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TV 시절 슈퍼스타 원로아나운서 임택근
'아들 임재범, 손지창 자랑스럽다'
3년 반째 휠체어 신세인 임택근씨가 서울 송파구 장지동 자택에서
굴곡진 현대사를 관통하는 방송인생 40년을 회고하고 있다.
당대 최고의 스타가 된 데는 타고난 쩌렁쩌렁한 미성의 목소리 외에
열정과 노력이 보태졌기에 가능했다
요즘 20∼30대 젊은층에게는 ‘나는 가수다’ 의 스타
‘임재범의 아버지’ 라는 수식어가 앞에 따라붙지만
중년층 이상 세대에겐 라디오와 흑백TV 시절
최고의 슈퍼스타로 기억되는 인물.
임택근은 60, 70년대 최고의 아나운서로 명성을 떨쳤다.
임재범은 ‘사랑보다 깊은 상처’ 등으로 가수로서 이름을 떨쳤고
손지창은 탤런트와 가수에서 최근에는 벤처사업가로
활동 영역을 넓히고 있다.
손지창은 미스 충북 출신의 어머니와 임택근 사이에서
태어나 이모부의 성을 따른 것으로 알려졌다.
임택근 씨는 조강지처 사이에서 임재범을 얻었고.
다른 여자(미스 충북 김후자) 사이에서 손지창을 얻었다.
그러면 손지창도 임씨가 되어야하나
손지창의 어머니를 이모부가 항상 도와주었는데.
이 이모부의 성이 손 씨이다.
항상 어머니 곁에 있어준 이모부가 고마워서
성을 임씨로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원로 아나운서 임택근(79)씨를 만나러
서울 송파구 장지동 자택을 찾았다.
“휠체어 신세라, 몰골이 말이 아니다” 며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던 그를 설득해 통원치료를 하는 평일을 피해
휴일에 찾아간 것이다.
무척 수척해져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팔순의 나이를 잘못 알았던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로
한 10년쯤은 젊어 보였다.
그는 “기분은 아직 60대 같다” 고 했다.
거실 정면 중앙에 걸린 예수 그리스도 사진이 눈에 띄었다.
고 김수환 추기경으로부터 함께 견진성사를 받은 부부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알려져 있다.
3년 6개월 전 경남 ‘진해 군항제(진항제)’ 에 간 그는
버스에서 내리다가 ‘0.1초 차로 발을 헛디딘’ 게 화근이 돼
경추 6번, 7번이 눌리는 사고로 이어졌다.
곁에 있던 부인이 “연세대 강남 세브란스병원에
자기공명영상(MRI) 찍으러 갈 때는
멀쩡하게 걸어 들어갔는데 나올 때는 하반신 마비가 돼
수술을 받았다” 며 연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임씨는 “연세대 총동창회 사무총장을 10년 넘게 지내고,
동창회관도 지은 내가 어떻게 연대 병원을 상대로
의료사고운운하겠느냐. 그냥 운명이라 생각한다” 고 말했다.
“수술 받고 3년 반 동안 누워 있는데 참 괴롭더라고요.
제가 가톨릭 영세 받은 지 25년 되는데,
그 전에야 1주일에 한 번 정도 미사 가고
반성도 안 하고 살았는데
쓰러지고 나니까 하느님께 매달리게 되더군요.”
그는 거실의 고정식 자전거 등 재활치료기구를 가리키며
“치료기구에 성모마리아 사진과 십자가를 붙여놓고
재활운동을 하면서 묵주기도를 올리는 등
늦게 철이 나서 이제사 하느님께 매달린다” 며
“믿음이 깊었다면 이런 불행이 오지 않았을 것” 이라고 했다.
사고 직전 마칭밴드협회 상임고문을 맡아
브라질까지 가서 마칭밴드 세계대회를 제주에 유치해
사회를 맡았고, 쓰러지기 1주일 전까지 골프를 치는 등
노익장을 과시한 그였기에 초기 사고의 충격은 컸다.
‘방송을 위해 태어난 사나이’ 란 별칭이 붙은 그에게
아나운서의 길을 걷게 된 계기부터 물었다.
“6·25전쟁 때 임시수도 부산에서
피란민수용소와 다름없는 판잣집 임시교사 천막이 있던 대학,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지요.
입학 4∼5개월 뒤인 1951년 여름 서울 중앙방송국에서
아나운서를 모집한다는 광고방송을 들었어요.
4년제 대학 졸업자에게만 응시자격이 있다며
원서접수조차 거절당했어요.
고민 끝에 당시 KBS 국장 노창성씨 방문을 열고 들어갔지요.”
노 국장은 한국 최초로 패션쇼를 연
패션디자이너 ‘노라노여사’ 의 아버지다.
그는 노 국장에게
“평생 꿈이 아나운서인데 제 꿈을 이렇게 쉽게 좌절케 하지 말아 달라” 며
“낭독엔 자신 있으니 한번 제 목소리를 들어봐 달라” 고 간청했다.
이틀간 아침 출근길마다 노 국장 방문을 가로막고 졸라대는
그의 집념과 끈기에 질린 노 국장이 결국 응시를 허락했다.
6대 1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한 그는 방송사상
첫 대학 1학년 아나운서가 됐다.
미성의 쩌렁쩌렁한 목소리인 그는
“아나운서가 될 팔자인지,
고교시절부터 특출난 제 목소리는 타고난 것 같다” 고 했다.
그가 ‘어쩔 수 없이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해야 하는 운명’ 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 사건이 있었다.
1959년 4월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여자농구대회
숙적 일본과의 결승전 중계가 그것이다.
한국은행 여자 농구단이 7전 전승 끝에 결승에 오른 날
그는 지독한 감기몸살로 몸을 가누기도 힘든 지경이 됐다.
마이크를 잡고 쓰러지더라도 중계방송은 해야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비 오듯 쏟아지는 땀방울을 씻으며
어지럼증을 참고 마이크를 잡았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언제 아팠느냐는 듯
멘트가 술술 터져 나왔다.
역전에 역전을 거듭하는 경기는 극적으로 한 골 앞서 종료됐고
그는 감격적인 승전보를 고국에 전했다.
“당시 감정이 안 좋던 숙적 일본과는 사생결단하고
붙던 시절이었죠.
라디오 중계방송으로 제가 전한 우승소식에
전국 방방곡곡 온 국민이 만세를 부르고 감격했었지요.
시골 동장 이장집 라디오, 종로통에는
스피커를 통해 길거리에서 수백명이 중계방송을 듣던
그런 목가적 시대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정신없이 중계방송을 마치고 나자
비 오듯 흐르던 땀이 자취를 감추고 펄펄 끓던 열도 내렸다.
신기하게도 방송을 하던 중에 감기가 말끔히 나은 것이다.
“그때부터 ‘죽어도 마이크를 잡고 죽어야겠다’ 는
결심을 하게 됐습니다.”
금의환향 후 선수단과 함께 경무대로 초청된 그는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난다.
이 대통령은 한쪽 구석에 있던 그를 보자 대뜸
“임 변사 앞으로 나와! 자네 수고가 참 많았네.
어떻게 그렇게말을 빨리 하고,
우리가 직접 눈으로 보는 것 같이 생생하게 중계를 하나?
용하구먼” 하면서 그의 손을 잡아주었다.
“악수를 했더니 대통령의 손은 제 손의 두 배 크기에
팔순이 다 된 나이에도 장작을 직접 쪼갠다는 소문대로
손가락마디마디에 못이 박혀 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역시 역사의거인은 거인이더군요.
그때 만나본 첫인상은 그랬어요.”
“제가 오빠부대의 원조 맞습니다.
1954∼1956년 ‘노래자랑’ 과 ‘스무고개’ 사회를 맡았는데
반향이 엄청났지요.
동화백화점(현 신세계백화점) 뮤직홀에서 공개방송을 했는데
그날만 되면 방송개시 수시간 전부터 동화백화점 앞은
방청하러 온 인파가 백화점 둘레를 몇바퀴 에워쌀 정도로
몰려드는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습니다. ”
20대 중반에 그는 대중의 스타가 됐다.
“ 방송하러 현장에 나가면, 수십명의 팬들이 에워싸고는
악수를 청하고 사인 공세를 펴며 몰려들었지요.
어떤 때는 아줌마들이 혼잡을 틈타 양복이나 와이셔츠 단추를
기념으로 뜯어가는 등 낭패를 당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들이 예쁘게 생겼다며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고 했고,
팬레터 중에는 자기가 꿈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청혼해 오는 여인도 있었지요.
뻘건 루즈로 ‘키스 마크’를 새겨서 고독을 호소하는
편지도 있었습니다.” 인터뷰 = 정충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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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손지창이 사연을 이제사 알겠군요 어허허허
좋은기사 감상합니다.
허어, 그렇군요. 왕년의 임택근아나운서. 차를 타고 가면서 종로거리 좌우간판을 모두 읽어댔다는 달변의 소유자이지요
아나운서의 대가 임 택근 감사함니다
감사합니다.
감동임니다
감사요
좋은 글 입니다..감사합니다
감동글 잘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잘보고갑니다 감사합니다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