상의 전통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획기적 의의가 있다.
그는 또 현실 세상에 적용할 수 있는 실용적 학문, 즉 경세치용의 학문으로 송나라 이래 고착화되고 보수화되고 화석화된 주자학의 공허한 관념을 비판함으로써 봉건시대에는 참으로 귀중한 사상적 해방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고염무는 '일지록' 외에도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와 '조역지(肇域志)', '정림시문집(亭林詩文集)' 등의 저술을 남겼고, 이는 명·청 교체기 중국 사회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다녀라
고염무는 위기의 시대를 살면서 끝내 지조를 버리지 않은 참된 지식인이자 큰 사상가였다. 그는 시대의 한계를 돌파한 개혁적 계몽사상가였으며, 세상과 백성을 위한 실용적 학문을 주장한 깨어 있는 학자였다. 말 그대로 큰 사상가였다.
그런 그의 가슴속에는 늘 참교육을 몸으로 실천한 부모와 숙부·숙모의 영혼이 살아 있었다. 특히 숙모는 그에게 문무 겸비와 근검절약을 가르쳤고, 사회적으로는 남을 돕는 봉사정신을 몸으로 실천해 보였으며, 국가적으로는 순국을 통해 애국과 지조의 정신을 교육했다.
고염무의 집안에는 대대로 책 향기가 넘쳐흘렀다. 장서만 6,000~7,000권이 넘었다. 이런 서향(書香)에 둘러싸여 자란 그는 어릴 때부터 책을 가까이할 수밖에 없었는데, 독서를 하는 데도 그만의 독특한 방법이 있었다. 그는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며 “나는 어려서부터 독서를 했는데 얻은 바가 있으면 바로 기록해두었다. 뭔가 맞지 않는 곳이 있으면 수시로 다시 고치곤 했다. 또 앞선 사람이 나보다 먼저 해놓았으면 바로 삭제했다”고 했다.
그는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책도 읽지 않는 담벼락 같은 선비를 멸시했다. 또 천하를 주유하며 실질적 공부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두 마리의 말과 두 마리의 노새에 책을 싣고 돌아 다녔으며, 책 수집도 좋아해서 기이한 책을 보면 기어이 손에 넣었다.
금석문을 특별히 좋아해 “어릴 때부터 옛사람들의 금석문을 구하려고 여기저기 찾아다녔는데··· 20년 동안 천하의 명산, 도시, 사묘, 가람 등 안 다닌 곳이 없었다··· 읽을 만한 것을 찾으면 바로 베꼈고, 앞선 사람들이 찾지 못한 것을 얻으면 좋아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염무가 말하는 공부는 세상에 유용한 것일 때 의미가 있었다. 또 깨달음이 없는 공부는 죽은 공부였다. 그가 왕조 체제에 강한 의문을 품고 역사의 원동력으로서 천하의 백성에 주목한 것도 책을 통한 공부와 세상을 경험하는 실질적 공부를 확실히 결합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그는 자신의 한계는 물론 시대의 한계도 돌파하는 획기적인 자각을 성취할 수 있었다.
독서만권(讀書萬卷) 행만리로(行萬里路), 이 여덟 자는 공부법과 관련해 역사상 가장 가슴에 와 닿는 명언으로 고염무가 남긴 말이다. ‘만 권의 책을 읽고, 만 리 길을 다녀라’라는 말은 책을 통한 지식과 여행을 통한 실제 경험을 병행할 때 진정한 독서인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책에 파묻혀 죽은 지식을 파는 지식인이 아니라 현실을 정확하게 인식해 남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실질적 공부의 단계에 오를 수 있는 지식인을 고염무는 갈망했다. 그리고 그 자신, 그런 지식인으로 거듭났다.
스스로 공부의 감독이 되어라
고염무의 공부법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철저한 독서 습관과 다양한 분야의 책을 두루 그리고 고루 섭취한 점이다. 그는 스스로 말하길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단 하루도 책을 손에서 놓아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중에서도 특별히 역사서를 집중적으로 읽었다.
사기를 비롯해 한서, 후한서, 삼국지 등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역사서는 거의 외울 때까지 몇 번이고 반복해 읽었다. 무엇보다 당시 현실 문제에 관심을 갖고 명 13조 실록과 공문서, 상소문 등 거의 모든 자료를 세심히 읽고 연구했다. 읽으면서 중요한 부분은 직접 필기해두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의 생애를 말할 때도 언급했지만 나라와 민생이라는 큰 문제에 관해서도 폭넓게 관련 자료를 참고해 그 근원을 탐구한 다음 자신의 생각과 견해를 제기했다. 그는 “하루 이 몸이 죽지 않았다는 것은 하루 듣지 않은 소식(정보)이 있다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자신이 처한 세상과 현실 문제에 강한 관심을 보였을 뿐 아니라 그 문제의 근본적 원인과 해결책까지도 제시했다.
고염무는 당시 지식인으로서는 파격적으로 과거제의 폐단에 관해 신랄한 비판을 가했는데, 과거제의 폐단이 기존의 공부하는 방법과 목적에 있다는 사실을 정확히 꼬집었다. 그는 공부와 그 방법에 관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무언가를 배운다고 하면서 하루 나아가지 못하면 하루 뒤처지는 것이다. 친구도 없이 혼자 공부만 파는 것은 고루할 뿐 아니라 성과를 내기도 어렵다. 한쪽에만 오래 치우쳐 있으면 거기에 물들어 깨닫지 못하게 된다··· 집 밖에 나가지 않고 책도 읽지 않는 사람은 벽창호 선비다."
고염무의 독서법 내지 공부법은 자유분방하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분야의 책을 읽고 천하를 주유하라는 그의 공부법 자체가 자유를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해 보인다. 하지만 고염무는 자신의 공부에 관한 한 대단히 엄격하고 체계적이었다.
먼저 그는 스스로 ‘공부의 감독’이 되었다(이를 자독독서自督讀書라 했다). 매일 읽어야 할 책의 권수를 스스로 규정했다. 다음으로 매일 다 읽은 후 읽은 책을 한 번 베껴 쓰도록 규정했다. 자치통감을 다 읽은 후 그것을 전부 베껴서 별도의 자치통감 한 부를 만들었을 정도다(참고로 자치통감은 전체 294권, 300만 자에 이르는 방대한 통사다). 참으로 지독한 공부법이 아닐 수 없다.
고염무의 공부는 이걸로 끝나지 않았다. 책 한 권을 읽을 때마다 찰기(札記)를 썼다. 찰기란 독서 일기 같은 것인데, 고염무는 이 찰기를 무려 30년 이상 쉬지 않고 썼다. 이것을 정리한 것이 앞에서도 언급한 '일지록'이다. 훗날 청나라 후기 지방 상군(湘軍)의 수령 호림익(胡林翼)은 군중에서 독서할 때 고염무의 이런 공부법을 그대로 따랐다고 한다.
고염무의 공부법은 자유로우면서 다양하되 엄격했다. 사상은 개방적이고 사유는 자유분방했지만 이를 위해 스스로 공부의 감독이 되어 수십 년을 한결같이 읽고 쓰고 생각했다. 중국 역사에서 가장 훌륭한 저술로 꼽히는 '일지록'이 탄생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고염무의 독서 편력은 너무나 생생하게 보여준다.
정섭(鄭燮) 공부법
예술과 현실을 접목해 사회의 부조리를 폭로한 청나라 때 화가이자 시인 정섭(鄭燮, 1693~1765년)의 자는 극유(克柔), 호는 판교(板橋)다. 사람들은 그의 호를 따서 흔히 정판교라 불렀다. 강소성 흥화 출신이다. 강희 연간에 수재, 옹정 연간에 거인을 거쳐 건륭 원년인 1736년에 진사가 되었다. 산동성 범현과 유현의 지현을 지냈다.
관직에 있는 동안 그는 평민을 동정하고 부호의 발호를 막는 등 선정을 베풀었다. 유현에 부임해 대기근이 들었을 때는 관부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그러나 건륭 18년인 1753년 고관의 심기를 건드려 결국 관직을 떠나게 되었다. 그가 떠나는 날 백성은 울음을 터뜨렸으며 죽은 사람에게나 세워주는 사당까지 만들었다. 이를 생사(生祠)라 한다.
정섭은 문학과 예술 등 여러 방면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그림에도 능했는데 대나무, 난초, 돌을 잘 그렸다. 서예에서는 예서에 해서를 섞은 독특한 서체를 창안했는데 이를 판교체라 불렀다. 시와 글과 그림 모두 잘했을 뿐 아니라 독특한 개성을 발휘해 세인에게 ‘삼절(三節)’이란 평을 들었다.
관직을 그만둔 후 정섭은 예술과 자유의 도시 양주에서 죽을 때까지 그림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는데, 서민과 어울리며 자유롭고 호방하게 살았다. 당시 양주 사람은 정섭처럼 권세를 뜬구름으로 여기며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고고하게 살아간 괴짜 예술가를 일컬어 ‘팔괴(八怪)’라 했는데, 정섭도 그중 한 명이었다. 흔히 양주팔괴(楊州八怪)라 부른다.
그의 시도 그의 삶처럼 자유롭고 개성이 넘쳤다. 문인에게 흔히 보이는 모범적이고 형식적인 경향을 배제하고 천진하고 낭만적인 멋을 추구했다. 또 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설적으로 진솔하게 표현하되 사회의 현실에 접근해 백성의 고통이나 탐욕스러운 관리의 폭정을 서슴없이 폭로했다. 그 중 대표작으로 꼽히는 도황행(逃荒行)이란 시를 소개한다.
열흘에 아이 하나 팔아치우고 닷새에 마누라 하나 팔아버렸다.
이제는 이 몸 하나 덩그러니 남아 아득히 멀고 먼 길 홀로 나섰네.
길은 꼬불꼬불 멀기만 한데 관산엔 승냥이, 호랑이 뒤섞여 있구나.
아! 초췌한 나의 살갗과 머리털, 허리와 팔뚝도 부러졌도다.
사람 보면 눈이 먼저 휘둥그레져 삼키려던 먹이 도리어 다시 토해낸다.
길가에 버려진 아기를 보면 가여워 솥에 담아 어깨에 둘러멘다.
제 자식은 모두 팔아버리고 남의 자식 도리어 키워주누나.
이제는 이 한 몸 편해졌건만 마음은 이내 슬퍼지노라.
아득한 남쪽 하늘 두고 온 내 고향 어드메인가.
수많은 사연 안고 말도 못하고 바람 앞에 홀로 서서 눈물 철철 쏟아낸다.
정판교는 예술과 공부와 백성을 함께 사랑했다. 대표적인 그림으로 '난죽도'와 '주석도' 등이 있고, 사회 현실을 폭로한 시로 '도황행'을 비롯해 사형악(死刑惡), 환가행(還家行), 고아행(孤兒行) 등이 있으며, 시문집으로는 정판교전집(鄭板橋全集)이 있다.
정판교는 따뜻하고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고통받는 백성과 어울려 살며 그들을 연민하고 사랑했다. “서재에 누워 듣는 대나무 잎 흔들리는 소리, 민간의 고통 소리처럼 들리는구나!” 그래서인지 그의 독서 습관 역시 그의 품성대로였다. 그는 당시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배워야 하는 경학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역사와 시 그리고 문집류와 소설을 주로 읽었다. 또 문을 걸어 잠근 채 두문불출하는 폐쇄적인 공부도 좋아하지 않았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어디서든 책을 읽었다. 배 안에서도 읽었고, 말 위에서도 읽었으며, 이불 속에서도 읽었다. 산속 바위에 앉아서 읽었고, 소나무 그늘에서도 읽었다. 심지어 폐허가 된 사당이나 무덤에서도 읽었다. 또 한번 책을 들면 모든 것을 잊고 완전히 몰입하는 무아지경에 빠지기 일쑤였다. 책 한 권을 수백 번 읽고 또 읽되 늘 소리 내어 읽었다. 옆에 사람이 있든 없든 가리지 않았고, 책을 읽느라 밥 먹을 때를 잊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는 독서와 공부는 치밀함(정독)과 적당함을 함께 갖춰야 한다고 주장하며 적당하면 거친 것도 치밀해지지만 적당하지 않으면 치밀한 것도 거칠어진다고 했다. 이런 무욕(無慾)의 독서법으로 그는 평생 청빈한 생활을 즐겼는데, 관직에서 물러날 때 책 상자 외에 아무것도 지닌 것이 없었다고 한다.
정판교는 세속을 초월한 개성과 부지런한 독서로 득도의 경지에 올랐다. 또 과거 급제 따위의 출세 지향적 공부를 경계했는데,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그는 “공부해 과거에 급제하고 과거에 급제해 관리가 되는 것은 작은 일이라네. 가장 중요한 것은 이치를 제대로 아는 좋은 사람이 되는 것이지”라고 썼다. 특히 자식 교육과 관련해 새장에 새를 가두어놓는 식의 교육에 단호히 반대했는데, 공부와 교육에 관한 그의 이런 지적은 지금 우리 교육의 병폐를 정확히 찌른다고 볼 수 있다.
새장에 넣어 새를 길러서는 안 된다고 해서 내가 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은 절대 아닐세. 다만 정리에 맞게 길러야 한다는 희망을 이야기했을 뿐이라네. 새를 기르려면 나무와 잎이 우거진 곳에 새집과 새의 나라가 있는 곳이라야지. 아침이 밝아 잠에서 깰 때 이부자리 안에서도 ‘운문’이나 ‘함지’ 같은 음악을 연주하는 듯한 새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옷을 입고 세수를 한 다음 차 한 잔을 앞에 두면 새들이 날갯짓을 하며 나는 모습을 보겠지. 이것과 새장에 가둔 새 한 마리의 즐거움이 어찌 비교가 되겠는가? 대저 인생의 가장 큰 즐거움은 천지를 꽃밭으로 삼고, 장강과 한수를 연못으로 삼아 만물이 제각기 타고난 천성대로 자유롭게 휘젓고 다니며 사는 것,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과 대야에 물고기를 기르고 새장에 새를 기르는 것을 비교할 때 마음의 넓고 좁음, 마음 씀씀이의 어질고 잔인함 중 어느 쪽을 택할까?
- 정섭이 동생에게 보낸 편지
이런 생각을 한 정판교인지라 자기만의 독서법과 공부법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제 정판교의 공부법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
정독이 기초다
정판교는 먼저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독’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독해야 다독도 의미가 있다는 말이다. 아무 생각 없이 많이만 읽는 것은 헛수고라고 지적한다. 정독이 기초가 되고 정독하는 독서법을 확립한 후 다독하면 그 내용이 정독을 통해 얻은 지식과 연계되어 새로운 지식으로 거듭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의 중심 과제를 둘러싸고 좀 더 깊이 들어갈 수 있다. 아울러 정독을 위해서는 경전류, 즉 고전류의 저작을 읽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독특한 식견을 가져라
독서에서 독립적 사고와 자기만의 견해는 공부의 단계와 차원을 반영한다. 현자들 공부법의 공통점에도 나타나듯 제대로 된 공부는 깊은 생각과 실천을 동반한다. 정판교도 이 점을 강조한다. 그는 “참으로 책 속에 책이 있고, 책 밖에 책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면서 마음을 맑게 비워 옛사람들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끌려가지 말라고 경고한다. 많은 책을 읽고 공부하고도 그 대의를 요약하지 못하고 자신의 주관을 확립하지 못하는 것은 호리병 속에 갇혀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그러면서 ‘특식(特識)’을 가지라고 말한다. 특식이란 말뜻 그대로 특별한 지식을 말하는데, 자기만의 독특한 견해나 식견을 가리킨다. 정판교가 말하는 특식은 단순한 주관적 억측이 아니다. 그가 말하는 특식은 지극한 ‘정리(情理)’, 다시 말해 인간과 만물의 본성을 통찰하는 이치다. 그러면서 그는 “어찌 뒤바뀌고 잘못된 논리에 미혹되어 옛사람의 진의를 잃을 것인가”라고 반문한다. 모든 독서와 공부는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임을 정판교는 일찍이 인식한 것이다.
암송과 기억
정판교는 독서는 모름지기 외워서 기억해야 하며 공을 들여 기억해야 한다고 했다. 얼핏 들으면 오늘날 교육에서 많은 비판을 받고 있는 암기식 공부법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암기식 공부가 무조건 나쁘거나 옳지 않은 것은 아니다. 생각 없이 무작정 외우는 암기식 공부는 옳지 않지만, 어떤 공부든 기본 지식과 기초 사실을 외우는 것은 다음 단계 공부를 위해 꼭 필요하다.
이것이 안 되면 다음 단계 공부로 도약하기 힘들다. 다만, 외우되 앞뒤 지식의 상호 연관성과 외우고자 하는 부분이 전체적 맥락에서 차지하는 위치와 의미를 생각하며 외우면 훨씬 효과적이다. 좋아하는 시나 노래 가사는 몇 번 따라 하지 않아도 저절로 외워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암기도 결국 자발성을 동반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정판교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책을 웅얼거리며 읽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탐구하고 연마하라
독서와 공부에 탄력이 붙으면 강한 지적 욕구가 발산되면서 스스로 탐구하고 생각하게 된다. 정판교도 같은 생각이었다. “미묘한 의미와 뜻을 탐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나아가게 되고, 연마하면 할수록 들어가게 된다”고 했다. 나아가게 된다는 것은 관련된 책이나 참고서를 찾아 나선다는 의미고, 들어가게 된다는 것은 공부가 깊어진다는 뜻이다. 그는 깊이 있는 이해를 추구하지 않는 거친 독서에 반대했다. 공부와 독서는 반드시 폭넓은 탐구와 깊이 있는 연마를 병행해야 한다고 보았다.
공독과 소독
정판교는 폭넓은 탐구와 깊이 있는 연마를 병행하는 방법으로 공독법(攻讀法)과 소독법(掃讀法)을 제안한다. “책을 제대로 잘 읽는 것을 공(攻)이라 하고 또 소(掃)라고도 한다. 공이란 겹겹이 에워싸인 울타리를 곧장 뚫고 나가는 것이고, 소란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공격적으로 많은 책을 읽으면서 연마하면 궁극적으로는 빗자루로 마당을 깨끗이 쓸듯 먼지나 티끌 하나 남지 않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의미다. 공부가 자기 수양의 단계로 접어들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배웠으면 물음이 있어야 한다
정판교는 모름지기 독서에는 물음이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배움이 있으면 물음이 있다는 뜻이다. 그래야 공부에 진전이 있다.
공부와 물음의 관계와 관련해 그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학문(學問)이란 두 글자는 반드시 떼어놓고 보아야 한다. ‘학’은 학이고, ‘문’은 문이다. 사람이 배우기만 하고 의문을 가지지 못하면 만 권의 책을 읽어도 그저 멍청이밖에 안 된다··· 책을 읽으면 잘 물어야 한다. 한 번 물어서 안 되면 두 번, 세 번이라도 물어야 한다. 한 사람에게 물어서 안 되면 수십 명에게 물어서 의문을 풀고 이치를 드러내야 한다."
중점이 있어야 한다
정판교는 가치가 없는 책은 읽지 말라고 말한다. 같은 책이라도 그 내용의 수준이 다를 수 있으니 대충 읽어도 되는 책은 대충 읽고 정독해야 하는 책은 정독하라고도 했다. 공부와 독서에 중점(重點)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는 목적을 가지라는 의미와도 통한다.
이 점과 관련해 그는 사마천의 사기를 예로 들어 이렇게 말했다. "사기 130편 중에 항우본기가 단연 으뜸이다. 항우본기 중에서도 거록 전투 장면, 홍문연(鴻門宴), 해하 전투가 최고다. 반복해서 읽다 보면 눈물이 난다. 만약 사기를 전부 읽고 다 기억한다면 어찌 둔한 자가 아니겠는가."
정판교는 공부와 독서의 목적이 그 행위의 방향 설정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한다. 백성을 편안하게 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공자의 생각에 동의하는 한편 자기 한 몸, 자기 집안을 위해 공부하는 것에는 반대했다. 그는 모름지기 공부와 독서란 백성과 나라에 보탬이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분명하게 주장했다.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 다음에는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등이 공부의 목적과 시종 함께한다는 것이다. 이는 백성을 제 몸처럼 아끼고 사랑한 그의 삶을 통해 충분히 확인할 수 있는 생각이다.
노신(魯迅) 공부법
중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노신(魯迅, 1881~1936년)의 출생지는 절강성 소흥이며, 본명은 주수인(周樹人)이다. 1902년 4월 일본으로 유학 가 의학을 공부했으나 중국과 중국인의 암울하고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고는 2년 뒤 의학을 포기하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1918년 5월 ‘노신’이란 필명으로 중국 현대문학사 최초의 백화문(白話文)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를 발표해 신문화운동의 주춧돌을 놓으며 중국 문학을 현대로 들어서게 했다. 1923년 첫 소설집 '눌함(吶喊)'을 출판했다.
1927년 허광평(許廣平)과 상해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1930년 중국 좌익작가연맹이 결성되었고 노신은 주요 발기인으로 동참했다. 결성 대회에서 노신은 ‘좌익작가연맹에 대한 의견’이란 유명한 연설을 발표했다. 1931년에는 채원배, 송경령, 양행불 등과 함께 중국민권보장동맹을 조직해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6년 10월 19일 상해에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1만 명 이상이 자발적으로 정중하고 장엄한 장례를 거행하는 한편 그의 관에는 ‘민족혼(民族魂)’이란 큰 깃발을 덮었다. 노신의 삶은 그가 발표한 주요 작품이 중국 문학사와 사상사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의미를 통해 짚어보는 것이 효과적이다. 그의 작품이 던진 충격과 남긴 영향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노신은 백화문 소설 창작의 선구자였다. 1918년 최초의 백화문 단편소설 '광인일기'가 세상에 나오자 문단은 발칵 뒤집혔다. 소설은 한 ‘미치광이’의 체험을 통해 장장 5,000년 동안 이어져온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의 역사를 폭로함으로써 반전통과 문화 반성이라는 강력한 목소리를 냈다. 물론 미치광이의 현실 속 원형은 노신 자신이었다. 과장되고 민감하고 괴상한 미치광이의 심리적 감수성은 작가 자신과 당시 사회 환경의 긴장 관계에 대한 반응이었다.
'광인일기'로 노신의 명성은 천하를 울릴 정도로 높아졌다. 그는 일약 중국 문단의 총아가 되었고, 이어 중국의 낡은 문화와 전통을 비판하고 암울한 현실을 폭로하는 백화소설을 마치 봇물 터지듯 토해내기 시작했다. 과거제의 해독과 그것에 마취당한 지식인을 묘사한 '공을기(孔乙己)', 중국 하층민의 마비된 정신 상태와 우매함 그리고 신해혁명과 하층 민중의 이탈을 심각하게 반영한 '약(藥)', 당시 농촌 경제의 암울한 현실과 함께 착취당하는 농민의 고통과 정신적 마비를 무겁고 처량한 심정으로 그려낸 '고향' 등을 잇따라 발표했다.
하지만 노신의 대표 작품은 1921년 말 완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중편소설 '아Q정전'이다. 그는 신해혁명이 실패한 역사적 교훈을 종합해 과거 중국 하층민의 우매함과 무지함을 폭로하는 한편, 아Q라는 생생하고 황당한 인물의 이미지를 문학적으로 빚어내는 데 성공함으로써 중국 국민의 열악한 근성을 끌어냈다. 이후 아Q라는 살아 움직이는 문학적 이미지는 중국인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어두운 그림자가 되었다.
사람들은 수시로 그 이미지에 자신을 비춰보거나 다른 사람을 학대하곤 했다. 이는 아Q의 몸에 기생하는 열악한 근성을 오늘날 중국인의 몸에서도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는 의미다. 이를테면 실제로는 실력이 없거나 못나서 패배해놓고는 이겼다고 강변하며 체념해버리는 ‘정신 승리법’ 같은 것이 그 전형적인 예다.
다음으로 노신은 중국 문학의 또 다른 형식인 잡문(雜文)의 역사를 열었다. 노신의 잡문은 그의 문학적 성취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잡문은 그의 비판적 사상과 분리할 수 없다. 일찍이 그는 잡문이란 “투창이자 비수로 독자와 함께 생존의 핏빛 길을 열 수 있는 무기다. 하지만 잡문은 사람들에게 유쾌함과 휴식을 줄 수도 있다”라고 했다.
그의 후기 창작은 대부분 잡문이었다. 열풍, 분(墳), 화개집(華盖集), 이이집(而已集) 등에는 양보가 없고 엄중하며 가혹한 그의 비판정신과 전투정신이 충만하다. 그의 날카로운 문풍(文風)은 중국의 문인과 그들의 사상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물론 노신의 사상에 한계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니체처럼 비판에는 뛰어났지만 건설적 대안은 부족했다. 이는 노신이란 한 인간의 한계이자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인식 수준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런 단점이 그의 위대한 업적을 덮을 수는 없다.
노신의 위대한 문학정신과 비판적 사상은 그의 독서 편력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이제 중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학가이자 사상가로 평가받는 노신의 독서와 공부법을 살펴보자.
노신은 평생 수많은 책을 읽었다. 정치 이론서와 문예 작품은 물론 자연과학, 사회학, 문물 고고, 미학과 심지어 불교학 관련 서적까지 두루 섭렵했다. 노신은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책을 읽고 그것을 기반으로 그만의 독특한 독서 방법론을 구축했는데 몇 가지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두루 많이 읽어라
이와 관련해 노신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책 보기를 좋아하는 청년은 자기 전공과목에만 매달리지 말고 다른 책도 읽어야 한다··· 물론 전공과목을 제대로 하고 난 여가에 각종 서적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전공과는 상관없어도 두루두루 읽어라. 예를 들어 이과라도 문학서를 읽고, 문학을 전공하더라도 과학서를 읽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다른 사람, 다른 일도 보다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와 함께 노신은 한 사람의 작품만 골라 보지 말고 여러 작가의 작품을 널리 구해서 그 장점을 취하라고 권한다. "꿀벌 같아야 한다. 많은 꽃에서 채집해야 달콤한 꿀을 만들 수 있는 것과 같다. 한 곳에서만 빨면 얻는 것에 한계가 있고 시들어버린다." 꿀도 원래 잡꿀이 진짜 꿀이고 맛도 있다는 말이 있듯 다양한 책을 많이 읽어 벌이 꿀을 모으듯 진정한 지식을 습득하라는 의미다.
방법론으로는 한가할 때 수시로 책을 펼쳐 들고 읽어 지식을 늘리고 시야를 넓힐 것을 제안한다. 동시에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과 반대되는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다면서 “이미 지난 책이라도, 자신의 의견과 반대되는 책도 잘 알고 있어야 한다”고 했다. 또 “이런 책은 몇 번 들추어보면 비교할 수 있다. 비교는 속임에 넘어가지 않는 좋은 처방전이나 같다”고 덧붙였다.
이렇게 언제든 편하게 들춰보는 독서법은 노신 자신이 1912년부터 1913년까지 2년에 걸쳐 직접 실천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1925년 이후 노신의 독서량은 더욱 많아졌다.
딱딱하게 읽어라
이 말은 억지로라도 끝까지 읽으란 뜻과 통한다. 독서에는 비교적 이해하기 어려운 필독서가 있다. 이런 책은 머리를 묻고 이해가 될 때까지 파는 수밖에 없다.
이와 관련해 노신은 이렇게 제안한다. "외국 책은 매일 손에서 놓지 않아야 한다. 단어와 문법이 달리더라도 억지로라도 공부해야 한다. 한 권의 책을 가져다 억지로라도 읽되, 단어를 번역하고 문법을 기억해야 한다. 다 읽어도 제대로 이해가 가진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잠시 내려놓고 다른 책을 읽어라. 몇 달 또는 반년 뒤에 다시 읽던 것을 보면 분명 처음보다는 한결 많은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일시적으로 알 수 없는 부분이 생기면 건너뛰고 읽되, 위의 문장과 연결해 나머지 문장을 끝까지 보면 이해가 갈 것이라고 말한다. 다시 노신의 말을 인용한다. "의문이 생긴다고 계속 그곳만 보면 아무리 오래 보고 있어도 이해가 안 될 것이다. 그럴 땐 건너뛰고 다시 앞으로 돌아가라. 그러면 앞부분도 분명해질 것이다."
노신은 시를 번역할 때 사전과 같은 공구서(工具書)가 필수라고 보았다. 그래서 외국어로 쓰인 공구서를 많이 갖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종류도 대단했다. 외국어나 외국어로 쓰인 책을 공부할 때 상당히 참고가 되는 공부법이라고 할 수 있다.
깊이 파고들어라
노신은 두루두루 읽은 후 이를 기반으로 선택하고 결정을 내려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로 들어서서 깊이 연구하라고 제안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배운 것이 잡다해질 것이라고 했다. 많이 읽긴 했지만 결국 하나도 성취한 것이 없다는 의미다. 노신이 저술한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을 비롯해 당송전기집(唐宋傳奇集) 등은 이렇게 깊이 파고든 전형적인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정보의 홍수 시대인 지금 노신의 이런 공부법은 더욱 필요하다. 쓸모 있는 정보를 가리고 이를 다시 거른 뒤 영감과 통찰력을 줄 수 있는 새로운 것으로 재가공해야 제대로 된 정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보가 돈이 되는 시대이긴 하지만 정보의 질이 문제고, 정보의 질은 방대한 정보를 얼마나 깊이 있게 다루었느냐가 판가름하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독서를 하라
노신은 독서에는 독립적 사고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를 훈련하기 위해선 주의 깊게 살피고 실천을 중시해야 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죽은 책을 읽으면 자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입만 열었다 하면 남까지 해치게 된다." "깊이 파고드는 독서에도 병폐가 있다. 따라서 사회와 접촉해 읽은 책을 살려야 한다." "자기 사색, 자기 관찰이 요구된다. 그저 책만 봐서는 책 상자로 변할 뿐이다. 설사 흥취를 느낀다 할지라도 그 흥취는 사실 이미 경색되기 시작해 결국은 죽은 것이 될 것이다."
아울러 노신은 세상을 유심히 살피라고 주장하면서 "자신의 눈으로 세상이라는 이 살아 있는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책을 참고하라
독서를 할 때는 책을 골라 읽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기 입맛에 맞는 책만 골라 읽어서는 안 된다. 독서의 기본은 그 넓이다. 노신은 책을 골라 읽되 작가의 전기나 전집 등을 함께 참고해야 그 작가가 처한 시대와 그 위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나아가 작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들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논문이라면 전체를 다 살피는 것이 가장 좋다. 아울러 글쓴이의 모든 것과 그가 처한 사회 상태를 돌아봐야 한다. 그래야만 비교적 정확하게 접근할 수 있다." "문예 작품을 본다면 먼저 유명한 작가들의 대표작을 보고 누구의 작품을 가장 좋아하는지 확인한 뒤 다시 그 작가의 전집을 본다. 그런 다음 문학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치를 살핀다. 보다 자세히 알고 싶다면 그 작가의 전기를 한두 권 보면 된다. 그러면 대략적인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노신은 평생 폭넓은 독서를 통해 '가져다 쓰기(인용 引用)', '내 것으로 만들기(점유 占有)', '고르기(도선 挑選)'를 잘했으며 이를 현실 생활에 적절히 조화시켰다. 훗날 심조노(沈祖勞) 등은 '인재가 되는 다리 - 노신의 독서 22법'에서 독서학, 과학, 최신 과학 지식 등을 운용해 이런 노신의 독서법을 계통적으로 소개하기도 했다. 이 책에 소개한 노신의 독서법 내지 공부법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보자.
이 책에서는 우선 노신이 배움과 실용을 결합해 새로운 정신을 이끌어낸 점을 강조한다. 구체적으로 학술상의 각종 장애 요소를 타파하고 앞 사람들의 오류를 바로잡아 사물에 내재된 규칙을 탐구하는 시대정신을 선도한 노신의 업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했는데, 크게 보아 다음 세 방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첫째 독서 방법과 관련한 노신의 논술, 둘째 중외 역대 유명한 학자와의 비교 및 이론상 장단점과 차이점 논술, 셋째 노신의 독서 편력과 그 성과이다. 이 책은 노신의 독서법을 ‘인재가 되는 다리’라는 말로 높이 평가하는 한편 조목을 나누어 구체적으로 분석하고 논술해 독자에게 유익한 정보와 영감을 제공한다.
끝으로 노신의 도서 추천에 관해 간략히 언급하고자 한다. 노신은 젊은이들을 위해 읽어야 할 책을 몇 차례 추천했는데, 다른 사람들의 추천서와는 상당히 달랐다. 이와 관련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학자들이 추천한 참고서 목록을 유심히 살펴본 결과 하나같이 성에 차지 않았다. 어떤 경우는 10년을 읽어도 다 읽지 못할 정도로 추천서가 너무 많았다. 자신도 읽지 않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 정도였다."
사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관공서에서 추천하는 책 목록을 보면 실소를 금할 수 없을 정도로 황당한 사례가 많다. 읽지도 않고 심지어 살펴보지도 않고 추천하기 때문에 빚어지는 해프닝이다. 노신의 지적이 따끔하다. 노신의 추천서 목록은 대개 문학을 전공하고자 하는 젊은이를 대상으로 한 것이라 굳이 소개할 필요는 없지만, 그가 어느 경우든 역사서를 중시한 점이 눈길을 끈다.
노신의 도서 추천 특징을 간략히 정리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째, 공부하고자 하는 당사자에게 맞추어 추천하고 각 책의 요지를 간명하게 적시했다. 둘째, 사회적 배경에 대한 연구에 중점을 두었다. 셋째, 현실과 역사의 결합을 중시하고, 정확한 사상적 방법을 장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노신의 이런 추천 원칙에는 다소 치우친 감이 없지 않다. 하지만 그의 독특한 시각은 지금 봐도 자기 계발에 적지 않은 도움을 줄 수 있을 정도로 참신하다.
모택동(毛澤東) 공부법
1949년 960만 제곱킬로미터(남북한 합친 크기의 약 45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대륙에 정말 기적과 같이 공산당 정권을 수립한 혁명가 모택동(毛澤東, 1893~1976년)은 호남성 상담(湘潭) 출신이다. 어릴 적 이름인 자는 윤지(潤之)다. 당숙 모종초(毛鍾楚)에게 아동기에 사마천의 역사서 '사기'를 배웠다. 열 살이 넘어서 진지하게 독서에 열중한 것은 물론 외국의 역사와 지리를 섭렵하기 시작했는데, '세계 영웅전'의 영향을 깊이 받았다.
1912년 장사 호남 제1중학교에 진학해서 반년에 걸쳐 빌린 통감집람(通鑑輯覽)을 통독하고 역사에 강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러고는 호남성 도서관과 제1사범학교 도서관을 제집 드나들듯 다니며 “미친 듯 열렬히 책을 읽었다. 마치 소가 남의 집 밭에 들어가 처음으로 맛난 풀을 뜯어먹듯 죽기 살기로 멈추지 않고 책을 먹어치웠다.” 이때 읽은 책이 사기, 자치통감, 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 등으로 전통 사서가 주를 이루었다.
1914년 호남성 제1사범학교에 진학한 모택동은 신민학회(新民學會)를 조직하는데 적극 참여했고, 1920년에는 호남성에 공산주의 소조를 창건하면서 서서히 중국 공산당에서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했다. 이후 미국 등 서방의 지원을 받는 장개석의 국민당 정부와 오랜 내전을 치른 끝에 대장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마침내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했다. 중앙인민정부 주석, 중국 공산당 중앙 주석 등을 역임했다. 모택동 선집, 모택동 시사 선집 등의 저서가 있고, 논저인 '신민주주의론'은 1988년 중국 역사에 영향을 미친 30권의 책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모택동은 부지런히 배우길 좋아하고 쉬지 않고 책을 읽었다. 아동기에는 물론 노년기에도, 전쟁 중에도, 평화기에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일찍이 모택동은 “내가 평생 가장 좋아한 것은 독서다”라고 술회하며 “밥은 하루 안 먹어도 괜찮고 잠은 하루 안 자도 되지만 책은 단 하루도 안 읽으면 안 된다”고 했다. 혁명기지 연안(延安)에서 읽은 책들은 온갖 풍상을 다 겪고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1949년 신중국을 건립한 이후 독서 환경이 크게 개선되었고, 중남해(中南海) 원국향(原菊香) 서재는 솔직히 말해 모택동의 서재라고 할 수 있었다. 눈길이 닿는 곳마다 책이 점령하고 있으며, 모택동은 남는 시간을 거의 이곳에서 독서하며 보냈다. 서재 건물에 들어서서 첫 번째 방은 송수재(松壽齋)라 하는데, 36개의 커다란 나무 책장이 나란히 놓여 있다. 바로 모택동의 책을 보관한 장서장이다. 동쪽 방에는 모택동이 생전에 읽고 주를 달아놓은 각종 서적이 진열되어 있다.
서쪽 방의 좌우 두 공간은 거실과 침실인데, 여기도 책이 네 벽을 가득 메우고 있다. 장서가 수만 권에 이르는데, 경전· 역사서· 제자백가서· 문집을 실로 엮은 고전과 문학서· 예술서· 과학기술서· 철학서 등 현대 도서를 총망라한다. 특히 역사서의 비중이 가장 큰데 역사서 고전, 역사소설, 역사가 논저, 지방사 등을 포함한다. 독서와 관련한 글귀도 여기저기 눈에 띄는데, 잠을 아껴가며 쉬지 않고 꾸준히 독서하라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모택동의 독서는 대단히 폭넓었지만 다소 치우치고 편애하는 면이 없지 않았다. 가장 즐겨 읽은 책은 역시 마르크스·레닌의 저작과 철학 그리고 중국사와 중국 고대문학이었다. 가장 많이 사용한 공구서는 사해(辭海), 사원(辭源), 중국 지도와 세계지도, 중국의 역사지도였다. 가장 많이 줄을 긋고 주를 달아놓은 책은 1952년 구입한 청 건륭 연간에 발행된 무영전(武英殿) 판본 '24사'다.
1950~1960년대 바쁜 공무 때문에 수도 북경을 벗어나 시찰을 나갈 때도 늘 친필로 읽을 책 목록을 적고는 큰 나무 상자 몇 개를 가지고 갔다. 머물 곳에 도착하면 그 지역 도서관을 찾아 목록에 적어놓은 책을 빌려다 읽었다.
세 번 반복해 읽고 네 번 익혀라
모택동은 세 번 반복해 읽고 네 번 익히라는 삼복사온(三復四溫) 독서법과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라는 원칙을 굳게 지켰다. 특히 역사를 별나게 좋아해 그저 평범하게 대충 훑어보는 정도가 아니라 반복해서 숙독하고 진지하게 생각해 그 안에서 유익한 영양분을 섭취했으며, 타고난 초인적 기억력과 풍부한 혁명투쟁 경험으로 단련된 깊은 이해력, 뼈를 깎는 학습에 대한 완강한 의지력으로 이를 위해 더할 수 없는 노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해서 역사에 대한 깊은 조예를 성취하고, 아울러 역사학자의 서재와 교실 그리고 고고학 현장을 뛰어넘는 독특한 견해와 남다른 비판 의식을 갖춤으로써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폭넓은 지식과 깊은 식견을 겸비한 뛰어난 지도자로 남게 되었다.
중국 현대사는 물론 중국사 전체를 통틀어 모택동이 차지하는 비중만큼 그의 독서 생활과 독서법에 관한 전문서도 여럿 출간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세 종류만 소개한다. 공육지(龔育之) 모택동의 독서 생활[毛澤東的讀書生活] 三聯書店 1986년. 옥석산(玉石山) 모택동은 어떻게 독서했나[毛澤東怎樣讀書] 中國大百科全書出版社 1991년. 장이구(張貽玖) 모택동의 역사 읽기[毛澤東讀史] 中國友誼出版公司 1992년.
모택동은 평생 시간을 아끼고 쪼개 많은 책을 읽어서 풍성한 성과를 거둔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독서법은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는데, 그중 가장 주목할 것은 책에서 얻은 지식을 실생활에 확실히 연계시킨 점이다. 이를 위해 모택동은 ‘삼복사온’과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라는 독서법을 견지했다.
이는 일생을 통해 변함없이 견지한, 강렬한 그의 지적 욕구에 기초한 독서법이었다. “그는 청년기에 사기와 한서 등 저명한 고전을 숙독했을 뿐만 아니라 노년에 이르러서도 끊임없이 그런 고전을 다시 읽었다. 만년의 그가 좋아한 책도 그런 역사서였는데, 읽을 때마다 새롭다며 읽고 또 읽었고” “한 번 읽은 책 겉표지에는 동그라미 같은 기호를 그리는 습관이 있었다.”
현재 중남해 거처에서 소장하고 있는 많은 책에도 두 번 또는 세 번 읽었다는 표시가 남아 있다. 어떤 책에는 날짜와 시간까지 명확히 기록되어 있다. 서로 다른 시간에 여러 차례 읽고 남긴 또렷한 기록이다.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
붓을 움직이지 않는 독서는 독서가 아니다는 공부법은 모택동이 스승 서특립(徐特立)에게 배워 익힌 습관이다. 그의 청년기 독서법은 ‘사다(四多)’ 습관으로 유명한데, 많이 읽고 많이 생각하고 많이 쓰고 많이 물으라는 뜻이다. 그중 많이 쓰라는 것이 독서에서 필기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이다.
사다 공부법에 관해서는 참고자료로 따로 소개하고, 여기서는 필기에 관한 부분을 좀 더 살펴보자. 모택동의 독서 필기법을 전체적으로 분석한 결과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형식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내용의 요점 정리다. 어린 시절 모택동은 수업을 들으면 그 내용을 정리한 ‘강당록’을 쓰고 과목 공부가 끝나면 스스로 ‘독서록’을 작성했는데, 문장 전체를 베끼는 노트와 요점을 정리하는 노트가 있었다. 그 노트가 쌓여 몇 광주리나 되었다고 한다. 연안 시절 모택동은 『철학과 생활』을 읽은 후 그 책의 논점을 약 3,000자로 요약했다.
둘째, 표기(標記)다. 책을 읽을 때마다 중요한 부분에 동그라미, 점, 테두리 등 여러 부호를 이용해 표시했다. 젊은 시절 읽은 '윤리학 원리'는 책의 모든 부분에 동그라미, 테두리, 점, 세모, 꺽쇠 같은 부호를 표기해두었다. 연안 시절에 읽은 '공산당선언, 자본론, 레닌 선집' 같은 책도 이런 표시가 곳곳에서 발견된다. 1950년대 초부터 늘 가지고 다닌 건륭 12년 간행 무영전 판본 『24사』는 모두 850책인데, 모든 책에 표시가 되어 있을 정도였다.
셋째, 주를 다는 것이다. '윤리학 원리'는 약 10만 자에 이르지만 반듯한 해서체로 페이지 가장자리와 행간에 무려 1만 2,100자나 되는 주를 달아놓았다. 연안 시절 읽은 '변증유물론 교과서' 두 개 판본도 책 뒤와 공백에 1만 3,000자에 달하는 주를 달았는데, 견해에 찬동하는 평어를 비롯해 실질적 관점 등이 잘 드러나 있다.
넷째, 독서 일기다. 1937년 모택동은 이달(李達)의 '사회학 대강'을 읽고 그 책을 중국인의 손으로 쓴 최초의 마르크스 철학 교과서로 인정했다. 반복해서 읽은 뒤 오랫동안 중단한 독서 일기를 다시 쓰기 시작했다. 일기 첫머리에 “20년간 쓰지 않은 독서 일기를 오늘부터 시작한다. 나 자신의 연구와 학문을 독려하기 위해서다. 이달의 '사회학 대강'을 읽기 시작해 1월 17일 어제 제1편 ‘유물변증법’을 385쪽까지 읽었다”라고 썼다. 그 후 모택동은 매일 진지하게 독서의 진도를 일기 형식으로 기록해나갔다.
다섯째,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는 것이다. 모택동은 책의 부정확한 관점이나 적절치 않은 인용 부분을 늘 필기 형식으로 고쳤다. 심지어 틀린 글자나 부적절한 문장부호까지 일일이 바로잡았다.
[참고] 흥미롭고 의미심장한 사다(四多) 공부법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모택동은 다양한 공부법을 제시했는데, 그중에서도 ‘사다’ 공부법이 가장 유명하다. ‘사다’란 다독(多讀; 많이 읽기), 다사(多寫; 많이 쓰기), 다상(多想; 많이 생각하기), 다문(多問; 많이 묻기)을 말한다. 모택동은 실제로 이 ‘사다법’을 실천에 옮긴 장본인이기도 하다.
'많이 읽기'에는 다양한 책을 읽는 것 외에도 중요한 책과 문장을 여러 번 읽는 반복 읽기도 포함된다.
'많이 쓰기'는 공부나 수업을 하면서 배운 것을 쓰고, 끝난 뒤에 다시 읽고 쓰는 습관을 요구한다. 각종 기록 노트 외에도 문장 전체를 베껴보는 것도 필요하고, 또 요점을 정리해 쓰는 습관도 병행해야 한다. 이렇게 여러 해 동안 읽고 쓰기를 반복하면 훌륭한 자료가 될 것이다. 책을 볼 때 모택동은 늘 메모하고 썼다고 한다.
'많이 생각하기'는 공부하는 과정에서 어떤 관점이 정확한지, 어떤 시각이 잘못된 것인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판단해 토론이나 비판하는 자리에서 비교적 간단하게 찬성이냐, 반대냐, 의문이냐를 표시하는 것이다. 모택동은 여러 방면에서 역대 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해 이를 종합·비교한 다음 자신의 의견을 제시했다고 한다.
'많이 묻기'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 대해 때를 놓치지 않고 가르침을 청하는 자세를 말한다. 호남성 제1사범학교에 다니던 시절 모택동은 학교에 남아 자습할 때도 의문 나는 사항이 있으면 선생님을 찾아 질문하는 것은 물론 그것으로 충분치 않을 때는 장사(長沙)까지 나와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청했다고 한다.
1949년 장개석을 대륙에서 몰아내고 혁명을 완수한 모택동은 북평(지금의 북경)으로 개선했다. 이때 모택동의 가방에는 사마천의 『사기』를 비롯한 역사서가 주로 담겨 있었다고 한다. 어쩌면 장개석과 모택동의 운명이 독서의 질적 차이에서 갈라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 정도로 모택동의 독서와 공부는 혁명만큼이나 열정적이었다.
모택동은 정치가이자 혁명가였다. 인민과 함께 공산혁명을 이끈 투사였다. 그는 인민을 바른 길로 계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기의식을 철저히 개혁해야 하고, 그 바탕은 독서와 공부라고 확신했다. 어린 시절부터 거르지 않고 이어진 그의 독서 습관은 이런 자각으로 더욱 굳어져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장장 70여 년에 걸친 그의 독서 편력은 자연스럽게 철저한 독서법과 공부법으로 나타났고, 우리는 그 일단을 살펴보았을 뿐이다. 천재도, 혁명가도 끊임없는 공부와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을 모택동의 공부법에서 새삼 확인하게 된다.
▶️ 擧(들 거)는 ❶회의문자로 举(거), 挙(거), 㪯(거)는 통자(通字), 舁(거)와 동자(同字), 举(거)는 약자(略字)이다. 擧(거)는 음(音)을 나타내고 더불어 같이하여 정을 주고 받는다는 與(여, 거)와 손(手)으로 물건을 들어 올린다는 뜻이 합(合)하여 들다를 뜻한다. ❷회의문자로 擧자는 ‘들다’나 ‘일으키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擧자는 舁(마주들 여)자와 与(어조사 여)자, 手(손 수)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여기서 舁자는 위아래로 손을 맞잡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마주 들다’라는 뜻이 있다. 그러니 擧자에는 총 5개의 손이 그려져 있는 셈이다. 그러나 갑골문에 나온 擧자를 보면 단순히 아이를 번쩍 든 모습만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나 소전에서부터는 다양한 글자가 조합되면서 지금의 擧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擧(거)는 ①들다 ②일으키다 ③행하다 ④낱낱이 들다 ⑤빼어 올리다 ⑥들추어 내다 ⑦흥기하다(세력이 왕성해지다) ⑧선거하다 ⑨추천하다 ⑩제시하다 ⑪제출하다 ⑫거동(擧動) ⑬행위(行爲) ⑭다, 모든 ⑮온통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움직일 동(動), 옮길 반(搬), 흔들 요(搖), 옮길 운(運), 할 위(爲), 옮길 이(移), 다닐 행(行)이다. 용례로는 온 나라 모두를 거국(擧國), 일에 나서서 움직이는 태도를 거동(擧動), 어떤 사람의 이름을 초들어 말함을 거명(擧名), 손을 위로 들어 올림을 거수(擧手), 스승과 학인(學人)이 만나는 일을 이르는 말을 거각(擧覺), 기를 쳐듦을 거기(擧旗), 많은 사람 가운데서 투표 등에 의하여 뽑아 냄을 선거(選擧), 통쾌한 거사나 행동을 쾌거(快擧), 많은 무리들이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는 것을 대거(大擧), 인재를 어떤 자리에 추천하는 일을 천거(薦擧), 법령이나 질서를 위반한 사람들을 수사기관에서 잡아 들임을 검거(檢擧), 난폭한 행동을 폭거(暴擧), 경솔하게 행동함을 경거(輕擧), 온 국민이 모두 한마음 한 뜻으로 뭉치어 하나로 됨을 거국일치(擧國一致), 바둑을 두는 데 포석할 자리를 결정하지 않고 둔다면 한 집도 이기기 어렵다는 거기부정(擧棋不定), 살받이 있는 곳에서 화살이 맞는 대로 기를 흔들어 알리는 한량을 거기한량(擧旗閑良), 머리를 들어 얼굴을 맞댐을 거두대면(擧頭對面),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음을 이르는 거석이홍안(擧石而紅顔), 온 세상이 다 흐리다는 거세개탁(擧世皆濁), 밥상을 눈썹 높이로 들어 공손히 남편 앞에 가지고 간다는 거안제미(擧案齊眉), 이름 난 사람의 장례 때, 사회 인사들이 모여서 통곡하고 장송하는 일을 거애회장(擧哀會葬), 한 가지를 들어서 세 가지를 돌이켜 안다는 거일반삼(擧一反三), 모든 조치가 정당하지 않음을 거조실당(擧措失當), 다리 하나를 들어 어느 쪽에 두는 가에 따라 무게 중심이 이동되어 세력의 우열이 결정된다는 거족경중(擧足輕重), 명령을 좇아 시행하는 것이 민첩하지 못하다는 거행불민(擧行不敏) 등에 쓰인다.
▶️ 一(한 일)은 ❶지사문자로 한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젓가락 하나를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하나를 뜻한다. 一(일), 二(이), 三(삼)을 弌(일), 弍(이), 弎(삼)으로도 썼으나 주살익(弋; 줄 달린 화살)部는 안표인 막대기이며 한 자루, 두 자루라 세는 것이었다. ❷상형문자로 一자는 ‘하나’나 ‘첫째’, ‘오로지’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一자는 막대기를 옆으로 눕혀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막대기 하나를 눕혀 숫자 ‘하나’라 했고 두 개는 ‘둘’이라는 식으로 표기를 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그래서 一자는 숫자 ‘하나’를 뜻하지만 하나만 있는 것은 유일한 것을 연상시키기 때문에 ‘오로지’나 ‘모든’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러나 一자가 부수로 지정된 글자들은 숫자와는 관계없이 모양자만을 빌려 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一(일)은 (1)하나 (2)한-의 뜻 (3)성(姓)의 하나 등의 뜻으로 ①하나, 일 ②첫째, 첫번째 ③오로지 ④온, 전, 모든 ⑤하나의, 한결같은 ⑥다른, 또 하나의 ⑦잠시(暫時), 한번 ⑧좀, 약간(若干) ⑨만일(萬一) ⑩혹시(或時) ⑪어느 ⑫같다, 동일하다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한가지 공(共), 한가지 동(同),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무리 등(等)이다. 용례로는 전체의 한 부분을 일부(一部), 한 모양이나 같은 모양을 일반(一般), 한번이나 우선 또는 잠깐을 일단(一旦), 하나로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음을 고정(一定), 어긋남이 없이 한결같게 서로 맞음을 일치(一致), 어느 지역의 전부를 일대(一帶), 한데 묶음이나 한데 아우르는 일을 일괄(一括), 모든 것 또는 온갖 것을 일체(一切), 한 종류나 어떤 종류를 일종(一種), 한집안이나 한가족을 일가(一家), 하나로 연계된 것을 일련(一連), 모조리 쓸어버림이나 죄다 없애 버림을 일소(一掃), 한바탕의 봄꿈처럼 헛된 영화나 덧없는 일이라는 일장춘몽(一場春夢), 한 번 닿기만 하여도 곧 폭발한다는 일촉즉발(一觸卽發), 한 개의 돌을 던져 두 마리의 새를 맞추어 떨어뜨린다는 일석이조(一石二鳥), 한 가지의 일로 두 가지의 이익을 보는 것을 일거양득(一擧兩得) 등에 쓰인다.
▶️ 反(돌이킬 반/돌아올 반, 어려울 번, 삼갈 판)은 ❶회의문자로 仮(반)과 동자(同字)이다. 又(우)는 손을, 厂(엄)은 언덕의 뜻으로 뒤엎는다 또는 반대(反對)를 뜻한다. 비탈진 지형은 정상이 아니므로 반대를 의미한다. 反(반)은 위에서 덮는데 대하여 밑으로부터도 뒤덮는 일, 그 양쪽을 합하면 반복이란 말이 된다. 또 손바닥을 뒤집다, 배반하다, 돌아오다, 돌아보다 따위의 뜻으로 쓴다. ❷회의문자로 反자는 ‘되돌아오다’나 ‘뒤집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反자는 厂(기슭 엄)자와 又(또 우)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厂자는 산기슭을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추상적인 물건으로 응용되었다. 갑골문에 나온 反자를 보면 손으로 무언가를 잡으려는 듯한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어떠한 물건을 손으로 뒤집는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反자는 ‘뒤집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지만, 후에 뜻이 확대되면서 ‘배반하다’나 ‘반역하다’라는 뜻도 갖게 되었다. 그래서 反(반)은 변증법(辨證法)의 정(正), 반(反), 합(合)의 세 가지 계기 가운데에서 부정(否定)을 뜻하는 계기나 반립(反立)의 뜻으로 ①돌이키다 ②돌아오다, 되돌아가다 ③되풀이하다, 반복하다 ④뒤집다, 뒤엎다 ⑤배반하다 ⑥어기다(지키지 아니하고 거스르다), 어긋나다 ⑦반대하다 ⑧물러나다, 후퇴하다 ⑨보복하다, 앙갚음하다 ⑩되돌아보다, 반성하다 ⑪꾸짖다, 나무라다 ⑫보답하다, 되갚음하다 ⑬바꾸다, 고치다 ⑭죄를 가벼이 하다 ⑮휘다 ⑯구르다, 뒤척이다 ⑰기울다 ⑱튀기다 ⑲생각하다, 유추(類推)하다 ⑳대답하다 ㉑기인(起因)하다 ㉒모반(謀叛), 반역(反逆) ㉓번(횟수를 세는 단위) ㉔반대로, 도리어 ㉕더한층, 더욱더 그리고 ⓐ어렵다, 곤란하다(번) 그리고 ㉠삼가다(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하다), 조심하다(판) ㉡팔다(판)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바를 정(正), 도울 찬(贊)이다. 용례로는 공산주의를 반대함을 반공(反共), 반대로 움직임을 반동(反動), 법칙이나 규칙 따위를 어김을 반칙(反則), 상대방의 말을 되받아 묻는 것을 반문(反問), 두 사물이 맞서 있는 상태 또는 어떤 의견이나 제안 등에 찬성하지 않음을 반대(反對), 반사로 비친 그림자를 반영(反影), 반사하여 비침을 반영(反映), 반대하거나 반항하여 품는 나쁜 감정을 반감(反感), 한 가지 일을 되풀이 함을 반복(反復), 자극이나 작용에 대응하여 일어남을 반응(反應), 전쟁을 반대함을 반전(反戰), 쳐들어 오는 적을 되받아 공격함을 반격(反擊), 상대방에 반대하여 대들음을 반항(反抗), 반대의 뜻을 나타내는 행동이나 표시를 반기(反旗), 서로 미워함을 반목(反目), 잘못이나 허물이 없었는지 돌이켜 생각하는 것을 반성(反省), 반대되는 뜻을 반의(反意), 손님이 도리어 주인 노릇을 한다는 반객위주(反客爲主), 잘못을 자신에게서 찾는다는 반구제기(反求諸己), 서로 미워하고 질투하는 눈으로 봄을 반목질시(反目嫉視), 언행이 이랬다 저랬다 하며 일정하지 않거나 일정한 주장이 없음을 반복무상(反覆無常), 도리어 처음 만 같지 못함이라는 반불여초(反不如初), 남에게 재앙이 가게 하려다가 도리어 재앙을 받음을 반수기앙(反受其殃), 머리는 헝클어지고 옷은 해어진 초라한 모습으로 한데서 잠을 반수발사(反首拔舍), 엎질러진 물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는 반수불수(反水不收) 등에 쓰인다.
▶️ 三(석 삼)은 ❶지사문자로 弎(삼)은 고자(古字)이다. 세 손가락을 옆으로 펴거나 나무 젓가락 셋을 옆으로 뉘어 놓은 모양을 나타내어 셋을 뜻한다. 옛 모양은 같은 길이의 선을 셋 썼지만 나중에 모양을 갖추어서 각각의 길이나 뻗은 모양으로 바꾸었다. ❷상형문자로 三자는 '셋'이나 '세 번', '거듭'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三자는 나무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다. 고대에는 대나무나 나무막대기를 늘어놓은 방식으로 숫자를 표기했다. 이렇게 수를 세는 것을 '산가지(算木)'라 한다. 三자는 막대기 3개를 늘어놓은 모습을 그린 것이기 때문에 숫자 3을 뜻하게 되었다. 누군가의 호의를 덥석 받는 것은 중국식 예법에 맞지 않는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3번은 거절한 후에 상대의 호의를 받아들이는 문화가 있다. 三자가 '자주'나 '거듭'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도 이러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三(삼)은 셋의 뜻으로 ①석, 셋 ②자주 ③거듭 ④세 번 ⑤재삼, 여러 번, 몇 번이고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석 삼(叁)이다. 용례로는 세 해의 가을 즉 삼년의 세월을 일컫는 삼추(三秋), 세 개의 바퀴를 삼륜(三輪), 세 번 옮김을 삼천(三遷),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세 대를 삼대(三代), 한 해 가운데 셋째 되는 달을 삼월(三月), 스물한 살을 달리 일컫는 말을 삼칠(三七), 세 째 아들을 삼남(三男), 삼사인이나 오륙인이 떼를 지은 모양 또는 여기저기 몇몇씩 흩어져 있는 모양을 일컫는 말을 삼삼오오(三三五五), 삼순 곧 한 달에 아홉 번 밥을 먹는다는 뜻으로 집안이 가난하여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린다는 말을 삼순구식(三旬九食), 오직 한가지 일에만 마음을 집중시키는 경지를 일컫는 말을 삼매경(三昧境), 유교 도덕의 바탕이 되는 세 가지 강령과 다섯 가지의 인륜을 일컫는 말을 삼강오륜(三綱五倫), 날마다 세 번씩 내 몸을 살핀다는 뜻으로 하루에 세 번씩 자신의 행동을 반성함을 일컫는 말을 삼성오신(三省吾身), 서른 살이 되어 자립한다는 뜻으로 학문이나 견식이 일가를 이루어 도덕 상으로 흔들리지 아니함을 이르는 말을 삼십이립(三十而立), 사흘 간의 천하라는 뜻으로 권세의 허무를 일컫는 말을 삼일천하(三日天下), 세 사람이면 없던 호랑이도 만든다는 뜻으로 거짓말이라도 여러 사람이 말하면 남이 참말로 믿기 쉽다는 말을 삼인성호(三人成虎), 형편이 불리할 때 달아나는 일을 속되게 이르는 말을 삼십육계(三十六計), 하루가 삼 년 같은 생각이라는 뜻으로 몹시 사모하여 기다리는 마음을 이르는 말을 삼추지사(三秋之思), 이러하든 저러하든 모두 옳다고 함을 이르는 말을 삼가재상(三可宰相), 삼 년 간이나 한 번도 날지 않는다는 뜻으로 뒷날에 웅비할 기회를 기다림을 이르는 말을 삼년불비(三年不蜚), 세 칸짜리 초가라는 뜻으로 아주 보잘것 없는 초가를 이르는 말을 삼간초가(三間草家), 봉건시대에 여자가 따라야 했던 세 가지 도리로 어려서는 어버이를 시집가서는 남편을 남편이 죽은 후에는 아들을 좇아야 한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삼종의탁(三從依托), 키가 석 자밖에 되지 않는 어린아이라는 뜻으로 철모르는 어린아이를 이르는 말을 삼척동자(三尺童子), 세 사람이 마치 솥의 발처럼 마주 늘어선 형상이나 상태를 이르는 말을 삼자정립(三者鼎立), 세 칸에 한 말들이 밖에 안 되는 집이라는 뜻으로 몇 칸 안 되는 오막살이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간두옥(三間斗屋), 가난한 사람은 농사 짓느라고 여가가 없어 다만 삼동에 학문을 닦는다는 뜻으로 자기를 겸손히 이르는 말을 삼동문사(三冬文史), 삼생을 두고 끊어지지 않을 아름다운 언약 곧 약혼을 이르는 말을 삼생가약(三生佳約),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뜻으로 재물에 욕심이 없는 깨끗한 관리 즉 청백리를 이르는 말을 삼마태수(三馬太守), 세 치의 혀라는 뜻으로 뛰어난 말재주를 이르는 말을 삼촌지설(三寸之舌), 얼굴이 셋 팔이 여섯이라는 뜻으로 혼자서 여러 사람 몫의 일을 함을 이르는 말을 삼면육비(三面六臂), 사귀어 이로운 세 부류의 벗으로서 정직한 사람과 성실한 사람과 견문이 넓은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익지우(三益之友), 세 가지 아래의 예라는 뜻으로 지극한 효성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삼지지례(三枝之禮), 머리가 셋이요 팔이 여섯이라 함이니 괴상할 정도로 힘이 엄청나게 센 사람을 이르는 말을 삼두육비(三頭六臂), 세 번 신중히 생각하고 한 번 조심히 말하는 것을 뜻하는 말을 삼사일언(三思一言)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