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8일 [대림 제2주일]
루카 3,1-6
자발적 광야의 삶을 사는 이가 존경스럽다면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있다
오늘 복음의 핵심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메시아를 만나게 해 주는 길과 같은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
메시아를 만나려면 먼저 세례자 요한을 만나야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우리 뇌엔 ‘망상활성계’(RAS, Reticular Activating System)가 있습니다.
망상활성계는 뇌와 외부 자극 간의 필터 역할을 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할 정보를 선별하고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이바지합니다.
뇌가 우리에게 들어오는 수많은 정보를 다 처리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에 주의를 기울일까요? 바로 나의 ‘뜻’입니다.
예를 들어 공항에서 면세점에서 무언가를 사려 집중할 때는 공항 방송이 잘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다 시계를 보고 출발시간이 지난 것을 알았을 때는 벌써 몇 분째 자기 이름이 불리고 있었다는 것을 바로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수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당신을 보이셨는데, 어떤 이들을
그분을 메시아로 인정하였고 어떤 이들을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는 마치 망상활성계가 하는 일과 같습니다. 그분에게 집중하고 있는 이들만 보입니다.
그러면 그분의 무엇에 집중하고 있어야 할까요? ‘뜻’입니다.
‘착한 뜻’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이 되신 사랑입니다.
나에게 이웃을 사랑하려는 의지가 조금도 없다면 예수님은 만날 수 없습니다.
만약 잘 생기고 예쁘고 돈 많고 인기 많은 아이돌을 죽자 살자 쫓아다니는 아이에게 구유에 뉘어진 예수님이 매력이 있을까요?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처럼 자발적으로 광야를 산 세례자 요한을 만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현대의 세례자 요한을 주윤발이나 워런 버핏, 일론 머스크, 척 피니와 같은 인물들을 들고
싶습니다.
이들은 인기 있는 세계의 거부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광야에 살았던 세례자 요한과
비교하느냐고요? 먼저 돈에 대해 말해볼까요? 이런 사람들은 모두 돈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고
실제로 재산 대부분을 기부하고 기부할 약속을 한 이들입니다.
그래도 잘 먹지 않았겠느냐고요? 워런 버핏은 오래된 집에서 오래된 자동차로 맥도날드에서
4달러도 안 되는 햄버거로 식사합니다.
일론 머스크는 자기 집도 없이 6천 만 원짜리 조립식 주택에 거주합니다.
그래도 명예를 추구했다고요?
워런 버핏은 나이가 들어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성공한 것이라 말합니다.
척 피니는 자기 전 재산을 기부하면서도 나라에서 조사받기 전까지 그가 기부하는 사람인 줄 아무도 몰랐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존경스럽게 보인다면 착한 뜻이 들어온 것입니다.
착한 뜻은 이웃을 사랑하고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이기에 그런 이들이 보이는 것입니다.
착한 뜻을 가지면 자발적으로 광야에 살 수밖에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심이 많고 쾌락을 찾고 명예나 권력에 집착하면서 이웃을 사랑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에 만난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어디서 만났느냐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에서 만났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이휘재나 욘사마와 같은 같은 나이 또래의 사람들을 부러워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전혀 부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그들의 가난하고 절제되고 멸시받는 삶이 부러워졌던 것입니다.
이는 그 책이 저의 시선을 바꿔놓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삶에서 이젠 내가 아니라 이웃을 행복하게 하는 삶이 진정한 행복임을 알게 해 준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서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 당신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시는 예수님을 성체에서 알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을 읽을 때 놀랐던 적이 있습니다.
바로 주일학교 교사 중에 어떤 자매가 수박을 먹는데 빨간 부위가 하나도 없이 갉아먹는 것이었습니다.
예전 같았으면 ‘왜 저래? 맛있으라고 먹는 건데
저 흰 부분까지 먹다니. 누가 알아준대?’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위 책을 읽는 동안 시선이 바뀌었는데, ‘지금 나는 저렇게 못하더라도 언젠가는 저렇게 하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우리 신앙이 우리를 광야로 나가게 하여 참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존재로 변하게 하는 문입니다.
착한 뜻을 가져야 인간이 되신 착한 분을 알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자발적 광야를 사는 이들을 존경하게 만들어줄 환경에 자신을 먼저 살게 하십시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2월8일 [대림 제2주일(인권주일)]
루카 3,1-6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대림 제2주일이자 인권 주일입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피조물임을 자각하는 주일입니다.
인간은 첫째가는 하느님 피조물이기에 그 어떤 제도나 이데올로기보다 우선해야 하는 가치 있는 존재임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신분, 국적, 빈부 여부를 떠나 생명을 지닌 한 그 어떤 인간이라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주일입니다.
오늘 특별히 실직이나, 사업의 실패 등 경제적 파탄으로 인해 깊은 수렁 속에서 고생하시는 분들, 너무도 막막해 앞길이 전혀 안 보이는 분들, 희망을 상실한 분들을 위해서 특별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 주일입니다.
직원을 소중히 여기는 경영 마인드로 유명한 한 경영자의 외침은 어려운 이 시대 모든 경영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가 귀담아 들어야 할 소중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정리해고를 통한 인원 감축! 우선 인건비를 대폭 줄여보자는 마인드인데, 결코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닙니다.
서로를 위해 피해야 할 유혹입니다.
그로 인해 예견되는 피해자들의 고통과 국가적 손해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저희 회사는 인원 감축이라는 뼈아픈 해결책이 아니라 3교대를 4교대로 늘리는 고용 증대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리고 잉여시간을 직원교육과 재충전에 투자한 결과 생산성 향상, 안전사고 감축, 노사화합이란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을 소중히 여기는 이 회사 경영자의 인본주의적 사고방식, 근로자들과 고통을 분담하려는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 회사에서 사직서를 쓰면 최고 책임자와 면담을 거쳐야 한답니다.
그리고 최고 책임자로부터 "도대체 왜 사직서를 썼느냐? 좀 더 함께 일할 수는 없겠냐?"는 듣기 행복한 만류의 말을 들어야 한답니다.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 무리한 방법보다는 함께 고통을 분담하고, 함께 나누고, 함께 협력하는 방법을 통해 우리 앞에 놓인 이 난관을 함께 견디고 함께 안개 속을 헤쳐나가는 우리 가정, 우리 직장, 우리 공동체가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은혜로운 대림 시기도 어느덧 두 번째 주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한 세례자 요한에 대한 이야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자비로운 아버지의 따뜻한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고통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도록 합시다.
그들의 인간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도록 합시다.
죽음과도 같은 고통 앞에 망연자실하게 넋을 잃고 앉아있는 이웃들 삶을 개선시키는 구체적 "구원의 손길"이 됩시다.
진정한 회개의 잣대는 다름 아닌 삶의 변화입니다. 억압받는 이웃들을 향한 적극적 투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관대한 나눔, 그것은 회개의 가장 좋은 표시입니다.
우리 삶이 그저 단순한 하나의 반복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들을 향한 끝없는 개선의 길, 나날이 성장하고 쇄신되는 참된 회개 생활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대림 제2주일 강론>(2024. 12. 8.)(루카 3,1-6)
<회개는 ‘온 삶’의 변화입니다.>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즈카르야의 아들 요한에게 내렸다.
그리하여 요한은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이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한 말씀의 책에 기록된 그대로이다.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너희는 주님의 길을 마련하여라.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루카 3,1-6)”
1) ‘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오년’은 서기 27년-28년경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회개를 선포하고 세례를 베풀기 시작한 시기는 서기 27년경입니다.>
복음서 저자가 당시의 로마제국 통치자들의 이름과 시기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것은,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인간 세상의 역사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이고, 대사제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회개 선포가 실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의 구원 사업이 인간 세상 안에서 실제로 일어났음을 나타내기 위해서, 또는 하느님께서 인간 세상의 역사에 직접 개입하셨음을 나타내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아버지의 뜻이 구체적으로 땅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했음을 나타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광야에 있는’ 요한에게 내린 것은, 요한이 광야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지내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에 관해서 1장에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루카 1,80).”
성경에서 광야는 시련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하고,
은총의 장소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은총’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요한에게 내렸다는 말은, 요한이 하느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느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셨고 뽑으신 사람이었는데(루카 1,12-17), 그를 부르신 때는 그의 나이 서른 살쯤 되었을 때입니다.
인용되어 있는 이사야서에는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소리’ 라고 표현되어 있는데, 듣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 광야에서 회개를 선포한 것은 아닙니다.
3절에는 “요르단 부근의 모든 지방을 다니며” 회개를 선포했다고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을 보면, ‘요르단강 건너편 베타니아’에서 세례를 베풀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요한 1,28).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였다.” 라는 말은, “죄를 용서받으려면 회개하라고, 또 회개했다는 표시로 세례를 받으라고 선포하였다.” 라는 뜻입니다.
2) ‘주님의 길’은 주님께서 나에게 오시는 길이기도 하고, 내가 주님께 나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그분의 길을 곧게 내어라.”는 “회개하여라.”입니다.
“골짜기는 모두 메워지고”는 ‘탐욕’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산과 언덕은 모두 낮아져라.”는 ‘교만’을 버리라는 뜻입니다.
“굽은 데는 곧아지고 거친 길은 평탄하게 되어라.”는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에 물들어 있는 생활을 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즉 하느님 뜻에 합당한 생활을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누구든지 회개하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입니다.
‘모든 사람’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입니다.
메시아의 구원에는 민족, 인종, 신분, 직업, 남녀 등의 차별이 없습니다.
3) 세례자 요한은 뒤의 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라는 말을 했습니다.
이 말은, 행동으로(삶으로) 실천하는 회개를 하라는 뜻입니다(루카 3,11-14).
말로만, 또 생각으로만 하는 회개는, 회개가 아닙니다.
행동으로 실천하는 회개가 진짜 회개입니다.
그리고 회개한다면 ‘온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바로 그 변화가 ‘회개의 열매’입니다.
회개는 한 번 한다고 그것으로 끝나는 일이 아닙니다.
주님의 길을 곧게 내는 것도 회개이고, 그 길을 그 상태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회개입니다.
따라서 회개는 평생 끊임없이 계속해야 하는 일입니다.
4) 배반자 유다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했고,
자기가 지은 죄를 뉘우쳤습니다(마태 27,3-5).
그러나 그런 뉘우침은 회개의 시작일 뿐입니다.
죄를 뉘우쳤다면 보속도 해야 하고, 주님에게로 돌아가려는 노력도 해야 합니다.
그런 일들을 모두 합한 것이 회개입니다.
배반자 유다가 자살을 한 것은(마태 27,5)
회개하기를 포기한 것이고, 구원받기를 포기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자살은 배반보다 더 큰 죄입니다.
<스스로 구원에 대한 희망을 버리고 ‘절망하는 것’과 구원받기를 ‘포기하는 것’이 ‘죄 중에 가장 큰 죄’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