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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4월8일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수도회] 되돌아가는 기쁨의 순례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사도 3,1-10
† 복음 루카 24,13-35
★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다음,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시던 동안 하신 일들을 이어 간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치유하셨듯이
그들도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병자를 고쳐 준다. 그러나
이 치유를 보는 이들은 아직 그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내일 독서에서
베드로 사도는 그 이적을 설명해 줄 것이다(제1독서).
★ 복음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엠마오로 내려가던 제자들에
대하여 전해 준다. 그들은 슬픔에 잠겨 있었으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시고 빵을 떼어 주실 때 그분을 알아 뵙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에 관한 이야기, 대단히 아름다운 복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부활하셨지만 아직 부활하신 분을 만나지 못한 공동체,
예수님께서 지상에서 생활하시던 때처럼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현존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길을 잃고 방황하는 공동체, 곧 부활 이후의 초기 교회
공동체를 비롯하여 우리 모두를 위한 복음입니다.
엠마오 이야기는, 그런 공동체가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지를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깊은
충격과 좌절과 실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예언자라고 생각했는데
그만 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고 무능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마음이
타오름을 느끼게 되었고, 빵을 떼어 주실 때에 그분을 알아 뵙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 뵙는 순간 예수님께서는 사라지십니다.
루카 복음에서 이 이야기를 기록하여 전해 주는 이유는 예수님의 현존을
실감하지 못하는 공동체를 도와주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예수님을 이제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요?
제자들이 예수님을 알아 뵌 곳은 성경 말씀 안에서, 그리고 빵을 나누는
성체성사 안에서였습니다. 내 눈으로 예수님을 뵙지 못한다 해도
우리에게는 성경의 증언이 있고, 예수님의 몸을 받아 모시는 성체성사가
있습니다. 이것이 해가 저물 때 길을 걸어가야 하는 교회, 나그네처럼
시간을 걸으면서 영원과 천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교회가 늘 기억해야
할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시고
함께 살아갔던 것처럼, 우리는 성경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해 예수님을
우리 가운데 모시면서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되돌아가는 기쁨의 순례
2015년 나해 4월8일 부활 팔일 축제 수, 루카 24,13-35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시자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
되돌아가는 기쁨의 순례
인생은 어쩌면 되돌이표와 같은 것이리라. 일을 하거나 사람을 만나고
여행하기 위해서 떠났다가 되돌아오고, 하느님의 선에서 멀어졌다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것이 인생길이다. 한마디로 길 위의 인생이다. 오늘
복음의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길을 제시해 준다. 엠마오로
가는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만나는 두 가지 길로서
말씀과 성체를 제시해 주신다. 엠마오에서의 예수 발현사화는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했는지를 보여주며, 오늘의
우리가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며 살아야 하며,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지를 제시해 준다. 제자들의 엠마오 여행은 어떻게 주님
부재의 삶이 ‘주님과 함께 하는 삶’으로 바뀌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실패와
절망과 슬픔에 잠긴 제자들의 슬픈 여행이 예수님과 함께 하는 참 기쁨의
여행으로 바뀌는 신앙의 여정을 핵심적으로 잘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이
여행은 바로 ‘나’와 ‘우리’의 여행이어야 한다.
나는 삶의 여정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찾아,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
여행길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19절), ‘이스라엘을 속량하실 분’으로 믿는
신자들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십자가’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상
죽음’을 목격하고 인간적인 슬픔과 좌절에 빠졌고 신앙을 잃어버렸다.
이처럼 고통과 시련은 우리 신앙을 키우는 약이지만 신앙인들을 시험하는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느님의 힘과 사랑 안에서 이런
시련을 신앙과 일치시켜 나가야 한다.
엠마오 길의 제자들의 슬픔과 좌절, 낙담은 오늘 나의 체험일 수 있다.
이렇게 신앙의 위기에 빠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극복하고
포용할 힘을 주신다. 그분은 다가오시어, 함께 동행하시면서, 그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시며 관심을 가지시고, 대화를 통해 그들의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며, 성경 말씀을 설명하시면서 ‘고통의 구세사적 구원적인
의미와 가치’를 알려 주신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25절)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26절)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30-31절)
이렇게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러나 일상생활 한 가운데서는 그분의 현존을 체험하기 어렵다
(16절 참조). 그런데 성서의 말씀을 접할 때 그분의 현존을 감지하게 되고,
성체를 받아 모심으로써 더욱 더 그 현존을 뚜렷이 의식한다. 육안으로
보려 하고 감각적으로 느끼려 할 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는 없다.
육의 정신과 육의 열매들은 우리를 눈멀게 한다. 우리가 눈뜰 수 있는
것은(31절) 부활하신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을 통해서이다.
부활은 이렇듯 ‘깨달아가는 삶’이다. 이는 자신의 어리석음과 비천함과
죄를, 하느님 없이 홀로 살아갈 수 없음을, 하느님의 지혜를, 하느님의
선을 깨닫는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서만이 가능한
것이다. 그분과 만나게 될 때, 그분을 바라보게 될 때 눈이 열리어 그분을
알아뵙게 되고 우리의 슬픔이 기쁨으로 바뀌게 되며, 무딘 마음에
열정적인 신앙이 찾아드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자 ‘곧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거기서 부활
신앙을 고백하는 일단의 제자들과의 만남과 일치가 이루어진다. 이
엠마오의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삶을 다시 바라보아야 한다. 다른 이들과 함께 걸으면서 서로를
건네주면서 운명을 같이하는 엠마오의 길을 걸어가기로 하자. 하느님의
말씀에서 생명을 주는 양식을 받아 사랑의 친교를 나누며 부활하신
그분을 함께 호흡하기로 하자. 이러한 새로운 체험, 주님과 이웃과 함께
하는 체험이 있을 때, 우리는 일상의 삶 안에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하느님 아버지를 증거하기 위해 형제자매들에게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인천] 절망과 의심의 생각을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야
2015년 나해 4월8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세일즈맨을 할 수 있을까요? 특히
말도 어눌하고 몸도 불편한 상태에서 방문 판매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고용 자체도 힘들 것 같습니다.
미국 생활용품 회사 왓킨스사에는 30년이 지나도 깨지지 않는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빌 포터라는 세일즈맨이 있습니다. 미국 서부 지역 최고의
판매왕 자리에 올랐고, 그 판매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 빌 포터가 바로 뇌성마비 장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인내하라, 끝까지 인내하라.’는 말을 잊지 않고 가장 힘든
지역을 자청한 뒤에, 그곳에서 매일 15Km를 걸어 다니며 노력해서 성공의
결실을 맺은 것이지요. 즉, 24년 동안 수백만 가구의 문을 두드린 끝에
누구도 가능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던 일을 이루어낸 것입니다.
안 된다는 생각은 정말로 안 되게 합니다. 느린 걸음이라도 절대로 멈추지
않을 때, 불가능하다고 하는 것조차 가능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입니다.
승산이 없어도 포기만 하지 않으면 기회는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런데
불가능한 것들을 스스로 만들어 낼 때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각종 안 되는
이유를 만들어내고, 세상의 관점으로 불가능한 것은 절대로 안 된다며
쉽게 포기할 때도 참 많았습니다. 절망과 의심의 마음과 이에 따른
행동들이 주님의 활동조차 가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않을까요?
사실 주님의 활동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것이 많습니다. 그렇다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포기해야 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포기하지 않는 적극적인 우리의 모습 안에서 주님의 활동을 가능하게
합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들이 잘 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이야기입니다. 이 두 제자는 슬픔에 젖어 고향인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고 알려져 있지요. 그들은 비록 예수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에 실망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들이 겪은 절망과 의심을 털어놓지요. 바로
이런 절망과 의심의 마음이 곁에 계셔도 주님을 알아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일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죽음을 넘어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토록 부족해 보이는
제자들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학벌도 부족하고, 능력도 없고, 무엇하나
자랑할 것이 없어 보이는 제자들이었지만, 오늘 제1독서에 나오는
베드로와 요한처럼 적극적으로 주님을 세상에 알립니다.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주님을 기억하면서 스스로 한계 짓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즉, 절망과 의심의 생각을 버리고,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앞에 주님께서 환히 웃으시며
우리를 맞아주실 것입니다.
삶이 힘겨울 때마다 우리는 늘 뭔가 비범하고 독특한 해법을 찾곤 한다.
그러나 공기와 물처럼 소중한 것은 언제나 평범한 것들이다(스펜서 존슨).
엠마오라고 추정되는 곳의 경당(라투룸이라는 곳입니다)
일단 시도하십시오.
요즘 프로야구 시즌이지요. 그래서인지 야구에 관한 기록들이 종종 기사가
되어 올라옵니다. 며칠 전에 본 기사에는 류현진 선수가 있는 LA 다저스의
‘모리 윌스’에 관한 내용이었습니다. 그는 1960년대 메이저리그의 야구
틀을 바꾼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왜냐하면 그전까지는 홈런에 의한
득점이 주요했지만, 그는 빠른 발을 이용해서 득점을 하는 스몰볼의
효과를 세상에 알린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시즌에 자그마치 104개의 도루를 기록했습니다. 그 누구도 깨기
힘든 기록이었지요. 그런데 재미있는 또 다른 기록이 있더군요. 모리
윌스는 1965년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아웃을 당한 선수가 된 것입니다
(도루를 많이 시도했지만, 그만큼 많이 아웃도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웃될 것을 두려워서 도루를 하지 않았다면, 역사의 기록에 남지
않았겠지요. 아웃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기회가 된다면 다른 베이스를
향해 힘차게 뛰는 것이 중요했던 것입니다.
일단 시도하십시오.
프로야구... 구경가고 싶네요.
◈ [수도회] 2015.04.08.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사도 3,6)
여러분은 부자이십니까?
대부분은 먹고사는 데 문제없을 정도면 다행이고,
아니면 이래저래 빚도 떠안고 살아가기도 하겠지요.
그러다보니 남에게 힘이 되어주고 도움이 되어줄 여력도 없지요?
그런 나 자신이 때론 비참하기도 하고 죄스럽기조차 할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남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는 방법은 많습니다.
물질로만 생각하면 제 같은 수도자는
여러분보다 더 무능력한 사람들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말씀하시듯 저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있고
그분의 말씀을 먹고 살아갑니다. 그러니 제가 가진 말씀을 나눕니다.
저의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니 수많은 이에게
돈보다도 더 귀한 힘이 되어주고 위로가 되어줍니다.
여러분도 오늘 여러분이 가진 것, 미소일 수도 따뜻한 마음일 수도
고운 말 한마디일 수도 있는 그것으로 다른 이들에게
힘이 되고 위로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여러분의 그 작은 나눔 때문에 기뻐뛰며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이
많아지는 그런 아름다운 세상을 함께 꿈꾸는 오늘입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4월8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사도3,1-10 루카24,13-35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
어제 강론 제목은 '부활하신 주님과의 만남'이었고
오늘 강론 제목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결국 같은 제목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경의 이야기들은 거의 모두가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들입니다.
부활 팔일 축제내 어제에 이어 오늘 역시 온통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기쁘고 감사하게 사는 것이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입니다.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믿고(信) 희망(望)하고
사랑 (愛)하며 사는 것이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입니다.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오늘 지금 여기에서 늘
다시 새롭게(新) 시작하는 것이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입니다.
그래서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과 함께 참되고(眞) 착하고(善)
아름답게(美) 살아가는 것이 부활의 삶, 파스카의 삶입니다.
이렇게 사는 이들이 나이에도 불구하고
정신은 마음은 영혼은 부활하신 주님을 닮아 영원한 청춘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며칠 전 엠마오 산보 날에 젊은 형제들 거의 모두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러 팽목항에 갔고 원로급의 형제들만 수도원에 남아 있는 모습이
흡사 젊은 이들은 전쟁터에 나가고 노인들은 집을 지키는 모습처럼
생각되기도 했습니다.
젊은 형제들은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고
나이 든 형제들은 수도원에서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의식하든 못하든 나이에 상관없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영원한 청춘을 살아가는 우리 수도형제들입니다.
어제의 깨달음도 길이 잊지 못할 것입니다.
이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결과임을 확신합니다.
제 나이를 계산해 보니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사는 때는
넉넉잡고 80세 전후로 계산해 앞으로 10-15년쯤,
얼마 안 남았다는 생각이 새롭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수도원에 온지 올해로 28년째이니 10-15년도 금방입니다.
100세를 넘어 사시는 왜관수도원의 미카엘 수사님은 특별한 경우이고
대부분은 90세를 넘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제 얼마 안남은 동안 하루하루 기쁘고 감사하게, 너그럽고 자비롭게,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살자는 생각이 마음 가득
들었습니다. 이 또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선물처럼 주어진
깨달음입니다. 제 수도원 입회 전 초등학교 교사시절의 꿈이자 목표는
오직 하나 제가 맡은 반 아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요즘 수도사제로서 제 꿈이자 목표는 오직 하나 성체성사에, 고해성사에
참여한 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제가 하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번 부활대축일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기에 이런 깨달음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결국 함께 사는 수도형제들은 물론 만나는 모든 이들을
행복하게 해 주는 것이 제 유일한 꿈이자 목표가 되리라는 예감이 듭니다.
어제 수도원 귀원후 처음 중계 본동 구역장 모임 피정 때
혼신의 힘과 열정을 다해 미사를 드리고 강의를 했습니다.
"자매님들이 모두 오늘 복음의 마리아 막달레나처럼 보입니다.“
미사 강론에 앞선 제 말에 모두 웃었습니다만 사실이었습니다.
모두의 사랑스런 얼굴들이 그대로 오늘 강론 제목대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들'처럼 보였습니다. 끝나고 떠나기전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에서
확인했습니다. 웅장한 불암산, 활짝 만개한 살구꽃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얼굴인지 꽃인지 구별이 안됩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카톡으로 전송한 사진에 첨가한 문자 메시지입니다. 정말 꽃인지 얼굴인지
구별이 안될 정도로 모두가 꽃같은 얼굴들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집인 수도원에서 피정 중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자매들이었습니다. 수도원은 어디나 사진발이 잘 받아 찍고 나면 작품이요
현실보다 좋아보이니 '아, 하느님의 보시는 눈이 이런가 보다'하는 생각도
듭니다. 하느님 눈에 모두가 사랑스럽고 좋게 보일거라는 것이지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오늘 말씀의 이해도 확연해 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엠마오 도상에 있던, 예수님의 죽음에 침체해 있던 제자들 역시 부활하신
주님으로부터 빵을 받아 모시자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알아 봅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마음의 눈이 열리자 비로소 말씀 중에 활동하셨던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채는 제자들입니다. 오늘 복음 역시 아름답기 짝이 없습니다.
복음 전반부가 미사의 말씀전례를 상징한다면 후반부는 성찬전례를
상징합니다. 바로 미사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던 엠마오 도상의
제자들이요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사도행전의 '아름다운 문'곁에 구걸하던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이의 치유장면 역시 흥미진진합니다.
복음 내용 못지 않게 아름답고 신바람 나는 생생한 장면입니다.
"우리를 보시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우리가 이웃에게 줄 수 있는 최상, 최고의 선물은 부활하신 주님뿐입니다.
베드로를 통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숙명의 사슬은 끊어지고 새롭게 부활 치유된 태생 불구자입니다.
그는 사도들과 함께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하느님을 찬미하였고 이를 본 이들은 경탄하고 경악하였다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우리 역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남으로 치유되고
구원되어 새롭게 태어나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오늘 영성체후 기도가 오늘 말씀의 결론입니다.
"주님, 성자의 파스카 신비에 참여한 저희가 옛 악습에서 벗어나 새사람이
되게 하소서."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신부 -
◈ [청주] 말씀에 귀 기우려라|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4월8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루카24,13-35)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말씀에 귀 기우려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다는 것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됩니다. 무슨 특별한
말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나를 위한 사람이 내 옆에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사할 뿐입니다. 마음에 있는 얘기는 기회가 되면 할 것이고
지금은 묵묵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큰 일을 치루고 난 후에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침묵 속에서 주님의 뜻을 찾는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지금은
입을 다물 때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오늘은 할 말을 잃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무기력하게 죽었으니 모든 기대와 희망이 무너진 것입니다.
그러니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처참히
돌아가시고 더더욱 그 시신까지 없어졌으니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었습니다. 하늘과 같은 스승이
힘없이 사라졌으니 거기에 있다가는 어떤 불똥이 튀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므로 서둘러 그 자리를 떠야 했습니다. 사실 무덤이
비었다는 것은 ‘고난을 겪은 다음에 자기 영광 속에 들어가리라’는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해 주었지만 그것을 알기까지는 아직 눈이
뜨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큰 실망과 좌절만이 더하였습니다. 실망이
큰 만큼 기쁨이 크고 있다는 사실은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동행하시면서 성경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일으키고 결정적으로
제자들은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자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습니다. 지금 당장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지만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깨우침이 남아있었는가
봅니다. 나그네를 묵어가라고 붙들었으니 말입니다. 일찍이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천사를 대접’(창세18,1-15)하는 기쁨을
차지했습니다.
제자들은 마침내 나그네와 함께 식탁에 앉게 되었고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알아보기가 무섭게 그들에게서 사라지셨습니다. 이제 제자들이 알 것을
알았으니 더 이상 거기 남아계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또한 제자들도 가던
길을 되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하였고 거기서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뵙게 된 일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결국 주님께서 먼저 알려 주셔야 그분을 알 수 있고, 우리도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눈이 뜨인다는 깨우침을 얻게 됩니다. 또한
나그네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가? 를 배우게 됩니다.
우리는 삶의 절망 한가운데에서도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하였던
제자들처럼 주님을 붙잡아야 합니다. 시련과 고통의 어두움 속에서도
주님께서는 우리와 동행 하십니다. 다만 내 아픔이 커서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뿐입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면서 마음을 열어
주시고 뜨겁게 해주시지만 지금 당장은 눈이 가려져서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꼭 붙잡으십시오. 어둠 속에서도, 절망
가운데에서도 주님을 붙잡으십시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붙잡기만 하면 언제든지
함께 묵으십니다.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으로 마무리 하겠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예레1,8)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보병원 부원장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은총의 시간, 오후 세 시
2015년 나해 4월8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복음: 루카 24,13-35
< 은총의 시간, 오후 세 시 >
일본의 문학 박사 아베지로의 저서에 고오찌 요시다로오의 자서전이
소개되었습니다. 고오찌는 17세 때, 주인의 돈을 훔쳐서 쓰기 시작한 것을
시초로, 불량소년이 되었고, 18세 때, 니혼바시구의 한 상점에서
일하였는데, 그 집 안 주인과 불의의 관계를 하고, 게다가 그 부인을
살해한 후, 그 범죄를 덮기 위해 불을 질렀으나 체포되어 무기징역에다
9년이 더해진 중범인으로서 혹까이도의 소라찌 감옥에 수감되었습니다.
그가 25세 되는 1889년 1월 2일의 밤중이었다고 합니다. 그의 말에
의하면, 분명치는 않아도 천사와 같은 아름다운 어린이가 그의 앞에
나타나 “나는 네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늘에서 파송되어
왔다”라고 말한 후 한 권의 성경을 그에게 보이고 “청년이여 이 책을
먹으라. 이것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하느님의 참 말씀이다. 이 책을 네게
주니 반드시 읽고, 결코 내 말을 잊지 말라”고 말하면서 그에게 성경책을
주었습니다. 그런 일이 세 번이나 있었습니다.
오랜 노력 끝에 모처럼 그의 손에 성경이 입수 되었지만 글을 배운 적이
없어 한 자도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간수의 도움으로 글자를 배워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나중에는 같은 죄수들에게도 성경읽기를
권하였습니다. 물론 조소와 박해도 받고 죽음의 위협도 당했지만 결연이
이겨내었습니다. 감옥의 많은 이들이 성경을 읽게 되었고 그리스도인으로
탄생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1904년 특사로 가출옥 되었다고 합니다.
[출처: 한국 컴퓨터 선교회, 감화케 하는 성경]
하느님께서 구원과는 멀어 보이는 요시다로오를 구원하시는 방법은
그에게 당신 ‘말씀’을 먹이시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나무에 불이 붙여지듯
말씀은 그 안에 들어가 그 사람을 태워 본성을 변화시킵니다. 이 새로
태어남의 과정이 없이는 구원이 불가능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기도하러 간 시간이 ‘오후 세
시’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문맥상으로 그 정확한 시간을 굳이 써야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 사도행전은 루카가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루카에게 오후 세 시가 어떠한 의미가 있는지 그의 다른 글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낮 열두 시쯤 되자 어둠이 온 땅에 덮여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
(루카 23,44)
루카는 오후 세 시를 단지 여기에서만 사용하였습니다. 오후 세 시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신 시간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파스카 제물이 바쳐지기 시작하는 시간도 오후 세 시였습니다. 결국
루카는 베드로와 요한이 일으킨 첫 번째 기적을 그리스도의 죽음과
결부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죽음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은 ‘성령’이십니다.
모든 기적의 힘은 ‘성령’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요르단 강에서
성령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기적의 힘을 발휘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기적을 카나의 혼인잔치에서 이루셨습니다. 바로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기적이었습니다. 그 포도주는 이제 십자가에서 피로 바뀌었습니다.
또 그 피는 오순절에 성령강림으로 바뀌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매 미사
때마다 그리스도의 살과 피의 형상으로 성경께서 우리에게 오십니다.
우리는 요시다로오가 먹었던 ‘말씀’을 ‘말씀의 전례와 성찬의 전례’를 통해
매 미사 때마다 영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져야하고 나누어주어야 할 첫 번째 선물은 돈이 아닙니다.
물론 돈도 있으면 당연히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것은
우리가 받은 ‘성령’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강림을 체험한 교회를
상징합니다. 교회는 돈이 없어도 성령의 힘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은도 금도 없습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자신이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사람을 돕겠다고 말한다면 이는 교회의
본질적인 모습이 아닙니다. 그런 자선은 불교에 다니더라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의 본질은 그리스도의 피이고 세례이고 견진이고 성체이고
성령입니다. 이렇게 새로운 생명을 탄생시키지 못한다면 교회의 본질을
잃어가는 것입니다. 오늘 모태에서부터 불구자였던 사람을 치유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모태에서부터 장님으로 태어난 이에게 진흙으로 눈을
만들어주시는 것과 같은 것이고, 지금으로 말하자면 성령의 힘으로 세례를
주어 하느님의 자녀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벌써 세례를 받는 신자들이 많이 줄어들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는
교회가 본질적인 성령의 힘에 의지하기보다는 다른 무언가에 의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초대 교회처럼 다시 성령에 집중할
필요가 있고 성령으로 충만한 삶을 가장 본질적인 목표로 새로운 운동이
일어날 필요가 있는 때입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그래서 복음(Good News)입니다.
2015년 나해 4월8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그래서 복음(Good News)입니다.
시차 두고 무덤 방문한자들과 엠마오 제자들이 주님부활사건을 말했습니다.
모두가 직접 겪은 일들이라서 자신 있게 확신을 가지고 말했던 겁니다.
이구동성(異口同聲)이라는 말은 바로 이럴 때 쓰는 말이라 봅니다.
오늘도 별 거 아닌 사건을 이구동성으로 말하면 귀보다 마음이 움직입니다.
많은 이들이 확언하면 그만큼 더 정확하여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거지요. 이
렇게 확실한 사건을 믿는 건 인생이 얻을 수 있는 최고의 보물입니다.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루카 24,34~3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서울]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2015년 나해 4월8일 주님 부활 팔일 축제 내 수요일
제1독서
<내가 가진 것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일어나 걸으시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3,1-10
복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독일은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나라입니다.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의 힘은 히틀러와 그를 중심으로 한 ‘나치당’이었습니다. 히틀러와
나치당에게 큰 책임이 있겠지만 당시 독일의 지성인이었던 에밀 구스타프
프리드리히 마틴 니묄러
((Emil Gustav Friedrich Martin Niemoeller, 1892~1984) 는
‘전쟁 고백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독일에 처음 나치가 등장했을 때, 처음에 그들은 유태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공산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엔
사회주의자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사회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노동운동가들을
잡아갔습니다. 나는 이때도 역시 침묵했습니다. 나는 노동운동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가톨릭교도들과 기독교인들을
잡아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가톨릭이나 기독교인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부터 내 이웃들이 잡혀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그들이 뭔가 죄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내 친구들이
잡혀갔습니다. 그러나 그때도 나는 침묵했습니다. 나는 내 가족들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은 나를 잡으러 왔습니다.
하지만 이미 내 주위에는 아무도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나를 위해 이야기
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무관심과 방관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행위가 아닌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것은 율법학자, 바리사이파,
대사제, 헤로데, 빌라도의 잘못도 있었지만 그것은 하느님의 아들을
지켜내지 못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무관심의 탓도 컸습니다.
우리 사회에는 직면한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세대, 계층, 지역,
이념’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사회복지, 교육, 빈부격차, 농촌, 어촌 등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사회는 브레이크가 고장 난 기차처럼 거침없이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야 하는지, 지구라는 푸른 별이 얼마나 소중한지 그리고 우리들은
잠시 이 아름다운 별에 머무는 것이고, 이 지구에는 앞으로도 수많은
생명들이 살아야 할 생명의 터전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행동했습니다.
‘주님 날도 저물었으니 오늘은 저희와 함께 머물러 주십시오.’ 그들의
행동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행동 없는 믿음은 참된
믿음이 아닙니다. 실천 없는 사랑은 관념에 머물 뿐입니다. 제자들이 겁에
질려 다락방에만 머물렀다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다락방에서 내려와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나왔습니다.
이제 그들의 발은 주님의 발이 되었고, 그들의 손은 주님의 손이 되었고,
그들의 말은 복음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이렇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신앙의 신비여! 우리는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그분의 부활을 굳게
믿나이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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