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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320~323)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320>위유런(于右任), 국·공 ‘인재쟁탈전’ 0순위에 오르다
|제321호| 2013년 5월 5일
▲1948년 5월 20일, 국민정부 관원들과 함께 총통 취임식장에 입장하는 감찰원장 위유런(오른쪽)
1949년 초, 장제스(蔣介石)는 패배를 예감했다. 아들 장징궈(蔣經國)에게 “재덕을 겸비한 준재가 구석에서 썩는 경우가 많다. 애석한 일이지만, 사교성 외에는 쓸모라곤 한 군데도 없는 것들이 요직을 꿰차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관건은 사람이다. 인재 확보를 서둘러야 한다”며 타이완(臺灣)으로 이전시킬 사람들의 명단을 건넸다. 앞줄에 위유런(于右任) 석 자가 선명했다.
승리를 확신한 마오쩌둥도 마찬가지였다. 저우언라이(周恩來)에게 신신당부했다. “4년 전, 충칭에 갔을 때 위유런과 함께했던 시간을 잊을 수가 없다. 대륙을 떠나지 말라고 연락할 방법을 찾아라.” 두 사람의 인연은 저우언라이도 익히 알고 있었다.
마오쩌둥과 위유런은 1924년 1월 광저우(廣州)에서 열린 ‘제1차 국민당 전국대표자 대회’에서 처음 만났다. 중앙 집행위원에 선출된 위유런은 노동자농민부장(工人農民部長)을 겸했다. 후보 중앙위원에 뽑힌 마오쩌둥에게도 선전부장 자리가 돌아왔다. 위유런 45세, 마오쩌둥 31세 때였다.
2년 후에 열린 2차 대회에서도 마오쩌둥은 후보 중앙위원에 선출됐다. 국민당 중진 위유런과 접촉할 기회가 많았다. 마오는 14세 연상인 위유런을 잘 따랐다. 일거리가 없으면 만들어서라도 찾아갈 정도였다.
◀타이베이 시절 서재에서 서예에 열중하는 위유런. [사진 김명호]
유희(遊戱)로 끝났지만, 항일전쟁 승리 직후인 1945년 8월 29일부터 43일간, 전시 수도 충칭(重慶)에서 장제스와 마오쩌둥이 담판을 벌인 적이 있었다. 충칭에 머무르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마오쩌둥의 숙소를 찾았다. 마오는 평소 글로만 접하던 사람들을 원 없이 만났다.
위유런만은 예외였다. 8월 30일, 저우언라이와 함께 직접 찾아갔다. “청년시절 위유런의 글을 읽으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앉아서 만날 수 없다. 못 만나도 상관없으니 미리 연락하지 마라. 예의가 아니다.” 당시 위유런은 흔히들 ‘민주의 집(民主之家)’이라 부르던 민주인사 셴잉(鮮英)의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날따라 위유런은 샤오빙(화덕에 구은 빵, 맛은 별로 없지만 위유런은 씹으면 씹을수록 고소한 고향 특산물이라며 유난히 좋아했다) 사먹으러 나가는 바람에 집에 없었다. 소문을 들은 장제스의 비서실장은 그날 밤 열린 마오쩌둥을 위한 연회에 위유런을 초청했다.
위유런도 9월 6일 점심에 마오쩌둥을 초대했다. 위유런의 요리 솜씨는 일품이었다고 한다. “맛있는 요리를 만들려면 시장을 잘 봐야 한다”며 며칠간 충칭 시내를 누볐다. 당일 날은 새벽시장에 나가 갓 잡은 돼지고기와 신선한 야채를 골랐다. 요리사들과 주방에 들어가 중요한 요리는 직접 만들었다.
이날 마오쩌둥은 위유런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붓글씨와 시(詩)를 주고받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정치 얘기는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오는 내내 마오는 싱글벙글했다. 저우언라이에게 “위유런이 내 시와 글씨를 극찬했다”며 칭찬 받은 애들처럼 좋아했다. 보기에 민망할 정도였다.
마오쩌둥의 지시를 받은 저우언라이는 위유런의 사위 취우(屈武)를 불렀다. 취우는 장징궈, 덩샤오핑(鄧小平) 등과 모스크바 유학 동기생이었다. 국·공 양당의 인사들과도 교분이 두터웠다. 특히 덩샤오핑과는 “네 이름이 건방지다. 샤오핑(小平)이 없어도 작은(小) 평화(平)는 이룰 수 있다”며 놀릴 정도로 친했다. 장징궈와는 모스크바 시절, 여자친구들이 서로 가깝다 보니 덩달아 친해진 사이였다.
저우언라이는 취우의 등을 떠밀었다. “빨리 난징으로 떠나라. 장인을 찾아가 내 말을 전해라. 우리 군대가 양자강을 건널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난징이 점령되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말씀 드려라. 우리가 비행기를 보내 모셔올 때까지 절대 움직이지 말고 계시라고 해라. 마오 주석의 뜻이다. 명심해라.”
장제스는 마오쩌둥이나 저우언라이보다 동작이 빨랐다. 취우가 도착했을 때 위유런은 난징에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허사였다.
장제스가 파견한 4명의 특무요원들에게 정중하게 납치당한 위유런은 한동안 광저우와 홍콩을 떠돌았다. 상하이에 머무르는 동안, 마오쩌둥이 중화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11월 26일 장제스가 보낸 비행기를 탔다. 눈 떠보니 충칭이었다.
충칭 도착 3일 후, 장제스의 저녁 초청을 받았다. 대륙에서의 마지막 만찬이었다. 그날 밤, 장제스 부부와 함께 타이완행 비행기에 올랐다. 시안(西安)에 있는 부인과 딸에겐 곧 돌아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을 남겼다. 낯선 섬나라에서 고독한 생활이 시작됐다. <계속> <321>위유런, 병원비 없어 ‘정기가<正氣歌>’ 쓰며 통증 달래다 |제322호| 2013년 5월 12일
▲감찰원 전신인 심계원 원장 시절, 참모총장 바이충시(앞줄 오른쪽 넷째), 전 행정원장 웡원하오(앞줄 오른쪽 첫째), 중앙연구원 원장 주자화(앞줄 왼쪽 다섯째), 베이징대학 총장 후스(앞줄 오른쪽 셋째), 국민당 조직부장 천리푸(앞줄 왼쪽 둘째) 등과 함께 국립 중앙연구원 회의에 참석한 위유런(앞줄 왼쪽 여섯째). 1946년 11월 20일, 난징. [사진 김명호]
위유런(于右任)은 정통파 중국 지식인 중에서도 모범생이었다. 청년시절 형성된 인생관을 죽는 날까지 바꾸지 않았다. 사망 9개월 전인 1964년 1월 22일 밤 “나는 유가(儒家) 계통의 사람이다. 젊은 시절 지키려고 마음먹은 것들을 이날 이때까지 유지했다. 무슨 일이건 중도에 방향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것은 세상에 웃음거리가 될 뿐”이라는 일기를 남기며 흐뭇해했다.
생활습관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책을 끼고 살았다. 잠시라도 손에서 놓으면 안절부절, 어쩔 줄 몰라 했다. 1963년 4월 16일,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의 일기가 남아 있다. “소년시절부터 습관이 안 되면, 늙어서 아무리 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게 독서다. 취미가 독서라는 사람을 볼 때마다 슬프다. 책을 멀리하는 사람은 치욕이 뭔지를 모른다. 가장 미련한 사람이다. 의사 말대로 하다 보니 며칠 간 독서를 못했다. 불안하다.” 초서의 성인(草聖)답게 붓글씨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오는 사람마다 붓글씨를 한 점씩 써줬다. 돈은 받는 법이 없었다.
위유런은 수십 년간 고관을 지내면서 명예를 제일로 쳤다. 수중에 돈이 남아날 날이 없었다. 만년에 병원비가 없을 정도였다. 85세 때 기관지염으로 입원했다. 3일 후 일기를 남겼다. “증세가 가라앉았다. 빨리 퇴원해야겠다. 병원비가 너무 비싸다.” 완치되기 전에 퇴원하는 바람에 병이 도졌다. 일기에 “의사 말 안 듣고 집에 온 게 잘못이다. 음식을 삼킬 수가 없다. 병원에 가고 싶지만 돈이 없다. 사회활동을 하다 보면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고 썼다. 의료보험이라는 용어도 없을 때였다. 정 힘들자 문청상(文天祥)의 정기가(正氣歌)를 7폭 병풍에 쓰며 아픔을 달랬다. 최후의 대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64년 7월 말, 기관지가 퉁퉁 부어 올랐다. 푸단(復旦)대학 교우회 회장이 입원을 권했다. 위유런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루가 다르게 병세가 악화됐다. 미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국방부장 장징궈(蔣經國)가 비행기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달려왔다. “제가 병원으로 모시겠습니다.” 위유런은 요지부동이었다. 장징궈가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하자 고개를 끄덕였다.
장징궈는 위유런의 부관에게 단단히 일렀다. “입원비 걱정을 하실 게 분명하다. 거짓말하는 수밖에 없다. 하루에 100원이라고 말씀 드려라.” 당시 감찰원장의 봉급은 5000원, 입원비는 하루에 1000원 남짓 했다.
생명이 다했음을 느꼈던지, 위유런은 몇 차례 유서를 작성하려 한 적이 있었다. 붓을 들었다가 놓기를 반복했다. “나라를 두 동강이 낸 주제에 무슨 놈의 유서. 푸젠(福建)에서 개가 짖으면 타이완의 개들이 화답한다. 우린 개만도 못한 것들이다. 후손들에게 못난 조상 소리 들을 생각하니 진땀이 난다.”
유서를 찾기 위해 감찰원 부원장과 감찰위원들이 위유런의 금고를 열었다. 만년필, 도장, 일기장 외에 대륙시절 조강지처 가오중린(高仲林)이 만들어준 헝겊 신발, 홍콩에 있던 손자의 미국유학을 위해 은행에서 빌린 차용증서 원본이 들어있었다. 30여 년간 감찰원장을 역임한 고관의 금고치곤 너무 초라했다. 다들 처연함을 금치 못했다.
훗날 비서 중 한 사람이 위유런이 가난했던 이유를 구술로 남겼다. “원장은 중국 역사상 찾아보기 힘든 청백리였다. 허구헌 날 같은 옷만 입었고 차도 싸구려만 마셨다. 어려운 사람이 찾아오면 그냥 보내는 법이 없었다. 돈이 없어서 학교 못 가는 애들에겐 빌려서라도 학비를 대줬다. 항상 쪼들렸다. 글씨를 팔자는 말이 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청빈과 인자함 외에는 딱히 표현할 말이 없다.”
위유런의 소망은 단 하나, 시국이 변하고 고향에 돌아가 가오중린을 만나는 것 외에는 없었다. 가오중린의 80회 생일이 다가오자 위유런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홍콩에 있는 친구에게 “조강지처가 그리워 못살겠다. 생일을 쓸쓸히 보낼 생각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중공 총리 저우언라이가 사람을 보내 융숭한 잔치를 베풀었다”는 답장을 받고 감동했다. 그날 밤, 꿈속에서 가오중린을 만났다. “꿈에 옛 전쟁터를 찾았다. 부대를 이끌고 함양을 우회했다. 백발의 부부가 만나 흰머리가 눈물로 뒤엉켰다. 그래도 요염함은 예전과 변함이 없었다.”
1964년 11월 10일 위유런은 타이베이에서 눈을 감았다. 소식을 들은 마오쩌둥은 가슴을 쳤다.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위유런의 서예 작품을 거둬들이라고 지시했다. “한 점도 유실되면 안 된다. 때가 되면 기념관을 만들어 보존해야 한다.”<계속> <322>위유런, 蔣<장제스> 고향까지 쫓아가 “장쉐량 석방하라” |제323호| 2013년 5월 19일
▲1928년 2월 2일, 난징에서 열린 국민당 4차 중앙집행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위유런(앞줄 왼쪽 여섯째)은 장징장(앞줄 의자에 앉은 사람), 차이위안페이(앞줄 오른쪽 셋째), 탄옌카이(앞줄 오른쪽 다섯째) 등과 함께 장제스(앞줄 오른쪽 넷째)를 당과 군의 최고 지도자로 추대했다. 뒷줄 오른쪽 둘째는 장제스의 처남 쑹자오런. 중간에 보이는 유일한 여성은 랴오중카이의 부인 허샹닝. [사진 김명호]
1911년 12월 25일, 16년간 망명생황을 하던 쑨원이 귀국했다. 기자들의 단독 대담 요구가 줄을 이었다. 쑨원은 ‘민립보(民立報)’ 기자의 요청만 수락했다. “쑨원은 총통으로 자처해서는 안 된다. 겸양의 미덕을 보여야 한다. 공화국의 첫 번째 총통은 선거를 통해 선출된 의원들이 선거법을 통과시킨 후 합법적으로 선출돼야 한다”는 사론을 봤다며 사장 위유런(于右任)의 안부를 물었다.
엿새 후, 쑨원은 민립보를 직접 찾아갔다. “위유런에게 차 한잔 얻어 마시러 왔다”며 ‘육력동심(戮力同心: 힘을 합하고 마음을 함께하겠다)’을 휘호로 남겼다.
1912년 1월 1일, 중화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됐다. 임시 대총통에 선출된 쑨원은 “임시”라며 위유런과 민립보 동인들을 요직에 기용했다.
쑨원이 위안스카이(袁世凱)와의 합작을 선언하자 위유런은 위안스카이는 공화주의자가 아니라며 거부했다. 교통부장 자리를 걷어치우고 신문사로 돌아왔다. 베이징에 있던 혁명당 군사총책 황싱(黃興)이 상하이까지 내려와 “민립보는 파괴와 건설을 동시에 해냈다. 파괴는 격렬했고 건설은 온건했다. 혁명가들이 본받아야 한다”며 50만원을 쾌척했다. 위유런은 “뜻은 고맙지만 출처가 불분명한 돈”이라며 거절했다.
1913년 3월, 총리 취임을 눈앞에 둔 국민당 이사장 쑹자오런(宋敎人)이 상하이 역두에서 암살당했다. 위유런은 현장 목격자 중 한 사람이었다. 위안스카이의 공화제 파괴 기도를 파악한 위유런은 쑨원과 다시 합쳤다. 군대를 일으켜 쑨원의 2차 혁명에 힘을 보탰다.
1928년 2월 2일, 중국 최대의 혁명정당이었던 국민당 중앙집행위원회 4차 회의가 난징에서 열렸다. 위유런은 장제스, 탄옌카이(譚延闓)와 함께 주석단에 앉아 회의를 주재했다. 6일간 계속된 회의는 중앙당 개조안을 의결했다. “국민정부를 개조하고 군사위원회를 설립한다. 혁명세력이 연합해 북벌을 완수한다.” 중국의 운명을 가르고도 남을 회의였다. 북방을 지배하던 봉천군벌 장쭤린(張作霖)의 북양정부가 정통성을 인정받을 때였다.
군사위원에 선출된 위유런은 당 원로 장징장(張靜江), 차이위안페이(蔡元培) 등과 연합을 서둘렀다. 북벌군 사령관 장제스를 군사위원회와 중앙정치위원회 주석에 추대했다. 펑위샹(馮玉祥), 옌시산(閻錫山), 리쭝런(李宗仁)과 연합한 장제스는 4개월 만에 수도 베이징을 압박했다. 근거지 동북으로 돌아가던 장쭤린은 중도에 폭사했다.
위안스카이 사후 중국에 군림했던 북양군벌 통치가 끝나는 듯했지만, 장쭤린의 아들 장쉐량(張學良)은 호락호락한 인물이 아니었다. 순식간에 친일세력을 제거하고 동북을 장악해 버렸다. 동북3성은 28세에 불과한 장쉐량의 천하로 변했다.
위유런은 장씨 집안과 인연이 깊었다. 3년 전, 장쭤린과 담판을 하겠다며 동북행을 자청한 적이 있었다. 회담은 실패로 끝났지만 수확도 있었다며 즐거워했다. “장쭤린은 마적 출신이다. 옛날 같으면 난세에 황제가 되고도 남을 사람이지만, 주책없을 정도로 완고한 게 흠이다. 아들 장쉐량은 물건이다. 변화에 민감하고 대국을 보는 눈이 있다. 엄청난 일을 해 낼 테니 두고 봐라.”
동북3성 보안사령관에 취임한 장쉐량은 난징 국민정부에 복종을 선포하며 통일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위유런은 자신의 예측이 정확했다며 흐뭇해했다. 21살 연하인 장쉐량을 윗사람으로 깍듯이 모셨다.
1936년 12월, 장쉐량이 시안에서 장제스를 감금했다. 공산당 섬멸에 혈안이 돼 있던 장제스에게 국·공합작을 요구했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위유런은 “천고의 영웅(千古英雄)”이라며 장쉐량을 지지했다.
장쉐량의 요청을 수락하고 감금에서 풀려난 장제스가 장쉐량을 연금했다. 분노한 위유런은 장쉐량의 석방을 물고 늘어졌다.
1949년 1월, 인민해방군이 베이핑에 입성하자 장제스는 하야했다. 성명을 발표하고 내려오는 장제스를 위유런이 가로막았다. “장쉐량에게 자유를 줘라. 국가 지도자는 빈말을 해서는 안 된다. 감찰원장 자격으로 요구한다.” 장제스는 위유런을 뿌리쳤다. “난 이미 하야했다. 리쭝런에게 자리를 내줬다. 내가 간여할 바 아니다.”
위유런은 총통대리 리쭝런의 집무실 문턱을 하루가 멀게 넘나들었다. 결국 장쉐량 석방 지시서에 서명을 받아냈다.
장쉐량을 관리하던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은 리쭝런의 지시를 거부했다. “군사위원회는 당에 예속된 기관이다. 정부기관이 아니다. 총통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 총통 자리를 내놨지만 국민당 주석은 여전히 장제스였다.
위유런은 고향에 칩거 중인 장제스를 찾아갔다. 위유런이 왔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이놈의 영감 또 시작했다”며 넌덜머리를 냈다. 아들 장징궈에게 뒷일을 맡기고 산속으로 피해버렸다. 무릎 꿇고 고개 숙인 장징궈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위유런은 한숨을 내쉬며 난징으로 돌아왔다. “자식들이 아비보다 나으니 천만다행이다.” <계속> <323>글씨 인심’ 후했던 위유런, 쑹즈원·쿵샹시에겐 인색 |제324호| 2013년 5월 26일
▲대륙 시절, 부총통에 선출된 경쟁자 리쭝런(李宗仁)에게 축하인사를 건네는 심계원장 위유런(오른쪽 둘째). 1948년 4월 29일, 난징. 다음날 감찰원장 임명 통보를 받았다. [사진 김명호]
초서의 성인(草聖) 위유런은 많은 일화를 남겼다. 당장 생각나는 대로 몇 편만 소개한다. 위유런은 열한 살 때 왕희지(王羲之)의 아자첩(鵝字帖) 연습을 시발로 매일 붓글씨를 썼다. 청년 시절엔 북위(北魏:386∼557) 비첩(碑帖)의 장중함에 심취했다.
스스로 “중년에 들어서면서 초서에 흥미를 느꼈다. 처음 3년간은 하루에 한 글자만 수백 번씩 썼다. 한 일 자(一)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했다. 아무리 피곤해도 화선지를 대하면 정신이 들었다”고 할 정도로 중년 이후엔 초서(草書)에만 매달렸다.
현존하는 위유런의 작품은 대략 1만 점을 상회한다. 다작이다 보니 저명 서예가 선인뭐(沈尹默)의 조롱을 받았다. “위유런 원장은 글씨를 너무 많이 쓴다. 무슨 물건이건 희소가치가 있어야 한다. 장차 내 것보다 값이 덜 나갈 테니 두고 봐라.” 위유런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귀해야 가치가 있구나”라며 웃어 넘겼다. 아무리 도처에 널려 있어도 명품은 명품이기 마련, 지금은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10년 전만 하더라도 선인뭐의 작품 값은 위유런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다.
감찰원장 위유런은 집안에 경비원을 두지 않았다. 누구나 드나들게 내버려두고, 돌아갈 때는 글씨를 한 점씩 써줬다. 무턱대고 글씨를 선물하지는 않았다. 맘에 드는 사람에게만 써줬다. 사회적 지위나 직업 따위는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퍼스트 레이디 쑹메이링의 친오빠이며 중국의 재정을 한 손에 쥐고 있던 쑹즈원(宋子文)은 위유런의 글씨를 유난히 좋아했다. 당대의 명장(名匠)이 만든 부채를 구입하자 위유런을 관저로 초청했다. 차가 몇 순배 돌아가자 부채를 정중히 내밀며 몇 자 부탁했다. 위유런은 연금으로 행방이 묘연한 장쉐량(張學良)의 안위만 물으며 붓을 들지 않았다. 장제스의 동서 쿵샹시(孔祥熙)도 행정원장 시절 비슷한 꼴을 당하고 끙끙 앓은 적이 있다.
수도 난징(南京)의 푸즈먀오(夫子廟) 인근에 있는 찻(茶)집 여종업원의 청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맨 정신에 “옥으로 만든 주전자에 청춘을 담아 팔며 빗소리를 즐긴다”를 즉석에서 선물했다. 작품을 받아 든 여인이 날아갈 듯 절을 올리며 수염의 유래를 묻자 어쩔 줄 몰라 하던 모습은 가관이었다. “젊었을 때 신문기자를 한 적이 있었다. 새벽부터 오밤중까지 돌아다니느라 깎을 시간이 없었다. 수염이 길다 보니 세수를 안 해도 표가 안 나서 편했다.” 위유런은 눈치는 없는 사람이었다. 젊은 여인이 “나도 수염 긴 사람과 결혼하겠다”는 말을 여러 번 해도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다.
세계적인 중국음식점 ‘鼎泰豊’도 위유런의 글씨다. 원래는 가짜를 걸어놨지만 사실을 안 위유런이 간판을 떼게 하고 ‘鼎泰豊油行’을 직접 써줬다. ▲于右任의 草書 讀山海經 四屛
讀山海經 - 陶淵明
孟夏草木長 繞屋樹扶疎 衆鳥欣有託 吾亦愛吾盧 旣耕亦已種 時還獨我書 窮巷隔深轍 頗回故人車 歡言酌春酒 摘我園中蔬 微雨從東來 好風與之俱 汎覽周王傳 流觀山海圖 傘仰終宇宙 不樂復何如
산해경을 읽으며
초여름 초목은 나날이 자라고 집 둘레 나무는 잎가지가 무성하다. 새 떼는 깃들 곳에 즐거워하고 나 또한 내 집을 사랑하노라. 이미 밭 갈고 씨 뿌렸으니 이제는 나의 책을 꺼내 읽는다. 내 사는 곳 궁벽한 골목 깊은 곳에 있어 몇 번이나 친한 이의 수레도 되돌아간다. 즐기어 혼자 봄술을 마시며 정원의 나물 뜯어 안주를 한다. 보슬비는 동쪽에서 날아오고 좋은 바람이 함께 불어오는구나. 찬찬히 주왕전을 꺼내어 읽고 두루 산해도를 바라본다. 고개 끄덕이는 동안 우주를 다 돌아보니 이 보다 더한 즐거움이 어디 있으랴.
위유런은 홍콩에 있는 외손자 류준이(劉遵義)를 총애했다. 류준이도 방학만 되면 할아버지를 찾아왔다. “할아버지는 서예와 독서를 가장 중요시했다. 생활은 평범하고 소박했다. 밥상에 국수와 만두 외에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양복 입은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긴 전통복장에 헝겊으로 만든 신발만 신고 있었다. 홍콩으로 돌아갈 때마다 글씨를 한 점씩 써서 가방에 넣어주곤 했다. 1961년, 미국 유학 떠나는 날 통증을 무릅쓰고 비행장까지 나와서 나를 송별했다. 내 유학비용을 마련하느라 은행에서 돈 빌렸다는 말을 듣고 몇 날 며칠을 울었는지 모른다.”
1964년 11월 10일 위유런이 타이베이에서 세상을 떠났다. 총통 장제스가 성명(褒揚令)을 발표했다. “행동에 덕이 묻어났던 사람. 항상 꾸밈이 없고 온후했다. 일찍이 뜻이 맞아 함께 혁명을 고취했지만 깊이는 헤아릴 방법이 없었다. 위험에 처할수록 건필에 힘을 더해, 바람도 기개를 누르지 못했다.” 타이베이에서 가장 높은 관음산에 모시라며 장지(葬地)도 직접 물색했다.
등산 동호인들은 대륙을 그리워하던 위유런의 소원을 풀어주겠다며 모금에 나섰다. 해발 3997m 위산(玉山) 정상에 대륙을 향해 동상을 건립했다. ‘大陸可見兮, 不再有痛哭’(대륙을 볼 수 있으니, 다시는 통곡하지 않겠다)를 새겨 넣었다.
위유런 사망 20여 년 후 국·공 간의 묵은 원한이 풀리기 시작했다. “조국을 두 동강 낸, 못난 조상 소리들을 생각하면 진땀이 난다”던 위유런의 탄식은 기우(杞憂)였다. 양쪽이 만났다 하면 기업인, 학생, 정치가는 물론 심지어 건달들까지도 위유런의 ‘望大陸’을 노래하기 시작했다. 대륙, 대만 할 것 없이 연말에 열리는 시 낭송에도 ‘望大陸’은 빠지는 법이 없다.
2006년, 상하이 푸단(復旦)대학이 설립자 중 한 사람인 위유런의 기념관 건립계획을 발표했다. 소식을 접한 홍콩 중문(中文)대학 교장 류준이는 학생 시절 타이완에 갈 때마다 할아버지가 써줬던 작품 20여 점을 푸단대학에 영구임대 형식으로 기증했다. 상하이로 보내기 전에 중문대학 문물관에서 작은 전시회를 열었다. 홍콩인들에게 조부의 작품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선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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