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안 온지는 한달도 더 된 어느날이었다.
이번 여름은 다른해의 여름보다 훨씬 더 더웠다.더군다나 비 조차도 내리지 않고
있었다. 사람들은 창문을 꼭꼭 닫아 버리고 에어컨을 가동시켰다. 나 또한 에어컨
이 있는 일층 거실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것은 연희도 마찬가지 였다. 여름내내
이층은 비어 있는듯 싶었다. 이층의 베란다는 여전히 연결되어 있었고 창문도 여
전히 열려 있었지만 나는 연희를 보지 못했고 연희도 나를 보지 못했다.
그렇게 칠월이 끝나가고 있었다.
"뭐해?"
연희가 나를 찾아 왔다.
"뭐하기는 너무 더우니까 그냥 맹하니 에어컨 앞에 앉아 있는거지. 너 그런데 오
랫만이다. 한 한달쯤 되었지? "
"응.."
"너 이 집 처음 들어 오니? 맹숭맹수 서 있지 말고 와서 앉아. 참. 냉커피 마실
래? 아얘 물통을 다 냉커피로 채웠다."
연희는 거실 쇼파의 내 옆자리에 앉더니 심각하게 말했다.
"오빠 사고 친다는게 뭔지 알아?"
"사고? 사고 치는게 뭔데? 너 사고쳤니? 그렇구나. 사고 쳤구나. 유리 부셨니? 아님
너무 많이 먹어서 베란다에 금이라도 간거야?"
연희는 이 나이가 되도록 심각해 본일이 별로 없는 아이라서 연희의 표정과 전혀
관계없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나 그만 뒀어."
"뭘 그만 둬?"
"뭐기는 뭐야. 내내 고민해 오던거 있잖아. 의상실말이야. 그거 그만 뒀어. 그런
데 중요한것은 울 엄마랑 울 아빠는 몰라. 나좀 살려 주라. 응? 오빠아~~~~"
연희는 고양이 처럼 얼굴을 나에게 비벼 대면서 칭얼 거렸다.
"언제?"
"어제. 어제가 토요일 이었잖아. 그것으로 그만 뒀어."
"왜 그만 둔건데?"
왜? 라는 질문을 연희에게 한다면 그것은 너무나도 바보 스러운 질문이 될까?
"왜 그만두기는 그만 둔다고 했으니까. 그냥 묻지 말고 처리 해주면 안돼?"
연희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면서 나에게 부탁을 했다.
오랫만에 보는 연희인데 이 부탁을 거절해 말어.
어차피 벌어진 일이었다. 아마도 연희 부모님도 이해를 하실것이다. 내가 나서지
않는다 하더라도 말이다. 하지만 내가 연희 대신에 말해서 연희도 그리고 연희 부
모님도 더 빨리 마음이 편해진다면 내가 말하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 않을거라고
생각했다. 때로는 빨리 결정지어 버리는 것이 가장 좋은 결정일때도 있다. 특히나
그것이 사람의 마음과 관계된 것이라면 더더둑 그렇다.
생각해 보니 연희와 나는 한동안 뭘 하고 지냈던 것일까?
연희가 나에게 의상실을 그만둬야 겠다고 말한데 한달전인데 그리고 나 또한 그만
두는것에 대해서 잠시 동안 생각을 했던 것이 분명한데 나는 어느새 연희를 까마
득히 잊어 버리고 연희의 창도 잊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어째서 잊었던 것일까? 너무나도 더웠기 때문에? 서로들 에어컨이 붙어 있는 거실
에 틀어 밖혀서 여름이 다 가기만을 기다렸을까?
별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나는 연희를 잠시 잊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잊는
다는 것은 잊는 사람보다 더 강렬한 어떤것이 잊어 버린 사람의 자리를 찾이 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사람들은 이별을 두려워 하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이 떠나는
빈자리를 채울 그 어떤것도 평생 나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사람
들은 항상 지금의 것에 연연해 하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빈자리를 만들기를 항
상 주저한다. 하지만 어떤 때는 빈자리를 만들어야 더 큰것이 들어 올수 있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기도 한다. 그렇다. 사실 사람들은 빈자리에 더 큰것이 들어 와
서 채울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동시에 너무나도 큰 자리를 찾이 했었기에 절대로
그 무엇도 채울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안다. 이러한 것들의 비극이라면 그 자
리가 비워지고 다시 채워지기 까지 그 자리가 얼마만큼 큰건지 또는 작은건지를
사람들은 절대 알수 없다는 점이다.
연희에게 있어서 나의 자리는 얼마쯤이었을까.
"내가 말해줄께. 대신에 너 저녁
사라?"
"저녁? 그러지 뭐. 흐흐흐.. 그러지 말고 푸짐한 저녁 만들어 줄까? 나도 신부 수
업해야 하잖어. 돈 나올때도 없겠다 그렇지? 아니다. 차라리 날 요리사로 써주라.
응? 석우야아. 그렇게 하자. 신부 수업도 할겸 동시에 돈도 벌겸. 역시 연희 만
세! 연희는 너무 너무 똑똑해요."
"됐네요. 내가 더위 먹은줄 아시우? 더위라도 먹어야 널 요리사로 쓰는 모험을 하
지 그렇지 않고서야 누가 그런 철딱서니 없는 짓을 하겠니? 에고. 맹꽁아. 신부
수업같은 소리 하지 말고 다른 무엇을 배워봐. 그리고 금새 대신 말해준다니까 단
순해 지는것봐. 끌끌."
나는 연희를 바라보며 혀를 끌끌 찼다.
한동안 잊고 있었던 유희였다. 날은 더웠지만 연희는 전혀 더위먹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까 모 냉장고 선전에 나오는 야무진 고양이의 모습을 그대로 빼다 밖았다라
고나 할까. 앗! 설마. 모 냉장고 선전이라니까 이런 생각도 난다. 그 고양이 뭘
보고 목숨걸고 냉장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 밀었을까? 바로 신선한 생선때문이리
라. 연희가 냉장고속에 고개를 밀어 넣은 그 고양이라면 생선은 바로 난가?
하하하.. 신선한 생선과 생선을 노리는 고양이라 그것도 이렇게 더운날에는 괜찮
은 일이었다. 그리고 내 마음에 꼭 드는것은 그 고양이가 냉장고에 고개를 밀어
넣는데 탤렌트 최진실이 그대로 문을 닫아 버렸다는 점이다. 내용이야 어떻든 내
가 고양이의 먹이가 될 생선이든간에 나는 무사했고 고
양이는 팔에 붕대를 감아야
했다는 것이 가장 나의 마음에 들었다.
"어라? 더위 안 먹었다더니 왜그래? 석우야 이게 몇개?"
연희는 내가 혼자 싱글 벙글 하는것을 보더니 고개를 꺄우뚱하면서 손가락을 두개
펴고는 이게 몇개냐고 묻고 있었다.
"어이. 우여사. 나 더위 안 먹었네. 단지 사는게 갑자기 유쾌해졌을 따름이야. "
"흐응.. 정말 석우가 이상해 졌어. 이런일이 없었는데 말이지. 요즘 나 안만나더
니 연애해? 그런가? 사랑에 빠진거야? 그래? 누구와? 유미란과?"
연희가 여기까지 말했을때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앗차! 지금쯤 유미란이 집앞
에 서 있을 것이다. 한달동안 내가 잠시 잠자리를 거실로 옮기고 연희를 잊고 있
었던 동안에도 나는 연구소에서 내내 유미란을 만났고 그리고 그녀는 그 한달동안
조금씩 나와 친해져서는 이제 우리집에 종종 놀러 오기까기 하는 사이가 되었던
것이다.
이럴땐 어쩐다지? 누구 좋은 묘수 없수?
"어? 내말이 정말인가 보네. 갑자기 표정이 굳어 졌어. 역시 사람은 표정을 속이
지 못하는가봐."
연희가 내내 재미있어 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허리를 쿡쿡 찔러 댔다.
그리고는 다시 말했다.
"나 갈께. 저녁은 언제 살까? 비싼거 먹음 안돼. 알았지? 아. 난 이제부터 시간이
남아 돌아가는 여자니까 내일 어때? 저녁에 시내에서 보자구. "
"그래 내일 보자. 내일 만나서 더 얘기를 해보자. 내일 여섯시 반에 커피숍 칼디
에서 만나자. 어딘지는 알지? "
"알았어."
연희는 손을 흔들고는 집을 나갔다.
휴우. 구사일생이다. 아직 유미란은 오지 않았다. 이럴땐 여자들이 약간씩 약속
시간에 늦는 그런 점이 마음에 든다. 그리고 연희가 나간지 채 오분도 되기전에
유미란이 들어 왔다.
"이 집은 올때마다 매번 문이 열려 있네요. 이 동네 도둑이 없는 거에요. 아니면
석우씨가 강심장이에요? "
"하하.. 제가 강심장이라서요. 슈퍼맨 아시죠? 제가 그 슈퍼맨이에요. "
"그래요? 그럼 대전에서는 어디가 가장 높아요? 서울이야 63빌딩에서 뛰어내려보
면 그 진위를 가릴수 있다지만 대전은 아직도 어디가 가장 높은지 모르겠어요.
음.. 아. 동양 백화점? 그곳이 높아요? 그거 12층이에요? 아님 15층이에요? 하여
간 그곳이 그런데로 높지요? 그곳에서 뛰어 내려 보자고 해야 겠어요. 후후후.."
"미란씨 당연히 뛰어 내릴수야 있지만 제가 슈퍼맨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아봐
요. 그럼 크립톤운석을 어디선가 구해서 악당들이 저를 조종하려 들거에요. 그럼
지구는 누가 지키나요? "
"꺄르르.. 누가 지키긴요. 독수리 오형제가 지키겠죠. 아님 최불암일까?"
유미란은 들어 오자 마자 농담이었다.
유미란은 정말로 상큼해 보였다. 아니 시원해 보였
다. 대전에서는 아직까지는 파
격적이라고 할수 있는 옷차림하며 그 화려한 외모가 덥다는 것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내가 유미란을 세세히 쳐다 보자 유미란이 얼굴을 붉혔다.
"내 옷차림이 이상해요? 난 자연스러운 건데. "
"안 그래요. 눈에 띄어서 그랬을 뿐이에요. 솔찍히 말해봐요. 자신이 매력적이라
고 생각하죠?"
"네에.. 그럼요. 내가 매력적이라기 보다는 남자들의 시선이 그러더라고요. 매력
적이라고. "
항상 솔찍한 여자가 유미란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내숭이 없다는 것인데 그녀는 그러한 그녀의 말투가 사람들을 더욱
더 자극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나 있을까? 비교를 할 생각으로 시작하는 것은 아니
지만 종종 연희와 유미란은 비교의 대상이 된다. 내가 만났던 여자가 오로지 유미
란과 연희여서 그런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마도 나에게 있어서 비슷한 파장으로
내 뒷통수를 꽝! 하고 치는 두 여자가 바로 유미란과 연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하
는 추측만 할뿐이다.
하여간에 유미란이 솔찍한 만큼 연희도 솔찍한 편인데 그 느낌은 확실히 달랐다.
유미란의 솔찍함은 마치 모든것을 흡수해서 깔끔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보이는 솔
찍함 같았고 연희는 그냥 다 들어 내놓는 솔찍함이었다. 그리고 세상을 살아 가는
데는 연희의 그런 솔찍함은 때때로 자신에게 있어서 적이 되기도 한다.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동안 유미란은 자연스럽게 냉장고로
가서 그녀가 물통에 가
득 채워 놓고 갔었던 커피를 꺼내 잔에 붓고 있었다.
"나 뭐 잊어 먹은거 있어서 왔어."
갑자기 현관문이 열리면서 연희가 다시 들어 왔다.
"아.. 나중에.. 나중에 말할께."
연희의 얼굴이 일그러 졌다.
그리곤 연희는 유미란을 쳐다 보더니 금새 현관문을 닫고 나가 버렸다.
이런 낭패가.
유미란은 그냥 웃고 있었다. 연희도 어떤 특별한 감정을 나타내지 않고 돌아 갔
다. 두 여자는 전혀 변함이 없는데 나는 영 기분이 찝찝하다. 마치 내가 두 여자
에게 양다리를 걸치다가 들킨것 처럼 그런 감정이 드는것이었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만 요란스럽게 들렸다.
"내일 연극 보러 안가실래요?"
유미란은 연희가 왔다 갔다는 사실을 조금도 개의치 않고 있었다.
"연극요? 좋지요
앗뿔사. 오늘은 실수를 두번이나 했다.
"그럼 내일 퇴근후에 같이 가요. "
벌써 말해버린것을 취소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과 동시에 약속을
하는것 또한 옳지 않았다.
유미란은 커피를 들고 거실의 창문쪽으로 걸어 갔다.
배꼽이 보일까 말까 싶은 배꼽 티를 입고 있었다. 유미란이 커피를 마시려고 잔을
들어 올릴때 마다 그녀의 미끈한 허리선이 보였다. 마치 벨리 댄스를 추는 중동의
여자 같았다. 몸 선이 다 들어 나는 쉬폰으로 된 옷을 입고 춤을 추는 여자치고
색정적이지 않은 여자가 없겠지만 유미란은 그 이상 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벨리 댄스를 추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속이 보일듯 말듯한 옷을 입은것도 아니었
다. 그녀는 이번 여름 남대문 시장엘 가면 어디에서나 걸려 있을 배꼽티를 입었을
뿐이었다.
"미란씨 지금 유혹 하는거에요? 아니면 제 시력 측정하는 거에요?"
내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둘다요. 재미 있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아셨어요? 제가 장난 치는걸요? "
유미란이 쿡쿡 거렸다.
"미란씨 나는 성인군자가 아니에요. 아시죠? 지금의 그런 행동은 나중에 법정에
가서도 별로 인정 받지 못한다고요."
"법정요? 그곳은 왜가요? 아.. 알겠어요. 석우씨 성인군자가 아닌거 나도 알아요.
그리고 난 성인군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
유미란이 말을 멈추고는 커피를 마져 마셨다.
"내가 탄 커피인데도 맛있네요. 냉커피 마셔 보셨어요? 어때요?"
"걱정 마십시요. 맛있어요. 누구보다 훨씬 잘 타시던데요? "
"네? 누구요? 그게 누군데요?"
아무래도 오늘은 입을 닫고 살라는 하늘의 엄명이 있었나 보다. 왜 이렇게 실없는
소리를 할까.
"아닙니다. 정말로 커피 맛있었어요. "
"그래요. 다행이에요."
유미란은 말
을 마치자 거실 쇼파로 와서 내 옆에 앉았다.
영화 제목으로 치자면 위험한 순간쯤이라고 붙어야 할것이다.
남녀 관계란 결코 여기까지 스톱! 이라는 것은 없다. 경험자는 다 알것이다. 결코
멈춤은 존재 하지 않는 것이다. 멈춤이라기 보다는 폭팔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
린다. 폭팔하고 나야 끝이 나는게 정상이었다.
제기랄.
나는 입속으로 중얼거렸다.
"커피향 좋아하세요? 커피향 나는 입술은요? 제가 처음 전화한날 기억하시죠?"
유미란은 천천히 나에게 말했다.
그리고는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마치 얼음을 입속에 넣은것 같은 기분이었다. 커
피액이 한방울 혀끝으로 떨어 졌다. 문득 소름이 쫘악 끼친는 기분이 들었다. 하
지만 차가운것은 잠시뿐이었다.
에어컨 돌아가는 소리가 점점 더 요란해 지더니 이내 뚝 그소리가 그쳐 버렸다.
"숙달된 조교."
유미란이 키스를 마치고 처음 한말이었다.
"미란씨 또한."
"좋아요 첫번째 여자 얘기를 해보세요."
몇 여자가 남자와 첫키스를 하고 그 과거를 이렇게 흥미로운 얼굴로 물어 볼수 있
을까 싶을 만큼 유미란은 사뭇 진지 했다.
"음.. 첫번째 여자라.. 어떤 점에서?"
"키스. 난 첫사랑의 아름다움 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요. 아니 차라리 처음 자
본 여자에 대해서 물을걸 그랬나?"
유미란은 여전히 진지했다.
나는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 망설이고 있었다.
유미란은 고개를 좌우로 돌리더니 내 눈을 쳐다 보았다.
"석우씨. 나는 말이에요. 인생이 어떤것인지 잘 몰라요. 아마 인생이라는 것을 어
떻게 살아야 한다는 잘 알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있지도 않았을 거에요. 내가 말했
죠. 난 순결하지도 않고 만난 남자도 여럿이에요. 매번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래
서 옷을 벗었어요. 더 솔찍해 지자면 우리도 그런 사이가 될거에요. 아닌가요? 적
어도 사랑이라는 이름은 아닐지라도 욕망이라는 이름으로 그렇게 될거에요. 제가
너무 장담한건가요? 우리는 이러다가 친구로 남을수도 있고 또는 연인이 될수도
있고 결혼을 할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중요한것은 예전에 만났던 첫번째 여자 또
는 첫번째 남자가 아니에요. 그것은 어떤 경우든 마찬가지죠. 언젠가 나는 후회를
하겠지만 그래요. 순결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서 후회를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과거를 뒤돌릴수는 없는 법이에요. 사랑을 시작하면 그 남자 앞에서는 매번 순결
한 것이랍니다. 그게 사랑이에요. 첫번째 여자에 대해서 그 어떤 고민을 할 필요
도 없어요. 중요한것은 지금이고 그를 또는 그녀를 사랑하느냐 마느냐라고 생각해
요. 그리고 사람들은 그것을 깨닿는데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죠."
유미란의 말이 옳았다.
내가 예전에 사랑한다고 믿었던 첫번째 여자를 두려워 해서는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아
직은 유미란에게 내 첫 여자의 이야기를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미
란의 말이 옳듯이 조상님들이 우리들에게 충고해 주었던 절대 침묵 또한 옳기 때
문이다. 유미란은 매번 사랑을 할때마다 스스로는 순결하다고 말하고 생각하겠지
만 그녀의 말대로 언젠가 진짜가 나타나면 후회할것이다. 그것은 상대 남자가 극
복하지 못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그녀 스스로가 매번 가슴 아파할것이기 때문이
다. 그에게 처음으로 줄것을... 이런 생각을 말이다.
"미란씨 말이 옳아요. 하지만 내 첫 여자에 대한 얘기는 나중에 합시다. 반드시
해주겠어요. "
너무나도 분위기가 어색해져 버렸다.
이런 여자들을 페미니스트라고 해야 하나? 페미니스트란 존재 하는 것일까?
내 생각으로는 페미니스트란 존재 하지 않는다. 그런것이 있을 턱이 없다. 그래야
했다. 세상에는 페미니스트란 있어서는 안된다. 그렇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자꾸만
생겨 나는 이유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 이다. 사람들은 그녀들을 공격한다. 지
치고 쓰러질때까지 말이다. 그녀들은 그녀들 자신을 지킬 무기가 필요 했다. 아마
도 그것이 페미니스트란것이 아닐까 한다.
언젠가 나도 유미란에게 나의 이야기를 해주게 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나도 그녀의 이야기를 듣게 될것이다.
한이 많은 여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연극을 보러 가리라고 결심했다. 연희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내 감정은
벌써 유미란과 연극을 보러 가는것으로 굳어져 버려다. 또한 연희와의 약속은 언
제라도 가능할것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유미란을 토닥 토닥 안아 주었다. 그리고 유미란은 아이같이 조용히 웅크리
고 있었다. 이제서야 다시 에어컨 돌아 가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한가로운 여름의 낮이었다.
***********
"어땠어요?"
미란이 나를 툭 쳤다. 우리는 막 연극을 보고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괜찮은데요."
"후후.. 괜찮다라. 이번에도 솔찍히 고백하건데 나는 연극을 보러 다니거나 하지
는 않아요. 단지 영화를 보러 가자고 하기보다 나은것 같아서 한 말이었을 따름이
에요."
나는 괜히 속이 답답해졌다.
"불편해 보여요."
미란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연극이 괜찮았듯이 나도 괜찮아요."
미란은 날씨가 꽤나 더웠음에도 불구하고 팔짱을 끼고는 가슴을 내쪽으로 붙여서
걷기 시작했다.
"커피 할래요?"
다시 미란이 물었다.
여자는 사랑에 빠졌다. 그 시작이 무엇이든지 간에 사랑에 빠진것이다.
커피숍 도토루는 셀프서이브 체인점인데 셀프 서비스라 할지라도 생각보다는 꽤나
괜찮은 곳이었다. 특히나 그곳의 소세지맛은 기가 막혔다.
우리는 카톨릭 문화회관에서 그 윗쪽으로 중구청을 지나 생긴지 얼마 안되는 도토
루에 들어 갔다. 도토루는 어제 연희와 약속한 칼디 바로 앞에 위치해 있었다.
도토루에 들어가면서 다시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아마도 칼디를 본탓이리라.
도토루는 에어컨 탓인지 시원했다.
나와 미란은 왼쪽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뭘 드실래요?"
유미란은 내가 자리애 앉자 마자 발딱 일어 섰다.
"냉커피."
"좋아요. 제가 살께요."
나를 좋아하는구나 느껴졌다.
나는 생각외로 감이 빠른 타입이었다. 살아 오는 내내 그랬었다. 나를 좋아하구
있구나라고 느껴지는 여자가 있다면 그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들의 한결같은 공
통점 또한 있었다. 아까워 하지 않는다는것. 바로 그것이었다.
유미란은 계산대로 가서 계산을 하고 커피를 가지고 돌아 왔다.
"나 또 시작해요."
유미란이 조용히 웃으면서 말했다.
"뭘요?"
내가 되물었다.
"미치는거요. 나같은 종류의 여자들만 경험할수 있는 거죠. 세상 여자 다는 아니
에요. 절대로 그렇지는 않죠. 하여간에 나는 매번 느끼고 있었어요. 내 커다란 불
길이 가만히 있지 못한다는 것을요. 그게 커지고 있어요. 그리고 그것은 평생토록
꺼지지 않죠. 단지 상대를 바꾸거나 그러기는 해도요."
냉
커피에 프림을 부었다. 프림은 흰색을 띄면서 자꾸만 자꾸만 속으로 퍼져 갔다.
"나도 그렇게 되고 싶어요."
유미란은 내 커피잔을 들여 다 보고 있었다.
"프림말이에요. 프림처럼 커피속에 스며들고 싶다고요."
유미란은 지쳐 있는것 처럼 보였다.
"잠깐 실레 해요."
유미란이 자리에서 일어 났다. 유미란은 전화박스 있는 곳으로 가더니 전화를 거
는 모습이 보였다.
"집에 전화 했어요. 어머니가 제 전화기에 대고 메일같이 전화도 안 받고 뭐하느
냐고 절 구박하시거든요. 어머니 말씀으로는 제가 못되서 있으면서도 전화를 안
받는거래요. 후후.. 거 있잖아요. 저는 누구 누구 입니다. 삐소리가 나시면 용건
을 말씀해 주세요. 그러는거요. 나이드신 분들은 전화기에 대고 말씀하시는거 싫
어 하시잖아요. 그러니 우리 어머니라고 다를게 없죠."
"미란씨 어머니는 좀더 현대적이실줄 알았는데 아닌가 보군요."
"네. 아하! 그런 구식 어머니 밑에서 어떻게 저 같은 애가 나올수 있었느냐고요?"
"아니요. 그런뜻은 아닙니다."
"상관없어요. 음.. 이렇게 말하면 될거에요. 자식은 부모의 뜻대로 크지많은 않는
다 이런거요. 뭐 팔자라고 생각할수도 있을거에요. 좋은 대학 나온 딸이 연애를
건 남자가 천하에 둘도 없는 건달이었다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부모님이 말린다 하
더라도 딸들은 열이면 여덟은 짐싸들고 그 남
자와 도망가죠. 세상은 그런거에요."
유미란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녀 자신도 지금의 자신의 처지가 어떤지를 알고
있었다. 미래에 대한 확신도 없었고 더군다나 그 미래가 다른여자들처럼 결혼이라
는 문을 통과할런지에 대한 확신은 더더욱 없었다.
유미란은 곧 화제를 바꾸었다.
"참 연희씨는 잘 있죠?"
어제 유미란이 가고 나서 나는 연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월요일날 약속을
취소해야 겠다라고만 말하고 전화를 끊었는데 내가 연희에게 말하고 끊기까지의
짧은 몇초의 공백속에서 나는 연희의 실망을 들었다.
"네. 어제도 봤잖아요."
"세상의 여자들은 다들 초감각적인 무엇이 있는가 봐요."
"왜요?"
"그건 여자들은 말이에요. 사람들을 만나면 그 첫인상만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될지 또는 미워하게 될지 그 사람과의 미래가 어떨른지 느끼거든요. 더군다나 이
사람은 보물이로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면 그래요, 이것야 말로 보물이로구나 싶은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거든요. 쉽게 말하자면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암
투쯤이라고나 할까요?"
"설마 그럴려고요. 그런데 재미 있는 얘기긴 하네요. 장희빈과 인현왕후라. 미란
씨는 어느쪽이에요? "
"그야 당연히 장희빈이죠. 전 역사를 잘 모르지만 프랑스의 루이 16세의 아내 마
리 앙뜨와네트라는 여자도 사실상은 현명했다라고
들었어요. 그녀가 교수형당한것
은 어쩔수 없는 시대의 배경 탓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요즘 그녀를 새롭게 해
석하는 바람이 일고 있다라고 들었어요. 그러니까 장희빈도 그런거 아니겠어요?
정말로 죽여 마땅한 여자였을까요? 죽은 자는 대답이 없지만 그래도 진실은 어딘
가에는 숨어 있는 법이잖아요. "
"그렇군요. 그런 생각은 하지 못했어요. 사실 난 그런쪽에는 관심이 없어서요. 옛
날에 도덕 교과서에 공산당 얘기가 나왔을때 그당시 사회 풍조가 그랬듯이 저는
그 공산당은 정말로 사람처럼 안생겼고 빨간 뿔이 난 그런 괴물인줄 알았었죠. 물
론 국민학교에 막 입학했을때의 생각이었지만 그런데 어느날 몰래 우리나라에 들
어온 간첩을 잡았다면서 테레비젼에 그 간첩이 나오는데 우리하고 다른게 하나 없
더라고요. 그래서 알았죠 착각이라는게 얼마나 무서운건지를요. 그리고 말에 따라
서 그 진실에 대한 외곡이 얼마나 심한가를 알게 되었죠."
"우리는 그런데로 공통점이 생겨나고 있는거 같아요. 그렇죠? "
유미란이 나를 향해서 활짝 웃었다.
웃는 여자는 어느장소 어느때든지 아름답다.
유미란을 집까지 바래다 주고 집에 돌아와 보니 집안은 완전히 불의 지옥이었다.
종일 나가 있는 탓에 문을 걸어 감그고 다니는데 이런 지독한 여름날에는 닫혀져
있는 방안 공기가 한창 낮에 더워졌다가 저녁에 기온이 떨어져도 통풍이 안되자
그대로 한낮의 더위에 덥혀진 공기가 식지도 않
고 그대로인 모양이었다.
나는 연희방에 가야 겠다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연희방은 시원할 것이다. 작년 겨
울에 중고로 산 에어컨이 연희방에서는 잘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선견지명이지.
낭비라고 사지 말라는 나와 부모님의 의견을 무시하고 사더니 결국은 올해처럼 지
독하게 덥고 그렇다고 해서 에어컨을 사려고 해도 살수 없는 이런때에는 연희의
예지능력은 인정받아 마땅했다.
이쁜것! 가서 뽀뽀라도 해줘야지. 그리고 몰래 에어컨을 떼어내 오는것이다. 그래
바로 그거야. 흐흐흐.. 이 기회에 우리집 에어컨을(우리집 에어컨은 산지 삼년째
다.) 비싸게 팔고 연희 에어컨 훔쳐서 여름을 지내고 겨울되면 좋은걸로 다시 사
야지. 이 얼마나 수지 맞는 장사인가. 역시 나는 천재적이야.
"석우얏!"
"에구 깜짝이야. 연희야 웬일이야?"
도둑이 제발저린다고 나는 깜짝 놀랐다.
"울 엄마가 시원한 미싯가루 탔다고 너 먹으랜다."
연희가 불쑥 미싯가루를 탄 그릇을 내 앞에 내밀었다.
"너 석우가 뭐냐? 좀 오빠라고 부르는가 싶더니만."
"오빠는 무슨 얼어 죽을... 아니 쩌죽을 오빠? 넌 내 수제자인데.."
나는 연희에게서 미싯가루를 받아 마셨다. 어름이 동동 띄어져 있는 미싯가루는
역시 고향의 맛이다. 우리 어머니라면 절대로 상상도 못하실 일이었다. 우리 어머
니처럼 바쁘신 케리어우먼이 미싯가루 생각은 고사
하고 냉수라도 챙겨주시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뭐가 수제자야?"
"뭐긴 뭐겠어? 흐흐흐. 사기 치는거지. "
"너 의상실 그만두더니 업종을 사기로 바꿨냐?"
"아니. 원래가 사기야. 사실은 이건 비밀인데 의상실서 육칠십만원하는 옷 있잖아
그런거 다 원가가 얼마인줄 알아? 십만원. 최고급 천을 사용해도 그정도 밖에 안
들거든. 그러니 사기지. 기술을 빙자한 사기."
"그런게 사기면 세상에 사기 아닌게 없겠다."
연희가 에어컨을 돌리더니 쇼파에 앉았다.
"나 사실은 하고 싶은말 있어서 왔어."
하고 싶은말이라고? 연희가 하고 싶은 말이라면 나는 안 듣는게 내 삶을 더 윤택
하게 만들는 방법일 것이다. 이번에는 무슨 사고를 치고 그러는 걸까?
"그래. 말해봐."
"나 요즘 만나는 남자 있어."
"만나는 남자? 언제는 남자 안만났니? 만나기만 하면 또 몰라요. 거기다 매일같이
넌 남자의 순결을 뺐았기에 바쁘잖아."
내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대답해 주자 연희는 답답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오빠. 나 정말로 그냥 짜릿한게 아니야. 겁나 죽겠어."
처음으로 연희의 입에서 짜릿하다는 말이 나왔다. 그리고도 모잘라서 자신의 그런
느낌을 겁내 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맘놓고 있던 정신이 퍼득 들었다.
의상실도 뱃장으로 그만둔 연희였다. 유학
도 뱃장이었고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도
뱃장이었다. 그런데 그만 이번에는 그러한 뱃장이 다 사라져 버린것이다.
"뭐가 문제인데? 겁나는거? "
"응. 사랑에 빠지는게 빠지는게 두려워. 나도 모르겟어. 사실은 뭐가 어떻게 된건
지를. 그냥 답답하고 화나는 그런날들이었는데 내가 알지 못하는 미지의 나라 혹
은 외계에서 왔을지 모를 남자가 나타 났거든."
나는 갑자기 입이 바싹 말랐다. 연희가 이렇게까지 말할 진지한 남자가 나타날거
라고는 한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물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살아 가겠지
만 그래도 이렇게 빠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도와 줄것은 뭔데?"
결국 내가 연희에게 해줄수 있는것은 뭘 도와주어야 하는것인지를 묻는것 밖에 없
었다.
"그냥.. 내 얘기를 들어줘. 그게 편해. 웃기는 일이지는 하지만 그냥 난 좀 수다
를 떠는 구석이 있나봐. 말하고 싶었어. 오빠한테 처음으로 알려 주고 싶었거든."
연희는 미소를 지었다.
"오빠 나 갈께. 내일 봐. "
연희는 이층으로 올라 갔다. 잠시후 창문 열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나마 들렸다.
에고 내 팔자야. 갑작스러운 연희의 고백때문에 한동안 정신이 멍했졌다. 하기사
얼마동안은 아침 식사 시간에 얼굴도 채 보기 힘들게 지냈었으니 그 동안 연희가
사랑에 빠질수도 있었다.
내 욕심이라고 생각
했다. 내가 연희와 같이 살지 않는한 연희가 영원히 내 옆에
있는것은 불가능한게 사실이다. 그런데도 나는 연희만큼은 내 옆에 있을거라는 확
신을 지울수 없다. 다른 형제들도 그런것일까? 여동생의 연애에 대해서 오빠들은
다들 나처럼 긴장하게 되는게 사실일까?
시계를 보니 유미란에게서 전화가 올 시간이었다. 그녀는 거의 매일 밤 11시에
서 12시 사이에 전화를 했다. 시계는 11시 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소설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열흘전 미국에 가 있는 친구가 보내온 책이었
다.
하얀것은 종이 까만것은 영어. 연희라면 아마도 이 책을 화장실 휴지조각으로도
사용하지 못할 페기물 정도로 생각하겠지? 나는 연희 생각을 하자 책을 그만 읽고
싶어 졌다. 연희가 중학교때 나에게 와서 영어를 배우던 생각이 났다. 연희는 자
존심이 강했고 그것은 그녀를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더 돋보이게는 했지만 자존심
이라는게 그냥 지식을 머릿속에 넣어 주는것은 아니었다. 연희는 공부를 하는것도
별로 안 좋아 했고 더군다나 영어는 아주 싫어 했었다. 그나마 수학을 영어 보다
좋아한다는게 다행이었다. 그런데도 연희는 인문계로 갔고 그리고 영어도 수학도
아닌 엉뚱한 의상을 택했다. 그리고 지금은 의상실도 그만두고 어디서 나타났는지
자신도 모르겠다는 남자를 사랑한다고 하는것이다.
나는 기분이 묘했다. 내것을 빼앗기는 느낌이었다. 유미란과 연희의 중간 어디쯤
에 서서 나는 이 두 여자들을 모두 소유하기를 원하는 것일까? 내 자신도 대답할
수 없는 문제였다. 스핑크스의 퍼즐처럼. 하지만 누군가 스핑크스의 퍼즐을 맞추
었듯이 누군가 내 문제의 해답을 쥐고 있을런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해답을 쥐고
있는 것은 혹시나 나 아니면 유미란 또는 연희.
새벽 두시가 되었을 쯤에 나는 오늘 유미란에게서 전화가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았다. 오늘은 저녁도 같이 먹고 연극도 봤으니까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일까? 습관
이란 무서운것이었다. 아주 조금만 그 습관에 어긋나게 되면 사람들은 십중팔구는
당황하기 때문이다.
유미란은 전화를 하지 않았고 연희는 사랑에 빠지고 나만 혼자 남아서 다음달 전
기세를 산출해야 했다. 내 월급에서 얼마를 저 에어컨이 집어 먹고 있는 것일까?
아직 몸보신도 못했는데......
생각은 산을 넘고 다시 강을 건너 바다로 갔다. 바다! 넓고 시원스럽게 펄쳐저 있
는 또 하나의 대지. 땅과는 다른 차원의 어머니. 하지만 수영을 못하면 물에 빠져
물귀신이 되는 수 밖에 없는 곳이 바다다. 나는 대학교 일학년때 제주도의 바닷가
에서 밤새 들리던 파도 소리를 아직도 기억한다. 공포와 머리 꼭대기 까지 올라
오는 쾌감은 항상 같이 동반되는 것이 아닐까? 조용한 밤에 들리는 파도 소리란
금새라도 텐트속으로 들어와 저 바다 끝 어디로 밀어 넣을것 같은 두려움을 느끼
게 했었다. 동시에 그 엄청난 공포가 주는 두려움의 끝엔 무엇
인지 모를 괘감이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귀신의 집에 들어가고 공포영화를 보는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와 똑같은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인생에 대해서 이렇다 할 주관이 있는것
은 아니었지만 인생이란 바다에 가서 공포를 느끼는 모험을 할것인지 아니면 바다
에 가지 않을것인지라는 두 가지 길을 항상 제시하는게 아닌가 싶다. 바다에 가지
않으면 빠져 죽을일도 밤바다의 파도소리가 얼마나 섬찝한지도 모르겠지만 동시에
그 속에 혼자 누워 있는 그런 묘한 격앙된 감정의 고조도 모를것이다. 인생은 항
상 그렇다. 동시에 두장소에 머물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 여름 휴가때는 바다엘 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휴가라면 이제 얼마 남지 않았
고 나는 이번 휴가를 혼자서 즐길 생각이다.
시계는 벌써 새벽 네시 반을 가르키고 있었다. 나는 내일을 위해서 이젠 자둬야
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