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평하신 하느님
- 조규만 주교님 도서 '날마다 생각한 하느님'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들어보라. 내 길이 공평하지 않다는 말이냐? 오히려 너의 길이 공평하지 않은 것 아니냐?” (에제 18,25)
사노라면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처럼,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탈렌트를 주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두 탈렌트, 그리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한 탈렌트를 주시듯이 (마태 25,14-30; 루카 19,11-27 참조), 어떤 사람은 좋은 나라에, 좋은 집안에, 좋은 가족과 환경 속에 태어납니다. 재주와 미모도 겸비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형편없는 나라에, 가난한 집안에, 재주도 없고 얼굴도 받쳐 주지 못합니다. 딸랑 건강 하나만을 받고 태어납니다. 또 누구는 태어나서 잘못한 것도 없이 고생만 하다가 삶을 마칩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은 나쁜 짓을 많이 했는데도, 사람을 많이 죽였는데도, 국화꽃으로 장식된 영구차로 영웅 대접을 받으며 국립묘지에 안장됩니다.
한 사람을 죽이면 살인자가 되지만 많은 사람을 죽이면 영웅이 되는 세상입니다. 참으로 불공평한 세상입니다. 불가에서는 이 모든 불평등은 윤회설에 의한 전생의 업보라고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은 전생에 많은 선업을 쌓은 까닭이요, 불행을 겪는 것은 전생의 악업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라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세상을 만드시고 사람들의 생사화복과 만물의 운행을 섭리하신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때때로 자신에게 불행이 느껴지면, 아니 자신만 불행하다고 느껴지면 공평하신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흔들릴 때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믿는 하느님의 공평하심은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데 근거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죽음 너머라도 공평하게 하신다고 믿습니다. 아무도 죽음을 겪어 보지 못해서 죽음 건너편에 대해서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죽음 이 편만을 보고 불공평하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죽음 건너편의 공평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알려 주신 한 가지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라자로의 이야기입니다. 부자는 저승에 가서 고통을 받습니다. 거지 라자로는 아브라함 곁에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연유를 설명합니다.
“너는 살아 있는 동안에 좋은 것들을 받았고, 라자로는 나쁜 것들을 받았음을 기억하여라. 그래서 그는 이제 여기에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초를 겪는 것이다.” (루카 16,25)
또 한편 탈렌트에 관한 비유를 자세히 관찰하면 하느님의 공평하심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섯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으로 다른 다섯 탈렌트를 더 벌었고, 두 탈렌트를 받은 사람은 그것으로 다른 두 탈렌트를 더 벌었습니다. 주인은 다섯 탈렌트로 다섯 탈렌트를 더 번 사람이나 두 탈렌트로 두 탈렌트를 더 번 사람에게 똑같은 말을 합니다.
“잘하였다. 착하고 성실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성실하였으니 이제 내가 너에게 많은 일을 맡기겠다. 와서 네 주인과 함께 기쁨을 나누어라.” (마태 25,21)
만일 한 탈렌트를 받은 사람도 그것으로 다른 한 탈렌트를 벌었다고 한다면, 주인은 똑같은 칭찬을 그에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하느님은 공평하신 분입니다.
비슷한 내용을 전하는 루카 복음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미나로 열 미나를 벌어들인 사람에게 임금은 열 고을을 맡깁니다. 한 미나로 다섯 미나를 벌어들인 사람에게는 다섯 고을을 맡깁니다. 한 미나로 한 미나를 벌어들였다면 그에게는 한 고을을 맡겼을 것입니다. 그들의 노력에 따라 대가를 지불하시는 공평하신 하느님이십니다.
사실 탈렌트는 어마어마한 단위의 선물입니다. 한 탈렌트를 드라크마나 데나리온으로 계산하면 6000 드라크마가 됩니다. 한 드라크마나 한 데나리온은 하루 품삯에 해당됩니다. 그렇다면 거의 20년의 봉급에 해당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느님께서 한 탈렌트만 주셨다 해도 그것은 엄청난 선물입니다.
사실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능력과 재주를 주셨습니다. 그 능력을 우리가 찾아내지 못하고, 또 알면서도 활용하지 못하는 데 우리의 잘못이 있습니다. 그 능력과 재주를 썩히는 일은 마땅히 벌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상선벌악의 법칙이요, 하느님의 공평하심의 기본입니다.
하느님의 공평하심을 말하자면, 신앙을 들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께서는 당신과 함께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으로 믿음을 내세우셨습니다. 만일 하느님께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사람을 미모로 결정한다면, 그건 너무 불공평한 일입니다. 미모는 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치러 성적순으로 결정한다고 해도 불공평한 일입니다. 머리 좋은 것도 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많이 배운 사람에게나 적게 배운 사람에게나 믿음은 공평합니다. 잘생긴 사람이라고 해서 더 잘 믿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어린아이라고 해서 더 믿기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우리나라 순교 성인들을 보면 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103위 순교 성인들 가운데에는 어린 유대철 베드로 성인도 있었고, 노인 정의배 마르코 성인도 있었으며, 승지 남종삼 요한 성인이 있었는가 하면, 하녀의 신분이었던 정철염 카타리나 성녀도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남녀노소, 성직자와 평신도, 양반과 하인,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그처럼 믿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하느님이 공평하신 또 하나의 이유는 바로 죽음이라 생각합니다. 죽음 역시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역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구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짧은 인생을 살고, 어떤 사람은 장수를 하고, 누구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며, 또 누구는 고통스러운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짧고 긴 것은 상대적인 것입니다. 영원하신 하느님 편에서 보면 도토리 키 재기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공평하심은 죽음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 데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믿음에 따라 고통스러운 죽음도 편안히 맞이하는 경우가 있고, 편안한 죽음도 고통스럽게 맞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시인 김요한이 이렇게 '두 사람'을 노래하였습니다.
“나는 보았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재산이 많고 욕심이 가득한 그 사람은 울부짖으며 조금만 더 살고 싶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도울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보았습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가난하지만 사랑이 많은 그 사람은 슬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요히 기도하며 편안하게 떠났습니다.
나는 보았습니다. 죽은 두 사람을.
한 사람은 조용히 눈을 감고 평화롭게 잠이 들었고, 또 한 사람은 괴로움으로 재물을 꼭 쥐고 죽었습니다.
나는 그때 보았습니다. 이 세상에도 천당과 지옥이 있다는 것을.”
하느님께 공평하지 않으신 것이 있다면 한 가지가 있습니다. 하느님의 용서입니다. 그것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큰 죄를, 그렇게 많은 죄를, 끊임없이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도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거기에 합당한 보속으로 처벌하지도 않으시고 용서하실 수 있습니까? 그것만은 공평하지가 않습니다. 정의의 차원에서는, 그건 오직 하느님의 사랑의 차원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 하느님의 공평하심입니다.
- 날마다 생각한 하느님 / 조규만 지음 / 가톨릭출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