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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
근본 없이 살아가는 삶이 얼마나 허망하고 부유하는지는 경험해보지 않고서는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사 모든 곳에 원인 없는 결과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것을 벗어나는 곳은 신의 영역이며 신의 창조의 순간에만 있을 뿐입니다. 인간은 단지 신의 피조물(被造物, ens creatum) 일 뿐이며 구원의 대상일 뿐입니다. 내가 창조의 주인공이란 정치적 망상이야말로 거짓 인간의 모습이자 온정적 인간을 향한 교리(敎理)일 뿐입니다. 정치는 논의 수문을 열 수 있을 뿐이지 벼를 자라게 할 수는 없습니다. 비료가 벼를 키우는 맞춤 서비스가 아닙니다. 계몽의 거짓이며 모방의 불안이자 눈치의 진실입니다. 자연의 진리를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으로 가려가며 이권을 챙기는 눈치의 세상일뿐입니다. 하다못해 영화조차도 자연스러움에서 벗어나 개념에 의존하는 의도된 계몽적 내용으로 잘 사는 놈과 못 사는 분들을 갈라가며 관객들을 개념에 물들이려 문화라는 수단까지도 표절과 모방으로 오염시켜가고 있는 시절입니다.
문화를 인간의 삶에서 떼어 놓으려는 개념의 욕심이 과다해지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영화를 보다가 감동해 너도나도 손뼉 치기에 여념이 없게 되기도 합니다. 그들에게 심리적 거리는 불가능하기에 현실에서의 면역력 또한 불가합니다. 우리나라 선수가 참여하는 운동경기를 보며 이기라고 목청을 돋우며 소리 높여 외치고 태극기를 흔듦으로써 스스로 애국자가 된 듯 뿌듯한 기쁨을 느끼는 계몽적 혼돈의 시절입니다. 국가대항의 축구시합에서 꼴을 넣으면 아파트가 똑같은 함성으로 떠들썩합니다. 이것이 옳다고 손으로 눈으로 힘으로 잡아채는 순간 인간은 그것을 놓아야만 하는 운명임을 모르고 어리석게도 계속 움켜쥐려 욕망해온 죄과입니다. 그런 행동이야말로 진정 세상의 욕심이며 내 가식(假飾)의 판단을 옳음으로 여기는 근거 없는 고지식함 일뿐입니다. 맹목에 빠지지 않을 근거이자 나 자신 자기답게 살아갈 불안하고 외로운 오솔길은 노력과 인내하는 용기를 요구합니다. 불안과 함께 외로움과 함께 할 때에 삶의 외관이 보이고 그러한 과정을 인내를 가지고 지속해 나아갈 때에 내면의 길이 보이리라고 감히 이야기해봅니다.
인간은 불안과 함께 태어났습니다. 어미의 자궁에서 세상으로 나오는 순간 이미 불안으로 온몸의 세포를 일깨웠기 때문입니다. 따듯한 양수가 터지며 출생하는 순간 불안의 인식으로 유기적 세포들은 힘찬 용틀임과 함께 인간의 삶은 시작되며 그것을 본능에 각인시킴으로써 인간의 운명이 되고 원인의 세계로 들어갈 입구로서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원인과 결과의 일치점이 탄생의 순간입니다. 인간의 불안은 잠자며 꿈에 나타날 정도로 항상적이고 본질적인 요소입니다. 결국 불안을 벗어나려 모든 인간은 활동을 펼쳐왔으며 앎으로 대응하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신의 창조에 인간은 앎의 창조로 대응해온 것입니다.
그 결과 가장 확실한 개념을 발견해냈으니 그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개념의 형이상학적인 의미라고 하겠습니다. 즉 신을 향한 사랑이야말로 진정 인간이 발굴해낸 정신의 여정이자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으로서의 신애(神愛 caritas)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삶은 신을 외면한 삶이었기에 그러한 서구적 개념을 잘못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신의 무한한 사랑의 의미를 현실에서의 물질적 혜택으로서의 사랑으로 여긴 것입니다. 신으로부터 내려오는 사랑에 화답하는 인간의 사랑이 아니라 그저 가만히 있어도 주어지는 선물로서 여겨온 것입니다. 그처럼 눈치는 치열함을 외면하고 열악함을 지향해 온 것입니다. 그것은 어려서의 어미의 사랑이자 가족의 사랑이었으며 이소하지 못하는 유아적 사랑이었습니다.
유아적 눈치에 빠져들수록 모두는 외면(外面)만을 진실로 여기며 내면에 대한 사고(思考)로서의 대상을 애써 회피하려 합니다. 포장이 화려할수록 그 내용물이 천박하다는 이치조차도 거부하는 시절이 되어갑니다. 그것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즉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 시절의 이야기이겠지만 그것이 현실에 잔류하는 아이러니가 작금의 현실이라 여겨지기도 합니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현상들이 회상이 하니라 현실로 나타나는 놀랍고 경이로운 시절을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남을 원망하는 심성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신의 존재근거는 산화(酸化) 되어갑니다. 남의 도움으로 살아가려 할수록 자신의 올바른 삶은 외부 의존적 혼란으로 채워집니다. 자신의 실패를 사회적 책임으로 돌리려는 얍삽함이야말로 진정한 자기 이탈이자 인생을 논한 가치를 스스로 내팽개치는 꼴입니다. 나의 모습은 거울 속에 있는 것이 아니며 요지경 속에 있지도 않습니다.
모두는 이념적 부추김의 유혹에 빠져들고 권력자의 따듯한 손길에 잦아들며 인간이 갖추고 살아가야 할 불안을 남에게서 동냥해 잠재우려 애씀으로써 스스로 일구어내는 용기의 인간을 회피하고 있는 시절입니다. 모두가 인생을 방황으로 시작합니다. 내가 없고 나의 존재가 없으며 내 삶의 앎에 대한 가치조차도 모르며 살아가는 엄벙덤벙 시절입니다. 오직 경제를 기준으로 가치를 정하고 이념을 지향함으로써 인간의 질서를 스스로 파괴하기에 모두는 인간의 탈을 쓴 먹이 앞의 동물로 변해가는 시절입니다.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겠다는 달콤한 유혹은 애정 어린 속삭임으로 공수표의 메아리로 세상에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경제를 근거로 하는 빌딩들이 올라갈수록 사회는 황폐화되어가고 인간의 인간을 향한 정서는 삭막해져가며 내로남불의 인생을 살아갑니다.
표절과 모방으로 나도 문화인이고 부자가 될 수 있다고 큰소리치며 공권력조차도 거기에 동조하기에 바쁩니다. 어찌해야 할지도 자신의 존재가치도 모르며 우왕좌왕하는 세상입니다. 모두는 상대를 인정할만한 인정과 스스로의 자격이 부족하다 못해 전무하다 보니 극악함을 보이면서도 적폐 청산을 부르짖는 이상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정하는 인정만이 넘쳐납니다. 그것은 정치권의 의도된 행동이라기보다는 시민들 모두의 자발적 행동이기도 합니다.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질을 갖추기보다는 내 욕심의 본능이 시키고 바라는 것을 지고지순의 가치로 여기는 유아적이고 단편적인 생각의 개념에 갇혀있기 때문이라 하겠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잘못되고 편파적인 교조적 개념 교육이 낳은 결실이기도 합니다. 한자교육을 할 필요가 없다는 인식에 빠져 아이들에게 그나마 남아있는 원류로서의 한문에 대한 문화적 접근도 차단했습니다.
언어로서의 문자의 뿌리를 지워버리기에 여념이 없었던 정치적 인간들이 영악하게도 어린 철부지들의 투정을 그들의 정치논리로 받아들임으로써 통치의 영악함으로 집권하려는 어리석음의 자해를 스스로 벌인 결과들입니다. 결국 그들은 성공했으며 그 시절은 시작되었습니다. 편리와 간편함에 물들어 개념에 빠진 어른들이 탄생한 것입니다. 자연으로서의 부모의 사랑을 지워버리고 거기에 허공을 부유하는 추상과 상상의 개념들을 가득 채움으로써 부모로서의 사랑의 의미조차도 모르는 과보호 사회를 만들어냈습니다. 근본 뿌리를 제거해버린 사회구조와 거기에 영합하는 시민들의 영악함이 만들어내는 혼돈의 사회를 우리는 살아가야 할 운명입니다.
결국 정치적 개념 교육이 인간의 삶을 지배함으로써 우리는 명사(名詞, noun) 적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과거의 자연과 함께 했던 형용사(形容詞, adjective) 적 사회를 벗어나면서 또 다른 개념으로서의 명사(名詞)를 도입해 살아가야 할 운명입니다. 영혼의 섬광이 아니라 개념의 순종에 처해 있습니다. 개념을 현대사회는 언어로서의 기호로 여기고 있으나 아직도 우리는 진리로서의 로고스로 여기는 실정입니다. 언어라는 것을 기호로 이해한다면 그러한 앎은 결국 상징적인 것이 될 뿐입니다. 상징성 즉 추상적 세계를 현실 세계로 인식한다는 것을 우리는 우상숭배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개념에 빠질수록 인간의 내면적 불안 심리에서 우러나오는 허접함은 더욱더 집착을 몰고 오며 우상숭배에 빠져들 뿐입니다. 안타깝게도 그것은 신(神)도 아닌 배움도 아닌 정치에 대한 우상으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모두는 냄비 속 개구리의 운명일 뿐입니다. 냄비를 벗어나 광활한 불안의 자연을 외면해온 대가(代價)입니다.
그것이 정치적 이념에 될 때에 사회적 고통은 시작되며 잘 사는 인간의 꼴을 보기 싫어하는 무지한 인간들의 얼굴이 넘쳐납니다. 얼굴의 모습이 경직된 채로 신념에 차서 나대는 꼴이야말로 진정 악마의 얼굴이겠으나 공짜심리에 쌓여 투쟁을 인생의 길로 여기는 시민들 또한 거기에서 신념을 배우고 개념으로 살아가려 자원하는 시절입니다. 모두는 심리적 거리가 무슨 이야기인지 관심도 없으며 오직 신념의 유대(紐帶)만을 유지하기 위해 불안을 투쟁으로 전환시킴으로서 이웃을 개념으로 바라보고 고용주를 갑을 관계로 바라보도록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내 능력으로서의 시민이 되기보다는 시류에 편승하는 영악함을 능력으로 인정해 달라고 아우성치는 꼴입니다. 이런 현상을 통해 권력자들은 무식(無識)을 권력 연장의 수단으로 삼으며 무지한 전위부대로 대열을 정비하고자 애씁니다.
스스로가 정의사회를 실현하겠다는 군상들에게 어느 누가 함께 공조해나가자고 손을 내밀 것이며 질서 있는 사회를 만들어가자고 말을 걸겠습니까. 모두는 자업자득이며 스스로 만들어낸 창조적 질서이기에 우물 안 개구리가 우리의 본성임을 모를 뿐입니다. 어미의 품 안에서 평생을 유아적으로 살아가야 할 운명의 인간들입니다. 그것이 본성이며 본성을 넘어 천성으로까지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따듯한 온실 속 화초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과거 없는 사회는 없고 과거에 잘못 없는 현실은 없습니다. 모든 과거사는 현대사라고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모두는 과거를 청산해야 하고 적폐를 무너뜨려야 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겠으나 그것은 인식의 차원이지 실천의 차원에서의 부관참시(剖棺斬屍)는 인간의 도리를 벗어난다고 하겠습니다.
망국의 매국노이자 을사 5적 경술 9적 친일반민족행위자로서 역사적 오욕을 불러온 이완용을 우리는 역사책에서 무수하고 배우고 확고하게 낙인찍어 왔습니다. 그들에게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고 개념 교육에 몰두해 왔습니다. 그 이외의 어떠한 시각도 용서하지 않는 철저한 배타적 적폐 청산을 시행한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합니다. 아직도 적폐 청산이 덜 되었다고 주장할 정도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끈질긴 집념이자 원망의 대상을 향한 끝없는 질타의 모습이라 하겠습니다. 누군가를 원망의 대상으로 선정해 그들만을 질타하고 매국노로 몰아감으로써 당시 그 이외의 모든 국민들과 정치권력자들이 망국의 책임에서 벗어나는 희한한 일을 우리는 역사의 기록으로 각인시켜온 것입니다.
과연 그처럼 이 세상에 올바른 진리가 있어 그런 진리에서 벗어난 잘못된 인간들만 단죄하면 세상은 진리가 강물처럼 넘쳐나는 훌륭한 삶의 세계가 펼쳐지기라도 한다는 듯이 잘못된 개념 교육을 어려서부터 뿌리 깊게 받아온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개념의 오류이자 남 탓하는 심성을 어린이에게 심어주는 근본 뿌리가 잘못된 교육입니다. 이것은 분명 개념 교육이라고 할 만한 대표적 사례이자 적폐 청산과 전교조적 개념 교육이며 근본 뿌리로서의 한문 폐지를 주장하는 어용(御用)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분명 우리 모두는 나라를 잃는 망국의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정치로서의 유교적 사회가 500년을 지속하면서 과연 아무런 부패 없이 잘 이끌어왔는데 갑자기 이완용이가 일본과 모략해서 나라를 팔아먹은 것처럼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잘못된 시각을 반영하는 대표적 사례라 할 만합니다.
분명 그 당시의 정치권의 무능력은 극한에 이르렀고 역사적으로 모든 집단이 그러할 경우 멸망했으며 혁명이 일어나서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는 것이 당연한 역사적 현상이겠으나 우리의 현실은 유교적 인의예지에 물들었기에 오히려 그런 애국적 혁명에 백성 모두의 참여를 불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후의 역사관조차도 그런 혁명의 위대함을 국민적 시각에서 지우기에 급급했습니다. 혁명을 철저히 배제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이미 이웃나라들의 탐욕의 대상으로 바뀌었기에 녹두장군의 혁명조차도 악랄한 중국과 더욱더 극악한 일본군들에게 무참하게도 짓밟히고 수 천 명이 한 전장 터에서 피 흘리며 학살당함으로써 혁명으로 완성되지 못한 전례가 그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을사 5적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갑오 동학 농민전쟁의 혁명정신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국민들의 믿음의 신앙으로 새겨야 했으나 어리석게도 우리의 신앙은 거기에서조차도 편리하고 간편한 눈치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원망의 대상을 선정하고 질타하는 이상한 방향으로 자리 잡았던 것입니다.
이완용이를 원망하며 오적이고 구적만을 목청껏 부르짖었지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기 두려워하며 남 탓하는 심정만을 교육으로 양산해내는 어리석음을 반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탓이라는 주관적 용기는커녕 객관적 식견(識見)조차도 불안의 증폭으로 사회적 매도(罵倒)의 대상으로 누구나가 여겼습니다. 불안에 본능적 거부감을 가지고 살아온 백성의 모습이자 현실의 숙명(宿命)입니다. 겉으로 보기 좋은 모습을 보이면서 속으로 썩어 들어가는 과일 모양새입니다. 그것을 교육 특히나 역사교육이라고 가르치는 정도가 아니라 개념 교육의 관점을 가지고 이리저리 권력자라는 인간들이 자기 입맛에 맞게 바꾸기를 마다하지 않고 있는 실정입니다.
진정한 출발을 원하고 올바른 삶의 철학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내 내면의 영혼이 올바른 시각과 함께 잘 연마되고 있는지가 우선이겠으나 우리의 심성은 남을 원망의 대상에 올려놓고 자신의 무능을 탁월한 능력의 반열에 올려놓는 거꾸로 사회를 만들어가고 있는 시절입니다. 가운데 중심이 뻥 뚫린 엽전(葉錢)처럼 내면에 바람이 들락거리는 헛기운으로 가득한 한량(閑良)처럼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자기답게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의 시야는 과거의 오천 년을 되돌아보아야 하며 현실의 광활한 삶의 영역에서 한 분야를 책임 있고 소신 있게 살아가기 위해 불안의 용기를 갖추어야 할 것입니다. 허접하게 내일의 운명도 알지 못하면서 미래를 설계하는 무지한 모습은 선전선동에 가까우며 거기에 심정적 동조를 보태는 시민들 또한 레밍 쥐의 모습처럼 보입니다. 배움 없고 식견 없는 삶이 가져온 현상이자 올바름을 깨닫기에는 너무나도 허접하고 가치 없어 보입니다. 가치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내 노고의 땀을 흘려 서서히 이룩해가는 세계입니다.
과거에서 배움을 얻으려는 마음 자세가 아니라 원망과 한에 휩싸여 질타와 적폐 청산으로 몰아가려는 투쟁적 시각이야말로 과거를 부정하고 자신의 현재를 소멸시키는 비뚤어진 심성에서 우러나오는 한풀이식 거짓 놀음이자 잘못된 삶의 선택이라 여겨집니다. 최소한 100년도 안된 역사적 사실에 대한 판단은 모두 거짓이며 선전선동을 위한 이념의 적폐임을 우리는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선진사회로 나아가는 지름길이자 시민들의 화합을 가져올 기반이란 생각이 듭니다. 소비적 세계는 그러한 상황을 오직 물질적 가치에만 몰두함으로써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고 스스로의 가치 창조에서의 무능력을 커버하고자 합니다. 그럴수록 사회는 정신적 가치를 벗어나 물질 만능주의에 빠져들 뿐입니다.
인간의 모든 활동으로서의 운동은 결국 자신이 출발한 곳에서 끝이 날 뿐입니다. 자연 또한 결과가 원인으로 돌아가며 끝나는 끝없는 윤회의 고리에 포함될 뿐입니다. 헛된 에너지에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혀가면서도 우월함에 빠져드는 어리석음의 악순환의 고리는 안타깝게도 지속되고 있어 보입니다. 현실의 죄인에 대한 질타에 앞서 현실 인식이 우선이며 그보다는 시대적 인식이 더욱더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삶을 내 고집과 아집으로 마감하기에는 우리의 시선은 지평선까지 걸쳐있습니다. 내 삶의 지평선을 저녁노을로 채울 것인가 아침의 서광으로 채울 것인가 스스로 판단력을 높여갈 때라 생각됩니다. 혼란이야말로 진정 인간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합니다. 불안이야말로 진정 모두를 참여의 마당으로 이끌어가는 합일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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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๑・̑◡・̑๑)갈대생각님 안녕하세요.(๑・̑◡・̑๑)
오늘도 반갑게 반깁니다.
"자기답게 - 5 "
감사히 읽고
감사한 마음 전하고 갑니다.
계절은 또 이렇게 가을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더운여름 보내느라
고생많으셨습니다.
더위와 작별할 수 있는
8월 마지막 수요일~ 기분좋게
마무리 하시기 바랍니다
늘~
함께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๑・̑◡・̑๑)추천"콕"(๑・̑◡・̑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