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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문.수필.독후감.영화평 스크랩 책소개 `언어적 근대`라는 문제설정
스투파 추천 0 조회 69 15.01.08 22:3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언어적 근대의 기획 - 주시경과 그의 시대
김병문, 소명출판, 2013

근대언어학은 최소 일정한 언어적 규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만큼은 평등하다고 가정되는 개인,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균질적인 공동체를 전제한다. 물론 이때의 평등한 개인은 근대적 주권자로서의 ‘국민’에, 균질적 공동체는 ‘국민국가’에 대응되는 것이며, ‘국민’이 공유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언어의 내적 규칙은 ‘국어문법’에 다름 아니다. ‘국어문법’은 이와 같이 근대적 개인과 그들의 (정치) 공동체인 ‘국민국가’를 요청한다. 반대로 ‘국민국가’ 역시 구성원의 동질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의 하나로써 ‘국어문법’을 필요로 한다. 최소한 ‘국어’의 내적 규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들 모두가 동등한 ‘국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근대언어학이 언어 내적 사실에 집착했던 것은 중세적 세계관의 극복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 이전에 언어와 문자에 대한 전문적 담론은 ‘성스러운’ 고전 텍스트 해독에 골몰해 있었다. 이에 비해 근대언어학은 성스러운 고전어나 저잣거리의 상스러운 말이나 내적 규칙에서는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따라서 언어 내적 규칙에 대한 천착은 곧 속어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스러운 고전 텍스트의 언어든 연애편지에 동원된 저속한 문장이든, 또 천리(天理)를 깨친 성현의 말씀이나 이문(利文)에 눈이 먼 장사치의 말이든, 언어적 규칙에 있어서만큼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발견의 정치사회적인 함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언어적 근대’를 찾아서

1990년대 이후 ‘근대’라는 개념은 인문사회과학계에서 하나의 화두와도 같은 역할을 해 왔다. 이는 근대에 형성된 제도나 생활 습속들이 근본적으로는 큰 변화 없이 현재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주고 있다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국어’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이들 사이에서는 ‘언어적 근대’에 대한 논의가 빈약했던 것이 사실이다. 물론 ‘국어사’라는 연구 영역을 통해 한국어의 역사가 다루어지고 여기서 ‘근대 국어’가 주요한 주제로 제기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의 ‘근대’는 여타의 인문과학에서 사용하는 개념과는 큰 차이가 있다. 예컨대 ‘근대 사회, 근대 사상, 근대 문학, 근대 정치, 근대 과학, 근대 교육, 근대 미술’ 등등의 ‘근대’가 서로 상당한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반면 ‘근대 국어’는 앞의 ‘근대’ 개념과 내적 연관관계를 가진다고 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국어사’에서 다루는 ‘근대 국어’는 대개 17세기 초부터 19세기 말 사이의 한국어를 가리키는데, 이 시대 구분이 언어 외적 요인들과는 무관한 언어 내적 사실, 즉 음운이나 문법 체계들의 변화를 기준으로 삼기 때문이다. 이렇듯 역사를 다루면서도 결코 언어 외적 환경과 맥락을 다루지 않는, 혹은 다룰 수 없는 현재의 언어 연구 풍토가 어디서 ‘기원’하는가 하는 질문 앞에서 ‘근대’라는 문제 설정에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근대’라는 문제 설정이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러나 이전 시기와는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생활 습속과 의식의 기원을 추적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서는 바로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근대 민족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민족어에 대한 자각과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민족적 정체성 형성이 매우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식의 논의는 상식처럼 통용되고 있으나 정작 ‘국어’ 연구자들은 이에 대해 별반 발언을 하지 않고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기존의 국어학계는 이런 논의에 개입할 이렇다 할 방법론이나 개념적 도구를 갖고 있지 못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보니 근대라는 문제 설정 속에서 언어에 접근하는 여타 인문사회과학자들의 논의를 인정할 수도, 또는 반박할 수도 없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일종의 토론 부재의 상태인 셈이다. 이 책의 발간이 반가운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상상의 공동체’가 형성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언어’이지만, 언어를 다루는 이들에게는 ‘민족’이 상상된 것인지 엄연한 실체인지를 논의할 개념적 도구가 없다. 그저 고대 국어로부터 중세, 근대 및 현대 국어로 면면히 이어져 오는 국어의 음운, 형태, 문법적인 변화를 따져 볼 뿐이다. 사실 이런 관점에서는 19세기 말 이후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특별한 질적인 단절이란 있을 수 없다. ‘근대어의 탄생’이라는 표현 자체가 어불성설인 것이다. 근대에 들어서 질적으로 다른 새로운 한국어가 생겨났다는 것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사실 ‘근대어의 탄생’이라는 표현은 근대에 나타난,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인식, 그리고 이에 기반을 둔 어떤 의식적 노력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온당할 터이다. 이전에는 아무렇지도 않고 특별할 것도 없었던 모어에 대해 새로운 인식이 생기고 그에 따른 어떤 의식적 노력이 사회 운동의 형태로까지 표출되었으며, 그리고 이 과정에서 특히 인쇄 매체상의 변화, 즉 표기의 수단이나 그 방식이라든가 공적 문체 등에 일정한 변화가 이루어지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물론 이는 매우 근대적인 현상이다. 언어적인 면에서 전근대를 특징짓는 현상은 라틴어, 또는 한문 같은 보편어가 문어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 이와 같은 언어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그에 따른 의식적 노력이 시작된 것은 언제부터일까? 그리고 이러한 흐름이 하나의 사회 운동의 차원으로 표출되는 것은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본서는 그 근원을 주시경에 주목하여 서술하고 있다. 주시경이 이른 시기부터 ‘국문’과 ‘국어’에 대한 자각을 통해 지속적인 발언을 했으며, 또 ‘주시경 일파’라 부를 수 있는 집단을 형성해 사회 운동적 차원에서 언어 문제에 접근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기 때문이다. 식민지 시기의 이른바 ‘한글 운동’은 물론이고 해방 후의 언어 운동 및 정책 역시 그의 직접적인 제자들이나 그의 이론을 따른 이들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점(이는 근본적으로 남한이나 북한이나 마찬가지이다) 역시 주시경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주시경에 주목하는 마지막 이유는 ‘언어에 대한 새로운 의식’이라는 관점에서 주시경에 접근했을 때, 앞서 언급한 일종의 토론 부재의 상황을 타개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이다. 주시경이라면 국어학계에서도 이미 수많은 업적이 나와 있으며, 언제라도 토론에 나설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언어적 근대’라는 문제 설정을 통해 주시경에 접근한다면, 기존 국어학계의 성과를 살리면서도, 근대의 초입에 어떠한 새로운 인식과 의식적 노력이 언어와 관련해서 있었고, 결국 이것이 현재에까지 어떻게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를 해명하는 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 언어적 근대의 기획>은 기본적으로 근대라는 문제 설정 속에서 주시경의 업적을 재해석해 낸 결과물이다. 또한 이를 통해 근대에 들어 생겨난 새로운 언어 인식이라는 것이 과연 어떠한 성격을 띠는 것이며, 그것이 특히 언어학적 텍스트에서 어떤 양상으로 드러나는지를 적극적으로 해명한 연구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앞부분에 언급한 ‘토론 부재’의 상황을 해소하는 데에도 일정한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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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

 

1.

언어사회학서설 - 잃어버린 말을 찾아서라는 연작 소설집의 첫 작품 떠도는 말들 언어사회학서설 1에서 이청준은 현대 사회에서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말들의 실체를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은 신문기자 출신의 자서전 대필가. 그는 작업 중에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진저리를 친다. 그 중 태반은 잘못 걸려온 전화이고, 그마저도 혼선으로 인해 제멋대로 뒤섞이기 일쑤다. 그는 언제부턴가 그것들이 말의 유령이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맡은 대필 작업은 코미디언의 자서전이다. ‘그의 말은 그의 말이 아니었고, 그의 웃음은 그의 웃음이 아니었다.’ 따위의 몇 문장에서 한 치도 더 나가지 못한다. 그러던 차에 걸려온 이상한 전화 한 통. 말괄량이 아가씨는 전부터 죽 당신을 알고 있었다며 시시때때로 전화를 걸어 가뜩이나 심란한 주인공을 괴롭힌다. 처음에는 미심쩍어하다가 이런 저런 수작 끝에 얼마간 말을 섞게 되고 급기야는 그녀가 입원했다는 병원을 불시에 찾아간다. 꽃다발까지 사들고. 그러나 병원에는 그러한 여성이 입원했다는 어떠한 기록도 없다. 아니 그런 사람은 애초에 어디에도 없었으며, 말의 유령만이 그의 주위를 떠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시 전화벨이 올리고, 수화기 속에서는 또 말이 말을 걸어온다. 그러다 전화는 혼선되고 먼저의 그 목소리는 이제 또 다른 목소리와 뒤엉킨다.

 

말에 대해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을 때부터, 그 계기가 어떤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나는 왠지 언어학이란 학문이 말과 사회와의 관계를 도외시하고 있다고, 그리고 그것은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말만 보면 말도 못 본다는 선언인지 구호인지를 읊조리던 학부 때의 어느 공부모임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철지난 운동권 학습서의 영향 때문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사회와 언어의 관계를 밝히는 것이 내가 할 언어학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정작 사회언어학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대학원을 입학하기 전부터 나의 전공이 사회언어학으로 정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래서다. 그러던 차에 풍문으로 들었던 것이 언어사회학이었다. 이건 또 뭔가. 사회언어학과는 어떻게 다르단 말인가?

 

70년대 이미 언어사회학이란 말을 소설의 제목에다 붙였던 이청준은 과연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던 것일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어쨌든 말과 관련된 사회적 병리현상을 연구하는 학문쯤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는 우리 사회의 말이 말하는 사람과 분리되어 있다고 보았다. 말 따로 사람 따로라는 것인데, 이렇게 사람으로부터 분리되어 홀로 나돌던 말은 결국 사람을 곤경에 빠트린다. 말의 역습이라고 할까. 첫 번째 연작의 주인공이 그의 말은 그의 말이 아니었고 그의 웃음은 그의 웃음이 아니었다.’라는 첫 문장에서 한 치도 더 나아 갈 수가 없었던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말은 이미 인간과의 연결고리를 찾지 못하고 제멋대로 떠돌고 있기 때문에 그가 내뱉는 말조차도 그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말을 인간으로부터 소외시킨 것은 누구인가? 아니 말이 인간으로부터 소외되었다는 것은 도대체 무슨 뜻인가? 그리고 이런 일은 대관절 왜 어떻게 일어난 것일까?

 

이 책은 이와 같은 질문으로부터 출발한다.

 

2.

 

음 법칙에 예외 없음이라는 테제로 잘 알려진 소장문법학파 이래로 근대언어학은 언어에 새겨진 인간의 무늬[人文]’를 가급적 떼어내려고 애썼다.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떤 상황에서 한 말이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언어학이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러한 언어 외적 요소와 무관한 언어의 내적 법칙이었다. 예컨대 소쉬르는 실제 발화와 관련되는 파롤적인 것을 일반언어학의 대상에서 제외하고자 무진 노력했다. 그가 언어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발화가 아니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추상적인 수준의 체계(system), 즉 랑그였다. 이 랑그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계급적인, 성적인, 지역적인 변이들은 간단히 무시되었다. 중요한 것은 이것들과 무관하게 존재하는 규칙, 즉 언어의 내적 법칙인 것이다. 그렇게 과학적담론이 된 언어학에는 그러나 인간도 사회도 없었으며, 그것들을 설명할 개념도 방법론도 없다. 오직 퍼즐 맞추기와 비슷한 자족적인 규칙의 놀이들만이 가득할 뿐이다. 거기에도 물론 진리를 찾는다는 즐거움과 환희는 있다. 하지만 그 환희에 탐닉할수록 다른 담론과의 소통은 힘들어지고 언어학은 점점 더 자폐적이 되어만 간다.

 

그러나 사실 근대언어학이 언어 내적 사실에 집착했던 것은 중세적 세계관의 극복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근대 이전에 언어와 문자에 대한 전문적 담론은 성스러운고전 텍스트 해독에 골몰해 있었다. 이에 비해 근대언어학은 성스러운 고전어나 저잣거리의 상스러운 말이나 내적 규칙에서는 우열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밝혀냈다. 따라서 언어 내적 규칙에 대한 천착은 곧 속어의 복권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 그 말을 쓰는 사람들이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성스러운 고전 텍스트의 언어든 연애편지에 동원된 저속한 문장이든, 또 천리(天理)를 깨친 성현의 말씀이나 이문(利文)에 눈이 먼 장사치의 말이나 언어적 규칙에 있어서만큼은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발견이 갖는 정치사회적인 함의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최소한 일정한 언어적 규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만큼은 평등하다고 가정되는 개인, 그리고 그러한 개인들로 구성된 균질적인 공동체를 근대언어학은 전제한다. 물론 이때의 평등한 개인은 근대적 주권자로서의 국민, 균질적 공동체는 국민국가에 대응되는 것이며, ‘국민이 공유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언어의 내적 규칙은 국어문법에 다름 아니다. ‘국어문법은 이와 같이 근대적 개인과 그들의 (정치) 공동체인 국민국가를 요청한다. 반대로 국민국가역시 구성원의 동질성을 확인해 줄 수 있는 것의 하나로 국어문법을 필요로 한다. 최소한 국어의 내적 규칙을 공유한다는 점에서만큼은 그들 모두가 동등한 국민이 되기 때문이다. 이때 강조되는 것은 그들이 공유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추상적 층위의 언어 규칙(랑그)이지 실제 발화에서 빚어지는 온갖 종류의 차이(파롤)는 아니다.

 

이 땅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국어문법을 구상했던 이들 가운데 하나가 주시경이다. 이 책은 주시경의 국어문법이 위와 같은 근대적인 담론의 배치와 무관하지 않음을 밝히고자 했다. 물론 이러한 문제의식은 기존 국어학계에서는 매우 낯선 것이다. 1언어적 근대라는 문제 설정에서는 그러한 문제의식이 갖는 의미를 가급적 충분히 소개하려고 했다. 2언어적 근대를 찾아서 - 동아시아의 경우에서는 특히 동아시아에서 언어에 대한 전통적 담론의 양상이 어떠했는가, 그리고 근대적 담론은 그것과 어떻게 다른가를 몇 가지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3국어를 찾아서에서는 주시경이 국어라는 말을 어떠한 맥락에서 쓰기 시작했는가 하는 점을 짚어 봄으로써 그의 국어가 결코 구체적 맥락에 놓여 있던 것이 아니라, 추상적 층위의 존재였다는 사실을 드러내려고 했다. 4근대적 개인의 발견과 국어국어문법과 근대적 의미의 개인이 갖는 관계를 주시경의 저술을 통해 확인하고자 했으며, 5국어의 지층들에서는 국어문법을 기술하는 데 사용한 각종 개념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이들에 녹아 있는 사회역사적 함의는 무엇인지 살펴보았다. 6타자의 시선과 국어의 발견에서는 주시경이 국어 연구에 진력하게 된 내적 동기를 검토하고, 글쓰기 스타일의 변동과 연구 모임의 조직을 각각 내적 외적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한다. 7국어의 구축은 그가 언어 단위를 어떻게 범주화했는가 그리고 그것이 국어사전 편찬에 어떻게 연결되는가 하는 점을 주로 다루었다.

 

논의를 전개하는 과정에서 가급적 국어학의 전문 개념과 이론은 배제하려고 했으나 여전히 곳곳에 언어학적 술어들이 버티고 있다. 그래서 3, 4, 5, 7장 등에서는 각 장의 논의를 사회역사적 맥락에서 정리하는 부분(각 장의 3)을 따로 마련하여 이해를 돕고자 했다. 특히 5장과 7장은 다루는 주제의 성격상 국어학사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다소 이해하기 어려운 면도 없지 않은데, 역시 각각의 3절을 참조하면 대략적인 윤곽을 그려 볼 수 있다. 맺음말인 8은유로서의 언어는 의사소통 모델이라는 문제를 끌어와 이 책이 다룬 내용을 좀 더 거시적인 맥락에서 정리해 보았다.

 

3.

 

사회언어학언어사회학의 차이는 무엇일까? 94년 가을이었던가. 어둑어둑 해가 지고 있던 어느 오후 종합관 강의실에서 벌인 세미나의 주제는 바로 비슷하면서도 달라 보이는 이 두 분야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그날의 결론이 어떻게 났는지는 정확한 기억이 없지만, 사회언어학은 언어학이고 언어사회학은 사회학이니 어쨌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사회언어학이라는 식의 생각을 그때 가지고 있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날 세미나가 끝나갈 무렵 나타난, 당시로서는 소장(少壯)’이었던 사회언어학 전공의 한 교수는 우리에게 일갈했다. 그런 분과학문의 틀에 얽매이지 말라고. 그것이 사회학이든 철학이든 역사학이든 아니면 심리학이든 말을 들여다보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가리지 말고 섭렵하라고.

 

사회언어학과 언어사회학의 차이에 대한 관심은 그때 이후로 깨끗이 사라졌고, 언어학이냐 아니냐도 별로 가리지 않았다. 대신에 나를 포함해서 그 소장사회언어학자를 지도교수로 둔 이들은 하나 같이 학위논문 심사 때마다 심사위원들에게 이것이 어떻게 국어학인지, 언어학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운명을 감수해야 했다. 분과학문의 힘은 여전히 세지만, 그 경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는다. 그때의 그 소장학자는 이제 정년퇴임을 앞둔 노교수가 되었다. 내가 대학원에 가겠다고 할 수 있었던 것도 또 이런 주제로 논문을 쓰려고 마음먹을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김하수 선생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마음으로부터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이 책은 필자의 학위 논문을 수정한 것이다. 당시에 심사를 맡아주셨던 고려대학교의 최호철 선생님, 연세대학교의 임성모, 김현주 선생님, 대구대학교의 조태린 선생님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 이 책이 출판되도록 힘써 주신 연세대학교의 김영민, 고석주 선생님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린다. 이 책의 구상은 3국어를 찾아서를 집필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 글은 애초에 일본 동지사 대학교의 고영진 선생님이 기획한 식민지 시기 전후의 언어 문제(소명출판, 2012)에 싣기 위해 쓴 것이다. 출발점을 굳이 따져보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멀리서 늘 관심 갖고 지켜봐 주시는 고영진 선생님께 감사를 드린다. 편집에 까다로운 부분이 없지 않았을 텐데도 말끔하게 활자화해 주신 소명출판사의 관계자 여러분께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2013년 가을

 

김병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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