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에 안고도 흐트러지지 않다
[坐懷不亂]
유하혜(柳下惠)라는 사람이 있다. 중국 춘추시대 노(魯)나라에서 대부를 지내며 직도(直道)를 지켜 임금을 섬긴 것으로 알려진 그는 성은 전(展)이고 이름은 획(獲)인데, 그가 살았던 식읍인 버드나무골 유하(柳下)와 문인들이 그에게 올린 시호인 혜(惠)가 합쳐져 ‘유하혜’라 통칭된다.
유하혜는 일찍이 사사(士師)라는 관직을 지내면서 형옥(刑獄) 관리를 맡았는데, 세 번이나 관직에서 쫓겨나자 이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그에게 노나라를 떠나기를 권했다. 그러자 그는 “올곧은 도리로 사람을 섬기다 보면 어디 간들 세 번은 쫓겨나지 않겠소? 비뚤어진 도리로 남을 섬길 양이면 어찌 꼭 부모의 나라를 떠나야 한단 말이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여기서 세상이 나를 버려도 원망하지 않는다는 ‘유일불원(遺佚不怨)’의 고사성어가 나왔는데, 이렇듯 반드시 정당한 방법으로 일하되, 도리에 맞게 일이 시행되지 않고 자신의 뜻이 버림받더라도 남을 탓하지 않았던 유하혜를 두고 공자는 ‘정인군자(正人君子)’라 칭송하였다.
조화로운 기질이 남다른 그는 아무리 더러운 세상이라 해도 자기는 그 속에서 맑게 살 수 있다는 자신감을 지녔었는지 세속에 어울려 사는 것을 꺼려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하여 도(道)와 예(禮)를 모르는 시골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지극히 자연스럽고 너그럽게 대하면서 잘 지냈다. 그래서 유하혜의 기풍과 법도를 들은 사람은 아무리 도량이 좁은 사람이라도 너그러워졌으며, 야박하고 무정한 사람이라도 마음이 도타워졌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를 ‘성지화자(聖之和者)’라 부르기도 하는데, 훗날 조선의 허균(許筠)도 “이 분은 텅 빈 듯하면서도 한없이 넓은 마음씨로써 사람들과 경계를 다투지 않으셨다. 현명하거나 어리석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를 막론하고 모두 즐겁게 어울렸으니 화광동진(和光同塵)의 풍모를 갖춘 분이었다. 나는 그분을 본받고 싶지만 역부족이다.”라고 칭송하였다(『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유하혜와 관련해서 몇 가지 일화가 있는데 그 중 ‘좌회불란(坐懷不亂: 품에 안고서도 흐트러지지 않다)’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유하혜가 먼 길을 가는데 늦은 밤이라 성문이 닫혀 성 밖에 유숙하게 되었다. 밖은 한파가 몰아치는데 갑자기 한 여인이 방 문 앞에 와 추위에 떨면서 하룻밤 묵게 해달라고 청하였다. 어진 마음의 그는 그 여인이 얼어 죽기라도 할까봐 거절하지 못하고 방으로 들였다. 유하혜의 거처 역시 충분한 난방이 되지 않았기에 이미 몸이 얼기 시작한 그 여인을 따뜻하게 해주기에는 온기가 부족했다. 그래서 유하혜는 그 여인을 자신의 품에 안고 자기 옷을 덮어주어 몸을 덥혀 재웠는데, 그 낯선 젊은 여인을 품에 안고 하룻밤을 지내고도 음란한 마음을 품지 않고 흐트러짐이 없었다고 한다.
이 일화를 들으며 나는 유하혜가 참으로 조행(操行)이 바른 남자로 불릴 만하다고 감탄했다. 그러나 한편 과연 그것이 가능하기는 한 일인가 하는 의문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속인다운 호기심에서 혹시 유하혜가 성무능력자는 아니었을까 하고 전거를 뒤져보았다. 한참만에 원전은 아니지만 한 인용문에서 유하혜는 강 씨에게 장가를 들었으며 29세에 장남을 얻었고 37세에 차자(次子)를 낳았다는 것을 찾게 되었는데, 참으로 나의 호기심마저 부끄러워졌다. 정말 유하혜는 대단한 남자다.
훗날 같은 노나라에 한 홀아비가 혼자 살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과부가 밤중에 폭풍우가 몰아쳐 자기 집이 무너지는 바람에 잠잘 곳이 없어지자 생각다 못해 옆집 홀아비에게 하룻밤 의탁할 것을 청하였다. 그랬더니 그 홀아비는 문을 잠가 버리고 받아주지 않았다. 그 과부가 담 밖에서 “아니, 남자가 어찌 이렇게 어질지 못하오?”라고 하자, 그 홀아비는 “그대도 젊고 나도 아직 젊으니 어찌 그대를 받아들일 수가 있단 말이오?”라고 대답했다. 과부가 다시 “당신은 어찌하여 유하혜처럼 하지 않소?” 하자 그는 “유하혜는 가하나, 나는 그렇지 못하오. 나의 불가함으로써 유하혜의 가함을 배우니 이해하시오.”라고 답했다. 이러한 그의 처신에 대하여 공자는 “참 착한 일이로다. 유하혜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다.”며 칭찬했다고 한다(『공자가어』 「호생(好生)」).
내가 검사로서 공직생활을 할 때 가장 어려웠던 문제 중의 하나가 어느 범위의 사람까지 만나야 하느냐 하는 문제였다. 도처에 ‘낯선 젊은 여인’이나 ‘옆집 과부’ 같은 사람들이 깔려 있기 때문이었다. 초임 검사 시절에 한번은 평소 알고 지내던 고등학교 선배 한 분이 저녁식사나 같이 하자고 하여 별 생각 없이 약속 장소에 나갔었는데,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던 그 선배 옆 자리에 내가 맡고 있던 사건의 고소인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기겁을 하고 도로 나온 일이 있었다. 그 뒤로는 누가 만나자고만 해도 겁이 덜컥 났다.
공직자는 결코 오해받을 만한 처신을 하지 말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늘 주변 관리를 깨끗이 하고 사람을 아무나 막 만나서는 안 될 것이다. 일찍이 공자도 ‘군자는 반드시 함께 지낼 사람을 신중히 가려야 한다[君子必愼其所與處者焉]’고 말씀하셨는데(『공자가어』 「육본(六本)」), 이는 공직자 중에서도 특히 공정함을 지켜야 할 직위에 있는 사람들이 꼭 새겨둘 사항이라고 본다.
물론 여기에는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사람 만나는 것을 너무 꺼리는 것은 다소 옹졸해 보이고, 단순히 주어진 일만 수동적으로 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큰일’을 해내려면 자기 몸 깨끗함만 지키는 샌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이다. 특히 검사가 하는 일은 판사의 일과 달리 현장성이 중요하고, 여러 부류의 사람을 다양하게 많이 만나봐야지만 척결해야 할 대상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다는 논리를 펴기도 한다. 더 나아가 폭넓은 대인관계는 다양한 정보 수집 채널이 생겨 유능한 검사가 되는 필수 조건이라고까지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것이 맞는 것 같기도 한 것이 종전에 검찰에서 잘 나간다는 인사들을 보면 대개 정계와 관계는 물론 재계에까지 널리 잘 통하는 이른바 ‘마당발’들이 많았으니 말이다. 다른 부처의 인사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간혹 그들 중에 주먹세계와도 선이 닿아 있었던 것이 나중에 밝혀져 물의를 빚기도 한다.
그런데 나는 아무리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고 출세를 하게 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을 마구 만나고 싶지가 않았다. 아니, 그러는 것이 생리적으로 맞지 않았고, 위와 같은 논리나 주장도 그저 ‘마당발’들의 자기합리화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이런 사람 저런 사람을 많이 만나다 보면 잘못된 정보 또는 의도적으로 만들어진 정보에 오염될 수가 있으며, 때로는 청부수사로까지 연결될 위험이 많아 매우 경계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겁이 났었다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유하혜는 ‘낯선 젊은 여인’을 밤새 품에 안고 있어도 흐트러지지 않았다고 하는데, 나는 흐트러지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 사람 만나기를 꺼려했다는 것이 맞다. 앞에서 말한 홀아비가 “유하혜는 가하나, 나는 그렇지 못하오. 나의 불가함으로써 유하혜의 가함을 배운다오.”라고 한 것은, “유하혜는 그리 할 수 있겠으나 나는 인품이 못 미쳐 감히 그렇게 따라가지 못하오. 내 스스로 이를 잘 알고 있으니 삼갈 수밖에 없소.”라는 뜻으로 보인다. 시쳇말로 자기 주제파악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도 그런 셈인데, 그렇다고 이렇게 소극적이기만 한 나를 공자께서 착하다고 칭찬해주실까?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는 대형 비리 사건이 터질 때나 고위 공직자 임명을 위한 청문 절차를 밟을 때 이들 ‘마당발’ 인사들의 금품거래가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럴 때마다 이들은 그것은 빌린 것이라거나 외상거래여서 뇌물은 아니라는 식으로 변명을 한다. 어쩌다 그런 TV 뉴스를 함께 보던 친구가 “너도 저런 사람들한테서 돈을 빌리곤 하니?” 하고 빈정거리듯이 물어올 땐 정말 난감해진다. 한번은 나도 잘 아는 인사가 골프 접대와 향응을 받은 일로 기자들 질문 공세를 받으며 쩔쩔매는 모습이 TV에 나온 일이 있다. 이것을 보던 아내가 “저 분이 왜 범법자 같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녔죠?” 하고 의아해하며 물어왔다. 그 인사가 여러 모로 실력 있고 유능한데 너무 이 사람 저 사람 가리지 않고 만나는 것이 좀 위태롭다고 느껴왔던 나는 “공직생활을 하다 보면 만나기 싫어도 만날 수밖에 없는 경우도 있는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런데 유하혜는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네가 아무리 내 옆에서 옷을 벗고 알몸을 드러내더라도 어떻게 나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爾爲爾 我爲我 雖袒裼裸裎於我側 爾焉能浼我哉]”라 했다고 한다(『맹자』 「공손추 상(公孫丑 上)」). 참으로 대단 오기다. 나를 마주한 상대로부터 어떠한 영향을 받지 않고 자신을 지킬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는데, 이런 자신감과 기개가 있었기에 ‘좌회불란’도 지켜낼 수 있었을 것이다. 나같이 소심하고 옹졸한 사람은 그저 위의 홀아비처럼 ‘나는 가하지 못하오.’라고만 되뇌고 말 일이다.
초(楚)나라의 시인 굴원(屈原)이 생각난다. 정치에도 깊이 관여했던 그는 ‘온 세상이 더럽구나[擧世皆濁].’라고 개탄하면서 멱라수(汨羅水)에 뛰어들어 생을 마쳤다. 그의 글 「어부사(漁父辭)」를 보면, 그는 유하혜와는 달리 자신은 혼탁한 세상에 휩쓸려서는 깨끗함을 지켜낼 자신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몸을 더럽힐 바에야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나는 굴원처럼 결벽이 강하진 않다. 다만, 자리가 바르게 놓여 있지 않으면 그곳에 앉지 않았다[席不正 不坐]는(『논어』 「향당(鄕黨)」) 공자의 가르침을 따라 항상 내가 있을 자리를 조심하긴 했다. 비딱한 자세가 문제라기보다는, 그런 자세로 인해 비딱한 마음이 자신에게로 들어올까 염려해서 말이다.
물이 너무 맑으면 그 속에 고기가 없고,
사람이 너무 깐깐하면 따르는 무리가 없다.
[水至淸則無魚 人至察則無徒]
『명심보감』 「성심(省心)편」에 나오는 대목인데, 나는 사법연수원 교수로서 ‘검찰실무’를 가르칠 때 첫 시간에 이 글을 칠판에 써놓고 강조했다. “검사가 되려면 찰찰(察察: 사소한 일까지 깐깐하게 밝히는 가차 없는 모습)해야 한다. 고기가 없어도 할 수 없다. 따르는 무리가 없어도 어쩔 수 없다. 검사가 된 이상 ‘淸’과 ‘察’은 벗어날 수도 없고, 벗어나서도 안 되는 하나의 숙명이다.”라고 말이다.
지금 다시 강의를 한다면 아무래도 여기에 실천적인 사항을 하나 더 덧붙여 강조해야 할 것 같다. 요즘처럼 유혹이 많고 여러 미끼들이 널브러져 있는 세상에서 검사 노릇을 제대로 하려면, 아무리 유하혜처럼 흐트러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하더라도 함부로 품지 말고 사람 만나는 것도 더욱 조심해야 한다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