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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묵상글 들 ( 설. - <복 박>을 크게 마련하라.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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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설.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복 박>을 크게 마련하라
오늘 독서 민수기의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아론과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축복하라고 말씀하시고,
말씀대로 축복하면 당신도 그들에게 복을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리고 설 명절에 우리는 전통적으로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인사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아론과 아들들처럼 여러분에게 축복하며,
다시 말해서 여러분에게 복을 빌어드리며 두 가지 덕담을 하려고 합니다.
첫째는 여러분도 저도 축복하는 한 해가 되자는 덕담입니다.
이웃을 향한 우리 축복은 우리 행복의 조건이기 때문입니다.
축복 곧 복을 빌어주는 것은,
이웃을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남에게 복을 빌어줘야 복이 돌아오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사실 남을 축복해야 남도 나를 축복해주니
복이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라도 축복해줘야 하겠지만
설사 복이 돌아오지 않을지라도 축복해주라는 말이고,
그것은 남이 아니라 나의 행복을 위해서라는 말입니다.
저주하는 사람보다는 축복해주는 사람이 행복하고,
무엇보다도 축복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강복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아론과 아들들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하면 당신도 그들에게 복을 내리시겠다고.
“그들이 이스라엘 자손들 위로 나의 이름을 부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내리겠다.”
주님께서 복음의 다른 곳에서 말씀하신 바 있듯이
주는 됫박과 받는 됫박은 같습니다.
주는 됫박 따로 있고 받는 됫박 따로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같은 <복 박>으로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것이며
같은 <저주 박>으로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는 겁니다.
둘째 덕담은 복을 많이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 가운데는 행복도 욕심부리지 말라는 사람이 있는데
저는 여러분이 복을 많이 받아 많이 행복하시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정도로 행복하라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행복이란 만족인데 이 정도로 만족할 줄 알 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이고,
사실 행복한 줄 모르는 것이 불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복을 많이 받으시라고 하는 것은
지금 받는 복이 부족하다며 욕심부리라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많이 주시는 복을 내가 부주의하여 흘려버리거나
나의 복 박이 작아서 넘쳐버리지 않게 하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앞서 얘기했듯이 여러분이 <복 박>을 키우시라는 뜻입니다.
욕심은 버리고 <복 박>은 키우라는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복을 주시는 분이라는 것을 믿고,
하느님께서 주시는 복이 많고 넘친다는 것을 믿는다면
비 올 때 빗물을 받기 위해서 큰 양동이를 마련하듯이.
새 해 주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아
올해도 행복한 여러분 되시길 빌며 세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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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설.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3주일이자 말씀주일이고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설입니다. 보편교회는 신앙이나 공익에 관계없는 일에 엄격한 통일성을 강요하고자 하지 않고 오히려 여러 종족과 민족들의 훌륭한 정신적 유산을 보호 육성하도록 권고합니다. 또한 민족들의 풍습 중에, 미신이나 오류와 끊을 수 없는 관계에 있지 않은 것이면, 무엇이나 호의를 가져 고려하고, 할 수 있다면 잘 보존하기를 가르칩니다.
이에 따라 우리 민족의 참된 설의 의미와 어원을 살펴 봄으로써 신앙안에서 우리 민족에 맞는 설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새해의 첫 시작을 알리는 설은 묵은해를 정리하여 떨쳐버리고 새로운 계획과 다짐으로 새 출발을 하는 첫날 입니다. 이 설은 순수 우리말로써 그 말의 뜻에 대한 몇가지 어원을 살펴보며 몇가지 신앙의 덕담을 하고 싶습니다.
첫번째는 서럽다는 의미입니다. ‘서러워서 설 추워서 추석’이라는 속담도 있는데 그 옛날 추위와 가난 속에서 맞는 명절이라서 서러운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차례를 지내면서 돌아가신 부모님 생각이 간절하여 그렇게 서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런 배경 위에서 신앙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서러움은 제 2독서에서 나오는 내용처럼 내일일을 알지 못하여 서럽고, 우리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라는 말이 서럽게 합니다. 이 좋은 세상에 말입니다. 그래서 복음에서 주님이 말씀하시는 것처럼 깨어 있으면서 현재를 헛되이 보내지 말고 충실하고 의미깊게 살아가는 것이 서러움이 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 보도록 합시다.
두번째로는 '사리다(삼가다)의 의미입니다. 몸과 마음을 조심하고 신중히 가다듬어 새해의 첫 시작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신앙의 삶은 우리 각자에게 마지막 날이 언제 닥칠지 모르기에 새해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도록 다짐해 봅시다.
세번째로는 나이를 말할 때 ‘몇 살’ 하는 살에서 비롯된 어원입니다. 이 의미를 바라보며 우리의 영적인 신앙의 나이는 얼마인지 다시 말해서 생을 횟수로 얼마만큼 살아 왔느냐가 아니라 얼마만큼 값지게 신앙안에서 의미있게 살아왔는지 성찰해 보았으면 합니다.
마지막으로 ‘낯설다’는 의미입니다. 설은 새해라는 정신적, 문화적 시간의 충격이 강하여 ‘낯설다는 뜻입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언제나 타성에 젖어서 기도하지 말고 늘 새로움의 충격으로 받아들여 기도를 하는 깨어 있는 종말적 신앙인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오늘 새해인 설을 맞이하는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사육제 동안 두브노 (Dubno)에서 생긴 일
폴란드 -1866년
두브노 (Dubno)는 러시아-폴란드령에 있는 작은 도시이다. 이곳에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사순절의 마지막 3일 동안 성체께 조배드리기 위해 현시하는 풍습이 있었다. 시간이 있는 사람은 이 성체조배 시간에 꼭 참여했다. 1866년 2월 18일 성체 앞에 무릎을 꿇고 있던 사람들은 성광 위에 있는 성체로부터 갑자기 빛줄기가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 빛의 중앙에 하느님이신 구세주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러한 구세주의 현현은 40분간의 기도시간 동안 내내 뚜렷하게 지속되었다. 단지 몇몇의 적은 수의 사람들만이 아니라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 위대한 사람이나 소인배 할 것 없이 멀리서부터 기적을 체험하기 위해 급히 이곳으로 달려와서 참석한 모든 사람들은 예외없이 성체 안에서 인간의 형체를 취하신 사랑하올 구세주를 보았던 것이다.
러시아 경찰은 즉시 이 사건에 대한 통보를 받았다. 본당사제는 소환되어 진상을 알려야만 했다. 그런 후에 찌토미르(Zitomir)에 있는 총독 크죠르트쿄프(Czortkow)에게 보고되었다. 그 총독은 사제에게 계속 기적에 대해 얘기할 경우 감옥형에 처하겠다고 위협하면서 기적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시켰다. 본당신부는 주교에게 모든 일에 대한 보고서를 보냈다. 그리고 신부는 눈으로 목격한 모든 증인들에게 더 이상 그 문제에 관해 얘기하지 말 것을 간절히 부탁했다.
하느님이신 구세주께서는 무엇때문에 바로 사순절의, 여러 날에 걸쳐 이루어진 속죄기도 동안에 나타나셨을까? 확실히 그분은 이로써 방종한 시대에 많은 위험에 처해 있는 영혼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도록 도처에 있는 선량한 크리스찬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시려고 하셨고, 또 춤추는 대신 기도하는 그런 이들을 당신께서 특히 흡족해 하신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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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수도회 한국관구
에페소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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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민수 6,23)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주님의 축복을 빕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복을 내리시고, 은혜를 베푸시고, 평화를 주실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말합니다.
“너희는 이렇게 말하면서 ... 축복하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은혜를 베푸시리라. ...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평화를 베푸시리라.”(민수 6,22-26).
오늘 <복음>의 앞부분은 주인의 귀환을 깨어 기다리는 종들이 복을 받는다는 말씀(루카 12,35-38)입니다. 사실, <루카복음>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위하여 남겨주신 최후의 행위는 ‘축복’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승천 장면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드시어 그들에게 강복하셨다.
이렇게 강복하시며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라가셨다.”(루카 24,50-51)
그렇습니다. 우리는 ‘축복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생명과 자비를 입은 존재요,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입은 존재입니다. 나아가, 우리 주님께서는 당신 생명을 주시고, 당신 존재를 건네주셨습니다.
‘복’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깨닫는 일입니다. 곧 지금도 우리와 ‘동행하시는 주님’을 깨닫는 일입니다. 따라서 축복받은 사람이란,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존재와 자비에 깨어있는 사람입니다. 결국,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에 깨어있는 만큼, 꼭 그만큼 축복받은 사람이 됩니다.
<성경>에서, ‘축복’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놀라우신 자비를 말합니다. ‘축복’을 뜻하는 히브리어 단어(바르크, 브라크하)는 ‘어떤 것을 선사함’, ‘주어진 선물’, 곧 자비를 나타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무엇보다도 말씀과 그 말씀의 신비를 통해 표현되고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곧 축복은 ‘말씀’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축복’인 것입니다. 곧 ‘좋은 말’(εύλογία, benedictio), 좋게 되기를 빌어주는 말이요, 좋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곧 상대를 ‘위하여’ 건네주는 말입니다.
“설”인 오늘 우리는 서로에게 축복을 빌어 줍니다. 사실, 축복을 빌어주면 빌어주는 이에게 축복이 먼저 옵니다. 왜냐하면 축복을 비는 행위가 이미 ‘축복을 비는 축복’을 입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곧 ‘축복하는 행위’가 곧 축복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축복’을 어떻게 빌어주는가? 곧 ‘축복기도’는 어떻게 하는가? 이렇게 하면 됩니다.
주님, 그를 축복해주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그가 응답하게 도와주십시오!
또한 그 축복이 이루어지도록 제가 협조자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저도 그를 축복합니다.
참 묘한 것은, 상대를 축복해주는 순간, 변화의 영이신 성령께서는 이미 축복하는 이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축복하는 이 안에 ‘먼저’ ‘위하는 마음’(호의, 선의)을 북돋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축복하는 이가 먼저 축복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축복받은 이가 축복을 주는 이가 됩니다. 이처럼, 이 소박한 기도인 ‘축복기도’는 우리 안에 그분의 자비가 흘러들게 하고, 그분 존재를 건네받게 합니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그대를 통하여 세상의 모든 이가 복을 받을 것입니다.”(창세 12,3).
다시 한 번, 축복을 빕니다. 무엇보다도 ‘하느님을 받아 누리는 축복’이 한 해 내내토록 차고 넘치길 바랍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설”을 맞이하여 축복을 빕니다.
오늘,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선물인 “축복”을 주신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베풀어진 이 ‘축복’이
일 년 내내 토록 날마다 여러분의 가슴 속을 따뜻하게 지피고
올 한 해를 사는 힘과 용기의 샘이 되게 하소서.
또한 당신께 축복을 받은 이들이
한 해 내내 참된 행복 안에 머물고 이웃에게 사랑과 행복을 나누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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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설.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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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12월 31일 퀸즈한인 성당에서 송년미사를 함께 했습니다. 2019년에 뉴욕에 왔으니 어느덧 4번째 송년미사를 같이 했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2022년에 있었던 본당의 행사들을 영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의 여진이 아직 남아있지만 본당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신문사가 성당 옆에 있기도 하지만, 본당 신부님이 배려해 주어서 가족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성당에 손님 신부님들이 많이 오시면 신문사로 모시기도 했고, 신문사에 손님 신부님들이 많이 오시면 제가 성당으로 가서 자기도 했습니다. 미사를 마치면서 예전처럼 ‘고향의봄’을 함께 불렀습니다. 고향 땅을 떠나서 미국에 정착한 이민자들의 사연은 다들 다를 것입니다. 눈물 젖은 빵을 먹기도 했고, 차별과 무시를 당하기도 했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는 아픔을 겪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고향의 봄’을 부르는 감회는 모두에게 진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도 3년 전 코로나가 한참 기승을 부릴 때 어머니가 한국에서 선종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미국에서 어머니를 위해 미사를 봉헌해야 했습니다.
오늘 설날을 지내면서 ‘고향의 봄’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리인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꽃동네 새 동네 나의 옛 고향/ 파란 들 남쪽에서 바람이 불면/ 냇가에 수양버들 춤추는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어려서 고향 땅을 떠나 서울에서 살았지만 제가 태어난 고향 선산을 갈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80순이 되어가는 고향 큰 형님이 선산을 돌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집 앞에는 개울이 흐르고, 집 뒤에는 산이 있습니다. 개울이 내려가는 끝에는 저수지가 있습니다. 5대조 할아버지는 박해를 피해서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김제, 정읍, 전주로 가는 길목에 있는 곳이라서 포졸이 오면 도망가기 쉬웠다고 합니다. 집 앞 마당에는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32년 전 사제서품 받고 첫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고향 어르신들이 모두 오셔서 미사에 참례했습니다. 오늘 설날을 지내면서 선산이 있는 고향, 제가 태어난 고향 땅이 그립습니다. 언제고 시간이 허락되면 고향 땅 선산에 가서 친지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고, 돌아가신 부모님과 친지들을 위해서 연도를 바치려 합니다.
낮선 땅에서 서글픈 노래를 불렀던 민족이 있습니다. 시편 137편은 그들의 심정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바빌론 강기슭 거기에 앉아 시온을 생각하며 우네./ 거기 버드나무에 우리 비파를 걸었네./ 우리를 포로로 잡아간 자들이 노래를 부르라, 우리의 압제자들이 흥을 돋우라 하는구나./ 자, 시온의 노래를 한 가락 우리에게 불러 보아라./ 우리 어찌 주님의 노래를 남의 나라 땅에서 부를 수 있으랴?/ 예루살렘아, 내가 만일 너를 잊는다면 내 오른손이 말라 버리리라./ 내가 만일 너를 생각 않는다면 내가 만일 예루살렘을 내 가장 큰 기쁨 위에 두지 않는다면 내 혀가 입천장에 붙어 버리리라./ 주님, 에돔의 자손들을 거슬러 예루살렘의 그날을 생각하소서. 저들은 말하였습니다. 허물어라, 허물어라, 그 밑바닥까지!/ 바빌론아, 너 파괴자야! 행복하여라, 네가 우리에게 행한 대로 너에게 되갚는 이!/ 행복하여라, 네 어린것들을 붙잡아 바위에다 메어치는 이!” 저는 이 시편을 성경보다 먼저 ‘보니엠’이라는 보컬 그룹의 노래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멜로디는 경쾌했지만 나중에 내용을 알았을 때는 이스라엘의 슬픈 역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아픔과 슬픔을 아셨고, 다시금 고향 땅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설날에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건강입니다. 몸이 아프면 산해진미가 있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몸이 아프면 재물이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다음은 재물입니다. 재물은 우리를 풍족하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은 친구입니다. 건강해도, 재물이 많아도 마음을 나눌 친구가 없다면 허전하기 마련입니다. 건강, 재물, 친구가 모두 채워진다면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설날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바라는 복을 듬뿍 받으시기 바랍니다. 신앙인들은 또 다른 복을 받으면 좋겠습니다. 신앙인들이 받아야 하는 복은 어떤 것일까요? 친절하게도 예수님께서는 산상수훈에서 우리 신앙인들이 받을 복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참된 행복’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에게 그런 복이 주어질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입니다. 평화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입니다. 복음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2023년 설날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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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새해의 기쁨을 맘껏 누리시고, 주님의 사랑과 은총이 여러분 가정에 충만하시길 기도합니다.
오늘은 한 해의 첫날을 기리는 명절인 설날입니다. 설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새로 온 날이 낯설다는 의미에서 낯설다의 어근인 ‘설다’에서 온 것으로 본 시각과 한 해가 새롭게 개시되는 날을 의미하는 ‘선날’이 설날로 바뀌었다고 보는 시각이 대표적입니다. 낯선 설, 한 해가 새롭게 시작되는 ‘설’입니다. 이렇게 낯설고 새로운 날에 어떤 생각을 해야 할까요? 예전과 같은 부정적인 마음으로 힘든 날이 아닌, 긍정적인 마음으로 희망을 간직할 수 있는 멋진 날들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무장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분명 어제와 다른 참 기쁨의 삶을 여러분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솝 우화에 나오는 여우와 신포도 이야기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렇지요. 여우가 길을 가다가 잘 익은 포도를 발견합니다. 이 먹음직스러운 포도를 먹으려고 폴짝폴짝 뛰어 보았지만 너무 높은 곳에 있어서 도저히 포도를 딸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의 노력 끝에 여우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 포도는 시어서 맛이 없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바꾸고 나서 여우는 편안한 마음으로 자기 갈 길을 갈 수 있었습니다. 만약 여우가 생각을 바꾸지 않고 계속해서 포도를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면 어떠했을까요? 그 노력으로 포도를 얻을 수 있다면 커다란 만족감을 얻게 되겠지만, 모든 노력으로도 얻지 못한다면 그 실망감은 대단히 클 것입니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다 보니 포도를 먹지 못했어도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생각도 바꾸면 삶이 편안해진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좌절과 절망을 가져오는 생각은 안 됩니다. 또 불평과 원망을 가져오는 생각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지금의 어려움을 뒤로 할 수 있는 지혜, 미래의 희망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께서는 오늘 복음에서 주인이 왔을 때 깨어있는 종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루카 12,40)라고 명령하십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과거로 되돌아가는 삶이 아닙니다. 바로 미래의 삶인 주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삶인 것입니다. 이를 위해 과거에 갇혀 있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미래를 바라보며 지금의 삶에 충실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이 새해 복을 더 충만하게 받을 수 있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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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희망이든 자신이 품고 있는 희망을 믿고 인내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용기이다. 그러나 겁쟁이는 금세 절망에 빠져 쉽게 좌절해 버린다(에우리피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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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설.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자녀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주여, 당신은 대대로 저희의 안식처가 되시었나이다.”(시편90,1)
오늘 화답송 시편 90장은 제 좋아하는 시편이고 방금 부른 윗 화답송 후렴도 참 좋습니다. 이어지는 다음 시편 기도도 은혜롭고 위로와 힘이 됩니다. 설날 아침 미사에 잘 어울립니다.
“아침에 당신 자애로 저희를 채워 주소서.
저희는 날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리이다.
주 하느님의 어지심을 저희 위에 내리소서.
저희 손이 하는 일이 잘되게 하소서.”(시편90,14.17)
오늘은 하느님의 축복이 넘치도록 주어지는 설날입니다. 설날이자 연중 제3주일이고 하느님의 말씀 주일이기도 합니다. 반갑고 고맙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9년 9월 30일 자의 교서,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를 통해 매년 연중 제3주일을 하느님의 말씀 주일로 지내도록 제정하셨습니다. 작년 하느님의 말씀 주일 때 교황님의 다음 강론 대목도 여전히 호소력을 지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거짓 우상들을 무너뜨리고, 우리의 예상을 폭로하며, 지나치게 인간적인 하느님의 모습을 허물고, 그분의 참다운 얼굴과 그분의 자비를 보도록 이끌어 줍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믿음을 기르고 새롭게 합니다. 우리의 기도와 영성생활의 중심에 하느님의 말씀을 다시 두도록 합시다!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지 우리에게 계시하는 말씀을 중심에 둡시다. 우리를 하느님께 가까이 다가가게 하는 말씀을 말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살아가는 참으로 축복받은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 ‘하느님의 자녀’ 두 말마디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에게 하느님의 말씀은 본질적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사람답게,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는 말씀의 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 없이, 사람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참으로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하느님의 말씀 공부보다 더 중요한 평생 공부는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날 미사중 강론 제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행복하여라, 하느님의 자녀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삽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행복하게 살아야 할 꽃자리 하늘 나라는 오늘 지금 여기입니다. 그 구체적 방법을 오늘 말씀을 바탕으로 소개합니다.
첫째, 감사하십시오.
찬양하십시오. 감사와 더불어 자연스럽게 뒤따르는 하느님 찬양입니다. 하느님 찬양이 살맛나는 인생을 만듭니다. 설날 저녁 성무일도시 후렴 둘의 곡도 참 흥겨웠습니다.
“우리 힘 하느님을 기꺼이 찬양하자.”
“초승에 한보름에 우리네 축제일에 하느님을 기꺼이 찬양하자.”
찬양의 기쁨, 찬양의 행복으로 살아가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의 계속되는 축복속에 감사와 찬양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은 이 은혜로운 설날 미사중 당신 사제를 통해 우리 모두 하나하나에게 복을 내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그대에게 복을 내리시고, 그대를 지켜주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비추시고, 그대에게 은혜를 베푸시리라.”
“주님께서 그대에게 당신 얼굴을 들어 보이시고, 그대에게 평화를 베푸시리라.”
축복중의 축복이 평화의 축복입니다. “우리 모두 매일의 삶에서 평화의 증인이 되도록 하자”는 어제 교황님의 말씀도 생각납니다. 참으로 하느님이 좋아하시는 일이 당신 자녀들에게 복주시는 일이며, 주님의 복덩어리인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답게 감사와 찬양으로 응답하며 살아야 함을 깨닫습니다. 감사와 찬양은 우리가 자발적 기쁨으로 행해야 할 우리의 우선적 마땅한 의무입니다.
둘째, 겸손하십시오.
섬기십시오. 겸손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뒤따라야 할 섬김의 삶입니다. 섬김의 사랑으로 표현되는 겸손입니다. 참으로 겸손한 사랑으로 평생 주님 섬김의 배움터 삶의 자리에서 한결같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며 사는 것입니다.
겸손하십시오. 자만하지 마십시오. 무지한 이들이 교만하지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아는 지혜로운 이들은 겸손합니다. 매사 세상에, 세상 사물에 집착함이 없이 초연합니다. 이탈의 참자유와 행복을 누립니다. 오늘 제2독서 야고보 사도의 가르침도 이와 일치합니다.
“여러분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의 생명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한 줄기 연기일 따름입니다. 도리어 여러분은 '주님께서 원하시면 우리가 이런저런 일을 할 것이다.' 하고 말해야 합니다."
이런 인간의 실상을, 진상을 아는 자가 진정 겸손하고 지혜로운 자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아갈수록 주님을 닮아 지혜롭고 겸손한 삶입니다. 이래서 예닮의 여정에 항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과 인간에 대한 열쇠의 답입니다.
셋째, 깨어사십시오.
준비하십시오. 유비무환입니다. 막연히 깨어 사는 것이 아니라, 하루하루 날마다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주님을 기다리며 맡은 바 책임에 충실하며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오늘이 내일입니다. 하루하루 오늘 이렇게 살면 내일은 내일대로 잘될 것이요 천상탄일의 선종의 복된 죽음일 것이니 내일은 전혀 걱정안해도 됩니다.
“주님은 나의 목자 아쉬울 것 없어라.”
참으로 주님께 신뢰와 희망, 사랑을 둔 신망애의 하느님 자녀들은 하루하루 깨어 기쁘게 삽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언제나 우리가 깨어 살 것을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 혼인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이 도착하여 문을 두드리면 곧바로 열어 주려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되어라.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주님인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런 모습을 보게 되면, 그 종들은 행복하다.”
행복은 멀리 있는게 아니라 가까이 있습니다. 언젠가 살아야 할 행복이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에서 행복하게 하늘 나라를 살아야 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를 못살면 내일도 못삽니다. 바로 깨어 주님을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느님과 이웃을 섬기며, 주어진바 거룩한 책임을 다하며 하루하루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평생처럼 사는 것입니다. 주님은 노파심에서 거듭 당부합니다.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너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다.”
아니 매일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를 찾아 오시는 주님이십니다. 새삼 ‘감사와 찬양’, ‘겸손과 섬김’, ‘깨어있음과 준비’로 하느님의 자녀답게 사는 것 역시 하루하루 날마다 죽을 때까지의 영성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깨어 기다리며 준비하며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게 하십니다. 마침 가톨릭평화신문에 나온 ‘산다는 것’(김용해)이란 묵상시默想詩 나눔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나이가 들고 노인이 되니 이제 알게 되네요
세상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무한가를.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남보다 더 높아지려는
그 욕심과 집착이 얼마나 부질없는가를.
나이가 들고 죽음을 보면서 이제 깨닫게 되네요
세상 산다는 것은 사랑이란 것을.
서로 아끼고 섬기고 서로 나누고 도우면서
그렇게 사랑으로 사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삶이란 것을.”-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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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설.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예전 광고 중에 “어 내 마음대로 또 있네!”라고 하며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광고가 있었습니다. 이 광고는 커피 광고입니다. 그런데 그 광고를 접하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세상 사는 것 중에 내 마음대로 대는 것이 과연 몇 가지가 있는가? 특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들은 내 마음대로 할 것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뭐죠? 태어남과 죽음이지요. 우리는 태어남도 죽음도 우리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인간이 극복하고자 하는 문제이면서 동시에 절대로 극복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죽음에 다가설수록 겸손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우리는 사실 우리가 언제 죽음의 문에 도달할지 모릅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다가올 날이 언제 어떻게 올지 모르니 준비하라고 말합니다.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복음은 우리에게 준비하라고 하는데 말입니다.
보물을 준비할까요? 돈을 준비할까요? 좋은 집을 준비할까요? 우리가 준비해야 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등불입니다.
오늘은 설입니다. 설에 우리는 한 해를 시작하는 마음으로 친지들과 가족들이 모여 새해 인사를 나누고 새해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또한 조상들을 기리며 그분들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정성과 사랑을 기억합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은 바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새해에 건강을 빌어주고 하느님의 사랑을 빌어주고, 가족들을 사랑하고 소망을 나누며 지내는 모습. 또한 조상들을 기억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는 모습은 바로 우리 자신의 미래를 위해 준비하는 일입니다.
그러니 오늘 같은 날은 우리가 겸손하게 하늘나라를 준비하기에 너무 좋은 날이지 않을까요?
마지막 날 우리는 사랑으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이 말을 저는 늘 가슴속에 품고 살아갑니다. 사랑은 마음으로 품는 것임과 동시에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로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몸으로, 자신의 노고로 실천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습니다. 특히 꾸준히 실천하는 것은 더욱 어렵습니다.
마지막 말에 주님께서 물어보실 것입니다.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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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122. 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설에 벗에게>
오늘은 설이니
주님의 축복이 되어
벗에게 스미어요
서러워서 설이라
설이 서러운 벗에게
따뜻한 품이 되어주어요
낯설어서 설이라
설이 낯선 벗에게
든든한 곁이 되어주어요
새해가 선다고 설이라
설이 설레는 벗에게
벅찬 희망이 되어주어요
한 살 더 먹어 설이라
설이 버거운 벗에게
기름진 밑거름이 되어주어요
사려야 한다고 설이라
설이 조심스러운 벗에게
바른 길이 되어주어요
오늘은 설이니
주님의 축복이 되어
벗에게 스미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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