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영국 여왕의 비극적인 이야기
영국 땅을 밟아본 적이 없는
영국 여왕의 비극적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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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종종 왕비를 화려한 인물로 기억한다.
금빛으로 장식된 성당에서 거행된 대관식이나
사회 구조를 변화시킨 왕조를 통해 군주는
국가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해왔다. 그러나
12세기의 왕비 나바라의 베렝겔라는 이러한
틀에서 벗어났다.그녀는 키프로스 섬의 작은 예배당에서
잉글랜드 왕비로 즉위했지만, 단 한 번도 자신이 왕비로서
통치해야 할 땅을 밟지 않았다. 그녀의 왕비 역할은
궁정의 권위가 아닌, 조국의 부재, 남편의 부재,
그리고 인정받지 못한 존재로 형성됐다.
그녀는 유럽 역사에서 가장 신화적인 군주 중 한 명인
리처드 1세(사자심왕)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강인한
생존력으로 가장 잘 기억되고 있다.
왕국도 궁정도 없는 왕비와,
실체 없는 결혼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사진을 통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피레네 왕국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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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는 1165년경 나바라 왕국에서 태어났다.
현재 스페인의 자치 지역인 이곳에서 그녀는
나바라 왕 산초 6세와 카스티야의 산차 사이에서
태어난 장녀였다. 그녀는 세련된 궁정에서 자라며
유럽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았다.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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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5년, 베렝겔라의 아버지는 그녀에게 몬레알 영지를 하사했다.
이는 충성이나 봉사의 대가로 주어지는 토지였으며, 공주에게는
매우 이례적인 특권이었다. 하지만 이는 그녀의 높은 신분을
강조하는 동시에 정치적으로 중요한 왕실 혼인을
준비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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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0년대 후반, 아키텐의 엘레오노르는
나바라와의 동맹에 관심을 가졌다.
이 동맹은 전략적 이점을 제공하며
카스티야와의 연결을 강화할 수 있는 기회였다.
이에 따라 엘레오노르는 베렝겔라와 자신의 아들
리처드 1세의 혼인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비밀스러운 약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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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와 리처드의 혼약은 팜플로나에서 비밀리에 조정됐다.
이 외교적 전략은 리처드와 프랑스 공주 앨리스 사이의
복잡한 기존 혼약을 우회하는 방식이었다.
파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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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프랑스 공주 앨리스와 약혼했으나
스캔들로 인해 파혼했다. 앨리스가 리처드의
아버지인 잉글랜드 왕 헨리 2세의 애인이
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베렝겔라와의 혼인이 가능해졌으며,
프랑스의 반감을 샀지만 베렝겔라가
잉글랜드 왕비로서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제3차 십자군 원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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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9년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리처드 왕은
프랑스 왕 필리프 2세와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와 함께
제3차 십자군 원정을 시작했다.
이는 2년 전에 함락된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한 것이었다.
왕은 빠르게 시칠리아로 이동해
어머니인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에게
베렝겔라를 데려와 줄 것을 요청했다.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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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는 유럽을 가로질러 이동해
리처드가 있는 시칠리아에 도착했다.
1191년 겨울이었다. 그녀는 리처드의
누이인 조안 공주의 보호 아래 머물렀다.
사순절로 인해 혼인이 지연된 가운데,
베렝겔라는 최근 시칠리아의 내전에
개입한 리처드를 둘러싼 혼란스러운
정치를 목격했다.
지중해에서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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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와 조안은 성지로 향하는 배에 올랐으나,
키프로스 해안에서 좌초됐다. 두 사람은
적대적인 섬에 고립되었으며, 당시 키프로스를
통치하던 이삭 코무네누스가 그들의 안전을 위협했다.
이에 리처드는 십자군 원정 경로를 변경하고
군사력을 동원해 그들을 구출했다.
키프로스 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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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베렝겔라와 조안을 구하기 위해
신속하게 키프로스를 정복했다. 그의 승리는
두 사람의 안전을 확보했을 뿐만 아니라,
앞으로 1년 동안 지속될 십자군 원정을 위한
전략적 기지를 확보하는 계기가 됐다.
리마솔에서 열린
왕실 결혼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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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1년 5월 12일, 베렝겔라는 키프로스 리마솔에 있는
성 조지 예배당에서 리처드와 결혼했다. 같은 날,
보르도 대주교가 그녀를 잉글랜드 왕비로 대관했다
십자군 원정에
동행한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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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는 리처드의 십자군 원정에 동행했지만,
대부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안과 함께 지원하는
역할을 했다. 십자군 원정 중에 군주의 아내가
남편과 함께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매우 드문 일이었다.
성지에서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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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원정 동안 베렝겔라는
아크레(현대 이스라엘의 도시)와 같은
요새에서 승리를 목격했으며,
리처드는 최전선에서 전투를 이끌었다.
그녀의 삶의 이 시기는 종교적 신념, 불확실성,
그리고 끊임없는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운 시간이었다.
십자군 원정의 종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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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십자군 원정은 1192년에 예루살렘으로의
기독교 순례를 허용하는 조약을 체결하며 종료됐다.
베렝겔라는 십자군의 영적·감정적 부담을 견디며
유럽으로 돌아왔지만, 지속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위험천만한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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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육로를 선택했고, 베렝겔라는
해상을 통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리처드는 오스트리아에서 포로로 잡혀
결국 신성 로마 황제 하인리히 6세에게 감금됐다.
한편 프랑스에 머물던 베렝겔라는 정치적 고립과
불안정 속에서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의 도움을 받아
리처드의 석방을 위한 거액의 몸값을 마련해야 했다.
필사적으로
몸값을 마련한 여왕
©Public Domain
베렝겔라는 프랑스에서 엘레오노르와 협력하며
몸값 마련 캠페인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정치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도 그녀는
굳은 결의를 보이며 충성을 다했고,
끈질긴 노력과 동맹을 통해
남편을 구출하는 데 기여했다.
외로운 왕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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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1194년 2월 4일 마침내
석방되어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그러나 베렝겔라는 대륙에 남았다.
두 사람의 분리는 그들의 통치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일이었다.
베렝겔라는 왕비라는 칭호를 가졌지만,
실질적으로 리처드와 함께 잉글랜드를
통치하지는 않았다.
프랑스 땅을 놓고
다시 시작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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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는 남은 생애 동안 프랑스와 전쟁을 벌이며 형 존이
잃었거나 필리프 2세가 빼앗은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반면 베렝겔라는 대륙의 영지에서 생활하며 궁정과는
거의 단절된 채 정치적 불안정과 남편과의
거리감 속에서도 왕비로서의 지위를 유지했다.
교황의 재회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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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셀레스티노 3세는 리처드에게 혼인 서약을
지킬 것과 왕비에 대한 충실함을 요구하며 개입했다.
교황의 명령으로 인해 베렝겔라와 리처드는
일시적으로 재회했고, 두 사람은 정기적으로
함께 교회를 찾는 모습이 목격됐다.
사자심왕의
마지막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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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9년 3월, 리처드는 프랑스 리무쟁 지역에서
사순절 기간 동안 반란을 진압하려 했다.
그는 작은 성채인 샬뤼스-샤브롤을 포위했으나,
3월 26일 석궁 화살에 어깨를 맞았다.
상처는 급속히 괴사하기 시작했다.
남겨진 왕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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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99년 4월 6일, 리처드 사자심왕이 사망했다.
베렝겔라는 포위전이나 그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다.
그의 죽음으로 그녀의 공식적인 왕비 지위는 끝났으며,
정치적 지원이나 궁정에서의 영향력을 잃은 채 과부가 됐다.
슬픔에 잠긴
과부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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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는 리처드의 죽음을 깊이 애도했지만,
왕실 행사에서 거의 주목받지 못했다. 그녀는
자식이 없었고 외국 출신이라는 이유로
정치에서 소외됐다. 결국 그녀는 재혼 대신
과부로서 남편을 기리는 길을 선택했다.
여왕의
늦은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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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는 리처드가 살아 있었을 때 한 번도
잉글랜드를 방문하지 않았으며, 리처드는
결혼 생활 동안 잉글랜드에서 머문 시간이
6개월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1220년
캔터베리에서 성 토마스 베켓의 유해가
이장될 때 그녀가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후 잉글랜드를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후계자 없는
결혼 생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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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와 리처드는 자녀를 두지 않았으며,
역사가들은 이들의 결혼이 완전한 혼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자식이 없었던 사실은 왕위 계승에 영향을 미쳤으며,
학자들은 이를 통해 두 사람의 결혼이 점점 더 외교적이고
형식적인 관계로 변모했음을 보여준다고 해석한다.
애매한 지위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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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왕이 사망한 후, 새롭게 즉위한 존 왕은
베렝겔라의 연금을 지급하는 것을 거부했다.
절박해진 그녀는 아키텐의 엘레오노르와
교황 인노첸시오 3세 등 강력한 동맹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며 존에게 압력을 가했다.
교황의 최후통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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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은 존 왕에게 최후통첩을 보내
베렝겔라의 연금을 지급하지 않으면
영적인 제재를 가하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세속적 정의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요청은 무시되었다.
배상과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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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6년 존 왕이 사망했을 때, 그는 여전히 베렝겔라에게
4,000파운드 이상의 연금을 지급하지 않은 상태였다.
이는 현대 화폐 가치로 약 650만 파운드(미화 870만 달러)에
해당한다. 새롭게 즉위한 헨리 3세 치하에서 그녀는 마침내
연금을 지급받았고, 오랜 기간 방치되고 빚을 떠안은 끝에
존엄성과 경제적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다.
르망의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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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는 르망에 정착해 그곳의 영주가 되었다.
이는 그녀의 지참금으로 받은 영지 중 하나로,
프랑스 북서부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그녀는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며 존경받는
영주이자 권위 있는 인물로 자리 잡았다.
수도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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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는 1229년에 르망 근처에 레포 수도원을 설립했다.
그녀는 말년에 신앙에 깊이 헌신하며 교회 중심의 삶을 살았다.
1230년 12월 23일에 세상을 떠났으며, 레포 수도원에 안장되었다.
재발견된 안식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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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의 무덤은 1960년 수도원의 복원 작업 중 발견되었다.
이곳에서 나온 유골은 왕비의 것으로 추정된다. 그녀의 유해는
그녀의 모습을 본뜬 석상 아래에 최종적으로 안치되었다.
잊혀진 여왕을
기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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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렝겔라는 오랫동안 잊혀졌지만, 오늘날 그녀는
신앙과 강인함의 상징으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녀의 왕비직은 전통적인 형태와는 달랐으나,
수십 년간 정치적 소외와 개인적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와 헌신을 보여준 강력한 사례로 남아 있다.
출처
(Britannica)
(History of Royal Women)
(University of Winches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