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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창조과학회 발췌게시 다시 생각해보는 창조의 순서와 그 내용
[“한국창조과학회” 김정훈]
창조과학 사역을 하면서, “성경”에 관하여 많은 질문을 받게 되는데, 한 번은 어떤 교인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한 가지 질문을 받게 되었다. ‘창세기’1장과 2장을 보면, 창조의 순서에 있어서 ‘언뜻 모순되어 보이는 부분이 있는데, 그 부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하는 질문이었다. 실제로, ‘창세기’1장에 보면, 식물이 먼저 창조되고(1:11-12) 그 후에 사람이 지은바 된 것으로(1:26-27) 기록되어 있는데,
2장에서는 그 순서가 바뀌어 마치 식물이, 사람보다 나중에 창조 된 것 같은 인상을 주는 기록이 있음으로, 이 부분에 대한 분명한 해석상의 정리가 있어야만 하겠다는, 생각을 필자 자신도 같이 하게 되었다. 아울러 이 기회에 ‘창세기’1장과 2장이 서로 어떤 관계에 있으며, 각각의 창조의 순서는 과학적 사실로 받아들이는데 아무런, 무리가 없는지도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창세기 2장의 성격부터 분명히 이해해 보도록 하자. 앞서 1장에서 ‘연대기적’인 창조의 기술(記述:기록 서술함)이 있은 후 그 결론이 2장 3절까지 이르러서 일단락을 지음을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 뒤에 이어지는 2장의 내용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2장에 나오는 창조의 내용은 1장과 서로 다른 창조의 기사를, 후대에 와서 편집하여 합쳐 놓은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 같은 주장은 소위 '문서설'에 그 기초를 두고 있는데, '문서설'이란 그 이론 자체에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성경”의 ‘영감성’을 부인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옴을 인하여, 사실 신앙생활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하는 이론이다. 여기서 2장4절이 뒤에 나오는 ‘창세기’2장 전체의 해석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신학교’ 구약학(舊約學)교수를 지낸 ‘에드워드 J 영(Edward J. Young)박사’는 이 구절을 단호[단언]하게 표제 문(表題文:내용전체의 간결 문- 제목)으로 본다. 다시 말하면, 4절은 앞서 1장의 창조의 내용에 대한 종결[결정]문이 아니라, 새로운 문단을 여는 표제 문으로 봐야 옳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4절에서 사용된 '대략'이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톨레돗'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이 단어가 ‘창세기’에서만 열 번이나 사용 되고 있으며, 그 때마다 새로운 문단을 시작할 뿐만 아니라, 앞서 기술한 어떤 주제에 대하여 보다 구체적이고, 자세한 설명으로 범위를 좁혀 가며 기술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렇다면, 2장 4절에서도 이 구절이 사용됨으로써 앞서 1장에서 기술한, 창조의 내용을 이제 보다 자세하게 그 중의 어떤 부분에, 초점을 맞추어 기술하려고 한다는 게 자명[분명]해 진다.
결국, ‘창세기’ 2장은 1장의 내용을 보완하며, 동시에 ‘에덴동산’으로 창조의 시선이 모아간다. 이는 또한 뒤에 3장에 나오는 ‘에덴동산’에서의 인류의 타락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3장의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끌어들이는 역할을 한다. ‘창세기’ 2장의 성격이 1장의 많은 창조 내용 중에서, 특히 인간의 창조와 ‘에덴동산’의 환경을 1장에 대하여, 보완적[부족한 부분보충]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진다면,
그 안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와 내용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2장5절은 분명히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하여야 할 부분은, '들'과 '밭'은 동일한 원어에서 나온 단어로, 인간의 농사를 암시[묵시]하고 있는 단어라는 점이다. 실제로 영어성경은 이 부분을 번역할 때, 들의 초목(plant of the field)과
밭의 채소라는 말에서, 같은 field(밭)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또한 이 같은 사실은 5절 앞부분에 아직 비가오지 않았다는 사실과, 경작할 사람이 없었다는 기록에 의해 더욱 뒷받침되고 있다. 사실 밭이라는 것은 인간이 타락함으로써 얻게 된 결과로써, 가시덤불과 엉겅퀴와 싸우면서 이마에 땀을 흘린 후에야, 비로소 먹을 수 있는 식물을 얻어낼 수 있는, 땅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 아닌가?
결국 5절에 기록된 내용은 앞서 1장에서 창조의 셋째 날, 풀과 씨 맺는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과목으로 표현된 지상의 모든 종류의 식물이, '땅'에는 이미 창조되었으나(1:11-12), 인간의 노력에 의하여 땀 흘려 농사지으며 가꾸게 될, '밭'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았다는(2:5) 뜻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그럼 여기서, ‘창세기’1장에 기록된 창조의 순서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 보기로 하자.
우선 하나님께서는 1장1절의,'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으로, 지구와 함께 모든 우주(?)에 필요한 구성물질을 창조하셨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여기서 사용된 창조하다의 ‘히브리어’ 'bara'는, 무에서 유의 창조를 가리키는 특별한 단어로서, 이 일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임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지구는, 아직 혼돈하고 공허한 상태에 있었다(2절).
이제 하나님께서는 빛을 창조하시고, 그 빛을 중심으로 지구를 한 바퀴 자전시키심으로, 저녁이 되며 아침을 오게 하여 지구에 첫째 날을 되게 하셨다(3-5절). 여기서 창조된 빛은 태양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우주의 어딘가 에서 단지 지구를 비추는, 빛의 근원에 대한 창조를 가리킨다고 여겨진다. 한 가지 더 주목하여 말할 것은 여기서 창조된 빛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이 하나님 자신이 빛을 비추는
그런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하나님 자신이, 피조물이 되는 우스꽝스런 결과를 낳고 말기 때문이다. 둘째 날은 궁창을 만드시고, 물을 둘로 나눠 궁창위의 물과 그 아래의 물로 나누시었다.(6-8절). 여기서 궁창위의 물은 당시 지구의 환경과, 이후에 ‘노아의 홍수’ 사건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단서[실마리]가 됨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셋째 날에는, 육지가 드러나면서 식물이 만들어진다(9-13절).
식물은 본래 광합성을 할 때 태양 에너지를 필요로 하지만, 이 때 창조된 식물은 이미 잎사귀가 무성한 장성한 식물로서, 태양이 있기 전에(?) 만들어 졌어도 다음 날 태양이 나올 때까지, 충분한 양의 에너지가 이미 그 잎사귀에 저장되어 있었을 것이며, 또한 첫째 날 만들어진 보다 근원적인 빛이 지구를 비추고 있으므로, 생존에 필요한 에너지라는 측면에서 하등의 문제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이어서 하나님은
놀랍게도 넷째 날에 가서야, 비로소 태양과 달과 별을 만드시는데(14-19절), 태양에서 지구가 떨어져 나왔다는 식의 ‘진화론적’ 사고와는, 정반대의 순서로 창조를 하시었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이스라엘’ 주변의 ‘이방족속’들은 한 결 같이 태양을 하나의 신으로, 숭배하였던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태양을, 하나의 피조물로써 넷째 날 만드신 것은 남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이제 태양이 창조됨으로써 지구를 비추는 빛의 역할을 태양과 달, 그리고 별들이 맡아 하게 된다. 다섯째 날이 이르러 하늘의 새와 물속의 생물을 창조하시는데(20-23절), 이때 다시 한 번 'bara'라는 특별 동사를 사용하신다. 아마도 이제까지의 식물을 포함한 다른 피조물에는 없는 무언가를 동물을 창조하실 때 새로이 창조하신 것 같다. 어떤 학자는 이것을 'soul'(영, 혼)로 보는데, 꽤 설득력이 있는 생각이다.
이제 여섯째 날이 이르러서는, 땅 위의 모든 생물과 사람을 지으시는데(24-31절), 사람을 창조하실 때 다시 한 번 'bara'(영혼, 정신)가 사용됨으로, 이제까지의 피조물에는 없는 근본적인 새로운 것을, 사람에게 새로이 창조하여 주심을 볼 수 있다. 동물을 포함한 모든 다른 피조물에서는 찾아 볼 수 없고, 오직 사람만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하나님의 형상, 생령('spirit'-프뉴마, 영혼)이 아닐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왜 하필이면, 6일간에 걸쳐서 창조를 하셨을까? 그 분은 본래 전능하시어서 단 하루 만에도, 천지를 지으실 수 있는 분이 아닌가? 그 이유는 바로 하나님께서 제 칠일 째 되는 날 친히 안식을 하심으로(2:1-3), 우리도 하나님처럼 6일 동안 힘써 일하고 7일에는, 안식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기억하는 날을 갖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출20:8-11).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진리임에 틀림이 없다.
‘진화론적’ 사고에 익숙하여, 창조의 각 하루를 수억 년의 긴 연대로 인식하는 혹자(或者:어떤 이)들에게는, 6일 창조내용이 오히려 당황스럽기 짝이 없다. 가령 셋째 날 만들어진 식물이 수억 년 동안을, 태양도 없이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6일의 노동 후 7일째 안식의 개념은, 또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수억 년을, 안식하셨어야만 된다는 결론이 아닌가? 성경은 창조의 기록에 있어서 분명하다.
‘창세기’1장은 창조의 순서를 6일 간에 걸쳐 명시하고, 2장에서는 초점을 ‘에덴동산’으로 모아 3장에서 타락된 존재로서의, 우리의 실체를 밝힐 준비를 한다. ‘창세기’1-2장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는 인간이 상상하여, 쓸 수 있는 종류의 글이 아니다.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다.
<'이브의 배꼽, 아담의 갈비뼈' 중에서>
창세기1장-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
[“한국창조과학회” 이재만]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1:5). 진화론적 사고가 들어온 이래로 성경은 이전에 겪지 못했던 어려움을 맞아왔다. 특별히 ‘창세기’1장인데 그 중에 "욤(day)” 즉 하루에 대한 논쟁이다. 즉 ‘고생대’ ‘중생대’하는 ‘진화론적’ ‘지질학’과 ‘빅뱅’과 같은 ‘천문학’의 진화론적 가설로 교육을 받으면서이다..
‘챨스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 -영국 침례교목사, 보수적 신학자)은 ”과학이 무엇인가? 과학이 사람의 무지함을 숨기려는 방법이 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었다. 과학자들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담대히 단언한다. 그리고 우리의 어떤 것보다(그들의 말을) 훨씬 경솔하게 믿도록 요구한다.”라고 하며, 과학자들 역시 타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앞서 갈 수 없음을 경고했다.
‘종교개혁’ 시대에 ‘신부’들이 오히려 모든 것이 6일이 아닌 ‘하루’에 또는 ‘순간에 창조’되었다고 말했던 적이 있다. 이때 ‘마틴 루터’는 ”‘모세’가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을 6일 동안 창조했다.”라고 썼다면, 6일 전체가 ‘하루’였다는 식의 어떤 주석도 감히 생각하지 마라. 그러나 만약 당신이 하나님께서 6일 동안 행하셨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다면, 당신보다 훨씬 많은 것을 아시는 성령께 의지하라...
그의 말씀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마음대로 바꾸는 것은 올바르지 않다.”고 사람의 생각에 성경을 맞추는 것의 위험성을 지적했다. 비슷하게 ‘존 캘빈’도 이야기 했다. ”…지금 세상은 끝으로 가고 있으며, 아직 6천년에 도달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창조)사역은 순간이 아니라, 6일 동안에 완수 되었다.” ‘루터’나 ‘칼빈’ 모두는 당시교회가 성경으로 돌아가게 한 ‘개신교’의 분수령을 이룬 사람들이다.
이들 모두는 ‘창세기’1장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며, 지구의 역사도 성경의 역사로 보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성경으로 돌아가 보자. ‘창세기’1장 밖에서 저녁과 아침이란 말이, ‘욤’과 함께 쓰였을 때나 아닐 때나, 보통의 하루가 아닌 적은 찾아볼 수 없다. ‘히브리어’ '욤(day. 약1,200번)” 또는 '야밈(days. 약 700번)”가 성경에서 사용될 때는 보통의 날로 사용되었는데, 시간의 의미로 사용되더라도 문맥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더 이상의 내용을 열거하지 않더라도, ‘창세기’1장의 하루 만을 특별히 취급할 이유가 없다. ‘요나’[선지자]가 물속에 3일 있었을 때나,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 돌았을 때에 대하여는 반대하지 않으면서(즉 기적은 인정하면서), ‘창세기’1장을 오늘날의 하루로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오직 기존의 ‘진화론적’ 편견이 남아있다고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아직도 성경으로 순수하게 들어가고자 준비가 덜 됐던지, 과학에 의해 성경이 흔들릴까 하는 불안감이 있는 것이 아닐까?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가 태양이 없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한다면, 아직도 ‘천동설’에 갇혀있는 사람이다. 태양과 상관없이 지구가 한 바퀴 돌 때, 저녁과 아침이라고 한다. 지구는 처음 창조될 때부터 돌고 있었다는 것이다. ‘욥’의 말 중에 ”땅을 공간에 다시며(26:7)”라는 말이나,
‘잠언서’의”궁창으로 해면에 두루 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When He set a compass upon the face of depth,깊음의 표면 위를 둥글게 에워쌀 때, 8:27), ‘이사야서’의 ”그는 땅위 궁창에 않으시나니(He sit upon the circle of the Earth,지구의 원위에 앉으시나니,40:22)”등은 둥근 지구가 허공에 떠 있음을 묘사한다. 그 둥근 지구가 처음부터 돌고 있다는 것을, ‘창세기’1장은 계속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1장의 하루를, 오늘날의 하루로 고백하는 것은, 믿음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바로 나의 어떤 생각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토[주제의 단어에 다른 단어를 끼워 넣어 또 다른 단어를 만들기]를 달지 [논쟁하지]않겠다는 자세[믿음의 순종]인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내(한정된) 생각에 집어넣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을 (완전한)하나님 말씀에 맞추겠다는 고백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이 있는데, 그 고백의 순간에 형용할 수 없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유 함이 넘치는 것을 아는가! [끝]
***** 공감가는 부분이 있어서 보완정리하여 게재 하였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