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41
9월7일 [연중 제23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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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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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8vkSYxk6-Eg (성세현 바르톨로메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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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1)대한 독립의 소리가 들려 오면 천국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태풍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간절히 고대하면서 책을 한 권 손에 들었습니다. 김훈 선생님의 하얼빈(문학동네)! 청년 안중근 토마스 의사님(1879~1910)의 거사와 순국(殉國)의 기획과 과정을 소상히 묘사한 흥미진진한 역사 소설입니다.
참담한 슬픔과 굴욕의 시기, 청년 애국자 안중근의 마음은 늘 찹찹했습니다. 처참히 짓밟히는 조선의 안타까운 현실 앞에 안중근은 기약 없는 떠남을 결심합니다. 황해도 진남포에서 신천으로, 신천에서의 서울로, 서울에서 부산으로, 부산에서 배를 타고 함경북도 연추로, 연추에서 블라디보스콕으로, 그리고 마침내 하얼빈으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이들, 늘 미안했던 부인 김아려, 어머니 조마리아를 뒤로 하고 어딘지 모를 머나먼 이국땅으로 떠나가는 청년 안중근, 그 분위기는 참으로 처연했습니다. 아들이 품고 있는 큰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어머니 조마리아는 아들을 붙잡지 않았습니다. 그저 한 마디만 하였습니다.
“거기는 춥다던데, 너는 한뎃잠을 좋아하니 견딜만 하겠구나. 네 처가 가엾게 되었구나. 성정이 고우면 속마음이 더 힘들다. 내가 잘 살필 터이니 그리 알아라.”
안중근은 신새벽에 길을 나섰습니다. 짐은 겨울옷 한 벌이 책 몇 권뿐이었습니다. 천주교 기도서도 보따리에 넣었습니다. 아내 김아려는 대문에서 남편과 작별했습니다. 이승에서 더 이상 남편과 해후할 수 없음을 직감한 아내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습니다.
오직 대한 독립이라는 사명 하나를 가슴에 간직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물설고 낯선 머나먼 길을 떠나는 안중근의 뒷모습이, 한없이 나약하고 지조 없는 오늘 우리의 가슴을 치게 만듭니다.
마침내 하얼빈에 도착한 안중근은 동지 우덕순과 거사를 목전에 두고 하얼빈 시내로 나갔습니다. 두 사람이 주고받은 대화를 통해 그들 마음이 얼마나 결연하고 엄숙했던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옷을 사러 가자.”
“옷이라니?”
“지금 입은 옷은 추레하다.”
“돈이 모자랄 텐데.”
“넌 돈 걱정을 하지 마라.”
“왜 갑자기 옷이냐?”
“쏘러 갈 때 입자.”
“머리를 깎자. 잡힐 때 깔끔한 게 좋겠다.”
“그렇겠구나.”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은 중국과 러시아 접경 지역인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습니다. 이 의거는 조선 통감으로 재직하면서 한일합방을 추진했던 가장 중요한 인물을 응징한 대사건이었습니다.
저격 30분이 지난 후 이토 히로부미는 68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고, 러시아 경찰대 숙직실에 구금된 상태로 있던 안중근은 그 소식을 전해 듣고는 기뻐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벽에 걸려있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 자신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사건 다음날 이완용은 이토 히로부미 가족을 위로하기 위해 뤼순으로 달려갔습니다. 뤼순에서 돌아온 그는 이토 히로부미 가족에게 위로금 10만원(현 시세 30억원)을 하사하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고, 순종은 마지못해 재가했습니다.
더없이 나약한 순종 임금은 자칭 천황 메이지에게 위로의 전문을 보냈습니다.
“오늘 이토 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逆道)에게 화를 당하였다는 보고를 받고 통분한 마음을 금할 길 없습니다. 삼가 위로를 보냅니다.”
취조 때, 그리고 재판 과정 내내 안중근 의사는 더없이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였습니다.
“그대가 믿는 천주교에서도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닌가?”
“그렇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자를 수수방관하는 것은 더 큰 죄악이다. 나는 그 죄악을 제거했다.”
사형 집행 며칠 전 안중근 의사는 동생들에게 눈물겨운 유언을 남겼습니다.
“독립 전에는 내 시신을 옮기지 마라. 대한 독립의 소리가 들려 오면 천국에서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나라를 빼앗기고, 모국어를 빼앗기고, 존재의 이유마저 빼앗긴 나머지, 혈혈단신 춥고 배고픈 이국땅을 떠돌던 한그루 청청한 소나무 같던 안중근 의사, 그는 비록 이승에서 가난했고, 굶주렸고, 슬퍼 울었지만, 지금은 더없이 행복한 얼굴로 자비하신 하느님 품에 안겨계시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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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상의 옷을 벗고 예수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으십시오!>
오늘 첫 번째 독서인 콜로새서를 읽고 묵상하다 보니, 어찌 그리 한 문장 한 문장이 모두 명문장인지? 어찌 그리도 감동적인지? 어찌 그리 오늘 제게 꼭 필요한 말씀인지? 출력을 해서 냉장고문에 붙여 놓아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은 이미 죽었고, 여러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님 안에 숨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안에 있는 현세적인 것들, 곧 불륜, 더러움, 욕정, 나쁜 욕망, 탐욕을 죽이십시오. 여러분은 옛 인간을 그 행실과 함께 벗어 버리고, 새 인간을 입은 사람입니다.” (콜로새서 3장 1~10절)
세례 성사를 통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 신자들의 시선은 이제 교정되어야 마땅합니다. 우리의 시선은 뒤를 돌아보지 말고, 앞을 내다봐야 합니다. 땅을 바라보지 말고 저 윗쪽, 천상을 바라봐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새로운 신자들을 향해 새로운 시야를 지닐 것을 부단히 강조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생각과 의지는 하늘나라에, 다시 말해서 영광스럽게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더 이상 지상에 있는 것들에 우선권을 둔다든지, 지상 것들에 중심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모든 피조물들은 새로운 질서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모든 창조물들은 예수님을 통해 새롭게 쇄신되고 재창조되었습니다. 이제 세상 모든 피조물들은 예수님을 기준으로 새로운 가치 평가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거듭 아래가 아니라 위를 바라보라고, 지상 것들로부터 초월하고, 천상의 것들 추구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바오로 사도의 권고를 잘 새겨들어야 할 것입니다. 아래보다는 저 위의 것, 지상 것보다는 천상의 것을 추구하라는 그분의 말씀을 곡해해서는 안되겠습니다.
위의 것, 천상의 것이라는 말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매일 당연히 해야 할 담당구역 청소는 하지 않고 줄창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맡은 일은 뒷전인 채, 하루 온 종일 성전에서 울부짖고 있어서도 안되겠습니다.
이 땅에 두 발을 딛고 있는 이상, 이 땅 위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와 만남, 사건과 사고에 소홀히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바오로 사도 말씀의 진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맡고 있는 직무나 사명에 소홀 하라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물론 우리의 시선은 만물의 창조주 하느님, 세상만사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만, 현세 생활에서 맡은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 것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께서는 저 위의 것, 천상의 것, 영적인 삶에 우선권과 고귀함을 크게 강조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지상의 삶, 현세적인 것, 인간 조건, 육체를 무시하거나 소홀히 평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또한 바오로 사도께서 지적하고 힐난하신 것이 탈선이요 과욕, 죄로 가득한 그릇된 욕망입니다.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고 고결하신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에 반하는 악습에서 거듭 죽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어두운 삶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 생명의 삶과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특별히 과도한 욕심, 탐욕을 경계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어느 정도 충족되었으면 감사하고 만족하면 좋을텐데, 어떤 사람들 보면 욕심이 한도 끝도 없습니다. 충분히 채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은 그칠줄 모릅니다.
그런 모습은 새로운 백성의 복음적 삶과는 정면으로 충돌하는 삶이라서 그리도 강하게 경고하시는 것입니다.세례성사는 죄에 대한 죽음의 성사요, 우리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으로 재창조되는 은총의 성사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상의 옷을 벗고 그리스도라는 새로운 의복으로 갈아입은 사람들입니다. 새로운 가치관과 새로운 자아로 무장한 새로운 인간인 우리 그리스도인들입니다. 매일 과거의 악습에 죽어야겠습니다.
수시로 우리를 유혹하는 죄와 탐욕에서 죽어야겠습니다. 시시각각 분노와 격분, 악의와 중상에 죽고, 온유하고 자비로운 새 인간으로 거듭 태어나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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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oGuqT9md7y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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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른이 되면서 잊는 유일한 행복의 요건>
금쪽같은 내새끼 112회 ‘부모의 이혼과 재혼을 겪는 금쪽이, 불안과 구토증세의 이유는?’에 심하게 분리불안을 겪는 여자아이가 나옵니다. 집에 들어와 엄마가 없으면 심하게 불안해하면서 엄마에게 전화를 겁니다. 그리고 무조건 들어오라고 떼를 씁니다. 그리고 엄마가 전화를 받지 않으면 펑펑 서럽게 웁니다. 그러다 먹을 것을 생각하면 금세 울음을 그치고 편안한 마음으로 폭식합니다. 엄마를 찾는 행위가 분명 생존본능 때문임을 입증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음식이 떨어져 갈 때 아이는 다시 급히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화장실로 달려가서 토합니다. 결국, 음식으로는 엄마를 대체할 수 없음을 몸이 아는 것입니다. 아이는 잠을 혼자 자지 못합니다. 옆에서 엄마가 손을 잡아주고 같이 자야만 잠이 듭니다. 안 그러면 기침하다가 또 구토합니다. 엄마는 어쩔 수 없이 남편이 아닌 아이와 같이 잠을 자야만 합니다.
금쪽이가 이렇게 엄마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아빠가 자신에게 신체접촉도 안 해 주고 놀아주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아빠는 금쪽이가 네 살 때 엄마와 결혼하였습니다. 엄마는 재혼이었지만 아빠는 초혼입니다. 그러니까 아이에게 어떻게 해 주어야 하는지 잘 모릅니다. 남의 자식이라 야단도 칠 수 없고 신체접촉도 아이가 사춘기가 되면 아빠를 이상하게 여길까 봐 주저합니다.
금쪽 처방으로 아빠는 금쪽이를 하루 세 번 안아주어야 하고 자주 놀아주어야 한다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빠는 피곤하지만, 아빠의 역할을 다해줍니다. 그러니까 금쪽이가 너무 좋아합니다. 급기야 폭식 성향도 줄어들고 잠도 혼자 잘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잠을 잘 때 부모가 지켜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들은 어떻게 하면 행복해지는지 압니다. 참 행복은 자신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수 있는 부모에게서 온다는 것을. 그래서 다른 무엇보다도 부모가 나의 참 생존을 책임져주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려주기를 바랍니다. 부모가 아니면 어떤 것에도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춘기가 지나고 어른이 되면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도 알았고 어디서 왔는지도 알게 됩니다. 자신은 인간이며 진화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신과 같은 존재로 믿습니다. 이제 자기 생존을 자기가 책임져야 합니다. 그래서 돈과 먹는 것과 힘에 의존하게 됩니다.
그것이 행복이라 믿게 됩니다. 행복이 자신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려줄 부모를 믿는 것이 아닌 부모가 알아서 챙겨주어야 할 것들로 변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루카 복음의 행복 선언입니다. 마태오복음의 진복팔단과는 다르게 루카복음은 세속-육신-마귀를 이기고 청빈-정결-순명의 덕을 쌓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곧 세속은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육신은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마귀는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로 극복됩니다.
우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모욕받고 중상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세속-육신-마귀를 따르면 불행하고, 청빈-정결-순명을 추구하면 행복하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요즘 이 복음이 아무 힘을 쓰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사람들이 돈을 행복이라 여기고 배부름을 행복이라 여기고 명예를 행복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이 그렇게 믿게 되었을까요? 어린이 때 가졌던 진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자신을 생존하게 만드는 것들보다는 부모를 행복으로 여깁니다. 부모가 생존까지 책임져주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부모를 바랍니다. 아기가 음식을 씹어서 식물인간이 된 엄마에게 먹이는 예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른이 되면서 자신도 창조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의 생존을 자신이 책임질 수 있다는 교만함에 사로잡힙니다. 그래서 더는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 자신의 신으로서 스스로 생존을 책임지려 합니다. 그래서 행복의 목적이 자신의 출처가 아닌 자기를 생존시켜 줄 대상들로 바뀌게 됩니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이 행복입니다. 아기들은 아는데 어른은 모릅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의 창조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자기 생존을 책임지려 하는 게 고통입니다. 아이가 부모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생존을 위해 발버둥 치는 일은 고통스럽게 보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부재를 잊기 위해 먹고 토하고 하는 것과 같은 삶을 삽니다. 그렇게 탈진해버립니다. 정 안 되면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합니다.
다행히 저는 어렸을 때 행복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고 살 수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는 물론 생존에 관련된 것들이 행복이라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을 추구하다 보니 더 공허하고 배고프고 행복에서 멀어짐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은 결국 그런 것들을 추구할 필요가 없게 만드는 신을 창조자로 믿는 방법뿐입니다.
나의 삶의 궁극적 목적이 행복임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나의 출처인 창조자 하느님을 찾아냅니다. 그분이 아니면 결코 그 목적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고갱의 대작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를 봅시다. 인간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담은 이 철학적인 작품은 초월의 경지에서 인생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고갱이 이 작품을 그릴 때, 거의 자포자기 상태였습니다.
고갱은 타히티라는 낯선 곳에서 자기만의 세계에 몰입했지만, 그곳에서의 삶 역시 녹록지 않았습니다. 타히티에 온 지 6년째 되는 해, 딸이 폐렴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이 무렵 자신의 건강도 나빠졌으며, 경제적으로도 어려워 완전히 절망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는 그가 자살 결심 후 그린 대작입니다.
“저는 용기도 돈도 떨어졌습니다. 다락방으로 올라가 목에다 밧줄을 메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엄습해 옵니다. 저의 발목을 잡는 것은 오직 그림뿐입니다.”
이 작품은 오른쪽의 탄생을 시작으로 왼쪽은 죽음으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고갱은 늦은 나이가 되어서 그가 죽고 싶은 이유는 실제로는 돈 때문도, 건강 때문도 아닌 자기 정체성을 알지 못하는 것임을 깨달은 것입니다.
우리도 너무 늦기 전에 우리 존재의 행복은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아는 것에 있음을 잊지 말고 내 영혼의 창조자를 믿으려 노력합시다. 그래야 세속-육신-마귀의 집착에서 멀어져 자유롭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집착이 사라져서 그것으로 이웃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러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기반이 바로 그분이 참 행복을 어떻게 찾을 수 있었는지에 대한 요한복음의 이 문장에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당신 손에 내주셨다는 것을, 또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나왔다가 하느님께 돌아간다는 것을 아시고, 식탁에서 일어나시어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들어 허리에 두르셨다. 그리고 대야에 물을 부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고, 허리에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 시작하셨다.”(요한 1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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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유시화의 글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그분의 책 중에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 좋은지 나쁜지 누가 알겠는가?’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우리말에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이 아니라는 말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불행해 보이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남이 보기에는 행복해 보이지만 불행하게 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렸다.’라고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의 떡이 커 보인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2005년에 ‘ME’ 주말을 다녀왔습니다. 그 뒤로 엠이 모임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엠이는 결혼한 부부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대화하며 보다 행복한 부부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모임입니다. 결혼하고 부부가 되어 가정을 꾸미는 것도, 저처럼 사제가 되어 독신으로 사는 것도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면 모두가 감사할 일입니다.
신학생 때는 사제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보좌신부 때는 본당신부가 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본당신부 때는 보좌신부가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작은 본당에 있을 때는 모든 것이 갖추어진 성당에 있으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20년이 지나서 안식년을 하면 행복할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았습니다. 행복은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어진 순간을 감사드리고, 그 시간에 충실한 것이 행복이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아니듯이 행복은 결코 내가 원하는 것을 채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이고, 행복 역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의 제1독서는 우리가 늘 추구하지만, 그것으로는 얻을 수 없는 행복의 조건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현실의 땅에 발을 딛고 있지만, 마음은 미래를 볼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욕심, 욕망, 출세, 성공, 권력, 명예’와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얻기 위해서 불꽃 속으로 날아드는 불나방처럼 모든 것을 불태우려 합니다. 하지만 그 끝은 ‘허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행복을 이야기하십니다. 그것은 진흙 속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워내는 ‘연꽃’과 같습니다. 시련 속에서도, 절망 중에서도, 고통의 한 가운데서도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 것이 진정한 행복입니다. 행복은 어떤 조건이 채워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물론 행복은 소유에 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비록 가난할지라도, 병중에 있을지라도, 시련과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행복하다고 하였습니다. 많은 재물을 가졌을지라도, 높은 자리에 있을지라도, 많은 능력을 갖췄을지라도 하느님을 떠나 있으면 행복하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행복은 감사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언제나 감사하십시오. 항상 기도하십시오. 늘 기뻐하십시오."라고 권고하였습니다. 반면에 불행은 불평의 문으로 들어온다고 합니다. 매사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한 사람은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능력이 있어도 행복하지 않습니다. 제가 아는 분은 노래도 잘하였고, 말도 잘하였고, 외모도 잘 생겼습니다. 제게 없는 것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런데 행복해 보이지 않았습니다. 일이 많으면 많아서 힘들다고 했습니다. 일이 적으면 무시당한다고 원망했습니다. 상사에게는 대화가 안 된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젊은 직원에게는 예의가 없다고 불만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고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늘 곁에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원망과 불평이 가득한 사람 곁에는 행복이 머물 수 없습니다. 행복해지고 싶다면 감사의 문을 활짝 열면 됩니다. 계속 행복해지고 싶다면 불평의 문은 꼭 잠가 놓으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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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6,20-26: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오늘 복음은 참된 행복을 가르쳐 주신다. 루카는 네 가지로 표현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20절) 이것은 가난하다고 해서 모두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한 사람은 죄에서 가난한 사람, 악덕에서 가난한 사람, 세상 우두머리에게 빼앗길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다(요한 14,30 참조). 부유한 분이셨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해지신 그분처럼(2코린 8,9 참조)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우리가 몸과 마음, 모든 힘을 다하여, 가진 것을 다해서 하느님께 충실하고 불우한 이웃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생활 때,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는 바보스럽게 보일 수 있다. 그것은 영원으로 그리스도께서 갚아주실 것이다. 물론 현세의 삶이 풍요롭고 행복한 것은 좋은 것이고 하느님께서도 원하신다. 문제는 하느님과 세상의 가치관이 마음에 어떠한 순서로 정리되어있느냐에 달려있다. 항상 하느님께서 우리의 첫 자리를 차지하고 계신다면 모든 것은 잘 되어있는 것이다. 반대로 재물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하느님께나 인간에게나 제대로 사랑을 실천할 수 없다.
우리는 하느님을 향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진정으로 울 줄 아는 사람, 하느님의 아들 때문에 박해도 당할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살아야 한다. 하느님 앞에 가난하고 굶주리는 사람들은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살 수 있다. 우는 것도 자신의 잘못 때문에, 나의 잘못으로 하느님을 떠나는 나 자신을 위하여 진정으로 울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울어줄 수 있는 그러한 삶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부유하다는 것은, 마음이 세상의 일로 차 있으므로 하느님이 그 안에 들어가실 수 있는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세상의 일에 즉 하느님의 뜻에 역행하는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한 삶 때문에 결정적으로 슬픔을 맛보게 되리라는 말씀이다. 복음에 나오는 불행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형벌을 뜻하며, 애통하여 소리친다는 뜻이다.
우리 신앙인들의 바람직한 태도는 나쁜 일을 하지 않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부자 청년의 비유에서 보듯이, 어렸을 때부터 계명을 잘 지켰던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가서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예수님을 따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의 삶을 통해서 적극적으로 다른 사람을 용서하며 선행을 하는 데 있다. 이렇게 진정으로 하느님 앞에 행복한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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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참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20-21)
이 말씀은, 구원받는 방법에 관한 ‘구원론’입니다. <‘행복하여라.’라는 번역 때문에 ‘행복론’으로 오해하는 이들이 많은데, 여기서는 ‘행복하여라’보다는 ‘복되어라.’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복’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복, 즉 ‘구원’을 뜻합니다. 뒤에 있는 ‘불행 선언’은, “그렇게 살면 멸망한다.”라는 경고 말씀입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라는 말씀은,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과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 모두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실제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위로의 말씀’이 되고, 스스로 가난을 선택한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말씀’이 됩니다. 이 말씀은, “가난하니까 행복하다.”도 아니고, “가난하니까 구원받는다.”도 아닙니다. 구원은 ‘가난’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에서 옵니다. 가난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축복의 원인이고 이유입니다. <사실 가난 자체는 불행이고, 악입니다. 가난을 극복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선입니다. 그런데 그게 혼자 힘으로는 안 될 때가 많으니, 공동체가 함께 노력해야 합니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라는 말씀도 앞의 말씀과 뜻이 같습니다. ‘굶주림’도 고통이고, 악입니다. 우리는 ‘굶주림’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는 현실을 외면하고 도피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종교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남보다 가난한 사람도 없고, 남보다 부유한 사람도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가난과 굶주림’은 하느님의 벌이 아니라는 뜻도 들어 있습니다. ‘부유함’을 ‘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눈에는 ‘가난함’이 ‘벌’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편견이고, 오해이고, 교만입니다. 인간 세상의 ‘부익부 빈익빈’이나 ‘양극화’ 같은 불평등은 악입니다.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루카 6,24-26)
여기서 “불행하여라.”는 “멸망하게 될 것이다.”, 즉 “너희는 지금 멸망을 향해서 가고 있다.”라는 경고입니다. 하느님을 섬기지 않고 재물을 섬기면서, 그리고 물질적인 부유함을 누리면서, 그것을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많고, 그렇게 사는 것을 목표로 삼고 그렇게 살기 위해서 애를 쓰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부유함은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힘으로 작용하고, 또 하느님을 잊고 살게 만들기 때문에, 그 부유함은 ‘악’이고, 사탄의 함정일 뿐입니다. (물론 부유하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그렇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고, 구약성경의 ‘욥’처럼 예외적인 경우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제 현실에서는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광고에서 자주 듣는 “부자 되세요!”라는 말은, 축복이 아니라 저주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은 세상도 또 세상 안에 있는 것들도 사랑하지 마십시오. 누가 세상을 사랑하면, 그 사람 안에는 아버지 사랑이 없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곧 육의 욕망과 눈의 욕망과 살림살이에 대한 자만은 아버지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온 것입니다. 세상은 지나가고 세상의 욕망도 지나갑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은 영원히 남습니다.”(1요한 2,15-17)
예수님의 말씀에서,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라는 말씀은,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 있는 아브라함의 말에 연결됩니다. “얘야,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루카 16,25) 이 말은, 이 세상에서의 처지와 저 세상에서의 처지가 정반대로 바뀐다는 단순한 뜻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 사랑 실천을 안 한 사람은 저 세상에서 받을 것이 없다는 뜻입니다. (라자로의 경우에는, 겉으로 드러나게 선행과 사랑 실천을 할 수 없었겠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선행과 사랑을 실천했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렇게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에는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못 받았지만, 저세상에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득 받게 됩니다.) ‘불행 선언’의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라는 말씀도 같은 뜻입니다. 많이 소유하고, 많이 누리면서 사는 사람들이 사랑도, 나눔도 실천하지 않고 저세상으로 간다면, 그쪽 세상에서는 아무것도 받지 못합니다. 따라서 지금 사랑과 나눔 실천을 소홀히 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구원의 복’을 받아 누리기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지금 사랑과 나눔을 실천하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서 누릴 ‘구원의 복’을 미리 준비하는 것입니다. (글자 그대로, 뿌린 대로 거두게 됩니다.) 26절의 말씀은, 세속의 인기와 명예에 취해서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사는 위선자들을 향한 ‘경고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좋게 말하는 것도 문제인데, 그것 때문에 교만해져서 잘난 체하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모든 사람이 좋게 말하는 것이 왜 문제인가? 위선을 위선으로 알아보지 못하고 겉모습만 보고서 칭찬하니까 문제입니다. 그 칭찬과 존경에 우쭐해져서 자기가 무엇이나 된 것처럼 착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도 하고, 죄를 짓는 일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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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구대교구 강수원 베드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마태오 복음의 참행복 선언(마태 5,3-12 참조)은 ‘산상 설교’(5─7장)의 첫머리에 놓여, 시나이산에서 주어진 구약 율법을 완성하는 ‘신약의 새 모세’로 예수님을 내세웁니다. 한편 오늘 루카 복음의 참행복과 불행 선언은(루카 6,20-26 참조) ‘평지 설교’(6,17-49)에 속한 대목으로, 산에서 평지로 내려오시어 병자들을 치유하시고 백성을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하여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이미 시작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각각 네 가지로 구성된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은 대칭을 이루며 서로 그 뜻을 밝혀 줍니다. ‘가난한 이들’이 ‘부유한 이들’과 달리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까닭은, 자신의 미소함을 인정하고 오직 하느님께만 의탁하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그분의 현존과 은총 속에서 진실하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특히 저 먼 미래의 무엇이 아닌 “지금”(21.25절)의 삶을 잘 살피고, 하느님 없이 자만자족하는 부자가 되기보다는 그분께 희망을 두기에 당장의 불편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이겨 낼 줄 아는 ‘스스로 가난하게 된 사람’, 곧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상속자가 되라고 우리를 초대합니다.
부유하고 즐겁기만 한 삶에 익숙해진 이는 그것을 잃어버릴까 늘 두려워하고 불안해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르는 데 필요하다면 스스로 세상의 가치를 내려놓는 ‘결핍’에 익숙해진 신앙인은(제1독서 참조), 세상일에 일희일비하지 않으며 평정심과 확신을 잃지 않습니다. 오직 하느님께서만 주시는 그 온전한 ‘자유’를 현세에서부터 미리 누리며 살다가, 장차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우리야말로 참으로 ‘행복한 사람’들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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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서북원 베드로 신부님]
<참 행복>
어느 때 가장 행복하십니까? 저는 사제로서 신자들이 기쁘게 웃으면서 성당에 나와 기도하고, 성당을 자기 집처럼 돌보며 돌아가는 뒷모습을 볼 때 참 행복합니다. 항상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가 있는 자리에서 먼저 행복해지려고 합니다. 내가 기쁘게 살아야 신자들에게도 기쁨을 전해줄 수 있으니까요.
철학자 <쇼팬하우어>는 행복은 모든 인간의 마음속에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내가 하루 한 끼를 굶는다고 해도, 청소부로 일한다 해도 내가 기뻐서 하면 행복한 것입니다. 하늘 나라에서 지켜보고 계실 제 은사이신 배문한 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람에게는 세 가지 길이 있다. 가는 길, 가고 싶은 길, 가야 할 길. 이 세 길이 하나가 된다면 그 사람은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그때는 잘 알지 못했지만, 지금은 뼈저리게 느낍니다. 어렸을 때부터 사제가 되고 싶었던 나. 신학교에 입학하고 사제가 되어 지금까지 사는 나. 인간이 가야 할 길 중 사제의 길도 참 좋습니다. 가는 길, 가고 싶은 길, 가야 할 길이 어느 정도 일치된 나는 정말 행복한 사람입니다.
간혹 신자들에게 묻습니다. 정말 원하는 길을 가고 있습니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행복을 잘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신앙을 통해 마음을 잘 다스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 안에서 기쁘게 살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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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강영구 루치오 신부님]
<행복한 사람과 불행한 사람>
태풍이 동해안 밖으로 날아갔습니다. 오늘 아침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고 깨끗합니다. 당신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가난이나 부요가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가난과 부요가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이 아닙니다.
더구나 예수님은 가난하기 때문에 행복하다거나, 부유하기 때문에 불행하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은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입니다.
가난의 그릇에 하느님 나라를 담고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는 가난하지만, 하느님과 하늘나라를 차지하기에 누구보다 부유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가난의 그릇에 탐욕을 담아서 불행해집니다.
탐욕은 족쇄이자 늪입니다. 탐욕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생명을 잃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가난한 사람도 부자도 탐욕의 늪에 빠지면 하느님도 이웃도 보지 못하게 됩니다.
당신이 하느님께 귀의(歸依)하고 그분 위에 서 있다면, 가난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습니다. 당신의 가난은 하느님 나라를 담는 그릇이 됩니다.
당신이 부요하다 하더라도 돈과 재물에 기대서지 않고 하느님께 기대어 선다면 자유롭고 행복합니다. 당신의 부유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나누어주는 방편이 됩니다. 하느님께 귀의하고 예수님을 닮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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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완료형의 행복은 불행이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아시다시피 루카복음의 행복선언은 마태오복음의 것과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어떤 것이 주님의 행복선언에 더 가까운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금 성서학 공부를 하자는 것이 아니니 루카복음서의 가르침이 무엇인지에 초점을 맞추어 성찰하면 될 것입니다.
우선 루카복음은 마태오복음과 달리 불행선언이 있습니다. 얼핏 생각하기에 굳이 불행선언을 따로 할 필요가 있을까? 마태오복음처럼 행복선언만 하면 그렇지 못한 사람은 자동으로 불행하다는 것이 될 텐데.
그런데 루카복음은 그렇게 생각지 않은 것입니다. 불행선언을 따로 또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겁니다.
요즘 제 주변의 사람들을 봅니다. 건강이 안 좋은 사람이 참으로 많은데 이런 사람에게 우리는 두 가지 권고를 합니다.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라는 것과 건강에 해로운 것 하지 말라는 것. 그런데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라고 하는 것이 마태오 복음적이라면 건강에 안 좋은 것 하지 말라고도 하는 것이 루카 복음적입니다.
많은 사람, 특히 젊은 사람들이 운동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먹는 것도 안 좋은 것만 골라서 먹는 것 같아 제가 보기에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해도 그렇게 먹으면 지금 당장은 행복해도 병날 것이 뻔합니다.
그래서 저도 술을 먹고 아주 짜게 먹기에 말할 자격이 없으면서도 그런 것 먹지 말라고, 먹으면 이리저리 안 좋다고 충고합니다. 런 사람에게는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라는 것 이전에 건강에 나쁜 것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우선이고, 더 강조해야 할 것입니다.
루카복음도 마찬가지여서, 불행해지라는 저주처럼 들릴 수도 있는데도 이렇게 불행선언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은 같은 이유입니다.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것 놔두고 행복해질 것에 관해서만 얘기할 수 없지요. 그렇다면 루카복음이 얘기하는 바, 우리를 불행케 하는 바로 그것은 무엇입니까?
루카복음에는 “지금”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그런데 똑같이 지금 가난하고 지금 부유한데 지금 부유한 경우는 완료형의 지금입니다. 완료형의 행복은 불행이라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루카복음은 이미 위로를 받았다고 얘기합니다. “불행하여라,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미래와 영원과 이어지는 지금이 있고, 미래와 영원과 이어지지 않는 지금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쾌락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나중에 어떻게 되건 일단 지금 맛있는 것 먹고 보자는 겁니다.
심리학에서 이런 테스트를 합니다. 맛있는 것과 맛없는 것이 있는데 두 가지를 다 먹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것을 먼저 먹는지 테스트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맛있는 것을 먼저 먹는 사람은 미성숙하거나 심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덜 건강하거나 병약합니다. 어린애는 입에 쓴 약은 뱉고 입에 단 사탕은 먹어 나중에 이빨이 빠지지요.
나는 어쩔 것인가? 영원으로 이어지는 지금을 살 것인가, 당장의 쾌락이나 즐거움을 좇는 지금을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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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행복과 불행>
루카 6,20-26 (참 행복, 불행 선언)
그때에 예수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며 말씀하셨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사실 그들의 조상들도 거짓 예언자들을 그렇게 대하였다.”
<행복과 불행>
나 그대로
나로 품는
행복
나의 것을
나로 믿는
불행
나를
이루어가는
행복
나에
고여 있는
불행
나 너머
너와 함께
행복
나 안에
나만 홀로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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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렸을 때, ‘제비가 낮게 날면 비가 온다’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실제로 하늘 높이 날던 제비가 땅에 가깝게 비행하는 것을 보게 되면, 곧 비가 내렸습니다. 그래서 이 제비가 날씨를 예측하는 특별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런 재주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곤충 때문이지요.
제비는 곤충을 잡아먹기 위해 날아다니는데, 비가 오기 전에 습도가 높아지면 곤충의 날개도 습기 때문에 무거워져 높이 나는 것이 아니라 낮게 날 수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곤충을 잡으려는 제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곤충이 많은 땅에 가깝게 비행해야 할까요? 아니면 곤충이 전혀 없는 하늘 높이 날아야 할까요?
비가 오기 전, 습한 날에 땅 가깝게 비행하는 이유는 이렇게 ‘곤충’ 때문이었습니다.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단지 곤충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아서 제비가 날씨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다고 착각할 뿐이었습니다.
우리 인간의 능력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우리는 종종 사람의 능력에 대해 과대평가합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은 우리 눈에 직접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때문입니다. 단적으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지 않았다면 그런 능력을 어떻게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문제는 자기의 힘만으로 얻었다는 착각 속에, 언제나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행복과 불행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4가지 행복은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입니다. 뒤이어 오는 불행은 4가지 행복을 뒤집은 것으로, 부유한 사람, 배부른 사람, 웃는 사람, 칭찬받는 사람입니다.
이를 듣고 어떻게 가난한 사람, 굶주리는 사람, 우는 사람,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할까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무조건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하여 가난하고 굶주리고 우는 사람 그리고 박해받는 사람이 행복하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상 것보다 주님이 먼저입니다. 그래서 가난할 수 있고, 굶주릴 수 있고, 울 수 있으며, 세상의 반대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은 자기 능력과 재주보다 하느님의 은총과 사랑 덕분에 이루어진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께서 먼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세상의 기준과 판단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보다 주님의 기준과 판단이 가장 중요합니다. 이를 따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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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람의 아들 때문에 행복하길>
‘옛 생활을 청산하여 낡은 인간을 벗어 버리고 새 인간으로 갈아입은’사람다운 생활을 하는 데 있습니다.(골로3,9-10) 참된 행복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늘을 차지하면 부러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미움을 사고 쫓겨나고 모욕을 당하고 누명을 쓴 사람들을 행복하다고 하시고 오히려 부유한 사람들, 배부르고 웃고 칭찬을 받는 사람들을 불행하다고 하시니 선뜻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부유한 사람은 부 때문에 위험합니다. 그들은 자기 삶의 확고한 기반을 하느님에게서가 아니라 자신의 부에서 찾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얻으려 하기때문에 행복합니다.
그래서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말합니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신 사람입니다.”(니사의 성 그레고리오)
성 베르나르도는 “내 행복은 오직 하느님 곁에 있는 것, 내 주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일뿐입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 때문에”행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가지고 ‘행복하다.’, ‘불행하다’를 말하지 말고 우리 마음에 열성을 기르고 믿는 바에 관심을 일깨우며 천상사물을 갈망하십시오. 어떠한 불행 중이라도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이 행복을 스스로 포기하지 마십시오.”(성 대그레고리오 교황)
시편의 말씀으로 마무리 합니다. “행복하여라! 악인들의 뜻에 따라 걷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들지 않으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사람, 오히려 주님의 가르침을 좋아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밤낮으로 되새기는 사람,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지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1-3).
하느님과 함께 하는 이는 행복합니다. 모두가 하느님 때문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행복하십시오!
마음을 다하여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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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더불어(together) 행복의 여정>
-“행복은 선택이자 발견이요 은총이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루카6,23)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Gaudete et exultate), 바로 ‘현대 세계에서 성덕의 소명에 관한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권고’ 책이름입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 바로 우리 모두의 행복입니다. 누구나 바라는 바 행복일 것입니다. 언젠가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어제의 행복이, 내일의 행복이 아니라 오늘의 행복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권리요 책임입니다. 한번뿐이 없는 삶,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혼자만의 행복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야 합니다. 나만의 행복이 아니라 이웃도 행복해야 합니다.
그래서 더불어 행복하고자 엊그제 많은 분들과 함께 13년전 제 환갑기념 동영상을 나눴고 오늘은 또 2012년도 “수도원 설립 25주년 기념 감사제”때 폭소를 터뜨렸던 참으로 감동과 행복을 선사했던 동영상을 또 나누려 합니다. 흡사 강론 제목을 “행복 예찬”이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행복은 선택이자 발견이요 은총입니다. 누구나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행복을 선택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제 행복기도 한 연이 생각납니다.
“곳곳에서 발견하는
기쁨, 평화, 감사, 행복이옵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행복임을 깨닫나이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행복한 날입니다. 9월은 “순교자 성월”이지만 동시에 “행복 성월”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어제도 참 행복한 날이었습니다.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행복의 발견이요 이 행복을 선택하여 사는 것입니다. 힌남노 태풍으로 내린 폭우로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 따라 동요를 부르며 산책할 때도 행복했고, 엊그제 종일 비내른 날 다음 어제의 청명한 날은 “파스카 신비”를 연상케하여 행복했습니다.
“산을 보면
산처럼 살고 싶고
강을 보면
강처럼 살고 싶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을 살자
밖으로는 성 베네딕도의 산을,
안으로는 성 프란치스코의 강을 살자.”-2022.9.6
불암산 배경으로 강같이 흐르는 불암산 계곡물을 보며 미소를 지으며 읊은 시에 또 행복했습니다. 어제 화요일 3시경시 잠언의 성경소구도 생각납니다.
“행복하여라, 지혜를 찾은 사람! 행복하여라, 슬기를 얻은 사람! 지혜의 소득은 은보다 낫고, 그 소출은 순금보다 낫다. 지혜는 산호보다 값진 것, 네 모든 귀중품도 그것에 비길 수 없다.”(잠언3,13-15)
성전 안, 제 기도 탁자 위에 놓여 있는 시편 성구도 볼 때마다 행복을 상기시킵니다.
“행복하여라, 그는 시냇가에 심겨 제때에 열매를 내며 잎이 시들이 않는 나무와 같아 하는 일마다 잘 되리라.”(시편1,3)
제1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종말론적 분위기를 조장하며 언젠가가 아닌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살아야 하겠다는 의욕을 불러 일으킵니다. 덧없이 흘러가는 세월에 안타까워 할 것이 아니라, 허무에 목덜미 잡힐 것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흐르는 시간보다 앞서 가야지 뒤쫓다 보면 결코 행복하기 힘듭니다. 언제나 시간보다 앞서 갈 때 참행복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제부터 아내가 있는 사람은 아내가 없는 사람처럼, 기뻐하는 사람은 기뻐하지 않는 사람처럼, 물건을 산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처럼,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1코린7,29-31)
현실 무시나, 현실 도피의 이중적 위선의 삶이 아니라, 집착없는 초연한 자유의 이탈의 행복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로 살라는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인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이런 종말론적 행복한 삶이겠습니다. 어둠의 짙은 구름 넘어 늘 빛나는 행복의 태양이신 하느님께 희망을 둘 때, 샘솟는 참행복입니다.
“주님께 아뢰옵니다. ‘당신은 저의 주님, 저의 행복 당신밖에 없습니다.”(시편16,2)
이런 종말론적 삶의 초연한 자세로 오늘 복음을 보면 그 이해가 확연해 집니다. 행복선언과 불행선언이 한 셋트로 제시됨이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의 평지설교 서두 행복선언이 참 장엄합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너희는 배부르게 될 것이다.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오늘이 그날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기뻐 뛰놀며 행복하라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런 가난한 사람들, 낮은 사람들, 작은 사람들에 대한 우대는 하느님의 절대적 자비를 드러내는 표지입니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의 은혜를 고대하라고 모든 이에게 보내는 초대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께 궁극의 희망을 둘 때 궁핍중에도 참 행복임을 깨닫습니다.
이어지는 불행 선언은 바로 회개의 촉구입니다. 행복 선언에 뒤따르는 것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서로 연대하여 나누며 살라는 것이겠습니다. 혼자 부유하지 말고 혼자 배부르지 말고 혼자 웃으며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 너희는 이미 위로를 받았다.
불행하여라, 너희 지금 배부른 사람들! 너희는 굶주리게 될 것이다.
불행하여라, 지금 웃는 사람들! 너희는 슬퍼하며 울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희를 좋게 말하면, 너희는 불행하다!”
이것은 저주도, 형벌의 선고도 아닌, 탄식이며 경고입니다. 회개의 촉구입니다. 행복 선언의 불행하고 불쌍한 이들과 연대하여 나누며 살라는 회개의 촉구입니다. 가진 자들이, 있는 자들이 불행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난한 사람들, 굶주리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며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며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은 나라가, 정치가, 가진 자들이 즉각 실행할 일이기도 합니다.
행복하십시오. 행복은 발견입니다. 행복은 선택입니다. 행복은 은총입니다. 궁극의 행복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혼자의 행복이 아니라 더불어 행복해야 참행복입니다. 살 줄 몰라 불행이요 살 줄 알면, 하느님과 함께 살면 참행복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행복하게 하십니다. 혼자가 아닌 더불어 행복의 여정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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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불행하여라, 너희 부유한 사람들!"(루카6,20.24)
<회개의 때!>
오늘 복음(루카6,20-26)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네 가지 행복선언과 네 가지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의 신원은 '믿는 사람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믿고, 죄 말고는 우리와 똑같은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33년간 사셨고, 3년의 공생활을 통해 하느님을 완전히 드러내 보여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이 지금 여기에서 넘쳐나는 하느님의 나라'이고, 죽음 저 너머에 있는,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인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궁극적인 목적'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궁극적인 목적 안에서 바라보아야만, 곧 믿음 안에서 바라보아야만 이해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예수님 때문에 고통을 받는 사람들이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예수님의 행복선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래야 부유한 사람들, 지금 배부른 사람들, 지금 웃는 사람들, 남들로부터 칭찬받는 사람들이 불행한 사람들이라는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오늘 독서(1코린7,25-31)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형제 여러분,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것입니다. 때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세상을 이용하는 사람은 이용하지 않는 사람처럼 사십시오. 이 세상의 형체가 사라지고 있기 때문입니다."(7,29.31)
역대 가장 강력한 태풍이라는 힌남노 태풍이 지나갔습니다. 자연의 거대한 힘 앞에서 아무 힘도 쓸 수 없고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회개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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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여라, 지금 우는 사람들! 너희는 웃게 될 것이다."(루카 6, 21)
우리가
찾고 있는
행복이 다시금
무엇인지를
묻게된다.
유년시절
가정의 아픔으로
많이 아팠고 많이
힘들었던 눈물의
시간이 하느님을
간절히 찾았던
가장 행복한
시간이 되었다.
살아있기에
울음이 있고
살아있기에
웃음이 있다.
우리의
아픈 울음을
기쁜 웃음으로
바꾸어
주시는 분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사고방식의
반대편에 있는
참된 행복이다.
우리는
너무 많은
앎에 갇혀있다.
안다고 하지만
실상 알지 못한다.
삶의 방식을
다시금
바꾸어 놓으시는
참된 웃음이다.
참된 웃음은
우리의 삶이
선물이 되고
축복이 되게 한다.
행복은 생각 속에
있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며
느끼고 체험하는
모든 것이 행복이다.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시는
참된 행복은
행복이라는
지식에 갇혀
있지 않다.
오히려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눈물도 흐르고
세월도 흐르고
행복도 흐르고
기쁨도 흐른다.
모든 것을
맛보며
삶에 감사하게
되는 우리들이다.
우리의 행복은
하느님과 함께하는
우리의 모든 삶이다.
눈물도
울음도
슬픔도
봉헌한다.
하느님을 찾는
모든 순간이
행복이었다.
행복한 사람이게
하시는 하느님께
오늘을 맡겨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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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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