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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안에서 사는 삶
빌립보서 4:4~13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본문 말씀은 그 편지 빌립보서의 후반부로서, 이 부분에서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삶의 모습을 확인하게 됩니다. 4절 전반절에 “주 안에서”라는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주님과 함께 부활의 새 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주님을 모르고 내가 주인 되어 살던 삶과는 달리 이제 그리스도가 주인 되어 사는 새 사람으로 살도록 부름받은 자들입니다. 날마다 주님 안에서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의 이유와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전혀 다른 관점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주 안에 거하는 신자의 삶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사도 바울 자신이 그 본보기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신의 삶을 모델로 제시하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이 본문 말씀을 통하여 우리도 날마다 주님과 깊은 교제와 사랑을 나누면서, 성령이 주시는 충만한 은혜를 받아서 사도와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이 시대에 주 안에 거하는 신자의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주 안에서 사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어떠한 모습일까요?
첫째로, 항상 기뻐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빌립보서 4장 4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당부의 말씀은 이미 이 편지에서 썼던 말인데 또 다시 여기서 재언급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3:1 말씀에 보면,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고 하였습니다. 또한 빌립보서 2:17,18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고도 하였습니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지금 복음 때문에 감옥에 갇혀서 신체의 자유가 없고 궁핍하고 춥고 미래가 불안한 상황 속에서 불안해하고 두렵고 우울해하고 절망의 늪에 빠지기 쉬운 환경 속에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주님 안에 거하는 그의 신앙의 은혜 속에서 기뻐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살면서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도 주님 안에서 기뻐하라, 기뻐하라, 기뻐하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의 가르침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주님 안에서, 주님을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많은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영원한 지옥불에 던져져야 할 운명에서 벗어나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세상에서 시련과 역경이 있지만 우리가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고 주님께서 우리를 늘 함께해주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얼마든지 기뻐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 안에 거하는 주의 백성들의 심령 가운데 보내주신 성령 역시 기쁨의 영이십니다. 갈라디아서 5:22 말씀에서 이르기를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라고 하였으며, 로마서 14:17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역하시는 중에 칠십 인 전도대가 돌아와 보고하자 이를 들으시고 반응하실 때 기뻐하셨습니다. 이에 대하여 누가복음 10:21 말씀에서 이르기를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며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 거하는 자, 성령으로 충만한 성도는 비록 그의 일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아니할지라도, 야곱의 아들 요셉이나 사도 바울처럼 원치 않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고 할지라도, 혹시라도 병이 찾아왔다 할지라도 혹시라도 이런 저런 이유로 죽음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결코 우울과 슬픔과 좌절감에 사로잡히지 않고 도리어 기뻐하며 크게 기뻐하며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않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데살로니가전서 5:16~18)
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모두 주 안에 깊게 뿌리를 내리고 성령으로 늘 충만함으로써 이런 저런 일들로 인하여 침체하고 우울하고 낙심하기 쉬운 이 어두운 시대 분위기를 뛰어넘읍시다. 그래서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고 또 기뻐하는 삶을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너그러운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빌립보서 4:5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주 안에 사는 성도들의 삶 속에서 뚜렷하게 나타나야 할 특징은 관용의 태도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이 땅에 사는 동안에 늘 관용을 베풀며 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에 자기에게 무례한 자, 자기를 시험하는 자들에게조차 끝까지 인내하면서 그들 스스로 자기들의 어리석음과 악함을 깨달을 수 있도록 진리를 가르치기를 그치지 아니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초대하였을 때에 그 집에 기꺼이 가서 대접을 받으면서 그들에게 교훈할 기회가 되면 가르치기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심지어 완고한 그들에게 독설까지 퍼부으면서까지 그들이 돌이켜 회개하고 진리에 대하여, 우리 구주 예수님에 대하여 마음을 열고 받아들여서 그들이 살고 죽지 않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원수와 대적이 많았던 그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 그들에 대하여 관용을 베풀고 오래 참았던 것입니다. 실수가 많고 잘난 척하며 욕심이 많았던 자기의 제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고 여전히 실수 투성이요 허물이 많은 그들을 끝까지 너그럽게 대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가룟 유다의 정체를 알면서도 오래 참으셨고 체포될 당시에도 위선적인 입맞춤을 하려고 다가온 유다에게 주님은 “친구여 네가 무엇을 하려고 왔는지 행하라”(마태복음 26:5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자, 주 안에 거하는 자는 당연히 주님을 닮아 관용의 자세를 항상 견지하는 태도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5절 후반부에 “주께서 가까우시니라”고 하신 말씀은 아무래도 주님의 종말 심판을 언급하는 말씀으로 이해함이 자연스러울 것 같습니다. 누구나 주님 앞에 다들 서야 할 그 날이 멀지 않은데,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 날 주님으로부터 너그러운 판단을 받기를 누구라도 소망할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판단과 심판의 기준이 어떠함에 대하여 주님께서 이르신 바가 있으니, 다른 이들에게 가혹한 판단을 하는 사람은 가혹한 판단을 받겠고 관용을 베푼 사람은 주님으로부터 관용이 넘치는 판단을 받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6:37 말씀에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그러한 뜻입니다.
오늘날 남을 판단하기 쉽고 정죄하고 독설을 퍼붓기 쉬운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이들과 다투고 뒤틀려진 감정으로 원수를 맺고 저주를 퍼붓는 시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정치적 견해가 달라서 접점을 찾기 힘든 갈등이 서로간에 높은 담을 치고 마음의 골을 깊게 만들고 있는 갈등 증폭의 시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대적들이 그를 이단의 괴수, 거짓 선지자로 낙인을 찍고 불법적인 재판을 행하여 사형 선고를 내리고 이방인 총독 빌라도에게 정치적 압력을 가해서, 무죄로 풀어주려는 시도를 막아버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고 그 앞에 모셔서 쾌재를 부르면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내려와보라”고 조롱하며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 매달려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누가복음 23:34)
이렇게 관용과 용서와 인내와 사랑을 베푸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우리는 어떻게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겠습니까? 뉴아더주님께 조건없이 받은 그 큰 사랑과 용서와 자비를 기억하고서 우리도 세상을 살아갈 때에 만나는 원수와 대적과 해를 끼친 자들에 대하여 미움과 저주와 보복으로 되갚으려 하지 말고 도리어 힘써 관용과 자비와 오래 참음과 축복으로 대하는 자가 됩시다. 그것이 장차 우리가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주님으로부터 너그러운 용서와 사랑이 넘치는 심판을 받는 복을 받게 해줄 것입니다.
셋째로, 염려 대신에 기도함으로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아갑니다.
본문 말씀인 빌립보서 4장 6절과 7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여기서 보면 염려의 문제를 사도가 말씀합니다. 우리 시대에도 모든 사람들은 살다 보면 이런 저런 일들을 경험하면서 염려가 수시로 찾아와 마음이 어지러울 때가 종종 있지만 이천년 전에는 지금 우리보다 경제적으로 훨씬 더 열악한 시대 상황이었습니다. 경제적 수입원이 될 만한 일들도 지금처럼 많지 않았고, 수시로 전쟁이 터지고 수시로 기근이 생기고 메뚜기 떼들이 몰려들어서 흉작이 많았습니다. 가축이나 사람들에게 치명적인 전염병도 자주 돌았습니다. 체계적인 의료 시설도 많지 않았고 효과 없는 민간 요법이 성행하였고 무당들과 신전 사제들에게 찾아가서 기도를 받는 일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국가 권력 역시 폭력이 많았고 로마 제국은 식민지 국민들을 이등 국민으로 여기고 높은 세금으로 괴롭혔고 반란이 일어나면 잔인하고 칼창으로 무참하게 진압하곤 하였습니다. 그러니 당시 사람들의 수명은 몹시 짧았고 사는 나날 늘 불안과 염려에 시달리며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시대에 살고 있는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은 해결책을 여기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에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하나님께 나아가 청하라는 것입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주님께서 가르치신 바 산상 수훈의 말씀과 동일한 권면입니다. 염려와 근심은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것입니다.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없고, 수명을 한 시간도 더 연장시킬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마태복음 6:27).
그러한 염려꺼리, 근심꺼리가 있다면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로 아뢰어 맡김으로써 염려꺼리를 하나님께서 해결해주시도록 하라고 사도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할진대 마음속에 염려와 근심과 불안이 사라지고 그 대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놀라운 평강이 마음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주 안에 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독생자의 생명의 피를 대가로 지불하고서 사신 하나님의 아들 딸들입니다. 세상의 부모들도 자기 자녀들의 삶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먹이고 입히고 길러가고 앞길을 열어주려고 애를 씁니다.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어찌 자기 자녀들을 그냥 내버려두시겠습니까? 그들이 자기의 필요를 내놓고 간절히 호소하며 매달리며 기도하는데, 어찌 못 들은 척하고 외면하고 오래 참으시겠습니까? 자기 자녀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염려하고 근심하며 불안 가운데 계속 살아가도록 어찌 잠잠히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반드시 기도하는 그의 백성들의 마음에 하늘의 평강이 가득 차도록 성령의 감동을 주시고 염려꺼리들을 해결해주사 하나님께서 돌보시는 것을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해주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불안과 근심이 많은 이 시대에도 주 안에 거하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기도함을 통하여 마음이 늘 평안합니다. 여유가 있습니다. 두려움이 없습니다. 만약 근심과 불안에 마음이 짓눌린 채 있는 성도가 있다면 주님과 사도 바울이 이처럼 분명히 가르쳐주신 말씀을 기억하면서, 모든 염려꺼리를 기도와 간구로써 하나님께 아뢰기 바랍니다. 계속 하나님께 우리 문제를 아뢰시되 하나님께서 반드시 도와주실 것을 믿고 감사함으로 아뢰시기 바랍니다. 그럴진대 머지않아 주님의 영께서 여러분의 심령에 평안을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문제들 역시 머잖아 해결해주시는 은혜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이 약속을 믿고 우리 모두 평강이 넘치는 삶의 주인공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
넷째로, 마음의 생각들과 행실이 아름답고 건전하고 사랑스럽게 변화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8절과 9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주 안에 거하는 성도들은 이제 생각과 마음과 행실이 전혀 달라진 삶으로 이행될 수밖에 없습니다. 주 안에 거하는 자는 이전에는 자기가 삶의 주인이었으나 이제는 자기를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 자기 삶의 주인 자리를 내어준 자가 되었습니다. 자기 명예, 자기 야망, 자기 욕망을 위하여 살아가던 자가 이제는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드높이고 이 땅에서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이루어가는 사명을 추구하는 사람으로 달라졌습니다. 주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새 사람이 되었기에 하나님의 형상, 우리 구주의 형상을 본받게 되니 이제 옛 사람의 부패한 삶의 생각과 행실을 버리고 새 사람다운 내면 세계가 형성되고 행실이 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모신 사람으로서 빛의 열매인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어가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전에는 어둠에 속한 자였으나 이제는 빛에 속한 자가 되고 이전에는 악한 영의 종노릇을 하던 자였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 딸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을 본받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빌립보서 4장 8절과 9절에서 당부한 대로, 선하고 아름답고 칭찬받을 사랑스러운 생각을 하게 되고 행실도 주님과 주님을 본받아 몸부림치며 살아가는 사도 바울의 모든 행실들을 본받아 행하고자 애쓰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 안에 거하는 자로서 더 이상 옛 사람의 성품과 기질과 말과 생각과 행실에서 점차 벗어나 예수님의 성품과 믿음의 선배들의 아름다운 내면 세계를 본받고 행실에서도 날마다 그렇게 세상의 빛과 세상의 소금이 되어 세상 가운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과 우리 구주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주 안에 거하는 자는 반드시 점점 주님 닮아가는 그런 내적 변화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도 오늘 마음의 생각의 기준들을 제시한 사도의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항상 우리 자신의 생각들을 점검합니다.
8절 말씀을 다시 보겠습니다.
“끝으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엣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받을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항상 자기 생각을 돌아보고, 이 생각이 과연 참되고 진실한가, 이 생각이 과연 경건한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에 부합한가, 이 생각이 옳고 정의에 부합하는가, 이 생각이 정결하여 더러움과 불결함이 없이 깨끗한가, 이 생각이 사랑스럽고 아름다운가, 이 생각이 과연 칭찬받을 만하고 사람들의 영혼과 삶에 유익한가, 이 생각이 덕이 되는가 다른 이들에게도 추천할 만한 생각인가, 이 생각이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기억이 되고 아름답게 기념이 될 만한 기릴 만한 생각인가를 꼼꼼히 점검해보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거짓되고 불손하고 왜곡되고 더럽고 추하고 비난당할 만하고 어질지 못하고 두고 두고 후회스러운 그런 생각들은 우리 마음 속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게 바로 바로 몰안냅시다. 그리고 항상 참되고 경건하고 옳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본받고 싶고 길이 길이 칭송하며 마음에 담아두고 싶은 생각들만꼬옥 간직하며 복스런 생각들을 길러갑시다. 또한 9절 말씀에서도 사도 바울이 자기를 성도들의 행실의 본보기로 제시하고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고 권고하였듯이, 우리 주님과 사도들과 위대한 믿음의 선배들의 행적을 항상 생각하고 그들의 행실을 본받아 살려고 몸부림을 칩시다. 그리함으로써 우리 모두 행실에서도 주님의 향기가 아름답게 풍겨나서 우리를 통하여 주님이 나타나는 이 시대의 작은 예수들이 다 됩시다. 할렐루야.
다섯째로, 어떤 처지에 있든지 자족하며 살아갑니다.
10절로부터 13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이 로마 감옥에까지 에바브로디도를 보내어 사도를 위로하고 선교헌금을 보내어 쓸 것을 챙겨주고 옥바라지를 해주는 등의 도움을 아낌없이 베푼 일을 언급하면서, 그들의 아낌없는 사랑의 헌신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의 물질적, 인적 후원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그토록 기뻐하고 축복하는 까닭에 대하여 오해할까봐, 사도는 그들을 이렇게 칭찬하고 축복하는 이유가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경제적인 궁핍이 심하여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고 해명합니다. 그들의 이러한 헌신은 그들의 신앙이 아름답게 성장한 증거이기 때문에 이렇게 기뻐하며 칭찬하는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 자신은 객관적으로 볼 때 감옥 생활에 따르는 궁핍과 고생과 비천히 여김을 당하는 일들에 대하여 불평이 있거나 분노감과 실망감을 갖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어떤 처지에 있든지 항상 자족하는 법을 익혔노라고 말합니다. 그는 부유할지라도 그런 환경에 빠져서 믿음을 저버리거나 일락에 잡히지 않고 가난할지라도 낙심하거나 그 가난에 잡히지 않고 배부른 환경에 처하거나 배고픈 환경에 처하거나 불평 없이 자족하며 만족하고 적응하는 일체의 비결을 체질화했노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불우한 상황 속에 낙심하거나 침체에 빠지지 않고 좋은 환경에 이끌려서 안일과 부패에 빠지지 않고 항상 환경을 뛰어넘어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 잘 극복하며 살아갈 수 있는 까닭은 자기에게 능력 주시는 자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 보내신 성령의 능력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그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이라고 말해줍니다.
그렇습니다. 주 안에 거하는 사람, 성령 안에 거하는 사람은 어떤 처지에 빠지든지 낙심하거나 자만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처지에 있다고 해서 의기소침하거나 불평하거나 인색하지 않고 부유하다고 해서 교만하거나 사치에 빠지거나 안일에 빠지지 않습니다. 어떤 상황에 처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자유롭고 평안하고 넉넉하고 여유롭습니다.
그런 분을 예로 들자면, 일제 때에 안이숙 선생이 좋은 예입니다. 안이숙 선생은 일본 유학을 다녀와서 음악 교사를 하다가 학교 당국이 학생들과 교직원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반대합니다. 그러다가 안이숙 선생을 향하여 학교 당국자들이 압박을 가하여 학생들과 함께 모두 신사참배를 하도록 강요하는 분위기에서 선생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뻣뻣하게 서서 거부함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입니다. 그런 후에 학교에 있다가 사람들에게 끌려가서 군수 집무실에서 질책을 당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수가 상급자의 전화를 받더니 정신이 없이 서류를 챙기고 집무실을 빠져나간 후에 아무 제지도 받지 않고 안선생이 집으로 돌아오니 집에서는 어머니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 즉시 어머니는 딸을 할머니처럼 변장시키고 도망을 치도록 합니다. 그 후 도망자 생활을 하다가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박관준 장로님과 그 아들과 더불어 일본 제국의회에 들어가서 신사참배에 대한 일본의 강요의 죄악을 강력하게 규탄하는 전단지를 뿌립니다.
그 후 안 선생님은 체포되어 취조를 당합니다. 그런데 평양 경찰서에서 취조당할 때나 평양 형무소에 갇혀 수감 생활을 할 때에 안 선생님은 항상 의연하였습니다. 1년 동안 평양경찰서에서 취조를 당할 때에도 조금도 주눅들지 않았습니다. 주님을 믿고 담대하게 일본 신사에서 섬기는 일본 여신 천조대신을 섬기는 것은 헛되고 일본 천황에게 신으로 절하는 행위도 부당한 것이고 오직 성경에서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 한분만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시고 예수 그리스도 한분만이 구원자시요 만민의 심판장이심을 확실하게 증언했습니다. 취조 중에 그러면 천황도 지옥에 가느냐고 묻자 안이숙 선생이 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취조하는 순경은 깜짝 놀라면서 왜 자기에게 해로운 말을 그렇게 하느냐면서 기가 막혀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성경이 말하는 사실이라고 단호하게 말하였습니다. 평양 형무소로 들어가서도 아무런 두려움없이 믿음으로 행하고 사랑으로 행하고 천국 소망 가지고 삽니다. 겨울에 자기의 옷도 다른 죄수에게 입혀줍니다. 먹을 것도 나눠주니 감옥에 있는 다른 여죄수들은 그녀의 사랑에 감동합니다. 그래서 같은 감방에 있는 살인자도 예수님을 믿게 되고 안이숙 선생을 존경하고 따르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안이숙 선생은 잡히기 전에 이미 주님을 위하여 순교하기로 작정했으니 감옥에서 밥 투정을 할 것이 없습니다. 부식으로 죄수들에게 썩은 사과가 배달되면 다른 죄수들은 다 싫어하고 불평하지만 사과를 좋아하는 안이숙 사모는 그 썩은 사과를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셨다고 생각하며 기뻐하며 즐겁게 먹습니다. 주일에 일터에 가서 일하라고 형무소에서 명령을 내리면 자기는 죄수지만 안식일에는 절대로 일 못한다고 거부합니다. 고집을 안 선생님이 부리니 형무소의 신과 같은 자리인 일본인 형무소장도 안이숙 사모는 건들지 말라고 말하면서 사람까지 딸려서 안이숙 선생을 돕도록 해줍니다.
이처럼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씀만을 두려워하였던 안이숙씨는 경찰서에 있어도 여왕처럼 당당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존경하며 마치 아무도 두려워할 없는 사람처럼 자유인으로 살았습니다. 안이숙 여사는 능력 주시는 자에게 붙들려 살았기 때문에 그렇게 아무 것도 두려워함 없이 모든 상황 속에서 자족하면서 기뻐하면서 주님을 당당히 증거하다가 사형 집행 전날 밤 1945년 8월 17일 밤 11시에 평양 감옥에서 나왔습니다. 물론 출감되어 나왔을 때에 오랜 수감 생활로 영양 실조로 이가 다 빠지고 눈도 잘 안보이고 머리카락도 다 빠졌습니다. 안 선생님이 그런 고난 중에도 당당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여종으로서 자유인이 되게 하신 능력 주시는 자 안에 거했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사도 바울도, 안이숙 여사도, 주기철 목사님도, 우리도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어떤 형편과 상황에 처할지라도 항상 만족하며 자족하며 기뻐하며 살 수 있습니다. 불평, 원망, 욕구불만, 낙심함 없이 어떤 처지와 형편에 있든지 행복하고 기뻐하며 섬김과 사랑과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건은 우리가 능력 주시는 자 주님 안에 온전히 거하는 것입니다. 항상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하고 주님이 내 안에 거하도록 합시다. 내 생각과 말과 행실이 주님으로 온전히 젖어 있도록 합시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내 가지라.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우리의 전 존재가 주님께 밀착되고 주님과 깊이 연합되도록 합시다. 주님의 마음이 내 마음이 되고, 주님의 생각이 내 생각이 되고 주님의 감정이 내 감정이 되고 주님의 뜻이 내 뜻이 되고 주님의 의지가 내 의지가 되고 주님의 가지신 계획이 내 삶의 길이 되도록 합시다. 주님이 가지신 시대에 대한 계획과 포부가 나의 관심이 되고 기도의 제목이 되고, 주님의 아픔이 내 아픔이 되고 주님의 눈물이 내 눈물이 되도록 합시다. 그리하여 날마다 내게 사는 것이 주님이 되고 주님의 영이 나의 삶 속에서 때마다 일마다 내 마음과 생각과 행동을 주장하여 인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합시다.
그리할 때에 사도 바울이 오늘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신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모든 이들에게 너그러운 자가 될 것입니다. 우리의 염려가 기도꺼리가 되어 늘 평강이 우리 마음을 지키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이 주님 보시기에 사람들 보기에 아름답고 선하고 우리 행실에서 작은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처지와 형편에 우리가 처할지라도 자족할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도 지배당하지 않고 도리어 주님의 능력에 강력하게 붙잡혀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진정한 자유자의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날마다 주 안에 더 온전히 거하는 자, 성령께 깊이 붙잡혀 살아감으로써 주님과 깊이 동행하는 진실되고 충성된 주님의 제자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