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기림사는 신라 선덕왕 12년(643) 창건되었다고 한다. 기림사라고 불리기 전에는 임정사로 불렸는데 이 절에는 광유선사가 머물고 있었고 이 임정사가 선덕왕 12년 원효대사에 의해 기림사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함월산 기림사는 동해에서 신라 경주에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하였는데 과거 이 길을 통해서 석탈해가 경주에 들어가 탈해왕이 되기도 하였다.
기림사의 창건주로 알려진 광유선사와 관련된 설화에 의하면 그는 신라승려가 아닌 외국승려 곧 인도승려로 여겨지는데 그렇게 된 원인은 기림사의 지정학적 위치와 기림사가 인도의 기원정사에서 절 이름을 따온 것과 연관이 있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광유선사와 원효대사가 기림사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언급은 후대에 덧붙여 진 것으로 생각된다. 원효의 경우 그가 정식으로 승려가 된 것이 648년으로 선덕왕 12년 당시에는 절 이름을 바꿀만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숭유억불정책하의 조선에서 기림사는 세종대(1418~1450) 해인사, 단속사, 견암사와 더불어 경상도의 4대사찰로 130결의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연산군 7년이 조성의 건칠보상좌상 좌대에서 기림사가 여전히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임진왜란시에는 신라 때의 호국사찰의 성격을 이어받아 경주지역의 승병과 의병활동의 중심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대적광전 봉안된 비로자나불상은 임진왜란 직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1986년 이 불상의 복장에서 고려시대 사경을 비롯한 많은 복장유물이 발견되어 세간의 관심을 끌었으며 현재 이 유물들은 보물로 일괄 지정되어 현재 유물전시관에 전시하고 있다. 이후 기림사는 조선후기에 여러 차례 중수를 거듭하였으며 일제시대에는 31본산의 하나였다.
자료출처:전통사찰관광안내

기림사 부도

기림사 일주문

기림사 천왕문

기림사 사천왕상

기림사 사천왕상

기림사 대적광전 가는 길

기림사 진남루
문화재자료 제251호
기림사는 함월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세웠다. 기림사란 이름은 부처가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인도의 기원정사를 뜻한다. 진남루는 이 절의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남쪽에 자리잡고 있다. 지은 시기는 알 수가 없고 다만 조선 영조 16년(1740)에 쓴 사적기에도 기록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그 이후에 세운 것임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인 익공 양식으로 꾸몄다. 이 건물은 호국 사찰로 승병 활동과 관련이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기림사 응진전
시도유형문화재 제214호
기림사는 선덕여왕 12년(643)에 천축국의 승려 광유가 세웠으며, 이름은 부처님이 살아있을 때에 세웠던 인도의 기원정사를 뜻한다. 응진전은 기림사 내에 있는 건물로 지어진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후기에 다시 지은 것으로 추측한다. 앞면 5칸·옆면 2칸이며 지붕 옆면이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되어있다. 기둥 위에서 지붕을 받치는 공포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양식의 건물로 단정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안에는 오백나한상을 모시고 있다. 건축양식을 볼 때 부분적으로 조선 중기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조선 후기(18세기 이후)의 건물이다.

기림사 삼층석탑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05호
응진전 앞에 세우져 있는 일반형 석탑으로 비교적 완전한 탑이다. 이 탑의 하층기단은 갑석(甲石)부터 남아 있고, 상대(上臺) 중석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撑柱) 1주가 모각(模刻)되어 있으며, 그 위에 놓여 있는 상대갑석의 밑면에는 부연이 있다. 또한 상면에는 4단의 층급괴임이 있습니다. 각 옥신(屋身)에는 우주가 모각되어 있고 초층옥신은 장대하나, 2층의 체감률이 크기 때문에 탑 전체가 고준한 느낌이 든다. 2~3층의 옥개석(屋蓋石)은 각 층 4단의 층급 받침이 있고, 추녀는 수평하며 낙수면(落水面)은 완만하나 전각에서 약간 반전하고 있다. 상륜부(相輪部)에는 노반(露盤), 복발(覆鉢), 앙화(仰花)가 완전하게 남아 있다.

기림사 응진전내

기림사 대적광전
보물 제833호
기림사는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인도의 스님 광유가 세워 임정사라 불렀고, 그 뒤 원효대사가 새롭게 고쳐 지어 기림사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 절은 천년에 한번 핀다는 한약초 ‘우담바라’가 있었다는 전설이 있기도 한 곳이다.
대적광전은 지혜의 빛으로 세상을 비춘다는 비로자나불을 모셔 놓은 법당을 가리킨다. 선덕여왕 때 세워진 후 여러 차례에 걸쳐 수리한 것으로 지금 건물은 조선 인조 7년(1629)에 크게 고쳤을 때의 것으로 보인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이다. 겉모습은 절의 중심 법당답게 크고 힘차며 안쪽은 비교적 넓은 공간에 정숙하고 위엄있는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공포에 조각을 많이 넣어 17세기 건축 흐름을 알 수 있고, 특히 수리를 할 때 옛 모습을 손상시키지 않아 중요한 건축사 연구 자료가 된다.

기림사 대적광전 문살

기림사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
보물 제958호
신라 선덕여왕 12년(643) 승려 광유가 창건하여 임정사(林井寺)라 부르던 것을 원효대사가 기림사로 고쳐 부르기 시작하였다. 기림사 대적광전에 모셔진 불상인데 향나무로 틀을 만든 뒤 그 위에 진흙을 발라 만든 것이다. 중앙에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좌우에 약사(藥師)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협시로 배치한 형태이다. 근엄하면서도 정제된 얼굴, 양감이 풍부하지 않은 신체의 표현, 배부분의 띠로 묶은 옷 등에서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된다.

기림사 약사전
문화재자료 제252호
기림사는 함월산 기슭에 있는 절로 신라 선덕여왕 12년(643)에 세웠다. 기림사란 명칭은 부처가 생전에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던 인도의 기원정사를 뜻한다. 중심 건물인 대적광전 동쪽에 있는 약사전은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는 불당이다. 세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조선 효종 5년(1654)에 고쳐 세운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에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기둥 위와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겉모습이 부드러우면서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축물이다.

기림사 약사전내

기림사 관음전

기림사 관음전내

기림사 요사

기림사 삼천불전

기림사 삼천불전내

기림사 요사

기림사 명부전

기림사 명부전내

기림사 삼성각

기림사 삼성각내

기림사 범종각

기림사 매월당 사당

매월당 진영
기림사 찾아가는 길
경주시내에서 감포방향으로 4번국도를 타고 가다가 왕복2차선 산길로 접어들면 왼쪽에 덕동호의 수려한 모습이 보인다. 추령고개를 넘어 안동리 입구에서 929번 지방도로로 좌회전해서 4~5km쯤 들어가면 기림사 앞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