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일제강점기(日帝强占其)-민족 말살 통치기(1931년~1945년)
1943년 조선인 육군특별지원병 병사
1931년 일제는 만주 사변을 일으킨다. 일제는 중화민국을 비롯한 대륙으로의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한반도를 일본의 중국 대륙 진출의 전진기지로 삼고, 이에 따라 일본의 경제적 지배 정책도 병참 기지화로 선회하였다. 이 시기 조선 사상범 보호 관찰령 등을 공포하여 사상 통제를 강화하였고 일선동조론과 같은 역사 날조도 자행되었다.
일제는 대공황 이후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보호 무역 강화로 면방직 원료의 공급이 부족하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 남면 북양 정책을 수립하여 공업 원료를 증산하기 위해 남부에는 면화 재배와 북부의 면양 사육을 독려하였다. 그리고 대륙 진출을 위한 병참 기지화 정책에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 일대에 발전소를 건립하고 광업 분야가 성장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 북부 지대에 군수공장을 대거 건립하였다.
1937년 중일 전쟁을 기점을 침략 전쟁을 본격화하면서, 국가총동원령 하에 산미증식계획이 재개되고 미곡공출제가 시행되어, 한국인들은 식량을 배급받게 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지원병제와 징용제를 실시하였는데, 1940년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는 한반도를 더욱 수탈하였다.
조선총독부는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에 동원할 인력과 군자금, 군수품을 한국으로부터 조달했으며, 징용과 징발, 지식인들을 통한 자발적 징용, 징발 독려, 성금 모금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노동력과 자본을 차출해갔다. 1941년까지 약 160만 명의 한국인이 일본 내의 공장, 건설 현장, 탄광,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징병 제도를 실시하여 한국인을 전쟁에 동원하는 한편, 10대 초반에서 40대에 이르는 여성들을 정신대(挺身隊)라는 이름으로 강제 동원하거나 군수 공장 등지에 보냈으며, 그 중 대부분을 중국과 남양지방의 최전선에 투입하여 일본군을 상대하는 일본군 위안부로 보냈다. 최근 들어 그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한 종군 위안부 문제를 간과하기 어려운 까닭은 이러한 범죄 행위가 개인이 아닌 국가에 의해 조직적으로 행해졌다는 데에 있다.
창씨개명과 일본어 강요
창씨개명과 일본어 사용을 강요한 징집한 조선총독 미나미 지로.
한국인들을 완벽한 일본인으로 만들기 위한 민족 말살 통치가 진행되어, 내선일체와 일선동조론에 의거한 황국 신민화 정책이 실시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은 황국신민의 서사의 암기와 신사 참배 및 일본어의 사용을 강요하였다. 애국반을 통해 국민 생활 전반을 통제하였는데, 학교의 한글 교육은 중단되었고, 한국의 역사를 배울 수 없게 되었으며, 창씨개명이 강압적으로 행해졌다. 민족성이 강한 전문학교는 폐교되거나 강제 개명당했다.
또한 "조선이 일본 영토인 이상 한국어는 일본어 방언이며, 내지 방언뿐이며 궁극적으로 소멸시켜야한다"는 한국어 방언론에 따라 한국어를 강제로 폐기하고 일본어를 모국어화 할 것을 요구하는 의견이 일본인 언어학자들로부터 제출되었다. 1938년 제3차 교육령에서 한국어가 수의(隨意)과목이 된 것을 시작으로, 한국어 사용이 상벌의 대상이 되는 등 '국어 상용'운동이 본격화되면서 공교육에서 한국어가 추방되기 시작했다.
1942년 10월 조선어학회의 주요 구성원이 치안 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는 조선어학회 사건이 일어났다. 이를 근거로 일제 당국이 한국어 말살을 도모했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한편 1945년 해방 당시 남한의 12세 이상 인구의 78%는 한글 문맹이었다는 주장이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일본어 강제 보급 정책의 문제성을 지적하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한국어가 일상 생활이나 신문 등에서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었다. 조선총독부에서도 1921년부터 1945년 해방에 이르기까지, 조선어능력시험에 합격 한 직원을 승진과 급여 면에서 유리한 대우를 받았었다. 따라서 한국어가 계획적으로 말살된 흔적은 없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그러나 학교에서 한국어 수업 이외의 모든 수업이 일본어로 진행되었음에 비추어, 대부분의 교육과정에서 일본어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1943년 당시까지도 일본어를 해석하는 한국인은 1,000명당 221.5명에 지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자료도 있다.("조선사정"1940-1944 년판), 80%의 한국인은 일본어를 못했고, 한국어를 말살하고 일본어를 강제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일본의 패전, 소련군·미군 군정과 독립
서울 시내에 걸려 있던 일본 국기를 내리고 미국 국기를 게양하는 미군(1945년9월 9일)
1945년 8월 15일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제국이 패전하여, 한반도는 독립을 맞이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바로 철수한 것은 아니고 당분간은 통치 상태를 유지하였다. 현재까지 한국에서는 독립이 확정된 8월 15일이 광복절로 기념되고 있다. 1946년 통화사건 으로 독립군 은 일본군 패잔병을 진압했다. 연합군에 의해 한국인의 전범도 처형되었다.
1910년대의 국외와 국내의 민족운동과 계몽운동
조선총독부는 안악 사건에서 시발된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1911년 윤치호, 이동휘, 양기탁, 김구 등 신민회 간부들을 대량으로 검거, 검속하여 신민회를 해산시켰다. 이 일을 계기로 김규식, 이승만 등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은 선교사들의 도움을 얻어 해외로 망명한다. 그 후의 독립운동단체들은 비밀결사의 길을 걷게된다. 국권이 빼앗긴 이후 무단 통치가 강화되면서 기존의 항일 운동이었던 항일 의병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은 일제의 무단 통치로 점차 쇠퇴하였다. 대부분의 의병계열들은 간도나 연해주 일대로 이동하였다. 또한 각종 공직자 채용 시험과 각종 산업시설의 인허가에서도 일본인에게 우대 혜택을 주게 되면서 한국인들의 반발은 계속되었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철저한 탄압과 차별 정책으로 인해 한국인들의 항일 운동은 비밀 결사 형태로 변화하였는데, 교육과 종교 단체를 통해 농민과 노동자와도 연결하여 독립 운동가들을 규합하였다. 대표적 단체로는 대한 광복회와 독립 의군부, 송죽회, 조선 국권 회복단 등이 존재한다. 특히 대한 광복회는 의병 출신과 애국 계몽 운동 계열로, 군대식 조직으로 구성되어 대구에서 활동하였는데 군자금을 모집하고 경상도 관찰사였던 친일파 장승원 등을 처단하는 등 친일 부호를 처단하여 독립군 기지 건설에 노력하였다.
독립 의군부는 고종의 밀명을 받아 국권 반환 요구를 시도하고 의병 전쟁을 계획하였는데, 대부분 유생 출신자였다. 이들은 고종 황제의 복위의 복벽주의를 내세웠으며, 신민회 이후의 거의 모든 단체가 공화제를 내세운 것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송죽회는 평양의 숭의 여학교의 교사와 학생이 중심이 되어 독립 운동 자금을 모금하여 독립 운동 단체 전달하였는데, 교회를 통한 민족 의식 고양과 여성 계몽운동에도 노력하였다.
이 시기에는 개량 서당과 기독교 계열 학교들이 확산되었고,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이었던 사립학교를 통한 민족교육운동도 존재하였다. 개신교 계열 학교들은 한성부를 중심으로 확산되었고, 천주교 계열 학교들은 1920년대부터는 평양을 중심으로 평안남도,북도와 함경남도북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이들 종교계열 학교들은 영어, 라틴어, 서양식 기계기술, 수학, 물리학 및 세계사, 성서 구약과 신약 등을 가르쳤다.
국외의 민족 한 운동
니콜라옙스크 사건 으로 불타서 내려앉은 일본영사관 (1920년)
일제의 헌병 통치에 의해 많은 의병 부대와 지식인층 등 애국 계몽운동 인사들이 해외로 이주하였다. 이에 만주의 서간도 삼원보에서는 경학사, 한족회, 부민단 등이 결성되었고, 독립군 장교 양성을 위한 신흥 무관학교가 만들어졌다. 북간도에서는 민족 학교인 서전서숙과 명동학교가 설립되었고, 대종교 인사들이 주도가 되어 중광단, 정의단, 북로군정서 등이 결성되어 무장투쟁을 위한 군사조직이 꾸려졌다.
연해주에서는 블라디보스토크에 신한촌이 형성되어 민족 운동이 근거지가 되었다. 이에 13도 의군과 이상설, 이동휘가 주도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1914년에 수립되었고, 후에 전로 한족회 중앙 총회와 대한 국민 의회 등이 수립되었다. 니콜라옙스크 사건으로 독립군과 붉은 군대는 일본군을 전멸시켰다.
중국 관내의 상하이에서는 1918년 김규식, 여운형, 신채호, 김구 등이 주축이 되어 신한청년당이 결성되었다. 이들은 파리강화회의에 김규식을 파견하였다. 이 단체는 후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기반을 조성하는 도움이 되었다.
미주 지역에서는 안창호가 주도한 대한인 국민회와 흥사단이 결성되어 독립 운동 자금을 지원하였고, 이승만은 대한인 국민회에서 활동하다가 따로 대한인 동지회를 조직하고 기독교 학교를 설립하였으며, 박용만은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군인을 양성하였다.
민족 자본 육성 운동
김성수와 송진우 등은 식민 치하의 한국인들이 일본제 무명, 비단 등을 수입하며 일본제 제품이 한국에 유행하는 것을 보고 일본의 자본이 한국의 침투를 우려하였다. 김성수는 민족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였고, 마하트마 간디의 경제 자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국내자본 육성 계획을 세운다. 우선 그는 중앙고보의 학생들로 하여금 국산 무명옷을 교복으로 입게하였다. 김성수 등은 무명옷을 교복으로 했을 때 인촌은 옷감의 국내 자체생산 및 조달을 생각하였다. 1917년 방직기술자인 이강현의 건의를 받아들여 일제 당국은 순순히 허락하지 않았으나 결국 그의 사업을 승인해주었다. 1917년 10월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광목제조 회사 '경성직뉴주식회사'를 윤치소 등으로부터 인수하였다.
일본에서 도입한 도요타 방직기, 일본 업체들과의 경쟁을 위해 일본 기계를 도입하여 생산량을 증가시켰으며, 김성수는 기계의 성능을 직접 시험하였다.
일본의 방직회사들이 한반도에 진출해 있는 상황에서 그가 시장진출을 확보하는 방법으로 창안해낸 것은 한국인 지사들을 주주로 공모하는 것이었다. 이후 그는 외부 자본의 침투는 민족의 경제를 갉아먹고, 외환의 유출을 촉진한다는 점을 들어 한국인 인텔리들을 설득해 나가기 시작했다.
1918년 봄 김성수는 경상북도 경주를 찾아 최부잣집의 후손 최준을 방문하였다. 김성수가 최준을 찾은 것은 경성방직과 후에 세우게 될 동아일보에 지방의 유력 인사들의 참여를 권유하기 위함이었다. 김성수가 경북 경주를 다녀간 지 1년 후 1919년 10월 경성방직이 설립되었고, 최준은 경성방직의 창립 발기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 최준은 김성수와 안희제 등과 교류하면서 교육의 중요성을 깨닭았다 한다. 김성수는 한국인 최초의 방직회사 설립자가 되었는데, 그해 11월 부산에 설립된 조선방직회사는 일본인이 세운 것이었다. 중앙학교의 졸업생 중에서도 윤주복(尹柱福) 등은 그의 권고로 규슈대학 방적학과로 진학, 졸업한 뒤 경성방직에 입사하기도 했다. 전국을 다니며 모집한 끝에 많은 주주와 후견인들을 모았고 경방 창림 발기인들의 주식은 3,790주였고 16,210주는 일반공모주였다. 국내 의류업체들이 일본의 면직물 수입이 증가하면서 일본 면직물에 의존하여 제품을 생산, 한국의 면직물은 거의 소멸될 위기에 처하자, 1918년부터 중앙상공주식회사를 통해 직접 면의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1919년 10월 5일 김성수, 박영효 등은 명월관 지점 태화관에서 창립총회를 가졌다. 하지만 그것은 실제적 출발점은 아니었다. 경성방직은 설립되자마자 좌초의 위기에 처했고 1926년경에 가서야 조업 정상화에 성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